Spring Spring. 0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샘추위라고 해서 날이 쌀쌀하더니, 오늘은 화창하고 날씨가 좋다. 나은은 이런 봄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오랜만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꺼내어 입었다. 오늘은 친구들과 벚꽃놀이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매일 강의가 끝나고 곧장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주말에는 대체로 집에서 쉬는 편이라 야외로 나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잔뜩 들뜬 나은은 친구들과 만나기 전에 조조영화를 보고 왔다. 평소에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마땅히 볼 시간이 없어서 미뤄두고 있었던 영화였다. 친구들과 함께 보려고 했지만, 혜연은 이미 남자친구랑 본 영화라고 했고, 인혜는 가족들과 함께 보았다고 했다. 결국 나은은 별 수 없이 혼자서 영화를 보았다. 혼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그것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약속 시간 보다 훨씬 빨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나은은 벤치에 앉아서 혜연과 인혜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외출인지라 기분이 들떠서 나은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은이 얼마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자, 혜연과 인혜가 함께 도착했다. 아마도 오는 길에 근처에서 만나서 함께 온 모양이었다. “일찍 와 있었네?” “응. 영화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아, 맞다. 조조 보고 온다고 했지?” “응. 어서 가자! 나 지금 되게 들떴어!” “으유, 하여간.” 잔뜩 들뜬 나은을 혜연이 철없는 아이 보듯이 쳐다보았다. 나은은 그런 혜연의 시선에 개의치도 않은 채 버스가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로를 살폈다. 때맞춰 나은과 친구들이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고, 셋은 나란히 버스에 올랐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버스 안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앉아서 가는 것은 일찍이 체념하고, 셋은 버스 한 쪽 편에 섰다. “아, 맞다. 혜연아, 너 어제 도형이랑 2주년 이었다며. 뭐했어?”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인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인혜는 혜연 쪽을 보면서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혜연과 도형이 기념일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은은 별 기대 않는 표정으로 혜연을 보았다. 혜연은 인혜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했다. “하긴 뭘 하냐. 그냥 집 근처에서 스파게티나 먹고 헤어졌어.” “에? 도형이가 뭐 준비한 거 없어?” “준비하긴, 뭘. 걔가 그런 거 하는 애도 아니잖아. 기대도 안 했어.” “그래도 서운하긴 했겠다. 그치, 나은아?” 인혜의 물음에 나은은 그저 살짝 웃고 말았다. 나은도 혜연처럼 기념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한 번씩 특별한 이벤트는 기분이 좋겠지만, 그것이 꼭 기념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함께 하면서 즐거울 수 있다면 매일 매일이 기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박인혜, 너 내가 소개시켜준 남자랑은 어떻게 된 거야?” 혜연의 물음에 인혜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나은은 며칠 전 도형의 친구를 소개받는다며 들떠있던 인혜를 기억해냈다. 한동안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해서 그런지, 인혜는 많은 기대를 하는 듯 보였었다. 인혜의 연애사가 궁금해진 나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인혜를 보았다. 인혜는 어색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만 계속해서 내뱉었다. “야, 너 또 술자리에서 폭탄주 만들었다며?”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유, 못살아, 진짜! 넌 생긴 건 조용할 것 같이 해선 행동은 왜 그러냐?” “그게 뭐 어때서!” “그러니 남자가 들러붙다가 기겁을 해서 물러가지.” 혜연이 인혜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인혜가 남자 앞에서 폭탄주를 타고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나은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인혜의 그런 모습은 벌써 2년이나 보아왔지만 나은은 아직도 그런 모습이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나은이 처음 인혜를 만난 것은 대학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나은의 눈에는 인혜가 정말로 예뻐 보였다. 청순하고, 조용하게 생긴 것이 꼭 마음에 들어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은이 먼저 말을 걸었는데, 이야기를 조금 해보니 자신이 상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천사표로 착할 것만 같은 애가 거친 말도 툭툭 쉽게 내뱉고, 털털한 기질이 남달랐다. 그것이 나은에게는 왠지 더 매력적이게 느껴져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내 이야긴 접어두고, 나은아, 너는 뭐 새로운 소식 없어?” “새로운 소식은 무슨, 만날 보면서.” “만날도 나름이지. 너 매일 알바 하느라 우리랑 제대로 이야기 해 본 게 언젠지도 모르겠다.” “매일 알바 하는데 뭐 새로운 소식이 생길 리 있니?” “있지, 당연히! 너 맘에 들어서 매일 찾아오는 손님 같은 건 없어? 너 번호 따간 남자도 없어?” “그런 거 없어!” 나은이 꼬치꼬치 물어대는 인혜를 향해 말했다. 인혜의 얼굴에는 실망한 표정의 역력했다. 인혜의 옆에 있던 혜연은 나은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혜연은 나은을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왔었다. 2년이나 같은 반을 하면서 상당히 친한 편이었다. 단짝은 아니었지만, 항상 같이 어울려 다니는 무리에 함께 속해 있었다. 우연히 같은 학교, 같은 과로 진학하게 된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혜연은 나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나은의 가치관이나 생각을 대부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데, 별 거 아닌 남자가 다가와서야 천하의 정나은이 넘어가겠어?” “백마 탄 왕자님이라니, 솔직히 그건 아니다!” 혜연의 말에 나은이 발끈하며 말했다. “진짜 인연이라면, 첫 눈에 반하게 될 거다. 첫 눈에 알아 볼 수 있어야 진짜 사랑이다. 그게 네 신조잖아. 그게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의 자세와 뭐가 다르냐?” “하여간 정나은 알아줘야해. 새내기일 때부터 미팅도 안 나가, 소개팅도 안 나가, 무작정 그렇게 기다린다고 그 사람이 오겠어? 때로는 사랑을 찾아갈 필요도 있다고 한다고 생각해, 난.” 혜연과 인혜가 나은을 보며 한 소리씩 해댔지만, 나은은 꺾이지 않았다. 나은의 오랜 신조였다. 나은은 진짜 사랑하게 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첫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거라고, 분명 첫눈에 반하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신조로 인해 나은의 연애 경험은 전무 했다. 기껏해야 중학교 때 같은 반 남자와 3일을 사귄 것이 다였다. 어디 가서 사귀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전적이었다. “어? 야! 우리 내려야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버스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있고 있었던 나은은 혜연의 말에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주변은 분홍빛으로 가득했다. 창밖으로는 화사하게 늘어진 벚꽃길이 보였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줄줄이 버스에서 내렸고, 나은과 혜연, 인혜도 그 뒤를 따라서 버스에서 내렸다. “우와!” “와!” “이야, 장난 아니다.” 버스 안에서 본 벚꽃과 버스 밖에서 본 그것은 사뭇 달랐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을 보자 나은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슴이 왠지 들뜨고,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예쁘다!” 나은은 감탄에 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는 뛰듯이 발랄한 걸음으로 벚나무 길 사이로 들어섰다. 벚나무 길에는 벚꽃놀이를 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말이라 가족단위로 놀러온 사람들도 많았고, 연인들은 특히 많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은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한 웃음을 얼굴에서 지울 줄을 몰랐다. “야, 정나은! 같이 가!” 혼자서 신나는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나은을 혜연이 쫓으며 말했다. 인혜는 철없어 보이는 나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봄인데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야외로 놀러 한 번 가지 못했던 나은을 데리고 오길 잘 했다고 인혜는 생각 했다. “꽃비야, 꽃비!” 바람이 한 번 불자, 커다란 벚나무 아래로는 분홍빛의 꽃잎이 흩날렸다. 그것을 본 나은은 마치 소녀처럼 발랄하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고 손바닥을 펼쳐 머리 위로 들었다. 수많은 꽃잎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그 중 단 하나의 잎만이 나은은 손 위에 살짝 앉았다. 나은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꼭 쥐었다. “이것 봐! 나 꽃잎 잡았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던데.” “정말? 그거 진짜야, 인혜야?” “글쎄, 난 모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나은에게 인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인혜의 눈에는 나은이 철없는 아이 같아 보였다. 나은은 자신의 손에 있는 꽃잎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그리고는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그 사이에 꽃잎을 끼워 넣었다. 나은의 표정은 한없이 밝은 반면에 혜연은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혜연은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나은은 그런 혜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눈에는 한없이 예쁘기만 한 벚꽃길이라 혜연이 인상을 찌푸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오른손을 자신의 배 위에 얹었다. “아, 배가 살살 아프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너네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 혜연이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되자 나은은 풋,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이런 곳에 와서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을 찾고 있는 혜연의 모습이 그냥 웃기게만 보였다. 혜연은 이리저리로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내 화장실을 찾았는지 그 쪽으로 종종걸음 쳐 갔다. “어? 쟤 휴지도 없을 텐데!” “화장실 안에 있겠지, 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남아 있을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휴지 주고 올게!” “응, 알았어. 나 여기에 있는다?” “응! 금방 갔다 올게!” 인혜는 가방 속을 뒤적이며 혜연이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 혼자 남겨진 나은은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도 의외로 벤치에 앉아서 쉬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오히려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제법 눈에 띄었다. 나은은 가방을 뒤져 다이어리를 찾아 꺼내었다. 가방에서 꺼낸 다이어리를 펼치고 지갑 속에 있던 영화표와 핸드폰 사이에 끼워 놓았던 꽃잎을 꺼내어 다이어리 사이에 끼웠다.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자신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는 다이어리였다. 자신의 보물과도 같은 다이어리를 닫고 그 겉면을 한 번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후, 나은은 다이어리를 무릎 위에 얹어두고 고개를 들었다. 주말을 기회로 놀러 나온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들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 손에는 솜사탕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귀여운 꼬마 숙녀도 보였고,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연인도 있었다. 두 손을 꼭 잡고 늦은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느긋하게 벚나무를 구경하는 노부부도 있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하니 나은은 귓가에 발랄한 음악이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나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귓가에 들리던 노래도 뚝 끊겨 버렸다. 나은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여러 번이나 눈을 끔뻑였다. 나은은 짧은 현기증을 느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에 지어져 있었던 미소도 사그라졌다. 나은의 시선은 한 남자에게 멎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선이 닿은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두운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흰 셔츠를 살짝 접어 올린 남자, 조금 마른 체형에 큰 키, 그리고 준수한 외모. 진짜 인연이라면 언젠가 길을 가다가 스쳐 지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은의 생각이었다. 그저 생각이었다. 그러게 믿고 있기는 했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신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의심스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의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진 듯 했다. 잠시 미소가 지워졌던 나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치 첫 연애를 하는 사춘기 소녀의 얼굴과도 같은 수줍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 남자에게로 멎어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그녀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약간 짜증이 난 표정의 남자였는데,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순간적이라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은은 그 남자를 계속 바라보면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찾았다, 나의 인연! “정나은!” 어디선가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나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은의 왼쪽 편에서 인혜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은은 인혜에게 잠시 손을 들어보이고는 다시 그 남자가 있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졌다? 남자가 있었던 그 곳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남자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은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버렸다. 그 바람에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다이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나은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 남자를 다시 찾기 위해 아무리 사람들 사이를 눈으로 뒤져보아도 그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다. 나은은 남자가 있었던 곳으로 빠른 걸음걸이로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남자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찾아야 하는데.” 나은이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또 다시 그 남자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랐다. 아니,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운명의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놓쳐버리자 가슴이 턱턱 막혔다. “나은아, 뭐해?” 나은을 뒤따라 온 인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은은 그냥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나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인연이라면 꼭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은은 인혜를 따라서 발을 옮기면서도 그 남자가 서있던 그 자리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Spring Spring. 1 오늘은 여기까지, 라는 교수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은 소란스러워졌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서둘러 강의실을 나갈 채비를 했다. 뒤쪽 자리에 앉아있던 나은은 크기 기지개를 켰다. 나은의 옆에 앉아있던 혜연은 필기구를 가방 안에 넣으면서 나은에게 말을 걸었다. “정나은, 오늘도 아르바이트 하지?” “응. 넌? 도형이 만나러 가?” “아니. 오늘은 인혜랑 쇼핑이나 좀 하려고.” “에? 나만 빼고?” 나은이 입을 빼쭉 내밀고는 혜연과 인혜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아르바이트를 가야하기에 함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히 서운했다. 오늘 같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아르바이트는 접어두고 친구들과 쇼핑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넌 아르바이트 가야 한다며. 어쩔 수 없잖아, 응?”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인혜가 타이르듯이 말하자, 나은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자신들과 놀고 싶어 하는 나은을 알기에 인혜와 혜연의 마음도 편할 리가 없었다. 짐을 챙기면서 툴툴 거리던 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씽긋 웃었다. “잘 놀다 와! 야, 너네 괜히 이것저것 지르고 후회하지 말고, 꼭 살 것만 사!” “알았어, 인마!” 나은이 웃으면서 말하자 혜연과 인혜도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 수 있었다. 나은은 친구들에게, 나 먼저 갈게, 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 빠르게 강의실에서 나가버렸다. 학교 건물을 빠져나가면서 나은은 반복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강의가 조금 늦게 끝난 바람에 자칫 잘못하면 지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은은 빠른 걸음으로 캠퍼스를 빠져나갔다. 넓은 캠퍼스를 걸어서 나가려고 하니 조금 힘에 겨웠다. “으아, 언니가 기다리겠네.” 걸음을 재촉하던 나은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전공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플랫슈즈를 신은 채 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나은을 스쳐 지났지만 나은은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치우기에 바빴다. 한 손에 들고 있는 두꺼운 전공 책은 계속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뛰어왔던 나은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서 멈춰 섰다. 흘러내리던 전공 책도 다시 끌어 올렸고, 머리도 귀 뒤로 단정히 넘겼다. 그리고는 거친 숨을 쉬면서 빠른 걸음으로 편의점을 향해서 걸었다. “언니! 저 왔어요!”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나은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봄바람이 선선하게 날씨가 좋은 데도 불구하고 땀을 흘리고 있었고, 바람을 맞은 앞머리는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편의점에서 나은을 기다리던 신영은 그런 나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또 뛰어 왔어? 천천히 와도 된다니까.” “그래도요. 언니 저 금방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응. 숨 좀 고르고.” 신영의 말에 나은은 생긋 웃어보이고는 카운터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창고를 겸해서 쓰는 방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 복으로 갈아입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은은 입고 왔던 살구색의 카디건을 벗고 하얀 티 위에 그대로 작업복을 겹쳐 입었다. 자신의 몸보다 한참이나 큰 옷은 마치 남자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편의점 옷은 나은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편이었다. 나은은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한 번 단속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신영은 이제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 옷 갈아입어요. 오늘 별 일 없었죠?” “응. 그냥 그랬어. 지루했지, 뭐.” 신영은 따분했다는 표정으로 나은에게 말하고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은은 좀 전까지 신영이 있던 자리에 가서 약간 흐트러져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 신영이 퇴근할 준비를 모두 하고 나왔다. 나은은 여성스러운 흰 색의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신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뭐 묻었어?” “아니요, 언니! 그거 되게 예쁘다! 나도 그런 거 입고 싶은데, 별로 안 어울리려나?” “글쎄, 넌 밝은 색이 잘 어울리니까 예쁠 것 같은데?” “이번에 월급 받으면 나도 블라우스 사야겠어요! 언니 되게 잘 어울려요. 예뻐요.” “고마워. 나 야간 수업 있어서 가봐야겠다. 갈게, 수고해!” “네, 언니. 내일 봐요!” 나은은 문을 열고 나가는 신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서 한참이나 손을 흔들다가 신영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나은은 자리에 앉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일이 쉽고 편하지만,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학교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이라서 손님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서 다섯 시간이나 지키고 있으려면 지루하고 따분했다. 나은은 자리에 앉아서 잠시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이나 가방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나은이 갑자기 손바닥으로 자기 머리를 탁 치면서,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 진짜 미쳤어. 어떻게 그걸 잃어버리지.” 나은은 울상을 지으면서 뒤지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다이어리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지다가, 이내 다이어리를 며칠 전에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나은은 심란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나은에게 다이어리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일정과 학교 과제, 약속 같은 것을 모두 적어둔 다이어리였는데, 그것을 잃어버려서 나은은 몹시 심란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나자 나은은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안 잃어버렸을 텐데…….” 나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 날을 다시 떠올렸다.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벚꽃놀이를 갔던 그 날, 분홍빛의 예쁜 벚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발견하였었다. 그 사람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자신은 그 사람을 찾으려 했고, 그 때 다이어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나은은 입을 씰룩씰룩 거렸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사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은은 운명이라면 다시 꼭 만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그 날, 그 남자를 찾지 못한 것에 다시 한 번 속상해졌다. 만약 그 때,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면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지금은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이, 물건 정리나 해야지.” 나은은 이미 지나간 일은 지워버리기로 했다. 아직도 셔츠를 멋지게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하지만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과자코너부터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영이 퇴근하기 직전에 이미 물건을 정리해두어서 거의 가지런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손을 보면서 조금 더 정갈하게 물건들을 놓았다. Spring Spring. 성준은 수업을 마치고 소란스러운 강의실에서 천천히 짐을 챙겼다. 필기구를 정리하여 가방 속에 넣다가, 성준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작은 크기의 다이어리였다. 성준은 그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한 손에 전공 책을 들고 가장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단과대 건물에서 빠져나와서 성준은 잠시 망설였다. 그는 학교의 기타 동아리의 장을 맡고 있어서, 대개는 이 시간에 동아리 방으로 가곤 했지만 오늘은 잠시 고민을 했다. 단과대 앞에서 서서 그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쳐다보았다. 여섯시 십오 분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성준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아리 방이 있는 건물과 반대 방향이었다. “아무래도, 돌려 줘야겠지?” 성준은 정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가방 속에 있는 작은 다이어리를 꺼내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고, 꽤나 귀여운 것이었다.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전공 책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책을 받침삼아서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다. 다이어리 중간, 프리 노트 부분에 귀엽게 쓰여 있는 글자를 보았다. 벌써 여러 번이나 보았던 것이라 이미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을 했다. ‘아르바이트 - 학교 앞 W편의점 5시부터 10시까지.’ 그것을 확인한 성준은 다이어리 제일 뒷장을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 쓰여 있는 학교의 이름을 한 글자씩 똑똑히 보았다. ‘한국대학교’ 성준은 그것을 읽으면서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우연히 줍게 된 이 다이어리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상당히 놀랐었다. 성준이 학교 정문 깨에 도착하자, 그의 시야에는 몇 개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분식점, 줄줄이 늘어진 복사 집, 그리고 W편의점. 성준의 시선은 편의점에 멎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았다. 여섯시 이십 분. 다섯 시부터 열 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으니,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다이어리의 주인이 되는 셈이었다. 성준은 길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안을 살피려고 했지만, 거리가 제법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어? 성준 선배!” 성준이 편의점 쪽으로 가기 위해서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누군가가 성준에게 다가오면서 그를 불렀다. 성준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를 예쁘게 입은 한 여자가 성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성준은 그 여자를 보고는 살짝 웃으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해보였다. 성준의 인사를 받은 여자는 생긋 예쁘게 웃었다. 성준과 같은 동아리의 후배인 지수였다. “선배! 오늘 동아리 방에도 안 오더니, 여기서 뭐해요?” “어? 그냥 좀 일이 있어서.” “난 동아리 방에서 선배 언제 오나 기다리다가 지쳐서 이제 집에 가려고요.” “날 기다렸어?” “이번 발표회 곡 때문에 선배랑 이야기 좀 하려고 했는데. 뭐, 내일 하면 되죠.” “아, 미안해. 연락하지 그랬어.” “바쁜 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내일은 꼭 동아리 방에 갈게.” “네. 선배, 저 과외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내일 봬요!” “응. 내일 보자.” 지수는 밝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높은 구두를 신어 불편할 텐데도 총총 빠르게 걸어 사라졌다. 성준은 그런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편의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횡단보도의 신호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편의점 쪽을 보면서 길을 건넜다. 편의점 내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성준은 편의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안을 보았다. 살짝 웨이브 진 머리에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이 보였다. “……역시 맞네. 찾았다.” 성준은 작게 읊조리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전, 이 다이어리를 주웠던 그 날을 다시 떠올렸다. 그 날이 있기 며칠 전부터 후배들 사이에서 벚꽃 놀이를 가자는 이야기가 돌았었다. 정식 모임도 아니고 편하게 가는 것인데, 괜히 선배인 자신이 끼어서 분위기가 불편해질까봐 성준은 가지 않으려고 했었다. 게다가 사람이 북적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가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성준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화를 해대는 후배들 탓에 그는 반 강제적으로 벚꽃 놀이에 가게 되었다. 막상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많아서 심하게 북적였고, 지각으로 유명한 후배들은 단체로 지각을 해서 성준의 마음이 불편해 있었다.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후배들을 기다리는데, 그의 눈에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하늘하늘한 파스텔 톤의 원피스를 입고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미소를 담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성준이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여자들에게 인기는 많은 편이었지만, 이성을 만나는 데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던 성준인데 자신도 모르게 계속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일 거라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때 애들이 오는 바람에…….” 성준은 그 여자를 보면서 먼저 다가가서 말을 붙여볼까, 말까,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자신을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이상한 사람 취급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순간에 후배들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 자신을 불렀다. 후배들에게 잠깐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그 여자가 있던 자리에는 자그마한 다이어리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다이어리가 바로 지금 성준의 손에 들려 있는 다이어리였다. 그 날 밤, 성준은 집으로 돌아와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훔쳐본다는 생각에 뭔가 꺼림칙하기도 했으나, 그 여자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알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여자가 자신과 같은 학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학교 앞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이름까지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정나은, 이름도 예쁘네.”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문득 멀찍이서 나은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스토커 같아 보인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성준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다이어리를 다시 가방 속에 넣고는 편의점 쪽으로 다가섰다. 편의점 문에 손을 얻고 조금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딸랑, 하는 작은 종소리가 편의점 안에 울렸다. 그러자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나은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심하게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을 건네었다. 성준은 그런 나은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음료가 있는 쪽으로 갔다. 딱히 물건을 사려고 들어왔던 것이 아니었기에, 성준은 이리저리 살피다가 오렌지 주스를 손에 들었다. 어느새 물건을 정리하던 나은은 계산대로 옮겨가 있었다. 성준은 계산대에 다가가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나은은 익숙하게 바코드를 찍었다. “천 원입니다.” 무심히 일을 하던 나은은 가격을 부르면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손님을 쳐다보았다. 계산을 하러오면서부터 나은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성준이었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맞부딪혔다. 시선이 부딪히자 성준은 금방 시선을 돌리고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어 오천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나은이 잔돈을 내주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성준은 다시 나은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파스텔 톤의 원피스를 입고 해맑게 웃고 있었던 그 여자가 확실했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은이 건네주는 거스름돈을 받고 빠르게 편의점에서 빠져나왔다. 편의점을 빠져나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도 없이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그런 성준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봄바람이 기분 좋게 살랑거리며 성준을 스쳐 지났다. 성준은 어디선가 달달한 봄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볍게 떨리고 있는 자신의 심장 위에 손을 갖다 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Spring Spring. 2 나은은 멍한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 서있었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계산을 했는지도 헷갈렸다. 나은은 넋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편의점 문 쪽을 보고 있었다. 나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좀 전에 오렌지 주스를 하나 사가지고 나갔던 그 손님은 분명 나은이 며칠 전에 보았던 그 남자였다. 벚꽃 놀이를 갔다가 보았던 자신의 운명이었다. 나은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그 남자의 모습과 방금 편의점에서 나갔던 그 손님을 다시 매치시켜 보았지만, 분명하게 맞아떨어졌다. “…말도 안 돼.” 나은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던 그 남자를 이런 식으로 다시 볼 것이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게 다시 마주치는 바람에 그 남자를 또 그냥 보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어떡해, 진짜!” 나은은 재빨리 계산대에서 나가 편의점 문을 열고 밖을 살폈지만, 이미 그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은은 울상을 지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더 일찍 알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그 남자를 쳐다본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바보처럼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계산을 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나은은 계산대로 돌아와서는 가방 속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외우고 있던 인혜의 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면서 나은은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인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화가에 나가 있는 모양인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 여보세요? “야, 나 어떡해!” - 어?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돼!” - 뭐야? 무슨 일 있어? “방금 그 사람이 왔었어.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왔었다고!” - 그 사람이라니, 무슨 소리야.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말하는 나은 때문에 전화를 받고 있는 인혜가 더 고생이었다. 인혜는 잔뜩 흥분한 나은에게 차분하게 무슨 말이냐며 물었다. 나은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정신없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있잖아! 내가 벚꽃 놀이에 가서 봤다던 사람!” - 벚꽃 놀이? 아…, 뭐 네 운명인 것 같다던? “응, 그 사람! 그 사람이 편의점에 왔었어, 방금!” - 진짜? 웬일이래, 진짜 인연이라도 되는 건가. 그래서? “어?” - 그래서 어쨌냐고. 번호라도 물어 봤어? 아니면 어느 학교 다니는 지라도 물어봤어? 인혜의 물음에 나은은 작게 한숨을 쉬며 울상을 지었다. 그 사람을 보고서는 너무 놀라서 멍청하게 거스름돈 내주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는 그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그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 으이그. 아무 말도 못했구나? “어떡해. 진짜 바보 같아. 다시 또 오려나? 안 오겠지? 여기서 아르바이트한 지 세 달이나 되었는데 처음 보는 거니까 아무래도 다시 보긴 힘들겠지?” -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네 말대로 진짜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지 누가 알아. “그래. 진짜 인연이라면 그렇겠지.” - 멍충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해. 다음에 또 오겠지. “그렇겠지? 어휴, 알았어. 잘 놀다가 들어가.” - 그래. 내일 보자. 나은은 전화를 끊고도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계산을 하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던 그 남자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깔끔한 흰 색 단가라 티를 입고 있는 모습은 벚꽃 놀이 때의 모습과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풍겼지만, 단정하고 바른 느낌의 인상을 주는 것은 같았다. 성실하게 살아왔을 것 같은 그 사람의 분위기가 나은에게는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나은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 앉았다. 멍하니 어쩌면 좋을까, 혼자서 생각하다가 이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나버린 일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앞으로도 계속 이 편의점에서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에이, 과제나 해야지.” 나은은 가방 속에서 파일을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 받은 과제물을 꺼내어 펼쳐놓았다. 펜을 잡고 과제를 하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아쉬움이 남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딸랑’ 하는 작은 종소리가 들리고, 나은은 반사적으로 편의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그 사람이 다시 오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졌지만, 편의점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이내 그 기대를 접어버렸다. “왔어요?” “에이, 나도 손님인데 ‘왔어요?’가 뭐예요.” “언제는 ‘어서 오세요.’라고 하면 딱딱해서 싫다면서요.” 나은은 편의점으로 들어온 사람과 익숙하게 말을 나누었다. 편의점 맞은편의 분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환이었다. 세환과 나은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이 같아서 자주 마주치는 편이었다. 처음에 나은은 세환을 그저 단골손님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맞은편 분식집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는 나은과 말을 나누게 된 이후부터 이렇게 꼭 하루에 한 번씩은 편의점에 들르곤 했다. 특별히 무엇을 사지 않더라도 심심할 때 들러서 나은에게 말을 걸곤 했다. 나은에게 세환은 능구렁이 같고, 장난기 가득한 사람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세환은 계산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계산대에 두 팔과 얼굴만 얹고는 쪼그려 앉아서 나은은 올려다보았다. 과제를 하고 있던 나은은 얼굴을 들이미는 세환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이! 뻥치시네. 나 눈 되게 좋거든요? 건너편에서 봐도 얼굴에 ‘나 복잡해.’라고 적힌 게 눈에 다 보여요.” “하나도 안 복잡해요.” “에? 그럼 뭐지. 마법에 걸려서 우울한 건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내뱉는 세환을 보고 나은은 ‘풋’하고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사람을 사귈 때 낯을 많이 가리는 나은에게는 빤질빤질한 세환의 그런 모습이 신기했다. 세환은 나은이 웃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자신도 환하게 웃었다. 나은의 눈에는 세환이 왠지 철이 없어 보였다. 분명 자신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사람인데도 더 어리게 느껴졌다. “가게에 손님 없어요? 이렇게 만날 나와 있어도 되요?” “괜찮아요. 우리 사장님 마음이 태평양 같아서 심심하면 바람 쐬고 오라고 그래요.” “부럽다. 나는 꼼짝없이 여기에 잡혀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오잖아요. 나는 그쪽한테 심심하고 따분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견뎌내게 하는 비타민 같은 존재정도?” “됐거든요.” 나은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 세환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환은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조금 힘들었는지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허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스트레칭도 했다. 그러다가 음료가 있는 쪽으로 가서 캔 커피를 하나 가져왔다. “아, 이번 주말에 뭐했어요?” “주말에요?” “나 사실 주말인거 까먹고 여기 왔던 거 알아요?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어떤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있어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그랬어요?” “그랬다니까요. 민망해서 뭐라도 사갈려고 했는데 돈도 안 들고 왔던 거 있죠?” “정말요?” 세환의 말에 나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돈도 안 들고 편의점에 들어와선 아르바이트생 얼굴만 보고 나갔을 그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당혹스러워 했을 그 표정이 예상이 되어서 웃음이 났다. “그렇다니까요. 주말에 그냥 집에서 쉬었어요?” “안 가르쳐 줄래요.” 나은이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하자 세환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은은 그런 세환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내가 꼭 말해줘야 할 필요가 있나?’ 라고 말을 덧붙였다. 세환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은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무어라 작은 소리로 계속해서 중얼대었다. 나은은 그러한 세환의 모습을 보며 살짝 웃고는 세환이 가져온 캔 커피를 들었다. “이거, 계산해요?” “네, 계산해줘요.” “천 원이에요.” 나은은 익숙하게 바코드를 찍은 후에 다시 커피를 세환에게 건네었다. 세환은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한 장을 나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은이 건넨 커피를 받아들었다가 이내 다시 나은 쪽으로 내밀었다. “에?” “마시고 일 열심히 하라고요.” “나 마시라고요?” “네. 난 이만 가볼게요. 아무리 태평양 같은 마음씨를 가진 우리 사장님이라도 이렇게 늦으면 화내요. 내일 또 봐요!” 세환은 나은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금방 손을 흔들고는 편의점에서 나가버렸다. 나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환이 나간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캔 커피를 보고는 헛웃음 지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나은은 자리에 앉으면서 손에 들려있는 캔 커피를 살짝 흔들었다. 세환이 편의점에 들락날락한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지만, 나은에게 세환은 아직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상한 사람’ 이었다. Spring Spring. 동아리방에 앉아서 기타를 손에 쥐고 있지만 성준의 머릿속은 온통 엉켜있었다. 성준이 나은을 만나기 위해 편의점으로 갔던 날로부터 벌써 3일이나 지나있었다. 다이어리에 적힌 나은의 정보를 보아 나은은 영문학과 2학년이었다. 심리학과에 다니고 있는 자신과 같은 단과대이기에 학교에서 어쩌면 나은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나은과 마주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다이어리에 쓰여 있는 나은의 시간표와 자신의 시간표가 너무나 달랐다. 나은의 점심시간에는 자신이 강의를 듣고 있었고, 자신의 강의가 마치면 나은은 이미 강의를 마치고 가버렸거나, 곧장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시간이었다. “선배!” 성준이 소파에 앉아서 기타를 품에 안고 멍하니 있자, 옆에 앉아 있던 지수가 성준을 불렀다. 성준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지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준을 보고 있었다. “어, 지수야. 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오늘은 도통 연습도 안 하고.” “그냥, 아무 것도 아냐.” “선배 요즘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애들이 선배보고 뭐에 홀린 사람 같대요.” “뭐? 아냐, 그런 거.” 성준은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지수를 향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제야 성준은 동아리방에 있던 후배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준은 괜히 민망해져서는 기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바람을 쐬러 간다고 말하고는 동아리방에서 나왔다. 동아리방에서 나온 성준은 창가로 다가섰다. 성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요즘의 자신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여자에는 도통 관심도 없던 자신이었는데, 요즘 성준의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하면 나은을 마주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존재도 모르고 있을 나은인데, 나은에 대한 생각 때문에 하루를 다 쓰고 있었다. “…나도 진짜 미쳤지.”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나은과 자주 마주칠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며칠을 보낸 자신의 우스워 보였다. 그저 나은의 아르바이트 시간에 맞춰서 편의점을 가면 가장 간단한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성준은 왠지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인연처럼 자주 마주치는 사이가 되어서 나은도 자신을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지금은 자신의 존재를 모르지만 반복적인 우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면 했다. “어? 성준 형, 여기서 뭐해요?” 성준이 창가에서 바람을 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성준을 불렀다. 성준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키가 제법 크고 몸이 탄탄한 남자가 있었다. 성준은 그를 보고는 살짝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성준과 같은 과이며 같은 학년인 도형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성준과 달리, 도형은 군대를 미루고 있는 터라 성준보다 나이가 두 살이 적었다. “어? 도형이구나. 넌 이 건물에 웬일이야? 동아리도 없잖아.” “혜연이가 테니스 동아리잖아요.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아, 네 여자 친구?” “네. 형은 또 동아리방에 있는 거예요?” “어? 뭐, 그렇지.” “하여간, 형도 못 말린다니까. 매일 강의 마치기만 하면 곧장 동아리방으로 오고.” “습관이지, 뭐.” “형, 그럼 전 가 볼게요. 내일 봬요!” “그래, 내일 보자.” 도형은 성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도형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성준은 다시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 창틀에 몸을 살짝 기대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가벼운 봄바람이 흘려들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성준이 갑자기 ‘아!’라는 탄성을 내뱉으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도형이 여자 친구가 영문학과였던 것 같은데.”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얼굴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성준의 기억이 맞는다고 한다면, 도형의 여자 친구인 혜연은 영문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 말은 나은과 혜연이 같은 과 동기라는 말이 되었다. 성준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나은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다시 동아리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아리방 안에서는 후배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성준은 살짝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성준이 안으로 들어오자 시선이 성준에게 모아졌다가 이내 다시 흩어졌다. 성준은 자신의 기타를 한 쪽에 세워두고 소파에 있던 가방을 들었다. 성준이 집에 가려는 듯하자, 소파에 앉아있던 지수가 고개를 들어 성준을 올려다보았다. “어? 선배 벌써 가려고요?” “응. 왜?” “저도 지금 갈 건데, 같이 가요!” “그래, 그러자.” 지수는 성준의 말에 자신의 핸드백을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아리방이 모여 있는 건물을 빠져나와서 학교 정문 쪽으로 가는 성준과 지수의 모습은 마치 연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지수는 걸어가면서 자꾸 힐끔힐끔 성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 지수의 시선을 느낀 성준이 살짝 웃으면서 지수를 쳐다보았다. 성준과 시선이 마주친 지수는 살짝 놀라면서 금방 시선을 돌려버렸다. “왜?” “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성준이 물어오자 지수는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지수의 그런 시선을 느끼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성준은 지수가 무엇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즘 갑작스럽게 행동이 변화한 것이 지수의 눈에도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선배, 요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걱정해줘서 고마워. 근데 아무 일 없어. 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신경 쓰이는 일이요? 뭔데요?” “별 거 아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성준이 친절하게 웃으면서 이야기 하자,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의 친절한 미소는 지수가 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동아리 여자 후배들의 애정을 한 몸에 다 받을만한 멋진 미소였다. 지수는 동아리 동기들이 성준에게 얼마나 많이 고백을 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백에 대한 답은 언제나 기분 나쁘지 않은 정중한 거절이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것이 지수가 성준을 마음에 두고도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학교 정문에 가까워지자 성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편의점 쪽으로 흘렀다. 평소에는 거의 편의점을 이용하지 않아서 보지도 않았던 곳인데, 요 며칠 간은 습관적으로 편의점을 쳐다보게 되었다. 편의점 안에는 유니폼을 입은 아르바이트생이 보였다. 그것이 나은일거라는 생각을 하니, 성준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얹혀졌다. “아, 맞다. 선배, 잠깐 저기 좀 들러요.” “어? 편의점에?” “네. 저 교통카드 충전 좀 해야 해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준은 편의점 바로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지수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라는 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은 지수의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있느라 성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성준은 수수하게 화장을 한 나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잔액 만 오백 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은은 충전이 된 교통카드를 지수에게 넘겨주었다. 지수가 교통카드를 받고서 뒤돌아서자 나은의 시선도 함께 따라 왔다. 그러다가 나은을 쳐다보고 있던 성준과 눈이 마주쳤다. 성준은 나은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들킨 것 같아서 괜히 민망해졌다. 성준은 급하게 시선을 피하고 지수와 함께 편의점에서 나왔다. 편의점을 빠져나와서도 성준은 두어 번이나 뒤를 돌아 편의점 쪽을 쳐다보았다. 성준은 왠지 자신과 나은의 시선이 마주쳤던 그 짧은 순간에 나은의 눈동자가 커진 것 같다는 기분을 받았다. Spring Spring. 3 나은은 강의실에 앉아있었지만 강의를 듣지 않은지는 오래되었다. 손에 쥐고 있는 펜을 굴려가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은을 옆에서 지켜보던 혜연이 펜으로 툭툭 나은의 팔을 쳤다. 넋을 놓고 있던 나은이 그제야 혜연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혜연이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혜연은 최근 들어서 자주 멍하게 있는 나은이 걱정스러웠다. 물론 그 이유가 나은에게 나타난 ‘운명의 남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유, 걱정이다, 진짜.” 혜연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은은 혜연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보이고는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를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다시 강의에 집중하는 듯했지만, 이내 나은은 금세 또 다른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나은은 어제 또다시 편의점에 다녀갔던 그 남자의 모습을 기억했다. 정장 느낌이 나는 예쁜 투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였다. 처음 편의점을 다녀갔던 이후로 계속 그 남자를 기다렸지만, 쉽게 나은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은이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있을 시점에 다시 나타난 남자였다.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반드시 말을 걸어보아야 한다고 마음먹은 나은이었지만, 정작 그 남자 예쁜 여자와 함께 나타나자 나은은 또 다시 그를 그냥 보내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 주까지 과제 제출하는 것 잊지 마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나은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강의는 끝이 났다. 나은은 강의를 단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을 하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나은의 뒷자리에서 강의를 듣던 인혜는 필기구를 챙기면서 나은에게 말을 걸었다. “정나은, 너 오늘 강의 하나도 안 들었지?” “어? 응.” “천하의 정나은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 놓은 그 사람이 궁금하다, 궁금해.” “나도 그 사람이 궁금하다, 진짜.” 인혜의 말에 나은이 장난스럽게 그렇게 받아쳤다. 나은은 아직까지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짜증이 났다. 운명의 사람이 나타난다면 길가다가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만 했지, 알아본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근데, 아무래도 그 사람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아.” “뭐?” “실은 어제 그 사람, 편의점에 왔었어.” 나은의 말에 혜연과 인혜가 동시에 나은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나은은 친구들의 반응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은은 어제 그 남자와 함께 편의점에 왔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귀여우면서도 성숙한 느낌이 풍기는 제법 예쁜 여자였다. 수수한 자신과는 달리 화장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예뻤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의점을 나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연인같이 잘 어울렸다. “어떤 여자랑 같이 왔었어.” “뭐야. 그냥 친구일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런가? 그런데 잘 어울려보였어.” “에이. 네 마음대로 생각해서 괜한 맘고생 하지 마. 어쨌든 너는 어제도 말도 못 해봤다는 거네?” “어? 응. 그렇지, 뭐.” 나은은 인혜의 말에 풀이 죽은 듯이 대답했다. 연애를 많이 해본 인혜와 혜연의 입장으로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말 한 번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나은이 답답해 보였다. 나은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짐을 챙겼다. “오늘 알바가기 전까지 시간 있지?” “응. 한 두 시간 정도? 왜?” “오늘 나 동아리 랭킹 전 있는 날이잖아. 구경 와!” “어? 정말 가도 돼?” “당연하지! 너랑 인혜랑 같이 와서 응원 좀 해줘.” 나은은 혜연의 말에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르바이트 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나은은 혜연이 테니스 동아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혜연이 동아리 활동을 하는 동안, 나은은 거의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기에 볼 기회가 없었다. 도형은 혜연이 테니스를 할 때에 가장 멋있고, 예뻐 보인다고 했는데 오늘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 바로 가야해. 얼른 가자.” 혜연이 나은과 인혜를 보며 서둘렀다. 나은은 서둘러 책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과대를 빠져나와서 나은은 동아리 건물이 있는 쪽으로 갔다. 동아리가 없는 지라 그 건물에 들어서는 것은 입학 직후 학교를 둘러볼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나은은 동아리 건물에 들어서자 어색해 하며 앞서가는 혜연을 따랐다. 여러 가지 동아리 홍보 포스터들로 게시판이 가득 차 있었다. 나은은 게시판에 다닥다닥 붙여진 포스터들을 흘낏흘낏 살피면서 계단을 올랐다. “근데, 요즘 나 연습 거의 안하고 이도형이랑 놀러 다녀서 랭킹 떨어질 것 같아.” “그래도 본래 실력이 있는데, 잘 하겠지!” “도형이는 보러 안 와?” “온대. 먼저 체육관에 가 있겠다고 했어. 난 테니스채랑 운동복도 좀 챙겨가야 해서.” 4층에 있는 테니스 동아리방까지 가기 위해 나은은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벌써 3학년인데도 마치 신입생처럼 이 건물을 신기해하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우습게 느껴졌다. 나은은 대학생활의 묘미라는 동아리 활동도 하지 못했던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동아리 건물 안에는 제법 많은 학생들이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 다들 이곳이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편하게 행동했다. 마치 남의 공간에 와있는 것처럼 어색해 하는 사람은 나은 혼자뿐인 것 같았다. “선배!” “어, 지수야. 왜 나와 있어?” “선배, 방금 신입생 몇 명 왔다갔어요! 올해는 신입생 제법 들어올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다.” 나은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어디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나은은 놀란 눈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가던 혜연과 인혜는 나은이 멈춰선 것을 보지 못하고 계속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 중간에서 멈춰선 나은은 한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찾았다.” 나은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짧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나은은 혹시 자신이 지금 환상은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동아리 건물에서 나은의 눈에 띈 사람은 분명 그 남자였다. 벚꽃이 흩날리던 주말, 하얀 셔츠를 접어 올리고서는 약간 짜증이 난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던, 바로 그 남자였다. “정나은! 너 뭐해?” 나은이 계단에서 멈춰서 있는 것을 발견한 인혜가 아래를 보면서 물었다. 그때였다. 나은은 그 남자의 시선이 빠르게 자신 쪽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은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나은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계단 위쪽에서 나은을 보던 인혜는 이상한 나은의 행동에 계단을 타고 내려 왔다. “정나은, 왜 그래?” “…나 어떡하지, 인혜야?” 나은은 마치 그 자리에 묶여버린 것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눈앞에 있는 그 남자를 다시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어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Spring Spring. 성준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복잡했다. 다음 강의까지 한 시간 정도 비는 시간이 있어서 동아리방에 들렀었다. 지수가 신입생이 다녀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기에 듣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정나은!’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준은 반사적으로 그 이름이 들리는 쪽으로 쳐다보았다. 정나은, 그것은 요즘 성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이름이었다. “…어?” 성준의 시선이 나은에게로 닿았다. 성준은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나은을 보자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분명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 나은도 성준을 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성준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선배,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성준의 옆에 서있던 지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수는 성준과 성준의 시선이 닿아있는 나은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성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은에게는 나은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서 나은에게 말을 걸었다. 그제야 성준에 멎어있던 나은의 시선이 옮겨갔다. 하지만 성준의 시선은 변함없이 나은에게로 멎어있었다. 지수는 그런 성준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선배, 갑자기 왜 그래요?” 옆에서 지수가 성준에게 계속 물었지만, 성준은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멍하니 나은을 보고 있었다. 나은은 불안정한 표정으로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다시 한 번 시선을 성준 쪽으로 돌렸다. 성준은 나은과 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리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나은 쪽을 보았을 때, 나은은 친구의 손을 잡고는 가까이에 있는 화장실로 서둘러 들어가 버렸다. “…아, 어쩌지.” 성준은 나은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자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지수는 성준과 나은이 사라진 화장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준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자신의 심장 쪽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은이 사라진 화장실 쪽에 시선을 두었다. “뭐예요, 선배. 어서 들어가요.” 성준의 옆에 서있던 지수는 성준의 이상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지수는 멍하니 서있는 성준의 팔을 잡고 동아리방 쪽으로 잡아당겼다. 지수가 성준을 당기자, 성준은 조금씩 발을 뗐지만 여전히 시선은 한 곳에 멎어있었다. 동아리방 안으로 들어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밖에 시선을 두던 성준은 방 안에 들어와서야 겨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동아리방 안에서는 후배들이 기타를 들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성준은 가까운 곳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지수는 성준의 옆에 서서 성준을 내려다보았다. “하여간 요즘 선배 진짜 이상해요. 대체 왜 그래요?” “어?” “요즘 연습도 안하고 계속 멍하니 있기 일쑤고, 동아리방에도 잘 안 오잖아요. 방금도 갑자기 넋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고.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아냐, 그런 거.” 성준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에게 말하는 지수를 올려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런 성준을 보는 지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성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갑자기 동아리 건물에 나타난 나은과 자신을 보고 있던 그 모습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성준은 나은이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은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아직 안 갔을까.” 성준은 동아리방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섰다. 지수는 성준의 그런 모습에 반쯤 포기를 한 듯, 금방까지 성준이 앉아있던 소파에 털썩 앉아서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나은이 있었던 그 자리를 다시 보았다. 마치 나은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갔나보네.”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동아리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나은이 들어갔던 화장실 입구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성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화장실 쪽을 보았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나온 것은 나은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성준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뒤돌아섰다. Spring Spring. 4 하늘에서 별안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없었던 터라 나은은 우산을 들고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낮에는 그렇게나 날씨가 좋더니 순식간에 날이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 나은은 울상을 지으며 밖을 보았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봄비라고 치기에는 꽤나 굵은 빗방울이었다. 나은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네.” 비가 와서 그런지 편의점에는 손님들도 뚝 끊겼다. 나은이 멍하니 유리벽 밖을 보고 있는데, 길 건너에서 뭔가가 주기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은은 그것이 분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세환의 팔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나은은 분식점 쪽을 쳐다보았다. 세환이 나은을 보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은은 가볍게 손을 들어 세환의 인사에 답을 하였다. “뭐하는 거야.” 세환은 테이블을 닦고 있었는지 한 손에 행주를 들고 있었는데, 나은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자 행주를 테이블에 놓아두고 유리벽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은 손으로 우산을 펼쳐 보이는 행동을 취했다. “뭐지? 우산이 있냐는 건가?” 나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환은 다시 한 번 더 행동을 반복하였다. 아무래도 우산이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 나은은 양 팔을 들어서 크게 엑스 자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자 세환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들어 올려 흔들었다. “핸드폰을 확인하라고?” 나은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세환을 힐끔 보자, 세환은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 핸드폰 번호를 교환한지는 꽤 되었지만, 이렇게 문자를 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세환이 용무가 있으면 편의점으로 왔기 때문에 연락할 일이 따로 없었다.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메시지가 도착하였다는 음성이 들리자, 나은은 핸드폰을 열었다. 나은의 예상대로 세환이 보낸 문자였다. 나은은 그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우산 있어요. 같이 집에 가요?” 나은은 세환의 문자를 받고 잠시 고민을 하였다. 우산이 없기는 하였지만, 세환과 같이 집에 가면 조금 어색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비가 그치지 않으면 편의점에 안에 있는 우산을 하나 사서 가도 상관은 없는 것이었다. “아, 어쩌지.” 나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세환은 여전히 유리벽 옆에 서서 나은의 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은은 문자를 보내고 나서 유리벽 너머로 세환을 보았다. 세환은 방금 도착한 나은의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문자를 확인한 세환은 고개를 들어 나은 쪽을 보더니 머리 위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면서 다시 테이블 쪽으로 돌아갔다. [그래요, 고마워요. 일마치고 봐요.] 나은이 세환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나은은 카운터에 앉았다. 손님이 없어 따분했기에, 가방 속에서 엠피쓰리를 꺼내었다. 나은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조용히 앉아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듣고 있으니 나은의 머릿속에는 문득 오늘 동아리 건물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가 다시 떠올랐다. “아, 멍청이.” 나은은 그 생각을 하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남자가 자신과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기타 동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굉장한 수확이었으나, 결국에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은은 그 남자와 두 눈이 분명하게 마주쳤던 그 순간을 다시 기억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 남자는 나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은은 그 남자를 보고서 놀란 나머지 화장실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렇게 도망을 가버린 이유 중에는 그 남자가 편의점에서 보았던 예쁜 여자와 함께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었다. “진짜 바보 같아.” 나은은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를 앞에 두고서 도망치듯 화장실로 가버리고는, 이내 인혜와 다시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그 남자를 찾아다녔다. 그 남자가 기타 동아리의 방에 앉아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를 다시 찾은 후에도 나은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 남자 곁에는 항상 예쁜 여자가 함께였다. 마치 자기가 그 자리의 주인이라는 듯, 나은이 그 남자를 볼 때마다 항상 함께였다. 그 이후 나은은 혜연의 랭킹전을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집중을 하지 않고 있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서 다시 마주친 그 남자를 머릿속으로 그릴 뿐이었다. 나은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도 나타나지 않던 인연이었다. 스물두 살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인연이었는데, 한 번 마주치고 난 후부터 그 사람이 자꾸 눈에 띄었다. 이상하게도 반복적으로 나은과 마주치는 일이 생겼다. 석 달간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남자가 요즘 들어서 자주 편의점을 들렀다. 나은은 마치 그 남자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나은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은과 교대를 할 아르바이트생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봄비답지 않은 굵은 빗방울에, 우산을 썼음에도 옷이 잔뜩 젖어 있었다. 나은은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을 뺀 후, 가볍게 인사를 하고 카운터에 늘어놓았던 자신의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생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오자, 나은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은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세환이 편의점 앞에서 나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은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한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무겁게만 들렸다. “나은아!” 나은이 편의점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세환이 나은을 불렀다. 나은은 조금 놀란 눈으로 세환을 보았다. 서로 이름과 나이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세환은 단 한 번도 나은에게 말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은아’라고 이름을 부르니 나은이 놀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에?” “내가 나이도 한 살 더 많은데, 그렇게 부르면 싫어?” “아, 아니요. 싫은 건 아닌데, 좀 놀랐어요.” “이제는 말 편하게 하려고. 괜찮지?” “네? 아, 그럼요.” 세환이 살짝 웃으면서 나은에게 말했다. 나은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대답을 했다.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서도 나은은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해서 어색해했다. “자자, 그럼 갑시다! 비 맞지 않게 우산 속으로 쏙 들어와!” “고마워요.” 세환은 나은이 비에 맞지 않도록 우산을 나은 쪽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세환의 오른쪽 어깨는 비를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축축이 젖어가고 있었다. 나은은 괜히 자신 때문에 세환이 비를 맞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선 버스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내일 주말이니까, 아르바이트 안하지?” “네. 주말은 쉬어요.” “에이, 그럼 난 재미없겠다. 우리 사장님은 주말엔 손님도 없는데 대체 왜 문을 여는지 몰라. 그치? 피곤해 죽겠단 말이야. 때려치울까보다. 쥐꼬리만 한 시급 받고 일하는데!” “매일 그 말 하면서도 안 그만 두잖아요.” “그야. 그만 두면 네가 심심할 테니까.” 나은은 세환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은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세환은 너무나 빤질빤질하면서 능글맞았다. 붙임성도 좋고 오지랖도 넓었다. 그래서 나은과 세환이 이정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지만, 아직도 나은은 세환이 적응되지가 않았다. “어! 버스 왔다!” 세환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비 때문에 버스 안은 눅눅한 공기가 가득했다. 앉을 자리가 비어있지 않아서 나은과 세환은 버스 뒷문 쪽에 나란히 섰다. 버스 문이 닫히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나은은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밖이 어두운데다가 빗방울까지 흘러내려 잘 보이지는 않았다. “어?” 창밖을 보던 나은이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나은은 어둠 때문에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하고 두 눈을 여러 번 끔뻑였다. 하지만 버스에 속도가 붙어 금세 그 자리를 벗어나서 나은은 제대로 확인을 하지 못하였다. “왜? 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아니, 아니에요.” 어두운 창밖으로 보인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 펼쳐진 우산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접힌 작은 우산을 들고 있던 그 사람이었다. 나은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요즘 계속해서 그 사람만 생각해서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은이 계속 창밖을 보며 어두운 표정으로 있자, 옆에 서있던 세환이 나은을 보며 물었다. “요새 무슨 걱정 있어?” “아니요. 왜요?” “며칠째 계속 표정이 안 좋던데? 일 할 때 계속 멍하니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어이구. 만날 일 안하고 나만 쳐다보고 있어요?” “응. 몰랐어?” 나은은 너무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는 세환 때문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은은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하도록 그 사람 생각을 하는 것에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나은이 웃음을 터트리자, 세환은 그런 나은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나은의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세환의 스킨십에 나은은 조금 놀랐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이 행동했다. “고민 털어 놓을 곳이 필요하면, 나한테 털어 놔. 이래봬도 나 입 무겁다?” “치. 믿음직해야 고민도 털어놓고 하는 거죠.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단 거 알아요?” “에? 내가? 말도 안 돼! 내가 얼마나 듬직한 줄 알아?” “웃기지 마요.” 나은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세환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버스가 나은의 집 근처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 세환의 집은 그곳에서 한 정거장이나 더 가야했지만, 나은을 데려다 주기 위해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가도 돼요.” “여기서 가까워?” “네. 바로 요 근처예요.” “그래? 그럼 이거 쓰고 얼른 들어가.” “어? …오, 빠는요?” 나은은 놀란 눈으로 세환을 보면서 말했다. 사실 오빠라는 그 말이 입에 붙지 않아서 어색하기도 했다. 한 번도 세환을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었기에, 세환은 그 말을 듣자 기분 좋게 웃었다. “네가 오빠라고 불러주니까 좋다. 비 맞아도 기분 좋을 거 같아. 나, 갈게. 조심히 들어가!” 나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세환은 자신의 우산을 나은의 손에 쥐어주고는 나은을 등지고 뛰어가 버렸다. 아직 빗줄기가 제법 굵은데도 비를 맞고 뛰어가는 세환의 모습을 보자 나은은 마음이 불편했다. 나은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세환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Spring Spring. 성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빗방울이 투둑투둑 우산 위로 떨어졌다. 성준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또 하나의 우산과 작은 다이어리를 쳐다보았다. 성준은 뭔가 자신이 초라해진 느낌을 받았다. 성준은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혹시나 나은이 우산이 없을까 싶어 퇴근 시간 즈음에 우산을 들고 편의점 앞에 서있었다. 아직도 전해주지 못한 나은의 다이어리와 함께 우산을 전해줄 생각이었는데, 성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 기분이 이상하네.” 나은이 남자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던 성준은 방금 자신의 눈으로 본 상황에 조금 놀랐다. 성준이 편의점 앞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편의점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 누굴 기다리고 있나 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은이었다. 편의점에서 일을 끝내고 나온 나은은 그 남자와 한 우산을 쓰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이건 어쩌지.” 성준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우산과 다이어리를 가슴께로 들어올렸다. 성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편의점 쪽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돌려줘야 하는 다이어리였고, 애초에 나은을 위해서 새로 샀던 우산이었다. 성준은 나은이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은에게 전하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편의점 카운터에는 나은이 아닌 덩치가 조금 있는 남자가 있었다. 항상 나은이 있던 시간에만 편의점에 들렀던 터라, 다른 사람이 나은의 자리에 있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굵은 목소리로 성준에게 인사를 하였다. 성준은 카운터로 곧장 가서는 한 손에 들려있던 다이어리와 우산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성준의 행동에 아르바이트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성준을 보았다. “죄송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부탁이요?” “이거 방금 교대한 아르바이트생에게 내일 전해줄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럴게요. 누구라고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되나요?” “네. 그냥 전해주기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준은 아르바이트생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원래 자신의 손으로 전해주고는 자신의 존재도 알릴 셈이었지만, 나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성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성준은 어쩌면 나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나은이 누구도 사귀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더 말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속이 씁쓸한 것은 지울 수가 없었다. 성준은 오랜만에 자신을 설레게 한 그 사람이 왜 하필이면 나은일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한심하다, 박성준.”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준은 며칠 동안 나은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자신이 한심하게 보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혼자서 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그 사람을 온전히 품에 안을 수 없다는 것이 성준을 씁쓸하게 하였다. 성준은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가슴 아픈 것인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성준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버스정류장에 섰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자 성준은 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빈자리에 앉아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시 이십 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은에게 다이어리와 우산을 전해줄 거라는 기분 좋은 기대를 안고서, 어둠이 내려앉은 이 시간에 이곳에 온 자신의 모습이 성준은 왠지 우습게만 느껴졌다. 성준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도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짧은 통화음 뒤로 도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도형아.” - 네, 형! 무슨 일이에요? “너 어디야?” - 저요? 집이죠. 왜요? “그냥. 술 한 잔 할래?” - 술이요? 형,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비가 오니까 술이 마시고 싶네?” 성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 비오는 날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언의 퇴짜를 맞아서 씁쓸하여서 그렇다는 그 말을 성준은 차마 하지 못했다. 성준은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 도형의 답을 기다렸다. - 아, 형. 오늘 말고 내일 어때요? 내일 제가 혜연이도 소개 시켜 줄게요! “혜연이를?” - 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형이라고 혜연이한테 만날 자랑하니까, 혜연이도 보고 싶다고 늘 그랬거든요. “뭐? 영광인데?” - 그러니까, 형. 내일 어때요? “음, 그래. 주말이기도 하고 좋아.” - 알았어요, 형. 내일 다시 제가 연락할게요! “그래. 연락해.” 성준은 도형과 통화를 끝내고 허탈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얼떨결에 도형의 여자 친구인 혜연을 소개받는 약속을 정하게 되었다. 성준은 허탈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동글동글한 작은 빗방울들이 창문을 타고 흘렀다. 창문에 서려있는 뿌연 김과 빗방울들 때문에 창밖이 잘 보이지 않자 성준은 한 손을 올려 창문을 닦아내었다. 하지만 뿌연 김만 사라질 뿐 창문을 가득 메운 빗방울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손을 대면 금방 자신의 손에 묻어 사라질 것 같은데, 딱딱한 유리벽에 가로막혀 성준은 빗방울을 닦아낼 수 없었다. 성준은 닦아지지 않는 그 작은 빗방울들이 나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Spring Spring. 5 주말이라 집에서 티브이를 보며 쉬고 있었는데, 소파 앞 테이블에 놓여 있던 나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은이 소파에 뉘었던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들었다. 발신자는 혜연이었다.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잘 연락을 하지 않았던 혜연이기에 나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 응, 나은아! 뭐해? “나? 그냥 집에서 쉬고 있지. 아침부터 웬일이야?” - 놀러 가자! “응?” - 오늘 사실 도형이가 제일 좋아하는 형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거든. 근데 나만 있으면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너랑 같이 있으면 좀 나을 거 같아서. “에이, 뭐야. 그런 거라면 인혜가 더 낫지 않아?” - 오늘 인혜 집에 일이 있대. 나 어색한 걸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살려줘, 응? 아침부터 나은에게 전화를 건 혜연은 간절한 목소리로 나은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 집에서 편하게 쉬려고 했던 나은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혜연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맘이 편하지 않았고, 불편한 자리에서 불편하게 있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음. 알았어. 언제까지 어디로 가면 되는데?” - 열두 시까지 학교 앞으로! “학교 앞?” - 응! 진짜 고마워, 나은아! 나중에 봐! “응. 알았어.” 나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열시 반이니, 지금부터 외출 준비를 하면 딱 맞았다. 왠지 혜연이 이런 것까지 계산하고서 전화를 한 것 같아 조금 얄밉기도 했다. 나은은 소파에서 기지개를 키면서 일어섰다. 나은은 외출을 하기 위해 샤워도 하고, 외출복도 꺼내어 입었다. 어떤 옷을 입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너무 불편하지 않도록 가벼운 옷을 꺼내어 입었다. 화장도 하고, 준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열한시 반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나은은 핸드백을 들고 서둘러 구두를 신었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요!”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나은은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늘따라 화장도, 옷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나은은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오니 날씨도 맑아서 더욱 들떴다. 원해서 가는 약속은 아니었지만 집밖으로 나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나은을 스치자, 나은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나은은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섰다. 학교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 버스 왔다!” 나은이 버스를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은은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정류장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함께 버스에 올랐다. 주말이라서 버스가 한산한 편이었다. 나은은 버스의 제일 뒷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선선한 바람을 맞고 싶어서 창문도 조금 열었다. 그리고는 핸드백 속에서 엠피쓰리를 꺼내어 귀에 꽂았다. 창 밖에서는 분홍빛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성격이 급해 잎보다 먼저 핀 분홍빛 꽃잎이 땅으로 춤추듯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벚나무에 꽃이 지고 조금씩 푸르러 지고 있었다. 벚꽃을 좋아하는 나은은 그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벚꽃이 만개했을 때 좀 더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름다운 벚꽃을, 벚꽃과 잘 어울렸던 흰 와이셔츠의 그 남자와 함께 즐길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은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버스에서 내릴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은은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속장소인 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음에도 혜연도, 도형도 보이지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약속 시간에 십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은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주말이었지만 학교 앞이 번화한 편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이었다. “분식점에나 놀러 가 볼까.” 나은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주말에 분식점에 갔다가는 세환에게 괜한 오해를 심어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나은은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때 나은의 먼 왼쪽 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형인가.” 나은은 거리가 너무 멀어 다가오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아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오는 실루엣을 보니 도형은 아닌 것 같았는데,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나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 “어?”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그 사람이 다가왔을 때, 나은의 심장은 어느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은은 잠깐의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나른한 봄날의 꿈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나은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남자에게 있었다. 분명 그 남자였다. 운명이라고,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였다. 이상하게도 요즘 자주 마주치게 되는 그 남자였다. 마치 하늘에서 이 순간을 위해 떨어진 것만 같은 남자였다. 그 남자가 나은에게 다가왔다. 나은을 보면서 나은 쪽으로 다가왔다. 나은은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음을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어느새 나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저기요.” 그 남자가 나은을 향해 입을 열었지만, 정작 나은은 어떠한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얼어버린 것 마냥 멍해져 버렸다. 나은과 그 남자는 계속해서 시선을 마주했다. 깔끔한 흰 티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깔끔한 흰 티에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도 옷 태가 나는 사람이었다. 나은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나은아!” “어? 성준 형!” 그때였다. 나은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 혜연과 도형이 서둘러 오고 있었다. 나은은 혜연은 자신을, 도형은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불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는 나은은 도형과 남자를 반복적으로 쳐다보았다. “…성준?” 나은은 그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도형의 가장 친한 형이자, 오늘 혜연에게 소개시켜주려 했던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운명의 남자라는 것을 깨달은 나은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 역시 나은과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것 같았다. 혜연과 도형은 두 사람 가까이로 다가왔다. “어라? 두 사람 원래 알았어?” 도형의 말에 나은도, 그 남자도 어떠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운명의 실타래가 두 사람을 엮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Spring Spring. 성준, 나은, 도형, 혜연, 네 사람은 깔끔하고, 음식이 정갈한 스파게티 집에 앉았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도형이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나은의 귀에는 도형의 말이 들어오질 않았다. 단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멍할 뿐이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했는지, 혜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두 사람 아는 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나은은 혜연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의 반응에 도형은 다시 분위기를 풀기위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형인 성준이 형. 박성준이야.” “반가워요. 도형이가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제가 얘랑 사귀는지, 오빠가 얘랑 사귀는지 헷갈릴 정도였어요.” “야, 솔직히 그건 아니지! 어쨌든, 형, 이쪽은 내 여자 친구인 권혜연이고, 이쪽은 혜연이 친구인 정나은이에요.” “반가워요. 도형이 여자 친구라고 해서 기대 많이 했는데, 기대한 대로 예쁘시네요.” “아, 말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그럼, 말 편하게 할게. 이쪽은 나은이라고 했나? 반가워.” “네? 네…, 안녕하세요.” 성준이 나은을 보며 편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자, 나은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을 했다. 나은은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 혼자서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콩닥콩닥 뛰고 있는 이 심장을 어찌해야할 지 나은은 정신이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성준은 웃으면서 자신을 대하고 말을 거는데, 그러 때마다 나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혜연이 동아리 랭킹전 때문에 서두르느라 성준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혜연이 이 상황에서 자신을 조금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혜연은 아무 것도 모르고 도형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은은 살짝 고개를 들어 성준을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을 보고 있던 성준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나은은 어색하게 웃고는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쩔쩔매고 있을 때,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나왔다. 나은에게는 자신의 앞에 놓인 스파게티가 마치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나은의 시선은 오로지 스파게티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은은 고개를 들면 자신의 앞에 있는 성준과 눈이 마주칠 것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와, 맛있겠다. 오빠, 많이 먹어요. 나은아, 맛있게 먹어.” “야, 나는!” “넌 알아서 먹겠지, 뭐.” “에라이. 너한테 뭘 기대하냐. 형, 많이 먹어요.” “응. 너도. 혜연아, 나은아, 너네도 맛있게 먹어.” 나은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포크를 들어 스파게티를 먹었다. 서로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나누는 데도, 나은은 말없이 듣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은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자신의 인연, 운명의 남자가 눈앞에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사실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은아, 어디 안 좋아?” 말없이 스파게티만 입으로 집어넣는 나은을 보고 혜연이 나직이 물었다. 나은은 포크를 놓지도 않은 채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은을 쳐다보았다. 나은은 입 안에 있는 스파게티를 꿀꺽 삼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나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성준과 도형, 혜연이 나은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나은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 자신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은은 화장실 벽에 몸을 기대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손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려다 놓았다. “…미쳤나봐.” 나은의 심장은 진정할 생각이 없는 듯 쿵쿵 거리며 뛰고 있었다. 성준을 처음 벤치에서 보았을 때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나은은 성준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쏟아지는 아찔한 현기증에 정신을 놓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은아?” 말없이 스파게티만 먹던 나은이 갑자기 화장실로 가자 걱정이 된 혜연이 나은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 있는 나은을 발견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은은 울상을 지으며 혜연을 보았다. “왜.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이야.” “응?” “도형이가 소개시켜 준 사람, 내 운명의 남자.” “뭐?!” 혜연이 놀란 표정으로 나은을 보았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나은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손으로 혜연을 팔을 잡았다. 혜연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나,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미치겠어.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말도 안 돼, 진짜야?” “응. 진짜야. 혜연아, 나 어쩌지?” 나은은 성준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은은 혜연의 팔을 놓고 세면대로 가서 차가운 물로 손을 씻어내었다. 그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명의 남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했다. “아, 모르겠다. 혜연아, 들어가자. 기다리겠다.” “아? 응. 너 먼저 가 있어. 나 화장실 좀 갔다가 갈게.” “알았어.” 나은은 혜연을 화장실에 두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크게 심호흡을 여러 번 쉬자 그나마 떨리는 가슴이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은의 시선은 성준에게 멎어있었다. 성준은 도형과 이야기를 나누며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 단정하고, 말끔한 모습. 바르고, 착실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을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그 사람에게서 빛이 나는 것 마냥 느껴졌다. “형, 잠시 만요.” 성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도형이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혜연이 앉았던 자리에서 혜연의 핸드백을 들고는 나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은이 나오고 있던 곳인 화장실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은은 그런 도형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왜?” “아, 혜연이가 뭐 두고 갔나봐.” “내가 갔다줄까?” “아냐. 내가 갖다 줄게. 앉아 있어.” “응, 알았어.” 나은은 도형을 보내고 나서야 테이블에는 성준 밖에 앉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성준의 시선은 도형을 따라가다가 나은에게서 멈춘 상태였다. 나은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성준과 나은이 앉은 테이블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나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성준의 시선은 나은에게 멎어있었지만, 나은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Spring Spring. 6 성준은 자신의 앞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나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스파게티만 먹고 있는 나은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걸고 싶은데,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도형의 여자 친구를 소개받는 자리를 갖기 위해 나온 성준은 약속 장소에서 나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주말 임에도 학교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나은을 본 순간, 이번에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나은에게 남자 친구가 있을지라도 나은에 대해서 알 기회를 꼭 갖고 싶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한 번쯤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나은에게 다가갔었다. 그런데 나은에게 겨우 말을 걸었을 때, 도형과 도형의 여자 친구인 혜연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은이 혜연의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제야 성준은 혜연도, 나은도 영문과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준은 자신의 앞에 있는 나은을 보고 있다가 손목에 채인 시계를 보았다. 도형이 혜연의 핸드백을 가지고 화장실 쪽으로 간 지 꽤 된 것 같은데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은과 이렇게 말없이 마주 앉아 있은 지 꽤 된 것 같았다. “얘네, 왜 안 오지?” “네? 아, 그러게요.” 성준이 말을 내뱉자 나은은 꽤 놀란 눈으로 성준을 쳐다보았다. 스파게티 집으로 들어와서 나은을 정면으로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성준은 나은을 빤히 보았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아 보이는 귀여운 얼굴이 성준을 설레게 했다. 학교를 마치고선 곧장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성실한 모습도 성준의 마음에 들었다. 늘 바르고 착실하게 살아왔을 것 같았다. 그런 순수한 모습이 성준을 매료시켰다. “제가, 화장실에 갔다 와볼까요?” “어? 아, 그래줄래?” “네. 갔다 올게요.” 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 혼자 남은 성준은 나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성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한 손을 올려 자신의 심장 깨에 갖다 대었다. 나은의 앞에서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을 하고 있었었다. 나은은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이 보여서 더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혹시나 나쁜 모습을 보이게 되지는 않을까,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 “저…, 오빠?” 성준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을 때, 나은의 목소리가 들려 성준이 고개를 돌렸다. 나은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성준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성준은 나은이 방금 자신을 보고 ‘오빠’라고 부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쁘고, 보호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왜 알지 못했는지 속상할 뿐이었다. “…화장실에 가봤는데, 아무도 없어요.” 멍하니 나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성준은 나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었다는 나은의 말은 성준을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나은은 조심스럽게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도형과 혜연이 어디로 갔는지 잠시 생각을 하던 성준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혜연의 핸드백까지 가지고 나가던 도형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이 살짝 나은을 보자, 나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은은 이미 핸드폰을 열고 있었다. 성준 역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도형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은도 혜연에게로 전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성준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대체 도형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이 자리는 명백히 도형이 여자 친구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도형이가 전화를 안 받네.” “…혜연이도요.” 성준은 나은의 말까지 듣자, 두 사람이 성준과 나은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이란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성준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난감했다. 혹시나 서툰 행동으로 나은이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갖지는 않을지 걱정이 크게 되었다. “저, 오빠.” “어?” 성준이 쉽사리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나은이 먼저 성준에게 말을 걸었다. 성준은 약간 멍한 눈으로 나은을 바라보았다. 나은은 성준과 잠시 눈을 맞추었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나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됐는데, 오늘 별 일 없으면 같이 영화나 보러 갈래요?” 나은이 먼저 이런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성준은 나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은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건넸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정말 단순히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애매한 상황이 되어서 그런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러면서도 떨리고 있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뭐. 바쁘시면, 어쩔 수 없고요.” “어? 아, 아니야. 오늘 별 일 없어.” 성준은 나은의 말에 성급히 대답하면서도 마치 관심 없는 듯한 말투로 대답을 한 자신 때문에 나은이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성준은 조심스럽게 나은은 쳐다보았다. 나은은 약간 홍조를 띈 얼굴로 수줍게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성준에게는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성준과 나은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영화관으로 갔다. 나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성준은 이것이 꿈은 아닌지 계속 현실을 의심했다. 나은 앞에 나서지 못하고 항상 주변만 맴돌던 자신이, 이렇게 나은과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너무나 꿈같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남자친구가 있는 나은과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지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나은을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고르고, 팝콘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나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은은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았다. 성준은 괜히 딴 짓을 하면서도 은근히 나은의 전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어? 네, 오빠. 웬일 이예요?” 나은은 전화를 받자마자, ‘오빠’라는 말을 꺼내었다. 나은이 자신을 ‘오빠’라고 부른 것에 설레어 하던 성준은 조금의 실망감은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쉽게 부르는 호칭이었는데, 자신 혼자서 설레어 하던 모습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성준은 나은의 얼굴을 살짝 보았다. 나은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나은의 표정을 보자, 편의점 앞에서 보았던 나은의 남자친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괜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정말요? 나 봤어요? 아, 지금 영화 보러 왔어요. 누구랑 왔냐고요?” 나은이 전화를 받다가 성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성준은 나은이 어떻게 대답을 할까 궁금하면서도, 괜스레 신경 쓰지 않는 척 다른 쪽을 보았다. “아, 아는 사람이랑 왔어요. 네, 수고해요.” 성준은 그저 무난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은과 ‘아는 사람’이라는 관계가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말 한 번 쉽게 걸어보지 못했던 나은과 어느새 ‘아는 사이’라도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야?” 성준은 나직이 나은에게 물었다. 나은은 성준의 물음에 고개를 크게 저으면서 대답했다. “저 남자친구 없어요. 그냥 좀 아는 오빠예요.” “어? 남자친구 없어?” “네, 없어요.” 성준은 나은의 대답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성준은 그동안 편의점 앞에서 보았던 남자가 나은의 남자친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을 접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괜히 남자친구가 있는 나은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저 친한 오빠 동생 사이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은이 남자친구가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성준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얼굴에 저절로 피어오르는 웃음은 숨기려고 해도 자꾸 숨겨지지가 않았다. Spring Spring. 스크린 위로는 영화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지만, 나은의 눈에는 영화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옆에 성준이 앉아있다는 그 사실에 온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온 운명의 남자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상영관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나은은 그 어둠 속에서 자신과 성준,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은은 힐끔 성준을 보았다. 성준의 시선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살짝살짝 스크린의 빛에 의해 보이는 성준의 실루엣이 나은을 떨리게 만들었다. 나은은 자신이 먼저 영화를 보러 오자고 말 한 것을 참 잘 했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그렇게 없던 용기가 어떻게 그 순간에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아주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성준이 바쁘다며 거절하지는 않을까, 대답을 듣기 전의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나 떨릴 수가 없었다. “재미없어?” 성준이 나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은은 살짝 놀란 몸짓을 하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영화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나은의 모습이 성준의 눈에는 지루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나은은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영화의 내용은 이미 뒷전이었다. 나은은 팝콘을 먹기 위해 손을 넣었다. 그 순간, 팝콘을 쥐고 있던 성준과 손이 맞닿았다. 나은은 깜짝 놀라 성준을 쳐다보았다. 성준도 놀란 모양인지 나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은은 얼른 손을 빼고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에 아직 남아있는 성준의 감촉을 지울 수가 없었다.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이라서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을 성준에게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느새 영화는 종반부를 치닫고 있었다. 평소에 보고 싶어 하던 영화를 보러 왔지만, 나은은 영화를 하나도 보지를 못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혼자서 다시 보러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성준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심장이 떨려 조금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상영관 안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서 영화관을 빠져나가는데, 성준과 나은은 자리에 앉아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영화 잘 못 보던 것 같던데, 재미없었어?” “네? 아,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정말?” “네! 원래 보고 싶었던 영화였어요.” 나은은 괜히 오버스러운 몸짓까지 덧붙여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왠지 바보 같아 보여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영관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나은과 성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영관에서 나와서 나은은 가까운 곳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섰다. 영화가 끝난 직후라서 화장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은은 기다란 줄 끝에 서있으면서 왼쪽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았다. 지금 나은은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나오는 순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옷차림이나, 화장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못나게만 느껴졌다. 성준을 만날 줄 알았다면 좀 더 화장에 신경 쓰고, 좀 더 옷에 신경을 쓸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좀 더 예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기다란 길이 줄어들고 나은이 화장실을 다녀와서 손을 씻었다. 그러면서도 거울 속의 자신이 못나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은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어?” 화장실에서 나온 나은은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벽에 기대어 성준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준은 모습을 본 나은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은은 왠지 기분이 좋고 설렜다. “나왔어?” “네, 오빠.” “나가자. 영화관 안에 공기 좀 답답하지?” “네? 네, 조금요.” 성준은 나은을 보며 살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 부드러운 미소가 나은을 떨리게 했다. 성준과 나은은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나은의 눈에는 오늘의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좋게 느껴졌다. 세상이 온통 기분 좋은 바람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영화관을 빠져나온 나은과 성준은 어디로 갈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막상 영화관을 나오니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나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성준과 헤어지는 것은 너무 아쉬웠다. 아직 성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나은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집에 가긴 좀 아쉽다, 그치?” 나은은 성준이 먼저 그 말을 꺼내준 것을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보러 가지 않겠느냐는 말도 자신이 먼저 꺼냈는데, 그 말까지 자신이 하면 너무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많은 걱정을 하던 터였다. 나은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나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포켓볼 칠 줄 알아?” “아, 네! 저 되게 좋아해요.” “정말?” “네. 혜연이한테 배웠는데, 잘은 못 쳐도 좋아는 해요.” “다행이다. 혹시나 싫어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포켓볼 치러 갈래?” “네, 좋아요!” 나은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성준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은은 왠지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준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 기쁘게 했다. 성준이 자신을 단지 동생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은은 지금 성준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하루 종일 성준을 생각하며 지냈던 날들의 마음고생을 다 씻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준, 그리고 성준과 이렇게 만나서 지금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진짜로 운명이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이 쉽사리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나은이 먼저 성준에게 말을 걸었다. 성준은 약간 멍한 눈으로 나은을 바라보았다. 나은은 성준과 잠시 눈을 맞추었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나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됐는데, 오늘 별 일 없으면 같이 영화나 보러 갈래요?” 나은이 먼저 이런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성준은 나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은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건넸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정말 단순히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애매한 상황이 되어서 그런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러면서도 떨리고 있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Spring Spring. 7 학교를 마치고 편의점으로 향하는 나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제 집으로 돌아온 나은은 현관 앞에서 두근거리고 있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었다. 나은은 현관문에 기대어 서서 기분 좋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나은은 어제 하루 종일 성준과 함께 데이트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매너 좋은 성준이라고 하더라도 집 앞 까지 자신을 데려다 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에 나은은 더욱 설렜었다. 나은은 마치 성준과 연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설렜다. 하루가 꼬박 지난 후인 오늘도 나은은 그 설렘을 가득 안고 있었다. “나은아, 왔어?” 나은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신영이 반갑게 맞았다. 나은은 활짝 웃으며 ‘네, 저 왔어요!’라고 활기차게 말하고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작은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은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자, 신영은 의아한 눈으로 나은을 보았다. “좋은 일 있나봐?” “네?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데? 얼굴에 꽃이 피었어, 아주.” “헤. 그래요? 그냥 어제 좀 재밌게 놀았거든요.” 신영은 잔뜩 들떠있는 나은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은은 카운터 앞의 물건을 이리저리 정리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신영은 그런 나은을 보며 중증이라며 중얼거리더니,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나은아, 주말 아르바이트생 알지?” “아, 네. 그 남자요?” “응. 그 사람이 너한테 이것 좀 전해주라던데? 어떤 남자가 와서 너한테 전해주라고 했었대.” “네? 뭔데요?” 나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신영이 내민 것을 보았다. 신영의 손에 들린 것을 본 나은의 눈이 커다래졌다. 좀 전까지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환한 미소도 어느새 사라졌다. 나은은 놀란 눈으로 급하게 신영의 손에 든 것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나은이 잃어버린 다이어리였다. 보물처럼 여겨오던 나은의 다이어리였다. 벚꽃놀이를 갔던 날 잃어버려서 다시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신영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니 나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누가 주고 갔대요?” “그런 말 없었다던데? 그냥 이 우산이랑 같이 주고 갔대. 비오는 날에.” “말도 안 돼, 진짜!” “뭐 중요한 거였나 봐? 아, 나은아, 언니 먼저 가봐야겠다. 내일 보자!” “네? 네, 언니!” 나은은 서둘러 편의점을 빠져나가는 신영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신영이 손에 쥐어 주고 간 다이어리와 우산을 쳐다보았다. 나은은 자신의 손에 있는 다이어리는 얼른 펼쳐보았다. 분명 자신의 다이어리가 확실했다. 벚꽃놀이 때 잃어버린 다이어리가 어떻게 다시 자신의 손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나은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누구지…….” 나은은 손에 들린 다이어리에서 어떤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다이어리는 잃어버렸던 그 순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이어리 사이에 꽂혀있던 한 잎의 벚꽃과 한 장의 영화표도 그대로였다. 마치 잠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그대로였다. 나은은 다이어리와 우산을 카운터에 놓아두고 카운터 아래쪽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연락처를 적어둔 종이였다. 나은은 다이어리와 우산을 자신에게 전해주라고 했던 그 아르바이트생의 연락처를 찾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어 곧장 전화를 걸었다. 누가 되찾아 준 것인지 꼭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 여러 번의 연결 음이 지난 후, 반대편에서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는 정나은이에요.” - 아,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다름이 아니라요. 저한테 전해주라 하셨던 다이어리와 우산 받았거든요. 그런데 이거 혹시 누가 갖다 주었는지 알 수 있을까, 하고요.” - 글쎄요. 누구라고 말해드릴지 물으니까 그저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데요. “아…, 정말요? 그럼 혹시 인상착의 같은 거라도 알 수 있을까요?” -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키가 좀 크고 약간 마른 체형의 남자였어요. “아, 그래요?” - 더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나은은 전화를 끊고 더 심란해졌다. 누가 이 다이어리를 돌려주었는지 감히 예측이 가는 사람도 없었다. 바닥에 흘려버린 다이어리는 대체 누가 이곳까지 가지고 왔는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은은 무엇이든 꼼꼼히 적어놓는 자신의 성격 탓에, 어느 누구라도 다이어리 안을 조금만 살핀다면 자신이 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주인도 모르는 이 다이어리를 다시 돌려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다이어리와 함께 건네 준 이 우산은 뭘까, 라는 생각을 했다. 다이어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 맞았지만, 우산은 나은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색의 삼단 우산,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은 들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우산이었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나은이 다이어리와 우산을 카운터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내뱉었다. 손님이 온 줄 알았는데,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세환이었다. 세환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면서 나은이 있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 왔다. “왔어요?” 나은의 익숙한 인사말에 세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서서는 나은을 쳐다보았다. 나은은 세환에게 신경을 거의 쓰지도 않고는 다이어리를 되찾아준 사람에 대한 생각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표정이 별로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아니오.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러다가 다이어리 뚫어지겠다. 이게 뭔데 그렇게 열심히 쳐다 봐?” 세환은 카운터 위에 놓인 나은의 다이어리를 들어올렸다. 나은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세환의 손에 들려있는 다이어리를 순식간에 빼앗았다. 나은은 자신이 보물처럼 여기는 다이어리를 누군가가 손대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다이어리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은은 급하게 다이어리를 뺏고도 괜히 민망해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런 나은의 행동에 조금 놀란 세환은 어색해져서 얼른 손을 내려놓았다. “아, 미안해요. 제가 이건 남이 만지는 거 싫어하거든요.” “아니, 내가 미안하지.” 항상 세환이 나은에게 능글맞게 먼저 말을 걸고 장난을 쳐서 침묵이 흐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잠시 동안 나은과 세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나은은 왠지 그것이 예민하게 굴었던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세환은 다시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나은에게 말을 붙였다. “아, 맞다! 주말에 영화 뭐 봤어? 재밌었어?” “아. 그거 있잖아요. 한일 합작이라는 거, 그거 봤어요.” “아, 진짜? 어땠어? 재밌었어? 나도 보고 싶었는데 미루고 있었거든.”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응?” “영화에 집중을 안 해서 내용이 기억이 잘 안나요. 다음에 다시 보러 가던지 해야겠어요.” “에? 왜 집중을 안 해?” “아. 그냥, 좀 그랬어요.” 나은이 얼렁뚱땅 얼버무리자, 세환은 몸을 굽혀 나은을 쪽으로 다가갔다. 나은은 그런 세환을 보며 괜히 몸을 움찔했다. 세환은 뭔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은을 보았다. 나은은 괜히 뭔가 들킨 것 같은 기분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너!” 세환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나은을 보았다. 나은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세환을 보았다. “남자랑 영화 봤지!” 나은은 세환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뜨끔하고 말았다. 딱히 세환에게 그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는데도, 괜히 움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성준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는 그 사실이 다시 되새겨지자 나은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도 꿈같은 그 순간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나은에게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나은이 살짝 미소를 짓자, 세환은 혀를 끌끌 찼다. “진짜구만. 누구는 주말도 반납하고 분식집에서 일하는데, 누구는 남자랑 영화도 보고 참~ 좋겠다.” “치, 무슨 말이 그래요.” “누구는 데이트도 하고 참 좋겠다!” 세환은 계속해서 나은을 보며 장난스럽게 비꼬듯이 말을 했다. 나은은 괜히 민망해져서 그러지 말라며 세환을 말렸다. 세환은 한동안 그렇게 비꼬며 장난스럽게 말을 하다가, 이내 말투를 고치고선 나은을 쳐다보았다. “누구야?” “네?” “누구랑 봤냐고. 궁금하다!” “그냥, 아는 사람이요.” “남자 친구는 없는 거 같았고. 그럼 주말에 소개팅을 한 건가?” “아니에요, 그런 거!” 나은은 괜히 오버스러운 몸짓을 더해서 말했다. 나은은 성준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을 세환에게 들킨 것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성준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곧 들킬 것 같아서 불안했다. 세환이 성준과 아는 사이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은 불안했다. 혼자만 속에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에이, 아니기는! 딱 맞고만.” “뭐래요. 어서 분식집 가서 일이나 해요!” “아, 맞다! 잠시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온 건데!” “얼른 가 봐요. 그러다가 잘리기 전에.” “알았어. 너, 다음엔 꼭 다 알아낼 테니까 긴장하고 있어, 알았지?” 세환은 나은에게 장난스럽게 엄포를 놓고는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세환이 한바탕 나은의 머릿속을 헤집고 나가고 나서 한동안 나은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짧은 순간에 많은 이야기도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나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은의 시선은 다시 다이어리에 머물러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어쨌든 그 사람한테 고마워해야지.” 나은은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이어리를 자신의 가방 속에 넣었다. 다이어리는 잃어버렸던 그 때의 시간을 머금고 멈추어 있었기에, 왠지 지금은 손을 대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이 카운터 위에 있던 우산을 아래로 내리려고 손에 쥐었을 때, 편의점 문이 다시 열렸다. 서너 명의 손님들이 한 번에 몰려 들어왔다. 담배를 사기 위해 곧장 나은 쪽으로 오는 손님들 때문에 나은은 우산을 넣으려는 것을 포기하였다. 나은이 담배를 계산하고 있는 동안, 또 한 무리의 손님들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나은은 평소에 그렇게 한가하던 편의점에 웬일로 사람들이 들이닥치나 싶었다. “어서 오세요.” 담배를 샀던 손님들이 나가고, 다시 편의점 문이 열렸다. 나은은 입구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인사를 하고는 편의점 안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리고는 이내 몇 개의 과자와 음료를 손에 쥐고 계산대로 다가온 손님들의 계산을 서둘러 끝내었다. 편의점은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카운터에서 멀리 떨어진 음료 코너에서 무언가를 고르는 손님 한 명이 다였다. “어?” 음료를 고르던 손님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왔다.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얹혀 있었다. 나은은 그 손님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나은을 표정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손님이 나은의 쪽으로 다가왔다. 나은을 향해 다가오는 손님은 다름 아닌 성준이었다. “왜? 놀랐어?” “아, 네. 조금요. 저 여기서 일하는 거 아셨어요?” “아니. 그냥 요 앞에 지나가다가 보니까 안에 네가 있더라고. 그래서 커피나 하나 사가려고 들어왔지.” “아. 계산해드릴게요!” 나은은 성준을 보고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나은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느끼고 성준이 혹시나 눈치를 채면 어쩌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나은은 성준에게서 커피를 건네받고 계산을 하면서 성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성준의 시선은 나은이 아닌 다른 곳에 멎어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시선이 멎은 곳을 따라가 보았다. 그곳에는 빨간 우산이 있었다. 다이어리와 함께 찾아온 붉은색의 우산에 성준의 시선이 멎어있었다. 나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 원 이예요.” “아, 그래.” 성준은 나은의 말이 들리고 나서야 나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성준은 안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나은에게 내밀었다. 나은은 천 원을 받고는 성준에게 캔 커피를 내밀었다. 하지만 성준은 나은이 내미는 커피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음. 안 먹고 싶다.” “네?” “네가 마시는 게 낫겠어. 별로 안 먹고 싶네. 열심히 일하라는 응원의 커피 정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 “에? 저 주시는 거예요?” “응. 피곤할 텐데, 마셔가면서 일 해.” “우와, 감사합니다.” “내가 일이 있어서 금방 가봐야겠다. 수고해!” “네? 네, 오빠.” 나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성준에게 인사를 하였다. 성준은 살짝 손을 흔들며 편의점에서 나가버렸다. 나은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캔 커피를 보며 멍하니 서있었다. 나은은 지금 성준이 와서 자신에게 커피를 건네주고 간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망상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커피를 주고 갔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나은은 자꾸만 터져 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 Spring Spring. 8 나은은 성준이 가고난 한참 뒤까지 성준이 주고 간 커피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차가웠던 캔 커피의 표면이 나은의 체온에 의해서 미지근하게 식어져 있었다. 나은은 자신의 손에서 놀고 있는 커피를 보자 괜히 기분이 좋았다. 성준이 주고 간 커피라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마실 수도 없었다. 성준은 아무런 생각 없이 준 커피일지 몰라도 나은에게는 감히 마실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나은은 편의점이 조금 조용해지자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카운터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카운터 위에 아직도 그대로 놓여있는 빨간 우산을 보았다. 나은은 우산을 손에 쥐었다. 대체 누가 자신에게 이 우산을 주고 갔는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키가 좀 크고 마른 체형이라…….” 나은은 아르바이트생이 전해준 말을 되새겼다. 하지만 너무도 두루뭉술한 말이었기에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나은의 머릿속에 순간 성준의 모습이 스쳐 지났다. 성준 역시 키가 좀 큰 편에 마른 체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은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젠 별 걸 다 오빠랑 연결 짓네.” 나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성준과 연결 짓고픈 자신의 모습이 웃겨 보이기도 했다. 나은은 우산을 가방 속에 넣었다. 누가 주고 간 것인지는 모르나, 자신을 위해 준 것이라면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은은 진짜로 그 사람이 성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은은 우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똑따기 단추를 풀고 우산을 펼쳤다. 나은의 시야는 온통 빨간색으로 가득 차버렸다. 우산은 깨끗하기는 했지만, 우산 안쪽에 약간의 녹이 슬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새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은은 빨간색의 우산을 찬찬히 살폈다. 다이어리를 되찾게 해준 그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였지만, 나은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은은 우산을 곱게 접어서는 카운터 아래에 있는 자신의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Spring Spring. 성준은 요즘 따라 기분이 좋고, 하루하루가 기대되었다. 성준은 나은과 함께 데이트를 한 뒤로, 나은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은을 만날 때 느껴지는 그 설렘과 떨림은 변함없었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성준은 기뻤다. 나은과 ‘아는 사이’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준은 기분이 좋았다. 어제 성준은 나은이 일하는 편의점에 들렀었다. 원래 그곳에 나은이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우연히 알게 된 것처럼 들렀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은의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이런 좋은 날씨에 밖에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그곳에 있는 것을 보니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준은 캔 커피 하나를 사서 나은에게 건네주고 왔었다. 성준은 커피를 계산할 때, 편의점 카운터 위에 놓아져 있던 빨간 우산을 보았다. 비가 오던 날, 나은을 위해 준비한 우산이었다. 그 우산이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은이 자신의 다이어리를 돌려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다이어리를 되찾고 기뻐할 나은의 모습이 보지는 않았어도 눈에 그려졌다. “선배, 요즘 좋은 일 있어요?” 동아리방 소파에 앉아서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성준을 보고는 지수가 물었다. 지수의 눈에는 요즘의 성준은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요즘 성준은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을 자주 흘리곤 했다. “응? 아니야, 아무 것도.” “선배, 나 기타 좀 봐줘요. 아무래도 소리가 자꾸 이상하게 나요.” “어? 그래, 이리 줘봐.” 성준은 지수의 손에 들려있는 통기타를 건네받았다. 지수가 동아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준과 지수가 함께 가서 산 기타였다. 기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던 지수는 통기타를 좋아하는 성준을 따라서 통기타를 선택했다. 성준과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지수의 노력이었다는 것을 성준은 모르고 있었다. “비오는 날에 습기가 좀 찼나 보다.” “아, 그래요?” “응. 내 것도 비온 뒤로 소리가 좀 이상했었거든. 잘 건조시키면 괜찮아질 거야.” “다행이다. 갑자기 소리가 이상해서 진짜 놀랐거든요.”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지수에게 통기타를 돌려주었다. 지수는 안도한 표정으로 기타를 받아들었다. 지수는 성준의 얼굴에 띠워진 그 미소를 좋아했다. 지수는 작년에 동아리를 들기 위해 건물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우연히 들어온 기타 동아리에서 성준을 처음 보았다. 그때 성준은 동아리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수는 그런 성준을 보고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타 동아리를 선택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아, 날씨 좋다. 그렇지?” 성준은 동아리방에 있는 창문을 열면서 그렇게 말했다. 동아리방에는 지수와 성준, 그리고 지수의 동기만이 있었다. 지수는 통기타를 옆쪽에 눕히고는 성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준은 창문을 열고 건물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캠퍼스 안은 분홍빛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미 벚꽃이 많이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분홍 꽃잎이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성준은 나은을 처음 봤던 그 날을 기억했다. 분홍빛의 예쁜 벚꽃 아래에서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나은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귀여운 외모와 순수한 분위기가 성준을 사로잡았었다. 사람을 보고 첫 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던 성준이었는데, 나은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성준은 나은을 본 이후로, 첫 눈에 시선을 빼앗기고, 마음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배, 점심 안 먹었죠?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아, 그러고 보니 밥도 안 먹었네. 너희 다음 강의 없어?” “네! 전 오늘 다 마쳤어요.”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사먹자.” “아, 지수랑 드시고 오세요. 저는 조금 있다가 다음 강의 있거든요.” 소파에 앉아있던 지수의 친구가 성준 쪽을 보며 말했다. 성준이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지수는 어느새 소파 위에 두었던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세희야, 그럼 나 밥 먹고 올게. 수업 마치면 연락해! 쇼핑하러 가자.” “응, 알았어. 맛있게 먹고 와.” 지수는 성준을 보며 어서 가자는 식의 행동을 취했다. 그제야 성준은 소파 위에 두었던 작은 가방을 들고 동아리방을 빠져나왔다. 지수와 함께 건물을 나와서 정문 쪽으로 가는데 누군가가 성준의 눈에 띄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익숙하다 했는데, 아무래도 나은인 듯했다. 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수업하러 가나보네.”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파스텔 톤의 카디건을 입은 나은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플랫슈즈를 신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오던 나은도 성준을 발견한 모양인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배, 아는 사람이에요?” “어? 응. 잠깐만, 지수야.” 성준은 지수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나은 쪽으로 걸어갔다. 지수는 멀뚱히 서서 성준을 보고 있다가 어색해져서는 슬그머니 성준 쪽으로 걸어갔다. 성준은 나은과 마주서서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 오빠, 안녕하세요.” “이제 학교 오는 거야?” “네. 오늘은 수업이 좀 늦게 있어서요. 오빠는 어디 가요?” “나 밥 먹으려고. 밥은 먹었어?” “네, 집에서 먹고 나왔어요.” 성준은 이렇게 우연히 나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그것도 같은 단과대에 다니면서도 그 전까지는 나은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었다. 벚꽃놀이를 가서 나은을 발견하기 전까지, 나은이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은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하루에 꼭 한 번은 어떻게든 나은과 마주쳤다. 고의적으로 성준이 나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자연스레 나은과 부딪히는 일도 자주 생겼다. 마치 우연이 아니라 운명인 것처럼. “아, 오빠, 저 늦겠다. 가볼게요. 밥 맛있게 드세요.” “응. 수업 열심히 하고, 다음에 보자.” “네, 갈게요!” 나은은 손을 흔들면서 성준에게서 멀어져 갔다. 성준은 나은이 단과대가 있는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가는 것을 계속 보고 있었다. 왠지 불안하고 보호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선배, 누구예요? 되게 귀엽다. 전에도 본 적 있나? 좀 낯이 익어요.” “어? 아는 동생이야. 너보다 한 살 많겠다.” “스물 두 살이라고요? 되게 동안이네요. 부럽다.” 성준은 나은을 쫓던 시선을 돌렸다. 대신에 지수의 시선이 나은을 쫓고 있었다. 성준이 힐끔 지수의 얼굴을 보자, 지수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나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성준은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성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부러운 시선을 받을 정도라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괜히 자신이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배고프다. 선배, 어서 가요!” “어? 아, 그래.” 나은에게 있던 시선을 거둔 지수가 성준을 재촉했다. 성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어느 누구와 비교한다고 해도 성준의 눈에는 나은이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성준은 그런 나은이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된다고 했을 때는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Spring Spring. 나은은 우연히 성준을 만난 것이 굉장히 기뻤지만, 한 쪽으로는 찜찜했다. 그건 아무래도 성준과 함께 있던 예쁜 그 여자 때문인 것 같았다. 전에도 몇 번 본적이 있는 여자였다. 항상 성준과 함께 있는 그 여자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혜연과 인혜는 그저 친구가 아니냐며 말을 했지만,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연인사이인 것 같았다. “왜 울상이야. 오는 길에 성준오빠 만났었다며.” “아니, 그냥. 아무래도 그 여자, 여자 친구가 맞는 것 같아서.” “아유, 답답아. 성준오빠한테 여자 친구 있는지 물어 보면 되잖아.” “그냥. 그런 건 왠지 묻기가 껄끄러워서.” “그럼 내가 알아봐 줘?” 나은은 혜연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은은 혜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성준에게 물어볼 자신은 없으면서도 그 여자가 진짜 성준의 여자 친구인지 궁금했다. 나은의 즉각적인 반응에 혜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말 기다렸구나? 알았어. 도형이한테 전화해서 지금 당장 물어봐 줄게.” “우와. 고마워, 혜연아!” “너 때매 내가 못산다, 진짜.” 혜연은 혀를 끌끌 차면서 핸드폰을 열고 도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은은 혜연이 통화하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은은 잔뜩 긴장한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서 손을 모아서 속으로 제발, 이라며 중얼거렸다. “어, 도형아. 지금 통화할 수 있어?” 전화가 연결되자 나은은 더욱 긴장한 채로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나은의 모습을 인혜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통 남자에 관심이라고는 없던 나은이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 것이 웃기기도 했다.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던 인혜였는데, 나은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어 볼 게 있어서. 그 전에 봤던 성준오빠 있잖아. 응, 그 오빠. 그 오빠 여자 친구 있어? 아니, 만약에 없으면 괜찮은 친구라도 소개시켜 주려고. 응. 아, 그래? 응. 알았어. 나중에 봐.” 혜연이 전화를 끊자 나은이 혜연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뭐래?, 라고 물었다. 혜연은 나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치며 말했다. “여자 친구 없대. 별로 여자에 관심 없는 편이라는데?” “뭐? 진짜?” “응. 근데 요즘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나봐.” “에?” “자세히는 자기도 모르겠대. 그냥 요즘 좋은 일 있냐고 물었더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는데?” 혜연의 말을 들은 나은은 온 몸의 힘이 축 빠진 것처럼 늘어지고 말았다. 나은은 성준이 좋아하는 사람은 성준과 함께 있던 그 여자가 분명하다며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여자는 누가 봐도 예쁘고, 세련되어 보였기에 성준이 좋아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나은은 괜히 기가 죽는 기분이 들었다. 그 여자와 나은은 너무나 달랐다. 풍기는 분위기에서부터, 성준과의 거리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아, 힘 빠져.” “왜? 그 좋아하는 사람이 너일지 누가 알아?” “야, 그런 꿈같은 소린 하지도 마. 아니야.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 누군지 알 것 같아.” “뭐? 누구?” “있어. 동아리 사람인 것 같은데. 항상 함께 있더라고.” “야, 그건 모르는 거지. 일단 여자 친구도 없는데, 괜히 혼자 속 썩이지 마.” 나은은 인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지만 마음이 왠지 불편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은은 성준이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은은 강의실 책상에 떡하고 엎드려 버렸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교수님이 다시 강의실로 들어왔음에도 나은은 일어설 줄을 몰랐다. Spring Spring. 9 나은은 강의 내내 강의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준이 나은의 앞에 나타난 뒤로 이런 일이 잦았다. 수업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듣던 나은이었는데, 요즘 들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혜연과 인혜는 그런 나은이 걱정이었다. 나은 역시 친구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성준으로 가득차서 다른 것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나은은 강의를 마치고 강의실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혜연이는 도형이를 만나러 간다며 얼른 가버렸고, 인혜는 조별 과제가 있어서 강의실에 남았다. 아르바이트를 가기까지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었다. “도서관이나 가야겠다.” 나은은 혼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자신 때문에 조별 과제를 주말로 미뤘는데, 허술하게 준비를 해서 나쁜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과제는 아니었지만, 나은은 무슨 일이든 똑 부러지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은은 가뜩이나 성준 때문에 수업에 집중도 하지 못하는데, 과제마저 허투루 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도서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개강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서관은 한산한 편이었다. 나은은 계단을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이 어쩐지 나은을 숨 막히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 이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은은 책장 사이에서 손가락으로 책들을 훑으면서 중얼거렸다. 방학 때 잠시 학교에 왔을 때 빌렸던 책이라서 그 위치를 기억하고 있는데, 누가 빌려간 것인지 책이 보이질 않았다. 나은은 입을 삐죽거리며 책장에 기대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아무 책이나 꺼내어 무릎에 얹었다. 묵직한 책이 무릎 위에 얹히자, 나은의 무릎은 절로 조금 가라앉았다. 나은은 책을 펼쳤다. 영어 원서였는데, 무슨 내용의 책인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 않아서 책을 펼쳐 둔 채로 그대로 두었다. “…아, 오늘은 왠지 일하기 싫다.” 아까 성준과 마주친 이후로, 그리고 성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은은 왠지 기운이 빠져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나은이 좋아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운명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나은은 남자에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만남 속에서 몇 번쯤은 호감을 가지고 좋아한다는 감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 사람이 자신의 운명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성준에게는 가장 먼저 ‘운명’이라는 그 단어가 떠올랐다. 첫 눈에 반하고, 첫 눈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눈을 쫓고 있었고,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성준을 부담스럽게 할까 걱정이 되어 나은 스스로 그 마음을 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 나은아.”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나은을 불렀다. 나은은 멍한 눈으로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본 나은은 크게 숨을 들이 마시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그 사람을 보았다. 마치 나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 사람이 나타났다. 성준이 한 손에 두꺼운 책을 들고서 나은을 보고 있었다. 나은은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나은은 자신이 성준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뭐해? 오늘은 일 안 해?” 성준은 나은에게 다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나은을 향해 한 발씩 다가섰다. 나은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성준을 보면서 나은은 운명이라는 그 단어를 떠올렸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도 운명의 연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제 때문에 책을 찾으려고 왔어요. 조금 있다가 일하러 가야해요.” 성준은 나은의 옆으로 다가와 나은처럼 책장에 몸을 기대로 바닥에 앉았다. 나은은 자신의 바로 옆에 성준이 앉아 있다는 사실에 살짝 긴장을 했다. 성준이 손을 뻗어 나은의 무릎에 있는 책을 건드렸다. 긴장을 하고 있던 나은은 순간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로 몸을 움츠렸다. “아, 미안. 놀랐어? 무슨 책인지 궁금해서.” “아니요, 괜찮아요. 이 책 그냥 아무 거나 뽑았어요. 제가 찾던 책이 없어서요. 오빠는 도서관에 웬일이에요?” “나도 과제 때문에 책을 찾으려고. 후배 시키려다가 그냥 내가 왔는데, 그러길 잘한 것 같다.” “에? 왜요?” “그냥 여러 모로. 그나저나 우리 오는 자주 보는 거 같다. 그치?” “그러게요. 수업하기 직전에 보고, 수업 마친 직후에 또 보네요.” “나쁘지 않네. 너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거든.” 나은은 성준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성준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일 수도 있지만, 그 한 마디의 말에 나은은 설레고 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얼굴을 보았다. 성준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 나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미소로 살짝 웃었다. 나은도 따라서 어설프게 웃었다. “일하러 가봐야 하지 않아? 다섯 시 다 되어 가는데.” “아, 정말요?” “응. 한 이십 분 정도 남았다. 걸어가면 여유 있게 도착하겠어.” “그럼 가봐야겠어요. 오빠는 더 있다 가실 거예요?” “아니, 나도 이제 갈 거야. 같이 나가자.” 성준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은은 자신의 무릎에 놓여있던 두꺼운 책을 처음 있었던 그 자리에 꽂았다. 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나은은 시야에 성준의 손이 들어왔다. 성준이 나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은이 조심스레 성준을 올려다보자, 성준은 어서 잡으라는 듯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그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성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손을 잡았을 뿐인데, 나은의 손에는 성준의 감촉이 남아있는 듯 했다. 마치 사춘기의 소녀처럼 사소한 것에 가슴이 설레고, 떨렸다. 첫 사랑을 하는 수줍은 여고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책만 대여하고 나가자.” 나은은 성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도서관 사서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학생증과 함께 두꺼운 책을 내밀었다. 나은은 성준이 내민 책을 보았다. ‘성격심리학’이라는 커다란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은은 성준이 심리학과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겼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을 것처럼 느껴져 왠지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자, 나은아.” 나은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미 대여를 끝냈는지 성준이 테이블 위의 책을 들면서 말했다.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서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올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은은 그 침묵이 왠지 어색하지 않게 느껴져서 좋았다. “오빠는 어디로 가세요?” “난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가려고.” “아, 그럼 저랑 같이 나가시면 되겠어요.” “응. 어서 가자. 너 늦겠다.” 나은은 성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까지 나은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던 성준에 대한 고민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Spring Spring. 나은의 흔적을 찾는 것은 성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준은 나은의 강의가 끝날 무렵에 단과대 입구에서 나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칠 요량이었지만, 나은은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는지 성준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성준은 조심스럽게 나은의 뒤를 따랐다. 왠지 힘이 없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두 시간 전, 강의를 시작하기 전만 하더라도 화사한 모습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나은의 발걸음은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나은을 따라 도서관으로 간 성준은 우연을 가장하여 나은의 앞에 나타났다. 우울해하는 것 같은 나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혹시나 귀찮아하거나, 만나기를 꺼려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나은은 살짝 웃으면서 성준을 맞아주었다. “매일 일하면 힘들지 않아?” “별로 안 힘들어요. 그냥 앉아서 계산만 하면 되는데요, 뭘. 또 주말은 쉬니까 할만 해요.” “주말엔 집에 있는 거야?” “보통은 그래요. 가끔은 놀러 가기도 하는데,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해요.” 성준은 나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나은이 일을 하는 편의점까지 나은을 데려다 줄 심산이었다. 사실 동아리에 일이 있어서 학교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나은에게는 집으로 갈 것이라며 거짓말을 했다. 과제 핑계를 대며 필요도 없는 두꺼운 전공서적까지 빌렸다. 성준은 나은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 아직까지 나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 환한 미소와 봄처럼 따스한 나은의 분위기, 매일 일하는 편의점, 영문학과,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나은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좀 더 많이 나은에 대해 알고, 좀 더 많이 아껴주고 싶었다. “오빠, 저 일하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 그래. 열심히 해. 나도 가볼게.” “네. 들어가세요.” “응. 수고해.” 성준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는 나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인사를 하고나서야 뒤를 돌아 헤어졌다. 성준은 다시 학교로 들어가기 위해 방향을 돌리면서도 힐끔 편의점 안을 살펴보았다. 나은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성준은 나은이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사람? 혹은 그저 조금 아는 오빠?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스쳐지나갈 사람? 성준은 나은에게 자신이 그렇게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으면 했다. 아직까지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색하고, 어설픈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앞으로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은에게 다가가서 나중에는 나은에게 소중하고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쉽네.” 성준은 언제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요즘 성준은 나은을 만나면서,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하며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선배!” 성준이 동아리방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성준을 반기는 것은 지수의 목소리였다. 동아리 방에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정기적으로 동아리 모임을 갖는 날이었다. 성준은 후배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비워져있는 지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구석에 눕혀두었던 자신의 통기타도 집어 들었다. “선배, 갑자기 어디 갔었어요? 말도 없이.” “응? 잠시 누구 좀 만나러 갔었어. 왜?” “아이 참, 선배 요새 진짜 다른 데 정신 팔고 있죠? 우리 공연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저랑 같이 공연하는 것 좀 신경 좀 써줘요, 네?” 지수가 성준을 보며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성준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지수를 보았다. 그 표정을 본 지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면서 퉁명스러운 표정을 풀고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난 선배 못 이기지.” 성준은 살짝 웃으면서 지수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지수는 성준의 사소한 손길에도 움찔하며, 볼이 상기되어 버렸다. “미안해. 남은 기간 동안은 열심히 하자.” “진짜죠, 선배?” “그래. 얘들아, 공연 이제 한 달도 안 남은 거 알지? 각자 전에 계획했던 대로 연습하고, 혹시나 수정된 부분 있으면 나한테 바로 말해줘.” 성준의 말에 동아리 후배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는 각자 연습을 시작했다. 성준도 무릎 위에 얹어 놓았던 통기타를 바로 잡았다. 지수는 핸드백 속에서 함께 공연하기로 했던 곡의 악보를 꺼내놓았다. Falling slowly, 영화 Once의 주제곡이었다. 통기타 연주 중에서는 진부한 곡이기도 했지만, 성준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 공연 때마다 빼먹지 않는 곡이었다. 우연히도 지수 또한 이 곡을 가장 좋아해서 의견의 차이 없이 이 곡을 연주곡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성준은 기타를 잡고 익숙하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미 악보 따위는 없어도 될 만큼 머리가, 그리고 성준의 손이 기억하고 있는 곡이었다. 성준은 연주를 하다가 도입부에서 연주를 멈추었다. “지수야.” “네, 선배.” “우리 이번엔 노래도 같이 할래?” “노래요?” “응. 연주만 하면 심심하잖아. 너만 괜찮다면 노래도 같이 하면서 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는데…” “별로 어렵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지수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공연하는 모습을 나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은이라면 자신의 공연을 즐겁게 봐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Spring Spring. 10 성준은 오랜만에 연습에 집중을 했다. 이미 동아리 후배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고, 마지막까지 성준과 함께 남아있던 지수마저도 집으로 돌아갔다. 동아리방에 혼자 남은 성준은 기타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성준은 손목에 차인 시계를 보았다. 벌써 아홉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 까지 학교에 남아서 혼자 연습을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처음 기타를 배울 시절에는 거의 매일 이렇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곤 했었다. 기타를 치는 동안에는 왠지 시간이 잘 흘러서, 밤이 늦는 줄도 모르고 학교에 남아서 기타를 치곤했다. “아, 이제 나도 가야지.” 성준은 자리에서 일어서 기타를 한 쪽에 잘 세워두고는 가방을 챙겼다. 지수가 깜빡 잊고 놓고 간 악보도 한 쪽에 잘 정리해 두었다. 불을 끄고 동아리방을 나서려던 성준이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다시 동아리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한 쪽에 세워두었던 기타를 다시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구석에 있는 캐비닛에서 자신의 통기타 가방을 꺼내어 기타를 넣었다. 기타를 한 쪽 어깨에 메고서야 성준은 동아리방을 나왔다. 이미 깜깜해진 학교는 인적도 드물고 조금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성준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와서 정문에 다다르자, 성준은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아홉시 오십분, 잠시 후면 나은이 아르바이트를 마칠 시간이었다. 성준은 길 맞은편에서 편의점을 바라보았다. 편의점 안 카운터에 나은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일을 마무리 하는지 조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성준은 편의점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나은이 편의점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준은 오늘 나은을 집까지 데려다 줄 생각이었다. “어? 나오나 보다.” 나은과 교대를 하는, 전에 한 번 보았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고, 나은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성준은 벤치에서 일어서 편의점 앞으로 갔다. 어깨에 멘 기타가 성준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성준은 편의점 앞에서 나은을 기다리면서, 나은이 자신을 보고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이렇게 오늘 벌써 나은과 세 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어?” 성준이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옷을 갈아입은 나은이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편의점 앞에 서 있는 성준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성준은 나은을 보자마자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얼굴인데도 또 반가웠다. “어, 오빠? 여기서 뭐해요? 일찍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너 기다리고 있었어.” “에? 저를요?” 나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웃으면서 어서 가자는 식으로 나은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나은은 잠시 움찔 하더니 이내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준은 그런 나은과 속도를 맞춰서 함께 걸었다. “오빠, 솔직히 말해요. 저 기다린 거 아니죠? 집에 간다더니 이제 학교에서 나오는 거예요?” “응. 좀 전에 나왔어. 너 퇴근할 시간 됐기에 진짜로 이 앞에서 너 기다리고 있던 거야.” “정말요?” “그렇다니까. 오늘 우리 되게 자주 본다, 그치?” “그러게요. 벌써 세 번째네요.” 나은은 그렇게 말하고 씽긋 웃었다. 성준은 나은의 웃음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혹시나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었는데, 나은이 웃으면서 자신을 대해줘서 성준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은과 성준은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섰다. 나은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성준이 어깨에 메고 있는 기타에 관심을 가졌다. 나은이 성준의 기타 가방에 손을 얹었다. 성준은 고개를 돌려 나은을 보았다. 나은은 신기하다는 듯이 성준의 기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기타 잘 쳐요?” “그렇게 잘 치진 않고, 그냥 재미로 치는 거지.” “아, 맞다. 오빠 기타 동아리죠?” “응. 어떻게 알았어?” “전에 오빠 동아리방에 있는 거 본 적……, 아!” 나은은 말을 하다가 중간에 말을 끊어 버렸다. 성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은을 보았지만, 나은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성준은 생각 없이 듣고 있던 나은의 말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전에 동아리방에서 자신을 본 적이 있다는 나은은 말을 되새기면서 성준 역시 그 날이 번뜩 떠올랐다. 동아리 신입생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지수에게 듣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성준은 고개를 돌렸었다. 그때 나은이 동아리방 근처에 있었고, 분명히 자신과 눈이 마주쳤었다는 것을 성준이 기억해냈다. 그러면서 성준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과 친구를 번갈아 보던 나은의 모습과 화장실로 재빨리 사라지던 나은의 모습까지 성준은 모두 기억을 해냈다. “그때,” “네?” “그때부터 날 알고 있었어?” 성준은 조금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은에게 물었다. 나은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성준은 나은이 그때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왠지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알았다면,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졌다. “나은아, 너희 집까지 그렇게 멀지 않은데 조금 걸을까?” 성준은 나은에게 조금 걷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다. 나은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나은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참아내고 있었다. 나은이 언제부터 자신을 알게 되었을까, 혹시나 자신이 나은을 알게 된 것보다 더 먼저 자신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성준은 말없이 나은과 함께 걸었다. 나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성준은 조심스럽게 나은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야. 나은아.” “네.” “도형이가 소개시켜주기 전에 나 알고 있었어?” 성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은은 성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은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가로젓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었다. 성준은 나은의 답에 조금은 실망을 했다. 성준은 나은이 일찍부터 자신을 알았더라면, 하는 솔직한 바람이 맘속에 있었다. 서로 알고 지내지 못했던 시간이 성준은 못내 아쉬웠다. Spring Spring. 나은은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성준의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말았다. 나은은 자신이 진작부터 성준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성준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볼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거짓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성준이 혹시나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 채지는 않았을까, 마음이 졸였다. 나은은 성준이 자신을 알기 전부터, 자신이 성준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기가 싫었다. 왠지 그런 마음은 숨겨놓고 싶었다. 또, 성준이 지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런 마음을 들켜 괜히 어색해지기도 싫었다. 나은은 지금 이렇게 편하게 마주치는 관계가 좋았다. 나은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성준이 신경 쓸까 싶어 얼른 화제를 돌리었다. “오빠, 근데 이 시간까지 학교에서 뭐했어요? 과제?” “아니, 동아리 공연이 얼마 안 남아서 연습 좀 하다가 왔어.” “우와. 공연도 하는 거예요? 언제 하는데요? 나도 보고 싶다.” “일주일 뒤에 해. 근데 저녁시간에 학교 공터에서 해서 너는 못 보겠네. 그렇지?” “그러네요. 아르바이트만 없으면 좋을 텐데…. 아, 아쉽다. 진짜 보고 싶은데.” 나은은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기타를 치는 성준의 모습은 왠지 부드럽고 멋있을 것 같아서 꼭 보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저녁시간대에 해서 나은은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나은은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은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땅을 보면서 걸었다. 성준은 그런 나은의 모습을 한 번 흘끗 쳐다보았다. “들려줄까?” “네?” 성준의 말에 나은이 놀란 눈으로 성준을 쳐다보았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은을 보고 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살짝 곡선을 그리고 있는 성준의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설렜다. 성준은 나은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나은은 무엇을 찾는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성준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은아. 너희 집 근처에 놀이터 있어?” “놀이터요? 집 바로 앞에 작은 놀이터가 하나 있기는 해요. 근데, 왜요?” “여기서 가까워? 잠깐 들렀으면 좋겠는데.” “가까워요. 요 바로 앞에 있어요.” “그래? 그럼 잠깐만 가자. 날씨도 포근하고 하니까, 괜찮지?” “네? 아, 괜찮아요.” 나은은 쭈뼛거리며 잠시 서 있다가 놀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은은 성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은은 집 앞에 있는 놀이터로 성준과 함께 갔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놀이터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아무 대화 없이 걷고 있자니, 나은은 왠지 성준의 행동 하나 하나에 모두 신경이 쓰였다.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느껴졌다. 슬쩍 나은의 손등에 성준의 손이 스치자 나은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나은은 살짝 성준을 올려다보았지만, 성준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성준은 나은의 집 앞에 있는 작은 놀이터를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여기 놀이터가 있었지? 전에 너 데려다 줄 때 봤었는데, 잊고 있었어.” “근데 오빠, 놀이터는 왜요?” “일단 저기 잠깐 앉을래?” “네? 그래요.” 나은은 성준과 함께 놀이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놀이터에는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나은은 벤치에서 발장난을 치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성준은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기타를 자신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나은은 그러한 성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준은 나은을 슬쩍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살짝 미소만 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기타 가방 안에서 자신이 아끼는 통기타를 꺼내더니 기타를 치려는 자세를 잡았다. “우와, 오빠 저 들려주시려는 거예요?” “응. 너 공연 때도 못 오잖아. 공연 때 내가 할 곡, 너한테 먼저 들려줄게.” “정말이요?” “응. 너도 이 노래 아마 알 거야. 영화 OST거든.” 나은은 자신을 위해 기타를 치려는 성준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은은 놀이터가 어두운 것이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붉게 물들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들킬 것 같았다. 성준은 나은을 한 번보고 씽긋 웃고는 기타를 연주하고 시작했다. 나은은 성준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자, 나은은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Falling slowly.” 나은이 전주를 듣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성준은 나은은 그 말을 듣고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전주 후에 성준은 기타 연주 위로 자신의 목소리를 덧입혔다. “I don't know you(난 당신을 몰라요). But I want you All the more for that (하지만 그래서 더욱 당신을 원해요).” Falling slowly, 영화 Once의 주제곡으로 나은도 굉장히 좋아하는 곡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그 노래가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 집으로 돌아가 수십 번이고 들었던 노래였다. 나은은 그 곡을 성준이 직접 부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떨리고, 설레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어 자꾸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성준의 따뜻한 목소리가 나은의 마음을 적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준은 기타를 연주하면서 간간히 나은과 눈을 마주쳤다. 나은은 마치 자신이 성준과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자꾸 설레기만 했다. “Words fall through me(이해 못 할 말들이 나를 지나고), And always fool me(항상 나를 바보로 만들죠). And I can't react(그리고 난 대꾸할 수가 없어요). And games that never amount To more than they`re meant Will play themselves out(서로를 속이는 의미 없는 게임은 우릴 지치게 할 뿐이에요).” 나은은 조심스럽게 입 모양으로 성준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수십 번이고 들어서 나은도 그 곡의 가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연주를 괜히 망치기 싫어 소리 없이 입으로 중얼거리면 성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성준은 자신의 노래에 입모양을 맞추고 있는 나은을 보자 함께 부르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은 마치 무언가를 들킨 사람마냥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가라앉는 이 배를 붙잡아 줘요). We've still got time(우린 아직 늦지 않았어요). Raise your hopeful voice(희망의 목소릴 높여요). you have a choice You've made it now(당신은 선택을 했고 당신은 이제 결정해야만해요).” 일절까지 부르고 난 뒤, 성준은 기타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나은은 조금 아쉬운 그 여운을 잊지 못하고 성준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귓가에 성준의 노래가 들리는 듯 했다. Falling Slowly, 가뜩이나 여운이 오래 남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성준이 직접 불렀으니 나은은 정신이 없었다. 마치 이 봄의 어둠 속에서 다른 세계로 빨려나간 기분이 들었다. “오늘 연습을 좀 오래 했더니, 목 상태가 별로 안 좋다. 미안해. 다음에는 끝까지 제대로 들려줄게.” “목소리가 안 좋긴요. 오빠 목소리 정말 좋아요. 멋졌어요. 진짜 고마워요.” “고맙긴. 너도 이 노래 잘 아는 거 같던데?” “네. Once 주제곡이잖아요. 이 노래 저 정말 좋아하는 곡이예요!” “그래? 그럼 같이 부르지. 원래 남녀가 함께 부르는 곡이잖아.” “그냥요. 전 노래도 잘 못 부르는데, 오빠 노래 망치면 안 되잖아요.” 나은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성준은 한 손을 올려서 나은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 놓았다. 나은은 마치 자신이 성준 앞에서 아이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러면서 정말로 성준이 자신을 단지 아는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성준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은은 아주 작게 변해서 성준의 머리와 그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밤늦었다.” “아, 그래요.” 성준은 꺼내 놓았던 기타를 가방 안에 다시 넣은 뒤에 어깨에 멨다. 나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은은 성준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마치 꿈만 같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꿈에서 깨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준과 함께 하는 설레는 이 순간순간들이 너무 좋았다. “오빠.” “응?” “약속 지켜줘야 해요.” “무슨 약속?” “다음에 꼭 제대로 다시 불러주겠다는 약속이요.”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나은의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All the more for that. 나는 당신을 몰라요. 그래서 더욱 당신을 원해요. Falling Slowly의 첫 가사가 마치 나은의 마음과 같았다. 아직 나은은 성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이 없지만, 그래서 더욱 성준이 궁금하고, 그래서 더욱 성준이 알고 싶고, 그래서 더욱 성준과 가까워지고 싶고, 그래서 더욱 성준을 원했다. “아, 뭐. 바쁘시면, 어쩔 수 없고요.” “어? 아, 아니야. 오늘 별 일 없어.” 성준은 나은의 말에 성급히 대답하면서도 마치 관심 없는 듯한 말투로 대답을 한 자신 때문에 나은이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성준은 조심스럽게 나은은 쳐다보았다. 나은은 약간 홍조를 띈 얼굴로 수줍게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성준에게는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성준과 나은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영화관으로 갔다. 나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성준은 이것이 꿈은 아닌지 계속 현실을 의심했다. 나은 앞에 나서지 못하고 항상 주변만 맴돌던 자신이, 이렇게 나은과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너무나 꿈같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남자친구가 있는 나은과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지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나은을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고르고, 팝콘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나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은은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았다. 성준은 괜히 딴 짓을 하면서도 은근히 나은의 전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어? 네, 오빠. 웬일 이예요?” 나은은 전화를 받자마자, ‘오빠’라는 말을 꺼내었다. 나은이 자신을 ‘오빠’라고 부른 것에 설레어 하던 성준은 조금의 실망감은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쉽게 부르는 호칭이었는데, 자신 혼자서 설레어 하던 모습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성준은 나은의 얼굴을 살짝 보았다. 나은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나은의 표정을 보자, 편의점 앞에서 보았던 나은의 남자친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괜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정말요? 나 봤어요? 아, 지금 영화 보러 왔어요. 누구랑 왔냐고요?” 나은이 전화를 받다가 성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성준은 나은이 어떻게 대답을 할까 궁금하면서도, 괜스레 신경 쓰지 않는 척 다른 쪽을 보았다. “아, 아는 사람이랑 왔어요. 네, 수고해요.” 성준은 그저 무난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은과 ‘아는 사람’이라는 관계가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말 한 번 쉽게 걸어보지 못했던 나은과 어느새 ‘아는 사이’라도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야?” 성준은 나직이 나은에게 물었다. 나은은 성준의 물음에 고개를 크게 저으면서 대답했다. “저 남자친구 없어요. 그냥 좀 아는 오빠예요.” “어? 남자친구 없어?” “네, 없어요.” 성준은 나은의 대답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성준은 그동안 편의점 앞에서 보았던 남자가 나은의 남자친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을 접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괜히 남자친구가 있는 나은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저 친한 오빠 동생 사이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은이 남자친구가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성준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얼굴에 저절로 피어오르는 웃음은 숨기려고 해도 자꾸 숨겨지지가 않았다. Spring Spring. 스크린 위로는 영화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지만, 나은의 눈에는 영화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옆에 성준이 앉아있다는 그 사실에 온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온 운명의 남자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상영관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나은은 그 어둠 속에서 자신과 성준,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은은 힐끔 성준을 보았다. 성준의 시선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살짝살짝 스크린의 빛에 의해 보이는 성준의 실루엣이 나은을 떨리게 만들었다. 나은은 자신이 먼저 영화를 보러 오자고 말 한 것을 참 잘 했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그렇게 없던 용기가 어떻게 그 순간에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아주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성준이 바쁘다며 거절하지는 않을까, 대답을 듣기 전의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나 떨릴 수가 없었다. “재미없어?” 성준이 나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은은 살짝 놀란 몸짓을 하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영화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나은의 모습이 성준의 눈에는 지루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나은은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영화의 내용은 이미 뒷전이었다. 나은은 팝콘을 먹기 위해 손을 넣었다. 그 순간, 팝콘을 쥐고 있던 성준과 손이 맞닿았다. 나은은 깜짝 놀라 성준을 쳐다보았다. 성준도 놀란 모양인지 나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은은 얼른 손을 빼고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에 아직 남아있는 성준의 감촉을 지울 수가 없었다.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이라서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을 성준에게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느새 영화는 종반부를 치닫고 있었다. 평소에 보고 싶어 하던 영화를 보러 왔지만, 나은은 영화를 하나도 보지를 못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혼자서 다시 보러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성준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심장이 떨려 조금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상영관 안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서 영화관을 빠져나가는데, 성준과 나은은 자리에 앉아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영화 잘 못 보던 것 같던데, 재미없었어?” “네? 아,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정말?” “네! 원래 보고 싶었던 영화였어요.” 나은은 괜히 오버스러운 몸짓까지 덧붙여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왠지 바보 같아 보여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영관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나은과 성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영관에서 나와서 나은은 가까운 곳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섰다. 영화가 끝난 직후라서 화장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은은 기다란 줄 끝에 서있으면서 왼쪽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았다. 지금 나은은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나오는 순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옷차림이나, 화장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못나게만 느껴졌다. 성준을 만날 줄 알았다면 좀 더 화장에 신경 쓰고, 좀 더 옷에 신경을 쓸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좀 더 예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기다란 길이 줄어들고 나은이 화장실을 다녀와서 손을 씻었다. 그러면서도 거울 속의 자신이 못나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은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어?” 화장실에서 나온 나은은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벽에 기대어 성준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준은 모습을 본 나은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은은 왠지 기분이 좋고 설렜다. “나왔어?” “네, 오빠.” “나가자. 영화관 안에 공기 좀 답답하지?” “네? 네, 조금요.” 성준은 나은을 보며 살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 부드러운 미소가 나은을 떨리게 했다. 성준과 나은은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나은의 눈에는 오늘의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좋게 느껴졌다. 세상이 온통 기분 좋은 바람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영화관을 빠져나온 나은과 성준은 어디로 갈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막상 영화관을 나오니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나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성준과 헤어지는 것은 너무 아쉬웠다. 아직 성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나은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집에 가긴 좀 아쉽다, 그치?” 나은은 성준이 먼저 그 말을 꺼내준 것을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보러 가지 않겠느냐는 말도 자신이 먼저 꺼냈는데, 그 말까지 자신이 하면 너무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많은 걱정을 하던 터였다. 나은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나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포켓볼 칠 줄 알아?” “아, 네! 저 되게 좋아해요.” “정말?” “네. 혜연이한테 배웠는데, 잘은 못 쳐도 좋아는 해요.” “다행이다. 혹시나 싫어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포켓볼 치러 갈래?” “네, 좋아요!” 나은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성준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은은 왠지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준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 기쁘게 했다. 성준이 자신을 단지 동생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은은 지금 성준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하루 종일 성준을 생각하며 지냈던 날들의 마음고생을 다 씻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준, 그리고 성준과 이렇게 만나서 지금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진짜로 운명이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Spring Spring. 11 나은이 편의점 한 쪽에서 물품을 정리하고 있을 때, 딸랑, 하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세환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고개를 내밀어 문 쪽을 본 나은은 세환이 들어온 것을 보자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물품 정리를 계속했다. 세환은 편의점을 서성이다가 이내 나은의 옆에 와서 섰다. “바빠?” “아니요. 이것만 다하면 되요. 오빤 한가한 시간이에요?” “응. 지금 조용해. 사장님이 시장에서 뭐 좀 사오라고 해서 나왔어.” “그럼 심부름 가야지 왜 여기로 왔어요?” 나은은 정리를 끝내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세환은 살짝 웃으면서 나은을 따라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안에 무언가 묵직하게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은은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벌써 사왔어. 사실 이거 가게 바로 옆에도 파는 건데, 사장님은 시장에나 파는 줄 알거든. 시장 갔다 오려면 한 삼십분 쯤 걸리는데 시간 벌었지, 뭐.” “치. 완전 땡땡이 선수네요.” “가게에만 있으면 지겹단 말이야. 넌 혼자서 일하면 지겹지 않아?” 나은은 세환의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환은 입을 씰룩 거리며 카운터 앞에 쪼그려 앉아서 나은과 시선을 맞추었다. 저녁시간이 살짝 지난 때여서 편의점은 손님이 끊겨 조용했다. 나은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세환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생각에 빠졌다. 성준이 나은에게 Falling Slowly라는 곡을 들려준 지도, 또 나은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성준이 나은을 데리러 오는 것이 벌써 이주가 넘었다. 나은은 퇴근 시간이 기대되고 설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복잡했다. 성준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는 성준을 보면서 나은은 성준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가끔 학교 안에서 동아리 후배와 함께 다니는 성준의 모습을 보면 꼭 그러한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상한 성준이라서 친한 동생으로, 아끼는 동생으로 생각해서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은은 성준이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 뒤로 불안한 마음이 컸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네?” “왜 정신을 놓고 그래. 무슨 고민인데? 말해 봐. 이 오빠가 들어 줄게.” “됐어요.” “에이, 말해 보래도?” 나은은 세환의 말에 살짝 고민을 했다. 나은은 예전부터 세환에게 물어보고 싶기는 했었다. 자상한 사람과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세환에게나마 물어보고 싶었다. 나은은 주위에 이성 친구가 많지 않을뿐더러, 나은의 눈에는 세환이 여자를 많이 만나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환은 반반한 외모에 이야기도 센스 있게 잘 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 있잖아요.” “응, 응!” 생전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는 털어놓지 않던 나은이었기에, 나은이 입을 열자 세환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은은 그런 세환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자상해서 누구에게나 잘 해주는 사람이랑 저를 좋아해서 저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해야 해요?” “에?” “그러니까, 나한테만 잘해주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이 잘해주는 ‘아무나’ 중에 한 명인지 어떻게 알아요?” 세환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은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나은의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한 걸 네가 직접 봤어?” 나은은 성준의 물음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은이 학교에서 성준과 마주칠 때의 절반정도는 항상 여자와 함께 있었다. 물론 여자라고 해도 얼마 전에 동아리 후배라며 성준이 소개해주었던 지수뿐이었다. 어쩔 땐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고도 했고, 바람을 쐬러 간다고도 했다. 어제는 갑작스레 공강이 생겨 성준의 동아리방으로 가서 살짝 살펴보니, 성준이 지수와 함께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동아리방에는 두 사람 뿐이었고, 기타 소리와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우러져서 나은은 감히 그 공간에 침범할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은은 헷갈렸다. 성준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건지, 그것이 아니라면 지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인지, 또 그것마저 아니라 두 사람 모두를 그저 동생으로 여기는 것인지, 혹은 성준이 두 사람을 이리저리 재고 따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고 헷갈렸다. 성준이 확실하게 무어라고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요즘은 나은은 성준의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무겁고 지쳤다. “네, 봤어요. 근데 제가 본 건 한 사람뿐이었어요.” “한 사람에게만?” “네. 사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건 잘 본 적이 없거든요. 거의 그 한 사람이랑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너한테는 잘 해주고? 그래서 헷갈린다는 거네?” “네, 맞아요.” “에이, 그 사람 진짜 별론데?” 나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세환을 올려다보았다. 세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나은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 나은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 왠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환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봐. 너한테는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해. 그런데도 다른 사람에게도 잘 해준다 그거잖아. 마치 그 남자가 너 말고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사람 진짜 별로지. 이리저리 사람 재고 따지고, 누가 넘어오나 살피고, 어장관리 하는 거 아냐? 그런 사람 만나면 네가 아까워.” “…….” “진짜로 너를 좋아한다면 너한테 올인 했겠지. 너한테만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그런 행동을 했겠지. 근데 여러 사람한테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이리저리 떠보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같아. 내가 그 사람을 모르니까 이런 말 하긴 좀 그래도, 난 반대야.” 나은은 세환의 말을 듣고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세환의 말이 공감하지 못할 말이라면 차라리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왠지 세환의 말도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은이 겪어본 성준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나은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바르고, 성실하며,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성준의 행동은 세환의 말처럼 이리저리 사람을 떠보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내가 괜한 말 했나? 그냥 난……,” “아니에요, 오빠. 고마워요. 오빠 말 잘 참고 할게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나 이제 가게로 가봐야겠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은아, 난 네 전화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밤에라도 또 할 말 있으면 전화 해. 알았지?” “네, 알았어요. 고마워요, 오빠. 들어가 봐요.” “응. 간다!” 세환은 나은에게 손을 흔들면서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나은은 그동안 세환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오늘 이야기를 하면서 나은은 세환에게 가지고 있었던 벽을 허문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세환과 더욱 가까워지고, 좋은 오빠 동생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세환이 나가고 나서도 그가 한 말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세환의 말이 맞는 기분이 들었다. 성준과 함께 있을 때 나은은 즐거웠지만, 함께 있지 않은 순간에는 성준이 지수와 함께 있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나은의 눈에도 예뻐 보이는 지수와 함께 성준이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성준이 나은을 그저 친한 동생으로 여긴다면,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도 나은은 차라리 그것을 성준이 자신에게 확실히 표현해주었으면 했다. “에이, 모르겠다.” 나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준과 함께 하는 그 순간순간이 그저 기쁘기만 했는데, 요즘은 괜히 머리가 복잡하고 어려웠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그저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카운터 위에 올려 있는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보았다. 이제 퇴근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열시가 되면 편의점 앞에서 성준이 나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오늘은 왠지 그것이 마냥 설레지는 않았다. Spring Spring.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성준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벌써 아홉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성준은 공부를 하던 책을 덮고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매일 열시, 성준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은과 함께한지 보름정도 되었다. 성준이 짐을 정리하고 열람실 밖으로 나가는데, 다른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화장실에 가는 지수와 마주쳤다. 성준은 지수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지수는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성준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또 이 시간에 가요?” “응. 갈 곳이 있어서. 넌 이번 시험 열심히 하네?” “저번 학기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이번엔 제대로 공부 해보려고요. 선배, 조심히 들어가요.” “그래. 열심히 해. 내일 동아리방에서 보자.” 성준은 지수에게 살짝 손을 흔들고는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매일같이 도서관에 들러 공부를 하는 덕에, 성준과 지수는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쳤다. 성준은 도서관을 빠져나가서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있었더니 몸이 찌뿌듯했다. 학교 정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성준은 시계를 보았다. 나은이 마칠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성준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은이는 공부 좀 하고 있으려나.” 성준은 시험기간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나은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자신만 마음 편히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성준이 도형에게 전해들은 말로는 나은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장학금은 내내 받고 있다고 했다. 일도, 공부도 놓치지 않는 나은이 성준의 눈에는 대견스럽기도 했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성준은 늦지 않기 위해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학교 정문을 지나 편의점 앞에 도착한 그는 늘 앉는 벤치에 앉아서 편의점 안을 보았다. 나은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있는 자신의 물건을 챙기고, 편의점 안을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나은의 일은 끝이 났다. 잠시 후 교대를 하는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면, 나은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쪽방으로 들어갔다. 나은이 방으로 들어가자 성준은 편의점 앞에 서서 나은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장난기가 돌아서 편의점 옆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내 밀며 편의점을 엿보았다. 잠시 뒤, 편의점에서 나은이 나왔다. 나은은 문을 열고 나와서 좌우를 살피더니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성준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나은을 보았다. 나은은 게름직한 표정으로 버스정류장에 가기위해 발을 옮겼다. 나은이 편의점 옆쪽으로 돌기 직전에, 성준은 나은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은의 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성준의 모습에 나은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오늘도 수고 했어.” “오빠, 깜짝 놀랐어요.” 성준은 수고했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은은 환한 웃음을 숙으러 트리며 말했다. 학교를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조금 버거웠는지 오늘 나은의 표정이 평소처럼 밝지는 않았다. 성준은 혹시나 자신이 친 장난이 기분 나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놀랐어?” “아뇨. 그냥 오늘은 안 오시는가, 했거든요.” “와야지. 근데, 많이 피곤해? 표정이 안 좋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빠는 오늘도 도서관에서 오는 거예요?” “응. 공부 좀 하면서 시간 죽이고 있었어. 어서 가자. 피곤하겠다.” “정말 괜찮아요. 편의점 일이 힘들 게 뭐 있어요.” 성준은 나은과 함께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나은의 집 쪽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도착했다. 성준은 나은을 먼저 버스에 태우고 뒤따라 버스에 올랐다. 늦은 시간이라 자리가 많이 비어있었다. 나은은 익숙하게 제일 뒷자리로 올라앉았고, 성준은 나은의 옆 자리에 앉았다. “시험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는 잘 되가?” “그럭저럭 하고 있어요. 편의점에선 일하면서 공부해도 되니까 그건 좋은 것 같아요.” “하긴, 몸 많이 쓰는 일은 아니니까 다행이다. 아, 어서 시험 끝났으면 좋겠다.” “오빠, 공부할 것도 많으실 텐데 이렇게 집에 안 데려다 주셔도 괜찮아요.” “아니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늦은 시간에 너 혼자 집에 가는 것도 위험하고.” “전 정말 괜찮아요. 여태껏 계속 그래 왔는데요, 뭘.” “그래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성준은 자신을 걱정하는 나은을 다독이 듯 말했다. 그러면서 괜찮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눈에 굴곡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성준은 나은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불편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나은의 집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십 분 정도 타고 간 후에 금방 버스에서 내렸다. 성준은 나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이미 익숙했다. 나은의 집 맞은편에 있는 놀이터와 오른쪽 코너를 돌면 있는 세탁소,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슈퍼,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나은이 자주 간다고 했었던 작은 서점도 있었다. 이제는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동네였다. 성준은 나은을 한 번 쳐다보았다. 나은은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표정이 어두웠다. 항상 얼굴에 웃음을 담고 있는 나은이었기에 이런 모습은 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성준은 무엇 때문에 나은이 기분이 좋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성준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은아, 너 푸우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이 뭔지 알아?”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곰돌이 푸우 있잖아. 그 푸우가 어떤 동물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줄 알아?” “글쎄요? 음, 꿀벌?” “땡. 정답은 아기염소야.” “에? 아기염소요?” “응. 아기염소 여럿이 푸우를 뜯고 놀아요!” 성준이 동요를 곁들여서 말하자 나은은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성준은 나은의 웃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웃음이 났다. 나은은 웃는 모습이 가장 예쁘고, 가장 잘 어울렸다. “그게 뭐에요, 오빠!” 나은은 웃으면서 어이없는 성준의 농담에 그를 타박했다. 성준은 환하게 웃으면서 나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신없이 웃던 나은은 순간 표정이 굳어지며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은의 그 표정에 성준은 어색해하며 나은의 머리에 있던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하지 마요.” “어?” “저한테 이제 그런 농담도 하지 말고, 잘 해주지도 말고, 이렇게 머리 쓰다듬지도 말아요.” 성준은 나은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예상도 하지 않은 채 들어버린 충격적인 말에 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나은을 보고만 있었다. 맨 땅을 쳐다보고 있던 나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들어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잔뜩 긴장한 채로 나은을 보았다. “오빠, 이제 그만해요.” “무슨 말이야.” “…사람 헷갈리게 그만 하라고요.” 나은의 눈가가 어느덧 촉촉이 적셔져 있었다. 성준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저 나은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아직 나은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였다.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라는 나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준은 나은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은에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준은 나은과 자주 마주치는 그 우연들이 실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도, 그저 지나가다가 들른 것이 아니라 나은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편의점을 들른 것이라는 것도, 밤길에 나은이 위험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에, 그리고 조금이라도 함께 있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매일 이렇게 나은을 데려다 주는 것이라는 것도 나은이 모두 눈치 채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성준은 자신이 나은을 좋아하고 있다는 그 마음을 그렇게 조금씩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이제 잘해주지도 말고, 친절하게 대해주지도 말아요. 학교에서 마주치면 인사는 해도 나보면서 웃지는 말아요. 편의점에도 들르지 말고 조금 더 걸어가면 슈퍼 있으니까 그 쪽으로 가요. 매일 이렇게 집에 데려다 줄 필요도 없어요. 나한테 이러지 마요.” “나은아, 갑자기 왜 그래?” 성준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나은이 야속하기도 하면서도 얼떨떨해서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나은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집에 데려다 주면 늘 고맙다고 말하며 씽긋 웃던 나은이 갑자기 눈가를 적셔가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급기야 나은이 눈물을 뺨 위로 흘려보내자 성준은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그는 나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손을 올렸다. 그러자 나은은 자신의 얼굴에 성준의 손이 닿기도 전에 쳐내어 버렸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오빠. 그러지 마요, 진짜. 오빠는 어떤 마음으로 나한테 잘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난 오빠 때문에 정말 헷갈려요.” 성준은 뭐라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나은이 곧장 말을 이었다. 성준은 멍한 표정으로 나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나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한테 왜 잘 해줘요? 왜 사람 헷갈리게 해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행동할 거면서 왜 나한테 그렇게 잘 해주냐는 말이에요, 네? 그동안은 그냥 기뻤어요. 오빠랑 알게 된 것도 기뻤고, 점점 가까워지는 것도 기뻤어요. 근데 요즘은 오빠가 저한테 잘 해주는 게 절 힘들게 해요. 나 한 번 떠보는 거예요?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잘 해주는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어, 나은아?” “그렇게 다정하게 내 이름 부르지도 마요.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거잖아요. 나한테만 그러는 듯이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지수라는 그 애한테도 똑같이 이럴 거잖아요.” 성준은 나은의 말을 들으니 나은이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성준은 답답한 노릇이었다. 나은은 아무래도 성준이 지수와 나은 사이에서 이리저리 마음을 떠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준은 답답했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은은 이제 아예 고개를 떨어트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은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눈물로 젖은 나은의 얼굴이 안쓰럽게 보였다. “…오빠가, 나한테 잘 해주면, 난 기대한단 말이에요. 오빠가…, 오빠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그런 것처럼, 오빠도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나 그렇게 기대하고, 착각한단 말이에요.” 성준은 나은의 말에 온몸의 긴장이 모두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준은 자신이 나은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말에 너무 기뻐서 웃음을 자꾸 터져 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은은 여전히 성준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성준은 나은의 어깨를 양 손으로 감싸고 나은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 나은을 꼭 품에 안자 가슴이 무서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울림이 나은에게 전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지 말라고요. 힘들어요. 오빠 때문에 정말로 힘들어요.” 나은은 성준의 품을 살짝 밀어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준은 나은을 더욱 세게 꼭 안으면서 말했다. “나은아.” “…….” “좋아해.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이 너를 좋아해.” 좋아한다는 그 말을 내뱉는 성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성준은 좋아한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렵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그 말을 내뱉는 것이 성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 많이 좋아해서, 좋아하는 그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누군가는 쉽게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만, 성준에게는 그것이 어려웠다. 정말로 그 마음이 진심이라서, 그 마음이 너무 커서, 너무 많이 좋아한 탓에 그 말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은을 오해하게 했고, 나은을 힘들게 했다. 성준은 품에 안고 있던 나은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은의 눈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 주었다. 나은은 이제 성준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나은은 아직도 성준의 말이 믿기지 않는 것인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성준을 보고 있었다. “네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근데, 이거 하나는 사실이야.” “…….” “널 정말로 많이 좋아해, 나은아.” 성준은 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나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은은 그제야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성준은 나은의 미소를 보고야 자신의 마음이 전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성준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나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말도, 지금 나은과 함께 있다는 그 자체도,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2년 전, 이처럼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Spring Spring. 12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나은은 책장을 넘기며 앉아있었다. 약속시간 보다 훨씬 일찍 나온 탓에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나은은 책을 살짝 덮고는 핸드폰을 보았다. 벌써 약속 시간인 열한 시는 조금 지나 있었다. 나은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혜연과 인혜는 이렇게 매번 약속 시간에 늦었다. 그래서 항상 나은이 먼저 와서 그들을 기다리곤 했다. 나은은 읽고 있던 책을 가방 안에 넣었다. 미리 시켜놓았던 따뜻한 카페모카를 한 모금 마시었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나은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카페 밖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몇 년 만의 폭설이라며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약속인데 눈이 오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지난밤까지 내리던 눈은 그쳤다. 나은이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을 때, 딸랑, 하는 작은 종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오다가 만난 것인지 혜연과 인혜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추워!” “어? 나은아, 일찍 와있었네?” “너희가 늦은 거야. 이십 분이나 지났거든?” “에이, 미안해.” 혜연과 인혜는 실실 웃으면서 나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각자 녹차라떼와 카라멜 마끼야또를 시켰다. 나은과 혜연, 그리고 인혜가 이렇게 함께 만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취업하여 직장 생활을 하느라 예전처럼 자주 만날 시간이 없었다. “나은아, 넌 학원 할 만해? 나도 학원으로 갈 걸 그랬나? 우리 회산 너무 힘들어.” “난 괜찮은 거 같아. 내 적성에 딱 맞는 것 같아. 다른 선생님들도 좋고, 애들도 착해.” 혜연이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은은 졸업을 하자마자 학원가로 뛰어들었다. 오랫동안 했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세환이 소개시켜준 고등학생 영어 과외를 하면서, 나은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았다. 교육 대학원을 진학하려고 하니 이것저것 문제가 많아서, 나은은 학원 강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은과 다르게 혜연은 큰 외국 계열의 회사에 입사를 했다. 아직 정식 입사는 아니었고, 통번역 대학원을 다니면서 임시직을 있는 것이었지만 그 일이 혜연에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인혜야, 넌?” “나야, 뭐. 솔직히 힘들 건 없잖아. 아버지 회사니까.” “하긴. 그래도 너 정식 입사한 거잖아. 면접까지 봐서!” “응. 회사 사람들도 아직 아버지 딸인 거 몰라. 다만, 아버지 일하는 거 늘 봐와서 별로 낯설지 않다는 거지.” “아, 그렇구나.” 인혜는 졸업 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로 들어갔다. 낙하산이라는 말이 싫어서 정식으로 면접을 보면서 입사하였지만, 그래도 자신 스스로는 아버지의 회사에 들어간 것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혜는 친구들과 있을 때에도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는 편이었다. 나은은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강사 생활에 지칠 때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잘 맞지 않아서 함께 볼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늘 아쉬웠다. 나은은 그동안 친구들과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마구 쏟아 내었다. 자주 전화를 하기는 하였지만, 전화로 다 할 수 없었던 많은 말들을 수도 없이 나누었다. “아, 도형이는 이제 제대 얼마 안 남았지?” “응. 이제 나도 꽃신 될 날이 얼마 안 남았어.” “너도 참 정말 대단하다.” 나은은 대단하다는 눈으로 혜연을 보았다. 혜연의 남자친구인 도형은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혜연을 두고 입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남들보다 늦게 군대를 갔지만, 혜연은 그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나은은 몸이 멀어져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기다릴 수 있는 혜연이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이제 도형의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혜연의 표정이 밝았다. “근데, 나은이 너는? 오빠는 바빠?” “성준오빠? 오빠도 바쁘지, 뭐. 꾸준히 바쁜 모양이야.” “그럼 너넨 만날 시간도 별로 없겠다.” “조금씩 시간 내서 봐야지. 어쩔 수 없잖아. 둘 다 직장인이니까.” 나은은 인혜의 물음에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나은은 성준과 만나지 않은지 제법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연락을 하긴 하지만, 서로의 일이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항상 아쉬웠다. 나은은 문득 나온 성준에 대한 이야기에 성준이 보고 싶었다. 성준은 대학을 졸업하고 아동 심리 치료사로 일했다. 특히나 성준이 있는 병원이 심리 치료로 유명한 병원이어서 그런지 성준은 항상 나은보다 바빴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항상 나은이 더 바빠서 성준이 나은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졸업을 하고 서로 직장을 다니면서는 나은이 성준을 찾아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은이 그를 찾아갈 때마다 성준은 미안한 표정으로 나은을 꼭 안아주었다. 피곤한 몸으로 그를 찾아가서도 자신을 안아주는 성준의 품에서 그의 미안함과 애정이 느껴져서 나은은 항상 기뻤다. “우리 이제 나갈까? 간만에 같이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자.” “그래, 그러자.” 나은은 혜연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은은 친구들과 함께 요즘 인기가 많은 멜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그 자체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항상 시간이 부족해서 나은과 성준은 차에서 영화를 보곤 했었다. 나은은 성준과 함께 조용한 차 안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그럴 때면 왠지 이 세상에 둘만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참, 나 오늘 저녁에는 오빠랑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에? 뭐야? 우리 랑만 약속 있는 게 아니었어?” “미안해. 오늘 아니면 오빠랑 언제 시간이 맞을지 몰라서. 한 여섯시쯤에 보기로 했으니까, 그 전까지 재밌게 놀자.” “에이, 뭐야. 어쩔 수 없지.” 나은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은은 셋이서 만나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인데 끝까지 함께 있지 못하고 성준을 만나러 가는 것이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오랜만에 성준과 시간이 맞았는데, 그 귀중한 시간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은은 일찍 친구들과 헤어지는 대신에 친구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로 했다. 나은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수다스럽게 이야기도 하고, 슬픈 멜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몇 방울 흘리기도 하고, 백화점과 지하상가를 오가며 쇼핑을 하면서 서로 스타일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나은은 오랜만에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학원에서 일을 하면서 고등학생들이 여간 부러웠던 것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고등학생이 너무 부러워 보였다. 곧 그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우연히 성준을 만난 자신처럼 꿈에 그리던 사람을 만나서 예쁘게 연애도 하고, 이런저런 모임도 가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시험기간이 되면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이들이 부러웠다. 졸업한지 고작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나은은 벌써 학생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 오늘 진짜 너무 재밌었어!” “에이, 진짜로 가는 거야?” “미안해. 나도 더 있고 싶은데, 오늘 오빠가 바에서 공연 한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야해.” “아쉽다. 그럼 다음에 또 시간 내서 보자.” “응. 꼭 그러자. 나중에 전화할게, 미안해!” 나은은 친구들에게 울상을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뒤돌아서서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손목에 찬 시계를 반복적으로 쳐다보았다. 성준이 바에서 기타 공연을 한다고 했던 시간이 여섯시 반이었으니, 차가 막히지 않는다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은이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타야할 버스가 곧장 나은의 앞에 섰다. 친구들과의 약속장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라서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은은 버스에 올라타서는 핸드폰을 꺼내어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몇 번의 통화음이 흐르고 이내 성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은 성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아침, 약속 장소로 나가기 직전에 듣고 다시 듣는 목소리였음에도 나은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 어디야? 나 지금 오빠가 말한 바로 가고 있어.” -그래? 난 먼저 와서 준비하고 있어. 아마 공연 전에는 따로 보기 힘들 것 같은데, 어쩌지. “괜찮아. 나도 바에서 오빠 공연보고 있지, 뭐. 여섯시 반에 시작 하는 거 맞지?” -응. 그럼 공연 끝나고 바로 밖으로 나갈게. “응. 그럼 나중에 봐.” 나은은 짧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은은 성준에게 줄곧 존댓말을 해오다가 올 여름에 들어서 겨우 반말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어색하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더욱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은은 핸드폰을 핸드백 속에 넣고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인 아름답게만 보였다. 나은은 버스에서 내려 성준이 말했던 바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바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성준은 가끔씩 이렇게 바에서 통기타 공연을 하고는 했다. 주로 대학 후배였던 지수가 만들어주는 자리였다. 나은은 대학시절부터 기타를 좋아하고, 잘 연주하던 성준이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기타를 치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기타를 칠 때의 성준은 더욱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서 더욱 좋았다. “조금 달콤한 칵테일로 한 잔 주실래요?” 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나은은 그렇게 말하고 바텐더가 추천해주는 칵테일을 아무거나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서 시계를 보았다. 이제 곧 성준이 공연을 할 시간이었다. 나은은 기대감에 차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성준인데다, 나은이 좋아하는 기타를 치는 모습이니 더욱 그랬다. 나은은 손에 들려있는 달콤한 칵테일을 한 모금 삼키었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나은의 목을 적시었다. “안녕하세요, 박성준입니다.” 나은은 성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작은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대라고 하기가 무색할 만큼 작은 무대 위에 성준을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성준은 기타를 안고 무대 위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은은 성준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성준은 간단한 인사말을 하면서 주위를 돌려 나은을 찾는 듯했다. 나은은 가볍게 손을 올려 자신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내 성준이 나은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은 쪽을 보며 살짝 웃었다. “그럼 비록 실력은 멋지지 않지만, 몇 곡 연주해보도록 할게요. 첫 곡은 다들 아시는 곡이실 거예요.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으로 시작해 볼게요.” 연주를 시작한다는 성준의 말에 작은 박수가 나왔다. 그리고 성준은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이라는 곡은 성준이 나은에게도 몇 번이나 연주를 해주었던 곡이라 익숙했다. 바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준의 통기타 간주에 맞추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은도 그 박자에 따라서 작은 소리로 박수를 쳤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성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 안에 가득 퍼졌다. 몇 번씩이고 들었던 곡임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나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비록 성준이 연주해준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은 이 곡이 아니지만, 나은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곡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성준은 연주를 하면서 간간히 나은과 눈을 맞추었다. 나은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으로 설레는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초록의 슬픈 노래로 내 작은 가슴속에 이렇게 남아 반짝이던 너의 예쁜 눈망울에 수많은 별이 되어 영원토록 빛나고 싶어.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성준은 솔로곡이 아님에도 이 곡을 혼자서 훌륭히 소화하였다. 성준이 첫 곡을 마치자 박수 소리가 바 안을 가득 메웠다. 나은은 환하게 웃으면서 큰 박수로 성준을 응원했다. 성준은 뒤를 이어 세 곡 정도 더 기타 연주를 하였다. 나은은 그가 연주를 하는 모습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성준과 눈이 마주칠 때면 따뜻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성준과 같은 공간에서 그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으로도 기뻤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일주일 남짓한 그 시간들을 보상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성준은 마지막 곡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곡은 제가 가장 좋아하기도 한 곡이에요. 이 곡은 저를 도와줄 분을 한 분 모시려고 합니다. 제 아끼는 동생인 송지수 양인데요. 박수로 맞아주세요.” 나은은 성준의 소개에 무대로 올라오는 지수를 쳐다보았다. 두 달여 만에 보는 지수는 여전히 예쁘고, 세련되어 보였다. 나은은 성준이 지수와 함께 공연을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나은은 지수를 대학시절에 성준의 친한 동생으로 소개 받았다. 성준의 여자 친구라고 지수를 오해해 불편하게 생각했던 기억 때문에 나은은 지수에게 더 살갑게 굴었다. 도도하고, 새침할 것만 같은 지수도 나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나은은 항상 성준을 도와주고, 가끔은 이렇게 공연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지수에게 항상 고마웠다. 무대 위로 올라온 지수는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기타를 바로 잡았다. 바 안을 둘러보던 지수와 눈이 마주치자, 나은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지수 역시 살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이내 성준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신호를 보내며 공연을 시작했다. “어? 이 노래네.” 나은은 지수와 성준이 함께 연주하는 곡의 간주를 듣자마자 작게 읊조렸다. 나은은 익숙한 간주를 듣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성준이 연주해주었던 곡 중, 나은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성준 역시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소개를 했다는 사실에 나은은 기분이 좋았다. 익숙한 간주로 시작되는 곡, 성준이 나은에게 가장 먼저 불러주었던 곡인 Falling Slowly였다. “오랜만이다.” 부드러운 성준의 목소리에 지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곡이었다. 성준의 목소리로 듣는 이 곡은 나은에게 원곡보다 훨씬 더 좋게 느껴졌다. 다만 성준의 목소리 위에 얹어진 지수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괜히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곡까지 끝나고, 성준과 지수는 인사를 한 후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바 안에는 박수소리가 가득했다.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자신과 마주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은은 공연의 여운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나은의 볼을 스쳤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한기가 더욱 느껴졌다. 세상을 덮은 하얀 눈은 녹을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은은 자신의 옆인 난간에 쌓인 하얀 눈을 손으로 만져보려 하다가 뼛속까지 시릴 것 같은 기분에 이내 손을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봄을 좋아하는 나은에게 겨울은 일 년 중 가장 힘든 계절이었다. 새하얀 눈은 좋았지만, 차가운 추위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은아!” 나은이 차디찬 바람을 막기 위해 두꺼운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리고 있을 때, 성준이 나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본 나은은 환하게 웃으면서 성준을 맞이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넓게 벌려 성준에게 꼭 안기었다. 나은은 성준의 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지난 며칠 간, 나은은 이렇게 성준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성준과 오랜 전화 통화를 하곤 했다. 침대에 누워서 성준의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성준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참 좋았다. “오빠. 오늘도 진짜 멋있었어! 오랜만에 기타 치는 거 보니까, 진짜 좋다.” “그래? 고마워.” 나은은 성준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렇게 말하였다. 성준은 나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잠시 밖에 나와 있었을 뿐인데도 날이 추워서 나은의 손은 어느덧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온기에 손을 녹이면서 환하게 웃었다. Spring Spring. 13 나은은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성준의 손이 좋았다. 자신보다 한 마디나 더 큰 성준의 손은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손을 잡고 있으면, 나은은 자신이 성준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이 실감이 났다. “선배!” 성준의 뒤 쪽에서 들리는 지수의 목소리에 나은과 성준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지수는 양 어깨에 기타를 메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고, 하나는 성준의 것인 것 같았다. 성준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지수를 보았다. 나은은 지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수 역시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언니, 안녕하세요! 선배, 기타를 놓고 가면 어떡해요!” “아, 맞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깜빡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쟁 끝났다고 총 버리고 오는 거예요?” “미안해. 무거울 텐데 두 개나 갖고 오느라 힘들었겠다. 고마워.”“괜찮아요. 남는 게 힘인데요, 뭐.” 지수와 성준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준은 지수에게서 자신의 기타를 건네받았다. 나은은 지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세련된 지수의 매력이 나은은 내심 부러웠다. 나은은 자신에게서 풍기는 여리고, 여성스러운 이미지가 가끔은 지루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씩 변해보려고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수야, 밥은 먹었어?” “아니요. 학교에서 바로 오느라 밥 못 먹었어요. 배고파 죽겠어요.” “그럼 우리랑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어서 가자. 나도 되게 배고파.” 나은은 지수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지수는 배를 부여잡고 모션까지 취하며 배가 고프다고 울상을 지었다. 나은과 성준, 지수는 바에서 멀지 않은 일본식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각자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면서 오랜만에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언제 둘이 연습한 거야? 되게 잘 맞던데.” “아, 언니. 따로 연습은 안했어요. 오빠 대학 다닐 때, 같이 공연하곤 했었잖아요. 그때 그 노래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별로 연습할 필요 없었어요.” “아, 그렇구나.” “언니, 어쨌든 진짜 오랜만이에요. 더 예뻐지신 것 같은데요?” “에이, 그런 입에 발린 말은 됐어. 넌 어떻게 지내? 4학년이라 요새 정신없지?” “네, 맞아요. 취업도 잘 안 되는 시기고 해서 정신 하나도 없어요.” 나은은 지수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성준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살짝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나은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준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이내 다시 지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예전에는 도도하고, 새침하게만 보이던 지수였는데, 가까워지고 나니 귀엽고, 애교도 많았다. 그래서 나은은 가끔 졸업 후에도 지수와 가까이 지내는 성준이 불안하기도 하였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이내 테이블 위는 주문한 음식으로 채워졌다. 나은은 잘 먹겠습니다, 라는 한 마디 말과 함께 수저를 들었다. 나은은 오랜만에 성준과 함께하는 저녁이 기분 좋았다. 오늘 하루 종일 한동안 못 만나고 있었던 친구들도 만나고, 오랜만에 지수도 만나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성준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은에게 오늘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짧게만 느껴졌다. “아, 지수야. 요새 동아리는 어때? 학교 갈 때 한 번씩 들러봤어?” “요즘은 바빠서 잘 들르지는 못하는데, 잘 돌아가는 것 같아요. 정현이가 이번에 동아리 장 맡았잖아요. 애가 워낙 남자인데도 꼼꼼한 편이라서 잘 하는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다. 소연이랑 주훈이랑은 동아리 활동 계속 잘 해? 예전엔 모일 때도 잘 안 오고 그랬는데.” “걔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새 진짜 잘 챙겨서 와요. 실력도 많이 늘어서 이번에 공연할 때 두 곡이나 한다던데요?” “정말? 난 진짜 믿어지지가 않는다. 걔네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성준은 환하게 웃으면서 지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에 끼어들 수 없는 나은은 말없이 돈가스를 입 안으로 넣었다. 지수와 성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은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동아리 이야기에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은은 힐끗 성준의 표정을 살피었다. 동아리 이야기를 하면서 성준은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자신이 장으로 있었던 동아리였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많이 가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끝낸 그들은 가게 밖으로 나왔다. 지수는 일이 있어서 집으로 가야겠다며 인사를 했다. 버스정류장까지라도 데려다 주겠다는 나은의 말을 뒤로 한 채, 지수는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나은은 지수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금방 헤어지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다. “나은아, 춥지? 어서 차로 가자.” “아, 응!” 성준이 멍하니 서있는 나은을 보면서 말했다. 나은은 성준을 올려다보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살짝 웃으면서 나은의 손을 꼭 잡았다. 나은의 손은 추운 날씨에 그새 차가워져 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차가 있는 쪽으로 걸으면서 괜히 후, 하고 불어 새하얀 입김을 내어 보았다. 추운 것을 싫어해서 겨울을 싫어하는 나은이었지만, 새하얀 눈과 새하얀 입김은 겨울 중에서 나은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오빠, 기타 무겁지 않아? 차에 두고 밥 먹으러 갈 걸 그랬네.” “아냐. 별로 안 무거워. 오늘 친구들 만난다고 했었지? 뭐했어?” “그냥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그랬어. 오빠는? 병원에 있다가 온 거야?” “응. 어제 하다가 다 못 한 일이 있어서 마저 끝내고 바로 왔어.” “에이. 그 놈의 병원 사람 잡겠네!” “먹성 좋은 여자 친구 맛있는 거 많이 먹이려면 잡혀 살아야지!” “에? 오빠 딱 그랬지? 맛있는 거 안 사주기만 해봐. 만날 맛있는 거, 비싼 거 먹으러 가자고 할 거야!” 나은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성준은 그런 나은이 귀여운 듯 쳐다보았다. 나은은 바 근처에 세워두었던 성준의 차 앞좌석에 탔다. 성준은 메고 있던 기타를 뒷좌석에 정리해두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성준은 차 시동을 켜자마자 차 안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히터를 틀었다. 차에 열기가 없어 차가운 바람이 먼저 나왔다. “오빠, 근데 우리 어디가?” 나은은 안전벨트를 매면서 성준에게 물었다. 성준은 운전대를 잡고서는 음, 하는 긴 소리를 내더니 나은 쪽을 쳐다보았다. 나은은 동그란 눈으로 성준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니 괜스레 웃음이 나서 나은은 웃음을 내뱉었다. 성준 역시 나은의 그런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갈까? 나은아, 가고 싶은 곳 있어?” “글쎄, 어디가지?” “그럼, 일단 출발하자. 가면서 어디 갈지 생각해 보자.” 나은은 성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나은은 창밖의 온통 하얀 세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차 안에 히터가 나와 따뜻한 바람이 나은의 몸을 녹여주었다. 따뜻한 곳에서 보는 새하얀 눈이 좋았다. 나은은 눈이 따뜻한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 전화 온다. 나은아, 이어폰 좀 꽂아줄래?” “응? 응, 알았어.” 나은은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다시 성준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차 앞 쪽에 있던 이어폰을 성준의 귀에 조심스럽게 꽂아주었다. 성준은 나은에게 짧게 고마워,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나은은 성준의 통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상대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성준의 대답으로 전화 내용을 이리저리 추리해보았다. 성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나은은 성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아, 정말요? 갑자기 그런 거예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성준은 전화를 끊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은은 걱정스런 눈으로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길가에 잠시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나은을 보았다. 나은은 성준의 표정을 보고는 대충 낌새를 챘다. 아무래도 성준이 일하는 병원에서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나은은 미안해하는 성준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빠, 일 생겼어?” “어? 응. 미안해서 어쩌지, 나은아.” “괜찮아. 일이 있으면 가봐야지. 급한 일이면 어서 가봐. 나 여기서 버스 오니까, 버스 타고 가도 괜찮아.” “아니야. 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냐, 오빠. 이 시간에 병원에서 전화할 정도면 급한 일이겠지. 미안해하지 말고 들어가 보세요.” 성준이 나은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나은은 도리어 성준을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은 역시 오랜만에 만난 성준과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자신 때문에 성준의 일을 방해하는 것도 싫었다. 나은은 계속해서 괜찮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성준은 미안함을 지우지 못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오빠, 어서 들어가 봐. 전화 할게. 응?” “알았어. 미안해, 나은아.” 성준은 한껏 쳐진 목소리로 나은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나은을 한 번 꼭 안아주었다. 나은은 성준의 품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달콤한 향이 성준에게서 퍼져 나왔다. 성준의 생일 날, 나은이 그에게 선물해준 향수의 향기였다. 나은은 살짝 웃으면서 성준의 품에서 나왔다. 그의 포옹에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기에 나은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 난 집에 들어갈게. 밤에 전화할 거니까, 그땐 꼭 받아. 알았지?” “응. 조심히 들어가. 집까지라도 데려다 줘야 하는데 미안해.” “에이,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럼 나, 간다! 오빠, 안녕!” 나은은 성준의 차에서 내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차에서 내리려는 성준을 향해 나은은 괜찮다며 만류했다. 그리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성준을 뒤로하고 얼른 몸을 돌렸다. 괜히 시간을 끌면서 있으면 성준이 더 미안해 할 것만 같아서였다. 나은은 길을 건너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성준의 차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며 말을 하기는 하였지만, 아쉽고 씁쓸한 것이 사실이었다. “어, 버스 왔다.” 나은은 금세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뒷좌석에 앉아서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벌써 아홉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성준과 헤어지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오늘 하루를 보고 싶던 사람들과 함께 보내어 나은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은은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낸 성준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은은 대학시절에 데이트를 하다가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미안함을 표시하며 헤어지던 자신의 모습이 꼭 그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삼십 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간 후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이렇게 홀로 집에 돌아올 때마다 나은은 성준이 데려다 주던 때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사소한 장난 하나하나 까지도 생각이 나서 괜스레 웃음이 났다. 서로 바빠지면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그리움이 커져가고,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은은 성준과 자신이 만나기 시작한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성준과 함께 벌써 두 번의 봄을 넘기고 또 다시 새로운 봄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함께한 시간이 짧기만 한 것 같은데, 벌써 그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게 느껴졌다. “나은아!” 나은이 성준을 생각하며 멍하니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은의 이름을 불렀다. 나은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은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세환이었다. 집에 있다가 잠시 나온 모양인지 아주 간편한 복장이었다. “오빠! 어디 가는 길이야?” “잠깐 슈퍼 좀 들르려고. 넌 이제 들어오는 모양인가보네?” 나은은 세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환은 작년부터 나은의 집과 멀지 않은 원룸으로 이사를 왔다. 졸업을 하고 입사하게 된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려다 보니 나은의 집과 아주 가까운 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세환이 이사를 온 후로 나은과 세환은 이렇게 종종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오빠는 보아하니 오늘 하루 종일 방콕 한 모양새인데?” “아, 그게 그렇게 티 났나? 여자 친구도 없는데, 집에서 놀아야지 나가서 뭐해.” “에이, 오빠 집에 가면 총각냄새 풀풀 풍기겠다!” 나은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세환은 두 팔을 흔들어대며 격하게 부인했다. 나은은 그런 세환의 모습이 왠지 우스워 보여 크게 웃었다. 언제나 세환은 나은에게 크게 웃음을 주었다. 나은은 세환과 함께 슈퍼에 들렀다가 함께 들어가기로 하였다. 슈퍼로 들어가며 보니 세환은 이 추운 날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에? 오빠. 발 안 시려? 이 추운 날에 양말도 안 신고 뭐해.” “어차피 잠깐 나오는 건데, 뭐.” “그런 거 있잖아. 수면양말! 그런 거라도 신고 다녀. 그거 진짜 따뜻하다?” “네가 사주면 한 번 생각해 볼게.” “하여간, 뺀질거리는 건 변함이 없다니까!” 나은은 세환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환은 씩 웃고는 몇 가지 과자와 맥주 캔을 샀다. 집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며 간식으로 먹을 요량인 것 같았다. 나은은 그런 세환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빤 백수도 아닌데, 참 백수 같아 보여.” “그거 욕이지?” “당연히 욕이지! 회사 나갈 땐 참 말끔하게 가면서, 이럴 때보면 백수도 무슨 이런 백수가 없어. 고시에 네 번이나 낙방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백수 같아.” “와, 심하다! 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 정도야! 그러니까 평소에도 신경 좀 쓰란 말이야.”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무슨 잔소리가 우리 엄마보다 심해.” “다 오빠 잘 되라고 하는 말이지!” 나은은 세환을 구박하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은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해도 나쁘게 듣지 않고, 장난스럽게 되받아치는 세환이 재밌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까지만 해도 나은은 세환에게 얇은 벽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세환이 소개시켜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 더 많이 가까워지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누구보다 친한 오빠, 동생으로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나은아, 그럼 나 들어가 볼게. 추운데 어서 들어가.” “응. 다음에 또 봐!” “그래. 몇 걸음 안 되지만 조심히 들어가!” 나은은 세환에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세환은 아파트 옆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봉지를 흔들며 슬리퍼를 끌고 걷는 세환의 모습이 영락없는 백수의 모습 같아 보여서, 나은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Spring Spring. 14 갑작스런 전화로 병원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온 성준은 지쳐서 곧장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입원해서 성준에게 심리치료를 받던 한 아동이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인다는 말에 성준은 병원으로 가야만 했었다. 그는 누운 자세에서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성준은 오랜만에 하는 나은과의 데이트를 이런 식으로 망쳐버린 것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일이 바빠서 예전만큼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이 미안한데, 이렇게 데이트마저도 망쳐버린 것이 정말로 미안했다. 성준은 나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다. 한참을 코트 주머니를 뒤지는데 핸드폰이 나오질 않았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어디 간 거야.” 성준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보이지 않자 손길이 다급해졌다. 옷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도 핸드폰이 나오지 않자, 그는 자신이 가져온 가방까지 뒤졌다. 가방 속 내용물을 모두 꺼내고 뒤져봐도 핸드폰이 나오지 않았다. 혼자 사는 집이라 집 전화를 따로 두고 있지도 않아서 핸드폰이 울리는지 확인해 볼 길도 없었다. 성준은 혹시 차에 두고 온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차키를 들고 집밖으로 갔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서 주차장으로 간 그는 곧장 차문을 열고 운전석 주변을 확인했다. “어? 왜 없지.” 성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차 안을 샅샅이 찾았다. 운전석 바닥도 찾아보고 혹시나 사이에 끼인 것은 아닌지 꼼꼼히 찾아봤지만, 성준은 핸드폰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쓴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차 안에서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뒤 성준은 따로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곧장 병원으로 갔고,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성준은 누군가에게 핸드폰이라도 빌려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주차장 안에는 성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운전석에 타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에도, 옷에도 없다면 병원에 핸드폰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얼른 핸드폰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나은이 자신에게 전화를 했을 줄도 모를 일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생겼을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도리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삼십 분이 넘게 걸렸다. 성준은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잠시 걱정을 하다가 병원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차를 돌렸다. 성준의 차는 나은의 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성준은 걱정스런 말투로 중얼거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보통 나은은 학원 강의를 준비하느라 새벽 한, 두시가 되어서 잠이 들기는 하였다. 나은이 잠이 들지 않더라도 나은을 만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임은 분명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성준은 나은의 집 쪽으로 향하고 있는 차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준의 집에서 나은의 집까지는 차를 타고 가면 십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성준은 나은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서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그는 시린 바람에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나은이 사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나은의 집, 불이 깜깜히 꺼져있는 것이 아무래도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 자, 나은아.” 성준은 나은의 집을 올려다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아파트 앞 쪽 슈퍼에 있는 공중전화에 백 원짜리 동전을 하나 넣고는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 음이 흐른 뒤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여자의 목소리로 닿았다.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출근을 할 것이기에 핸드폰이 회사에 있다면 굳이 찾으러 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로 다시 돌아갈까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내 다시 공중전화 앞에 섰다. 그리고 새로 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는 자신의 번호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나은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면서 괜히 자신이 나은의 잠을 깨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었다.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음이 흐리고 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도 잠이 든 목소리가 아니었다. 성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나은아. 나야.” -아, 오빠? 핸드폰으로 계속 전화 했는데 안 받더니… “미안해. 나 핸드폰 잃어버린 것 같아. 아무리 찾아도 없네. 그렇지 않아도 네가 걱정할까봐 내가 도리어 걱정되었는데.” -무슨 일 있나 했어. 그럼 지금 어디야? 아직 병원이야? “아니. 집에 들어왔어. 집 앞에 공중전화에서 전화하는 거야.” -그렇구나. 오빠, 많이 피곤하지? “아니, 괜찮아. 아직까지 안자고 뭐해?” 성준은 나은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과 통화를 하는데 삐,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하나 더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전화가 끊기지 않게 재빨리 동전을 넣었다. -그냥 내일 강의할 거 준비 좀 하고 있었어. 이제 자려고. 오빠도 피곤할 텐데 어서 자. 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응, 알았어. 너도 어서 자. 핸드폰 찾으면 내일 다시 전화 할게.” -응. 오빠, 잘 자고 좋은 꿈 꿔. “너도. 잘 자.” 성준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은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성준에게 나은은 그런 존재였다. 하루의 시작과 마지막을 목소리로나마 함께 하는, 언제나 자신의 삶에 비타민이 되는 그런 존재였다. 이제는 일상 같은 전화 통화였지만, 그는 나은과 통화할 때 마음이 가장 편해지는 것 같았다. 성준은 다시 한 번 나은의 집을 올려다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벌써 시간은 새벽 한 시 반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피곤하네. 얼른 가서 자야겠다.” 성준은 차를 다시 자신의 집 쪽으로 몰았다. 오늘 하루 동안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음주 운전, 졸음운전은 절대로 하지 말라던 나은의 잔소리가 왠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서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2년 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성준의 삶 곳곳에 나은이 스며들어 있었다. 나은이 함께하지 않은 그의 공간, 그의 시간은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나은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성준의 옆에 상주하고 있었다. 성준은 그러한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나은과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사소한 하나하나까지 나은과 함께 하는 기분이 들어서 행복했다. 성준은 집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계단을 올랐다. 회사에 다니면서부터 혼자 살기 시작한 성준은 집으로 들어갈 때가 가장 외로웠다. 집으로 들어가면 깜깜한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그를 가장 외롭게 했다. 그러면서 나은과 함께 살면 어떤 기분일까, 라는 상상을 가끔 하기도 했다. 일에 지쳐 집으로 돌아오면 나은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처음에 그러했듯 다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의 긴 하루는 이렇게 끝이 났다. 새벽같이 일어난 성준은 늦지 않게 병원에 도착했다. 자신의 생각처럼 핸드폰의 병원, 자신의 책상 위에 있었다. 언제 꺼냈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는데 용케 책상 위에 핸드폰이 올려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영영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핸드폰을 열었다. 밤새 전화와 알람으로 배터리가 소진되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부재중 통화 7통, 문자는 3통. 자신이 공중전화를 통해서 한 전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은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는 부재중 통화와 남겨진 문자만으로도 연락이 되지 않는 자신을 나은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걱정했던 나은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서 성준은 괜히 웃음이 났다. 성준은 나은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이내 핸드폰을 닫았다. 오후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학원이기에 보통 나은은 늦게까지 잠을 자곤 했다. 성준은 나은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전화를 하는 대신에 핸드폰을 찾았다는 짧은 문자를 남기고서 배터리를 새로 갈고 핸드폰을 책상 한 쪽에 두었다. “아, 이제 일 시작해 볼까.” 성준은 책상 한 쪽에 쌓아두었던 서류를 꺼내어 일을 시작했다. 나은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꾸만 핸드폰 쪽으로 향했다. 이제는 무던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그는 나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성준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왠지 우스워 살짝 웃음을 짓고는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Spring Spring. 나은은 강의를 모두 마치고 기지개를 키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있는 탁상시계를 보니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늘의 강의는 이걸로 모두 끝이었다. 중, 고등학생을 맡아 가르치는 나은이었기에 이 시간에 강의를 마치는 오늘 같은 날은 일찍 마치는 축에 속했다. 가끔씩 열의에 넘치는 학생들이 질문이라도 하러오면 나은의 퇴근 시간은 그만큼 더 늦어졌다. “퇴근하겠습니다!” 나은은 내일 강의를 위한 책 몇 권과 프린트들을 손에 들고는 다른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였다. 아직 강의가 남은 선생님들은 퇴근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나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나은은 옆 자리에 앉아 친하게 지내던 수학 선생님과 함께 학원을 빠져나왔다.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들어가세요!” “네, 선생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은은 방향이 다른 선생님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추운 날씨라 그런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 왠지 길게만 느껴졌다. 나은은 새하얀 입김을 내면서 버스 정류장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지난 새벽 잠깐 눈이 내려, 그 눈이 어는 바람에 바닥이 많이 미끄러웠다. 나은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히 땅을 보며 걸었다. 그때 빵, 하는 차의 클락션 소리가 들려 나은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오빠!” 나은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다름 아닌 성준이 있었다. 나은은 생각지도 못한 성준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쪽으로 걸어갔다. 성준은 차에서 내려서 나은이 차에 탈 수 있도록 도왔다. 추운 날씨에 버스를 기다릴 생각을 하면서 걱정을 하던 차에 성준이 나타나자 나은은 기분이 좋았다. 말도 하지 않고 찾아온 성준의 깜짝 방문에 놀라기도 했다. “오빠, 오늘 일 일찍 마쳤어? 여기까지 다 오고 피곤하지 않아?” “하나도 안 피곤해. 너야 말로 피곤이 가득한 눈인데?” “응? 내 눈이 뭐! 뭐!” 나은은 괜히 동그랗게 눈을 떠 보이며 성준에게 말했다. 나은은 성준이 이렇게 찾아온 것이 좋아서 얼굴이 싱글벙글 이었다. 나은은 예고하지 않고 가끔 성준이 이렇게 찾아올 때, 성준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지친 하루에 기대하지 않았던 그의 방문은 나은을 언제나 힘이 나게 했다. “자, 그럼 출발 합니다!” “응. 출발!” 성준은 나은의 안전벨트를 매어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차에서는 따뜻한 히터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나은은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무릎 위에 올려다 놓았다. 그리고는 편하게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버스를 타고 갔으면 사람들 사이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집으로 가야했을 텐데, 이렇게 편하게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성준에게 고마웠다. 창밖의 세상은 많은 불빛들로 가득했다. 크리스마스가 이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트리와 예쁜 전구장식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은은 반짝이는 전구 장식을 쳐다보다가 문득 성준의 차가 집 쪽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준을 보았다. 나은의 시선을 느꼈는지, 성준은 나은이 묻기 전에 먼저 대답을 해버렸다. “이 근처에 24시간 하는 카페 중에 괜찮은 곳이 있대. 잠시 들러서 따뜻한 거라도 마시고 갈까?” “응, 좋지. 그렇지 않아도 따뜻한 거 먹고 싶었어.” “다 왔다. 주차하고 올게. 잠시 여기서 기다릴래?” “응, 알았어.” 나은은 차에서 내려서 성준이 말했던 카페를 쳐다보았다. 큰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전체적으로 커피색으로 인테리어 된 작은 카페였다. 이렇게 조그마한 카페가 24시간 운영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은이 밖에서 카페를 구경하고 있을 때, 주차를 끝낸 성준이 나은의 옆으로 다가왔다. “지수가 가르쳐 준 곳이야.” “어? 지수가?” “응. 너랑 가면 좋을 거라면서 소개해 주더라고.” “아, 그렇구나.” 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나은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밖과 다른 온도에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준과 나은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나은은 녹차라떼를, 성준은 따뜻한 코코아를 주문했다. 잠시 후 자신 앞에 놓인 머그컵을 양 손으로 감싸 쥔 나은은 녹차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살짝 웃었다. “맛있다!” “맛있어?” “응. 되게 괜찮아. 여기 진짜 좋다. 분위기도 괜찮고, 맛도 좋고.” “그렇지? 지수가 소개시켜 준 곳은 늘 괜찮은 것 같아.” “그러게. 지수는 이런 곳을 다 어떻게 안대.” 나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해 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이렇게 좋은 곳을 알지 못하는데, 늘 지수가 먼저 알아서 성준에게 알려주었다. 나은은 이런 곳을 잘 알고 있는 지수가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했다. 지수의 말을 언제나 신뢰하는 성준이 조금은 얄밉기도 했다. 나은은 녹차라떼를 다시 한 모금 삼키었다. 부드러운 우유와 따뜻한 녹차향이 목을 넘어가면서 괜히 삐뚤어진 마음을 녹이게 했다. “이렇게 집에 가면 잠이 잘 올 것 같아.” 나은은 성준을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따뜻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졌다. 또 며칠 간 못 보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성준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도 기분이 좋았고, 둘이 함께 이렇게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때, 하늘에서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는 눈이 온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은은 창밖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성준 역시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눈 정말 예쁘다. 그렇지, 나은아?” “응! 매번 쌓여있는 것만 봤는데, 이렇게 내리는 거 보니까 진짜 좋다.” “눈 오는 거 조금만 보다가 나가자. 벌써 시간이 꽤 됐어.” 나은은 성준의 말에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창밖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성준과 나은은 마주보고 함께 있었다. 나은은 지금 이 순간 시간이 멈추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허망한 생각이 나은의 머릿속을 채웠다. Spring Spring. 15 성준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은은 피곤한 눈이 자꾸만 감기려는 것을 느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두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나은은 오늘도 집에 가서 해야 할 강의 준비를 생각하며 억지로 눈을 뜨려고 애썼다. 그때 나은의 핸드백 속에 있던 핸드폰이 큰 진동을 울렸다. 나은은 핸드백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보았다. 늦은 시간에 온 전화라 엄마의 전화인가 했는데 세환의 전화였다. 나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으, 춥다. 나은아, 어디야? “나? 이제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 왜?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라, 나도 좀 전에 집에 들어왔는데 오늘 갑자기 우리 집에 가스가 안 나와서. 혹시 집에 휴대용 가스레인지 있으면 좀 빌릴 수 있을까, 하고. “아, 정말? 응, 있어. 금방 집에 들어가니까 빌려 줄게. 근데, 보일러는 나와?” -아니. 보일러는 안 나오는데 전기장판 있으니까 괜찮아.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한 오 분 정도?” -그럼 좀 있다가 너희 집 앞에 가 있을게. “응, 알았어. 나중에 봐.” 나은은 전화를 끊고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세환과 나은은 영락없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서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빌리고, 빌려 주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성준은 나중에 보자는 나은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나은을 보았다. 이 늦은 밤에 누구를 만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누구야? 인혜?” “아니. 세환오빠. 집에 가스가 안 나온다고 나한테 휴대용 가스레인지 있으면 좀 빌려달라고 하네.” “아, 그렇구나. 세환이는 잘 지내? 못 본지 한참 됐네.” “응. 회사 다니느라 세환오빠도 평일엔 되게 바쁜 모양이야.” 나은이 세환을 성준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 준 것은 일 년쯤 전이었다. 인혜나 혜연이만큼 세환이 편해졌을 때, 성준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지수와 나은만큼이나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가끔 만나면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성준과 세환은 친해졌었다. 둘의 성격이 너무 다른 편이라서 잘 친해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성준의 차는 어느새 나은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은의 집 앞에 주차를 하고서 성준은 나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나은은 세환이 도착했는지 고개를 돌려보니, 아파트 입구 쪽에서 세환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은과 성준을 발견했는지 세환의 걸음걸이가 조금 빨라졌다. “어? 형! 안녕하세요. 같이 있었나 봐요?” “응. 잠시 어디 좀 갔다가 들어오는 길이야. 오랜 만이야.” “그러게요. 아, 춥다. 형 요새 어때요? 병원에서 일한다면서요?” “응. 그냥 바쁘고 정신없지, 뭐. 너도 회사일 바쁘다고 들었는데.” 나은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살짝 웃고 있다가 세환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두 사람에게 잠시 이야기 하고 있으라고 하고는 얼른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와서는 곧장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찾았다. 늦은 밤인데도 나은의 엄마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오자마자 뭘 그렇게 찾아?” “아, 엄마. 휴대용 가스레인지 어디 있어? 요 옆에 사는 오빠가 가스가 안 나온다고 빌려 달라는데.” “가스레인지? 거기 싱크대 아래에 있을 거야.” “아, 여기 있다! 엄마, 나 잠시 이것만 갖다 주고 올게요.” “응. 어서 들어와. 밖에 춥다.”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스레인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성준과 세환을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세환은 오늘도 여전히 맨발에 슬리퍼차림이었다. 보일러도 안 나온다면서 그렇게 춥게 입고 다니는 세환이 왠지 한심해보였다. 나은은 일층에서 내려서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오빠. 여기 가스레인지. 아마 가스는 안에 들어 있을 거야.” “우와. 진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내일 아침도 굶고 회사 갈 뻔 했네.” “고마우면 다음에 밥이나 한 번 사.” “알았어! 나 먼저 들어갈게. 고마워. 형도 조심히 들어가요.” “응. 들어가!” 나은은 뒤를 돌아 멀어져가는 세환에게 손을 흔들었다.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집에서 지낼 세환이 왠지 걱정이 되었다. 나은은 흔들던 손을 내리고 성준을 보았다. 시간이 늦어서 성준도 많이 피곤해 보였다. “오빠. 얼른 들어가 봐. 피곤하겠다.” “응, 갈게. 잘 자고, 내일 너무 늦게 일어나진 말고.” “응. 알았어. 오빠도 잘 자.” 나은은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 두 팔을 벌렸다. 성준은 나은을 한 품에 꼭 안았다. 성준의 따뜻한 기운보다는 코트에서 뿜어 나오는 차가움이 먼저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성준의 달콤한 향기와 온기가 나은에게 퍼졌다. 성준은 나은을 품에서 놓아주고는 나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은은 가벼운 뽀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서 들어가, 오빠. 춥다.” “응. 너 먼저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알았어. 그럼 나 들어간다?” “응. 잘 자.” 나은은 손을 흔들면서 다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헤어지는 순간은 언제나 아쉬웠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다시 서로 일을 하러 나가야 했기에 헤어져야 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이렇게 잠시 동안 만나는 시간은 달콤하긴 했지만, 언제나 아쉬움을 남겼다. Spring Spring. 성준은 며칠 전 나은과 함께 작은 카페에 간 뒤로 며칠 동안 나은을 보지 못했다. 병원 일이 계속 바쁘거나, 자신이 바쁘지 않으면 나은이 밤이 늦어서야 일이 끝났다. 주말이나 되어야 나은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준은 오랜만에 일이 일찍 끝나 평소보다 훨씬 일찍 집으로 들어왔다. 늘 병원에서 밥을 사먹기 일쑤였는데, 성준은 오랜만에 집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간단한 야채들뿐이라서 볶음밥을 하기로 했다. 나은은 언제나 밖에서 밥을 사먹는 성준에게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런 나은의 목소리가 성준의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성준은 조금은 시들시들한 야채들을 냉장고에서 꺼내었다. 감자를 씻어 싹이 난 부분을 잘라내고, 양파의 뿌리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내었다. 당근도 깨끗이 씻어 작은 크기로 잘랐다. 요리의 요, 자도 몰랐던 성준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나은에게 배운 요리 중 하나였다. 나은은 바쁜 와중에도 가끔 주말에 성준의 집에 와서 맛있는 요리를 가르쳐 주곤 했다. 혼자 살면서 밥을 잘 챙겨 먹지 않는 것을 걱정해서 그에게 가르쳐 준 요리였다. “…기름은 조금만 두르라고 했던가.” 성준은 한 손에 식용유를 들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이내 기름을 많이 부으면 기름에 떡이 된 볶음밥을 먹게 된다던 나은의 잔소리를 떠올렸다. 성준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만 두르고 미리 잘라놓은 야채를 볶았다. 성준은 나은이 사 준 앞치마를 입고, 나은이 가르쳐 준 요리를 하며, 나은의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나은이 없으면 자신의 삶이 크게 삐걱거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완성한 볶음밥을 자그마한 상에 놓고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었다. 오랫동안 먹지 않아서 이미 김치가 많이 시큼해져 있었다. 성준은 티브이를 켜고 수저를 들었다. 이 시간에 집에 들어와 티브이를 보면서 밥을 해 먹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라서 익숙하지 않았다. 성준이 밥을 먹고 있을 때, 침대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울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보았다. 나은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응, 오빠. 뭐하고 있었어? “오늘 일찍 마쳐서 집에 들어와서 밥 먹고 있었어. 너는 밥 먹었어?” -아니. 나는 이제 방금 강의 마치고 다른 선생님들이랑 이제 먹으려고. “오늘은 몇 시에 마쳐?” -오늘? 아마 열두 시 넘어서야 마칠 것 같아. 예비 고3들 수업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요즘 정신이 없네. “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챙겨 먹어. 알았지?” -응, 알았어. 어? 원장 선생님이 부르신다. 나중에 또 전화할게! 성준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상 앞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평소에는 보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바빠서 티브이를 볼 시간이 없어서 예능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딱히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었다. 평소였으면 나은의 속도를 맞추느라 천천히 밥을 먹었을 성준이, 혼자 먹는 밥이어서 그런지 볶음밥을 후다닥 해치웠다. 설거지 거리를 싱크대에 놓고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시계를 보니 여덟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이 성준에게는 아무래도 어색했다. 성준은 핸드폰을 들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지수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연결 음이 흐르고는 지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지수야. 뭐해? 바빠?” -아니, 별로 안 바빠요. 방금 친구들이랑 밥 먹고 이제 집에 들어가려고요. “그래? 괜찮으면 잠깐 만날래?” -에?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오늘 오랜만에 일 일찍 마쳤는데, 집에 일찍 들어와 있으니까 영 이상하네.” -우와. 웬일이래요. 선배가 빨리 마치는 날도 있고! 그럼 선배, 나 영화 보여줘요! 안 그래도 나 보고 싶은 영화 있었는데, 그거 보여줘요! “영화? 그래 좋지. 넌 그럼 학교 근처야?” -네. 저 어디로 갈까요? “아냐. 거기에 있어. 별로 안 머니까, 내가 그 쪽으로 갈게.” -네, 알았어요. 그러면 도착하면 전화해요, 선배. “응. 조금만 기다려.” 성준은 전화를 끊고서 나갈 채비를 했다.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고, 나은이 이번 크리스마스 때 직접 떠서 선물해주었던 목도리도 했다. 미뤄두었던 설거지는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하기로 했다. 성준은 집에 불을 끄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매일 밤늦게야 집에 들어올 때에는 단 하루라도 일찍 마쳤으면 했는데, 막상 일찍 마치고 나니 할 일이 없어 다시 또 집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성준은 오랜만에 학교 쪽으로 차를 몰았다. 성준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평소에는 그 주변으로 갈 일이 없어서 가지 않았었다. 번화한 학교 주변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강의를 마친 대학생들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놀 거리를 찾고 있었다. 성준은 학교 앞 편의점 쪽에 차를 잠시 세웠다. 대학 시절, 나은에게 한 눈에 반한 그가 매일 같이 나은을 기다리던 장소였다. 성준은 옛날 생각이 나서 슬며시 미소를 띠웠다. 성준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지수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똑똑, 하고 누군가가 조수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성준이 고개를 돌리자 지수가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그의 차를 찾아서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지수는 차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차에 탔다. “아, 춥다! 선배, 진짜 빨리 왔네요.” “응. 가까우니까. 어디로 갈까? 명동 쪽이 좋겠지?” “네. 아무데나 가요. 전 상관없어요.” 지수는 안전벨트를 매면서 그렇게 말하였다. 성준은 차를 명동 쪽으로 몰았다. 명동을 가려면 나은의 학원 앞을 지나가야 했다. 나은은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을 텐데, 자신만 이렇게 놀고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선배. 근데 일찍 마친 날인데 저랑 이렇게 놀아도 돼요? 나은언니는요?” “나은이 오늘 열두시나 돼야 마칠 것 같다고 하더라고. 학원일이 요새 바쁘대.” “아, 그렇구나. 선배, 나은언니랑 놀고 싶은데 저랑 있어서 아쉽죠?”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 덕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좋지, 뭐.” 성준은 지수의 장난에 살짝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성준의 차는 이제 나은의 학원 앞을 지나고 있었다. 성준은 살짝 속도를 늦추면서 나은의 학원을 올려다보았다. 학원 내부의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나은은 저 곳에서 학생들을 위해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러다가 성준은 운전을 할 때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던 나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시 운전에 집중을 했다. “선배, 요새 로맨스 영화가 재밌는 게 있대요. 그거 봐요!” “로맨스? 그래. 난 영화는 뭐든 다 잘 보니까.” “아, 신난다! 안 그래도 친구들은 다 남자친구랑 보고 왔다고 해서 같이 볼 사람 없었거든요.” “나랑 본다고 신나서는 안 되지. 어서 너도 남자친구를 만들어서 같이 봐야지!” “에이, 참. 선배는 여자 친구 있다고 지금 유세 하는 거예요?” “그래.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 있다고 유세하는 거다, 뭐.” 성준은 장난스런 말투로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는 잔뜩 튀어 나온 입으로 혼자서 무어라고 꿍얼대더니 이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성준은 자신이 팔불출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 앞에서는 애정표현도 잘 하지 않고, 여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요즘 들어서 나은을 남 앞에 잘 내세우게 되었다. 성준은 나은이 자신의 여자 친구라는 것이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자신의 여자 친구라는 사실이 늘 뿌듯했다. 성준은 나은을 생각하며 살짝 미소를 짓고는 어느덧 도착한 영화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Spring Spring. 16 나은은 원장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저녁시간 동안 잠시 은행에 가는 길이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많은데 굳이 자신을 시키는 원장선생님의 심보에 혼자서 꿍얼거리며 있는데, 나은의 눈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눈에 띠었다. “…성준 오빠랑 같은 차네.” 나은은 별 생각 없이 중얼거리고는 번호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차들과 달리 속도를 한껏 줄이면서 달리고 있어서 번호를 읽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3584, 번호판을 본 나은은 눈을 끔뻑거리며 반사적으로 운전석을 확인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본 번호판에는 성준의 차 번호가 똑똑히 써져 있었다. “어? 오빠다.” 나은이 차 안에 있는 성준을 확인하자마자 그 차는 나은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나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의 차 안에는 성준과 지수가 함께 있었다. 일찍 마쳐서 집에 들어갔다던 성준이 왜 지수와 함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성준의 번호를 누르고 나서도 나은은 통화버튼을 누르기 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누구보다도 성준을 믿는 나은이었기에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나은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흐르고는 성준이 나은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오빠. 지금 집이야?” -어? 아, 응. 왜? “그냥. 오랜만에 오빠가 쉰다니까 좋아서. 매일 너무 힘들어 보였는데 오늘은 집에서 푹 쉬어. 난 지금 원장선생님 심부름 잠시 나왔는데, 오늘 되게 추워.” -그 원장선생님은 만날 너한테만 심부름 시키는 것 같아. 얄밉네. 추운데 밖에 오래 있지 말고 어서 들어가. 감기 걸리면 큰일이야. 강의하느라 말도 많이 할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아, 심심해서 전화했는데 이제 들어가야겠다. 또, 전화 할게!” -응, 알았어. 어서 들어가 봐. “응. 푹 쉬고 있어. 끊을게.” 나은은 성준과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날씨가 추운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나은은 멍하니 그 자리에 있었다. 잠시 동안은 원장선생님의 심부름을 가야 한다는 그 사실 마저도 잊고서 그 자리에 있었다. 나은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성준은 나은과 만나면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은은 언제나 성준을 신뢰할 수 있었고, 항상 신뢰할 수 있었기에 사랑하는 마음이 이만큼이나 커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생전 거짓말을 하지 않던 성준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은은 자신이 본 것이 성준의 차가 아니었기를 바랐지만,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본 성준과 지수의 모습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아, 모르겠다.” 나은은 괜히 복잡하게 생각해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성준이라면 분명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짓말을 하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성준이 자신을 만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맘을 품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은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한 생각으로 성준을 오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싱숭생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은은 다시 은행 쪽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나은은 무슨 정신으로 심부름을 하고 무슨 정신으로 다시 학원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은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성준과 지수의 모습만 아른 거렸다. 웃고 있던 지수의 모습과 슬며시 미소를 짓던 성준의 얼굴이 자꾸 지워지지 않았다. 나은은 학원으로 돌아와서는 저녁조차 먹지 않았다. 아직 강의가 한참이나 남았기에 나은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학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추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은이었기에 겨울이 되고서는 단 한 번도 옥상에 올라온 적이 없었는데, 속이 답답하니 옥상에 올라와서라도 바람을 쐬고 싶었다. “어? 선생님! 저녁 드셨어요?” 옥상 올라가자 먼저 올라와서 바람을 쐬고 있던 학생들이 나은을 보며 말을 걸었다. 나은은 자신의 기분을 다른 사람의 눈에까지 표출시키고 싶지 않아서 생글 웃으면서 학생들을 대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일을 잠시 접어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니. 오늘은 속이 별로 안 좋아서. 너희는 밥 먹었어?” “네. 요 앞에서 금방 사먹고 올라 왔어요!” “너희 이제 고3 되지? 정신없이 바쁘겠네. 요새 기분은 어때? 괜찮아?” “음. 잘 모르겠어요. 아직까진 실감이 안나요. 떨리기는 하는데, 너무 막막한 것 같아요.” “그렇지? 나도 그랬어. 그래도 생각보다 금방 끝나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말고.” “네, 선생님. 선생님 이제 저녁시간 거의 끝나가요. 같이 내려가요!” “응. 그러자. 날씨가 추워서 오래 나와 있지도 못하겠다. 그렇지?” 나은은 생긋 웃으면서 학생들과 함께 옥상에서 내려왔다.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은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그런지, 나은은 그 말이 아직은 어색하게만 들렸다. 몇 살 어리지 않은 학생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칭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진짜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선생님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은은 성준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 기분을 계속 안고 강의에 들어갔다가는 강의를 엉망으로 할 것만 같았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모두 마친 나은은 서둘러 책을 정리하고 학원을 빠져나왔다. 유난히 많았던 강의 탓에 온 몸이 찌뿌듯했다. 나은은 하품을 하면서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 가까이 섰다. 이렇게 강의가 늦게 마치는 날이면 버스마저 끊겨서 택시를 타기 일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원과 집이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나은은 학원 앞을 지나던 빈 택시에 올라탔다. 아파트 이름을 대고 조금 쉬려고 하는데, 주머니 속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나은은 핸드폰을 꺼내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세환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반갑습니다, 고객님. 대여했던 가스레인지를 반납하려고 하는데, 혹시 지금 어디신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고객님? 나은이 전화를 받자마자 세환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은은 세환의 말투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환이 다니는 회사가 서비스업에 관련된 회사여서 그런 말투가 입에 베인 것인지 어색하지 않게 느껴져서 더 우스웠다. 항상 세환은 생각지도 못한 것들로 나은의 웃음을 자극하곤 했다. “뭐야, 오빠. 나 지금 택시 타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이제 가스 나오는 거야?” -응. 보일러랑 다 고쳤어. 괜찮으면 오늘 갖다 줄까? 나도 막 집에 도착했거든. “응. 그럼 그렇게 해. 나 한 십 분쯤 후면 도착할 것 같아.” -오케이! 알았어. 시간 맞춰서 나가 있을게. 나은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세환의 말투가 자꾸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다. 나은이 탄 택시는 금방 나은의 집 앞에 섰다. 나은은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려서는 세환의 모습을 찾으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나은은 자신의 동 앞에서 마치 춤을 추는 듯이 움직이고 있는 세환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은은 세환이 뭘 하고 있나 유심히 살폈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천천히 그의 쪽으로 걸어갔다. 남의 집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세환이 바보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나은이 빌려준 가스레인지는 아파트 계단 위에 얹어 놓고는 계속해서 이상한 몸짓을 이었다. “오빠, 뭐해?” 나은이 세환의 가까이 다가가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란 모양인지 세환은 몸을 움찔 거리면서 이상한 행동을 멈추었다. 나은은 세환이 서있었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웃고 싶지만, 다른 주민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러지 못하고 입을 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세환은 아스팔트 바닥에 어디서 났는지 흰 분필로 직사각형을 그려놓고 혼자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왜 웃어!” “오빠, 이게 뭐야. 왜 혼자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어!” “그냥. 너 기다리는 거 심심해서. 너 이거 기억나? 오랜만에 하니까 완전 재밌는데?” “혼자 하는데 뭐가 재밌어!” “그럼 너도 같이 하면 되지! 자, 이거 네 돌이야. 어서 해!” 세환은 막무가내로 나은의 손에 자그마한 돌멩이를 쥐어주었다. 나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환을 보았다. 세환은 어서 하라는 듯 부추기는 시선으로 나은을 보면서 땅따먹기 판을 내어주었다. 나은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막무가내인 세환을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나은은 별 수 없이 세환이 쥐어준 돌멩이를 손에 들고 땅따먹기 판 앞에 섰다. 오랜만에 해보는 땅따먹기라서 그런지 기분이 묘했다. 차가워진 손 위로 더 차가운 돌멩이가 올라가 있었다. 나은은 가볍게 돌멩이를 던져 숫자 1이 적혀진 곳으로 돌멩이를 놓았다. 그리고는 한 발을 들어서 숫자 2가 적힌 곳으로 가볍게 뛰었다. 다행이도 오늘은 높은 구두를 신고 나오지 않아서 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나은은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 한 것을 세환이 잡아 준 것을 제외하고는 순조롭게 판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에이, 선 밟을 뻔 했는데.” 세환은 나은을 보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나은은 그런 그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럴 때 보면 세환은 꼭 철없는 어린 애 같았다. 나은은 세환을 오랫동안 알았지만 아직도 어떤 사람인지 헷갈렸다. 늘 뺀질거리는 모습이 바람둥이 같기도 하였고, 말끔히 양복을 입고 회사로 갈 때면 그냥 평범한 직장인 같기도 했다가, 이렇게 후줄근한 잠옷 차림으로 자신에게 장난을 칠 때면 영락없는 어린애 같았다. “하여간 오빠 때문에 못 살아.” 나은은 웃음을 참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세환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이내 계단에 올려두었던 가스레인지를 손에 들고서 나은에게 건네주었다. 나은은 가스레인지를 건네받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진작 집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세환과 말도 안 되게 땅따먹기를 하느라고 시간이 이렇게나 늦어졌다. “에? 벌써 한 시가 다 됐어. 오빠도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어서 들어가서 쉬어.” “응. 알았어. 가스레인지 진짜 잘 썼어. 휴, 그래도 오늘은 따뜻한 방에서 자겠다.” “나 그럼 들어간다? 다음에 또 봐!” 나은은 손을 흔들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세환은 나은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직사각형의 땅따먹기 판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은의 눈에는 요새 들어서 세환이 더욱 철없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을 웃게 해주는 세환에게 고마웠다.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나은을 덮쳐왔다. Spring Spring. 성준은 지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가 갓 넘은 시간이었다. 나은의 학원으로 가서 나은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지금쯤이면 나은은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있을 것이었다. 성준은 나은의 집 쪽으로 차를 돌렸다. 나은을 잠깐이라도 보고 집으로 들어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혼자서 영화를 보며 놀다온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만 놀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미안해서 집이냐고 묻는 나은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을 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의도치 않게 나은에게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 되어버렸다. “빨리 가면 내가 먼저 도착 하겠다.”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속력을 조금 더 냈다. 채 오 분이 되지 않아서 성준은 나은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나은의 동 앞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그는 조금 떨어진 동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서 나은의 동 앞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나은의 동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성준은 조금 더 다가가서 그 사람을 보았다. 세환이었다. 성준은 나은의 집 쪽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가 넘은 이 시간에 세환이 나은의 집 앞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의아스러웠다. “…아, 가스레인지.” 성준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며칠 전 세환이 나은에게서 빌려간 가스레인지를 돌려주기 위해 나은을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성준은 굳이 이 늦은 시각에 돌려주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준이 세환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가려는데, 별안간 세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무엇을 꺼내더니 아스팔트 위에 하얀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성준은 자리에 서서 세환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었다. 세환은 바닥에 땅따먹기 판을 그리더니, 혼자서 깡충깡충 뛰면서 땅따먹기를 하였다. 성준은 그런 세환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 보다 고작 한 살 더 적을 뿐인데, 세환은 아직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성준이 세환의 행동에 정신이 팔려 있을 동안, 어느새 나은이 세환에게로 다가왔다. “오빠, 뭐해?” 성준은 나은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피곤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은은 세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세환이 그려놓은 땅따먹기 판을 한 번 보고는 별안간 입을 막고 웃기 시작했다. 나은의 눈에도 세환의 행동이 어처구니없는 모양이었다. 나은은 세환의 행동에 한참을 웃다가 이내 세환이 건네준 돌멩이를 들고 함께 땅따먹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은의 얼굴이 웃음이 한가득 이었다. 성준은 나은의 얼굴을 보면서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땅따먹기를 하던 중 나은의 몸이 살짝 기우뚱했다.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하는 나은을 세환이 빠르게 잡아주었다. 무사히 한 판을 돌아온 나은은 환하게 웃었다. 철없이 보이는 세환을 타박하면서도 나은은 웃고 있었다. 성준은 왠지 기분이 묘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세환이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세환의 앞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밝은 웃음을 보이는 나은이 야속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나 그럼 들어간다? 다음에 또 봐!” 나은은 세환에게서 가스레인지를 건네받은 후,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나은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세환은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성준은 감히 세환의 앞에도, 나은의 앞에도 나설 수가 없었다. 나은을 만나러 나은의 집 앞까지 왔지만, 세환과 재미있게 놀고 있는 나은의 앞에 나타나는 것이 왠지 껄끄러웠다. 차가운 바람이 성준의 두 뺨을 스쳐 지났다. 성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세환은 어느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성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성준은 언제나 나은이 자신의 여자라는 사실에 자신이 있었다. 나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역시도 나은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지난 2년간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었다. 그런데, 차가운 바람과 함께 그러한 생각이 성준을 덮쳤다. 나은을 즐겁게 해 줄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세환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없어졌다. “아, 모르겠다.” 성준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몸을 돌렸다. 한 쪽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차로 성준은 다시 돌아갔다. 운전석에 앉았지만, 성준은 차마 시동을 걸지 못했다. 그는 나은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새벽 한 시, 나은의 집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성준은 자신에게 되물었다. 진정 지난 2년 동안 나은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이 자신이었던가. 성준은 그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성준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나은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잠이 든 것인지, 나은의 집에 환하던 불은 어느새 꺼져 있었다. 성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동을 걸고 차를 자신의 집 쪽으로 몰았다. 사랑하는 그 마음만큼 나은을 행복하게 했던가, 라는 질문은 성준을 계속 따라왔다. 유난히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Spring Spring. 17 성준은 요 며칠 밤잠을 설쳤다. 그렇게 깊게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놓을 때가 많았다. 그저 편안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음에도, 성준은 자꾸 마음이 거슬렸다. 언제나 나은의 마음을 믿었기에 성준은 그동안 세환과 나은의 사이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괜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 2년 동안 자신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준 나은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자신보다 세환이 나은을 더 웃게 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서려있었다. 성준은 평소에 입던 슈트를 한 쪽에 정리해 두고 간편한 옷을 꺼내어 입었다. 꼭 일주일 만에 나은과 정식으로 데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성준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이상하게도 뭔가 부족해보이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성준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집을 나섰다. 나은을 만나는 날까지 그런 마음 무거운 생각을 하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나은을 만나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고 싶었다. 성준은 자신의 차에 타고 나은의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십 분이 채 되지 않아서 나은의 집 앞에 도착한 성준은 차에서 내려서 나은을 기다렸다. 나은의 동 앞에서 나은을 기다리는데, 아스팔트 바닥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분필 자욱이 눈에 띠었다.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네모난 땅따먹기 판, 그 위로 숫자들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성준은 그 자국을 보자 또 미묘하게 기분이 뒤틀렸다. 세환과 함께 땅따먹기를 하면서 너무나 밝게 웃고 있던 나은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아, 박성준 왜 이러냐.” 성준은 크게 한숨을 내어 쉬면서 자신을 타박했다.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생각들이 요즘 들어서 성준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어쩌면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이었기에, 더 진득하게 성준을 괴롭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성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두려웠다. “오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성준을 발견한 나은이 환하게 웃으면서 걸어 나왔다. 성준은 얼굴에 띠고 있던 무거운 표정을 지우고, 이내 웃으면서 나은을 반겼다. 나은은 성준을 보자마자 성준의 품에 폭 안기었다. 성준은 평소 때보다 더 큰 애정으로 나은을 안아주었다. 성준은 자신의 품에 있는 나은을 내려다보면서 어느 때보다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성준을 따라다니던 두려운 고민들이 나은을 품에 안자마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 성준의 품 안에서 나은은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춥지? 어서 차에 타자.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 오늘 바람도 많이 부는데.” “괜찮아. 별로 안 추워. 그나저나 오늘 어디 갈 거야?” “수족관! 아쿠아리움 가자. 어때?” “아쿠아리움? 완전 좋지! 어서 가자.” 나은은 발랄한 웃음을 띠면서 성준을 재촉했다. 성준은 차에 올라타서 나은의 안전벨트를 매어 주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잔뜩 기대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는 나은을 보니 성준은 마음이 놓였다. 성준은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빠져나가면서 룸미러로 나은을 살피었다.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나은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게만 보였다. “오빠.” “응?” “근데 내가 그렇게 예쁜가.” “에?” 별안간 나은이 심각한 표정으로 성준에게 물었다. 성준은 얘가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며 슬쩍 나은을 보고는 이내 다시 운전을 하기 위해 정면을 보았다. 나은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몸까지 홱 돌려서 성준 쪽을 향하고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오빠. 나 좀 그만 훔쳐 봐. 나 닳겠다!” 성준이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은이 성준에게 장난을 친 것이었다. 성준은 나은의 장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나은의 머리를 사랑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성준에게 있어서 나은은 삶의 활력소였다. 언제나 자신에게 웃음을 주고,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믿어주었다. 성준에게 있어서 나은은 그런 존재였으며, 이제는 떼어버릴 수 없는 삶의 한 조각과 같았다. 성준의 차는 약 삼십 분 정도를 달려서 아쿠아리움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서 성준은 나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성준은 나은의 손을 꼭 잡고서 아쿠아리움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에도 나은과 함께 아쿠아리움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성준과 나은이 만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성준은 나은과 함께 다시 아쿠아리움으로 들어서니 기분이 색달랐다. 조금은 조심스러웠던 그때와 서로 많이 편해지고, 많이 닮아있는 모습으로 다시 찾은 지금이 미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오빠,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그러게. 벌써 일 년도 넘었지?” “응. 그때 우리 되게 어색했는데! 그때 막 오빠가…, 어? 전화 온다. 잠시만,” 신난 표정으로 말을 하던 나은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말을 끊고는 핸드백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성준은 자신의 앞에서 형광의 색을 내고 있는 수많은 열대어 떼를 보면서 나은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열대어를 보던 성준은 나은의 통화가 길어지자 수족관 어항에 비춰진 나은의 얼굴을 보았다. 통화를 하는 나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 나은의 모습에, 성준은 몸을 돌려 나은을 똑바로 보았다. “응. 갑자기? 그럼 어떡해. 부산에? 아, 어쩌지. 알았어요. 응. 그럴게요.” 나은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성준은 나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나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었다. 나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성준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오빠, 어쩌지.” “왜? 무슨 일 있어?” “부산에 계신 할아버지가 지금 쓰러지셨대. 위독하셔서 아무래도 내려가 봐야 할 것 같다는데, 어쩌지.” 나은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지난주 데이트를 할 때에는 성준이 병원에 일이 있어서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나은에게 일이 생겨버렸다. 아쉽기는 하였지만,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성준은 괜히 나은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은을 보았다.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면 어서 가봐야지.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게. 어서 가자.” “오빠, 정말 미안해.” “미안하긴. 데이트야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 할아버지 위독하신 게 더 중요하지.” “그래도…….” “어서 가자. 어머님이 기다리시겠다.” 성준은 미안해하는 나은을 재촉했다. 성준은 살짝 웃으면서 나은의 손을 잡고 아쿠아리움을 다시 빠져나왔다. 만나자마자 다시 곧장 헤어지는 것이 나은은 아무래도 미안한 모양인지 걸음이 느렸다. 나은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위독하신 할아버지께 어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성준에 대한 미안함을 지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성준은 그런 나은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나와서는 조수석에 나은을 앉혔다. 안전벨트까지 단단히 채워주고 나서 성준은 문을 닫았다. 나은은 불안한 시선으로 손톱을 뜯고 있었다. 성준은 운전석에 올라서 불안해하는 나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부산에 내려가면 며칠 있다가 오겠네?” “…응, 아무래도. 학원 나가야 하니까 주말 안으로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조심해서 다녀와. 할아버지 간병 잘 해드리고.” “응. 알았어.” 성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나은의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서둘러 가야한다는 생각에 속력을 조금 올렸다. 나은의 집으로 가는 동안, 나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성준은 나은의 어두운 표정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웃는 모습이 가장 예쁜 나은인데, 굳은 표정으로 있는 나은의 모습은 왠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가 그다지 막히지 않은 탓에 성준의 차는 금세 나은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집 앞에서는 나은의 부모님이 벌써 밖에 나와서 나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준은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곳 앞에 차를 세우고 나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성준은 전에도 한 번 뵌 적이 있는 나은의 부모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나은의 어머니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성준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오랜만에 데이트 하는 것일 텐데 미안해요. 급하게 부산에 내려가야 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먼 길 가시는데,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요. 그럼 우리 먼저 가 볼게요. 다음에 봐요.” “네. 조심히 내려가세요.” 성준은 나은에게 따로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을 전하고는 나은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마음이 급한 부모님은 성준의 인사를 받고는 서둘러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셨다. 성준은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던 나은이 부모님의 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 까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어야겠네.” 성준은 작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차로 갔다. 나은과 만난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요즘 들어서 나은과 만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주말에도 제대로 데이트를 하지 못하니, 평일 밤 늦게 잠시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성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자신의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나은을 보지 못할수록 나은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성준은 자신이 얼마나 나은을 사랑하고 있는지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삶에 나은은 너무나 큰 조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성준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휴일인데도 막상 나은을 만나지 않으면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바쁜 일상 중에 유일하게 시간이 나는 때에는 늘 나은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친구들과도 연락이 드물어져 갑작스레 전화를 해서 불러내기도 어색했다. 성준은 방 한 구석에 세워 두었던 통기타를 꺼내었다. 지난 번 바에서 공연을 하고나서는 처음으로 만져보는 기타였다. 성준은 익숙하게 기타를 쥐고는 가볍게 연주를 시작했다. 성준이 언젠가는 나은에게 불러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노래였다. “난 행복합니다. 내 소중한 사람. 그대가 있어 세상이 더 아름답죠. 난 행복합니다. 그대를 만난 건, 이 세상이 내게 준 선물인 거죠.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이 우릴 갈라 놓을지라도.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삶이 끝날지라도.” 성준이 노래를 일절까지 끝내었을 때,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성준은 기타를 한 쪽에 세워두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나은의 전화일거라 기대를 했는데, 지수의 전화였다. 그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선배. 뭐해요? “집에서 쉬고 있었어. 너는?” -저는 봉사활동 하고 있었어요. 선배, 저 부탁이 하나 있어서 전화 했는데. “부탁? 뭔데?” -다름이 아니라, 제가 봉사 활동 하는 고아원에 유치원생 애가 한 명 있거든요. 근데 얘가 요새 좀 말썽이라서 원장선생님께서 심리치료를 했으면 하셔서요. 어려우시면 안 해주셔도 되는데, 부담 안 가지셔도 되요. “심리치료?” -네. 원장선생님이 혹시 그런 쪽으로 아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셔서요. 웬만하면 아는 사람한테 아이를 맡기시고 싶은 모양인가 봐요. “아, 그래? 그럼 내가 해줄게. 내가 하는 일인데 도와야지.” -아, 정말요? 선배, 진짜 감사해요! 그럼 선배 언제 데리고 갈까요? “음. 모레? 모레쯤엔 시간이 날 것 같아. 우리 병원으로 데려 올래?” -네. 그럴게요. 그럼 선배, 잘 쉬세요. “응. 너도 수고해.” 지수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일이 바빠서 봉사 활동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던 성준이었기에, 이런 기회로 나마 봉사 활동을 도울 수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이내 다시 기타를 잡았다. Spring Spring. 나은이 부산으로 내려온 지 벌써 삼일 째였다. 학원에는 사정을 말하여 이틀 후부터 다시 출근하기로 하였다. 나은은 삼일 내내 할아버지의 간병을 도왔다. 정정하신 줄만 알았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단 말에 나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가 점점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신다는 것이었다. 나은은 간병을 부산에 사시는 친척에게 부탁하고, 이제 다시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부모님은 직장 때문에 먼저 서울로 올라가셨기에, 나은은 혼자서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고모, 그럼 저 이제 올라가 볼게요.” “그래. 그동안 수고 많았어. 고마워, 나은아.”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올라가서 전화 드릴게요.” “응. 조심히 올라가 봐. 역까지라도 데려다 줘야 하는데, 미안해.” “괜찮아요. 그럼 가볼게요, 고모.” 나은은 고모께 가볍게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병원을 빠져 나오는 나은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난 삼일 동안 불편한 잠을 자서 그런지 나은의 온 몸은 찌뿌듯했다. 나은은 크게 하품을 하면서 병원 앞에 세워져 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부산역이요, 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고는 나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눈을 뜨고는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었다. 익숙하게 성준의 번호를 누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 전화를 하라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여보세요? 마치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성준으로 인해 나은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은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성준의 목소리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보세요, 라는 한 마디 말 뿐이었는데, 나은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준의 목소리는 항상 그랬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는 나은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오빠, 일하고 있었어?” -응. 넌 아직 부산이지? “응. 나 이제 서울 올라가려고. 기차 타고 갈 거니까, 한 세 시간쯤 걸리겠다.” -맘 같아서는 서울역까지 마중 나가고 싶은데, 일 때문에 시간이 안 나네. 미안해. “에이, 미안하긴 뭐가.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서 눈 좀 붙여야겠다. 병원 소파에서 새우잠 잤더니 온 몸이 찌뿌듯해.” -그래. 고생 많았어, 나은아. 출근은 언제부터…, 아, 잠깐만. 수화기 너머의 성준은 자신의 방에 누군가가 들어온 듯 핸드폰을 잠시 아래로 내려놓은 것 같았다. 나은은 핸드폰을 그대로 귀에 대고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로 작은 소리로 성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은 성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 지수 왔어? 잠시만 기다릴래? 나 곧 나갈게. 응, 알았어. 나은은 감았던 눈을 떴다. 지수 왔어?, 라는 성준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나은은 소리를 내지 않고 나지막이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지수, 라는 그 이름을. -어. 나은아, 미안. 너 출근은 언제부터 하는 거야? “내일까진 쉬고 모레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아, 그래? 그럼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 많이 피곤하겠다. “응, 그럴게. 오빠도 바쁜 거 같은데 끊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응. 서울 도착하면 전화해. 나은은 응, 이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은은 지수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되뇌었다. 대학시절부터 성준과 인연이 있었던 지수였다. 나은은 자신에게 일방적이며,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던 성준의 마음을 알기에 그동안 지수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가 지수를 단순히 친한 동생, 아끼는 동생으로만 여긴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기에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나은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그동안 할아버지를 간병하느라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서 쉬고 있다던 성준, 그리고 나은의 옆을 지나간 성준의 차. 그 안에서 웃고 있던 지수와 성준. 나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생각이 나은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덮쳐왔다. 그리고 꼭 2년 만에 나은은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은이 혼자서 성준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던 그 생각이 다시 나은을 찾아왔다. “…지수랑 오빠, 진짜 연인 같이 잘 어울리는데.” 나은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나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나은은 택시 창문을 내렸다. 자신이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시린 바람이 택시 안으로 들어왔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나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중충한 회색빛의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치 회색빛의 구름처럼, 나은의 마음도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Spring Spring. 18 서울로 돌아온 나은은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왠지 몸이 축 쳐지고, 기운이 빠져서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왠지 성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은은 잔뜩 쳐진 기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은은 서울로 돌아오는 날 성준의 병원에 깜짝 방문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가 일 때문에 바빠서 역으로 마중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은이 그를 찾아가 볼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나은의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오늘은 왠지 성준과 지수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아무런 생각 없이 보았을 그들이지만, 오늘만큼을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본다면, 또다시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은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나은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것만 같은 피로함을 느꼈다. 나은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눈을 꼭 감았다. 서울에 올라오면 전화하라던 성준의 말이 기억났지만, 왠지 지금은 전화를 하기가 싫었다. 나은은 아주 깊게 잠을 자다가 성준의 전화로 눈을 뜨고 싶었다. 잠에 파묻힌 자신의 목소리에 자고 있었냐는 성준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뜨고 싶었다. 나은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잠에 빠져드려 할 때쯤, 머리맡에 두었던 나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뭐야.” 나은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눈을 떴다.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자신의 잠을 방해한 전화에 나은은 조금 신경질이 났다. 나은은 핸드폰을 들어 발신인을 보았다. 혜연이의 전화였다. 나은은 작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일이 바빠서 전화할 틈도 없을 텐데, 시간을 쪼개서 겨우 전화를 한 혜연의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보세요.” -어, 나은아. 인혜한테 들었어. 너 부산 내려갔었다며. 서울 올라온 거야? “응. 방금 집에 들어왔어. 정신없어서 인혜한테만 말하고 너한텐 말도 못했네.” -아냐, 괜찮아. 잘 돌아왔나 확인 차 전화했어. 피곤할 텐데 오늘은 푹 쉬어. “응. 고마워, 혜연아.” -고맙긴. 그나저나 우리 다시 또……, 네! 부장님, 잠시 만요! 나은아, 미안. 나 끊어야겠다. 다음에 또 전화할게. “응. 수고해.” 나은은 전화를 끊고는 다시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자신의 단잠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우울하고, 마음이 복잡할 때, 나은은 항상 잠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아주 많이 깊게 자고 나면, 이 기분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Spring Spring. 성준은 책상 위에 어질러진 서류를 정리하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일을 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나은이 서울에 도착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성준은 나은에게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성준은 핸드폰을 다시 자리에 내려놓고는 네, 하고 짧은 대답을 했다.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지수였다. 지수는 오늘 치료를 했던 작은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선배! 오늘 진짜 고마웠어요. 그럼 언제 또 오면 되는 거예요?” “음. 치료는 계속 꾸준히 하는 게 좋으니까, 일주일 내로 시간되면 한 번 와. 언제든지.” “아, 정말요? 고마워요, 선배. 원장선생님께서 선배한테 감사하다고 꼭 전하래요.” “감사하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인데, 뭐. 그럼 들어가 봐.” “네, 선배. 다음에 또 올게요. 수고해요.” 지수는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성준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성준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학교 다니느라 바빠서 봉사 활동을 하기 힘들 텐데도 꾸준히 봉사 활동의 하는 지수가 기특해 보였다. 성준은 지수를 보내고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지수가 데려온 아이를 먼저 봐주느라 미뤄두었던 일이 쌓여 있었다. “아, 오늘도 야근이겠구나.” 성준은 작게 읊조리고는 서류를 한 부 꺼내었다. 나은에게 전화를 하려했다는 사실을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성준은 늦은 밤까지 일을 계속했다. 밀려있는 일을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는데도 일이 끝이 없었다. 어제, 오늘 심리 치료를 했던 아이들의 상태를 다시 꼼꼼히 서류로 확인하고, 내일 만나보아야 할 아이들의 증상을 미리 숙지해 두느라 여념이 없었다. 병원의 다른 사람들은 이미 퇴근을 하였음에도 성준의 방에만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저녁까지 거르고 일을 하던 성준은 어깨가 저려서 기지개를 크게 한 번 하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열한 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그제야 성준은 아차,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간 나은은 피곤함에 잠이 든 모양인지 전화가 없었다. 성준은 나은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나은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피곤하겠지.” 성준은 지난 삼 일 내내 불편하게 잠을 잤던 나은이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방해하기 싫었다. 성준은 작년 이맘 때 외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강원도로 간 적이 있었다. 나은과 마찬가지로 성준은 그때 삼 일을 꼭 할머니 곁에서 간병을 했었다. 불편한 잠을 자면서도 혹시나 할머니께서 불편하신 것이 있을까봐 깊이 잠이 들지도 못했었다. 그때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는지 알았기에 성준은 나은의 깊은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성준은 곤히 자고 있을 나은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성준의 눈에는 나은의 자는 모습이 참 예뻤다. 잠이 든 나은의 일정한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는 피곤에 지쳐 자신의 차에서 잠이 들었던 나은의 모습을 떠올렸다. 성준은 일을 대충 정리하고는 퇴근을 준비했다. 여태껏 저녁을 먹지 않아서 출출함을 느꼈다. 회사를 나서면서 그는 뭐라도 사서 집에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간에 집에서 요리를 하기엔 귀찮았고, 또 요리를 하려고 해도 집에 마땅한 재료도 없었다. 성준은 차에 타서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포장을 해갈만한 것이 있는지 주변을 살폈다. 늦은 시각이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성준은 스물네 시간 운영하는 한 보쌈집 앞에 차를 세웠다. 보쌈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보쌈은 나은이가 더 좋아하는데.” 성준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 번 잠이 들면 끼니도 거르고 자는 나은이었기에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을 것 같았다. 성준은 가게에 들어가 보쌈을 두 개로 나누어 포장을 했다. 하나는 자신이 집에서 먹고, 또 하나는 나은에게 가져다 줄 생각이었다. 평소엔 요리도 잘 하고, 밥도 스스로 잘 챙겨먹는 나은이었지만, 피곤에 지치면 끼니를 잘 거르는 나은이 오늘도 또 밥도 먹지 않고 자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성준은 보쌈을 들고 차에 타서는 핸드폰을 꺼내어 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은의 단잠을 깨울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나은의 밥을 챙겨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도 잠에서 막 깬 목소리는 아니었다. 성준은 맛있는 보쌈을 나은에게 전해줄 생각을 하니 왠지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손가락 안에 드는 보쌈을 보고서 좋아할 나은의 얼굴이 성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성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응, 나은아.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어나있었네.” -응. 너무 많이 자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 “그럼 지금 집이겠네?” -어? 아니, 나 잠깐 밖에 나왔는데. 성준은 예상치 못한 나은의 대답에 잠시 당황을 했다. 나은이 집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밖에 나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성준이 어쩌지, 하고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아, 맥주 사왔어! 성준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그것은 세환의 목소리였다. 성준은 자신이 사온 보쌈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허탈한 웃음을 내지었다. “그렇구나. 난 이제 퇴근 하는 길이야. 추운데 밖에 오래 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 -응, 알았어. 아, 오빠. 내일 언제 퇴근해? “내일? 아마 일찍 마치면 아홉시쯤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내일 오빠 퇴근하고 심야 영화라도 보러 가자! “그럴까? 난 좋지. 그럼 내일 다시 전화 할게.” -응, 오빠. 미리, 굿나잇! 성준은 굿나잇, 이라는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성준의 시선은 조수석에 올려둔 두 개의 보쌈 봉투에 머물렀다. 성준은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나은과 함께 영화를 볼 생각에 기뻐지면서도 나은이 지금 세환과 함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성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차를 자신의 집 쪽으로 몰았다. 성준은 나은과 세환이 자주 만나는 것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차마 나은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은의 인간관계에 자신이 개입하는 것을 나은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지수를 편한 동생으로 만나듯, 나은 역시 세환을 편한 오빠로 생각해서 만난다는 것을 더 잘 알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마음 한 구석이 시렸다. 땅따먹기를 하며 세환과 함께 웃고 있던 나은의 모습이 자꾸만 다시 생각났다. 잊으려 할 때쯤이면 그 기억이 다시 찾아와 성준을 괴롭혔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렇게 쌓인 오해는 결국 두 사람을 휘청거리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성준은 애초에 오해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은이 그러하듯, 자신도 나은에 대해 확고한 신뢰를 가지려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성준의 마음이 계속 복잡했다. 성준에게 나은은 자신의 삶에서 뺄 수 없는 큰 조각이었고, 언제나 자신을 웃게 하는 활력소였다. 그러나 나은에게 성준의 존재는 어떠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그를 집어 삼켰다. Spring Spring. 한강변의 시린 바람이 나은의 뺨을 스쳤다. 나은은 세환이 건넨 맥주 캔을 건네어 받았다. 추위를 싫어하지만, 오늘따라 왠지 차가운 바람이 좋게 느껴졌다. 깊이 잠을 자던 나은이 다시 눈을 뜬 시간은 밤 열시였다. 나은은 일어나자마자 머리맡에 두었던 자신의 핸드폰을 보았다. 혹시나 자신이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을까, 하는 조바심에서였다. 하지만 핸드폰을 본 나은은 다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부재중 통화 0통, 나은은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울컥 쏟아졌었다. 성준의 전화에 눈을 뜨고 싶었던 나은이었다. 성준의 다정한 목소리에 눈을 뜨고 싶었는데, 나은은 홀로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확인한 핸드폰에서 성준의 연락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성준이 바빠서 전화를 하지 못한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은은 울컥하여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은은 아직도 이런 연락 따위에 소심하게 마음 졸이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성준과 나은은 벌써 함께 맞는 세 번째 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사소한 이런 것들에 마음 아파하는 자신의 모습이 나은은 너무나 싫었다. “나은아, 뭐 안 좋은 일 있어?” “응?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세환은 자신의 맥주 캔을 따면서 그렇게 물었다. 나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했다. 세환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은을 쳐다보았다. 나은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촉촉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흘리던 나은은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외투를 입고 집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나은은 차가운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추위를 참지 못하고 얼른 집으로 들어갔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추위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던 나은을 먼저 발견한 것은 세환이었다. 회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환은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세환은 나은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 나은의 등을 톡톡 쳤다. 나은이 뒤로 돌아보는 그 순간, 세환은 왁, 하는 소리와 함께 나은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나은은 놀라기는커녕 멍하니 세환을 바라보기만 했다. 세환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나은을 쳐다보았다. 세환은 나은의 침묵 속에서 눈에 맺힌 눈물을 발견했다. “근데 오늘 왜 그래? 이런 모습 너답지 않아.” “그런가.” “성준 형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냐. 우리 사이에 무슨 일 있는 거 봤어?” “하긴. 형이랑 넌 별 걱정 할 필요 없긴 하지.” 세환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 나은은 세환을 따라 맥주를 마시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한강의 차가운 바람은 계속해서 나은을 스쳐 지났다. 바람을 쐬기 위해 세환과 함께 한강변으로 나온 나은은 세환이 맥주를 사러간 동안 멍하니 검은 한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던 나은의 핸드폰이 울렸었다. 나은은 핸드폰을 꺼내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성준의 전화에 나은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되었다. 나은은 이유 없이 성준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서운함이나 그가 지수와 함께 있었다는 서러움보다 그리움이 더 우선이었다. 나은은 내일 성준과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나은아.” “어?”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무슨 이야기?” “교통사고를 세 글자로 줄이면 뭔 줄 알아?” “교통사고?” “응. 교통사고!” 나은은 잠시 동안 교통사고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세환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은을 보고 있었다. 나은은 세환을 보며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환은 그런 나은을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미소를 지었다. “에, 그것도 몰라?” “뭔데?” “붕어빵!” “붕어빵? 어째서?” “붕~, 어?, 빵!!” 세환은 살짝 웃으며 제스처를 곁들여 말했다. 나은은 어처구니없는 세환의 말에 픽,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세환은 나은에게 재밌지, 재밌지?, 라며 대답을 강요했다. 나은은 그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환은 나은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뾰로통한 입으로 투덜거렸다. 어린애 같은 세환의 모습에 나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은아, 너 푸우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이 뭔지 알아?’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곰돌이 푸우 있잖아. 그 푸우가 어떤 동물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줄 알아?’ ‘글쎄요? 음, 꿀벌?’ ‘땡. 정답은 아기염소야.’ ‘에? 아기염소요?’ ‘응. 아기염소 여럿이 푸우를 뜯고 놀아요!’ 나은은 아주 오래 전에 성준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으로 나은을 웃게 했던 성준이었다. 나은은 세환을 보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세환의 모습과 성준의 모습이 어설프게 오버랩 됐다. 나은은 세환을 보던 시선을 돌려 검게 물들어 있는 한강물을 보았다. 나은은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성준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Spring Spring. 19 나은은 오후 늦게 일어나서는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쉬는 휴일이 한가하고, 나른했다. 창밖에선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은은 따뜻한 바닥에서 뒹굴 거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후면 퇴근하신 부모님도 집으로 들어올 테고, 성준과의 약속을 위해서는 외출 준비도 해야 했다. 나은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나은을 따스하게 적셨다. 나은은 샤워기에서 뿜어 나오는 세찬 물줄기를 얼굴로 맞았다. “나은아, 엄마 왔어!” “응. 나 샤워 중이에요!” 나은은 엄마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샤워기의 물을 끄고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나은은 욕실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샤워를 서둘렀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밖엔 하얀 진눈깨비가 내리는 추운 겨울이지만, 샤워부스 안은 따뜻했다. 나은은 샤워를 마치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옷장 문을 열고는 무슨 옷을 입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나은은 옷장 한 쪽에 걸어 두었던 원피스를 꺼내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겨울에는 치마를 잘 입지 않는데, 오늘은 왠지 원피스를 입고 싶었다. 나은은 원피스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꽤 두툼한 원피스라 외투를 따뜻하게 입는다면 상당히 춥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빠가 좋아하겠다.” 나은은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나은은 언젠가 성준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은을 처음 본 벚꽃이 흩날리는 어느 봄날에, 하늘하늘한 파스텔 톤 원피스를 입은 나은이 그렇게나 예뻐 보였다는 성준의 그 말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은은 자신이 성준을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났다. 친구들과 함께 간 벚꽃놀이에서 나은은 그를 처음 보았었다. 하얀 셔츠를 살짝 걷어 올리고 조금 짜증이 난 듯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와 지금의 성준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은 더 어른스럽고 성숙된 느낌을 풍겼다. 병원을 다니느라 늘 슈트를 입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그때와 조금 달라졌을 뿐이었다. 나은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평소보다 더욱 정성을 들여서 화장을 했다. 화려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은이었기에 화장은 언제나 수수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성준이 가장 좋아하기도 했다. 나은은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서둘러 외출을 준비했다. 원피스에 두툼한 스타킹을 신고는 따뜻하게 외투를 입었다. 미리 꺼내두었던 핸드백도 챙기고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보았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요!”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응. 알았어요.” 나은은 평소보다 높은 힐을 신었다. 그리고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집을 나섰다. 나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출발하면 성준의 병원에 도착하고도 여유가 있을 시간이었다. 나은은 성준의 병원을 찾아갈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성준은 마치고 나은의 집으로 오겠다고 했지만, 나은은 직접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그가 놀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나은은 아파트를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에 섰다. 차가운 바람이 나은을 스쳐 지나자, 나은은 절로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나은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얼어버린 자신의 손을 호호 불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확실히 치마를 입고 나니 몸에 차가운 기운이 확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이 오 분 남짓 떨며 서있자, 성준의 병원 근처로 가는 버스가 섰다. 나은은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도 버스 뒤편에 자리가 나서 나은은 곧장 앉을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벌써부터 발이 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춥긴 춥네.” 나은은 창밖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까까지 내리고 있던 진눈깨비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나은은 멍하니 창밖을 보며 성준의 병원까지 갔다. 깜깜한 세상에 온통 하얀 눈들만 눈에 들어왔다. 나은은 성준의 병원에 가까워지자 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하는 병원은 아직도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나은은 버스에서 내려 병원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전에도 몇 번이나 와 본 적이 있는 병원인데 아직도 나은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은은 병원에 들어가 성준의 사무실을 찾았다. 성준의 방 앞에 도착한 나은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이제 곧 그가 퇴근 할 시간이었다.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똑똑, 하고 노크를 했다. “네,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성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은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성준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대할지 기대가 되었다. 나은은 문고리에 힘을 주어 살며시 문을 열고는 고개부터 빠끔히 그의 방 안으로 들이 밀었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 그리고는 슬며시 웃고 있는 나은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은아!” 나은은 문을 크게 열고는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은이 자신의 병원으로 찾아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는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나은은 왠지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환하게 웃었다. “추운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금방 내가 너희 집으로 갈 텐데.” “꼭 오빠만 오라는 법 있나? 오빠 빨리 보고 싶어서 내가 직접 왔지, 뭐!” “옷도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왔어. 아유, 손도 다 얼었네.” 성준은 나은의 차가운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은을 보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은은 걱정스레 자신의 손을 녹여주는 성준의 모습에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나은의 손을 녹여주다가 이내 팔을 잡아 당겨 나은을 자신의 품 안으로 넣었다. 성준의 품에 안긴 나은은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서 가자. 영화 내가 미리 예매해 뒀어.” "어? 정말?“ “응. 네가 보고 싶다던 로맨스 영화로. 늦겠다, 어서 가자.” “응!” 나은은 성준의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성준은 책상정리를 마저 마치고 가방을 들고는 나은과 함께 병원을 빠져나왔다. 나은은 병원 밖으로 나오자 느껴지는 한기에 잔뜩 몸을 움츠렸다. 성준은 나은의 모습을 보고는 나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성준의 온기가 나은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성준의 차를 타고 영화관에 도착한 그들은 달콤한 캐러멜 팝콘과 콜라를 샀다. 그리고는 미리 예매해둔 표를 들고는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영화관 안으로 들어서자 성준은 나은이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는 앞장을 섰다. 나은은 성준과 함께 자리에 앉아서는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극장 안의 따뜻한 공기가 나은에게 닿았다. 나은은 캐러멜 팝콘을 하나 쥐고는 성준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는 나은이 주는 팝콘을 받아먹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 영화 시작한다.” 나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영화 스크린에 집중을 했다. 오랜만에 성준과 함께 오는 영화관이었다. 늘 시간이 부족하여 성준의 차에서 영화를 함께 보거나, 가끔 휴일에는 그의 집에서 DVD를 보곤 했기에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나은은 영화를 보다가 중간 중간 옆자리에 앉아있는 성준을 올려다보았다. 스크린 불빛에 의해 잠깐씩 보이는 성준의 윤곽이 나은의 눈에 확 들어왔다. 나은은 오랜만에 초기에 연애를 할 때의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모습은 왠지 나은을 설레게 했다. 나은이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 시선을 느낀 건지 성준이 나은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나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내가 그렇게 멋있는가?” 나은은 성준의 말에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성준은 나은을 보고 씩 웃고는 이내 다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은아. 나 좀 그만 훔쳐 봐. 나 닳겠다!” 나은은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자신에게 하는 성준이 왠지 얄미워 보였다. 나은은 손으로 살짝 성준의 팔을 치고는 이내 살짝 웃었다. 성준은 팝콘을 쥐어 나은에게 내밀었다. 나은은 조심스레 입을 벌려 그가 내민 팝콘을 먹었다. 성준이 준 것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Spring Spring. 영화를 보고 난 후, 성준은 나은과 함께 영화관 근처의 작은 카페로 들어왔다. 겨울이면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치마를 잘 입지 않는 나은이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치마를 입고 나와서 추위가 더 한 모양이었다. 나은은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잔뜩 몸을 움츠렸다. 카페에 들어온 나은은 추위를 녹이기 위해 바로 녹차라떼를 주문했다. 성준은 따뜻한 코코아를 시켰다. 성준은 자리에 앉아서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열두시였다. 나은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이런 늦은 시간뿐이었다. “아, 오빠. 영화 슬퍼. 그렇지?” “응. 눈물 참느라 애썼지? 하여간 눈물은 많아서 큰일이야.” “울고 싶었는데, 화장 번질까봐 참았어. 진짜 슬펐어. 여자 주인공이 울 때! 그때 진짜 너무 슬펐단 말이야.” 나은은 성준의 앞에서 칭얼대면서 말을 했다. 성준은 그런 나은의 모습이 유난히도 귀여워 보였다. 평소 눈물이 많은 탓에 슬픈 영화를 볼 때면 자주 울곤 하는데, 오늘은 나은이 슬픈 장면에도 눈물을 꾹 참으려고 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워 보였다. 나은은 주문한 녹차라떼가 나오자마자 따뜻한 머그컵을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것이 나은의 습관이었다. 언제나 차를 마시기 전에는 머그컵을 양 손으로 쥐고는 그 온기를 먼저 느꼈다. 그것이 여름이건 겨울이건 관계가 없이 늘 그랬다. 그리고는 향을 먼저 맡고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삼키었다. 성준에게 나은의 행동 하나하나 모두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다. 나은 자신조차 모르는 습관들을 성준은 더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래도 너랑 이렇게 오랜만에 영화 보니까, 정말 좋다.” “응. 나도 나도.” 나은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나은의 그런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앞에서 환하게 웃는 나은의 모습이 정말로 예뻐 보였다. 무엇보다 세환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곁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성준은 자신의 앞에 놓인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었다. 혀를 데일 정도로 뜨거운 코코아가 혀끝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성준은 나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은은 창밖의 조용한 세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유난히도 오늘 나은의 모습이 예뻐 보였다. 마치 나은을 처음 봤던 그 때처럼 나은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흩날리는 벚꽃 아래에서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밝게 웃고 있었던 그 나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파스텔 톤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서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나은의 모습은 성준을 한 눈에 사로잡을 만큼 사랑스럽고 예뻤다. 성준은 코코아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은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다시 상기했다. 나은이 떨어트리고 간 다이어리, 그 속에서 그는 나은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던 날, 빨간 우산과 함께 나은의 다이어리를 돌려주기 직전에 성준은 다이어리 안쪽 은밀한 곳에 그의 번호를 적어 두었었다. 그것을 나은이 발견했는지, 혹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 다이어리를 버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오빠, 피곤하지 않아?” 창밖을 보고 있던 나은이 어느새 성준을 보면서 물었다. 성준은 고개를 저었다. 나은과 함께 있는 순간이 피곤할 리가 없었다. 그는 나은을 하루 종일 자신의 옆에 붙들어 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은의 환한 웃음을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나은을 만난 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은과 함께 있고 싶고, 아껴주고 싶다는 그 마음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깊어만 갈뿐이었다. “늦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내일은 너도 출근해야 하잖아.” “응. 들어가자.”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다 마시지 못한 나은의 녹차라떼가 머그컵에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성준과 나은은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걷고 싶기도 하지만, 추위를 유독 많이 타는 나은이 걱정되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차에 타자마자 나은을 위해 히터를 틀었다. 아직 차가 데워지지 않아서 차가운 바람이 먼저 나왔다. 성준은 차를 나은의 집 쪽으로 몰았다. “나은아.” “응?” “내일부턴 날씨가 계속 풀릴 거래.” “아, 정말? 이제 슬슬 날씨 풀리려나 봐.” “응. 이제 진짜 겨울도 끝나가나 봐.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어.” “진짜로! 우리 봄에 꼭 벚꽃놀이 가자! 작년엔 가려고 했던 날에 갑자기 비가 와서 못 갔잖아.” “응. 꼭 가자.” 성준은 나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봄이 오기라도 한 듯이 들뜬 표정으로 있는 나은을 보자, 그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벚꽃과 나은은 정말로 잘 어울렸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하게 매력을 뿜는 것이 벚꽃과 나은의 닮은 점이었다. 성준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다 왔다. 얼른 들어가서 푹 자. 알았지?” “응! 오빠도 조심해서 들어가.” “알았어. 잘 자.” “응. 굿나잇.” 나은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성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성준은 나은의 행동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리는 나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은은 차 문을 닫고는 아파트 안으로 종종걸음 쳐 들어갔다. 성준은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 한참 후에야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Spring Spring. 20 성준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한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있던 핸드폰을 찾아내어 알람을 꺼버렸다. 벌써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온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성준은 이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난 밤 나은과 함께 한 짧은 데이트가 다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괜한 생각 때문에 마음속이 복잡했는데, 나은과 함께 데이트를 하고나니 그런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일해야지!” 성준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얹어져 있었다. 성준은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옷장 속에 차례로 정리되어 있는 흰색의 와이셔츠를 꺼내어 입었다. 출근 준비를 거의 끝내고 집을 나서려는데, 식탁에 얹어둔 성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가 끊기지 않도록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나은의 전화였다. 이른 아침에는 잘 일어나지 않는 나은인데, 아침부터 웬일인가 싶기도 했다. “여보세요?” -오빠! 출근해? “응. 이제 집에서 나가려고. 오늘은 일찍 일어났나 보네?” -응. 왠지 눈이 떠져서. 다행이다. 나 사실 지금 오빠 집 앞인데! “어? 우리 집 앞이라고?” -응! 어서 내려와, 오빠! “알았어. 금방 갈게. 잠시만 기다려.” 성준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른 아침부터 나은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러면서 성준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나은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분을 좋게 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나은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그러면서 그는 나은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문단속을 하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1층 입구 쪽에 나은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나은은 발자국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는, 성준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역시도 나은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빠. 잘 잤어?” “응. 아주 푹 잘 잤어. 근데 아침부터 여기까진 웬일이야.” “치, 웬일이긴! 오빠 보고 싶어서 왔지! 어서 주차장으로 가자. 이러다가 오빠 지각하겠다.” “어? 응, 그래.” 나은은 성준의 손을 잡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나은의 다른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성준은 고개를 돌려 나은이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작은 도시락 같은 것이 나은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차장으로 온 성준은 차 문을 열어 나은을 조수석에 먼저 태웠다. 안전벨트까지 다 해주고서야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올랐다.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지만 아직도 쌀쌀했기에 성준은 시동을 걸자마자 히터를 틀었다. “아침부터 나 보니까 좋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뭐? 진짜? 나 그럼 그냥 집에 갈래.” “당연히 농담이지. 오늘은 왠지 하루가 술술 풀릴 것 같아.” 성준의 말에 나은은 환하게 웃었다. 그는 나은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회사로 향하는 짧은 길이었지만 나은과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나은과 함께 출근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묘했다. “근데 오빠 밥은 먹었어?” “아침 밥? 아니. 나 아침은 잘 안 챙겨 먹잖아.” “으이구! 내가 아침도 잘 챙겨 먹으라고 했잖아. 아침밥이 하루 중에서 얼마나 중요한데.” “아침엔 시간 여유가 많이 없어서 잘 못 챙겨먹게 되네.” “그럴 줄 알고…. 짜잔! 내가 오빠 도시락 싸왔어!” 나은은 자신이 가져온 도시락을 가볍게 흔들면서 말했다. 평소에는 늦은 오전이 되어서야 눈을 뜨는 나은인데, 도시락까지 싸서 이른 시간에 나오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을 나은의 예쁜 마음에 성준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운전대에 올리고 있던 한 손을 나은의 머리 위로 가져가 가볍게 쓰다듬었다. 성준은 자신을 이렇게나 생각해주는 나은인데, 자신이 그동안 허튼 생각으로 속병을 앓은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마치 나은에게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들고 가서 오빠 방에서 꼭 먹어. 간단한 거니까 꼭 먹어야 해. 알았지?” “그러지 말고 같이 먹고 들어가.” “아니야. 난 집에서 밥 먹고 나왔어. 오빠가 혼자서 다 먹어야 해.” “시간 여유 좀 있을 테니까, 차 잠시 세우고 같이 먹고 가.” “괜찮아, 정말로. 나 일 있어서 금방 들어가야 하기도 하고. 오빠가 맛있게 먹으면 그걸로 됐어.” “고마워, 나은아. 진짜 잘 먹을게.” 성준은 차가 신호에 멈춘 틈으로 나은과 시선을 맞추었다. 나은이 환하게 웃는 것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나은이 자신을 보면서 웃을수록 성준은 죄스러운 마음이 점점 커졌다. 세환과 있는 나은의 모습에 혼자 맘 졸였던 자신의 모습이 그저 바보 같게만 느껴졌다. 성준은 나은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벌써 함께 맞을 세 번째 봄을 앞두고 있는데도, 그의 눈에는 나은이 이렇게나 예쁘게만 보였다.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한 품에 안고 싶을 만큼 귀엽게만 보였다. 성준은 신호가 바뀌자 다시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는 나은이 건네준 도시락을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먹고 싶었지만, 나은은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만 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면서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이대로 나은을 보내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금방 병원에 들어가야만 했다. “나은아, 집까지 혼자가게해서 미안해. 도시락 정말 고마워.” “괜찮아. 오늘은 오빠랑 같이 출근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맛있게 먹고, 일 열심히 해!” “응.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응! 나 그럼 간다? 나중에 전화할게, 오빠.” “그래. 조심히 가.” 성준은 멀어지는 나은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그의 도시락이 나은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 그런지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은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성준은 외투를 벗고 가장 먼저 도시락을 펼쳐보았다. 아침부터 도시락을 쌌을 나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온 몸이 따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시락 속에는 맛스럽게 보이는 샌드위치와 성준이 좋아하는 설탕 토스트가 들어있었다. 직접 따뜻한 물에 차는 끓이지 못했지만, 나은은 그가 좋아하는 재스민 차 티백까지 도시락 속에 넣어두었다. 성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주머니 속에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어 나은에게 잘 먹겠다는 애정 어린 문자 메시지를 보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에 두었던 머그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재스민 차를 먼저 우린다음 샌드위치를 들어 한 입 물었다. “맛있네.” 성준은 살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샌드위치를 싸고 설탕 토스트를 만들었을 나은의 모습이 왠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성준은 생각해보면 늘 자신이 나은에게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성준의 마음을 헷갈려하며 나은이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고백했을 때, 성준은 앞으로 자신이 더 많이 나은을 아껴주고, 사랑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언제나 성준은 자신이 나은에게 그 마음 그대로 잘 대해주었는지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했다. Spring Spring. 나은은 성준의 병원에서 버스를 탔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잠이 몰려 왔다. 나은은 크게 하품을 늘어트렸다. 몸이 피곤하긴 했지만 아침 일찍부터 성준을 생각하며 그를 위한 도시락을 만들고, 성준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 앞을 찾아가고, 성준과 함께 차에 올라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 모든 것들이 좋았다.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동안에는 지수와 성준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근거 없는 괜한 의심과 괜한 오해들을 묻을 수 있는 오롯한 시간이어서 좋았다. 성준의 사소한 거짓말이나 마음속에서 자라는 자그마한 오해는 접어둘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로지 사랑하는 성준을 위한 나은의 시간이었다. 나은은 자신의 집 앞에 버스가 도착하자 하품을 크게 하며 차에서 내렸다. “어? 오빠!” 나은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버스 정류장 근처를 지나던 세환이 눈에 띄었다. 나은은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은이 크게 손을 흔들자 세환 역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슈트 차림이 아닌 간편한 복장인 것으로 보아 출근길은 아닌 것 같았다. “아침부터 네가 웬일이야? 한창 자고 있을 시간 아냐?” “응? 잠깐 성준오빠 좀 만나고 온다고. 근데 오빠는? 옷 보니까 출근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회사 휴무라서 놀러나 갈까 하고.” “놀러? 뭐 하러 가는데?” “자전거나 타러 가려고. 별 일 없으면 같이 갈래? 그렇지 않아도 혼자 가는 길이라 좀 쓸쓸하긴 했는데.” “음. 그럴까? 점심 때 쯤에 돌아오면 학원 늦지 않을 테니까.” “잘 됐다. 어서 가자.” 세환은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앞서서 걸어갔다. 나은은 그의 뒤를 쫓았다. 조금 피곤해서 집으로 곧장 들어가 쉬려고 했지만, 이런 좋은 날씨에 자전거를 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날씨가 많이 풀려 그렇게 춥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나은은 세환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한강 시민 공원으로 가 주세요.” 세환은 택시에 올라타서 목적지를 말하였다. 나은은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많은 편이라 늘 오전 늦게야 눈을 뜨곤 하는데,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근데 오빠 차는 놔두고 왜 택시를 타?” “그냥. 나 운전하는 거 별로 안 좋아 하잖아. 주차하기도 귀찮고 해서. 그리고 요새 기름 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등골이 휘어서 차 못타고 다녀.” “에이, 뭐야. 오빤 회사도 걸어가지?” “응. 회사야 걸어서 십 분이면 가니까.” 나은은 세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환과 성준은 참 다른 점이 많았다.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성준과 장난을 잘 치고 유쾌한 성격의 세환. 성격에서부터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른 점이 참 많았다. 성준과 함께하는 시간이 언제나 달콤하고 설레는 것과 달리 세환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재미있고 유쾌했다. “근데 넌 아침부터 형 회사는 왜 갔어?” “그냥 보고 싶어서.” “으, 닭살이야. 지겹지도 않아?” “지겹기는! 그나저나 오빠, 진짜 내가 여자 한 명 소개시켜 줄까?” “됐어. 나 여자에 별로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에이. 진짜 그렇게 안 생겨가지곤 빼긴.” “뭐? 내가 어떻게 생겼는데!” “내가 늘 말했잖아. 오빠는 바람둥이의 전형적인 인상이라고.” 나은의 말에 세환은 입을 삐쭉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나은은 세환의 그런 모습이 왠지 웃겨서 웃음을 터트렸다. 성준과 나은이 만나는 지난 2년 동안 세환은 단 한 번도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분식집에서 일을 하던 때의 세환은 철저한 바람둥이의 인상이었다. 그래서 세환이 편의점으로 와서 말을 거는 것이 왠지 껄끄럽게 느껴지곤 했었다. 세환과 많이 가까워진 지금에서야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바람둥이와 같은 인상은 세환을 놀릴 때 자주 쓰는 것이었다. “봐. 오늘도 나 아니었으면 혼자서 자전거 탔을 거 아냐? 아유, 동네 창피해서.” “됐어. 혼자서 자전거 타는 게 뭐가 어때서! 그렇죠, 기사님?” 세환은 투덜거리면서 택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세환의 질문에 기사는 그저 말없이 허허 웃을 뿐이었다. 나은은 뺀질거리며 기사님에게 말을 거는 세환의 모습이 2년 전과 다름이 없어 보여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조금 성숙해진 줄 알았더니, 여전히 뺀질거리고 장난기가 넘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세환에게 잘 어울리기도 했다. 진지하고, 진중한 모습은 왠지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넌 아침부터 성준 형 병원까지 가고 지극정성이네. 지치지도 않아?” “지치긴.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닌데, 뭐. 오빠도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얘 봐. 지금 애인 있다고 유세 부리는 거 맞지?” “응. 유세하는 거다, 왜!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흥. 하나도 안 부럽다, 뭐.” 세환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택시는 한강 시민 공원에 도착해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세환과 나은은 자전거 대여점으로 갔다. 갖가지 자전거들의 주르륵 세워져 있었다. 나은의 눈에는 드라마에서 보던 바구니가 달린 분홍색 자전거가 확 눈에 띠었다. 나은은 자전거를 발견하자마자 방방 뛰면서 손으로 가리켰다. 세환은 그런 나은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린 애 같이 그게 뭐야!” “왜! 예쁘잖아. 예쁘지 않아? 나 이거 타고 싶어!” “아냐, 아냐. 기왕 같이 온 김에 우리 이거 타자! 나 이거 진짜 타보고 싶었는데!” “뭐? 이건 커플 자전거잖아.” “응. 그러니까 이거 같이 타자. 나 한 번도 못 타봤단 말이야. 너 이거 타봤어?” “어? 아니. 안 타보긴 했는데.” “그럼 이걸로 결정! 이모, 저희 이걸로 빌릴게요!” 세환은 커플 자전거를 손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은은 큰 소리로 싫어!, 라고 했지만 이미 세환은 자전거를 빌려서 끌고 나오고 있었다. 나은은 입을 잔뜩 내밀고는 삐죽거렸다. 성준과도 함께 타보지 못한 커플 자전거를 대체 왜 세환과 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은의 눈은 아직도 분홍 자전거에 있었다. 그 예쁜 자전거를 타면 추위도 잊고 신나게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은아, 어서 타!” “아, 뭐야. 싫단 말이야!” “어쩔 수 없어. 벌써 빌렸어. 안 타? 그럼 나 혼자 간다?” 세환은 혼자 자전거에 올라서 페달을 돌리려고 했다. 나은은 그런 세환을 붙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세환을 그냥 보내고 자신의 맘에 쏙 든 분홍색 자전거를 타고 싶었지만, 돈을 한 푼도 들고 나오지 않았기에 세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은은 울상을 지으면서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세환은 출발, 이라고 외치면서 페달을 밟았다. 나은은 툴툴거리면서도 세환과 호흡을 맞추어 페달을 돌렸다. “우와, 이거 생각보다 재밌다!” “그치? 봐, 내가 뭐랬어! 속도 좀 더 내자. 간다!” 나은은 세환의 말에 페달을 조금 더 힘차게 밟았다. 자전거가 더 속력을 내자 나은은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리 차갑지도 않고 기분이 좋았다. 나은은 페달을 밟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몇 개의 구름들이 너무나 예쁘게 느껴졌다. 나은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침부터 성준을 만났고,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타고 있으니 오늘 하루가 온통 즐거운 일만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다음에는 꼭 성준과 함께 이곳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한강도 보면서 함께 달리고 싶었다. 그와 함께 타는 자전거는 두 배, 세 배로 더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지수와 성준의 관계 때문에 속병을 앓던 기분도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음 가득 성준만을 생각할 수 있는 오롯한 시간이 온 것 같아서 나은은 환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Spring Spring. 21 한강을 타고 제법 긴 오랫동안 자전거를 탔던 세환과 나은은 잠시 쉬기 위해 벤치 옆에 자전거를 세웠다. 다리가 조금 아파오던 나은은 곧장 벤치에 털썩 앉았고, 세환은 가까운 자판기에 음료를 뽑으러 갔다. 나은의 얼굴에는 아까부터 웃음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자전거를 타는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직장을 구하고 나서는 늘 바빠서 여유롭게 즐길 날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휴일도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성준과 시간을 보내다보면 금세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자, 넌 이온 음료지?” “응. 고마워.” 나은은 세환이 건넨 차가운 이온 음료를 받았다. 나은이 탄산을 먹으면 곧장 딸꾹질을 해서 탄산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세환이 이온음료를 뽑아왔다. 나은은 캔을 따고 입구를 옷으로 슬쩍 닦은 다음 캔에 입을 댔다. 시원한 이온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자전거를 타면서 느꼈던 갈증이 한 번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시원하다!” “이거 마시고 다시 공원 쪽으로 돌아가자. 자전거 반납하고 점심 먹고 들어가면 늦지 않겠다. 그렇지?” “응. 오빠가 맛있는 거 사줄 거지?” “지갑도 안 갖고 나온 어린 중생 구제하는 셈 치지, 뭐.” “우와, 신난다! 진짜 맛있는 거 먹어야지!” 신난 표정으로 말하는 나은을 보며 세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세환에게 나은은 혀를 빼쭉 내밀고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성준을 보아서 그런지 나은은 오늘 하루가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꾸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았다. 머리도 맑았고, 뭐든지 잘 될 것만 같은 날이었다. 나은은 이온음료는 서둘러 꿀꺽꿀꺽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손을 세환에게 내밀었다. “서비스로 캔은 내가 버려줄게.” “어이구. 참 고맙기도 하셔라.” “어라? 오빠가 버릴래?” “아니. 자, 여기. 친절만점 서비스 감사합니다.” 세환은 꾸벅 인사까지 하고는 빈 캔을 나은의 손에 쥐어주었다. 나은은 살짝 입을 삐죽거리고는 두 개의 캔을 휴지통에 버리고 다시 돌아왔다. 세환은 그새 자전거를 다시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저 자전거에 오른 세환은 나은을 보며 어서 타라는 모션을 취했다.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자전거에 올랐다. 나은은 자전거에 올라타자마자 페달을 가볍게 밟았다. 자전거는 다시 힘 있게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면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 여간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나은은 자전거를 타면서 한강변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바람을 쐬러 나온 다정한 연인들도 있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페달을 밟던 나은의 눈은 한 가족에게서 멈추었다. 꽤 젊은 부부와 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양 손을 부모가 나란히 나누어 쥐고 산책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나 단란해보였다. “엄마!” 세환과 나은의 자전거가 그 가족을 지나갈 때에 아이가 엄마를 올려다보며 엄마, 라고 명랑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은은 고개를 돌려 이미 지나친 그 가족을 돌아보았다. 아이가 귀여운 듯 웃고 있는 엄마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 그리고 그런 아이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나은의 얼굴에는 연한 미소가 있었다. 단란한 젊은 부부의 모습이 나은의 눈에 너무나 예뻐 보였다. 나은은 성준과 자신이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간을 내어 여유롭게 산책을 하면서 귀여운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고, 성준 역시 애정 어린 눈으로 아이를 함께 바라보고 있다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성준과 가족이 되어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함께 출근을 하며, 집으로 돌아와 그를 기다리거나 그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와 함께 하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그 무엇보다 행복할 것 같았다. “정나은! 한 눈 팔지 마. 자전거 흔들려!” “어? 응!” 나은은 세환의 말에 다시 페달을 밟는데 집중을 했다. 묵직하게 밟히는 페달의 느낌이 오늘따라 좋기만 했다. 시민공원에 가까워지자, 나은의 눈에 제법 근사해 보이는 레스토랑이 눈에 띠었다.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너무 무거워서 꺼려하는 나은이었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의 레스토랑인 것 같아서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세환에게 저기서 밥을 먹자고 할까, 하다가 부담스러운 가격일 것 같아서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월급을 받으면 성준과 함께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성준도 좋아할 것이었다. 나은은 살짝 웃으며 레스토랑에서 고개를 돌렸다. 나은은 자전거를 밟다가 이내 레스토랑의 이름을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려 레스토랑을 보았다. 레스토랑에서는 마침 한 가족이 나오고 있었다.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는 부부의 모습이 아까 보았던 젊은 부부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까의 가족보다 남자 아이가 좀 더 컸고, 엄마는 더 마른 편이었다. “어?” 나은은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가족을 유심히 살피다가 페달을 밟던 발을 멈추었다. 그 때문에 자전거가 살짝 휘청 하며 넘어질 뻔하였다. 세환은 왼발로 땅을 짚어 겨우 멈추고는 뒤를 돌아서 나은을 보았다. 나은은 레스토랑에서 나온 가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멍한 표정의 나은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세환은 나은의 시선을 따라갔다. “저거…, 성준 형 아냐?” 나은의 시선은 여전히 한 곳에 멎어있었다. 나은은 자신이 잘못 본거라 믿고 싶었는데, 세환의 말에 이것이 환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부부는 지수와 성준이어었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남자 아이의 손을 양 쪽에서 잡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은의 눈에는 지수와 성준 위로 아까 보았던 젊은 부부가 겹쳐보였다. 어느새 자전거에서 내려온 나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은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나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은은 방금 전까지 성준과의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자신의 모습이 부질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가족으로 보이는 저들이 지수와 성준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지수와 성준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으려고, 오해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은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은은 어젯밤 함께 영화를 보며 즐겁게 했던 데이트와 오늘 아침 자신이 건네준 도시락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던 성준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이 마치 아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어, 지수 왔어? 잠시만 기다릴래? 나 곧 나갈게. 응, 알았어.’ 나은은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밀려온 아찔한 현기증을 참아내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성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레스토랑 쪽에서 점점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성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응, 오빠. 지금 집이야?’ ‘어? 아, 응. 왜?’ ‘그냥. 오랜만에 오빠가 쉰다니까 좋아서.’ 집에서 쉬고 있다던 성준의 목소리와 지수와 함께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성준의 모습이 나은의 머릿속에서 오버랩 되었다. 거짓말을 해가며 지수를 만났던 처음 보는 성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나은은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깨물고 있던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은의 두 뺨을 따라서 눈물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나은아,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갑자기. 형이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형한테 가보자. 응?” “…아니. 아, 니. 오빠, 그냥 가자. 우리…, 그냥 가, 자.” 나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세환에게 말했다. 지금 성준에게로 갔다가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화를 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성준에게, 그리고 자신이 아끼는 지수에게, 어떠한 상황 설명도 듣지 않고 그저 화를 낼 것만 같았다. 그리고 펑펑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서 성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두려운 것은 혹여나 성준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나은은 떨리는 손으로 자전거를 밀었다. 세환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나은은 고개를 떨어트리고 눈물을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듯 자전거를 힘없이 밀고 있었다. “하.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세환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나은의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자신의 손으로 닦아주었다. 울고 있는 나은을 그저 달래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은은 울음을 참으려고 애를 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어서 가자, 라고 말을 하였다. 세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전거를 힘없이 밀고 있는 나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이 자전거를 끌었다. 나은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세환을 따라갔다.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은의 머릿속에는 젊은 부부의 모습과 지수와 성준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자신이 꿈꾸던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지수가 있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고, 가슴이 아팠다. 나은은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훔쳐내었다. “그만 좀 울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닐 테니까 그만 좀 울라고, 나은아.” 나은은 타이르는 듯한 세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환은 자전거를 반납하고 가까운 벤치에 나은을 앉혔다. 어느새 레스토랑과는 멀어져 성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은은 눈물을 참아내려고 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버리는 눈물을 막기가 힘들었다. 세환은 그런 나은을 말없이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빠.” “응.” “집, 에… 가자.” 나은은 눈물을 훔쳐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은의 말에 세환은 벤치에서 곧장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은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은을 일으켰다. 세환은 나은을 데리고 가까이에 세워진 택시를 아무거나 골라 탔다. 나은은 택시에 올라서도 말이 없었다. 그저 창문을 조금 내리고 택시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얼굴로 바로 맞고 있었다. 나은은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자신이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은은 함부로 행동하여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수와 성준이 친한 사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고, 분명 어떤 사정이 있어서 아이와 함께 레스토랑에 갔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해해보려고 해도 머리만 이해할 뿐, 눈물은, 가슴은 그것을 이해하기를 버거워했다. 성준에게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생각에서만 멈출 뿐 나은의 가슴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나은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거야. 저번에도 그렇고, 형이랑 무슨 일 있어?” 세환이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나은에게 물었다. 나은은 고개를 돌려 세환을 쳐다보고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은과 성준의 사이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어젯밤에도 평소처럼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했고, 오늘 아침에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전거를 타러 온 것이었다. 시시콜콜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성준에게 털어내는 것도 변함이 없었고, 매일 밤 성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드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조금씩 뒤틀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던 지수와 성준의 사이를 의심하고, 불편해했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보다 지수가 더 성준과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성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지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변함없는 가운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내리자.” 어느새 택시는 나은의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다. 나은은 세환의 말에 택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이제 곧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데, 나은은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지수와 성준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속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뭐라 표현할 수도 없는 묘한 감정이 나은을 덮쳐왔다. 그리고 자꾸만 불쑥 불쑥 눈물이 솟아오르려 했다. 성준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는 누구보다도 확신할 수 있었는데, 나은은 그 확신이 흔들리는 기분을 받았다. 성준에게 주던 확고한 신뢰는 언제부턴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나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나은은 두려웠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자신만의 허튼 상상이었으면 했지만, 혹시나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지수와 너무나 잘 어울렸던 성준이었다. 나은이 성준을 알기 전부터 지수는 성준을 알아왔었다. 그리고 나은은 지수가 성준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나은은 혹시나 지수가 아직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두려워졌다. 어쩌면 자신보다 지수가 성준에 대해 더 많이 알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한 의심은 점점 큰 것으로 옮겨갔다. “나은아. 들어가서 좀 쉬다가 학원 가. 맘 같아선 내가 같이 있고 싶은데, 너 출근 할 시간 다 되가. 그만 울고, 응? 알았지?” 세환은 작게 한숨을 쉬며 나은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나은은 자신을 끝까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세환에게 어떠한 답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세환의 모습마저 사라지자 나은은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대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은은 곧장 욕실로 가 세면대에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으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눈물이 쏟아졌다. 나은은 다리에 힘이 풀려 세면대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저 눈물이 흘렀다. 어떠한 것도 성준의 입으로 직접 듣지 못했고,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그저 한심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눈물이 흘렀다. 속이 쓰리고 가슴이 아팠다. 지수와 성준이 함께 있었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의 모습이 나은이 꿈꾸던 단란한 가정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었다는 것이었다. 나은은 자전거를 타며 했던 자신의 상상이 그저 자신만의 것일 까봐 두려웠다. “아닐, 거야. …정말, 아닐 거야.” 나은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세면대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흘러나오는 물을 잠그고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나은은 성준에게 연락하기 위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핸드폰 바탕 화면에 성준과 함께 찍은 사진이 가장 먼저 보였다. 나은은 왠지 그 사진조차 슬프게만 보였다. 외우고 있는 익숙한 성준의 번호를 누른 후, 나은은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얹고도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버튼을 누르려고 하면 괜한 두려움이 나은을 덮쳐왔다. 성준의 입으로 성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이 기대하던 것이 아닐까봐 두려운 마음에 감히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나은은 손에 힘이 빠져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나은은 그저 그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Spring Spring. 22 성준은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일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오전 지수가 고아원의 동혁이가 함께 자신을 찾아왔었다. 심리치료를 마치고 병원 근처에서 간단하게 점심이나 함께 먹으려고 했는데, 마침 지수가 소개시켜 주고 싶은 레스토랑이 있다며 한강 시민공원 근처로 가자고 하였다. 나은과 함께 가기 좋을만한 곳이라고 하기에 성준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말한 레스토랑은 분위기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나은이 좋아할만한 곳이었다. 레스토랑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레스토랑에 가는 것을 꺼리는 나은이었는데, 다른 곳들과 달리 가벼운 분위기라 나은도 좋아할 것 같았다. 성준은 나은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미리 먼저 맛보았다. 질기지 않고, 음식 맛도 제법인 것이 이번 주말에 나은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오는데, 말없이 밥을 먹던 동혁이가 삼촌이라 부르며 성준을 올려다보았다. 성준이 동혁이를 내려다보자, 아이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빠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또래의 아이가 보였다. 고아원에서 자라느라 애정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란 터라 그런 모습이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성준은 웃으면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혁이는 성준의 손을 꼭 붙잡고서야 활짝 웃었다. 아이는 나머지 한 손을 지수와 붙잡고는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으니 성준은 마치 자신이 아빠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준은 나은과 자신의 아이를 낳아, 그 손을 꼭 붙잡고 나들이를 가는 상상을 했다. 그런 성준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환한 웃음이 서렸다. 성준은 나은을 만나기 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는 것을 단순히 귀찮은 일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은을 만나고 언제부턴가 자신의 생각이 바뀐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성준은 자신과 나은을 반반씩 빼닮은 예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나은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자라는 아이를 함께 보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선배. 저거 나은언니 아니에요?” 상상에 잠겨 있느라 주변을 살피지 않았던 성준이 지수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수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로 나은이 있었다. 오늘 아침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나은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나은이 세환과 함께라는 것이었다. 성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세환과 나은이 함께 있는 모습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성준은 나은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은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나은은 세환과 이야기를 하며 자전거를 밀고 있었다. 성준의 시선은 잠시 동안 나은이 밀고 있는 커플 자전거에 멎어있었다. 자신도 한 번도 나은과 함께 타보지 못했던 커플 자전거였다. 그것을 세환과 나은이 함께 탔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성준이 자전거에 있던 시선을 다시 나은 쪽으로 옮겼을 때, 세환의 손이 나은의 얼굴 쪽으로 향하였다. 세환은 나은의 얼굴을 살피는 듯 자신의 얼굴을 나은 쪽으로 가까이 대면서 한 손으로는 나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성준은 나은을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다면, 세환은 나은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은이 잠시 고개를 든 순간, 성준은 나은이 울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 울어.” 성준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만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은이 세환의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이상하게 아팠다. 세환은 나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자전거를 밀고 있는 나은의 손을 잡아채었다. 그리고는 나은의 어깨에 손을 둘러 토닥였다. 그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성준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나은에게 달려가 나은을 한 품에 안고 세환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나은을 향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선배. 저 남자는 누구예요?” 말없이 나은과 성준을 번갈아서 보고 있던 지수가 성준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준은 지수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나지막이 대답을 했다. “그냥 나은이랑 친한 애.” “선배도 아는 사람이에요?” “응, 알아.” 그냥 친한 애, 그 말을 하면서도 성준은 그 말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세환과 함께 있을 때 밝게 웃던 나은의 모습이 성준의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집이 가까워 사소한 일에도 자주 만나는 두 사람을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했다. 성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환과 나은의 사이를 의심하는 것은 항상 자신을 향해 예쁘게 웃던 나은을 배반하는 일이라 생각을 하였는데 성준은 자신의 두 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너무나 불안해졌다. 나은과 세환이 함께 커플 자전거를 타며 한강을 따라서 신나게 달렸을 생각을 하니 화가 났다. 아침 일찍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와 도시락을 전해주고는 곧장 세환을 만났을 나은을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나은의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성준은 나은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자신이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변해도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삼촌. 왜 그래요? 우리 안 가요?” 성준의 손을 잡고 있던 동혁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성준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억지로 살짝 미소를 짓고는 가야지, 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나은이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성준은 아이의 손을 잡으며 나은과 함께하는 삶을 생각했던 자신이 왠지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과 결혼하여 나은과 자신의 아이를 함께 기르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오로지 자신 혼자만의 생각처럼 느껴져 화가 났다. 나은도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성준은 지수와 동혁이를 보내고 자신의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나은아.” 성준은 책상에 앉아서 핸드폰을 열었다. 그 속에 있는 나은의 모습을 보며, 나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늘 아침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와서 밝게 웃었던 나은이 곧장 세환을 만나 커플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누볐을 거란 생각을 하니 화가 나고 가슴이 저릿했다. 성준은 나은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신호도 채 가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종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성준은 지난 2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나은의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상상을 했다. 세환과 나은은 오랫동안 알던 사이였다.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나은을 알기 전부터 세환은 나은을 알아오고 있었다. 성준은 아주 오래된 기억들 중 하나를 찾아냈다. 줄곧 잊고 지냈던 하나의 기억이었다. 2년 전의 봄,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을 나은을 위해 성준은 편의점을 찾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은은 성준의 존재에 대해서 아예 모를 때였다. 성준은 우산과 다이어리를 함께 전해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릴 요량이었다. 그날 한 남자가 편의점 앞에서 나은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르바이트를 마친 나은은 그 남자와 같은 우산을 쓰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성준은 그날, 자신의 초라함을 느꼈다. 나은을 마음에 두었던 자신의 모습이 처음으로 비참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날 성준은 빨간 우산과 자신의 번호를 몰래 적어놓았던 나은의 다이어리를 편의점에 맡기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게….” 그동안은 알지 못했는데, 성준은 그때 깨달았다. 나은을 기다리며 함께 우산을 쓰고 사라졌던 그 남자가 세환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편의점의 맞은편에 있던 분식집에 일하며 나은을 알고 지냈다는 세환이가 나은과 함께 갔던 그 남자였음을 필연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성준은 더욱 심한 비참함을 느꼈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성준은 나은이 보고 싶었다. 나은을 직접 보고 나은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나은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세환이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들으면 흔들리고 있던 신뢰가 바로 설 것만 같았다. 성준은 자신이 눈으로 본 것, 자신이 상상한 것은 그저 허망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단순한 의심이고 오해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나은의 입으로 들으면 확실해 질 것 같은데 성준은 이상하게도 차마 나은에게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나은아. 내가 몹쓸 오해 하고 있는 거겠지?” 성준은 나은의 사진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엄한 생각이었으면, 몹쓸 오해였으면 하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들었다. 성준은 서류를 펼쳤지만 아무리 읽으려고 해도 글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에는 세환과 나은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글자를 읽기가 힘들었다.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가 다시 생각났다. Spring Spring. 나은은 강의를 마치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버스정류장에 섰다. 오늘 하루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결근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부산에 다녀오느라 며칠을 출근하지 못하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나은은 속이 답답하고, 먹먹하여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전화도 한 통 없네.” 나은은 코트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어 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 종일 성준의 연락이 없었다. 나은은 차마 자신이 성준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그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열두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의 전화는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나은은 핸드폰을 다시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나은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 별 몇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은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다 도착한 버스 막차에 올랐다. 버스에는 대여섯 명의 승객들이 각자 창문을 보면서 있었다. 나은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 이상은 서로 전화를 주고받던 나은과 성준이었는데, 오늘은 아침에 한 한 통의 전화를 제외하고는 전혀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나은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성준이 지수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멍청한 오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무너져가는 신뢰는 막을 수가 없었다. 나은은 눈을 꼭 감았다. 성준과 함께 했던 행복한 일들을 생각하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마치 한 가족같이 잘 어울렸던 지수와 성준의 모습이 그 상상을 가로 막았다. 나은은 또 눈물이 솟구치려해 입술을 깨물었다. 지수와 함께 웃고 있던 성준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은은 버스가 집 앞에 도착하자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나은은 자꾸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막으려고 억지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물을 흘려버리면 자신이 생각하는 엉뚱한 상상들이 모두 진실이 될까 두려워 울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성준의 마음을 의심한 것이, 성준의 마음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 될까봐 나은은 울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나은아.” 멍하니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은을 불렀다. 나은은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나은은 혹시 성준이 자신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나은의 기대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나은이 천천히 몸을 돌렸을 때, 나은의 뒤 쪽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은 성준이 아니라 세환이었다. 나은은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세환을 보았다. “…아, 세환오빠.” “이제 들어오는 거야? 오늘 강의는 잘 했어? 성준 형이랑은? 전화는 해봤어?” 나은이 걱정이 되었던 듯, 세환은 나은을 보자마자 질문을 쏟아냈다. 나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세환을 바라보았다. 나은은 아까 그렇게 자신을 보내놓고 걱정이 되어서 퇴근 시간에 맞춰 나온 세환의 마음이 읽히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세환은 나은을 데리고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차가운 바람이 나은을 휘감고 흩어졌다. 나은은 말없이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답답했다. “나은아, 형한테 연락은 해본 거야?” 나은은 세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은의 반응에 세환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은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그 여자, 너도 혹시 아는 사람이야?” “…응. 잘 알아.” “형이랑은 어떤 사이인데?” “동아리 선후배.” “그렇구나.” 세환과 나은의 사이에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환은 나은의 말을 듣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땅을 보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빠한테 연락이 한 통도 안 왔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아까 그 이후로, 너도 형한테 전화 안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오빠라면 어떨 것 같아? 오빠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마치 가족같이 있는 그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설령 그 두 사람이 아무 감정 없이 그저 친한 사이일 뿐이라도 그런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오빠의 기분은 어떨 것 같아?” 나은은 혹시 자신이 혼자서 예민하게 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환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감정이 당연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 감정이 잘못된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세환은 곧장 답을 내놓지 않았다. 나은은 말없이 세환의 답을 기다렸다. 세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은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세환의 말을 들었다. “물론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은아. 그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네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당연해.” “난, 단 한 번도 오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엔 그냥 오빠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어.” “왜? 왜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 아이랑 오빠가 너무 잘 어울리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었으니까.” 나은은 큰 한숨과 함께 말했다. 지수와 성준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함께 다니면 누구나 당연히 연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래서 지수를 질투했던 적도 분명히 있었다. 성준과 만나면서 그런 마음은 줄어들었지만, 이제야 그런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뭐?” “그 여자랑 성준 형이랑 잘 어울리는데, 그게 뭐 어때서?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야? 형의 여자 친구는 너잖아. 형이 사랑하는 사람이 너라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형이 다른 사람이랑 잘 어울린다는 겉모습이 뭐가 그리 중요한데? 그리고 왜 스스로를 못 깎아내려서 안달이야? 내 눈에는 너랑 성준 형이 충분히 더 잘 어울려.” 나은은 세환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환의 말이 맞았다. 외적인 모습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성준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은은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맞아. 오빠 그건 맞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나보다 성준 오빠에 대해 더 오래 알아왔던 그 아이가 오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오빠와 더 가깝지는 않을까, 한때 오빠를 마음에 품었다는 그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혹시 오빠가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세환은 울먹이며 하는 나은의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환의 한숨 소리와 함께 나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나은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한 손으로 급하게 눈물을 훔쳐내었다. 세환은 그런 나은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나은아. 그런 생각 안 해봤어? 형보다 너에 대해 더 오래 알아왔던 내가 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형도 불안하지 않았을까, 혹시나 자신보다 내가 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집이 가까워 자주 왕래하는 걸 보면서 혹시나 내가 널 좋아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그리고 그러면서 네가 나에게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을 형도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 안 해봤어?” 나은은 세환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말에 나은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은은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은은 자신이 지수와 성준의 사이를 의심하고 오해하듯, 성준 역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성준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자신과 성준이 아닌 다른 이유로 오해가 쌓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씩,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씩 쌓인 오해를 그동안 느끼고 있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성준의 인간관계에 끼어들어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지수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 자신처럼 성준 역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자신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은아. 혼자서 속병 앓지 마. 그것처럼 미련한 건 없어. 나라면 지금 이러고 안 있어. 내일이라도 형 만나. 그리고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내가 아니라 형에게 이야기를 해. 미련하게 굴지 말고, 응?” 나은은 세환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환은 나은의 뺨을 타고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으로 직접 닦아 주었다. 나은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나은은 성준이 보고 싶었다. 성준의 부드러운 미소가, 웃을 때 한 쪽만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성준의 입으로 모든 것을 듣고 싶었다. 자신의 상상이 아닌, 오해나 의심이 아닌, 사실을 성준에게서 듣고 싶었다. 나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 속에 아까보다 더 많은 별들이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Spring Spring. 23 지난 밤 울며 잠이 들었던 탓에 나은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겨웠다. 누군가가 눈 위에 묵직한 것을 얹어 놓은 것처럼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눈이 무거운 만큼 몸도 무거웠다. 온 몸이 축 쳐지고 힘이 없었다. 나은은 어렵사리 눈을 뜨면서 손으로 머리맡을 뒤적였다.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손에 쥔 나은은 몸을 일으키면서 핸드폰을 열었다. 성준의 전화가 와있을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핸드폰을 열었던 나은은 딱 그만큼의 실망감을 안고 핸드폰을 내렸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성준이었기에 나은은 지금의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은은 지난 밤 세환에게 많은 조언을 얻었다. 그리고 밤새 울며 생각했었다. 자신이 지수와 성준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처럼 성준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말은 하지 않았겠지만,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나은은 자신이 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행동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성준만 의심하고, 오해했었던 그 모습이 못되게 느껴졌다. 그리고 성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오빠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나은은 아직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은은 세환이 자신에게 했던 말처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준에게 말하려고 생각을 했다. 세환이 아닌, 성준에게 모든 것을 말하면서 둘 사이의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었다. 그러나 나은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성준 때문에 왠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시간은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성준은 이미 출근을 하고 한창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중간 중간 연락은 잊는 법이 없는 성준이었는데, 어제부터의 그의 행동은 나은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나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갔다. 양치를 하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고서 아무도 없는 텅 빈 거실로 나와서 소파에 앉았다. 나은은 리모컨을 손에 쥐고 앉았지만, TV를 틀 생각은 하지 않고 베란다 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나은의 눈앞에는 아직도 지수와 성준의 모습이 선했다. 나은과 성준은 2년을 만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사소한 일로 다툰 적이 없었다. 언제나 서로를 위해주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양보하곤 했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괜한 감정 다툼이 싫어서 언제나 서로에서 서로를 맞춰가곤 했다. 그랬기에 나은은 지금의 상황이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언제까지나 이런 마음을 속에만 담아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환의 말처럼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아닌 성준에게 말을 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오늘 오빠한테 연락이 한 통도 안 왔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아까 그 이후로, 너도 형한테 전화 안했잖아.’ 나은은 지난 밤 세환과 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소파 위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성준의 번호를 눌렀다. 성준은 번호를 누르고도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가 오래 걸렸다. 나은은 신호음이 가고 있는 핸드폰을 조심스레 귓가에 댔다. 몇 번의 신호음이 흐르다가 이내 여보세요, 하는 성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어, 그래. 나은아. “뭐야. 어제부터 전화도 안하고.” -어? 미안해. 그냥 좀 정신이 없었어. 잘 자고 일어났어? “응, 그럼. 오빠, 오늘 금요일이니까 조금 일찍 마칠 수 있지?” -응. 일 많이 없어서 괜찮을 것 같아. “그럼 오늘 나 데리러 오면 안 돼?” -안되긴. 오늘 열시에 마치지? “응! 오빠 그럼 열시에 학원 앞으로 오는 거다?” -알았어. 늦지 않게 갈게. “그럼 나중에 또 전화 할게, 오빠.”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핸드폰을 닫았다.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자, 나은의 얼굴에 있었던 옅은 미소가 점점 엷어지면서 사라졌다. 나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프고 몸에 힘이 없었다. 나은은 자신의 쳐지고 힘없는 목소리에 혹여나 성준이 걱정을 할까 싶어 억지로 더 밝은 목소리를 내며 통화를 마쳤다. 나은은 자신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던 그에게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많이 바빴을 수도 있고, 그에게 전화를 미처 걸지 못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지수와 이름 모를 꼬마 아이와 함께 한강에 있던 레스토랑에서 나왔던 것도 분명 어떠한 사정 때문에 그랬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은은 괜한 작은 한숨을 계속 내쉬었다. 나은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뒤에서만 맘 졸이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성준의 앞에서는 밝고 환하게 웃으면서, 뒤로 돌아서면 이런 걱정, 저런 걱정에 맘 졸이고 한숨 쉬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성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그와 괜한 말다툼을 하지 않으려고 나은은 항상 자신에게 상처를 내었고, 자기 자신과 싸우기 일쑤였다. “아, 학교 가고 싶다.” 나은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은은 갑자기 학교가 가고 싶었다. 성준을 만났던 곳, 항상 그와 함께 데이트를 했던 곳, 넓은 캠퍼스를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곳, 시험기간이 되면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고, 축제가 되면 기타를 치는 그의 멋진 공연을 봤던 곳. 나은은 그와 함께 했던 학교로 가서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추억들을 되짚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은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요 며칠 찬바람을 맞았던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감기가 오려는 것 같았지만, 나은은 빠르게 외출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섰다. 괜히 집에만 있으면 더욱 몸이 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을 나서자 오후의 햇살이 따스하게 밀려왔다. 겨울의 끝자락, 날씨가 정말로 많이 풀려 있었다. 나은은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바람이 조금 열린 창문 틈사이로 들어왔다. 나은은 조금씩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싫어 창문을 급히 닫았다. 나은은 학교로 가는 동안 창밖을 내다보았다. 외로운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나은이 성준을 처음 만날 때는 분홍빛 벚꽃으로 물들어 있던 나무였다. 나은은 어느새 성준과 함께 맞는 세 번째 봄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실감되지 않았다. 그를 만난 것이 바로 어제와 같은 데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나은은 그의 생각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은의 곁에 그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와 함께 걷던 길, 그와 함께 보던 영화, 그와 함께 샀던 옷, 그와 함께 듣던 음악, 그와 함께 탔던 버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나은의 곁에 이었다. -이번 정류장은 한국대학교 입구입니다. 다음은 한국 학생 광장입니다. 나은은 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가 천천히 정차하고 버스에서 내린 나은은 가장 먼저 자신이 일했던 편의점을 마주했다. 편의점 안에서는 이름 모를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나은은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은은 길을 건너 학교 정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라 그런지 기분이 색달랐다. 학교 앞은 여전히 번화했고,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찾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졸업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나은은 마치 한 십년 전 쯤 떠나온 학교를 다시 찾는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학교를 둘러보며 성준과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학교 곳곳 그와의 추억이 없는 장소가 없었다. “어? 나은언니!” 나은이 분수대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지수가 있었다. 지수가 나은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가운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은 역시 손을 살짝 들어 지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평소였으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방방 뛰었을 나은인데, 오늘은 그저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은의 눈앞에는 다시 지수와 성준이 함께 있던 모습이 스쳐 지났다. “언니! 학교엔 무슨 일로 왔어요?” “그냥. 오랜만에 와보고 싶어서. 넌 방학인데도 계속 학교 와?” “네. 교수님이 일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 와서 도와드리고 이제 집에 가는 길이예요! 우와, 우리 이렇게도 만나고! 언니랑 전 역시 인연이긴 인연인가 봐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지수를 보며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불편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수는 자신을 보고 너무나 밝게 웃고 있었다. 나은은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지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씽긋 웃으면서 지수를 보았다. “언니! 밥 먹었어요? 나 사실 배고픈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집에 가려고 했던 거였거든요. 아직 밥 안 먹었으면 나랑 같이 밥 먹지 않을래요?” “그래? 그럼 그러자. 나도 아직 한 끼도 안 먹었어.” “아침도 안 먹은 거예요? 에, 그러니까 언니 이렇게 말랐지! 언니는 살이 좀 붙어야 예쁘단 말이에요.” “치. 진짜 마른 사람이 그런 말하니까 신뢰감 빵점이다.” 지수는 나은의 말에 배시시 웃었다. 나은은 이렇게나 자신을 잘 따르고, 예쁜 동생을 불편해 했던 자신이 나쁘게 느껴졌다. 나은은 지수가 아무런 악의 없이 성준을 만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오해를 하게 되고,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 속상했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지수와 성준의 모습이 선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언니. 뭐 먹을래요? 아, 언니는 알 밥 좋아한다고 선배가 그러든데. 우리 알 밥 먹으러 갈까요?” “알 밥? 좋지. 어서 가자. 나도 배고프네.” “그래요. 학교 앞에 맛있는 알 밥집 생긴 거 언니 알아요? 거기 친구들일아 몇 번 갔었는데 진짜 괜찮더라고요. 언니가 가면 아마 좋아할 거예요!” 지수는 쾌활하게 말하면서 나은을 이끌었다. 나은은 지수가 이끄는 대로 발을 움직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몸이 좋지 않은 탓에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나은은 지수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수와 나은은 학교를 나와 가까운 식당에 도착해 나란히 알 밥을 주문했다. 배가 고팠는데 마침 나은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나은을 만난 것이 반가워서인지, 지수는 내내 발랄하게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잠시 뒤 주문했던 알 밥이 두 사람 앞에 놓여졌다. 지수는 먼저 숟가락을 들고는 잘 먹겠습니다, 라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근데 지수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뭘요? 뭐든 물어봐요, 언니!” 나은의 말에 지수는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은은 자신 앞에 두었던 물 잔을 들어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었다. 나은은 그동안 지수에게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 질문이 자칫 지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은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은이 망설이는 표정을 보이자 지수는 괜히 긴장한 채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그게…, 이런 말 한다고 해서 네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무슨 말인데요?” “내가 예전에 너희 동아리에 있던 내 후배한테 네가 성준 오빠를 좋아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 그게 혹시 사실인가 해서 말이야. 그냥 궁금해서.” 나은은 어렵게 입을 열고 지수에게 물었다. 나은의 물음에 지수는 잠깐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지수의 표정을 본 나은은 괜히 그런 질문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은은 지수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봐 괜한 조바심이 들었다. 나은은 긴장한 채 지수를 보았다. 지수는 이내 다시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나은과 눈을 맞추었다. “언니 그거 때문에 걱정이 됐어요?” 지수는 나은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장난스런 지수의 목소리에 나은은 한시름 놓은 듯 긴장을 풀었다. “언니 괜한 걱정 말아요. 다 옛날 일이니까요.” “옛날 일?” “네. 예전엔 그랬어요. 선배를 좋아했던 적 분명히 있었어요. 아, 좋아했다기보다는 동경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네요. 언니도 알다시피 선배는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출중하고, 기타도 잘 치고, 친절하고, 다정하잖아요. 동아리 동기들 중 한 번도 선배를 안 좋아했던 사람은 손에 꼽을 걸요?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아, 그렇구나. 내가 괜한 걸 물었네. 미안해.” “아니에요, 언니. 사실 선배를 오래 알아오면서 언젠가 한 번쯤은 뒤돌아 봐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분명 있었어요. 그래도 걱정 말아요.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요. 선배랑은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불편한 감정 없는 사이에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저 사실 만나는 사람 생겼어요!” 지수는 생긋 웃으면서 말을 했다. 나은은 괜히 지수에게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언젠가 꼭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기쁜 마음도 있었다. 나은은 자신이 미안해할까 봐 일부러 웃으면서 말해준 지수에게 고마웠다. Spring Spring. 퇴근을 준비하던 성준이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홉시 반, 지금 출발하면 늦지 않게 나은의 학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준은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불을 끄고 나서 병원을 빠져나왔다. 성준은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나은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렇게 마음이 무거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성준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내 불안한 마음이었다. 혹여나 나은이 세환에게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항상 웃게 하는 세환의 곁에 있을 때 더욱 편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성준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혼자만의 고민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성준은 불안감에 나은에게 쉽게 전화를 걸지도 못했다. 전화를 걸었을 때 옆에서 세환의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만 있었다. 성준은 그런 소심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미련하다, 정말.” 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성준은 오늘 오전에 걸려온 나은의 전화가 그렇게나 기쁠 수 없었다. 차마 나은에게 전화를 걸고 있지 못하던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왜 전화를 하지 않았냐는 나은의 투정마저도 반가웠다. 하지만 막상 나은을 보러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성준의 눈에는 세환과 함께 커플자전거를 끌고 가던 나은과 나은의 눈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던 세환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성준은 병원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은의 학원 앞에 도착했다.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학원 앞에 차를 대고 잠시 나은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열시가 넘자 학원에서는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준은 이제 곧 나은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학원 입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던 아이들의 행렬이 끊기고 나은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마친 건가.” 성준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열시 십오 분, 열시에 마친다던 나은이었다. 그는 나은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는 차에서 내려서 학원 입구 쪽을 계속 보고 있었다. 전화가 연결되고 있다는 신호음을 계속 들렸는데 나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성준은 괜한 조바심이 들었다. 그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넣고는 차에 기대어 나은을 기다렸다. 십분 쯤 지나자 학원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성준은 반사적으로 입구를 쳐다보았다. “나은아!” 성준은 학원에서 나오는 나은을 보자마자 손을 살짝 들고는 나은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은은 한 쪽 어깨에 핸드백을 메고, 다른 한 쪽 손에는 책을 잔뜩 들고 나오고 있었다. 성준이 나은에게로 점점 다가가는데, 나은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어? 나은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성준은 나은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 물었다. 나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걱정이 되어 나은의 얼굴을 살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얼굴색이 좋지 못한 것이 아무래도 몸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살짝 차가운 바람이 불자 나은은 몸을 움츠렸다. 나은은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성준은 나은을 조심스럽게 차 쪽으로 부축했다. “나, 괜찮아, 오빠.” “아냐. 안 좋아 보이는데, 뭐. 어서 차에 타. 히터 틀어둬서 따뜻할 거야.” 나은은 성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보조석에 나은을 태우고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성준은 안색이 좋지 않은 나은을 걱정스런 눈으로 보았다. 나은은 뜨거운 입김을 내면서도 괜찮다며 살짝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성준은 그런 나은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은은 반복적으로 콜록거렸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나은아,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성준은 나은을 두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는 한 쪽에 있는 자판기에서 뜨거운 율무차를 한 잔 뽑았다.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이라 올 겨울에는 나은이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나 싶었는데 여지없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성준은 율무차를 조심스럽게 차로 가져갔다. 나은은 눈을 감고 쉬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나은아 일단 이거 좀 마셔. 따뜻한 율무차야.” “…고마워, 오빠.” “으유. 걱정되게 이게 뭐야. 집으로 데려다 줄게. 오늘은 집에서 푹 쉬어.” 성준은 나은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은은 뜨거운 율무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성준은 딱 보기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집으로 가지 않겠다는 나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가서 쉬어야지. 누가 봐도 ‘나 아파요.’라고 얼굴에 쓰여 있고만. 괜히 고집 피우지 말고 집으로 가자.” “…싫어.” “왜? 집에서 가서 푹 쉬어야지.” “…오빠랑, 같이 있을래.” 나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성준은 나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은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성준은 조심스럽게 손을 나은의 이마에 가져갔다. 손을 닿기만 해도 뜨거울 정도로 열이 나고 있었다. 성준은 걱정스런 눈으로 나은을 보다가 이내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성준은 나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은은 한 번 자신이 한 말은 곧이곧대로 행하는 아이였다. 자신과 같이 있겠다는 나은을 말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금요일이었다. 나은의 부모님은 매주 금요일에 집을 비우시곤 했다. 나은을 집으로 데려다 주면 나은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성준은 나은을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우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 그에게도 마음이 편했다. 나은을 밤새도록 간호하며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도 더 나았다. “…오빠.” 성준이 집 쪽으로 차를 몰고 있는데 나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신호에 차가 멈추자 고개를 돌려 나은을 보았다. 바짝 말라서 각질이 잔뜩 일어난 나은의 입술이 안쓰럽게 보였다. 성준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나은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나은은 힘겹게 눈을 감았다 뜨면서 입김을 내쉬었다. “…오빤 날 사랑해?” 성준은 나은의 물음에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왜 갑자기 나은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호가 바뀌고 성준은 나은을 향하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직도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은을 처음 본 순간 나은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은을 만나는 지난 2년 동안 성준은 나은을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 순간도 나은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운 적이 없어서 오히려 나은의 물음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성준의 차는 어느새 그의 집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는 차를 세우고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나은을 보았다. 나은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반복적으로 들리는 나은의 숨소리만이 차 안에 들려왔다. 성준은 나은의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오빤 날 사랑해?, 라고 물었던 나은의 힘없는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성준은 도리에 나은에게 자신이 묻고 싶었다. 나은아, 너는 날 사랑하니?, 라고. 너를 웃게 하는 사람이, 너를 늘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이 세환이가 아니라 정말로 나일까?, 라고. Spirng Spring. 24(完) 차가운 것에 극도로 예민한 나은인데, 요 며칠 찬바람을 그대로 맞고 자전거까지 탔던 탓인지 나은은 겨울의 끝자락에 와서 감기 몸살에 시달렸다. 나은은 어두운 곳에 있었다. 너무나 어두워서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손을 내밀어 더듬어 보아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앞 쪽에서 밝은 빛이 나타났다. 마치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은 밝은 빛이었다. 나은은 한 손으로 빛을 가리고 눈을 찌푸렸다. 밝은 빛은 점점 옅어지고 이내 한 점이 되었다. 나은은 그 빛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몰랐지만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빛은 걸어갈수록 차츰 가까워졌다. 그때 빛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처음에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었는데 이내 여자 한 명이 늘어나고 그들 사이로 작은 남자 아이가 생겼다. 나은은 빛을 향해 가는 걸음을 멈추었다. 검은 실루엣 너머로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웃음소리, 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남자의 웃음소리. “…오빠.” 나은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은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그 실루엣을 바라만 보았다. 차마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 세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다정하고, 단란해 보여서 다가갈 수 없었다. 나은이 다가가면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만 같았다. 나은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이었다. 지수와 성준, 그리고 이름 모를 남자아이였다. 멍하니 실루엣을 보고 있던 나은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오빠, 라고 나지막이 부르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눈물이 흐르고, 그 눈물은 이내 흐느낌이 되었다. 나은의 흐느낌은 세 사람의 웃음소리에 끼어들었지만, 그 웃음소리를 멈출 수는 없었다. 나은은 그것이 더 억울하고, 서러워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나은아, 나은아!” 어디선가 나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은은 눈물을 닦으며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들의 웃음소리는 멈추어 있었다. 자신에게 뒤통수만 보이며 앞으로 걸어가던 남자가 몸을 돌려 나은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역으로 비춰오는 밝은 빛 때문에 그의 얼굴은 잘 볼 수 없었지만, 나은은 그가 성준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안도감이었는지 나은은 더 큰 울음을 터트렸다.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그가 다시 다가오자 마음이 놓여 눈물만 흘렀다. “…나은아!” 나은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어둠과 밝은 빛,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남자의 검은 실루엣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은은 눈을 끔뻑이며 천정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고개를 돌렸다. 나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성준의 얼굴이었다. 나은은 성준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배게 깃이 젖어있는 것으로 보아 꿈을 꾸면서 울었던 모양이었다. “나은아, 괜찮아? 무슨 꿈을 꿨기에 자면서 그렇게 울어.” “…그냥. 오빠집이네?” “네가 집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 일어났으니까 약 좀 먹어. 빈속에 먹기 그러니까 죽도 끓여놨어.” “…고, 마워.” 나은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나은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 두 시였다. 성준의 피로한 얼굴로 보아 여태껏 잠도 자지 못하고 자신을 간병한 모양이었다. 나은은 그의 마음이 느껴져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은은 뜨거운 숨을 내쉬면서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오는 그의 집인데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나은은 서랍 위에 있는 작은 액자에 시선을 멈추었다. 부산으로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나은은 그때가 생각나는 듯 힘없이 웃었다. “자, 나은아. 입맛이 없더라도 죽 조금 먹고 약 먹자. 그러고 푹 자고 내일 일어나면 많이 괜찮아질 거야.” “고마워, 오빠.” “근데 이런 몸으로 강의는 다 한 거야?” “이번 주에 빠진 날이 많았잖아. 또 결강하기 좀 그랬어.” 나은은 바짝 마른입으로 힘겹게 말하였다. 성준은 나은에게 먼저 물 한 잔을 건네었다. 나은은 그가 건네 준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시었다. 성준은 자신이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떠서 나은에게 내밀었다. 나은은 입맛이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걱정하며 죽을 끓였을 것을 생각하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꿈 꾼 거야? 자면서 무슨 눈물을 그렇게 흘려.” 성준은 걱정스런 눈으로 나은을 보며 물었다. 나은은 그의 말에 잠시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떠올렸다. 행복하게 웃고 있던 세 사람, 그리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성준. 그 모습이 나은에게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냥, 두려웠어. 그리고 기뻤어.” “어? 뭐가?” “…오빠가, 떠나갈까 두려웠어.” “뭐?” “그리고 나를 향해 걸어와서 정말 기뻤어. 그래서 울었나 봐.” 나은은 힘없이 말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은은 성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걱정스레 자신을 보는 성준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놓이는 것만 같았다. 나은은 성준이 떠 먹여준 죽을 한 숟갈 삼키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냥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은은 그가 너무 그리웠다. 지수와 함께 있는 성준이 아닌, 이렇게 자신을 사랑스럽게, 걱정스레 쳐다봐주는 그가 너무나 그리웠다. 나은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와 함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 한 방울도 나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어, 나은아. 왜 울고 그래. 그렇게 많이 아픈 거야? 병원 갈까?” 나은이 눈물을 흘리자 성준은 죽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은을 쳐다보았다. 나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픈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직 머리가 조금 아프고 몸이 으슬으슬 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지금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은은 지금 그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 중요했다. 그가 지수가 아닌 자신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 중요했다. 나은은 팔을 벌려 성준의 품에 안겼다. 성준은 그런 나은을 말없이 꼭 안아주고는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은은 그의 품에 안기자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 그의 가슴팍을 적시었다. “왜 그래, 나은아.” “…혹시나, 혹시나 오빠가 지수에게 흔들리는 건 아닐까 무서웠어.” 나은은 눈물에 젖은 힘없는 목소리로 흐느끼며 말했다. 성준은 말없이 나은을 더욱 꼭 안아주었다. 나은의 흐느낌은 줄지 않았다. 그녀의 마른 어깨가 성준의 품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빠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도 무서웠어. 집에 있다던 오빠가 지수와 함께 차를 타고 내 옆을 지났을 때도 무서웠고, 내가 오빠의 곁에 없을 때 지수와 함께 있었던 오빠가 무서웠고, 마치 한 가족처럼 지수와 함께 있는 오빠의 모습에 무서웠어.” “나은아….” “오빠랑 지수가 너무나 잘 어울려서 두려웠어. 혹시나 오빠가 지수한테 흔들릴까봐…, 그래서 날 떠날까봐 너무 무서웠어. 항상 속으로만 삭히면서, 항상 혼자서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 너무 힘들었어.” “…나은아.” “오, 빠…. 날 사랑해?” 나은은 흐느낌을 섞어 힘겹게 말을 내뱉고는 성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눈물로 촉촉이 젖은 나은의 눈이 서글프게 보였다. 나은은 흐릿해진 시야로 성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은은 소매 끝으로 자신의 눈물을 훔쳐내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린 탓에 숨이 가빠왔다. 나은은 불안한 시선으로 성준을 바라보았다. 성준은 슬픈 눈을 하고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은은 그런 그의 모습에 더욱 불안해졌다. 성준은 말없이 나은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그녀를 품속에 안았다. 나은의 불안한 눈빛을 보자 그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항상 자신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환과 함께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자신 혼자만 속상해하고, 답답해하는 줄 알았다. 정작 자신은 나은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성준은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은아.” “…….” “널 불안하게 해서 미안하고, 널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성준은 아직도 자신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은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나은 역시도 자신과 같은 생각에, 자신과 같은 오해와 의심으로 힘들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곁의 지수가 나은의 곁의 세환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혼자서 속병을 앓았을 나은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조금 더 나은을 살피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나은이 이렇게 혼자서 힘들어할 때까지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쳐 나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너와 내가 아닌 다른 오해들로 힘들게 해서 미안해. 울지 마, 나은아. 내가, 내가 미안해.” 성준은 나은을 더욱 꼭 안아주었다. 나은의 울음은 점점 잦아들었다. 성준은 나은이 눈물을 완전히 멈출 때까지 나은을 품에 안고 토닥여 주었다. 나은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성준은 나은을 품에서 살짝 놓았다. 나은은 아픈 몸으로 눈물을 잔뜩 흘려서인지 지쳐 잠들어 있었다. 성준은 나은을 다시 침대에 조심스럽게 뉘였다. 그는 안쓰러운 눈으로 나은을 쳐다보았다. 성준은 이렇게나 여린 아이가 그동안 마음고생 했을 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더 아팠다. 그는 잠이 든 나은의 손을 꼭 잡았다. 나은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그는 한 손으로 흐트러진 나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나은아.” 성준은 나지막이 나은을 불렀지만, 이미 잠들어버린 나은은 대답이 없었다. “우리 참 바보 같다, 그렇지?” “…….” “너를 향한 내 마음이나, 나를 향한 네 마음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괜한 오해로 힘들어 했던 거네. 세환이랑 함께 있는 너를 보면서 나도 참 힘들었어. 세환이의 곁에서 항상 웃고 있는 네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아팠어.” “…….” “…네가 혹시나 세환이에게 흔들리진 않을까 나도 사실 두려웠어. 근데 참 다행이야. 내가 떠날까 걱정하며 울어준 네가 고마워. 정말로, 다행이야.” 나은은 눈을 감고 말없이 성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성준이 자신을 침대에 뉘어주는 기척에 잠에서 깬 나은은 그의 말을 그저 듣고 있었다. 나은은 자신의 손과 맞닿아있는 그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멎은 줄 알았던 나은의 눈물이 눈가를 타고 베개를 적셨다. “…사랑해, 나은아.” 나은은 눈물을 많이 흘려 머리가 아팠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사랑한다는 성준의 목소리가 나은의 귓가에 닿았다. 나은은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뛰었다. 나은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의 마음이 아직도 변함없이 자신에게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나은의 곁으로 성준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성준은 나은의 얼굴에 아직도 남아있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 주었다. 그리고 나은의 까끌까끌한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나은의 뜨거운 입김이 성준에게로 전해졌다. 가볍게 입을 맞춘 성준은 나은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는 이내 허리께에 있는 이불을 목까지 올려 주었다. 나은이 두려운 꿈을 꾸어 울면서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참 좋은 꿈을 꾸었다고 환하게 웃으면서 눈을 떴으면 했다. Spring Spring. 성준의 간호 때문이었는지, 그의 마음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서 인지 나은은 몸살을 금방 떨쳐내었다. 갑작스런 병원의 호출로 인해 주말인데도 출근을 해야 하는 성준이 나은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은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있었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은은 침대에 누웠다가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으로 걸어가 앉은 나은은 책꽂이를 살피다가 손이 닿은 두툼한 다이어리를 꺼내었다. 오래도록 열어보지 않아서 윗부분에 약간 먼지가 쌓여있었다. 나은은 먼지를 휴지로 닦아내고는 다이어리 겉면을 보았다. 이제는 쓰지 않는, 예전의 다이어리였다. 나은은 다이어리의 겉면을 만지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열었다. 1년 동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다이어리였다. 나은은 다이어리 중간쯤을 펼치었다. “…여기 있네.” 나은은 펼친 페이지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성준과 만나기 시작한 날의 일기가 적힌 페이지였다. 나은은 그 페이지에 빨간 펜으로 앙증맞은 하트를 여러 개나 그려놓았었다. 성준을 처음 만났던 그 날의 떨림과 설렘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일기였다. 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지내던 며칠을 지나 자신을 헷갈리게 했던 성준의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며 마음을 고백했던 날이기도 했다. 나은은 마치 자신이 그 날로 돌아간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나은이 그 날을 기점으로 성준과 함께 했던 날들을 적은 다이어리를 읽어보고 있는데,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큰 진동으로 울렸다. 나은은 핸드폰을 들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성준의 전화였다. 나은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어, 나은아. 잘 쉬고 있지? “응. 오빠 덕분에 몸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집에서 푹 쉬어. 내가 준 약은 꼭 챙겨 먹고. “응, 알았어. 오빠 오늘은 언제 마쳐?” -오늘은 한 두세 시 되면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밖에 조금씩 비 오는데, 괜히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쉬어. “어? 비가 와?” -응. 조금씩 보슬보슬 내려. 나 마치면 다시 전화 할게. “응, 알았어.” 나은은 전화를 끊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방 안을 답답하게 했던 커튼을 열어 젖혔다. 성준의 말대로 밖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지 않은 빗방울이 조금씩 아스팔트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겨울이 끝나는 모양이었다. 나은은 내리는 비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봄이 다가 오고 있었다. 나은이 가장 좋아하는 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성준과 나은이 처음 만났던 계절인 봄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나은은 봄을 좋아했다. 포근한 그 날씨도 좋아했고, 만개한 꽃들도 좋아했다. 무엇보다 나은이 좋아하는 것은 벚나무 아래에서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던 봄날의 성준이었다. 나은은 아직도 눈에 선한 성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순수한 마음으로 성준을 마음에 품었던 그 날이, 포근했던 봄날의 날씨가 그리웠다. 나은은 창가에서 벗어나 다시 책상 앞에 섰다. 펼쳐 두었던 다이어리는 어느새 첫 페이지만을 열어둔 채 덮여있었다. 나은이 다이어리를 완전히 덮고 다시 책꽂이에 꽂으려는데, 순간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이어리의 커버가 벗겨져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나은의 손에는 다이어리의 두꺼운 커버만이 들려 있었다. 나은은 다리를 구부려 바닥에 떨어진 다이어리를 주웠다. “어? 이게 뭐지.” 다이어리를 주은 나은은 커버를 벗긴 다이어리 표지 부분에 무언가가 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번도 다이어리 커버를 벗긴 적이 없어서 미처 발견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은은 다이어리를 가까이 들고 자세히 그 부분을 살펴보았다. ‘빨간 우산.’ 빨간 우산, 이라고 적힌 글씨와 익숙한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나은은 그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은은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 꺼내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다이어리를 누군가가 다시 되돌려주었던 날. 나은은 그날의 기억을 꺼내었다. ‘이거! 누가 주고 갔대요?’ ‘그런 말 없었다던데? 그냥 이 우산이랑 같이 주고 갔대. 비오는 날에.’ ‘말도 안 돼, 진짜!’ ‘뭐 중요한 거였나 봐? 아, 나은아, 언니 먼저 가봐야겠다. 내일 보자!’ ‘네? 네, 언니!’ 나은은 벌써 2년쯤 전의 일이었지만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다이어리가 다시 주인을 찾아왔던 날이었기에 그러했고, 그 다이어리를 돌려준 사람을 결국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요. 저한테 전해주라 하셨던 다이어리와 우산 받았거든요. 그런데 이거 혹시 누가 갖다 주었는지 알 수 있을까, 하고요.’ ‘글쎄요. 누구라고 말해드릴지 물으니까 그저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데요.’ ‘아…, 정말요? 그럼 혹시 인상착의 같은 거라도 알 수 있을까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키가 좀 크고 약간 마른 체형의 남자였어요.’ 키가 좀 크고 약간 마른 체형의 남자. 나은은 그때 그 사람이 성준이었으면, 하는 생각만 했었다. 너무나 막연한 인상착의였기 때문에 그때의 나은은 그것이 딱히 누구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나은은 사실 다이어리를 돌려받은 이후로 그 날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은은 성준과의 만남에 정신이 팔려 누가 다이어리를 돌려주었는지, 그리고 누가 빨간 우산을 함께 두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은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한가득 담았다. 그리고 다이어리에 적힌 빨간 우산, 이라는 글씨와 함께 남겨진 핸드폰 번호를 쳐다보았다. 익숙한 글씨체, 익숙한 핸드폰 번호. 성준의 것이었다. “…오빠였어.” 나은은 환하게 웃으며 다이어리를 책상에 던지듯이 올려두고는 옷장 쪽으로 갔다. 그리고 옷장의 첫 번째 칸을 열어 깊숙한 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한참을 더듬거리던 나은은 마침내 자신이 찾던 것을 찾은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꺼내었다. 나은의 손에 붙들려 나온 것은 빨간 우산이었다. 굳이 자신이 쓰던 우산을 두고 다른 우산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은은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빨간 우산을 옷장 깊숙이 넣어두고 있었다. 한동안 있는지도 잊고 살았던 우산이었다. 나은은 우산을 꺼내어 펼쳐보았다. 2년 전 그대로 누가 쓴 흔적이 있는 우산이었다. 안쪽의 뼈대가 살짝 녹슬어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었다. 나은은 이것이 성준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오빠도 나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구나.” 나은은 우산을 다시 접어 품에 안았다. 성준을 가장 처음 보았던 날, 분홍빛의 예쁜 벚꽃이 하늘에서 내리던 날에 잃어버렸던 다이어리. 그 다이어리를 다시 찾아준 사람이 성준이었다. 나은이 성준을 처음 보았던 그 날에 성준 역시 나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되었다. 나은은 서둘러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어 껴입었다. 옷장에서 찾아 낸 빨간 우산을 손에 쥐고 나은은 집을 나섰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에 나은은 빨간 우산을 펼쳐 들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몸이 어느새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남아있던 감기 기운마저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은은 성준의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나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나은은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버스 안에서 우산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주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우산이었다. 다이어리를 되찾아 준 것이 성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빨간 우산을 전해준 것이 성준이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짜 성준이었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나은은 더욱 벅차올랐다. 혜연과 도형이 그들을 소개시켜주기 이전부터 서로를 알아왔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나은은 너무나 기뻤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은은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병원 앞에 선 나은은 그가 있는 사무실을 올려다보았다. 나은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다이어리 표지에 적혀 있던 그 번호, 성준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었다. -여보세요? “오빠! 병원이야?” -응. 아직 병원이지. “그럼 잠깐만 창밖을 좀 봐!” -창밖을? “응! 어서!” 나은은 성준을 재촉하며 성준의 사무실 쪽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커튼이 걷히고 창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성준의 모습이 보였다. 나은은 성준을 보자마자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은이 서있는 것을 본 성준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창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계단을 뛰어내려온 그가 병원 입구 쪽으로 나은을 향해 달려왔다. “나은아, 집에서 쉬라니까 왜 왔어!” “…찾았거든.” “응?” “내 소중한 것을 되찾아 준 사람.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찾았거든.” 나은은 그렇게 말하고 생긋 웃었다. 성준은 나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은은 두 팔을 벌려 성준의 품에 안기었다. 성준은 나은을 품에 안고도 의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두 사람은 나은이 쓰고 있던 빨간 우산을 함께 쓰고 있었다. 나은은 성준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나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살짝 발을 들어 그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은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성준을 보았다.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던 성준은 이내 나은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겨울의 끝자락, 보슬보슬 내리는 겨울비가 빨간색의 작은 우산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