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개인홈 : http://secrets.ivyro.net 뉴동픽 : http://cafe.daum.net/dongpic 사랑이 우정에게 1-31 完 Star Dust (Beloved 중간 박유천 번외) 1-5 完 Beloved(사우 2부) 1-60 完 Lion Heart (Beloved 완결 박유천 번외) 연재 중 원래 파일로 올리는 사람이 아닌데.. A4 562쪽을 전부 복사해서 붙일 자신이 없어서 파일 첨부 합니다.. 그래서 부탁 하나 드릴게요.. 받아갑니다~ 잘 볼게요~ < 요런 댓글 사양합니다.. 이런 댓글은 달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차라리 재미있게 보셨다면 돌아오셔서 감상 한 줄로 대신해 주세요.. 받아갑니다 라는 댓글이 하나라도 달리면 바로 파일 내립니다.. 그리고 박유천 번외 Lion Heart는 우수작가게시판에서 연재중입니다.. 쪽지 주지 마시고 찾아오시길.. [유수] Beloved / 사랑이 우정에게 2부 by 카미유 입술이 가까워진다. 검은 배경과 흰 피부는 입술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선명하게 붉은 그 입술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입술이 조금 열리고 새하얀 치아가 살짝 보인다. 이것은 명백한 유혹이다. 그리고 그 입술에 이끌린 듯 또 다른 입술이 다가간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닿는 순간……! 콰직!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있는 힘을 다해 움켜쥐고 말았다. 나는 티비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비릿한 썩소를 지었다. 찌그러져버린 캔에서 쏟아진 맥주가 내 손을 적시며 바닥에 뚝뚝 떨어졌지만 내 시선은 오직 화면에 박혀 있었다. 화면에는 유천이 보조 출현한 두 번째 CF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유혹, 미스틱'이라는 카피가 지나가는 화면에는 영혼을 빼앗긴 콘셉트의 유천이 인형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묘한 카리스마와 섹시함을 발산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유천의 영혼을 손에 넣은 요염한 모델이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이 새끼, 화장품 광고라더니. "키스. 그래…, 키스." 나는 코웃음까지 쳐가며 화면을 응시하다가 CF가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천의 단축 번호를 꾹 눌렀다. 하지만 컬러링이 한참이나 흘러도 유천은 받지 않았다. "아우 씨바." 나는 핸드폰을 침대 위로 내던지고 찌그러진 캔 안에 남아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을 잘 못 마시는 내가 이렇게 혼자서 술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바로 박유천. + 놀이공원에서 친척분의 부탁 - 협박 - 으로 출현했던 유천의 광고가 히트를 쳤다. 원래는 공원 내 설치된 영상 광고판에 외부 CF가 흐르는 막간을 이용해 가끔 나가던 것이었다. 그런데 생긴 것 멀쩡한 유천이 공주를 구하는 기사가 되어 화면을 누비는 장면은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했던 모양이다. 대형 광고판 옆에서 유천이 나오는 장면을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그 사진들이 인터넷에 퍼진 것이 시초였다. 놀이공원 내에서 계속 유천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고, 인터넷에 퍼진 사진은 유천을 놀이공원의 명물로 만들었다. 덕분에 유천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경호원 알바를 그만두었는데, 놀이공원 광고를 찍었던 감독의 눈에 들었는지 CF의 보조 출현 제안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까지 세 개 정도 CF에 보조 출현했는데, 정식 CF모델이 아니기에 화면에 얼굴이 다 비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저 화장품 광고. 저건 누가 봐도 박유천이란 말이다. 저 광고 덕분에 유천은 지금 집에서 내려가 있다. 일주일 전, 처음 공중파를 탄 유천의 저 CF가 끝나자마자 유천의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와서는 당장 내려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고함소리를 들어보니 유천의 부모님은 유천이 CF에 출현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유천은 석고대죄라도 하고 있는 건지 벌써 일주일 째 연락이 없고, 나는 유천의 고백을 받은 보람도 없이 혼자서 새해를 맞았다. 몰랐는데 유천의 집은 잘 사는 정도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일하는 놀이공원도 유천의 가까운 친척분이 대표이사로 계시다고 한다. 사귀게 되고 나서 이것저것 캐묻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인데, 유천은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도 안 하려고 해서 알아내는데 좀 힘들었다. 유천이 경호팀에 일하게 된 것도 그 분에게 부탁했던 것이고, 광고를 찍었던 것은 바로 그 대가였다고 한다. 유천은 계속 내가 정윤 형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어서, 나와 정윤 형을 떼어놓을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티는 안 냈지만 그 말을 듣고 사실 엄청나게 기뻤다. "히힛." 나는 유천의 CF 때문에 짜증이 났던 것도 잊고 키득거리며 웃어 버렸다. 박유천이 나를 좋아한단다. 고백을 받았던 그 날, 얼마나 울었는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덕분에 나중에 유천에게 잔뜩 놀림을 당했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던 것 같다. 세상에서 첫사랑을 이루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건 아마도 굉장히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냐 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행운을 거머쥔 세기의 행운아가 아닐까 싶다. 나는 휴지를 둘둘 말아 바닥에 흘러내린 맥주를 닦아냈다. 유천의 집에서는 반대를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직 어린애인가 보다. 내 친구-내 연인-가 티비에 나오는 게 마냥 신기하고 좋기만 하다. 적어도 저 화장품 광고를 보기 전까진 그랬다. 여자랑 키스신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결사반대했을 텐데. 아, 진짜 여자! 그 놈의 여자! 인류의 절반이 내 적이라니. 나는 씩씩대며 휴지를 쓰레기통에 쳐 넣고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었다. 콩콩콩! 그때 누군가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맥주를 티비 앞에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하지만 아무 대답도 없다. 나는 흘깃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가 넘어 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물쇠를 풀었다. "누구신데요?" "Happy New Year."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 너머로 반달처럼 곱게 웃음을 짓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My Beloved……. 그가 돌아왔다. + "해피 뉴 이얼 좋아하네. 1월 1일 지난지가 언젠데." 마음에도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는 팔짱까지 끼고 서서 삐딱하게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성큼 현관문을 들어섰다. 유천의 머리며, 어깨에 얇게 얹혀 있던 눈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밖에 눈 와?" "어." "언제 왔어?" "지금." 유천은 말을 짧게 끊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연락도 없었고, 방금 여자와 키스신이 있던 CF를 본 터라 나는 잔뜩 뾰로통해져 있었기 때문에, 등을 홱 돌려 집안으로 들어서버렸다. "으, 추워." 유천은 내 뒤를 따라 들어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TV 앞에 두었던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언제 이리 왔어?" "너 집에 내려가고 바로." 유천이 집에 가고 나니, 유천의 아파트에 혼자 있기가 좀 그래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좁아터진 원룸이라고 해도 그래도 1년 넘게 살았던 곳이라 역시 유천의 집보다는 편했던 탓이다. "보일러 너무 내려 놨잖아. 집에 들어갔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아……." 그제야 내가 일주일 전에 유천의 아파트를 나오면서 보일러를 잔뜩 내려놓은 것이 생각났다. "너 이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지." "술 마셨냐?" 내 변명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유천이 다시 물어왔다. "응." "웬일이야, 네가?"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웬일이냐고 물어도 사실대로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냥 뚱하게 앉아서 TV 화면만 응시했다. 유천이 겉옷을 벗어 걸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 바람에 몸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천이 손을 뻗어 내 손에서 맥주 캔을 가져갔다. 나는 흘깃 유천을 곁눈질했다. 유천의 목울대가 꿀꺽, 하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입술에 닿아 있는 캔. 간접 키스다, 저건. 괜히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아랫입술을 꾹 물어 참으며 나는 다시 TV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이상한 생각 했지?" 유천의 나지막한 물음에 금세 얼굴이 따끈따끈해졌다. 유천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벽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뭘?" 나는 시치미를 떼고 뚫어져라 TV를 응시했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유천이 쿡쿡 웃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더 달아오른다. 미친놈아, 이런 건 좀 모른 척 하면 안 되냐? 유천이 맥주 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다. 또 흘깃 곁눈질해서 유천을 훔쳐보았다. 그린 것 같은 옆얼굴이 단정하게 딱 떨어져 있다. 그리고 맥주 캔에 닿아있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입술로 아까 그 여자와 입을 맞췄단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또 썩소를 짓고 말았다. "집에 갔던 건 어떻게 됐어?" "호적 파서 나가래." "진짜?" "어." 유천의 대답에 나는 가만히 유천을 바라보았다. 호적 파서 나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 일이 하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 거야?" "어." "집에서 반대하는데도?" "해보니까 재미있더라고." 순간 아까 보았던 CF의 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자랑 키스하는 게?" "한두 번 해 보냐?" 심드렁한 유천의 대답에 이를 꾹 물고 숨을 멈췄다. 정말, 진심으로, 딱 한 대만 때려주고 싶다. 그래, 네가 원래 그런 놈이었지. 내가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속은 더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만 한다. "맥주 더 없어?" "손 없냐?" 툭 말을 뱉어내고선 내가 더 당황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재수 없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유천이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다가갔다. "재수 없어, 바람둥이, 카사노바, 제비 새끼."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는 유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재수 없어, 바람둥이, 카사노바, 제비 새끼." 유천이 사과 두 개와 맥주 두 캔을 갖고 돌아오면서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다 들려. 들으라고 한 거면 더 크게 하지 그러냐." 유천의 말에 찔끔해서 나는 괜히 애꿎은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유천이 쿡쿡 웃으며 내 앞에 접시와 과도를 내려놓았다. "자, 미안하면 사과하는 의미로 이거 깎아 줘." "미안하긴 뭐가?" "안 미안해도 깎아 줘. 토끼 모양으로." "미친 새끼." 결국 유천의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유천은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셨고, 나는 유천의 리퀘스트대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왠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오랜만에 유천과 보내는 시간에 자꾸 유천을 곁눈질하게 된다. 유천과 사귀기로 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연인이 되었다는 느낌보다는 아직 친구라는 기분이 강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내가 너무 울었고, 유천도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우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뻗어버렸다. 광고를 찍느라 무리를 한 탓인지 유천은 이틀 동안 계속 죽은 듯이 잠만 잤고, 광고가 공개된 이후로는 사람들에 시달리느라 항상 피곤해했다. 그 후에는 내가 회사에 약속한 1월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나도 나름대로 새로운 매니저 일을 배우느라 바빠졌다. 그 다음에는 유천이 CF에 보조 출현을 하기 시작했고, 일주일 전에는 집에 불려 내려가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것이다. 서로 너무 바쁜 시간을 보낸 탓에 우리는 연인이 되고서도 제대로 데이트도 못 해봤다. 너무 오랜 기간 친구였던 탓에 닭살 돋는 전화나 문자도 못하겠다. 궁금하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연인과 시간을 보내는 걸까? "야-, 김준수, 과일 깎는 거 되게 조신하다." 멍하니 딴 생각을 하다가, 감탄사까지 섞어 장난스레 내뱉는 유천의 말에 하마터면 손을 벨 뻔 했다. 조신하다니. 남자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 나는 유천을 험악하게 노려봤다. "노려보는 것도 이쁘다. 너 내 마누라 할래?" "맥주나 처마셔라." 잔뜩 날이 선 내 대답에 유천이 팔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런데 살벌하게 말을 했지만 마음이 조금 이상하다. 정말 내가 여자였다면 우리는 이렇게 멀리 돌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괜히 침울해진다. "삐쳤지?" 내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유천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래, 삐쳤다, 새끼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사과껍질을 토끼 모양으로 도려냈다. "네가 제일 좋아." 이어진 유천의 말에 손이 멈칫했다. 웃음기가 가신 검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 갑작스런 고백에 진땀이 난다. "시끄러." 애써 당황한 것을 감추려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벌써 볼이 달아오르고 있다. 유천은 쿡쿡 웃으며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버지는 호적 파라고 난리치시지, 어머니는 당장 학교 때려치우고 내려 오라시지,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거야. 일주일 동안 밥도 안 줘서 쫄쫄 굶었다. 아침에 눈 뜨면 잠들기 직전까지 무릎 꿇고 앉아서 허락해달라고 빌고. 그랬는데도 안 된다더라.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여서 호적 판다고 그러고 그냥 와 버렸지. 너 서울에 혼자 두고 와서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그 와중에 눈은 오고……. 올라오는 데 너무 힘들었어." 정말 피곤한 듯 나지막이 말하는 유천의 목소리에,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저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진지한 눈동자로 나를 좋아한다 말을 한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을 숨기는 것에만 익숙했던 우린 아직도 표현이 서툴지만, 어쨌든 연인이 되어 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따끈따끈해지는 것이다. 그나저나 유천이 모델 일을 한다는 것을 집에서 심하게 반대를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유천은 성적도 좋고, 머리도 좋아서 학교를 졸업하면 분명히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왜 CF모델에 꽂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야, 사과 먹어." 간신히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다 깎아서 들고는 유천을 툭툭 쳤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쓰러져 있는 유천을 살폈다. 어느새 유천은 잠이 들어 있다. 평화롭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친 표정. 집에 내려갔던 일이 정말 힘들었던 모양이다. 문득 안쓰러운 마음에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유천은 미간을 조금 찡그렸지만 잠에서 깨진 않았다. 신기하다. 이 녀석은 뭔가에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녀석이 아닌데. 하지만 뭐가 계기가 되었든 박유천이 하고 싶다면 나는 찬성이니까. 유천아, 네가 좋은 거라면 나는 반대 안 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등 돌려도 나는 끝까지 네 편인 것 잊지 마. 나는 몇 번이나 유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서툰 다짐을 새겼다. 그때 TV에서 유천의 화장품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클로즈업된 화면에 온통 여자 모델의 입술이 붉다. 나는 조금 전의 다짐과는 다르게 금세 싸늘해진 눈초리로 잠든 유천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거면 나도 반대인데 말이지……. “…….” 잠이 푹 들어 무방비하고 언뜻 순진해 보이는 내 연인은 희미하게 맥주 향이 나는 숨소리마저도 사랑스러웠지만……. 애인도 있는 새끼가 외간 여자랑 입 맞춰놓고 잘도 잔다, 씨발……. 울컥 밀려 나오는 짜증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비릿한 썩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켜 책상에서 펜을 찾아 들고 돌아왔다. 박유천, 세상이 다 등 돌려도 네 편이긴 한데… 지금 이 순간은 예외야. 나는 잠든 유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악마보다 더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 "두 잔이라고 했다니까요. 돈도 두 잔 값 받아놓고 무슨 소리야." "저기, 그럼 영수증 갖고 계세요?" "영수증은 주지도 않았잖아요!" "자, 잠시만요." 당황하는 승연의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승연은 빨리 오라는 듯 다급하게 손짓을 해댔다. 승연의 앞에는 한 아주머니가 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음료수 매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인 승연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된 초보라서 손님의 항의에 잔뜩 굳은 표정이다. 또 무슨 문제야.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절대 화내지 말자. 내 자신에게 몇 번이고 화내지 말라고 타이른 후 음료수 매장으로 다가갔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나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화가 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삐딱하게 서서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훑어 내렸다. 이건 또 뭐냐는 표정이다. 지었던 영업용 미소가 딱딱하게 굳는다. 저기 손님. 내가 좀 어리고 동안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매니저인데 그런 표정은 좀 곤란한데 말이죠.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말해주지 않으니 나는 승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콜라 한 잔 주문 받은 것 같은데 두 잔이라고 하셔서요." 승연이 곤란한 표정으로 얼른 상황을 설명했다. "두 잔 값 받았다니까!" 승연의 말을 듣고 있던 아주머니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이 손님은 괜히 큰 소리다. "한 잔 더 드려." "네? 그렇지만……." "얼른." 말대답을 하는 승연에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끊었다. 오, 나도 매니저 노릇 3주 만에 아랫사람 부리는 일에 능숙해졌다. 갑자기 뿌듯한 마음이 들어 입가에 비죽이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승연이 콜라를 내밀자 아주머니는 나를 다시 흘깃 바라보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나는 또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공짜 콜라 많이 드시고 살이나 더 찌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김 매니저님." 승연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음부터 또 그런 사람 있으면 그냥 한 잔 더 줘. 괜히 말이 길어지면 너만 스트레스 받으니까.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예전의 정윤 형과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정윤 형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일을 해결한 음료수 매장을 떠나 지친 걸음으로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그냥 알바생일 때는 몰랐는데 중간 관리자라는 건 참 책임이 막중한 것 같다. 하루에도 저런 일이 몇 번이나 터진다. 손님들 중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논리인지 막무가내로 큰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을 조율하는 일이 제일 힘들다. 괜히 소란스러워지거나 직원과 손님이 싸우기라도 한다면 회사 이미지만 나빠지기 때문에 매니저들은 항상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달고 산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내가 잘도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휴게실로 들어가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까 진동이 오는 것 같았는데, 공원 내에서는 핸드폰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계속 참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슬라이드를 밀어 올렸다. [지금일어났어 벌써출근했나보네 있다가전화할게] 최소한의 띄어쓰기만 한 유천의 문자에 좀 전의 일도 잊고 기분이 좋아져서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집에 내려갔었던 일주일 동안 꽤 힘들었는지 유천은 아침에 내가 부스럭거리는데도 깨지 않고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반찬도 없는데 밥은 잘 먹었나 몰라. 지이이이이잉. 그때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발신자로 유천의 얼굴이 떠 있다. 갑자기 어젯밤 내가 유천의 얼굴에 잔뜩 해 놓은 낙서가 떠올랐다.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바람둥이라고 써 놓았는데. 나는 킥킥대며 확인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 - 야! 깜짝이야. 나는 귀에 댔던 핸드폰을 얼른 멀찌감치 떼어냈다. - 김준수, 얼굴이 이게 뭐야! "으항항항항!" 유천의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나는 거의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해가며 미친 듯이 웃었다. - 야, 이 새끼야, 오늘 카메라 테스트 있는데 이래 놓으면 어떡해!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유천의 목소리는 핸드폰을 통해 휴게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진정시키고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댔다. "세수하면 되지!" - 다섯 번이나 했는데도 안 지워지거든? "아, 그래?" - 아, 그래 좋아한다. 나 일 못 잡으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유천의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하긴, 집에서 호적 파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인데. 그제야 이거 큰일이구나 싶어서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제 그 펜이 수성이 아니었던가? 그런 걸 일일이 확인하고 쓰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냥 신경이 거슬린 김에 아무거나 집어서 유천의 얼굴에 그어주었는데. "카메라 테스트?"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유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야, 그, 그거 샴푸나 목욕 비누 같은 걸로 안 지워지냐?" 나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해결책을 제시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물소리만 들려왔다. 씻고 있는 중인가 본데. "박유천?" - 나 지금 바로 나가야 되니까 일단 끊어. "으, 응." - 김준수, 집에 오기만 해. 죽을 줄 알아. 유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유천의 살벌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록데록 굴리며 굳어 있었다. "미친놈, 카메라 테스트 있는지 누가 알았나." 나는 끊긴 전화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뭐,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나는 코웃음을 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일터로 향했다. 멍하니 아이스크림 매장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영상 광고판에 또 유천의 모습이 지나간다. 나는 버릇처럼 멈춰 서서 광고를 응시했다. 아무리 CG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갈비뼈가 나간 상태인데도 잘도 날고뛴다. 그 녀석, 누구 애인인지 참 멋있기도 하지. "풉!" 문득 든 생각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연인이 생기면 다들 이런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난다. 박유천을 생각하면 막 등줄기가 간질간질해서 미칠 것 같다.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에 오스스 소름이 돋고, 손끝이 닿기만 해도 전기가 찌르르 오는 것 같다. 유천이 보조 출현한 CF가 나오면, 설혹 얼굴이 나오지 않는 CF라도 나는 유천을 구별해 낸다. 유천의 손가락, 유천의 목덜미, 유천의 어깨, 유천의 넓은 등과 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도 나는 다 알아 볼 수 있다. My Beloved. 이제 박유천은 내 것이니까. 박유천이 TV에 나올 때마다 나는 괜히 으쓱해진다. 우리 집 컴퓨터에는 유천의 CF를 캡처한 사진이 가득하다. 내가 유천의 얼굴에 낙서를 하게 한 그 화장품 CF 덕분에 며칠 전에는 신문기사도 한 번 나갔다. 그 남자 모델 누구냐고 사람들 사이에 말이 도는 것 같다. 그 기사 밑에는 남자 모델 너무 멋있다는 댓글이 10개나 달려 있었다. 그때는 '정말 멋있죠? 내 애인이에요.'라고 댓글을 달아 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도 이렇게 손가락이며 입이 근질근질한데 나는 앞으로 잘 참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뭐야, 준수. 뭐 잘 못 먹었어? 왜 이렇게 실실 웃고 있어?" 아이스크림 매장의 정민 누나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와서 나는 유천의 생각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정민 누나가 코앞에 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천의 광고를 보며 나도 모르게 멍하니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뭐, 뭐가요." "요새 좀 이상해." 정민 누나가 수상하다는 눈초리를 하고는 나를 가운데 두고 빙빙 돈다. 나는 머쓱해져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너어……." "왜요?" "연애하냐?" "에?!" 놀라서 쇳소리를 냈다. 아니, 왜 이렇게 여자들은 예리한 걸까? 당황해서 금세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이 반응은. 설마 진짜인 거야?" "어, 김 매니저님 연애해요?" 정민 누나의 말에 승연까지 거들고 나섰다. "진짜? 준수 오빠, 연애한대?" "김준수, 누구야?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미영 누나에 지현까지… 갑자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몰려든 것 같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고자 발걸음을 옮겼지만 금세 합세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아, 누나, 저, 저기. 그게 아니고요." "뭐야, 얼른 사실대로 말해." 나는 심상치 않은 미영 누나의 눈초리에 쭈뼛쭈뼛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만날 토끼 옷만 입고 다녀서 마냥 귀여운 줄 알았는데, 매니저 되고 나서 보니까 은근히 준수도 멋있어. 그치?" "맞아요, 준수 오빠 멋있다니까.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그때 퍼레이드에서 꼬마 구하는 거 봤지? 아, 넌 못 봤겠구나. 그때 얼마나 멋있었는데. 진짜 번개 같았다니까." "우와, 정말요?" 이 여자들 도대체 뭐야……. 나를 둘러싸고 느닷없이 품평회가 벌어졌다. 나는 당황해서 불타는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마침 광고판에 공주를 구해내는 유천이 보였다. 나는 애절한 눈빛으로 유천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유천, 나도 좀 이 상황에서 구해주면 안 될까? + 오늘 내 구역에선 고객의 항의가 다섯 건 있었고, 미아 사고가 두 건 있었으며, 분실물 사고가 한 건 있었다. 연달아 터진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나는 녹초가 되어서 탈의실로 들어섰다. 덤으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시달린 탓에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다. 나는 유니폼을 벗어 걸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또 유천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재빨리 슬라이드를 밀어 올렸다. [지하1층주차장] 간단한 한 마디를 보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설마, 얼굴에 낙서한 걸로 주차장에서 패려는 건 아니겠지. 이 새끼, 은근히 뒤끝 있는 놈인데. 문자를 보며 멍하니 굳어 있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설마 애인까지 됐는데 패려고?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옷을 걸쳤다. 그나저나 유천은 오늘도 카메라 테스트라니 또 뭔가 출현하는 것 같은데, 키스신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겠다. 궁금하다. 키스신 때문에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박유천은 과연 내 말을 들어줄까? 나는 유천의 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 1층을 누르고 내려가는 숫자를 보고 있으려니 점점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박유천이 가까워지고 있다. 내 몸은 본능적으로 유천과의 거리를 감지하는 것 같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자꾸 설레는 것 같아서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지하 1층입니다] 아니…, 단순히 후환이 두려운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숨을 멈췄다. 코앞에 유천이 서 있다.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유천의 표정은 왠지 차가워보였다. [문이 닫힙니다] 안내 멘트에 순간적으로 다시 엘리베이터에 탈까 고민했다. 유천은 담배꽁초를 휴지통에 던져 넣고는 다시 길게 연기를 토해냈다. 나는 유천의 얼굴에 낙서가 남아있는지를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없어 보이는데. 오늘의 유천은 얌전하게도 짙은 색 청바지에 폭신한 아이보리색 스웨터, 검은 피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유천은 수트도 멋지지만 저런 평범한 차림도 잘 어울린다. CF 감독의 눈에 띈 이유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잘난 놈이 내 애인이라니.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이를 꾹 물었다. "타." 유천은 한 마디만을 툭 던지고는 차에 올랐다. 나는 유천이 더 기분 상하기 전에 얼른 반대편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조수석에 탔다. 내가 벨트를 매기도 전에 유천은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말도 걸지 못하고 유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유천은 아무 말 없이 한강을 가로질렀다. 며칠 동안 이어진 추위로 강변에 얇게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유람선이 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와, 예쁘다." 나는 한강의 야경에 흠뻑 취해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천이 웃는 소리가 들려 나는 얼른 유천을 바라보았다. 웃으면 풀린 것이라는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천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얌전히 앉아 또 유천의 눈치만 보았다. "왜?" "으, 응?" 유천의 물음에 움찔했다. 유천이 다시 피식 웃으며 날 보았다. "운전 중이라 키스도 못 하는데 왜 이렇게 굳어 있어." 유천의 말에 귀가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진짜 박유천 입을 막는 기계를 하나 만들던가 해야지, 정말 민망해 죽겠다. "화 많이 났어?"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 화가 나?" 유천의 말에 이번엔 멍해졌다. 유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럼 내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낙서한 거 때문이 아니면 왜 이렇게 분위기 잡고 있어, 이 새끼야. 나는 금세 뚱한 표정이 되었다. "카메라 테스트인지 뭔지는 잘 됐냐?" "음… 그럭저럭." "이번엔 뭔데?" "CF가 아니라 잡지라던데. 잘 모르겠어, 처음 들어보는 거라." "그거 또 여자랑 하는 거야?" 내 퉁명스러운 물음에 유천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저렇게 구니까 나한테 미움을 받는 거다. 여자 밝힘증 같으니라고. 나는 창밖을 보며 또 입을 삐죽거렸다. "너는 오늘 잠들면 알아서 해." 갑자기 유천이 불쑥 말을 건다. 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유천을 바라보았다. "바람둥이라고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써 놨더라? 그거 지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풉!" 나는 유천의 잠들었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만 해. 매직으로 얼굴에 바람둥이 애인이라고 도배해버릴 거야. 일주일은 밖에도 못 나가게." 유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몸을 잔뜩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댔다. 박유천이 나보고 '바람둥이 애인'이란다. 볼이 화끈거리는데 너무 좋아서 계속 웃음이 난다. 유천과 사귀고 나서는 이런 별 것 아닌 일로도 미친 듯이 웃게 된다. 역시 나는 박유천에게 미친 것 같다. 사랑은 정신병이다. "지금 어디 가는데?" 한참을 키득대다가 간신히 웃음을 진정하고 유천에게 물었다. "글쎄? 데이트?" 유천의 대답에 당황해서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 말았다. 데이트라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제야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 기어변속기에 올려 있던 유천의 손이 불쑥 내 앞에 내밀어졌다. 나는 내밀어진 유천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 유천이 나지막이 한 단어를 내뱉었다. 손이라. 손을 달라는 의미냐? 그래도 내가 가만히 유천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유천이 내 손을 찾아 쥐고는 그대로 내 손을 이끌고 다시 기어변속기 위로 돌아갔다. 나는 물 흐르듯이 순간적으로 이어진 유천의 행동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유천과 맞잡고 있는 내 손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긴장해서 몸이 굳는다. 연인이라면 별 것도 아닐 행동인데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나는 그렇게 뻣뻣하게 굳은 채로 한참을 앞만 보고 있었다. 점점 서울 타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 정윤 형이 떠올랐다. 참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많은 기억을 남긴 사람이다. 형과 드라이브 코스를 달리며 데이트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멍하니 서울 타워를 보며 그때의 생각에 잠겼다. 하드 탑을 오픈하고 싸늘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올려다보던 별. 이불에서 맡았던 옅은 세제 향기. 정윤 형의 따뜻한 마음. 정말 좋은 사람이다. 더 신기한 건 언제 유천과 친해졌는지 유천이 나에게 고백하던 날, 기계실에 남아서 회전목마를 돌려주고, 방송으로 음악도 틀어주었다는 거다. 나 같으면 절대로 불가능할 텐데 유천이나 정윤 형이나 둘 다 신기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유천이 가는 방향이 왠지 낯익다. 아마도 드라이브 코스에 접어든 것 같았다. "남산 가는 거야?" "어. 안 가봤지?" "가봤어." "누구랑?" "정윤 형이랑. 여기서 드라이브 했어." "…언제?" "음… 너 우리 집 앞에 와서 기다리던 날인가?" "……." "형 차 되게 좋다. 막 뚜껑도 열려." 기억난다. 유천의 아파트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갔을 때, 날 기다리고 있던 유천. 갑자기 키스를 해 와서 뺨을 때렸더니 유천의 입안이 터졌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던 것이 참 멋있었지. 나는 신나게 이야기하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아, 아파!" 유천이 잡고 있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꽉 쥐어오는 것이 느껴져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유천은 쥐었던 손에서 힘을 빼며 아무 말 없이 흘깃 나를 쏘아보고는 다시 앞을 보며 운전을 한다. "왜 그래!" 나는 인상을 쓰고 유천을 노려보았다. "나 성인(聖人) 아니다. 누가 딴 사람 생각하면서 웃으래?" 나지막한 유천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 지금 이 말은? "박유천… 질투 하냐?" 내 질문에 유천이 다시 흘깃 나를 노려본다. 으항항항! 기어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가 차안에 가득 찼다. "으아아아아, 아파!" 하지만 나는 또 다시 고통에 잔뜩 인상을 쓰고 말았다. 유천이 손을 꾹 쥐어온 것이다. 이 새끼, 손아귀 힘이 왜 이렇게 세. 나는 투덜대며 유천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하지만 유천은 손을 놔주지 않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질투쟁이."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속삭였다. "그러는 너는?" 나지막한 유천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유천의 얼굴에 잔뜩 낙서를 해 놓은 걸 보면 나도 보통은 아닌 듯 싶다.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리 둘이 너무 닮은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유천이 백미러를 흘깃 보더니 깜빡이를 켜고 길 한 쪽에 차를 세웠다. 나는 다 온 줄 알고 벨트를 풀며 물었다. "내려?" "아니." 짧게 대답하며 유천이 힘을 주어 잡은 손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유천에게로 확 몸이 기울고 말았다. 유천의 다른 손이 목 뒤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의 가까워진 눈동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뻣뻣하게 굳었다. "왜, 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유천의 눈동자가 가만히 웃었다. "키스하게." 내가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유천은 그대로 입술을 부딪혀왔다. 갑자기 느껴지는 유천의 입술에 당황해서 나는 유천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닿았던 입술이 살짝 떨어져나가고 유천의 혀가 할짝, 내 입술을 핥아왔다. 나는 입술을 열어 유천의 혀를 맞아들였다. 따스한 호흡과 희미한 담배 향이 느껴졌다. 담배 끊으라고 해야지. 나는 입안으로 들어온 유천의 혀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생각했다. 유천의 혀가 부드럽게 입안을 유영했다. 온 몸이 노곤해지는 느낌에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반대편 차선으로 차가 지나가는지 헤드라이트 불빛이 느껴졌다. 유천의 혀가 살며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나는 유천의 체온이 남아있는 아랫입술을 가만히 빨아보았다.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 상처가 달아오른 열기에 욱신거렸다. 유천이 촉,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나는 이번에도 유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아 버렸다. 유천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머릿속에 다시 저장해. 여기 황정윤이랑 온 데 아니야. 박유천이랑 키스한 곳이야." 나는 숨을 멈췄다. 유천의 말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 어디라고?" "……." 유천의 물음에 너무 얼굴이 달아올라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답해, 여기 어디야?" "바, 박유천이랑……." "나랑." "……." 나는 다음 대답을 기다리며 진지하게 나를 응시하는 유천의 눈빛에 또 다시 숨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나랑." 유천이 손을 꾹 쥐며 채근했다. 나는 가쁜 숨을 몇 번 내쉬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박유천이랑 키스한 곳……." 부끄러움에 '키'부터는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마쳤다. 또 다시 얼굴이 미친 듯이 달아올랐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유천을 살짝 곁눈질 하니 유천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에 와서 황정윤이랑 왔었다느니 하는 소리 하면 그땐 키스로 끝내지 않을 거니까 알아서 해." 유천은 내 턱을 들어 올려 다시 촉, 하고 입을 맞추고는 벨트를 당겨 찰칵 하고 채워 주었다. 귀가 화끈거리다 못해 얼얼하게 아프다. 차를 출발시키는 유천을 나는 힐끔 곁눈질 했다. 유천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다. 박유천은 이런 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아니면 내가 유난스러운 건가?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 공교롭게도 유천과 들른 레스토랑 역시 정윤 형과 왔던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나는 '어!'하고 무심결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찔끔해서 등 뒤에 느껴지는 유천의 기척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도 왔던 데야?" 정말, 진심으로, 모르고 그런 거야. 이렇게 말하면 믿어줄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유천은 나를 스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 같이 가!" 나는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유천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미리 예약을 해 둔 듯 웨이터가 자리로 바로 안내해 주었다.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였다. 예약씩이나 해 놓다니 나는 의외라는 시선으로 자리에 앉아 멀뚱멀뚱 유천을 바라보았다. "왜?" "응?" "왜 그렇게 봐?" "아무 것도 아니야. 너 멋있어서." "이제 알았냐?" 재…수 없다. 어쩌면 저렇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부끄러움이라든가 겸손함 같은 건 박유천 사전에 없는 건가?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앞에 놓은 물을 들어 마셨다. 괜히 기침이 나왔다. 그때 입구가 웅성거리며 여자들이 몰려들어왔다. 친구들끼리 온 모양인지 우리 자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이것저것 메뉴를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친구들끼리 영화도 보러 다니고, 이런 레스토랑이나 찻집에도 잘 가는 모양인데 남자들은 그런 일이 드물다… 까지 생각했을 때 내 앞에 앉아있는 유천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우리 남자끼리네? 순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 쓰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혹여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평일이라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는 듯 했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유천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안 시켜?" "예약할 때 말해뒀어. 내가 마음대로 시켰는데 괜찮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또 정윤 형과 왔을 때처럼 불어로 적힌 메뉴판을 보고 당황할까봐 걱정했다. 한국어로 적어놓으면 오죽 좋아. 우리나라에 불어 할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잔뜩 긴장해서는 이렇게 속으로 투덜거렸었는데. 그때 어찌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는데 정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이것저것 시켜 주었다. 정윤 형도 참 매너가 좋았는데 말이야. 나는 또 피식 웃었다. 톡톡. 테이블을 손톱으로 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유천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있다. 딴 생각 했다는 것이 걸린 것 같다. 실수했다 싶어서 멋쩍게 웃었다. "너 죽었어." 유천이 나지막이 뱉어내는 말이 장난 같지 않다. 하지만 이럴 때는 잡아떼야 한다. 인정했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뭐, 뭐가!" "또 황정윤 생각했지?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었는데 실실 쪼개냐?" 이 새끼, 말하는 거 봐라. 애인한테 쪼개냐가 뭐냐? 나는 짧게 코웃음을 쳐주고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언제?" "오리발 내미는 거 봐라." "무슨? 사람 의심하는 병 있냐? 의부증이야?" "의처증." "……." 유천이 정정해준 단어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한참 유천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려니 입가에 삐질삐질 웃음이 새어 나온다. "풉!" 결국 나는 테이블 구석에 엎드려서 한참을 큭큭대며 웃었다. 뭔가 내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고 웃음이 나온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고 웃고 있자니 유천의 손이 머리에 와 닿았다.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는 유천의 손길에 정말 우리가 연인이 됐구나 싶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준수, 일어나, 음식 왔어."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둘러 눈가를 훔치고 몸을 일으켰다. 준수, 일어나… 다정한 울림이다. 웨이터가 애피타이저를 내려놓고 와인을 따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와인이고 뭐고 내 귀에는 '준수'만 계속 맴돌고 있었다. 또 불러보라고 하면 과연 박유천이 말을 들을까? 나는 와인 잔과 유천을 계속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봤다. "왜 또?" 역시 눈치 빠른 유천은 알아차리고 물어온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용감하게 물었다. "나 누구야?" "김준수." 유천아, 이 새끼야. 좀 전엔 그게 아니었잖니. 나는 실망에 가득 찬,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My Beloved." 그리고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동작을 우뚝 멈췄다. 역시 미국물 먹은 사람답게 네이티브 스피커에 가까운 그 단어는 너무나 감미로웠다. 나는 샐러드를 다시 천천히 내려놓고 유천을 바라보았다. "뭐라구……?" 들었다. 들었는데……. "김준수." 퉁명스럽게 내 풀네임을 내뱉으며 와인을 들어 마시는 것을 보니 귀 끝이 빨갛다. 귀여운 자식. 또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서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그래, 그래야 박유천이지. 그래도 나는 너무 좋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저기……." 그때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유천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아놔, 또 아는 여자냐? 나는 순식간에 눈매가 싸늘해져서는 유천을 노려보았다.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분……." "아닌데요." 유천은 퉁명스럽게 그녀의 말을 뚝 자르고는 또 다시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라? 일단 아는 여자는 아닌 것 같다. 근데 화장품 광고라면 박유천이 출현한 CF 맞지 않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천과 그녀를 번갈아보았다. "미스틱에 나오는 분 아니세요? 인형처럼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어왔다. 미스틱에 나온 인형이라면 박유천이 맞다. 근데 이 새끼는 왜 아니라고 하는 걸까? "아닌……." "맞아요!" 또 다시 아니라고 대답하는 유천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대답해버렸다. 유천이 인상을 확 썼다. 나는 '뭐?'라고 조그맣게 대꾸하며 왜 거짓말 하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죠? 야, 맞대!" 그녀는 아까 친구들과 같이 들어왔던 테이블에서 왔는지 뒤를 돌아보고는 환히 웃었다. 유천이 또 다시 노려보기에 나는 지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려봐주었다. "저기, 사인 좀 해주세요." 저쪽 테이블에 있던 친구들까지 전부 와서는 유천에게 수첩을 들이밀었다.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져서 뿌듯하게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멋있다며 호들갑을 떠는 그녀들에게 '내 애인이에요'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천은 썩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유천의 정강이를 툭 찼다. 꽤 아팠던지 유천이 또 인상을 썼다.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부라리기에 테이블의 수첩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빨리 사인하라고 또 정강이를 툭 찼다. 유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다가는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펜을 받아들었다. 유려한 필체로 유천은 네 장의 사인을 해 주고 억지웃음을 지은 채 사진도 한 장씩 찍어 주었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으려니 괜히 뿌듯해져서 나는 혼자 싱글벙글 웃었다. "감사합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녀들이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유천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나를 노려보았다. "왜 거짓말 하냐? 너 맞잖아." "너는 이게 좋냐? 성가시게 밥도 못 먹고." "싫은 척 하기는. 사인 잘만 하더라? 이럴 줄 알고 혼자 몰래 연습한 거 아냐?" "미국에서 쓰던 이름이거든요?" 아, 맞다 참. 그렇겠구나. 하지만 순순히 인정할 수 없는 게 또 나의 본능 아니겠냐고. "웃겨. 자기도 좋으면서." 말해놓고 흠칫 했다. 자기라니……. 연인에게 사용하는 그 용법은 아니었지만, 괜히 민망해져서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는 포크로 푹푹 음식을 찔러 입안에 넣었다. 유천이 한참이나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피식 웃더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도 가만히 웃었다. 이걸로 비긴 거지? My Beloved. + 식사를 하면서 나는 계속 유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직원이 되고 나서 첫 월급을 탔다. 비록 아직 학생 신분이라 파트타임이긴 하지만 아르바이트생의 월급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여서 통장에 들어온 금액을 확인하고는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난다. 역시 정직원이라는 건 좋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박유천이었다. 선물할 것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박유천에게는 필요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뭘 선물하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오늘 이렇게 데이트라는 것을 하러 온 것이다. 하긴 나도 남잔데 늘 유천에게 얻어먹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박유천이 아무리 잘 사는 집 아들이라고 해도 왠지 그건 나에게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유천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웨이터를 불러 계산을 마쳐놓고 유천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유천이 당황하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애인이 된 마당에 일개 지인에게 질투를 하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전화기 밖으로 들려온 '유천 씨이'라고 길게 끄는 코맹맹이 여자 목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디저트로 나온 푸딩에 스푼을 깊숙이 찔러 넣고 이를 꾹 물었다. 박유천 말대로 나는 의부증이 있는 건가 싶다. 쿨하게 웃어넘기자고 생각했는데도 자꾸 입꼬리에 삐딱한 웃음이 지어지고 저절로 팔짱을 끼게 된다. 내가 생각해도 참 가관이다. "다 먹었지? 가자." 유천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나는 가만히 유천을 바라보다가는 왜 그러냐는 말을 한 번 더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로 다가가는 유천을 보고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계산했어." "뭐?" 유천의 말에 대꾸도 안 하고 나는 혼자 식당을 나와 버렸다. 왠지 어두운 하늘에는 별이 하나도 없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딸랑이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천이 내 옆에 와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차로 걸어갔다. 삑삑 하는 소리와 함께 미니 쿠퍼가 반갑다고 불을 깜빡였다. 나는 유천이 오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차에 올라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정말 쿨하지 못한 행동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동안 유천이 쌓아온 여성편력을 바로 코앞에서 봐온 나로서는 박유천이 영 못 미더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물어도 박유천은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꾹 다문 채 절대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박유천이 정말 바람둥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 난 삐쳤다. "뭐하는 거야?" 유천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며 툭 뱉어낸다. "뭐가?" "누가 계산하래? 오늘 내가 산댔잖아." "누가 내면 어때?" "내가 싫어." "나도 싫어." 재수 없게 툭 내뱉자 유천이 한참을 서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는 '쫄지 말자'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지지 않고 유천을 노려봐주었다. 유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운전이 장난이 아니다. 왜 이렇게 거칠게 모는지 벌써 급정거만 다섯 번째다.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야, 운전 살살 좀 해." 결국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렇게 잘 하면 네가 하던가." 유천의 얄미운 말투에 나는 순간 주먹을 꾹 쥐었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한 대 때려줘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 아! 소홀하게 하면 때려도 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유천에게 프러포즈 받을 때의 말이 생각나서 정말 쥐어박을 뻔 했다. 하지만 나는 간신히 분노를 억눌러 참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할게." "됐어." "내가 한다고. 빨리 세워." "……." 유천이 또 다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또 흘깃 쏘아봐주었다. "고집만 세서는." 유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속도를 줄였다. 아까보다 얌전해진 차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천도 마찬가지여서 한참이나 차 안에는 냉랭한 기류가 감돌았다. 밥 잘 먹고서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어디로 갈 거야?" 집 근처의 큰 교차로까지 왔을 때 유천이 불쑥 물었다. 뭔 소린가 잠시 고민하다가는 내 자취방으로 갈 건지, 유천의 아파트로 갈 건지를 묻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새끼야, 좀 앞뒤에 말 좀 더 붙여서 설명하면 안 되냐? "우리 집." "언제까지 거기서 살 거야? 생활비 두 배로 들잖아." "네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져요." 유천의 중얼거림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때 마침 정면의 고층 건물 위에 설치된 전광판에서 박유천이 출현한 화장품 광고가 시작되고 있었다. 요염한 여자 모델과의 입맞춤은 아무리 봐도 합성이 아닌 것 같다. "저거 진짜 한 거야?" "뭐가?" "저거!" 나는 짜증스럽게 전광판을 가리켰다. 유천이 전광판을 흘깃 보더니 피식 웃었다. "진짜겠냐?" 저 말은 진짜 한 건 아니라는 소리지? 그제야 조금 기분이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리얼해." "으하하하하!" 유천이 핸들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 하는 시점인 것 같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창밖으로 향한 채 억지로 태연한 척 했다. "김준수, 질투쟁이." "누가!"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또 다시 불타는 홍당무가 되어야 했다. 지이이잉. 그 순간 유천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기에 유천이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내게 던져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예, 유천이 핸……." - 박유천 씨?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유천은 내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그 번개 같은 행동에 놀라 나는 멍하니 유천을 바라보았다. "죄송한데 운전 중이라서요,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유천은 단지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누구냐는 눈빛으로 핸드폰을 다시 던져주는 유천을 계속 응시했지만 유천은 아무 말도 없다. "누군데?" "같이 일하는 사람." 그것이 끝이었다. 하여튼 저 놈의 입. 한 번 닫히면 열릴 줄을 모른다니까. 나는 또 투덜대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나저나 유천이 CF 일을 시작한 이후로 걸려오는 전화가 많아졌다. 아까 나를 심통 부리게 했던 여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괜히 내가 모르는 유천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이상하다. 그렇게 유천을 흘깃거리는 사이에 유천은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일찍 자." "응. 바로 집으로 갈 거지?" "글쎄. 어디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코끝을 긁적이는 유천의 대답이 왠지 조금 못 미더웠지만 뭐 별 수 있나? 나는 뚱하게 유천을 바라보다가는 몸을 돌려 열쇠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 유천이 나를 돌려 세웠다. 갑자기 다가오는 유천의 입술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 또 장난인가 싶어 살며시 눈을 떴을 때 웃고 있는 유천의 눈동자가 보이고 이내 입술이 닿아 왔다. 유천은 짧은 입맞춤을 하고는 금세 멀어졌다. 'Good night kiss'라고 속삭이는 유천의 목소리에 나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묘한 기분이 되어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왜? 너무 멋있냐?" 또 시작이다. 자화자찬. 하지만 내 머리를 부스스 흩트리며 가만히 웃는 유천은 정말 멋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천이 피식 웃으며 내 턱을 살짝 들어 다시 촉, 하고 입을 맞췄다. 긴 입맞춤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빨리 멀어지는 유천의 체온에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들어 가. 전화 할게." 유천이 나지막이 말하며 차에 올랐다. 나는 멀어지는 유천의 차에 한참을 손을 흔들다가 돌아섰다. 아직도 입술에 유천의 느낌이 남아있다. 더 하자고 할 걸 그랬나. 나는 피식 웃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우리의 역사적인 첫 데이트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걸려온 전화가 우리의 연애사정에 걸림돌이 될 일련의 해프닝에 대한 불길한 전조였음을 꿈에서도 알지 못했다. + 유천을 보내고 들어와서 씻고 나니 벌써 시간은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가볼 곳이 도대체 어딜까?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해 볼까 말까 망설이며 TV를 켰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유천의 CF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CF는 망설임을 단숨에 날려주었다. 나는 유천의 번호를 누르며 화면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합성이 아닌 것 같은데. - 여보세요? "……?" 나는 느닷없이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당황해서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박유천 번호가 맞다. 그런데 왜 여자 목소리가? - 여보세요? 다시 여자가 대답했다.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내가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에 전화는 끊겨버렸다. 나는 깜빡이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못 걸었나. 나는 통화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박유천 번호가 맞다. "개새끼." 막힘없이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또 병이 도진 건가?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전화를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유천이 샤워 중이라든가, 자고 있다든가 이따위 소리를 듣게 되면 정말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참기로 했다. 이게 현명한 방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박유천이 그렇게까지 미친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건 연인이 되었으니 유천을 믿는 수밖에. 연애라는 건 힘든 거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정상인 걸까? 의문이 생겼다. 나는 박유천 이외에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서로 감정을 교류하면서 깊게 사귀어 본 적도 없다. 나에게는 박유천이 뭐든지 처음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자꾸 의심이 된다. 정말 의심하는 병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다. 어쨌거나……. "넌 내일 죽었어." 불을 끄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자면 나만 손해기 때문이다. 이건 박유천이랑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고 그 난리를 치면서 깨달은 것이다. 너무 속이 편한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괜히 몸이 축나면 더 힘들어지는 건 나니까. 나는 TV를 꺼버리고 잠을 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놀이공원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느라 피곤했기 때문에 금세 잠에 빠지고 말았다. + 삑, 삑, 삑, 삑. 나는 힘주어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렀다. 내 전화를 여자가 받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놨으면 변명하는 문자라도 하나 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새끼는 문자는커녕, 전원이 나가 있다는 멘트를 듣게 했다. 그래서 새벽에 눈 뜨자마자 유천의 아파트로 달려온 참이다. 철컥.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어도 절대 놀라거나 흥분하지 말자. 나는 문고리를 잡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유천을 의심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공황 상태에 빠져버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며 현관을 살폈다. 일단 여자 신발은 없다. OK, 현관 클리어. 현관에 들어서서 문을 닫자 적막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집에 없거나,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낯선 옷가지가 떨어져 있는 건 아닌지 소파 위를 훑었지만 역시 깨끗했다. 거실도 클리어. 다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유천의 방 앞에 섰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져 나는 또 다시 심호흡을 했다. 여기가 바로 사건의 현장일 가능성이 제일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얼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문고리가 내 체온에 따뜻하게 달아오를 때까지 망설이다가 겨우 살짝 문을 열었다. 커튼을 다 내려놓았는지 방은 어두침침해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나는 치열하게 갈등했다. 만일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렵기까지 했다. 그나마 마음의 의지가 되는 것이라고는 유천이 작게 속삭였던 'My Beloved'라는 말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는데 다른 여자를 불러들이지는 않았겠지. 나는 문을 조금 더 열었다. 거실에서 열린 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었다. 그리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는 유천 혼자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막상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유천을 보니 마구 화가 난다. 아침부터 이런 뭐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다니. 이 새끼는 정말 연인으로 자격이 없다. 나는 씩씩대며 걸어가서는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야, 일어나." 유천이 살짝 인상을 썼다. 잠에 취한 얼굴인데도 멋있는 걸 보니 나는 초강력 콩깍지가 씐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일어나라며 더욱 세게 쿡쿡 찔러댔다. 유천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한 쪽 눈만 슬쩍 떠서 나를 보더니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미안한데, 내가 청개구리 띠라서 말이야. 게다가 유천이 아침에는 잠을 잘 못 깬다는 걸 아는 이상 이렇게 달콤한 복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어나, 새끼야!" 유천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기에 나는 소리를 빽 지르며 이불을 뺏어버렸다. "아, 씨바, 왜!" 유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짜증나 죽겠지? 내가 좀 전에 그랬거든? 복수 성공이다. 나는 비죽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애써 쿨한 표정을 유지했다. 정신 좀 빨리 챙겨 봐. 형님이 따질 게 있어서 왔다 이 말이다. "너 어제 나랑 헤어지고 어디 가서 뭐했어." 나는 가능하면 차갑게 들리도록 툭 내뱉었다. 하지만 유천은 대답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제 어디 가서 뭐 했냐고." "……." "여러 번 묻게 할래, 자꾸?" "CF 감독님이랑 스태프들 만나서 술 한 잔 했어." 이제 슬슬 정신이 돌아오는지 눈을 비벼 뜨며 유천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일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천을 내려다보았다. 유천이 몸을 일으켜서는 내 손에 들린 이불을 빼가더니 주섬주섬 덮으며 또 눕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전화 건을 이야기할까 망설였다. "거기 여자도 있었어?" "당연하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유천이 왜 이렇게 얄미운지 모르겠다. 나는 1인용 소파에 유천이 벗어놓은 걸로 보이는 옷가지를 주워들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서 찍 소리도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에서는 핸드폰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협탁에 두었나 싶어서 거기도 확인하고 침대 머리맡도 확인했다. 혹시나 싶어서 유천이 누운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베개 밑도 확인했지만 유천의 핸드폰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야, 핸드폰 어디 있어?" "몰라."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침대에 털썩 앉아서는 이불을 끌어내렸다. 술 마셨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지, 가까이 가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유천의 감긴 눈에 살포시 내려앉은 긴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손이 불쑥 나갔지만 참았다. 잠시 후에는 나도 출근을 해야 하고, 괜히 아침부터 유천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나쁘지 않다. 잠에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유천을 이렇게 마음껏 보고 있을 수 있으니. 나는 유천 옆에 나란히 누워서 내 핸드폰을 꺼내 유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기 오기 전에 확인했듯이 전원이 나가있다는 멘트만이 돌아왔다. "옷에도 없고, 어디 뒀어?" "아, 몰라." 끌어내린 이불을 다시 잡아끌기에 나는 이불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유천은 계속 이불을 끌어올리려고 하고 나는 버티는 힘겨루기가 한참 이어졌다. 있는 힘을 다해 버텼더니 결국 유천이 한숨을 쉬더니 베개 위로 얼굴을 묻고 엎드려버렸다. 이 자식아, 그러면 얼굴을 못 보잖아. "전원 나가 있대. 어디에 버리고 온 거야." "모른다고." 유천이 웅얼거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귀를 막은 유천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다시 투덜거렸다. "칠칠맞게 핸드폰이나 잃어버리고 다니고. 바보냐? 초딩이야?" "……." "이제 나랑 어떻게 통화할 거야?" "아, 그만 좀 하라고. 머리 울려." 유천이 내게 잡힌 손목을 빼내고 다시 귀를 틀어막으며 웅얼거렸다. 그래, 술 냄새가 장난이 아닌 걸 보면 상태가 심각한 건 알겠는데. 지금 실종된 핸드폰은 갈비뼈 나가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랑 말다툼하다가 반으로 뚝 꺾어서 창밖으로 던져 버린 그 아이와 이별한 후에 새로 마련한 것이었다. 산지 이제 한 달 남짓? 내 돈은 아니지만 아까워 죽겠다. "산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잃어버려." "……." "야, 너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 "너 어제 내가 자기 전에 전화한 건 알아?" "……." "그때 여자가 받더라?" "아, 진짜, 김준수. 아침부터 바가지 긁고 난리야." 드디어 유천이 얼굴을 묻었던 베개에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괜히 기분이 상했다. 나는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한참 유천을 바라보다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유천이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몸이 한 번 흔들, 했지만 나는 유천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미안." 하지만 유천이 다시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다시 침대에 털썩 앉고 말았다. 나는 다시 유천의 손을 뿌리쳤다. "아, 준수야, 왜 그래." 이제야 잠이 달아난 눈으로 미소 지으며 다시 손목을 잡아채는 유천이다. 나는 싸늘하게 유천을 노려보았다. 어제 여자가 받은 전화는 도대체 뭔데, 그걸 바가지 긁는 거라고 한 순간에 매도해 버리다니. 또 다시 유천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김준수, 미안해. 잘못했어." 유천이 벌떡 일어나더니 뒤에서 덥썩 안아왔다. 그 바람에 다시 나는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리 꺼져, 새끼야. 갈 거야." 나는 유천의 팔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유천은 더욱 꽉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 번 더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오히려 유천의 팔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귓가에 유천의 호흡이 느껴졌다. 술 냄새도 더 가까워져 있었다. "아, 좀 놔, 술 냄새 나." "싫어."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목에 유천의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흠칫해서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유천이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쿡쿡 웃었다. 긴장해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난 병인가? 유천이 스킨쉽을 시도하기만 하면 이렇게 몸이 굳는다. 사귀기 전엔 좀 덜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땐 유천과 잘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땐 박유천에 목이 말랐었고, 애가 탔던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하던 짓도 멍석 깔면 못 한다고. 그 말이 정답이다. 왠지 두렵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제일 큰 문제는 나는 그, 뭐냐… 경험이 없단 말이다. "또 굳었어." 목덜미에 유천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내가 언제?" 퉁명스럽게 대꾸를 해보았지만 내가 들어도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다. 유천이 또 다시 쿡쿡 웃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내 허리를 안고 있는 유천의 팔에서도 이제는 조금 다른 감각이 전해져서 등줄기가 간질간질해지고 있었다. 유천이 팔을 들어 내 턱을 잡더니 살짝 뒤로 돌렸다. 유천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그리고 어깨를 가만히 밀어오는 유천의 힘이 느껴져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버렸다. 윗입술을 물어오는 유천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나는 투덜거리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윽, 술 냄새." "미안." "담배도." "끊을게." 유천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다시 입술 위를 덮어왔다. 내가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있자 유천은 내 손목을 잡더니 끌어올려서는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유천의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살짝 열어주자 따스하고 말캉한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지독한 술 냄새와 함께였지만, 내게는 한없이 달콤했다. 유천은 어젯밤에 미처 하지 못 한 것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길고 깊게 키스했다. 유천의 손이 허리를 쓸었다. 나는 흠칫하면서 유천의 목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유천의 혀가 더 깊게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아침부터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 노곤한 쾌감에 몸을 떨면서도 나는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유천의 손이 한참을 허리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옷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맨살에 닿은 유천의 손은 서늘했다. 그 낯선 느낌에 놀라 나는 유천의 어깨를 밀어냈다. 유천의 혀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살며시 눈을 뜨자 유천이 나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렇게 가까이서 내려다보면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하지 마?" 그리고 조용히 물어오는 유천의 목소리에 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천이 피식 웃으면서 이마에 입맞춤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가는 그 느낌은 너무 부드럽고 감미로워서 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먼저 유혹했으면서." 그리고 이어진 유천의 말에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내, 내가 언제!" "애인이 옆에 누워 있어. 그러다가 손목 홱 뿌리치고 나가는데 그냥 보내는 놈이 어디 있냐?" 유천이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붉어진 얼굴이 가라앉질 않는다. 결국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비켜, 나 집에 가서 씻고 출근해야 돼." "싫어." "아, 좀 비켜, 무거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천은 전신에서 힘을 쭉 빼더니 내 몸 위에 축 늘어져버렸다. 갑자기 유천의 체중이 실려 오자 호흡이 가빠져왔다. 목덜미에서 유천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자 또 다시 허리부터 야릇한 느낌이 쭉 타고 올라왔다. "야, 무거워. 나 일 가야 된다고." "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천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더니 씨익 웃었다. 그 미소는 왠지 사악해 보이는 것이어서 나는 바짝 긴장했다. "사랑해요, 유천 씨 해봐." "뭐!"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나는 좀 심하게 쇳소리를 내고 말았다. 유천이 다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큭큭대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 새끼야, 네가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 같지? "미친놈. 술 덜 깼냐? 빨리 비켜. 발로 차버리기 전에." 나는 유천의 어깨를 마구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유천의 손에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난 시간 많아. 급한 게 누구더라?"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유천의 얼굴에 순간 살의를 느꼈다. "아, 박유천! 좀 비키라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해봤지만 완력으로는 유천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힘이 다 빠져서 녹초가 되어 축 늘어져버리고 말았다. 유천은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새벽부터 유천의 집에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저런 소리는 평생 해 본 적도 없단 말이다. 하지만 유천은 말을 하기 전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별 수 없다. "…해요, 유천……." 나는 대충 발음을 얼버무리며 빠르게 뱉어냈다. 유천이 잠시 정말 할 줄 몰랐다는 듯 한 표정이 되었다가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유천이 배를 부여잡고 침대를 뒹구는 틈에 서둘러 몸을 일으킨 나는 빠르게 유천의 침실을 빠져나오며 악을 썼다. "개새끼, 너 진짜 재수 없어!"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도망치듯 현관문을 나섰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싸늘한 겨울의 새벽 공기에도 식을 줄을 몰랐다. + 결국 유천의 짓궂은 장난으로 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출근을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오늘은 놀이공원에 사람이 적어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편안한 하루였다. 매일매일 이런 날만 계속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오가는 사람들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당분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분위기를 확인한 후 직원 휴게실로 들어갔다. [뭐해] 낯선 번호였다. 앞뒤 다 뗀 저 말투는 딱 박유천인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구냐는 문자를 보냈다. 금세 같은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나. "아." 역시 유천이다. - 바빠? "아니. 근데 이 번호는 뭐야? 또 샀어?" - 어, 그냥 번호 바꿨어. 귀찮은 전화 많이 와서. "응, 잘 했어." 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대답했다. 나와 사귀게 된 이후에도 여자들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걸려오는 족족 여자인 것에 내가 한 번 짜증을 낸 적이 있는데, 기특하게도 번호를 바꾸다니. "왜? 무슨 일 있어?" - 오후에 일 없으면 우리 집에서 뭐 좀 갖다 줄 수 있나 해서. "지금 집에 있는 거 아냐?" - 어, 촬영하러 와 있어. "뭐? 그런 얘기 없었잖아." - 갑자기 잡힌 거라. "……." 나는 잠시 눈만 깜빡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유천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그 일을 계속 하고 싶은 것 같다. 유천이 이렇게 뭔가에 고집을 피운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이런 유천의 모습이 조금 낯설다. - 시간 없으면 괜찮아. "아냐, 갈게. 뭐 갖고 가면 돼?" - 컴퓨터 책상 위에 보면 내꺼 포트폴리오 파일 있어. 논현동 와서 전화해. "응." - 보고 싶다. 빨리 와. "……."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유천도 내게 뭔가 듣기를 원했던 것은 아닌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식의 심부름이라면 친구일 때도 많이 하던 것이다. 유천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것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느낌이 다르다. 뭐랄까……. 내가 유천의 생활 속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연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 우리는 오히려 친구일 때는 별로 싸우지 않았던 것 같다. 유천도 그다지 크게 화를 내지 않았고, 나도 유천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고집을 피우지 않았으니까. 내가 좀 일방적으로 유천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이 많긴 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싸우는 일은 별로 없었다. 서로 적정한 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마음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있다. 그래서 서로 그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그것은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어도 적당히 참아 넘기고, 심하게 상처를 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지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조금 변했다. 서로에게 그 울타리를 조금씩 열어두고 언제 어디서건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유천의 마음이 다이렉트로 내 마음에 전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좀 전의 전화 통화가 그렇다. 굳이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어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상황. 이런 것이 분명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열린 울타리로 서로의 마음을 더욱 직접적으로 아프게 할 수 있는 일도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이런 사이가 뿌듯하다면……? 박유천도 이런 기분일까?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고 싶다는 유천의 한 마디에 퇴근까지 세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을 몽몽한 핑크빛 기류에 휩싸여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을 맛보았다. "김준수 표정 좀 봐. 아무래도 수상해." 문득 들려온 정민 누나의 목소리에 내 정신은 다시 지구로 되돌아왔다. 시간이 훌쩍 가서 어느 새 퇴근 시간이 된 듯 다들 교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예리한 정민 누나의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탈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여자들은 신기하다. 어쩌면 저렇게 사람의 변화에 민감할까? 앞으로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왔을 때 나는 아르바이트생인 승연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녀가 키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내가 유천에게 달려갈 생각에 들떠 정신이 없던 탓이었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감싸 안고 간신히 벽에 손을 짚고 섰다. 여기서 넘어졌으면 웬 망신이냐는 생각에 안도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상당히 민망한 포즈라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아, 저, 저기… 괜찮아?" "네……."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내 물음에 승연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쓱하게 웃고는 내일 보자며 돌아섰다. 빨리 유천에게 가야 해서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다. "아, 저기 매니저님." 승연의 부름에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는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저, 저녁식사… 같이 하실래요?" "응?" "어제 도와주셔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어제?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사고가 많았지만 승연과 관계된 것이라면… 아마도 그 콜라 한 잔 값 내고 두 잔 받아간 아주머니? 스스로 뿌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일이라서 잘 기억하고 있다. "아, 미안. 오늘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내가 밥 사줄게." 나는 싱긋 웃어보이고는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승연을 도와준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한 것뿐이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마음을 쓰는 그녀가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지만 오늘은 유천이 먼저였다. 나는 왠지 시무룩해진 승연을 뒤로 한 채 서둘러 회사를 빠져나왔다. 하늘은 눈이라도 올 것처럼 잔뜩 흐려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행선지를 말 한 후 나는 유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 설정도 안 된 뚜르르 하는 벨소리가 몇 번 울렸다. - 네, 박유천 씨 핸드폰입니다. 여자였다. 얼핏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저… 유천이 친구인데요. 유천이랑 통화 가능할까요?" 친구라는 말이 참 내뱉기 힘들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 지금 잠깐 자리 비우셨는데요. "아, 네. 그럼 나중에 다시 걸게요." - 네. 뭐, 같이 일하는 사람이겠지. 조용히 끊기는 전화를 내려다보다가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괜히 마음 졸이지 않아도 오늘 가보면 알 수 있을 터였다. 나풀나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결국 눈이 오는구나. 나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를 내다보며 또 다시 유천의 생각에 잠겨 미소를 지었다. + 유천의 아파트에 들러 파일을 들고 다시 택시에 올랐다. 뭔가 하고 뒤적여보니 그동안 출현했던 CF 사진과 유천의 프로필 사진이 가득했다. 클로즈 업 된 유천의 사진 한 페이지를 펴 놓고 눈을 깜빡깜빡하며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전문 사진사에게 찍은 것이라 그런지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유천의 얼굴은 빛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박유천 진심인가 본데. 유천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은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며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잘 모르는 유천의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지이이이잉. 그때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유천이다. "응." - 어디야? "지금 택시 타고 가는 중. 거의 다 왔어." - 아, 그럼……. 유천은 스튜디오의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들어서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조금 걱정하며 유천이 알려준 길을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너 저녁은 먹었어?" - 아니, 아직. "거기 같이 일하는 사람 많아?" - 한 10명 정도? "아, 많구나." - 왜? "아니야. 빨리 갈게." - 어. "보고 싶어." 나는 서둘러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런 닭살 돋는 짓도 하고 정말 많이 변했다. 10명 정도면 뭘 사가는 게 좋을까? 사실은 저녁도 못 먹었다는 박유천에게 먹이고 싶은 거지만 혼자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이것저것 고민하면서 택시비를 건넸다. 유천이 알려준 대로 길을 찾아들어가다 보니 피자 가게가 눈에 띄었다. 여럿이 먹을 수 있으니까 저게 좋겠다 싶어 세 판을 포장해서 나왔다. 음료수까지 들고 있으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스튜디오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피자 가게에서 가까운 곳에서 스튜디오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큰 건물이었다. 4층이라고 했던가? 나는 무심코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몇 층 가시나?" 그런데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경비에게 제지를 당했다. "4층이요." 경비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금세 나에게 돌아와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4층에서 피자 안 시켰다는데?" "예?" 나는 당황해서 쇳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하지만 경비 아저씨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재영 씨 팬이면 여기 두고 가요. 전해 줄 테니까." "그게 아니고, 볼일 있어서 온 건데요?" "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지난번에도 잘못 들여보냈다가 이상한 사진 찍혔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그냥 두고 가." 이제는 말도 확 놓으시고.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저씨를 바라보았지만 아저씨는 상대해줄 생각이 없는지 TV로 시선을 돌려버린 상태였다. 나는 내 자신을 훑어보았다. 청바지에 티셔츠, 패딩 점퍼 차림의 나는 연예인의 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영락없는 학생이었다. 뭐, 실제로도 학생이지만. "아저씨, 저 진짜 볼일 있어서 온 거에요. 이거 전해줘야 해요." 나는 유천의 파일을 들어 보이며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저씨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돌아가라는 말뿐이었다. 난감한 기분에 들고 있던 유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좀 전처럼 그 여자라도 받아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서너 번 더 전화를 걸다가 포기하고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도무지 들여보내줄 것 같지는 않고, 유천에게 파일을 전해주기는 해야겠고 하니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한 것이다. 나는 뒤통수에 꽂히는 경비 아저씨의 경멸이 섞인 싸늘한 눈초리에 억울해하며 살짝 건물 뒤로 돌아갔다. 이재영인지 뭔지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인물인데 저렇게 막는 걸 보면 잘나가는 연예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드나드는 건물이라면 분명히 뒷문도 있을 터였다. 역시 건물 뒤쪽에는 좁은 길에 면해 있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비상구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문은 잠겨 있었다. "아씨." 나는 짜증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도 오고, 춥고, 손도 시리고, 유천에게 슬슬 짜증이 나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큰 길로 나와 전화기를 꺼내 유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몇 번이 울려도 유천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때 근사한 벤츠 한 대가 비상구 근처에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오, 차 멋있는데. 나는 감탄하며 구석구석 벤츠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그 차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언뜻 유천보다 키가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유천도 작은 키가 아닌데. 나는 벤츠와 잘 어울리는 그의 스타일리쉬한 차림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철컥! 무거운 쇳소리를 내며 비상구가 열리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그를 위해 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저 사람이 들어갈 때 따라 가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비상구로 다가갔다. 그는 문을 열어준 사람과 아는 척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문이 잠기기 전에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헉!" 그리고는 뻣뻣하게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 두 사람이 키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고개를 푹 숙이고는 계단을 한 걸음 올라갔다. 이런 자리는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아놔, 진짜 박유천. 너는 진짜 죽었어. 그 잠깐 사이에도 속으로 유천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야." 나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나는 쭈뼛쭈뼛 뒤를 돌아보았다. 좀 전에 벤츠를 타고 온 남자가 잔뜩 인상을 쓴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야'래. 내가 보고 싶어서 봤냐, 이 새끼야. 순간 울컥 했지만 그렇다고 잘 한 것도 없었기에 얼른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벤츠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눈치를 보더니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벤츠는 조금도 인상을 풀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썩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나는 사과를 했다. "넌 뭐야? 내 팬이야? 아니면 파파라치야?" 그의 싸가지 없는 말투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신 알지도 못하거든?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게 아니라 볼일 있어서 왔는데 정문에서 안 들여보내줘서……." "사진 찍은 거 있으면 좋은 말 할 때 내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나는 조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선글라스 너머로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분 나쁜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나는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죄인의 기분이 되어 눈을 깜빡거리며 서 있었다. "번호." 그가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네?" "핸드폰 번호." 나는 잠시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는 내 번호를 말해주었다. "이름." "김준수요." 사실 말 해줄 필요는 없었지만 내가 뭐 죄 지은 것도 아니고, 나는 당당하게 이름과 번호를 알려줘 버렸다. 그가 통화 버튼을 꾹 누르자 내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번호가 맞는 것을 확인한 그는 갑자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좀 전에 본 거 기자들한테 흘리면 죽는다. 소문나면 다 네 짓인 걸로 알 거야." 그가 나지막이 협박하며 수표를 몇 장 꺼내서 내미는 것이 보였다. "와씨."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저기요, 저는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고요, 그쪽 취향이 어떻건 관심도 없고요, 그냥 4층에 볼일 있어서 온 것뿐이거든요? 이제 가도 되죠?" 나는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돌아서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별 미친놈도 다 있다.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저렇게 안하무인에 싸가지가 없다니.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와서 4층 문을 열었더니 유천이 알려준 스튜디오가 보였다. 피자 다 식었겠네. 나는 투덜거리며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어요?" 문에 달린 종이 딸랑하고 울렸다. 예쁘장한 여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기에 나는 유천의 이름을 대며 심부름 왔다고 말했다. "잠시만요. 지금 촬영 중이신 것 같은데." 그녀는 예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나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 가죽 소파에 몸을 걸쳤다. 그 잠시 동안인데도 손이 얼어서 빨갛게 부어있었다. 나는 손을 호호 불며 마주 비볐다. 딸랑. 누군가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아, 씨바. 벤츠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나는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나를 흘깃 보는 것이 느껴졌다. 또 야야 하며 따지는 건 아닌가 긴장했는데 그는 그냥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의 뒷모습을 눈을 쫓았다. "어, 재영 씨 오셨어요?" 안쪽 촬영장이 소란스러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우를 보아하니 좀 유명한 것 같은데 나는 모르는 사람이니 패스. "준수야." 그때 유천이 안쪽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까맣던 머리가 느닷없이 갈색이 되어 있었다. 옅은 화장기가 있는 유천의 얼굴이 낯설다. 나는 멍하니 유천을 바라보았다. "왜? 이상해?" 유천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았다. 낯설긴 한데 이상하진 않다. 오히려 너무 멋있어서 탈이랄까? 나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피자를 가리켰다. "밥 못 먹었다고 해서 이거 사왔는데 좀 식었을지도 몰라. 경비실에서 안 들여보내줘서 엄청 고생했잖아, 새끼야." "아, 미리 말을 안 해놨네." 유천이 미안한 듯 웃으며 투덜거리는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고는 피자를 챙겨들더니 들어오라며 안쪽으로 향했다. 나는 유천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그리고 스튜디오의 낯선 광경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지금 카메라 앞에 손을 모으고 앉아있는 저 여인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최근에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아닌가? 나는 입을 뻐끔뻐끔하며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천이 피식 웃었다. "신기하냐?"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표정을 확 굳혔다. 그래, 나 촌스러워서 연예인보고 신기해했다. 나는 뚱한 표정이 되어 유천을 흘겨보았다. "피자 드세요!" 유천은 내가 사온 피자를 한 쪽 테이블에 풀어놓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잠시 쉬자는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반가워하며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누가 시켰어?" "제 친구가 사 왔어요." "어머, 그래? 잘 먹을게요." "현지 씨 피자 먹어!" 사람들의 호응에 괜히 뿌듯한 기분이 되어 사람들을 둘러보는데 한쪽에 앉아 있는 벤츠가 보였다. 잔뜩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것이 여간 건방져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옆에 아까 벤츠와 키스를 하던 남자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벤츠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싸늘한 시선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내가 남의 연애 사정 갖고 왈가왈부할 처지는 못 되니까. "박유천 씨." "네?" 벤츠가 유천을 불렀다. 유천은 이제 막 피자 한 입을 베어 물다가는 입가를 닦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벤츠에게 다가가는 유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새끼, 성격도 나빠 보이는데 유천이는 왜 부르는 거지? "이거 배터리가 나갔는데 충전 좀 해다 줘." 핸드폰 배터리를 내미는 그의 행동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게 어디서 우리 유천이한테 심부름을 시켜? "네." 하지만 유천은 고분고분하게 그것을 받아들고는 외투를 걸쳐 입었다. 스튜디오를 나서는 유천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나는 가만히 눈치를 보았다. 유천이 다시 스튜디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있어. 추운데." "네가 그걸 왜 해다 줘?" "그런 게 있어. 나오지 마." 유천이 다시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천의 미소에 내가 더 속이 상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천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있다가는 안으로 들어와서 벤츠를 노려봐주었다. 재수 없어. + 피자 덕분에 스태프들에게 점수를 땄는지 다들 내게 한 마디씩 걸어주며 친한 척을 해 왔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시켜대는 벤츠 덕분에 유천은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하고 또 머리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선배라서 어쩔 수 없다는 유천의 말에 괜히 속상하다. 벤츠의 이름은 이재영이라고 했다. 경비 아저씨가 팬이냐고 했던 바로 그 인물. 나는 지금 촬영을 구경하며 한쪽 구석에 멀뚱히 앉아있었다. 무슨 의류업체 카탈로그라는데 메인이 바로 이재영 씨란다. 잘 모르지만, 굉장히 유명한 모델이라고 한다. 유명하거나 말거나 내게는 유천을 괴롭히는 악마 이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촬영을 하면서도 계속 '박유천 씨, 박유천 씨'하고 유천을 불러대며 심부름을 시켜대는데 정말 얄미워서 죽겠다. 그나저나 계속 화장을 고치고, 머리 모양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고, 몇 십장이고 같은 사진을 찍고. 유천은 저런 것이 도대체 뭐가 좋은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저건 언제 끝나려나? 나는 슬슬 잠이 와서 하품을 하며 시간을 봤다. 벌써 11시인데. "잠깐 쉬고 하죠." 포토그래퍼의 말에 유천이 어깨를 잔뜩 늘어뜨리고는 금세 피곤한 얼굴을 한다. 유천이 담배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유천을 따라나섰다. 유천은 비상계단 문을 열며 담배를 빼 물었다. 나는 천천히 닫히는 문을 얼른 잡고는 유천을 따라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통로는 쌀쌀하고 캄캄했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눈이 날아들고 있었다. 유천이 나를 보며 물었다. "왜 나와?" "그냥." 유천은 내 말에 피식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유천의 얼굴이 주홍빛으로 달아올랐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유천은 피곤한 얼굴로 미간에 살짝 인상을 쓰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내뱉었다. 그것은 마치 고뇌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어서 묘하게 섹시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콜록콜록." "이쪽으로 와." 유천이 기침을 하는 나를 보며 반대편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걸음을 옮겨 반대쪽에 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유천을 바라보았다. 손질되어 하얗고 깨끗한 피부,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샤프하고 남자다운 옆선, 마르고 긴 손가락과 그 끝에 걸려있는 담배. 유천은 그 장면 그대로 CF였다. "담배 끊는다더니." 잠깐의 침묵을 참지 못하고 내가 불쑥 내뱉었다. 그냥 아침에 유천이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유천이 쿡쿡 웃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좀 봐줘." "응." 멋진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유천에게 딱히 불만은 없었기에 나는 얼른 대답했다. "나 되게 못하지?" 유천이 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담배연기를 토해내며 물었다. 촬영 중에 이런저런 지적을 많이 받은 탓에 유천은 조금 의기소침해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제일 멋있어." "그건 콩깍지고." "아냐, 진짜야."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세계에서는 박유천이 가장 빛나고 있었으므로. 유천이 또 다시 쿡쿡 웃었다. "이리 와." 유천이 팔을 약간 벌리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유천은 다시 말을 이었다. "고마워서 상 주게." 나는 씨익 웃으며 유천에게 와락 안겼다. 그에게서는 오늘도 쌉싸름한 불가리블랙의 향기가 났다. 나는 유천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향기를 들이마셨다. 유천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은 계속 이재영 씨가 유천을 마구 부려먹고, 포토그래퍼도 자꾸 지적을 해대고 해서 조금 걱정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박유천이니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유천을 위로하고 싶었다. "박유천." "어?" "키스해 줘." "……." 유천이 대답 없이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해?" 나는 유천의 목덜미에 그대로 얼굴을 묻은 채 물었다. 유천이 나지막이 웃었다. 유천의 몸에서 가만히 흔들림이 전해져왔다. "웬일이야, 김준수가?" "빨리." 내 채근에 유천이 또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담배 냄새 날 텐데." "괜찮아." 나는 유천에게 안겨있던 몸을 살짝 떨어뜨렸다. 유천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고 닿아오는 유천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씁쓰름한 담배향기가 느껴졌다. 언젠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게 등 돌려도 나는 끝까지 네 편이라고 했던 적이 있어. 오늘의 네가 힘들면 내가 격려해 줄 거고, 내일의 네가 눈물을 흘리면 내가 닦아 줄 거야. 모레의 네가 기뻐하면 나는 두 배로 기뻐해 줄게. 그러니까 힘내. My Beloved. 나는 내 마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유천을 더욱 단단히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연애질은 다른 데 가서 하지?" 그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나왔는지 재영이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우리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저 사람 되게 재수 없다. 나도 지갑에서 돈 꺼내서 쥐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 역시 삐딱하게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유천이 꾸벅 사과를 하자 그는 피식 하고 비웃었다. "신인 주제에 발랑 까져서는." 재영이 다시 비상구 문을 열고 나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순간 발끈해서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저……!" 재영을 크게 부르려던 내 입을 유천이 서둘러 틀어막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입을 막은 유천의 손을 뿌리치고 유천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나는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나중에 해도 돼." "무슨 나중이야! 저 사람 하는 거 봐. 어떻게 저렇게 재수가 없냐? 저걸 왜 참아?" "나중에 내가 할게. 우리 하던 거나 하자." 유천이 미소 지으며 담배 끝의 불똥을 손가락으로 탁 튀겨 날려버렸다. 그 동작에 나는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상처입지 않았다. 아니, 상처 입고 더욱 강해졌다. 그의 말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았다. "개새끼." 내가 욕설을 내뱉었음에도 유천은 그저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졸라 멋있어." 나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유천의 목을 끌어안고는 허겁지겁 입술을 부딪쳐 들어갔다. 유천이 쿡쿡 웃으며 내 허리를 안아왔다. 이렇게 멋진 연인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는 온 세상에 외쳐주고 싶었다. + "준수, 일어나." 유천의 촬영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나보다. 몸을 가만히 흔드는 느낌에 잠을 깨니 눈이 빨갛게 충혈된 유천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자 유천이 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눈물겨운 우정이군. 아, 우정이 아니지, 참."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이죽대고 있는 재영을 노려보았다. 재영은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저쪽으로 가버렸다. 와, 육두문자가 절로 나오게 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계속 저럴 생각인 거다. 나는 너무 분해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쏘아보았다. 옆에서 유천이 쿡쿡 웃었다. 나는 그런 유천에게도 짜증이 치솟았다. "미친놈아, 너는 웃음이 나오냐?" "원래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신경 끊어. 왜 괜히 네가 흥분하고 난리야? 너만 손해잖아." 너는 뭐 부처님 가운데토막이냐? 뭐 그리 너그럽게 굴고 난리야? 유천의 말에 더 짜증이 났다. "너 지금 누구 편 드는 거야." 내 퉁명스러운 말에 유천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유천의 손을 쳐내고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갈게요." 유천이 인사를 하며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입구에서 유천이 나오길 기다렸다. 유천이 여전히 굳어있는 내 표정을 보고 또 웃으며 손을 잡아왔다. 나는 유천의 손을 뿌리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야." "왜?" "뭐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뭘?" "내가 언제 그 사람 편을 들었다고 이래?" "아니면 됐고." 나는 쌀쌀맞게 대답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유천은 타지 않고 가만히 문 앞에서 나를 응시했다. 문이 닫힌다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데도 유천은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았다. 혼자 내려가 버릴까 하다가 유천의 굳은 표정에 슬쩍 겁을 먹고 얼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유천은 여전히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새끼, 또 삐쳤나? "어, 얼른 타." 나는 금세 찔끔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유천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 오른 유천은 말없이 지하 1층을 꾹 눌렀다. 그리고 나는 이 정도에서 넘어갔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가 훤하다. 난 분명히 박유천한테 평생 쥐어 살 거다. 제길. "잠깐만요!" 닫히는 문 사이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천이 다시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는 사이로 보인 인물은 이재영과 키스를 하던 그 남자였다. 그도 유천과 함께 작업을 한 신인 모델이었다. 나는 굳어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유천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분 더 오실 건데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가 멋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금세 우리는 그 사람이 이재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만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그가 천천히 복도를 걸어와서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걸린 시간은 잠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치솟아 나는 유천의 등에 머리를 묻고 기대버렸다. 유천이 닫힘 버튼을 꾹 누르는 것이 몸의 움직임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유천의 등에 머리를 댄 그대로 가벼운 한숨을 토해냈다. 쌉싸름하게 불가리 블랙의 향기가 났다. 나는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유천의 향기를 맡았다. 유천이 쿡쿡 웃는 것이 느껴졌다. "박유천 씨." "네?" 재영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유천보다 키가 큰 그는 삐딱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유천을 불렀으면서 왜 날 보고 있어. 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심부름 하나 더 해줘야겠어." "네." 뭐 저런 게 다 있어! 박유천, 넌 미쳤냐? 왜 그걸 얌전히 들어 주고 있냐고! 나는 '어이가 너무 없어서 실신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유천을 툭 쳤다. 유천이 흘깃 나를 보았지만 그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런 유천에게 더 어이가 없었다. "사무실에 이거 좀 갖다놔." "네." 유천의 순순한 대답에 대신 분노한 내 입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저기요. 우리 유천이한테 왜 자꾸 그러시는데요?" 이재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제길, 모델 놈들 싹 다 말살시켜버릴 테다. 왜 이렇게 키가 커서 하나같이 나를 내려다보냐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름대로 열심히 이재영을 노려봐 주었다. 그런데 박유천, 이 새끼는 내가 자기 편 들어주는데 왜 저렇게 잡아먹을 듯이 날 보는 건데! 더 짜증이 치솟는다. "우리 유천이?" 재영이 피식 웃었다. "김준수, 입 다물어."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내 분노를 멈출 수 없었다. "네, 우리 유천이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구세요? 원래 성격이 그래요? 남 잘 되는 거 못 봐요? 아니면 우리 유천이가 너무 잘 나서 질투, 읍……!" "입 다물라고." 박유천이 서둘러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이 새끼는 내가 자기 편 들어주는데 반응이 뭐 이러냐. 나는 배신감에 유천의 손을 있는 힘을 다 해 꽉 물어버렸다. "윽!" 유천은 고통에 미간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나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유천의 손을 잡아 내렸다. "김준수라고 했던가? 아주 귀엽게 노네." 1층에 도착했다는 안내 멘트와 함께 재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비웃음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다. 재영은 씩씩대는 내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나는 문이 닫힐 때까지 그를 노려봐 주었다. “너 이상해.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저 사람한테 관심 있냐?” 유천의 물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무슨 소리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된다. 싸가지는 어디 갖다 버렸는지 알 수 없는 거만한 인간한테 관심이라니. 이 새끼는 사람을 뭘로 보고. 나는 극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며 재영을 험담했다. 유천은 여전히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무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그 표정. "…손 괜찮냐?" 유천의 침묵과 내 욕설이 한참이나 계속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내가 물었던 유천의 손을 살펴보았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금세 멍이 들어 있다. 암튼, 나는 꼭 이런다. 다혈질이라 울컥해서 화를 터뜨려버리는데, 늘상 붙어 다니는 박유천이 고스란히 내 감정을 뒤집어쓰게 된다. 나는 미안함에 차마 사과도 못 하고 유천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치를 봤다. “개냐? 사람을 물게?” "…미안." 나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했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지하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성큼 내려서는 유천을 따라 쭈뼛대며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유천이 리모컨으로 시동을 걸자 또 다시 미니 쿠퍼가 불을 깜빡거렸다. 나는 잠자코 차에 올라서는 흘깃 유천의 눈치를 보았다. 기어 변속기에 올린 유천의 손에 선명하게 내 잇자국과 피멍이 눈에 들어왔다. 윽, 되게 아프겠다……. "저기… 많이 아파?" 유천이 차를 출발시키며 나를 흘깃 보았다. "너라면 안 아프겠냐?" "미안." "김준수." "응?" "내가 그렇게 좋아?" "뭐!?" 느닷없는 유천의 물음에 쇳소리를 내고 말았다. "우리 유천이래." 유천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뚱하게 유천을 노려보았다. 뭐 그런 거 갖고 놀리고 그러냐, 이 새끼는. "뭐? 그래서 불만이야? 그럼 너네 유천이냐?" "아니, 준수네 유천이 맞아." 유천이 웃으면서 한 대답에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역시 미워할 수 없단 말이지, 우리 유천이는. 그나저나……. "너는 바보냐? 왜 이재영한테 그렇게 당하고 있어?" "소속사 이사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 기획사 들어갔어?" "어." "언제?" "오늘. 아까 포트폴리오 갖고 오라고 한 거 이재영 이사가 좀 보자고 해서 시킨 거야." 순간 머릿속으로 내가 했던 행동들이 필름처럼 촤르륵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뭐야, 나 지금 박유천 인생에 태클 건 거야? 띵 하고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나는 멍하니 유천을 응시했다. 미친 새끼, 진작 말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사님 앞에서 우리 유천이 어쩌고 하면서 날뛴 거잖아. "야, 야. 그럼 진작 말하지."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어." 유천은 여전히 부처님 가운데토막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근데, 집에서 호적 파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반대하는 일인데 이래도 되나 싶다. "집에서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아예 본격적으로 할 거야?" "어." 유천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대답에 나는 불안과 불신이 섞인 눈초리로 그를 응시했다. 유천이 내 반응에 쿡쿡 웃었다. "왜 그렇게 봐? 뭐 못할 짓 하는 거냐?"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원래 이런 거 관심 있었어? 넌 항상 뭐든지 심드렁했잖아." "음……." 유천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내 기억에 학창시절의 유천은 뭐든지 잘했지만 뭐든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유천이 생소하고 낯설었다. 집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관철하고 싶은 게 생겼다니.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말도 하나도 모르고 다 모르는 사람들투성이잖아. 그게 너무 불안하고 우울하고 무서웠어. 그래서 내게 다른 인격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영어도 잘 하고, 사람들도 많이 아는 새로운 인격. 뭐 그 상태에서 진짜 인격이 생성되었다면 정신분열환자가 되었겠지만, 어쨌든 차츰 적응하고 영어도 할 줄 알게 되고 하니까 괜찮아지더라. 근데 그때 그 새로운 인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꽤 강렬했던 모양이야. 카메라 앞에서는 내가 박유천이 아니게 되더라고. 그게 좋더라."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왠지 차 안은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유천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연인이 아니라 친구로서의 자격도 없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차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난감한 기분에 가만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천은 어느새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었다. 재영이 말하던 사무실 건물인 것 같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이거 두고 올게." "응." "무서우면 통화하면서 갈까?" "됐어, 내가 무슨 어린 애냐?" "어린애 맞잖아." "미친 새끼, 빨리 꺼져." "아, 진짜 김준수 저 몹쓸 입." "어디가 어때서? 예쁘기만 하구만." "너무 예뻐서 입술로 막아버리고 싶어." 유천의 마지막 말에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대꾸할 수 없었다. GG, 내가 졌다, 박유천. +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 나는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져 이재영과 국내외 최고 남자 모델들의 자료를 수집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유천의 말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기는 한다. 하지만 유천처럼 새로운 인격이 필요하다는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없다. 역시 이건 유천의 트라우마인 걸까? 너무 어린 나이의 외로운 타국 생활은 부족함 없어 보이는 그에게 상처를 남긴 것이 틀림없다. 그의 지나친 무관심은 어쩌면 그 흔적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6년 지기 친구로서 미안한 마음에, 유천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지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과제용 파일 하나를 모조리 비워서는 여기저기서 출력하고 스크랩한 자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고, 쇼나 촬영 자료 동영상도 CD 하나에 구워 넣었다. 차마 얼굴을 마주보고 줄 수가 없어서 나는 밤을 샌 김에 창밖이 밝아진 것을 보고 그대로 씻고 집을 나섰다. 자고 있는지 조용한 유천의 집에 살짝 파일을 놓고 나왔다. 부디 유천이 기분 좋게 받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이렇게 기특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지금 약간 미묘한 분위기다. 박유천은 내가 말도 없이 승연을 만난 것에, 나는 박유천이 내 앞에서 승연에게 작업 아닌 작업을 걸었던 것에 삐쳐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오해는 사소한 것으로 시작된다. 발단은 밤을 새버린 내가 비몽사몽간에 유천의 예전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 ……. "여보세요?" - …네. "박유천 씨 좀 바꿔주세요." 예상치 못한 여자 목소리였고, 대답이 너무 늦긴 했지만 그냥 같이 일하는 스태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뚝 끊겨버린 신호음이었다. 실수로 끊긴 건가 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했더니 이번엔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멘트가 들려왔다. "……." 멍하니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기분이 무지 상했지만 애써 일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일을 해 보아서 아는데, 일을 하다 보면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나는 박유천처럼 쫌생이가 아니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다. 그래서 그냥 '바쁜가보다 시간 나면 전화해'라고 문자를 보내놓았다. 그런데 이것이 1시간이 가고, 3시간이 가고, 하루해가 저물어가도록 아무 연락이 없다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물론 중간에 한 번 전화가 왔었는데 이번엔 내가 일하는 중이라서 받지 못했다. 하지만 달랑 한 번 하고 마는 건 또 무슨 심뽀냐고. 쓸데없이 전화 안 하고 '용건만 간단히'를 실천하는 박유천다운 행동이긴 한데……. 예전처럼 내가 박유천을 짝사랑하는 사이라면 물론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이 넘게 연락이 없어도 참아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니 문제다. 그동안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유난히 전화에 신경이 쓰인다. 나는 곰곰이 그동안 우리의 전화 패턴을 되짚어 보았다. 어제는 내가 먼저 했다. 그저께도 내가 먼저 했다. 그끄저께…도 내가 먼저 했다. 그 전날도 아마 내가 먼저 한 것 같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박유천이 아침에 늦게 일어나니까 항상 내가 전화해서 깨우는 식이다. "……." 생각해보니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나만 기분 상하라는 법은 없다. 배터리가 나갔다고 유천에게 변명할 거리도 될 것이다. 나는 왠지 통쾌해져서 킥킥 웃었다. 탈의실을 나오다가 또 승연과 부딪혔다. 오늘은 다행히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고 적당히 피할 수 있었다. 또 얼굴이 붉어진 승연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기, 매니저님." 승연이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왜?" "오늘 시간 있으세요?" "아……." "지난번에 밥 사주신다면서요." 나는 눈을 깜빡깜빡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원래는 유천에게 가볼 생각이었다. 새벽에 내가 놓아두고 온 파일은 잘 받았는지, 과연 기뻐해줄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전의 걸려오지 않는 전화에 좀 기분이 상한 나는 금세 유천의 생각을 날려버렸다. "그래. 지금 나갈 거지?" "네." "기다릴게,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승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도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어 싱긋 웃어주었다. + 우리는 회사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마쳤다. 시계를 흘깃 보았더니 8시 반. 박유천이 전화를 한 번쯤은 했을 시간이다. 나는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 3통. 그럼 그렇지. 그제야 자존심이 좀 회복된 것 같은 느낌에 피식 웃었다. 지금 당장은 승연이 있으니 전화를 못 할 것 같고, 조금 있다가 해야 되려나? "아, 이제는 더 이상 못 먹겠어요." "커피 갖다 줄까?" "네." 샐러드 바를 벌써 몇 번이나 오간 탓에 그녀 뿐 아니라 나도 더 이상 들어갈 구석이 없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녀를 위한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전화 왔었어요." "응?" "제가 조금 있다 다시 하시라고 했어요." 그녀의 말에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나는 서둘러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박유천이란 세 글자에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유천의 전화를 여자가 받았을 때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천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왠지 눈에 선하다고 해야 하나. "왜요? 받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눈치 빠르게도 승연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여기서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일단 미소 지으며 아니라고 해 주었다. 그리고……. 지이이잉. 바로 다음 순간 진동하는 전화기에 놀라 움찔하는 것을 그녀가 부디 못 보았기를. "여, 여보세요?" 긴장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 어디야? "응?" - 어.디.냐.고. 딱딱 끊어서 말하는 유천의 말투에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난 이제 죽었다……. "저기, 그게……." - 어디냐고 물었어. "밥 먹고 있어." - 누구랑. "응?" - 김준수! 나지막한 유천의 외침은 나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나는 또 승연의 눈치를 흘깃 보았다. 당황해서 유천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계속 되묻기만 하고 있었다. 아, 이렇게 난감한 상황이 있을 수가. - 여러 번 묻게 하지 마. 지금 어디 있어, 셋 셀 동안 대답해. 하나. "여, 여기! 그, 회사 근처에 패밀리 레스토랑!" 겨우 3이라는 카운트다운을 앞둔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박유천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욕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유천이 귀엽게 봐주니까 가능한 반쪽짜리 자유다. 중3때 화장실에서 내 멱살을 틀어쥐고 앞으로 욕하면 조져 버린다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유천의 표정을 봤다면 아무도 내 말에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말했듯이 박유천은 화가 나면 화산처럼 터진다. 터지기 전에 알아서 접고 들어가는 수밖에. - 거기 그대로 있어. 유천의 명령을 끝으로 전화는 끊겨버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깜빡거리는 액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길… 어쩐지 평화가 오래 간다 했다. "누구…신데요?" 승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너희 매니저의 무서운 애인님… 이라고 대답하면 놀라겠지? 나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 그냥 친구." 박유천, 나 진짜 오늘 진심으로 네가 그냥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 여기 오신대요?" "응. 그럴 건가봐. 잠깐 기다릴 수 있지?" "네. 커피나 한 잔 더 마시죠, 뭐." "응." "제가 갖고 올게요." "고마워." 내 대답은 건성이었다. 유천이 도착하고 난 후에 벌어질 일은 상상도 안 됐다. 그 냉정하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박유천이 설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서 소동을 벌이진 않을 거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거 내가 당황할 일이 아니다. 박유천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여자가 전화를 받게 하지 않았는가? 어제 아침에도 유천의 전화를 여자가 받은 것으로 따지러 갔었는데 그 새끼가 갑자기 make love 모드를 만드는 바람에 해명은커녕 바가지 긁는다는 소리만 들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여자가 전화를 받은 건 난 고작 한 번이고, 그 새끼는 여러 번이다.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여자가 받는 전화를 따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드세요." "어, 고마워." 승연이 담아다 준 과일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하긴 승연도 있고 사람도 많은 이 식당에서 날 어떻게 하진 못할 것이다. 쫄지 말자, 김준수!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필승을 외치며 유천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했다. 지이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박유천이라는 이름에 괜히 또 흠칫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전화를 받았다. "응." - 어디야?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온통 검은 수트를 빼입은 유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주친 유천의 차가운 눈동자에 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꼭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이다. 유천은 내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나만 잘못한 게 아니니 나는 충분히 할 말이 있었다. 이건 전쟁이다. 여기서 지면 나는 정말 평생 유천에게 잡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부디 전쟁터가 지금, 바로 이 자리가 아니길 바라며 또 다시 파이팅을 외쳤다. 유천이 뚜벅뚜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표정관리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은 채 유천을 맞았다. "왔어?" "……." 유천은 대답 없이 승연을 흘깃 보고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은 나를 산 채로 얼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냉랭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얼른 자리를 옆으로 옮겨 앉으며 유천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 앉아." 승연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와 유천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이며 유천을 소개했다. "저기… 얘는 박유천이고, 중학교 때부터 친구야. 이쪽은 유승연이라고 같이 일하는 알바생." '친구'라는 단어에 유천이 나를 살짝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차마 유천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 한 채, 여전히 굳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지막한 유천의 인사에 나는 혼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역시 냉정하고 매너 좋은 박유천 씨답게 여기서 당장 나를 추궁하지는 않을 거라 이거지. "아, 예, 안녕하세요." 승연이 유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머뭇머뭇 인사를 했다. 동시에 나는 흘깃 유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전화에서 느껴지던 포스와는 달리 미소까지 지은 채 앉아 있다. 뭐야, 괜히 쫄았잖아. 별로 화 안 났나본데.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뵙는 것 같네요. 저도 거기서 잠깐 일했었는데." 유천이 내 앞에 놓여 있는 커피 잔을 슥 끌어가면서 승연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게, 너 그만 두고 나서……." "너한테 안 물었다?"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싱긋 웃는 유천의 눈은… 내가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나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알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지난주부터 했으니까 이제 2주도 안 됐네요." 나는 열심히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유천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유천은 또 다시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기… 근데, 매니저님." "응?" "이 분, 그 모델 아니세요? 미스틱인가 그 화장품 광고요." "아, 맞아. 되, 되게 멋있지?" 나는 또 다시 흘깃 유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와'하는 승연의 감탄이 터져 나오고 유천은 또 다시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뭐?' 하고 대들듯이 노려보자 유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기……." 승연이 또 말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면 안 돼요……?" 어렵게 입을 연 승연의 말에 유천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연은 새빨개진 얼굴로 가방을 뒤적여 다이어리를 꺼내 유천에게 내밀었다. 유천은 유려한 필체로 자신의 영문 이름을 써 준 후 '승연 씨라고 했죠?'라고 물으며 밑에 날짜와 승연의 이름까지 써 넣었다. 나는 괜히 또 어깨가 으쓱해져서 고개를 숙인 유천의 옆얼굴과, 그의 예쁜 속눈썹과, 멋진 콧날과, 가늘지만 남자다운 그의, 펜을 쥔 손을 내려다보며 뿌듯해했다. "카메라 있어요? 핸드폰 사진도 괜찮으려나?" "네?" 유천이 갑자기 승연에게 카메라가 있냐고 묻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같이 찍으려고? 다른 사람들이랑 사진 찍히는 거 싫어하면서 갑자기 왜 저런대. "이, 있어요! 디카!" 승연의 표정이 더욱 환해지며 가방을 뒤적여 카메라를 꺼냈다. 유천이 벌떡 일어나더니 승연의 옆자리로 옮겨 앉는 것이 보였다. 승연은 얼굴이 더 붉어진 채 입을 반쯤 벌리고 유천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왠지 이 상황이 불쾌해졌다. 저건 내 꺼란 말이다. 남들이 저런 눈으로 보는 건 싫다. "이렇게 해도 괜찮죠? 김준수, 찍어." 유천이 승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내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나는 유천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게 박유천 것이었으면 벌써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부숴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뭐해? 빨리 안 찍어?" 나는 이를 꾹 물고 유천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유천에게 안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승연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보며 오만하게 웃고 있는 유천의 표정이 보였다. 개새끼…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하나, 두울, 셋." 찰칵 하는 셔터음과 함께 나는 빨리 떨어지라는 눈빛을 유천에게 보냈다. 하지만 유천은 피식 웃으며 더 승연을 바짝 당겨 안는 것이 아닌가! "승연 씨, 한 장 더 찍어요." "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혈압이 치솟는 중인지 핑 하고 현기증이 난다. 하지만… 그래, 고작 사진 두 장이다. 이렇게 흥분하지 말자.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빨리 찍어." 또 다시 나를 재촉하는 유천의 비릿한 조소. 어쩌면 저렇게 재수 없을 수가. 저렇게 티 안 나게 사람 속 긁는 것도 참 재능이다. 정말 잘 때 묶어놓고 좀 패던가 해야지 안 되겠다. 나는 또 다시 굳은 표정으로 한껏 화면을 노려보며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는 사진이 잘 나왔는지 어떤지도 안 보고 그냥 승연에게 카메라를 돌려주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아, 어떡해." 승연은 유천에게 꾸벅 고개까지 숙여 보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유천을 흘깃 노려보았다. 유천은 또 다시 피식 하고 내 시선을 비웃으며 승연에게 말을 걸었다. "승연 씨, 다음엔 제가 한 끼 살게요. 괜찮으시면 연락처 받을 수 있을까요?" 승연에게 핸드폰을 내미는 유천의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승연은 당황하면서도 유천의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남겨 주었고, 유천은 통화 버튼을 꾹 눌러 승연의 전화가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또각또각 키패드를 눌러 내 눈앞에서 그녀의 번호를 저장했다……! "제 번호 남았으니까, 나중에 연락해요. 준수처럼 이런 데 말고, 근사한데서 밥 사줄게요." "네에……." 박유천, 너 이 새끼……!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저, 화, 화장실 좀." 승연은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채 말까지 더듬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긴 박유천이 저렇게 작정하고 들이대는데 제 정신일 여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나는 잡아먹을 듯이 유천을 노려보았다. 유천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저 돌변하는 표정이 더 얄밉다. "야, 박유천." "……." "야!" "귀 안 먹었어." 유천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말투에 혈압이 확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너 뭐야, 지금?" "뭐가?" "씨바, 너 솔직히 말해. 내가 진짜 좋은 거 맞아? 여자가 더 좋은 거 아냐?" 내 말에 유천이 하, 하고 짧게 비웃었다. 와, 진짜 재수 없어……. "완전 제비 새끼." 내 말에는 뾰족하게 가시가 돋아 있었다. "여자 만나고 있었던 게 누군데 이렇게 난리야?" "여자라니. 난 그냥 알바생 밥 사준 것뿐이야." "황정윤이 너를 그냥 알바생이라 밥 사줬냐?" "……."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미친놈, 그 얘긴 또 왜 꺼내고 난리야. 정윤 형과의 일은 아무래도 나에게 죽을 때까지 약점이 될 것 같다. 그 얘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으니 정말 큰일이다. 내가 굳어서 대꾸를 못하자 유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또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에 갑자기 심술이 치밀어 올라, 나는 테이블 아래로 유천의 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커피 잔을 입에 대고 있던 유천의 몸이 흠칫하며 흔들렸다. 유천은 싸늘히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지지 않고 그 시선을 맞받아쳐 주었다. 개새끼… 지금 내가 쫄아 있게 생겼냐고. 이게 어디서 딴 여자한테 작업이야, 작업이. 애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나는 또 다시 유천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드디어 유천이 커피 잔을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 진짜, 이게……." "이게 뭐? 어쩌게? 치시게? 쳐, 쳐, 쳐봐." 나는 한껏 독이 오른 말투로 깐죽거렸다. 유천의 얼음 같은 눈동자와 내 불타오르는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쳐 스파크가 일었다. 우리는 승연이 돌아올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승연이 타박타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유천이 꾹 눌러 참는 듯 한 한숨을 내쉬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피식 썩소를 날려 주었다. 승연이 유천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돌변해서 친절한 박유천 모드로 돌아온 그의 미소에 나는 또 어이없이 웃어버렸다. 와, 진짜 말이 안 나온다……. 넌 모델이 아니라 연기 해야겠다, 새끼야. "자리 옮겨서 맥주 한 잔 할까요?" "아, 아뇨. 전 이제 집에 가야죠. 두 분 약속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괜히 방해했나 봐요." 그녀도 바보는 아닌지라 내 눈초리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챘는지 주섬주섬 가방에 카메라며 다이어리를 챙기는 것이 보였다. 미친 새끼, 맥주 좋아한다. 나는 또 유천을 쏘아보았다. '뭐?'하며 비웃는 유천의 표정에 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계산서를 들고 의자를 드르륵 끌며 벌떡 일어섰다. 유천이 얼른 따라 일어나며 손목을 잡아챘다. "줘, 내가 할게." "됐거든요? 그쪽이 드신 거 아니잖아요?" 나는 잔뜩 날이 선 말투로 쏘아붙이며 생긋 웃었다. 승연이 쭈뼛쭈뼛 미소 지으며 따라 일어섰다. 유천이 한숨을 내뱉으며 내 손에 쥔 계산서를 잡았다. 나는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유천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서 큰 소리 나게 하고 싶지 않으면 말 좀 듣지?" "맘대로 하게 얌전히 있지는 않을 거니까 이거나 놓지?" 순간 유천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의 한쪽 입 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넌… 있다가 집에 가서 보자." 싸늘한 유천의 목소리. 씨바, 진심인가 본데……. "으아앗!" 그리고 곧바로 짧은 비명을 내뱉고 말았다. 유천이 잡고 있는 내 손목을 확 비틀어버린 것이다. 내 손에서 떨어진 빌 지는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유천의 손에 그대로 안착했다. 아, 진짜 재수 없어 미치겠는데, 저런 것 하나하나가 다 멋있어 죽겠으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나는 내 눈에 씐 콩깍지를 저주했다. "괜찮으세요?" 승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폼생폼사하는 인간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승연 앞에서 창피해서 죽을 뻔 했다. 나는 아픈 팔을 주무르며,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가는 유천의 뒷모습을 씩씩대고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전부 그에게 꽂혀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람 아냐?'라든가, '맞네, 그 광고에 나온'이라면서 유천을 알아보는 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박유천, 네가 너무 잘난 게 오늘은 좀 싫은 것 같기도 해…….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승연아, 내일 보자." "잘 가요, 승연 씨, 다음에 연락해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승연이 창밖에서 손을 흔들다가 집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지잉 하고 창문이 올라갔다. 나는 억지로 웃느라 굳어있던 얼굴 근육에 힘을 빼고 미소를 지웠다. 유천의 표정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이내 차는 침묵에 휩싸였다. 유천이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그런 유천을 흘깃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승연의 집이 있던 주택가를 빠져나와 도로에 합류했는데도 차 안에는 싸늘하게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어디로 갈 거야?" 뻔히 알면서 또 물어온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디로 갈 거냐고." "……." "김준수." "귀 안 먹었어." 유천이 아까 했던 그대로 돌려주었다. 유천이 어이가 없다는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계속 창밖만 바라보았다. "말 안 하면 우리 집으로 간다." "우리 집." 유천의 말을 중간에서 뚝 잘랐다. 유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깜빡이를 켜 차선을 변경했다. 차 안에 또 다시 냉랭한 침묵이 떠돌았다. 너무 조용해서 숨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괜히 이런 상황이 더 짜증스러웠다. 유천도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CD를 밀어 넣는 것이 보였다. 조용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Lost and all alone 길을 잃고 홀로 남겨진 채 I always thought that I could make it on my own 난 언제나 생각했어 나 혼자서도 해 낼 수 있다고 Since you left I hardly make it through the day 네가 떠난 후 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 My tears get in the way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가 않아 And I need you back to stay 네가 내게로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래 (Jessica - Lost Without Your Love) 유천이 다음 트랙을 꾹 눌렀다. I can see the pain living in your eyes 당신 눈에 고인 아픔을 알 수 있어요 And I know how hard you try 당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아요 You deserve to have so much more 당신은 더 많은 사랑을 받을만 해요 I can feel your hurt and I sympathize 당신의 아픔도 느낄 수가 있고 동감해요 (Jessica - Good bye) 또 다시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유천은 다음 트랙을 눌렀다. 느릿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고, 로미오와 줄리엣 OST의 Kissing You가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The right can stand a thousand trials 사람들은 수많은 시련을 겪죠 The strong will never fall 강한 사람들은 절대 굴하지 않아요 But watching stars without you 하지만 당신 없이 별을 바라보는 건 My soul cry 너무 슬퍼요 (Des'ree - Kissing you) 유천은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꾹 눌러 CD를 빼냈다. 들을 만하면 뚝뚝 끊기는 음악에 나는 짜증스럽게 유천을 노려보았다. "좋은데 왜 그래." "좋으면 너나 듣던가." 유천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CD를 내 무릎에 던졌다. 들으라면 못 들을 줄 알고? 나는 쳇 하고 혀를 차며 가방을 열고 책 사이에 CD를 끼워 넣었다. 다시 숨 막히는 정적이 차 안에 가득 찼다. 좌회전하기 위해 유천이 켜 놓은 깜빡이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말없이 약속할게, 그대 눈물이 마를 때까지 내가 지켜준다고~♬] 유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유천이 핸드폰을 꺼내드는데 좌회전 신호가 들어왔다. 유천은 또 다시 핸드폰을 내게 건네며 핸들을 돌렸다. 액정에 선명하게 떠 있는 이재영이라는 세 글자에 저절로 인상을 썼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가만히 불이 들어온 액정을 보다가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예, 박유천 씨 핸드폰입니다." - 박유천 씨, 잠깐 스튜디오에 와야겠는데. "유천이 지금 운전……!" 전화기 너머로 재영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유천은 내 손에서 전화기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그 목소리가 전에 이런 식으로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때도 박유천은 저렇게 행동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데. 나는 뚱한 표정으로 유천을 바라보았다. "논현동 스튜디오요?" - 재촬영할 게 생겨서 지금 빨리 와야겠어. "네, 지금 가겠습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또 촬영이야.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유천을 바라보았다. 유천은 신호에 걸려서 서자 다시 CD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하나를 꺼내 밀어 넣었다. 유천이 새로 선곡한 CD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When the visions around you bring tears to your eyes 너 주위에 비치는 것들이 네게 눈물만 가져다 줄 때 And all that surrounds you are secrets and lies 널 싸고 있는 모든 것이 비밀이고 거짓일 때 I'll be your strength 난 너의 힘이 되고 I'll give you hope 너의 희망이 되어서 keeping your faith when it's gone 너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게 지켜주고 the one you should call when standing here all alone 홀로 서 있을 때 곁에 부르고 싶은 사람이 되어 줄게 (N'Sync - This I Promise You) 이번에는 곡이 마음에 드는지 꺼내지 않고 가만히 듣는 유천을 보다가 나는 드디어 전화 이야기를 따질 때가 되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재영의 전화로 생각이 났던 것이다. 내 전화를 받은 여자의 목소리가. "야." 유천이 흘깃 나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싸늘한 유천의 눈초리에 더 심술이 난다. "오늘 전화 받은 여자 뭐야?" "무슨 소리야?" "너 아까 전화했더니 여자가 받던데, 뭐야, 그 여자?" "그러는 너는. 여자가 안 받았냐?" "승연이는 같이 일하는 동료잖아." "동료는 여자 아냐? 그리고 넌, 새끼야, 남자도 들러붙잖아." 유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차선을 변경했다. 이 자식이 어이가 없는 건 누군데. 그리고 그 얘기는 또 왜 꺼내. "김준수, 잘못했으면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러면 되지, 뭐가 그렇게 복잡해?" 이어진 유천의 말에 그나마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 이거다, 지금! "내가 왜? 난 오늘이 처음인데, 넌 벌써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서너 번이야. 지금 장난해?" "애인 있는 새끼가 미쳤다고 다른 여자한테 전화 맡기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유천의 우기기에 억울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다. 이거 녹음을 해놓던가 해야지, 원. 나는 가방을 뒤적여 내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통화목록을 꾹 눌러 여자가 받았던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반쯤에 어디서 뭐 했어." "아, 진짜……." 결국 유천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스태프인 줄 알고 너 바꿔 달랬더니 그냥 끊더라? 그래서 다시 전화했더니 폰 꺼버리던데.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일 하고 있었어?" "그 때 깼어." "미친놈아, 여자를 집으로 불렀어?!" 나는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유천이 잔뜩 인상을 쓰며 흘깃 나를 보다가는 우회전해서 우리 집이 있는 주택가로 들어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 거야, 박유천. 나는 입을 반쯤 벌리고 텅 빈 머리로 멍하니 유천을 응시했다. "김준수, 너 생각이 왜 그래?" "……." "내가 뭐 발정난 개새끼냐? 씨발, 멀쩡한 애인 놔두고 딴 여자 불러들이게?" 네가 그동안 네 여자친구들인지 뭔지한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새끼야. 네가 양다리만 했었냐? 문어발도 그런 문어발이 없었잖아.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유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천이 한숨을 내쉬며 차를 정지시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집 앞이었다. 나는 황망한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지금 논현동으로 갈 거야?" 나는 겨우 말라붙은 입술을 열고 중얼거리듯 질문을 뱉어냈다. "어." "…근데 이재영 그 사람은 전화 하는 게 뭐 그래? 사람 사정은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오라고 하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리고 너는… 그 사람 전화, 내가 왜 못 받게 해?" "김준수." "……." "하아." 유천이 한숨을 내쉬고는 아랫입술을 꾹 무는 것이 보였다. "뭐? 말해." "한 가지씩 해. 오늘 도대체 왜 이래?" "……." "나 너한테 그렇게 못 믿을 놈이냐?" "…응." 유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차 싶었다. "……." "……." 차 안에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실수했다 싶었지만 그래도 유천의 행동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그 때 일어났다는 말에 연상된 장면에 충격이 꽤 컸는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정신이 멍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 지금 38시간째 깨어 있구나. 일단 집에 가서 좀 자야겠다. 나는 주섬주섬 목도리와 가방을 챙겨들고 차문을 열었다. 유천이 따라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현관 열쇠를 돌렸을 때, 유천은 담배를 꺼내 물고 찰칵 하며 불을 붙이고 있었다. 예전에 정윤 형과 드라이브를 하고 왔을 때, 그 날도 유천이 저렇게 서 있었는데……. 나는 멍하니 유천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 때 나는 결국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기서 펑펑 울었다. 박유천도, 나도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며 돌아섰던 그 밤. "늦겠어, 얼른 가." 나는 문고리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뚜벅뚜벅 유천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나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유천은 그 날처럼 담배 향기가 나는 입술로 내게 키스했다. "굿나잇 키스." 그래, 우리 헤어질 때마다 이렇게 인사했었지. 나는 억지로 입술 끝을 올려 웃어 보였다. 유천은 또 다시 무거운 한숨을 뱉어내더니 들어가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정신이 멍했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것이, 아무래도 오늘 나는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간신히 발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도대체 내가 유천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유천의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득 유천의 차에서 갖고 온 CD가 생각났다. 나는 느릿하니 가방을 뒤적여 CD를 꺼내들었다. CD 겉면에 프린트 된 곡 목록을 확인하고는 불길함에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1. Jessica - Lost Without Your Love 2. Jessica - Good bye 3. Des'ree - Kissing you 4. Jennifer Hudson - One night only 5. Kelly Clarkson - Because of you 6. Toni Braxton - Unbreak my heart 7. M2M - The day you went away 8. Leann Rimes - Please Remember 9. Brian Mcknight - One Last Cry 10. Stevie Wonder - Lately 11. Michael Learns To Rock - 25 Minute 12. Alter Bridge - In Loving Memory 13. Ne-Yo - So sick 전부 이별노래였다. + 믿음, 혹은 신뢰. 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개념은 비단 연인 관계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반, 모든 인간관계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이것이 없이는 친구가 될 수 없고, 연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부모자식 간에도 필요한 것이며, 부부, 사제지간, 동료나 선후배 관계 등등 믿음을 기반으로 한 모든 인간관계는 이것이 사라지면 크게 상처를 입고 깨어지거나, 적어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는 없게 된다. 나는 아무래도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 - …어. 컬러링이 한참이나 흐르고 나서야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서는 졸음이 가득 묻어났다. "일어나. 벌써 1시야." - …어. "오늘도 촬영 있어?" - …어, 조금 있다가 또 나가야 돼. "어젠 몇 시에 끝났어?" - 음… 일곱 시? "너희 기획사는 너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유천이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바로 귓가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또 소름이 돋은 팔을 한 손으로 슥슥 쓸어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벌써 얼굴을 보지 않은지 이틀이나 지났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 애인을 두고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룻밤을 꼬박 새고 일어난 해프닝은 유천과 나 사이에 투명한 막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유리창처럼 저편이 잘 보였지만, 손을 내밀면 중간에 가로막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마음의 울타리를 마음대로 넘나들던 우리는 울타리를 닫아거는 대신, 그런 식으로 자기보호본능이 발휘된 것 같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상처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니까.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틀째 아무렇지 않은 척 이렇게 전화 통화만 하고 있다. "빨리 일어나서 밥 챙겨 먹어." - 알았어, 마눌. 익숙하지 않은 어휘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전화기 너머로 유천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에 취해 있었다. "…이게 돌았나." - 서방님한테 말하는 거 하곤. "누가 서방이야, 미친 새끼야." 내 날 선 말투에 유천이 또 다시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또 소름이 돋는다. 아무튼 이것도 병이다. 약도 없는 고질병. 나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좋은데, 왜 박유천은 하필 바람둥이일까? - 야, 너 다음번에 우리 집에 올 때는 꼭 네 입에서 서방님 소리 들을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와라. "꿈도 야무지셔." - 지난번처럼 금방 안 놔 줄 거야. 알아서 해. "그러시던가요." 박유천은 지키지 못할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래서 방금 저 말도 분명히 현실화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하지만, 뭐 지금으로서는 우리는 당분간 만날 일이 없을 분위기니까. 바람둥이와 얽히는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만은 예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자기가 저 사람의 바람기를 잠재우고, 머물 곳이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람을 잡아둘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그 여자도 또 한 명의 피해자가 된 채, 바람둥이의 화려한 이력을 장식하는 목록의 끄트머리에 고이 적히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가끔 내 이름이 유천의 그 목록 중 일부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난 박유천을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라는 무서운 상상을 해 보다가는 포기해버렸다. 달라진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것만큼 세상에 추한 것은 없다. 나는 그를 죽을 만큼 사랑하지만, 진짜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면 쿨하게 보내주고 싶다. 그게 내가 유천을 사랑하는 방식이고, 그렇게 해야 다시 친구로라도 그의 곁에 남을 수 있으니까……. - 언제가 되어야 고분고분 네- 할래? "죽을 때까지 그럴 일 없으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던가." - 야, 김준수. "뭐?" - 너 지금 그거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야.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야? 갑자기 유천이 정색을 하고 말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흠칫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 알아보라는 말은 역시 실수한 것 같다. 아무리 우리 사이가 미묘하다고 해도 우린 이제 고작 사귄지 한 달도 안 된 초보 연인인 것이다. "취소, 취소. 다른 사람 알아보면 둘 다 죽여 버릴 거야." 내 급사과에 유천이 또 다시 나지막이 웃는다. 나는 또 다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시계를 흘깃 보았다. 이제 점심시간도 슬슬 끝나가고, 또 다시 놀이 공원에 산재한 이런저런 사고를 처리하러 나가야 할 시간이다. "잠은 다 깼지?" - 어. "나 일할 시간 됐어. 있다가 전화 할게." - 알았어, 서방님은 밀린 빨래나 하고 있을게. "응." - 준수. "응?" - 사랑해. "……." 또 다시 말문이 막혔다. 역시 나는 아직 모든 것이 서툴다. - 끊을게. "응." 나는 가만히 깜빡이는 액정을 바라보다가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유난히 유천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온다. 낯이 간지러워서 나는 제대로 듣고 있을 수도 없는 단어인데, 진지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유천은 반복해서 말한다. 아마도 그날 밤의 내 대답을 의식한 행동일 것이다. 비록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진심은 충분히 전해져 온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유천에게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 미안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애초에 그의 여성편력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 긴긴 시간동안 그 수많았던 유천의 여자친구들 때문에 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전부 감내하며 버텨온 내가, 겨우 연인이 되었는데 이렇게 흔들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사과 한 마디로 무마하기엔 조금 사안이 크다. 나는 그래서 선뜻 유천에게 찾아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혼자 삽질을 하며 지구 반대편까지 파고드는 중이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한 번 깨어지거나 상처가 나면 쉽게 회복하기 힘든 것이다. "매니저님." 휴게실을 나섰는데 승연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문득 돌아보았다. "이거." "뭐야, 이게?" "지난번에 밥 사주셔서……." 승연이 건네는 작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나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승연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걸 받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비싼 거 아니에요. 얼른 받으세요." 승연은 억지로 내 손에 상자를 쥐어주고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달아나듯 자리를 떠나버렸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나는 흘깃 사방을 둘러보며 박유천의 그림자를 찾았지만 오늘은 없는 듯 하니 안심. 상자를 열어보니 작고 날씬한 넥타이핀이 들어 있었다. 은색 테두리에 검은 색으로 심플하게 코팅된 넥타이핀은 깔끔하고 잘 눈에 띄지 않아 젊은 층을 겨냥한 물건이 틀림없었지만… 문제는 나는 일할 때 빼곤 이런 걸 쓸 일이 없다. 승연은 아마도 내가 매일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생각해낸 모양인데, 난 수트에는 취미가 없다 이거지. 회사 규정에도 넥타이핀이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아, 이거 박유천한테 진짜 잘 어울리겠다……. 문득 유천의 마른 몸에 슬림하게 딱 떨어지던 지난밤의 검은 수트 차림을 생각해 내고는 배시시 웃어버렸다. "김준수, 표정 관리 해라." 정민 누나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와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정민 누나가 나 들으라는 듯 '아무래도 연애하는 것 같은데'라고 혼잣말을 하며 탈의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민 누나의 예리한 감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 [끝났어?] 퇴근하는 길에 유천에게 문자가 왔다. '집에 가는 중'이라고 또각또각 문자를 보내놓고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니 아주 고역이다. 여자 전화 건은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되어 가는 것 같아서 왠지 찝찝하지만, 그냥 먼저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유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설렘이 가득한 그대 하루만큼, 나의 하루는 길고 외로워, 어쩌면 나는 바랐는지 몰라,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이별이 되길~♬] "……?" 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낯선 컬러링이다. 아까 낮에 들었을 때만 해도 다른 곡이었는데?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이름을 확인했지만 박유천이 맞다. 설마 그새 바꾼 건가? […이런 나를 이해해요, 그댈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날, 그대가 난 눈물이 날만큼 부러웠었죠~♬] 좀처럼 받지 않는 전화에 계속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짜증이 났다. 뭐 가사가 이래? - …여보세요. 제길……. 나는 또 다시 들려온 나지막한 여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끊어버렸다. 액정이 몇 번 깜빡거리다가 대기화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내가 병신이고, 내가 미친놈이다. 이런 너한테 미안함을 느끼고 먼저 찾아갈 생각을 했다니. "후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유천아,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박유천, 내 친구, 내 연인, 내 사랑아. 도대체 넌 왜 이런 놈인 걸까? 난 왜 이런 널 사랑해 버린 걸까?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멍하니 전철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손에 쥔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을 해왔다. [가다가 심심하면 전화해 지금 머리 하는 중이야]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잠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잠시 부글부글 끓어오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다가 다시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래, 한 번 말이 나왔을 때 확실히 해야 되는 거야. 나는 야무지게 입술을 앙다물고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세찬 비가 내려도,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이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어, 당신과 함께라면 분명 넘을 수 있어~♬] 아, 이번엔 익숙한 컬러링이다. 나 들으라고 박유천이 친절히 제목까지 알려주며 설정했던 것인데. - 어. 이어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나를 무장 해제시켰다. "나." - 어, 우리 준수. "……." 이렇게 나오면……. - 왜 말이 없어? "……." - 준수야? "…응, 듣고 있어." …아무래도 앞으로는 따질 것이 있으면 종이에 적어놨다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집에 가고 있어? "응." - 춥지? "아니. 지금 전철역이야." - 오늘은 좀 일찍 끝날 것 같은데, 같이 저녁 먹을까? 유천이 먼저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 같다. 역시 화해할 때 보면 박유천은 참 어른스럽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장난을 걸고, 농담을 하며 다독여준다. "그럴까?" - 어, 나 차 정비 맡겼는데, 네가 좀 찾아서 이리 올래? "알았어. 몇 시까지 가면 돼?" - 내 분량은 거의 다 끝났어. 지금 바로 와. "응." - 빨리 와. 나지막한 그의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대기화면으로 넘어가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를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용히 두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약 2년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제 1년 반 정도를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정말 2년밖에 안 되는 걸까? 그렇다면 앞으로 약 반년 후면 나에게 이런 감정은 사라지는 걸까? 궁금하다. 하지만 박유천은 -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 벌써 7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일 유천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일분, 일초, 매 순간마다 그를 떠올리고,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니까. 7년? 그까짓 거. 나는 대기 화면에 설정된 유천의 사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는데 뭔가 빼먹은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열린 문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근처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향수냄새가 코를 찌른다. 향기가 자극이 되었는지 '아, 전화'하고 내가 유천에게 하려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또 하려던 이야기는 못했다. 제길. 이렇게 묻히는 건가? 달콤한 말로 내 정신을 쏙 빼놓다니, 설마 이게 박유천의 얕은 수는 아니겠지? 어쨌거나, 금방 간다! 조금만 기다려, My Beloved. + 정비소에 들러 유천의 차를 찾아 논현동으로 향했다. 유천과 사귀고 나서 정식으로 면허를 땄다. 이미 박유천의 대리운전기사로 무르익은 나의 실력은 세련되고 부드러운 유천과는 달리 슬그머니 스피드광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난폭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거리는 차가 많긴 했지만 미어터지는 정도는 아니어서 비교적 빠르게 스튜디오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입구 근처에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드문드문 모여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이재영이 와 있는 건가? 입구를 스쳐 지나며 경비 아저씨의 눈치를 보니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이 잔뜩 신경이 곤두선 눈치다. 오늘도 숨어드는 팬들이 많았나본데. 또 다시 실랑이를 벌일 생각을 하니 피곤해져서, 일찌감치 주차장 진입을 포기하고 전에 이재영이 차를 댔던 건물 뒤쪽에 차를 세웠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또 이상한 기분을 느끼기 싫어서 그냥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끝나면 전화하겠지. 좀 막연하고 미련한 방법이긴 하지만 괜히 유천을 의심하고 속상해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틀에 팔을 괴고 멍하니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눈이 온다고 한 것 같은데 차에 체인이 실려 있던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별 짓을 다 해 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인 줄 알았던 놈이랑 그 난리를 치며 연인이 되어 마눌이라는 둥, 서방이라는 둥, 상상도 못 했던 닭살을 떨어대고, 입을 맞추고, 지금은 이렇게 사랑싸움을 하고 있으니……. 박유천은 7년 동안 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 긴 시간동안 내 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나는 사귀고 나서도 이렇게 불안한데, 박유천은 그동안 내가 행여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나 불안하진 않았을까? 그 7년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그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순간도 그를 온전히 가졌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하아." 괜히 한숨이 나왔다. 유천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 핸드폰이 잠잠하다. 차 안에 정적이 흐르니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같아서 나는 CD 바이저에서 이것저것 CD를 뒤적이며 골랐다. 개새끼… 영어 할 줄 안다고 죄다 팝송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적혀 있는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난번처럼 이별 노래들로 도배된 CD를 고를까 봐 왠지 겁이 났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안 나와? 다른 출구 있는 거 아냐?" "그러게, 지금쯤 끝날 때 된 것 같은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유천." "아, 박유천." 문득 창밖에서 유천의 이름이 들려와서 무심코 돌아보았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몇 명이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날이 꽤 싸늘한지 하얗게 입김을 쏟아내면서도 그녀들은 건물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찍는 건 뭐야? CF야?" "아니, 잡지." "나 지난번에 카탈로그 사진 보고 기절할 뻔 했잖아. 완전 화보잖아 그건?" 따뜻한 캔 커피를 뽑아들고 종종걸음을 쳐 건물 앞쪽으로 돌아가는 소녀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녀들이 유천의 팬임을 깨달았다. 일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묘하게 납득이 가는 상황이다. 그에게는 같은 남자인 나도 반해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여자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이제야 그가 조금씩 나와 다른 부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반대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그의 편이 되어 주겠다고 했던 결심을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유천에게서는 아직도 전화가 없다. 나는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는 따뜻한 것이나 마시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동전을 챙겨들고 차에서 내렸다. 교복 입은 소녀들이 서 있던 자판기 앞에 똑같은 포즈로 서서 불이 들어와 있는 커피와 밀크 티 중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밀크 티를 꾹 눌렀다. 텅 하며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유천의 미니 쿠퍼 옆에 또 다른 차가 주차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벤츠 마크가 눈에 띄어 그가 이재영임을 깨달았다. 몸을 숙여 캔을 꺼내고 있으려니 그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얼굴 보기 싫은데 빨리 지나가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뭉그적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발소리는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짜증나'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눈앞에 버티고 선 이재영이 보였다. 그는 오늘도 이 캄캄한 오밤중에 눈이 안 보이도록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는 나를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큰 키는 지나치게 위압적이다. 무시할까, 인사를 해야 하나 순간 치열하게 고민을 하다가는 유천의 앞날이 문득 떠올라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박유천의 일이라면 눈이 뒤집히기도 하고, 이렇게 자존심을 숙일 수도 있는 것이 내 사랑이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면서. "인사도 할 줄 아네. 싸가지 따위는 취급 안 하는 줄 알았더니?" 그의 비아냥에 울컥 화가 치밀어 순간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비릿하게 조소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박유천의 미래! 그래, 이때 내조 한 번 제대로 해 주는 거야! 나는 이렇게 대견한 생각을 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다스렸다.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다시 꾸벅 인사를 하며 사과를 하자 또 그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 재수 없어. 나는 또 속으로 조용히 투덜거렸다. "잘못한 줄은 알아? 박유천 손등에 시퍼렇게 이빨자국 내놓고. 박유천은 네 애인이기 이전에 우리 상품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잘못, 상품, 너……. 몇몇 단어들이 아주 미세하게 신경을 긁어놓는 감각에 나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근데 언제 봤다고 너야. 나는 핸드폰을 꺼내드는 그를 아주 재수 없는 눈초리로 노려봐주었다. "어, 나, 도착했어, 문 좀 열어." - 열려있어요. "그래? 알았어." 이 사람은 아무한테나 다 반말이다. 스태프에게 전화를 하는 그를 마구 흘겨봐주다가는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흠칫해서 얼른 눈에 힘을 풀고는 당황한 김에 불쑥 손에 든 밀크 티 캔을 내밀었다. "이, 이거 드실래요?" 내가 급하게 만들어낸 어색한 미소와 내밀어진 밀크 티 캔을 번갈아 보던 재영은 가소롭다는 듯, 귀엽다는 듯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캔을 받아들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미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이 사람은 꼭 박유천이 화났을 때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항상 화가 나 있는 건가?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쭈뼛쭈뼛 웃어보였다. "안 들어 갈 거야?" 재영이 비상구 문을 열고는 불쑥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허둥지둥 차로 돌아와서 시동을 껐다. 핸드폰은 여전히 유천의 연락이 없이 잠잠했다. 나는 얼른 키와 가방을 챙겨들고 재영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비상계단 안은 쌀쌀했다. 괜히 어색한 기분에 서둘러 재영보다 앞서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타박타박 그가 따라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몇 계단 올랐을 때였다. "유천 씨, 핸드폰에 그 남자, 누구에요? 친구 아니죠?" "네?" 멀리 위쪽 비상계단 어딘가에서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자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사진도 되게 많고, 연락도 굉장히 자주 오던데." "친구에요." 나지막이 웃으며 대답하는 유천의 목소리에는 조금 당황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늘 유천의 전화를 받던 '그녀'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젠 연락하지 말아요. 나 좋아한다며." 그녀의 말에 유천이 또 다시 나지막이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천의 저 낮은 웃음소리.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그의 대답에 핑 하고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뻣뻣해진 손으로 서둘러 난간을 움켜잡았다. 다른 때 같으면 발끈해서 서둘러 쫓아올라갔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손끝하나도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지잉 하고 이명이 들려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잠시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농담일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시기에 저런 농담을 내가 듣고 있어야 되는 걸까? "유천 씨, 이거 진심이에요. 그 남자랑 연락하지 말아요." 또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힘없이 몸을 돌렸다. 몇 계단 아래 재영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저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나는 위에서 듣지 못하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밖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올라가세요." 재영은 아무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왠지 견디기 힘들어서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걸로 괜찮겠어?" 나는 흘깃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어 서 있었다. 씨발… 저 인간한테 동정을 받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에게 손목을 잡혀 건물 밖으로 끌려나왔다. 등 뒤로 비상구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는 나를 그대로 끌고는 자신의 벤츠 조수석에 밀어 넣어버렸다. 얼떨결에 그의 차에 태워진 나는 화를 낼 생각도 못한 채 얼굴을 양손에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튼 박유천 개새끼, 타이밍하고는……. 재영이 차에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동을 거는 소리에 유천의 미니쿠퍼 차키를 내가 갖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 저기요!" "뭐?" "……." "뭐?" 어디 가려는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이 안 나온다. 재수 없는 이재영의 말투에도 이제는 상할 기분도 없는지 나는 그냥 또 피식 웃어버렸다. 사실 나에게 그런 장면을 목격하게 한 유천이 괘씸해서 왠지 복수해주고 싶은 기분도 있었다. 그래서 그냥 이번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유천이 차키 제가 갖고 있어요. 이거 줘야 되는데." "줘." 재영이 불쑥 눈앞으로 손을 내밀기에 나는 유천의 차키를 순순히 올려놓았다. 재영은 차를 후진시켜서 빼고는 건물 앞쪽 경비실 앞으로 천천히 이동시키더니 차에 앉은 채로 경비 아저씨를 부르는 게 아닌가. 저런 싸가지. 나한테 싸가지 찾을 게 아니라 당신 싸가지나 찾으시지?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나저나 재영이 창문을 내리자마자 터져 나오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에 나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잘 나가긴 하나보다. 문득 든 생각이었다. "이거 박유천 씨 차키인데, 지금 4층 스튜디오에 있어. 차 비상구 쪽에 있다고 좀 전해줘." 이 인간은 경비 아저씨한테도 반말이구나. 나는 한심하다는 의미의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게 코팅된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소녀들이 보였다. 갑자기 열린 창문으로 분홍색으로 포장된 선물 상자가 하나 휙 날아들었다.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맞고는 작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누구야, 씨바. "벨트 매." "네?" "벨트 매라고. 귀가 안 좋아? 몇 번 말해야 돼?" 어이가 없어도,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웃음을 터뜨리며 벨트를 채웠다. 하지만 다음 순간 왜 이재영이 그 따위 소리를 친절하게 내게 했는지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부웅 하는 소리를 내며 벤츠는 총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를 질주하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재영의 차를 뒤쫓는 팬들의 택시가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손잡이를 움켜쥐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신을 찾고 있었다. RPM이 마구 치솟았다. 요리조리 차선을 무시하고 마구 끼어들기와 추월을 반복하는 재영의 모습에는 광기마저 어려 있는 듯 했다. 박유천, 살려줘……. 나는 무의식중에 박유천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재영이 아슬아슬하게 열려있는 공간을 비집고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름대로 소심한 스피드광인 나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씨바, 박유천, 앞으로는 너 운전 거칠게 해도 뭐라고 안 할게. 넌 정말 신사야……. 그렇게 내가 생사를 넘나들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이재영은 추격자를 전부 따돌리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속력을 낮췄다. 그리고 나는 뿌옇게 흐려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감사했다. 거기 계시는 누군가님,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진심으로… 땡큐. +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나는 여전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변을 따라 달리던 재영의 차는 한강 둔치 어딘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토기가 밀려왔다. "저기요! 소, 속이……."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재영을 불렀다. 재영이 나를 흘깃 보며 피식 하고 비웃었다. 이봐, 이재영 씨, 이거 장난 아니거든? 내가 이 비싼 차에 아름다운 짓을 한 후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욱!" 또 다시 울컥 치미는 토기에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재영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야, 참아!" "빨리 좀 세워요……." 끼이익 하는 파찰음을 내며 급히 벤츠가 멈춰 섰다. 나는 서둘러 문을 열고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 덤불을 향해 몇 차례 헛구역질을 했지만 먹은 것이 없으니 넘어올 것이 있을 턱이 없다. 한참을 그렇게 헛구역질을 해대다가 기진맥진한 채 몸을 일으켰다. 박유천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고, 이재영은 내 몸을 괴롭게 하는구나. 참, 팔자 기구하기도 하지. 나는 내 자신을 그렇게 동정하며 혀를 찼다. 탕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이재영이 자신의 차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부드러운 아치를 그리며 환하게 조명을 밝힌 아름다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와……." 나는 무심코 탄성을 내뱉었다. 어둠 속으로 하얗게 입김이 부서졌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는 마치 우주선인 양 어둠 속에 신비롭게 떠 있었다. 검은 강물 위로 비친 주홍빛 조명의 궤적이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재영은 아무 말 없이 차에 비스듬히 기댄 채 허공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재영과 그 뒤로 보이는 다리를 응시했다. 그의 길고 마른 팔다리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뚜렷한 옆선이 자연스레 배경에 녹아들어가 마치 잘 만들어진 화보나 사진집을 보는 것 같은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었다. 역시 톱 모델이구나…….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재영 쪽에서 담배냄새가 희미하게 날아왔다. 문득 이틀 전, 담배 향기가 배어 있는 입술로 굿나잇 키스를 하던 유천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재영은 유천과 옆모습이 많이 닮아 있다. 저기 서 있는 게 이재영이 아니라 박유천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우리는 이렇게 한강에서 야경을 구경한 적이 없다. 남산에서 데이트한 것 빼면 우리에게는 보통의 친구로 지낸 6년의 기억과, 사귀기 직전에 치열하게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가며 갈등했던 씁쓸한 기억만 있는 것 같다. 궁금하다. 친구로 지낸 기간이 길었던 다른 연인들도 이럴까? 좋아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서로에게 익숙한 편안함 때문에 소홀해진다거나, 배려해주지 못하는 일이 그들에게도 있는 걸까? [이젠 연락하지 말아요. 나 좋아한다며.] 문득 비상계단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박유천은 정말 그렇게 말한 걸까? 정말 그렇다면 그가 날 짝사랑했다던 7년의 기간이 무색할 지경이다. "개새끼……." 나는 무심코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박유천, 너 오늘… 조금 많이 미운 것 같아. 재영이 흘깃 이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눈곱만큼, 손톱만큼, 머리카락 세 가닥 정도만큼… 그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를 그 자리에서 끌고 나온 것을 보면 다소 표현 방법이 거칠어서 그렇지 나쁜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꼬맹이, 다 토했냐?" …고마운 거 취소. "안 토했거든요? 그리고 저 꼬맹이 아닌데요?" "그럼 꼬마?" 순간 들려온 그의 비아냥에 나는 이를 지그시 물고 숨을 참았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똑같아지면 지는 거다……. 나는 조용히 내 자신을 달랬다. 신은 세 종류의 인간을 만들었다. 남자, 여자, 이재영. 그 중에 이재영은 아무래도 실패작인 것 같다. 실패작의 말장난에 놀아나면 '인간'으로서의 내 체면은 바닥에 추락하고 말 것이다. 박유천은 저런 놈의 비위를 어떻게 맞추고 있었던 걸까? 사회생활은 역시 힘들다. "이제 어쩔래? 헤어질 거야?" 문득 들려온 재영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헤어지다니? 나는 담배연기를 길게 뱉어내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왜요? 누구랑?" "너랑 박유천. 그런 꼴을 봤는데 계속 사귈 거야?" 거기서 왜 헤어진다는 결론이 나오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나는 못 알아들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재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뻔하잖아. 남자들끼리 사귄다는 게, 아무런 구속력도 없고 가벼운 거. 새로운 사람이 생기면 안녕인 거지." "…굉장히 비관적이시네요." "현실적인 거지." "……." 하긴, 그의 말이 전부 틀린 소리는 아니다. 조금 침울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얼마나 됐어?" "…한 달이요." "헤어질 때도 됐네." "근거 있어요?" "보통 그 정도 가거든. 나도 오늘 끝냈어." 끝냈다는 말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비상계단에서 함께 있었던 신인 모델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그렇게 열렬히 키스를 하더니 그새 헤어진 건가? 재영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그 때 그 분……?" "어." "…왜요?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지만." "사람 마음이 변하는데 이유가 있던가?" 재영은 또 다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하며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아 그에게 따지듯이 되물었다. "사랑이 그렇게 쉽게 변해요?" "뭐야, 너희 사랑해?"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이 섞인 그의 말투에 괜히 오기가 생겨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린 것들." 재영은 또 다시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피식 비웃으며 강을 응시했다. 어린 것들이라니. 독설이라면 박유천도 일가견이 있는데, 이재영은 더 심하다. 도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낸 거야. 나는 속으로 그가 다녔을 유치원을 욕해 주며 재영이 향하고 있는 시선의 끝을 쫓았다. 불을 환하게 밝힌 유람선이 수면 위를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다리를 배경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조금 흩날렸다. 또 다시 희미한 담배 향기가 바람에 날려 왔다. 멀리 한강의 야경을 응시하는 그는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거랑 나이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오래 살았다고 해서 사랑하는 법을 더 잘 아는 건 아니니까." "상처를 덜 받는 법은 잘 알게 되지. 너희 땐 다 그래. 사랑에 올인해서 죽고 못 산다고 울고불고." "……." "하지만 이별을 반복하다가 서서히 깨닫는 거지. 전력을 다 하면 할수록 나만 깨지고 다친다는 걸. 그렇게 덜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면서 영악해지는 거야."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상처를 되풀이하다 보면 덜 다치려고 움츠러들게 된다는 그의 말은 왠지 현실감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끝나는 과정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유천과 나에게 사귀면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사랑을 하다 보면 분명히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생기게 된다. 그렇게 생겨난 상처가 계속 모이고 쌓이다 보면, 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더 큰 상처에 지레 겁먹게 되고 이별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영원하지 못한 걸까? 재영의 말처럼 이유도 없이 그렇게 쉽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일까? 나는 멍하니 다리를 바라보며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새삼 되돌아보고 있었다. "하아." 또 다시 한숨이 나왔다. 이재영이 재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보다 연상임은 틀림없다. 저렇게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소리를 해대고. 하긴, 저런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지를 생각하면 인성이 비뚤어진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 마음을 가볍게 본 거라면 그건 오산이다. 나는 내 사랑의 견고함을 믿는다. "난 변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상처받아도 박유천만 사랑할 거예요. 박유천이 다른 사람이 좋다고 떠나도… 계속 친구로라도 남아서 그 새끼 옆에 붙어 있을 거예요." 재영이 나를 흘깃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나는 그의 어딘가 공허한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겹다고 진절머리 내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 물처럼……. 그렇게 박유천만 사랑할 거예요." 내 목소리가 약간 떨려 나왔다. 괜히 감정이 복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뭐,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이게 나의 병신 같은 사랑법이니까. "자신 있어?" 나는 또 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는 꾹 밟았다.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오른 것 같기도 하다. "타." 재영은 짧게 말을 끊으며 차에 올랐다. 나는 저 재수 없는 인간이 마음이 변해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까 싶어, 종종걸음을 쳐서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벨트를 매느라 꼼지락거리고 있으려니 재영이 가만히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그의 앞에서 박유천에 대한 절절한 사랑 고백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씨바,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쪽팔려서 이재영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잔뜩 당황해서는 붉어진 얼굴로 괜히 가방을 부스럭거리며 뒤적였다. "부럽다." "……?" 이재영이 불쑥 뱉어낸 말에 흘깃 그를 보니 그는 창틀에 팔을 괴고는 아예 본격적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더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는 더 소란스럽게 가방을 뒤적였다. "야, 너 내꺼 할래?" "에?!" 아주 심한 쇳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경악에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박유천은 그 여자한테 줘 버리고 나한테 와라." 미친……. 익숙한 욕설이 혀끝까지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꿀꺽 삼켰다. 이재영은 내가 어떤 심정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특유의 그 비웃음 내지는 썩소로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100% 게이니까 절대 여자한테는 눈 안 돌려. 생긴 것 보다시피 멀쩡하고, 돈이 넘쳐나서 감당 못할 지경이야. 침대 매너나 테크닉은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어때? 끌리지?" "박유천도 생긴 것 멀쩡하고요, 걔네 집도 돈 많아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이건 뭐, 대꾸할 가치도 없는 대화긴 하지만. "밤일은?" "그건……." 잘 모르겠는데…가 아니라고! 나는 무심코 튀어나올 뻔 한 대답을 서둘러 집어 삼켰다. 식은땀이 버쩍 났다. 이런 얘기를 왜 이재영이랑 하고 있어야 되는 거야. "여태 뭘 들은 거예요!" 나는 재영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밤일은? 그것도 잘 해?" 재영은 내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키며 물어왔다. 나는 무시하고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다. 그나저나 나 핸드폰 어쨌지……. "설마 네가 탑이야?" 가방을 뒤적이던 손이 우뚝 멈췄다. 재영의 경악할 한 마디에 골이 띵해졌다. 재영이 나를 흘깃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이 반응은. 아직…인 거야?" "왜요? 그러면 안 돼요?" 그의 목소리에 섞인 비웃음에 괜히 기분이 상해 톡 쏘아붙였다. 재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이며 핸드폰을 찾았다. "박유천은 뭐 성인군자냐?" "……?" "이렇게 귀여운 게 옆에서 알짱대는데 여태 가만히 뒀단 말이야?" 이렇게 귀여운 '게'……. 또 다시 머리를 뭔가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나는 뭐, 짐짝이냐? 상자더미야? 순식간에 물건 취급을 당한 나는 그 앞뒤로 붙었던 단어들이 물건 취급보다 훨씬 수위가 높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허탈하게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재영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손을 들어 귀를 막고 말았다. 막은 틈새로 재영의 더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박유천, 내가 잘못했어. 나 좀 구해 줘……. 나는 또 다시 유천을 찾고 있었다. + 재영은 강변을 지나 시내 어딘가로 차를 향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재영의 놀림을 당하다 결국 해탈이라도 해 버린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말을 무시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며, 재영도 이제는 재미가 없는지 놀림을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여기저기를 뒤적이고 있었다. "없어?" "네." "전화해 봐." 주머니를 뒤적이던 내게 재영이 자신의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의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직 단 한 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어, 다시 시간을 돌린대도 선택은 항상 너야…♬] 넥스트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정말 오랜만에 듣는 내 컬러링은 좀 낯설었다. 하긴 자기 핸드폰에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무니까. 문득 유천을 좋아하게 된 언젠가, 이 부분을 유천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도대체 이 곡을 언제 설정했더라?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데 컬러링을 한참 듣고 있는데도 반응이 없다. "안 받는데……." "아까 거기서 흘린 거 아냐?" 재영의 말에 정말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끊었다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또 다시 음악이 한참 들려왔다. 분명히 유천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어디에 떨어뜨린 걸까? 영락없이 잃어버렸구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 네, 김준수 씨 핸드폰입니다.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유천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깜빡이다가 꺼져버리는 화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오싹 소름이 끼쳤다. 왜 내 전화를 박유천이 받는 걸까? "왜?" 가만히 굳어서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며 재영이 물어왔다. "…유천이가 받았어요." "박유천 차에 두고 온 모양이네." "……." 재영의 말에 몸이 더 뻣뻣해졌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유천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충격을 받고 재영에게 끌려나오듯 그 자리를 벗어나긴 했지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생각도 못했다. 나란 인간은 늘 이렇게 대책이 없어서 탈이다. 그렇게 자리를 피했으니 유천은 내가 그 대화를 들은 것은 모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왠지 내가 그 대화를 들었다는 것을 유천이 몰랐으면 좋겠다. 뭐, 마지막 남은 내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해 두자. 하지만 유천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거기까지 왔다가 왜 차만 두고 갔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나? 재영의 번호가 남아 있을 내 핸드폰도 문제다. 왜 이재영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전화는 그냥 모르고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지이이잉.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손 안에서 재영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액정에 떠 있는 내 번호에 또 다시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유천이 걸고 있는 것일 거다. 재영의 번호를 알아본 것일까? 또 다시 등줄기로 싸하게 소름이 돋아 내렸다. 어떡하지. "받지 마." 재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과연 이게 잘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받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우연히 만난 척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내가 고민하는 사이 전화는 끊겨버렸다. 묘한 기분이다. 뭔가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이 작용하여 우리를 계속해서 어딘가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다. 나는 잠시 더 고민을 하다가는 계속 어딘가로 가고 있는 재영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저녁 먹으러." "저 그냥 여기서 내려주세요." "왜?" "유천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밥 먹고 가. 그 녀석 괘씸하지도 않아?" "오늘 유천이랑 저녁 먹기로 한 거예요. 가봐야겠어요." 내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재영은 한참이나 나를 응시하다가는 불쑥 내뱉었다. "아주 열녀 났다. 박유천이 너 이러는 건 아냐?" 그의 물음에는 씁쓸히 웃고 말았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박유천은 알고 있을까? 어쩔 때는 유천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어쩔 때는 그냥 몰랐으면 싶기도 하다. 가끔 내가 유천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짝사랑 할 때는 몰랐는데, 그게 요즘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 툴툴대며 유천의 신경을 거스를 말을 하게 되고, 유천도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싸움으로 이어진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의 싸움은 거의 내가 유천의 무심한 행동에 삐쳐서 한 언행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박유천이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한 번 입을 다물겠다고 마음먹으면 다시는 그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 새끼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항상 사람 좋은 얼굴로 친절하게 굴지만, 정말 속을 내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그의 수많은 여자친구들에 대해서 속 시원히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게, 그를 내가 온전히 가졌다는 생각이 들도록, 다시는 못 믿겠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내 입을 막아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가버려도 그를 사랑할 거라는 내 말과는 어딘가 모순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연인이라면 이 정도는 바라도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와 사귀고 나서 부쩍 그가 접근해 오는 여자들에게 냉랭해진 것은 나도 느끼고 있다. 어쩌면 그가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가끔 그의 집 거실에서 뒹굴 거리며 TV를 보는 내게 가만히 고정된 그의 시선을 느낄 때…….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아……." 순간적으로 머리에 뭔가 지나갔다……. 그래, 마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유천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얼마나 했던가? 이재영 앞에서는 그렇게 자신 있게 내뱉었으면서 정작 유천에게는 얼마나 사랑한다고 말을 해주었던가? 또 다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따지니 오히려 박유천은 내게 끊임없이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살짝 미안한 기분이 드는데……. "세워주세요." 내 말에 재영이 흘깃 나를 돌아보았다. "집이 어딘데?" "그냥 내려주세요. 택시 타고 갈게요." "박유천 때문에 그러는 거면 멀리서 세워주면 되잖아." 눈치가 빠르구나, 박유천처럼……. 나는 이 와중에 또 그에게서 유천의 모습을 찾아낸다. 진짜 내 사랑은 정신병인가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집을 알려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차선을 변경해서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유턴을 하더니 우리 집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나저나 큰일 났다. 박유천한테 뭐라고 하지……. "박유천이 때리냐?" "에?" "너 지금 하는 거 완전 겁먹은 강아지 꼴인데? 그렇게 안 봤는데 성질 더러운가 보네." 겁먹은 강아지……. 아, 정말 이 사람 표현의 끝은 어디인거야. 그리고 누가 누구한테 성질이 더럽다는 거야, 진짜.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툭 내뱉었다. "그쪽이 우리 유천이만큼만 했으면 인기 훨씬 많을 걸요?" "야, 너 내 이름 몰라? 내가 그쪽이야?"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재영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그러는 당신은 날 언제 봤다고 야, 너인데? "그럼 저쪽이에요? 아니, 이쪽인가?" "아, 이게 진짜." 재영이 싸늘하게 나를 응시했다. 뭐? 어쩌라고? 나도 지지 않고 노려봐주었다. 유천과 싸우면서 익힌 스킬이다. 쫄지 않고 마주 노려보기. 재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원래 성격이 그래?" "뭐가요?" "너무 단순하잖아. 얼굴에 좋은 거, 싫은 거,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다 티 나고,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고집피우고 대들고. 그러다가 결국 한 대 맞지?" …뭐래니. "이런 게 옆에 있으니 박유천은 심심하지는 않겠다." 이따위 말을 지껄이며 쿡쿡 웃어대는 재영에게 허, 하고 코웃음을 쳐주고는 홱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멀리 유천의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이 있는 주택가가 나온다. "저 여기서 내려주세요." 재영은 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깜빡이를 켜고 차를 세웠다. 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재영이 손목을 잡아채서 나는 다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재영이 특유의 그 오만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요?" 나는 또 다시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그가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손목을 움켜쥔 그의 손이 너무 뜨거워서 괜히 긴장이 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재영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여워서 봐준다. 얼른 가. 그리고 박유천한테 많이 혼나면 형한테 와. 알았지?" 뭐 이런 게 다 있어! 나는 그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고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느껴졌다. 등 뒤로 지잉 하며 창문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많이 혼나면 연락해! 형이 총알같이 달려와서 위로해 줄게, 몸으로!"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미친 새끼!'라면서 그에게 악을 써댔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그가 으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거 완전 사이코 아냐. 일진이 왜 이러냐, 오늘 진짜. 날씨는 싸늘했으나 내 몸은 재영 때문에 확확 열이 치솟고 있었다. 재영의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서둘러 모퉁이를 돌았다. "씨발, 재수 없어." 그리고 그제야 참았던 욕설을 뱉어냈다. "뭐가?" "헉!"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으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유천이 차에 기대어 선 채 담배연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의 희고 섬세한 얼굴과 무표정한 눈동자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몸을 달구던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 설마… 재영의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지는 않았겠지? "열쇠." 유천이 다가오더니 내 주머니를 뒤적였다. 오늘의 그에게선 불가리 블랙 대신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이 살짝 얼어있는 것이 보였다. 집에 들렀다 온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일단은 무조건 잡아떼야 한다. 나는 슬슬 작동하기 시작한 생존 본능으로 인해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어, 언제 왔어?" 말은 왜 더듬는 건데, 김준수! "아-까." "추, 춥지?" "어." …씨바, 화났다. 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유천에게 쭈뼛쭈뼛 웃어 보이며 나는 서둘러 열쇠를 꺼내 들었다. "어디 갔었어?" "응?" "어디 갔었냐고." 올 것이 왔다……. 유천의 물음에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열쇠를 꽂아 넣었다. 핑계 대기에 가장 무난한 것은 역시 회사다. "갑자기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들어갔었어." "무슨 일로?" "그냥 좀." "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 회사 일이라는데 뭘 꼬치꼬치 물어? 괜히 식은땀이 난다. 역시 박유천, 집요하다. 뭔가 납득할 만한 핑계를 대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 나는 또 다시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냈다. "오후 타임 매니저가 결근했대서 잠깐 갔었어." "흐음… 그래?" 반신반의하는 유천의 목소리에 또 다시 식은땀이 난다. 흘깃 그를 바라보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다. 유천아, 다시는 안 그럴게, 이번엔 그냥 좀 넘어가주라. 나는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들어가 있어, 차에서 뭐 좀 가져갈게." 유천이 나를 열린 현관문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근데 뭘 가져 온다는 거야? 각목? 사시미? 나는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불쑥 떠오르는 생각들에 지레 겁을 먹고 방안을 서성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바로 계단 위로 쫓아올라가서 한바탕 난리를 치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쳤지, 박유천 성격 뻔히 알면서 어쩌자고……. 그때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 "뭐해? 빨리 받아." 유천의 말에 내 시선이 천천히 내밀어진 그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 들린 선명한 진홍빛 장미는 언젠가 내가 꿈에서 봤던 바로 그 색채였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유천은 내 손을 잡아서 꽃다발을 쥐어주었다. "오늘 우리 30일이더라." 그의 나지막이 이어진 목소리에 나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 쳤다. 미안함, 죄책감, 기쁨, 얼떨떨함 등등. 그 여자 일은 그 여자 일이고… 이건 이거대로 굉장히 기쁘다. "너 좋아하는 블루피쉬하우스 초콜릿 케이크 사왔어. 이거 때문에 백화점까지 갔다 왔다." 미안함에 고개도 못 드는 내게 유천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상자를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비로소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귀 끝이 조금 붉어져 있는 것이 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웃지 마, 새끼야." 유천은 퉁명스럽게 툭 말을 내뱉고는 서둘러 몸을 돌려서는 원룸 한쪽 구석에 놓인 식탁에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주섬주섬 내려놓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그제야 나는 안도하며 유천에게 다가갔다. "밥 안 먹었지?" "응." "초밥 사왔어. 먹고 씻어." "우와, 박유천. 너 죽을 때 됐냐? 웬 일이야?" "서방님한테 말하는 거 하고는." "누가 서방이야!" 낯선 어휘에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천이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 아니었냐? 그럼 네가 할래?" "……."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시선에 슬그머니 볼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유천이 또 다시 피식 웃으며 페이퍼백에서 초밥을 주섬주섬 꺼내 식탁에 내려놓았다. 나는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서 비상계단의 일을 마음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그래… 이렇게 나를 챙기는 유천인데 그렇게 쉽게 의심하고 그러면 내가 진짜 나쁜 놈이겠지? 나는 얼른 의자를 꺼내 식탁 앞에 앉았다. 유천이 내 앞에 초밥을 밀어주며 그제야 겉옷을 벗어서 거는 것이 보였다. 집에 갔다 온 것이 맞는지 티셔츠에 트레이닝복의 편안한 차림이었다. 저 새끼는 뭐 저렇게 입고 다녀도 멋있냐. 나는 초밥을 하나 들어 입에 넣으며 유천을 훔쳐보았다. 유천은 TV를 켜고는 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었다. 저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에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이 아무래도 난 어딘가 아픈 모양이다. "넌 안 먹어?" "먹고 왔어." "아……." 나랑 저녁 먹기로 한 거였는데 혼자 먹었겠구나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나한테 바람을 맞았는데도 웬일로 박유천이 신경질도 안 부리고 화도 안 내고 얌전하다. 왠지 폭풍 전야 같다. 나는 또 흘깃 유천을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나를 보는 유천의 사심 없는 눈빛에도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아씨, 나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건데?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러나? 나는 서둘러 초밥을 또 하나 입에 밀어 넣으며 쭈뼛쭈뼛 웃어 보였다. 유천이 가만히 웃으며 '얼른 먹어'라는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초밥을 입에 넣었다. "켁켁, 콜록콜록!" 아니나 다를까, 사레 들렸다. 유천이 몸을 일으켜서는 얼른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준다. 나는 기침을 몇 번 더 하고는 물을 들어 마셨다. 유천이 의자를 꺼내 맞은편에 앉는 것이 보였다. "얼른 먹어. 케이크에 초 꽂아야지." "으, 응." 유천의 말에 나는 서둘러 초밥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문득, 내 애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박유천은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30일? 보통 100일부터 챙기는 거 아닌가? 아니, 날짜를 세는 것 자체를 나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꽃을 사들고 나타나다니 정말 로맨티스트구나……. 나도 명색이 남자라서 꽃을 받고 좋아하는 취미는 없지만, 그의 마음씀씀이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다. 하긴, 나한테 프로포즈했을 때도 그랬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회전목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풍선을 건네다니.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비상계단의 그녀 일만 아니었어도 정말 오늘 기분 최고일 텐데……. 내가 초밥을 다 먹어갈 즈음 유천은 블루피쉬하우스의 초콜릿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았다. 블루피쉬하우스는 놀이공원 계열사 백화점 안에 있는 작은 카페인데, 달지 않은 케이크 맛에 우리 둘 다 좋아하는 가게다. 거기까지 다녀올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나는 유천이 모르게 킥하고 웃었다. 불을 끄고는 조심스레 초에 불을 붙이는 유천을 보고 있으려니 자연스레 그의 드러난 목덜미로 시선이 갔다. 마른 듯 남자다운 어깨선과 목울대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나는 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뭐, 뭐가!" 박유천, 제발 이런 건 모른 척 해 주지 않으련? 유천의 얼굴에 슬그머니 떠오른 짓궂은 미소에 얼굴이 더 뜨거워져서 나는 또 다시 애꿎은 물을 들어 마셨다. "뭐야, 진짠가 보네?" "풉! 콜록콜록콜록!" 유천의 말에 결국 심하게 물을 뿜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뿜어낸 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물을 뚝뚝 흘리는 유천의 모습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항항항항!" "너……." 유천이 썩은 표정으로 얼굴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을 닦아내는 것을 보고는 나는 몸을 뒤로 젖혀가며 더욱 박장대소 했다. 그때였다. 오른쪽 뺨에 서늘한 것이 불쑥 와서 닿았다. 그리고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천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웃음이 뚝 그친 나는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서늘한 것을 만져 보았다. 초콜릿 크림이 잔뜩 묻어났다. 그리고 또 다시 유천의 손이 불쑥 다가오더니 왼쪽 뺨에 또 서늘한 것이 느껴졌다. "개새끼……." 나는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내며 크림을 듬뿍 찍어 유천의 얼굴에 잔뜩 처발라 주었다. 유천이 초코 크림 범벅이 된 얼굴로 잔뜩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 싱긋 웃으며 깐죽거렸더니 유천의 표정이 더 일그러진다. 나는 의자를 조금 빼내서 도망갈 준비를 하며 또 다시 씨익 웃어주었다. "죽었어……." 그의 말이 나지막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천은 케이크를 양손으로 덥썩 집더니 벌떡 일어났고 나는 그의 움직임을 느끼자마자 총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길, 방이 좁으니 도망갈 곳이 바깥밖에 없어! "씨바, 거기 안 서!"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우리는 언젠가 유천의 집에서 했던 것처럼 우당탕거리며 현관문을 향해 달렸다. 이번엔 탈출 성공을 예감하며 덥썩 문고리를 잡았을 때……! 크림 묻은 손이 주르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씨발! "다 도망갔냐?" 그리고 뒤에서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쭈뼛쭈뼛 웃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양손에 크림범벅인 유천이 사악한 미소를 지은 채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주춤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차가운 현관문이 닿았다. "유, 유천아." 말까지 더듬으며 유천을 불러보았지만 그의 미소는 더욱 비열해질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 안으로 도망가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재빨리 유천의 옆을 스쳐 다시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 가 그의 크림이 잔뜩 묻은 손에 덥썩 허리를 잡히고 말았다. "으아아아! 하지 마!" "겁도 없이 까분다, 쪼그만 게." 유천은 나를 번쩍 들어 침대에 던지더니 저따위 말을 뱉어내며 내 얼굴에 크림을 마구 발라댔다. 나는 비명을 질러대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언제나 내 완력은 유천에 비해 역부족. 나는 한참이나 유천의 심술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결국 나는 기진맥진한 채 숨을 몰아쉬며 초코 크림 범벅이 되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유천이 나를 내려다보며 쿡쿡 웃는 것이 보였다. "개새끼야, 짜증나. 저리 꺼져." 나는 신경질적으로 유천의 어깨를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걸 왜 덤벼, 덤비길." "씨발, 이불에 크림 다 묻었어." "내일 빨아. 시트 또 있잖아." "케이크 하나도 못 먹었잖아!" 내 투덜거림에 유천이 또 다시 쿡쿡 웃었다. 몸 위에서 그의 움직임이 가만히 전해져오자 그제야 나는 우리의 포즈가 약간 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 비켜." 당황해서 유천의 어깨를 밀어내자 유천이 내 손을 잡아끌더니 손가락 끝에 묻은 크림을 쪽 빨았다. "이거 맛있다." "비키……!" 당황하여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던 소리는 금세 유천의 입술에 막히고 말았다. 유천에게서 초콜릿 냄새가 향긋하게 밀려들었다. 잠시 내 입술 위를 핥던 유천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유천의 혀에서는 달콤쌉쌀한 초콜릿 맛이 났다. 진짜 맛있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어 유천의 목에 감았다. 크림이 잔뜩 묻은 손을 맞잡자 자꾸 미끄러진다. 나는 유천의 옷을 꼭 움켜쥐었다. 한참을 부드럽게 입안을 훑던 유천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이내 내 얼굴에 잔뜩 묻은 크림을 핥아왔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킥 하고 웃으며 나도 유천의 손을 잡아서는 할짝거렸다. 유천이 쿡쿡 웃는 것이 또 가만히 전해져 왔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키득거리며 서로에게 묻은 크림을 핥아댔다. 마음 어딘가가 간질간질하다. 이래서 연애란 걸 하는구나 싶다. 아, 정말 별 짓을 다 해 본다, 김준수. 나는 유천의 크림이 묻은 볼에, 오랜만에 마음에서 우러난 뽀뽀를 쪽 해주고 말았다. + 키스를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방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한참 걸려 방 정리며 시트 교환을 끝내고는 샤워를 하는 중이었다. 크림이 잘 안 닦여 몇 번이나 비누칠을 하고 있자니 밖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움찔해서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이내 조용해졌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박유천은. 나는 몸에 묻은 비눗기를 씻어내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박유천이 좀 이상했다. 유천은 먼저 씻고 나가더니 내 옷까지 빌려 입고서는 시간이 늦었는데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가끔 내가 유천의 집에 가서 뒹굴 거리다가 자고 온 적은 있어도 유천이 여기서 자고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지금 유천의 행동은 묘하게 긴장감을 더하고 있었다. 또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긴장감 백만 배. 장난 아니다. 나는 왜 긴장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지은 죄가 있는데 유천이 언제 그 말을 꺼낼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서 결론을 내렸지만 아무래도 오늘의 유천은 다른 날과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욕실을 나섰다. 유천은 침대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유천이 나를 흘깃 보는 무심한 눈동자에 또 다시 긴장이 돼서 얼른 눈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이제 슬슬 자야 되는데……. "너 일찍 일어나야 되지?" "응."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유천의 말에 내가 너무 과민반응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자자, 불 꺼." "…안 갈 거야?" "어." 유천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나는 머리를 털고 있던 손을 아주 잠깐 멈칫했다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뭔가를 눈치 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굉장히 묘한 분위기다. 유천에게 비상계단의 일을 묻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고, 나도 유천에게 거짓말을 한 터라 혹시 재영과의 일을 아냐고 나서서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나는 머리를 대충 빗어 정리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불을 끄고 유천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유천은 그렇게 누워서도 한참이나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개그 프로를 보며 쿡쿡 웃는 유천의 움직임이 가만히 전해져 왔지만 나는 웃지도 못하고 유천의 입에서 언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까무룩 잠이 와서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던 순간이었다. 유천이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는 것이 느껴졌다. 흐릿해져가던 의식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방 안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유천의 손이 가만히 다가와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의 실루엣이 내 위로 몸을 기울여 오는 것이 보였다. 자는 척 하려고 했는데 허리를 안아오는 유천의 손길에 이내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려 금세 깨어있다는 것이 들켜 버렸다. 유천이 쿡쿡 웃는 것이 전해져 왔다.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왜?" 나는 유천이 뭘 하려는지 모르는 척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천은 대답 없이 그대로 내게 입을 맞춰왔다. 유천은 한참이나 내 입술을 머금었다. 방 안이 조용하고 어두워서 우리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덕분에 나는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이윽고 유천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의 손도 천천히 옷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유천의 서늘한 손길에 흠칫하며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말았다. 유천은 내 혀를 감아오는 동시에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손을 풀어내서는 목에 감게 했다. 그리고 유천이 천천히 내 옷을 걷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맨살에 닿는 싸늘한 공기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유천의 손이 다시 허리를 가만히 쓸었다. 온 몸이 뻣뻣하게 굳도록 오싹한 쾌감이 느껴졌다. 제길, 아무래도 난 허리가 약한 것 같다. 어떻게 알았는지 계속 유천의 손은 허리 근처를 떠나지 않은 채 나에게 깊은 입맞춤을 선사하고 있었다. "흐읏……." 결국 유천의 입술 위로 신음을 토해내며 그의 목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유천의 혀가 더욱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한동안 그렇게 키스를 나누던 유천의 입술이 멀어지더니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따스한 호흡에 또 다시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유천이 내 옷을 더 걷어 올리고 가슴 언저리에 입술을 묻었다. "하아……." 내 입술 사이로 또 다시 열기가 가득한, 한숨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에 없이 진한 유천의 몸짓에 내 몸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뻐근해오기 시작한 아랫도리는 나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박유천은 아예 마음을 먹은 건가? 아, 씨발, 좀 무서운데……. 나는 유천의 손길에 쾌감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손을 뻗어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유천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유천의 혀가 할짝이며 맨살에 닿는 느낌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또 다시 몸을 흠칫 떨었다. 그때였다. 바지 속으로 들어오는 유천의 손을 느끼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말았다. 유천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가슴 언저리에 그의 따스한 숨결이 규칙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그렇게 있던 유천의 입술이 다시 다가와서는 목덜미에 닿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손목을 움켜쥔 채였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유천이 목덜미에 작은 흔적을 만드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좀 무서운 것 같다……. 나는 그의 손을 놔야 하나 어째야 하나, 또 다시 긴장한 채 고민하고 있었다. "…이재영이 네 전화번호 어떻게 알아?"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유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몸을 뜨겁게 달구던 열기가 단숨에 가셨다. 급작스러운 낭패감에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유천이 다시 목덜미에 입을 맞추다가는 내 귀를 물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흣……." 귓가에 닿은 그의 호흡에 나는 소름끼치는 쾌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또 다시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손목을 꼭 쥔 채였다. "이재영이랑 같이 있었어?"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 해." "…응?" "안 할 테니까 놔." "……." "여기… 아프잖아. 얼른 놔." 유천이 내 것 위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여전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역시 내가 느낀 폭풍 전야의 느낌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내가 언젠가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달고 나타났을 때도 유천은 이런 식으로 반응했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나 행위를 멈추던 유천이었다. 하지만 이게 내 거짓말의 대가라면…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유천의 손목을 쥔 손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유천이 다시 입을 맞춰오기에 입술을 열어 유천의 혀를 받아들였다. 잠시 키스를 하던 유천이 천천히 내 옷을 끌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드러난 맨살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내 유천이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흣……!" 난생 처음 느낀 생경한 감각에 나는 크게 몸을 뒤틀었다. 유천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허벅지를 간질이는 것마저 지독히도 소름이 끼쳤다. 유천은 저절로 웅크려지는 내 허리와 골반 언저리를 단단히 눌러 잡고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오늘의 유천은… 내 의사를 존중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왠지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절정에 이름과 동시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유천은 내 옷을 바로잡아주고는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울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을 억눌러 참았다.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되면 내가 비상계단의 일을 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내 자존심은 끝내 그것을 유천이 알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입술을 꼭 물고 눈물을 참고 있는 나를 유천이 가만히 끌어안았다. "김준수." "…응." "너 앞으로 스튜디오 오지 마." "……." "이재영 전화도 받지 말고." "……." "한 번만 더 밖에서 만나는 거 내 눈에 띄면 죽을 줄 알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응."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아." 유천의 한숨이 무겁게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나는 차마 그를 마주 안지도 못하고 그저 숨을 죽인 채 안겨 있을 뿐이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우리에게 너무 긴 밤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 "…미안." 어렴풋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천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곧이어 이마에 따스한 호흡이 와 닿았다.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는 결국 설핏 잠을 깨고 말았다.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기에 금세 눈이 떠지지 않았다. 나는 잠결에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손길을 피했다. 또 다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준수, 일어나. 늦었어." 나지막이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젯밤을 유천과 함께 보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뻑뻑한 눈을 힘겹게 치켜뜨니 유천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눈을 돌려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의가 아니어서 그런지 어젯밤 일은 되짚어 생각해 볼 수도 없을 만큼 부끄럽고 민망하다. "일어나자." 유천은 꼭 아빠 같은 말을 하며 손목을 잡아 일으켜 앉혔다. 나는 창피한 느낌에 잠투정도 못하고 완전히 잠을 깨고 말았다. 유천은 침대 위에 멀뚱히 앉아 눈을 깜빡거리는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고는 '얼른 씻어'라며 식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서는 그에게서는 향긋하게 샴푸냄새가 났다. 언제 일어났는데 벌써 씻기까지 한 거야? 나는 흘깃 시계를 보았다. 7시 45분.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많이 늦었다. 왜 알람이 울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늦겠다 싶어서 얼른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섰다. 제대로 말리지 않았던 머리는 이리저리 마구 뻗쳐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다시 머리를 감고 급히 샤워를 마쳤다. 머리를 말리고 있으려니 유천이 욕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하며 얼른 드라이기를 껐다. "왜?" "늦겠어. 빨리 나와." "응." 대답을 하고도 욕실 문이 벌컥 열리고 유천이 들어오지 않을까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어젯밤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유천이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다시 머리를 말릴 수 있었다. 대충 머리 손질을 끝내고 욕실을 나서니 유천이 김이 오르는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고 있다. "나 아침 잘 안 먹는데." "그래서 죽 사왔어." 그의 마음씀씀이에 또 다시 이런저런 복잡한 심정이 교차한다. 나는 가만히 유천을 바라보다가는 순순히 식탁에 앉았다. 문득 어제오늘 식탁이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는 터라 제대로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침이라니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넌?" "별로 생각 없어." 유천은 나지막이 대답하며 내 앞에 물 컵을 놔 주었다. 나는 뜨거운 죽을 호호 식혀서 입에 넣으며 맞은편에 앉은 유천을 흘깃 곁눈질 했다. 가만히 나를 보고 있는 유천의 무표정한 얼굴은 조금 낯설었다.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마주 앉은 우리 사이로 미묘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유천을 보기가 민망하기도 하고, 좀 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젯밤 일로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준수야." "응?" "여기." 불쑥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유천이 자신의 목덜미를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손끝에 멋지게 자리 잡은 쇄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는데?" "나 말고." "아……." 그제야 어젯밤 유천이 목덜미에 한참 입을 맞추던 기억이 났다. 얼굴이 금세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또 민망해져서 한 손으로 목덜미를 가리며 죽을 입 안에 떠 넣었다. 그나저나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인데……. "옷 때문에 안 보이는데, 알고는 있으라고." "…응."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대답했다. 아씨, 박유천이 만들어 놓은 건데 왜 내가 창피해하고, 신경 써야 되는 거냐고.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흘깃 유천을 곁눈질 했다. 그는 여전히 파리하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럴 것이다. 유천은 아침잠이 많아서 내가 전화해서 깨우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새벽부터 나가서 죽을 사다 먹이고, 잠을 깨워주고 하는 건… 미안하다는 뜻인가? 나는 그가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속편한 소리 같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넘어간 것이 다행이다. 유천이 알면 화를 낼 거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법칙은 참 이상하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더 애가 타고, 더 상처받고, 더 아프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참아야 하고, 더 자존심 상해야 하며, 더 용서해야 한다. 우리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내가 그 역할인 것 같다. 나는 유천을 사랑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랑에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100만큼 유천을 사랑한다고 해서 유천에게 100을 되돌려 받으려 기대하면 안 된다. 사랑은 기대로 무너지는 법이다. 문득 '너희 나이 때는 사랑에 올인해 버려 더 크게 부서지고 깨진다'던 재영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나 상처도 크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경험에서 우러난 말일까?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니 확실히 우리보다 연상이 맞기는 맞구나 싶다. 하지만 새끼야, 나랑 사귀면서 다른 여자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한 건 너무하단 말이야……. 나는 잠시 유천을 원망 섞인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다 먹었지? 나가자." 혼자 유천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삽질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유천이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섰다. 당황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 그는 이미 의자 뒤에 걸려 있던 옷을 집어 들고는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데?" "데려다 줄게. 갔다 와서 내가 치울 테니까 열쇠 주고 가." "오늘은 스케줄 없어?" "어. 빨리 나와." 먼저 문을 나서는 유천의 모습에 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 나서야 했다. 아, 정말 김준수 인생 피곤하다. 왜 이렇게 저 새끼한테는 약해 터져가지고. 아니, 나 이미 박유천한테 잡혀 사는 거 아닐까? 문을 잠그면서는 내 자신에 대한 신세 한탄도 잊지 않았다. 엔진의 공회전 소리에 돌아보니 유천은 벌써 출발할 기세다. 나는 얼른 조수석으로 달려가 차에 올랐다. 차 안은 미리 시동을 걸어 두었는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의 배려에 또 다시 감동할 뻔하다가는 괜히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밖에 나가서 다른 여자들한테도 이러고 돌아다니는지 누가 아냐 이 말이다. 특히 '그녀'. 요주의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 건물에 있었던 걸 보면 같이 일하는 스태프 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은데……. 젠장, 나도 헤어나 메이크업 배울까? "손." 멍하니 창밖을 보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또 눈앞에 불쑥 유천의 손이 다가왔다. 나는 시큰둥하게 유천의 손을 내려다보다가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리는 내가 잠에서 깬 이후로 단 한 번도 서로를 향해 웃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내가 반응이 없자 유천은 스스로 내 손을 찾아 쥐었다. 그의 큰 손에 잡혀 있는 손을 빼내려 조금 꼼지락거리자 이내 유천은 깍지를 꽉 끼어버렸다. 순간 아랫입술을 꽉 물어야 했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느꼈지만… 그 여자는 그 여자고 이건 이거대로 기쁘다. 어휴, 이 대책 없는 정신병. 나는 속으로 자책하며 고개를 돌려 유천 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유천을 보게 되면 어제 그가 내게 했던 심한 짓도 잊고 헤실거리며 웃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싸웠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던가, 연락을 끊거나, 늘 하던 스킨십을 요란스럽게 거부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을 사귀기 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보통 또래의 연인보다는 어른스러운 사이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손을 잡고 있다고는 해도 역시 차 안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악도 켜지 않은 채, 조용히 거리를 달릴 뿐이었다. 유천은 복잡한 차 사이를 물고기처럼 유유히 빠져나가며 도심을 가로질렀다. 강변을 달릴 즈음 내 쪽으로 햇빛이 비쳐들어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유천의 모습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여자들은 남자의 운전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그럼 난 전생에 여자였거나 아니면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그 정도로 유천의 운전하는 모습에 가슴이 뛰어 왔던 것이다. 그의 섬세하고 단아한 옆선은 만져보고 싶어 불쑥 손이 나갈 정도로 근사하다. 저러니 여자들이 가만히 안 두지……. 나는 엄한 데서 비상계단의 상황을 납득하고 말았다. 그런데… 진짜 난 어딘가 좀 모자란가?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다, 제길. 나는 애써 박유천이 잘난 것과 바람둥이인 것은 관계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창문이 내려가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는 어느새 놀이공원에 도착해 있었다. 유천은 내 직원증을 경비 아저씨에게 보여주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잠시 놓은 손인데도 금세 휑하니 찬 기운이 느껴져 나는 왼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천은 엘리베이터에 가까운 자리에 능숙하게 주차를 하고는 시동을 껐다. 엔진이 멈추자 금세 차 안은 조용해졌다. 지하 특유의 텅 빈 느낌에 괜히 침울해졌다. 내가 일하는 사이 박유천은 그 여자를 만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내려." "응."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벨트를 풀고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차 밖으로 내딛었다. 탕 하며 유천 쪽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천천히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나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기대가 사랑을 무너뜨린다면, 사랑을 퇴색시키는 것은 의심이다. 나는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아버린 유천에 대한 불신에 속이 상했다. [딩동♬] 내 기분과는 다른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유천을 흘깃 곁눈질하고는 뚱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직원용 사무실과 탈의실이 있는 6층을 꾹 누르고 엘리베이터 밖에 선 유천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만히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왠지 어색한 침묵에 나도 입꼬리를 조금 올려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집에 가서 더 자." "어." [문이 닫힙니다] 친절한 안내 멘트를 들으며 나는 유천에게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유천의 모습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덜컹! 아슬아슬한 틈새로 유천의 손이 불쑥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놀라서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유천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있었다. 코끝에 닿은 그의 목덜미에서 불가리 블랙 대신 나와 같은 비누 냄새가 났다. 그와 밤을 보냈다는 것이 조금 더 확실히 실감이 나던 순간이었다. "준수야." "…응?" "이재영… 남자 좋아해." "……." "……." "…응, 알아."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유천도 그가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이미 정윤 형과의 화려한 전적이 있었던 터라, 유천의 기분도 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새끼야, 넌 너무해, 다른 여자한테 좋아한다고 하다니…….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 만나지 마." "…응." "5시에 데리러 올게." "…알았어." 내 대답과 동시에 유천의 입술이 가볍게 와 닿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유천을 밀어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유천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았다. "왜? 카메라에 찍힐까 봐?" "말이라고 하냐? 인터넷에 뜰까 무섭다." "너랑 찍힌 거면 난 스캔들도 괜찮은데." 유천의 뻔뻔한 소리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신인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다. 뜨기도 전에 매장당하고 싶지?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유천을 엘리베이터 밖으로 밀어냈다. 유천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나를 귀엽다는 듯 가만히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매섭게 유천을 노려봐주고는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문이 닫힙니다] 또 다시 친절한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아, 맞다." 유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상자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유천은 닫히는 문 사이로 서둘러 손을 뻗어 내 손에 상자를 쥐어주었다. 당황해서 뭐냐고 묻지도 못했는데 문이 닫혀버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희미하게 '30일 선물'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나는 멍하니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까만색의 작은 벨벳 보석함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유천과 멀어지는 중이다. 가만히 보석함을 열자 십자 모양의 작은 화이트 골드 귀걸이 한 쌍이 반짝였다. 십자 가운데에는 선명한 하늘색의 보석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크기로 박혀 있었다. 귀걸이 밑에 끼워진 작은 메모지에 '12월 탄생석이래'라고 적힌 유천의 유려한 글씨가 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눈시울이 화끈해졌다. 아주 병 주고 약 주는구나……. "개새끼……." 좋은데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다. 그 이율배반적인 기묘한 감정에 나는 또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참고 코를 훌쩍이며 탈의실에 들어섰다. 유천에게 받은 상자를 캐비닛 안에 넣고는 서둘러 옷을 꺼내들었다. 언뜻 캐비닛 안에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색의 상자들은 얼핏 보면 비슷하게 생겼다. 하나는 승연에게 받은 넥타이핀 상자인 듯 했다. 아, 이거 유천이 준다면서 아직 안 가져갔구나. 또 박유천을 떠올리며 씁쓸히 웃어버렸다. 그때 복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탈의실 옆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서는 기척이 났다. "저기?" "네, 저쪽이 대기실입니다." 묘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하나는 팀장 목소리고, 또 하나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나는 가만히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또 다시 말소리가 들리더니 웬 낯선 여자들이 짐을 들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낯익은 두 인물에는 동작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팀장과……. "어? 꼬맹이?" …이재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웃고 말았다. 반가운 척 사절. 내가 어제, 어? 당신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와씨… 진짜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주해 줄 테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쓰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러나 문은 팀장에 의해 바로 열리고 말았다. "김준수 씨." "네?" "인사해요. 이쪽은 오늘 준수 씨 구역에서 촬영하실 이재영 씨." “촬영이요?” 나는 쇳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오랜만." 어젯밤에 봐놓고 오랜만 좋아한다. 특유의 비스듬한 미소를 짓는 재영의 인사에 내 표정은 급속 동결되어 버렸다. 나는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재영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인간 때문에 내가 박유천한테 무슨 일을 당했는데! 왜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얼굴을 마주대해야 하냐고! 그나저나 뭐? 내 구역에서 촬영? 나는 아무것도 전달 못 받았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인상이 잔뜩 일그러진다. “어, 두 분 아는 사이?” “조금요.” 웃음기 섞인 재영의 대답에는 흘깃 노려봐주고 말았다. "팀장님, 저분들 개인 소지품 어떻게 하냐고 묻는데요?"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팀장은 나에게 잠깐 얘기 나누고 있으라며 탈의실을 나갔다. 저기, 팀장님 저는 이 분이랑 할 말이 없는데요? 나는 천천히 닫히는 문을 조금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이재영이 그런 나를 특유의 거만한 미소를 지은 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저 미소는 비웃음 같다. 나는 재영에게서 홱 하고 몸을 돌리고 재킷을 걸쳐 입었다. "너 여기서 일하냐?" "그러니까 여기 있죠." "학생 아니었어?" "맞아요." "그럼 알바야?" "아닌데요." "뭐야 그럼? 학교 휴학했어?" "아닌데요." "……." 톡톡 쏘아붙이는 내 말에 재영이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흘깃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요 싸가지 봐라? 라는 듯 한 표정을 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묘한 승리감에 코웃음을 치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무전기를 허리에 차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보니 선이 바깥으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 제길 이어폰 줄 옷 속으로 넣는 거 까먹었다……. 이게 다 이재영 때문이야. 나는 괜히 그에게 툴툴대며 다시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어 내렸다. 그때 갑자기 재영이 내 손에서 이어폰을 뺏어가더니 옷 속으로 손이 쑥 들어왔다. "으아앗!"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단추가 풀려 있는 가슴팍을 움켜쥐고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자 또 피식 웃는다. "왜 이렇게 놀라? 이거 넣으려던 거 아냐?" 씨바, 당신도 당해봐. 안 놀라나.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손에서 이어폰을 다시 잡아챘다. "이건 뭐냐? 뜨거운 첫날밤의 흔적?" 목덜미의 키스마크를 어떻게 눈치 챘는지 옷깃을 젖히고 짓궂게 웃는 그의 말에는 순간 살의가 끓어올랐다. 이게 누구 덕분인데! 나는 그에게 잡힌 옷깃을 잡아채며 쏘아붙였다. "남이야 뜨거운 첫날밤을 보내든 말든 신경 끄세요." "하루 사이에 너무 돌변했는데? 안 하면 안 되냐던 사람 맞아?" 쿡쿡 웃으며 빈정대는 그의 목소리에 좀 꺼져 달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허리 안 나갔냐? 뭐, 멀쩡히 서 있는 거 보니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박유천이 생각보다 테크닉이 좋은가 보네?" 안 했어, 안 했거든? 차마 그 말은 내뱉지 못하고 이를 꾹 물었다. 턱뼈에서 으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 한 마디면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지만… 세치 혀가 화를 부른다는 말도 있다. 이재영은 자살중독증이거나, 마조히스트거나, 변태인 것이 틀림없다. 저 빈정거리는 말투는 죽여 달라 내지는 싸우자는 뜻으로밖에 안 들린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는 소리는 이럴 때 쓰는구나. 나는 옛 사람들의 선견지명 있는 어휘력에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재영씨, 이쪽이요." 다시 문이 열리고 팀장이 그를 불러냈다. 재영은 또 다시 특유의 그 비릿하고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또 보자, 꼬맹아'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나는 속으로 '100년쯤 후에, 그리고 꼬맹이 아니거든?'이라고 덧붙여주고는 서둘러 이어폰을 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아." 문이 닫히는 소리에 괜히 한숨이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상황? 저 인간은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 내가 만나고 싶어서 만난 건 아니지만, 박유천이 알았다간 또 난리가 날 게 틀림없다. 박유천이나 나나 질투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가 투덜거리거나 소심하게 복수를 하고 그치는 것에 비해 박유천은 굉장히 그 반응이 격렬하단 말이다. 유천은 내가 이렇게 재영과 만난 것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어제의 그 기세대로라면 병원에서 있었던 그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일단은 저 사람 때문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유천에게 이재영이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부터가 난관이다. 에휴… 나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재영과 나는 악연인 것 같다. + "와, 진짜 멋있다." "이재영을 눈앞에서 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어떡해, 나중에 사인해달라면 해 주려나?" 아주 난리가 났다. 정민 누나며, 미영 누나며, 지현에, 다른 구역의 여자들까지 다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멀찌감치 서서 이재영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본사가 대대적인 브랜드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새로 확장한 패션 산업에 대한 이미지마케팅 차원에서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고, 세련되고 귀족적인 이미지의 이재영을 특별히 메인으로 발탁했다고 하는데……. 나는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귀족 좋아한다. 저런 싸가지 밥 말아먹은 인간이 귀족? 무덤에 누운 유럽 귀족들이 벌떡 일어나겠다. 자고로 귀족은 첫째도 매너, 둘째도 매너. 즉, 싸가지가 생명이란 말이다. "누나, 저 사람 알아요?" 나는 정민 누나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이재영 모르는 사람도 있냐?" '저요'라는 말은 그냥 집어삼켰다. 핸드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며 말 시키지 말라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는 정민 누나의 태도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내 구역에서 나는 사고는 다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왜 하필 내 구역인 거야, 씨.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동선을 확인하는 재영을 잔뜩 노려봐주었다. 벌써 이재영의 팬들이 몰려와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비명 내지는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밀려들면 이재영을 구경하느라 여기로 다들 모여들 거고, 사고는 평소의 배로 많아질 것이 틀림없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렸다. 지이이이잉.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주위를 대충 둘러보다가는 얼른 직원 휴게실로 들어섰다. "응." - 뭐해? "일하지." - 거기 지금 이재영 가 있지? "응?"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에 식은땀이 버쩍 났다. 이 새끼는 뭐 천리안이냐? 어떻게 알아? "그, 그게 내가 만나려고 한 게 아니고……." 나는 열심히 더듬거리며 변명을 했다. - 알아. 사무실 들렀더니 이번에 거기서 큰 건 들어왔다더라. "아……." 아우, 개새끼. 사람 마음을 막 들었다 놨다 한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있다가 데리러 갈 테니까 이재영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어. "알았어, 새끼야." 유천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불안감이 묻어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하신 거다, 우리 박유천 씨께서는. 하지만 유천아, 설마 비상계단의 대화를 들은 나만큼 불안할까? 나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우리는 사소한 잡담을 몇 마디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깜빡이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문을 나서자 촬영장 주위에 바글바글 몰려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잠깐 사이에도 촬영장 근처에는 사람들이 아까의 두 배로 불어나 있다. 멀리서 사진을 찍어대던 팬들의 라인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벌써 사람들의 경계는 촬영 기자재들과 스태프들이 있는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러다가 누구 하나 다치겠는데……. 나는 당황해서 서둘러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E3구역 촬영장이요, 경호팀 증원 좀 해주세요.” 무전기에서는 금세 알았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촬영 현장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있자니 새삼 짜증이 치솟았다. 이재영 따위가 뭔데. 조금만 참으면 TV로 줄기차게 보여줄 텐데 왜 여기서 이러냐고. 나는 툴툴대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드디어 인파의 끝이 보였다. 나는 비켜주지 않으려는 여자 두 명을 간신히 뚫고 배치된 경호원들에게로 다가갈 수 있었다. “형, 좀 어때요?” “불안불안하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몰리면 크게 한 건 터지겠다.” “증원 요청 해놨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 봐요.” 알바생일 때부터 얼굴을 익힌 성태 형과 불편한 표정으로 한숨 섞인 웃음을 나누고 있자니 또 다시 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이재영이 카메라를 보고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다. 뭐야, 고작 저것 때문에 그런 거야?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맞은편 텅스텐 라이트 뒤에 정민 누나와 승연이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랑 친하다고 막 근무지 이탈하더니 잘 됐다. 나중에 한 소리 해줘야지라고 벼르며 씨익 웃었을 때였다. 갑자기 뒤쪽부터 술렁이며 사람들이 파도처럼 앞으로 한 걸음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또 다시 경계 라인이 무너졌다. 몇 안 되는 경호원들이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는 것이 보였다. “어어, 언니…….” 그때였다. 승연이 누군가에게 확 밀쳐지며 휘청거리다가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조명기에 기대 세워두었던 반사판이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연이어 램프가 천천히 승연의 위로 쓰러져 내렸다. “승연아, 피해!” 나는 무의식중에 고함을 지르며 승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승연의 놀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미 램프는 중력의 힘으로 가속도가 붙은 채 그녀 위를 덮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승연을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급하게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와장창! 램프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물을 뿌린 듯 한 정적. 잔뜩 긴장한 어깨가 뻐근하다. 멀리 바이킹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손등이 유리조각에 베었는지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뿐이다. 의아한 생각에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감싸 안은 누군가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귓가에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한숨이 와서 닿았다. 내 볼을 타고 미지근한 액체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재영 씨!”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재영 씨 괜찮아요?” 사람들이 우르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를 보는 승연의 눈동자는 놀란 듯 잔뜩 커져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나를 감싸 안은 재영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옆에는 산산조각 난 램프가 나뒹굴고 있다. 그리고 그의 피투성이가 된 어깨……. 순식간에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영을 응시했다. 재영은 다시 한 번 이를 악문 한숨을 토해내고는 내 어깨를 짚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괜찮아.” 하지만 대답과는 다르게 재영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일으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하냐, 꼬맹이? 바닥 청소하냐?” 어느새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나에게 툭 내뱉는 말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재영의 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환호는 다시 이재영을 외치는 소리로 바뀌었다. 이재영을 연호하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재영은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통증을 참고 있는 중일 것이다. “재영 씨, 구급차 불렀으니까 잠깐 대기실로 가요.” 그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서는 재영을 이끌었다. 재영은 나를 흘깃 돌아보더니 한 쪽 입꼬리만 올려서 비웃음을 닮은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대기실 쪽으로 사라졌다. 모여서 웅성대던 사람들도 해산하시라는 경호팀의 말에 점차 흩어져갔다. 촬영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스태프들이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는 왜 나를 감싼 걸까? “매니저님 괜찮으세요?” 그때 승연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정신을 추스르고 승연을 내려다보았다. 승연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아, 괜찮아. 너야말로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겠어?” “네, 저는…….” 말끝을 흐리는 그녀는 또 다시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잔뜩 굳어버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내 말에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승연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씨, 우는 여자 달래는 거 못하는데……. 게다가 나도 정신이 없어서 남을 위로해줄 처지가 아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역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정민 누나가 보였다. “누나.” “너… 진짜 괜찮아?” “네. 승연이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의료센터 좀 데려다 주세요. 저 이재영 씨한테 좀 가보게요.” “알았어.” 나는 여전히 서럽게 울고 있는 승연을 정민 누나에게 맡기고 무전기로 본부에 사정을 설명했다. 뒤처리를 부탁하고 서둘러 재영이 있을 휴게실로 향하며 흘깃 유리창을 돌아보았다. 승연이 안겼던 앞섶이 그녀의 눈물로 젖어 있다. 그리고 내 볼과 어깨는 재영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제길… 나는 나지막히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분명히 위에서 문책이 내려올 것이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이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어제는 나를 힘들게 만들더니, 오늘은 대신 다치질 않나……. 이재영이라는 사람과는 정말 악연임이 틀림없다. 와씨, 어제오늘 일진 왜 이러냐. 나는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으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휴게실에서 재영의 피투성이가 된 셔츠를 찢어냈을 때, 유리 파편이 잔뜩 박히고 찢긴 그의 상처에 깜짝 놀랐다. 굉장히 아플 텐데 무표정하게 담배를 피워대는 그의 모습에는 더 놀라고 말았다. 나라면 분명히 박유천한테 아프다고 신경질을 부리거나 엄살을 피웠을 거다. 저런 게 어른인가? 무심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일단은 나도 20살이 넘었으니 어른…이긴 한데, 왜 나는 저런 느낌이 안 들까? 조금 짜증난다. 재영이 응급조치를 받고 병원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본부로 불려갔다. 빼도 박도 못하고 좀 깨지고 내려와서는 계속 멍한 상태다. 사실 내 일도 복잡해 죽겠는데, 위에서 뭐라고 하는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대충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시말서? 까짓것 쓰면 되지. 나는 이럴 때 보면 어떤 면으로는 참 속이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사면초가의 기분이랄까?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재영이나 박유천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괜히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짜증난다. 그렇게 박유천과 이재영의 생각에 잠겨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터덜거리며 탈의실로 들어와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아까 벗어두었던 피 묻은 재킷과 셔츠는 대충 말아서 가방에 쑤셔 넣었다. 문득 캐비닛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검은 상자 두 개가 보였다. 유천에게 받은 귀걸이와 유천에게 주려던 넥타이 핀이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상자 두 개를 잘 챙겨 주머니에 넣고는 탈의실을 나섰다.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들자 유천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7층에 볼 일이 있어서 올라 왔으니 주차장에서 잠깐 기다리란다. 7층은 임원들 사무실일 텐데. 임원 사무실에는 무슨 볼 일일까?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준수 씨, 이제 나가?” “네, 퇴근하세요?” 나는 같이 탄 사람들과 건성으로 인사를 하며 고민에 빠져 코끝을 긁적였다. 재영에게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역시 박유천 때문에 오늘은 못 갈 것 같다. 내일이나 가 봐야지. [지하 1층입니다] 안내 멘트에 흘깃 층수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마자 바로 근처에 주차된 유천의 미니 쿠퍼가 눈에 들어왔다. “풉!”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보닛에 커다랗게 적힌 ‘유천 오빠 사랑해요’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외에도 자잘한 글자들이 잔뜩 적혀 있다. 와이퍼에 끼워져 있는 편지며, 과자 봉투 같은 것들은 오히려 귀여운 축이다. ‘너무 멋있어요’라는 소심한 고백부터 시작해서, ‘유천아, 나랑 결혼하자!’라는 적극적인 대시까지… 나는 적혀 있는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키득거렸다. 요 사이 부쩍 알아보는 사람이 늘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극성팬이 생긴 것 같다. 근데 이거 뭐로 쓴 거야? 지워지려나? 나는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서 글자를 문질러 보았다. 안 지워진다……. 박유천, 이거 지우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쌤통이다. 나는 또 다시 키득대며 웃었다.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매직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 낙서를 하던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간 것일 터였다. 무의식중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갑자기 이 생각이 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제 용어나 범죄심리학 용어 중에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1969년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수에 의해 치안이 허술한 골목에 두 대의 자동차를 보닛을 열어놓은 채로 1주일간 방치해 두고 결과를 보는 실험이 실행되었다. 그 중 한대는 보닛만 열어놓고, 다른 한 대는 보닛을 열고, 일부러 창문을 조금 깬 상태로 놓았다. 약간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인데 1주일 후 두 차의 상태는 천양지차였다. 보닛만 열어둔 자동차는 특별히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의 유리창을 깬 상태로 놓아둔 자동차는 방치된 지 10분 만에 배터리가 없어지고 타이어도 전부 없어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낙서나 투기, 파괴가 일어났고 1주일 후에는 완전히 고철 상태가 될 정도로 파손되어 버렸다. 이처럼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일지라도 사람의 심리에 크게 작용하여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법칙인데 말이지……. …보는 사람 아무도 없지? 나는 주위를 살피며 슬며시 매직을 주워들었다. 멀리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나는 얼른 매직 뚜껑을 열고는 ‘유천’이라는 글자 아래에 말풍선을 하나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킥킥대며 말풍선 안에 ‘바’자를 써 넣을 때였다. “사랑해요는 괜찮지만, 오빠는 좀 곤란하다?” “……!” 나지막이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쓰게? 바람둥이?”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유천이 내 손에서 매직을 뺏어들었다. “…….” 온 몸의 피가 발밑으로 빠져나가 땅 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다. 이래서 죄짓고 살지 말라는 말이 있는 건가 보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여전히 보닛에 엎드려서 눈치를 보았다. 유천은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리모컨으로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미니 쿠퍼가 반갑다고 불을 깜빡깜빡 했지만 나는 여전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일어나.”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천의 서늘한 시선이 보닛의 낙서에 잠시 머물었다가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쭈뼛쭈뼛 웃어보였다. “내가 한 거 아닌데.” 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그럼 매직이 했냐?” 유천의 말에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금세 유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의 험악한 시선에 나는 서둘러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웃긴데 어쩌라고……. 유천은 매직을 흘깃 내려다보고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차에 이리저리 꽂혀 있는 편지며 과자 봉지들을 수거해서 뒷좌석에 처박았다. 그의 몸짓에 잔뜩 짜증이 묻어난다. 나는 또 다시 풉 하고 웃고 말았다. “재미도 있겠다.” 유천은 불쑥 내뱉고는 운전석에 올라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그 모습에도 괜히 웃음이 나와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는 금세라도 출발할 것 같은 유천의 표정에 서둘러 차에 오르며 급히 변명했다. “야, 진짜 내가 한 거 아냐. 솔직히 한 개는 내가 했다. 근데 다른 건 진짜 나 아냐.” 유천은 내 솔직한 고백에도 아무 대답 없이 신경질적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반응에 또 웃음이 나와서 서둘러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웃지 마라?” 이를 꾹 악문 유천의 목소리에 그가 지금 굉장히 많이 짜증스럽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쌤통이다, 이 자식아! 나 괴롭힌 벌이다! 나는 차가 출발한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숨을 억눌렀는지 모른다. 그것은 고문에 가까운 고통이었다. “그만 좀 웃으라고.” 유천이 짜증스레 내뱉으며 좌회전 깜빡이를 켰다. 그리고는 CD 바이저를 올려다보며 CD를 골라 밀어 넣는 것이 보였다. 가레스 게이츠의 Anyone of us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키득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척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집은 이쪽이 아닌데? “어디 가냐?” “병원.” “왜? 어디 아파?” “나 말고.” “나 안 아픈데?” “정신머리 아프잖아.” “뭐?” 유천의 말에 내 인상이 험하게 구겨졌다. “그럼 제 정신이냐? 서방 차에 낙서하면서 킬킬대고 있는 게?” “한 개 밖에 안 했다니까.” 좀 억울하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유천을 노려보았다. 잠시 말이 없던 유천은 좌회전 신호를 받으며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를 불쑥 내뱉었다. “넌 다친 데 없어?” “…응?”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되물었다. 그제야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실린 전형적인 병문안용 과일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금세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유천은 재영의 일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어떻게 알았어?” “…….” “어떻게 알았냐고.” “…….” “야!” 입을 꾹 다문 유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 안 먹었어. 소리 지르지 마.”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는 어이가 없었다. 아씨, 이걸 한 대 콱 쥐어박아? 나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다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제 이재영 때문에 그 난리를 쳐놓고, 지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내뱉는 유천의 말투에는 좀 많이 기분이 상한다. “이재영이 너 대신 다친 거 맞아?” 유천이 또 다시 불쑥 물어왔다. 미친 새끼, 다 알면서 뭘 묻고 그래. 나는 여전히 대답 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대답 안 할래?” “…….” “김준수.” “왜.” “이재영이 너 대신 다쳤냐고.” “말 안 해.” 유천이 나를 흘깃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유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민 씨한테 들었어. 됐지? 이제 너도 말해.” “싫어.” 개새끼, 결국 말할 거였으면 진즉에 말을 하던가. 난 벌써 제대로 마음 상했단 말이다. 유천이 또 다시 나를 흘깃 보는 것이 느껴졌다. 차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천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화를 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창밖만 내다봤다. “이재영이 너 감싸고 다친 거 맞아?” “…….” “야, 김준수.” “…….” “대답 안 해?” “…….” “이재영이 너 감싸고 다친 거 맞아?” 고집스럽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유천의 말에 나는 유천보다 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 먹었냐? 말 안 한다고.” “…….” “짜증나니까 여러 번 대답하게 하지……!” 말을 채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끼이익 소리를 내며 차가 도로 한 복판에 멈춰 섰다. 그 바람에 혀끝을 조금 깨물었다. 씨바, 졸라 아파……. “미친 새끼야, 제 정신이야?!” 나는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유천이 나를 싸늘히 응시하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지지 않고 노려봐주었다. 뒷차에서 요란한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뒷차가 뭐라 뭐라 욕을 해대며 우리 곁을 지나갔지만 우리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유천이 앞머리를 훅 불어 올리더니 비상등을 켜고 길가로 차를 댔다. 나는 또 다시 속으로 이걸 한 대 패, 말아 하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를 세운 유천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소리 나게 두드렸다. 미친놈아, 나도 짜증나거든? 나는 그의 신경질적인 태도에 코웃음을 한 번 쳐 주고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려버렸다. 문이 부서져라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는 씩씩대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유천이 서둘러 따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유천에게 팔을 잡아 채였다. 나는 싸늘히 그를 노려보며 잡힌 팔을 뿌리치고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유천에게 다시 손목이 잡혔다. “놔.” “타.” “놓으라고.” “…….” 유천이 아랫입술을 꾹 무는 것이 보였다. 그 작은 행동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저것은 뭔가를 참는 표정이다. 지금처럼 화가 났다던가, 기쁨, 눈물, 웃음 같은 것을 참아야 할 때 그는 곧잘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고3때 옥상에서 눈물을 참을 때도 꼭 저런 표정이었다. 나는 가끔 우리가 다툴 때 유천이 이렇게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나이기 때문에 참는다는 기색이 너무 역력하기 때문이다. 나는 웃음이 나는 것을 참기 위해 유천처럼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좀 전에 있었던 일은 벌써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날아가 버린 상태다. 역시 우리 싸움은 오래 못 간다.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미안해.” 한참의 기묘한 침묵이 흐른 끝에 유천이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사과에는 또 비죽이 웃음이 나왔다. 나는 또 다시 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숙였다. “얼른 타.” “싫어.” “너.” “뭐.” “자꾸 고집피우면 여기서 키스해버린다. 내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기 싫으면 얼른 타.” “풉!” 또 다시 이어진 유천의 말에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서둘러 웃음이 아닌 척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지만 머리를 부스스 흩뜨리는 유천의 손길에는 그가 이미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흘깃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천은 또 다시 입술을 꾹 물고 웃음을 참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빨리 풀리면 어떡해. 나 진짜 내일 신문에 내려고 했는데.” “미친 새끼.” 유천의 말에 피식 웃으며 퉁명스럽게 욕설을 내뱉었다. 찰칵! 순간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음이 들려왔다. 무심코 그쪽을 돌아보았으나 여고생 둘이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자.” “응.” 유천이 손목을 잡아끌기에 나는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서자마자 보이는 ‘유천 오빠 사랑해요’에는 또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천도 그것을 보더니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키득거리며 시동까지 걸린 채 버려져 있던 차로 되돌아왔다. 유천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운전석에 올라서는 내 벨트까지 손수 채워주는 친절을 보였다. 아, 진짜 이 새끼, 밖에서 다른 여자들한테 이러고 다니나 본데……. 나는 그의 친절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괜히 입맛이 썼다.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한 번 금이 간 믿음은 이런 식으로 계속 나의 심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유천이 다시 깜빡이를 켜 차선 변경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문득 주머니가 불편하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보니 작은 상자 두 개가 잡힌다. 아, 넥타이 핀! 이제야 생각났다. 나는 서둘러 상자 두 개를 꺼냈다. 벨벳 상자가 귀걸이지? 나는 유천에게 받은 귀걸이 상자를 무릎에 내려놓고 유천에게 말을 걸었다. “야.” “어.” “넥타이 핀 선물 받았는데 너 쓸래?” “네 선물인데 왜 내가 써?” “이거 승연이가 밥 사줘서 고맙다고 준 거야. 네가 돈 냈으니까 네가 산거잖아. 나는 넥타이 맬 일도 없고. 그러니까 너 가져.” “…승연 씨?” 순간 유천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아챘다. 아, 나 또 실수 한 건가……? 가만히 유천의 눈치를 보았다. 유천의 표정이 금세 싸늘해져 있다. 나는 한 번만 봐달라는 미소를 쭈뼛쭈뼛 지어보였다. “너 오늘 사고도 승연 씨 때문에 난 거라며?” “무슨! 이재영 때문에 난 거지.” 흥분해서 쇳소리가 나왔다. 이재영이라는 말에 유천의 눈이 또 가늘어진다.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나는 또 멋쩍게 웃으며 상자를 유천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열어 봐.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더라.” 신호 대기에 멈춰선 유천은 상자를 집어 들어 덮개를 열었다. 나는 유천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기대에 찬 눈초리로 표정을 살폈다. 상자를 연 유천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거 승연 씨한테 받았다고?” “응.” “언제?” “밥 먹은 다음 날.” 유천은 상자를 닫아서 다시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드나? 유천이 신호를 받아 차를 출발시키는 것을 보고 나는 유천의 무릎에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왜? 별로야?” “그냥 둬!” 유천이 다급한 목소리로 뚜껑을 여는 내 손목을 황급히 잡아챘다. 이 새끼 왜 이래? 이상하다는 느낌에 상자를 내려다 본 순간이었다. “으아앗!”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상자를 놔버렸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날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인 죽은 새였다. “스, 스, 스…….”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바닥에 굴러 떨어진 죽은 새를 가리키며 시옷 발음만 더듬거리며 반복했다. “새.” “그래, 새!”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쇳소리를 내며 따라했다. 그런데 그게 왜 여기 들어 있냐고! 유천은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변경해서 차를 길가로 몰았다. “말 덜 배웠냐? 스스스가 뭐야?” “닥쳐, 미친놈아.” “아, 저 놈의 입.” “너나 잘 해.” 유천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잔뜩 욕설을 내뱉어주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집어 들었다. 넥타이핀이 없다. “줘 봐.” 유천이 내 손에서 상자를 가져가더니 죽은 새를 다시 안에 담고 상자를 닫았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유천이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봤다. 충격이다. 22년 평생 살면서 남에게 이렇게 험한 꼴 당할 짓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어디에 뒀었어?” “캐비닛.” “자물쇠 바꿔.” “응.” “내일 가서 없어진 거 있나 확인해 보고.” “응.” 멍하니 건성으로 대답하던 나는 그제야 유천에게 받은 귀걸이 상자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이 안에도……? 왠지 불안하다. 나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나를 보고 있던 유천도 조금 긴장한 표정이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귀걸이는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이 상자도 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걸이 아래 끼워져 있던 유천의 메모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씨바,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잡히면 어쩌게?” “그 새 구워서 먹여버릴 거야.” “괴롭힐 생각이면 그냥 먹이는 게 나을 텐데?” 그러네? “…그래, 그럼 그냥 먹일 거야.” 유천이 쿡쿡 웃으며 내 손에서 상자를 가져갔다. “귀 대 봐.” 나는 유천의 말에 왼쪽 귀를 대주었다. 유천은 조심스레 귀걸이를 빼내고는 새 귀걸이를 끼워 넣었다. 귀걸이가 쑥 들어가는 느낌이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선명하게 느껴져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전에 것보다 약간 더 긴 십자가가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룸미러를 내 쪽으로 틀어 귀를 비춰보았다. 귀를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화이트 골드의 귀걸이가 새하얗게 반짝이며 달랑이는 것이 보였다. 전에 것보다 멋진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머리 손질해야겠다. 많이 길었네. “준수.” “응?” 유천이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유천이 뒷목을 덥석 잡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밀어냈지만 유천은 오히려 더 힘을 주어 목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금세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너무 당황하여 하지 말라는 의미로 유천의 등을 두어 번 내리쳤다. 그때였다. 으드득 하고 살 뚫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읏……!” 연이어 오른쪽 귓불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에 유천의 입술 위로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미친 새끼, 또 시작이야! 눈물이 찔끔 났다. 어찌나 아픈지 있는 힘을 다 해 유천을 밀어냈다. 오른쪽 귀가 심장 박동을 따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오른쪽 귀를 싸쥐고 고통을 참기 위해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유천이 쿡쿡 웃으며 머리를 부스스 흩뜨리는 것이 느껴져 신경질적으로 손을 쳐냈다. “씨발, 존나 아파…….” 욕설이 섞인 내 불평에 유천은 나지막이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야.” “어.” “넌 나 괴롭히는 게 즐겁지?” “어떻게 알았어?” “변태 새끼…….” 유천은 내 욕설에도 쿡쿡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태평스러운 대답에 울컥 화가 치밀어 운전대를 잡고 있느라 비어있는 그의 옆구리에 잔뜩 감정을 실은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유천은 윽, 하는 짧은 비명을 뱉어내며 몸을 흠칫 움츠렸다. “야, 씨, 운전 중이잖아.” 나를 흘깃 노려보는 유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여 주었다. 너도 생살 한 번 뚫려 봐. 나니까 참지, 네가 당했으면 아마 날 죽이려고 했을 걸? “아, 진짜 저걸…….” 유천의 탄식에 나는 피식 비웃음을 날려주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보다 고통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심장이 뛰는 것에 맞춰 귀가 욱신거렸다. 덕분에 죽은 새를 처음 봤을 때보다는 좀 놀란 마음이 진정된 것 같긴 하다. 그리고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있을 때 유천이 또 불쑥 말을 걸어왔다. “준수야.” “뭐.” 욱신거리는 귀의 통증으로 잔뜩 신경이 곤두선 나는 유천의 부름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기 쓰레기통 보이지?” 유천이 가리킨 앞쪽에는 과연 커다란 쓰레기통이 자리하고 있다. “뭐? 어쩌라고? 갖고 싶어? 취향 특이하네.” “내기할까? 한 번에 들어가면 너 갖고 싶다던 버버리 목도리 사 준다.” 죽은 새가 든 상자를 건네는 유천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제야 나는 유천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충격을 받았을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충격을 고통으로 희석시키고, 장난으로 잊게 하려는 것이다. 박유천은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성격이 까칠해서 나와 다투기도 많이 하지만 역시 기본적으로는 다정한 사람인 것이다. 그가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덕에 나는 가끔 이렇게 그의 다정함을 잊고 산다. “못 넣으면 버버리 지갑 사주기.” “Deal." 그의 명쾌한 본토 발음에 나는 씨익 웃으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넣어도 박유천이 내게 목도리를 사주고, 못 넣어도 지갑을 사줘야 하다니, 웬 바보 같은 대화인가 싶겠지만……. 버버리 따위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박유천의 마음만 내게 있어 준다면. 무엇보다 나는 버버리 따위는 아직 어울리지 않는 22살 새파란 청춘인 것이다. “박 기사, 출발해!” 나는 신호가 바뀌자 창문을 한껏 열고는 소리를 높여 외쳤다. 유천은 액셀을 순간적으로 꾹 밟으며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머리카락이 싸늘한 겨울바람에 폭풍처럼 휘날렸다. 나는 창밖으로 팔을 내밀어 거리를 가늠하다가 미니 쿠퍼가 쓰레기통 옆을 스쳐 지나는 순간 슬쩍 상자를 던져 넣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는 정확히 쓰레기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예스!” 나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성공을 자축했다. “나이스 샷." 유천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나는 짝 소리가 나도록 그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잊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야, 나 목도리 말고 블루피쉬하우스 치즈 케이크 사줘.” 유천은 나를 흘깃 보더니 피식 웃었다. “둘 다 사줄게.” 자식, 눈치도 빨라. 나는 비죽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남빛 벨벳 카펫처럼 펼쳐진 겨울의 밤하늘은 꼭 지금의 우리 사이처럼 청량하고 상쾌했다. 나는 결국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러분, 이렇게 저희 사랑은 아직 건재합니다. + 도중에 몇 번이나 멈춰 섰는지 기억도 안 나도록 우여곡절이 많았던 드라이브였다. 우리는 겨우 병원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유천은 한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좋다. 유천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잘 안다. 재영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가끔 박유천은 이렇게 귀엽다. 나는 바로 곁에 선 그의 섬세한 옆선을 곁눈질하며 피식 웃었다. “좋지?” “뭐가?” “서방님 잘 생겨서.” 또 어떻게 알았는지 저딴 소리를 해 온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귀신같다니까. 그래서 나는 박유천 앞에서 거짓말을 못한다. 열이면 열, 다 들통 나기 때문이다. “너는 그거 병이야. 정신과 좀 가 봐.” 자기가 잘난 걸 너무 잘 아는 박유천이기에 나는 일부러 그에게 이렇게 군다. 게다가 이런 말장난 같은 왕자병은 내 앞에서만 발병하기 때문에 묘하게 기분이 좋기까지 하다. 고등학생 때의 유천은 내 친구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두루 인기가 있었다. 늘 학교 앞에는 그를 보러 원정 오는 여학생들이 가득했고, 귀공자 같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서글서글하고 편한 그의 성격은 지위 고하, 연령과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그에게 호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구석도 있었다. 그것은 유천만의 독특한 존재감을 만들어 냈다. 친절하고 편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 동급생이지만 뭔가 정신연령의 차원이 다른 존재. 물론, 나에게만은 예외였다. 우리는 친구 사이이긴 했지만 그때도 뭔가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박유천이 다른 친구들한테 하는 것과 나를 대하는 것이 티 나게 차이가 났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녀석들한테는 마냥 좋은 사람이던 박유천은 내 앞에서는 대체로 짓궂은 꼬맹이 같았다. 마치 초등학생 때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악동 같은 느낌? 그렇게 나를 놀려 대고 장난을 치다가 내가 분을 못 이겨 씩씩대면 형처럼 달래주는 것이다. 병 주고, 약 주고. 박유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어릴 때의 나는 유천에게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하긴 그를 처음 만난 중3 때는 키가 10센티나 차이가 났으니까 그랬을 만도 하다. 나는 어릴 때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서 다른 녀석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입에 욕설을 달고 살았다. 덕분에 성격도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졌다. 유천은 그런 나에게 계속해서 짓궂은 장난을 걸어 왔다. 한 성격했던 나는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대들며 투닥거렸다. 징글징글한 인연 덕에 고2 때 빼고는 늘 같은 반이었고, 항상 짝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매 순간이 그런 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때도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우월감. 유천의 다른 친구들 앞에서 그와 초딩 같은 말싸움을 해대며 어깨가 으쓱해지는 묘한 특권 의식……. 그러나 그가 갑자기 어른 모드로 들어가 버리면 아무리 나라도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른 모드의 그는 나에게도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없이 어린애들처럼 투닥거리다가도 유천이 정색을 하면 나는 찔끔해버리는 것이다. …박유천은 나를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역시 조금 짜증난다. [9층입니다]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유천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유천은 성큼성큼 걸어서 어딘가로 향했다. “아, 저기다.”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갑자기 긴장감이 되살아났다. 지금 우리는 이재영에게 가는 것이다. 어제 박유천의 이성을 잃게 했던 바로 그 사람. 그것도 박유천과 함께라니……. 나는 괜히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유천이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갑자기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재영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 앞에 서 있었다. 환자복 안으로 목덜미까지 칭칭 감긴 붕대가 보였다.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데도 그는 얇은 환자복 하나만 입고 담배를 물고 있었다. 병원은 금연인데, 저 사람도 어지간히 골초인가보다. “좀 괜찮으세요?” “그럭저럭.”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피곤해서 그렇겠지.”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는 유천이나 재영 모두 사근사근한 말투는 아니었다. 유천이 손을 꾹 쥐어오기에 바라보았더니 빨리 고맙다는 말을 하라는 눈빛이다. 그제야 나는 이재영이 나를 감싸다 다쳤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저기… 오늘 감사합니다.” 재영이 담배연기를 길게 토해내며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천천히 유천과 맞잡고 있는 내 손으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다. 재영은 피식 웃더니 창틀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창문을 닫았다. “고마우면 갚아.” 뭐래?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나? 자기가 나서서 다치고서 왜 나한테 갚으래? 수많은 불평들이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나는 그냥 눈만 깜빡였다. “앉아. 왜 그러고 있어?” 그의 불친절한 말이 들려왔다. 그제야 유천이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천의 과일 바구니가 아니라도 이미 병실은 여기저기서 도착한 선물과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왜 아무도 없어요?” “매니저 잠깐 집에 갔어.” “부모님은요?” “전부 미국.” “아…….”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박유천은 입원하면 내가 있지만, 재영은 아마 친구도 없을 것이다. 성격도 더러운 데다가, 오랜 연예계 생활로 인해 연락이 닿지 않을 테니. 갑자기 그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나보다 연상이라고 해도 그는 기껏해야 20대 중후반, 아직은 친구들이나 부모님이 그리울 나이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혼자서는 못 살아간다던데, 그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서도 혼자 쓸쓸히 병실에서 담배나 물고 있어야 한다니. 톱스타라는 건 원래 이렇게 외로운 건가? 문득 그의 삶에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아무리 병실이 좋아 봤자 소용없다.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서러워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상처는 좀 어때요? 많이 다치셨어요?” “내일 신문 봐. 기자들 잔뜩 다녀갔으니까.” 꼭 말을 저따위로 한다니까. “오래 입원하셔야 한대요?” “아니, 바로 퇴원해도 되는데 내가 쉬고 싶어서. 핑계대고 한 이틀 놀려고.” 저 말 본사에 찔러버릴까 보다. “오늘 일 감사합니다.” “박유천 씨가 왜 고마워? 그런 말은 저기 저 꼬맹이가 해야지.” 좀 전에 고맙다고 했잖아, 그리고 꼬맹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왜 유천이는 박유천 씨고 나는 꼬맹이야? 나는 속으로 그의 말에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으며 기분 나쁜 눈초리로 그를 쏘아봐 주었다. 재영은 그런 나의 시선을 비릿한 비웃음으로 받아쳤다. 재수 없어……. “냉장고에 뭔가 잔뜩 있는 것 같던데 꺼내 먹던가.” “네, 식사는 하셨어요?” “별로 생각 없어.” “과일이라도 좀 드실래요?” “됐어.” 유천과 재영의 별 의미 없는 대화가 몇 차례 오갔다. 그때 유천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전화 좀.” “어.” 재영은 리모컨을 꾹 눌러 TV를 켜며 무심히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전화를 꺼내들며 재영에게 깍듯이 양해를 구하는 유천의 태도에 좀 놀라는 중이었다. 그 사소한 행동에도 그가 얼마나 지금 하고 있는 모델 일을 제대로 하려고 노력하는지가 묻어나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이재영이 재수 없고 유천의 신경을 긁는 사람이라지만, 일단은 선배에 상사인 것이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건가? 왠지… 멋지다. 박유천이나 나나 이제 3학년이 되는 대학생이라 도서관에 처박혀 있거나, 친구들과 술이나 마셔대면서, 서로 놀리고 빈정대던 모습만 봐왔던 터라 지금 보는 유천의 모습은 너무 새롭다. 저게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의 모습이라는 건가……?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뭐야, 나도 사회생활 하는데 난 왜 안 멋있지? - 박유천?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왔다. 명희 씨다. 나는 가만히 유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귀를 쫑긋 세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어, 왜? 출국 아직 안 했냐?” - 너 혹시 휴학 했니? “…학교는 왜?” 휴학……?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천을 바라보았다. 유천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나를 조금 밀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 너 조만간 집에서 호출 있을 거 같다. “왜?” - 나 어제 출국이었는데 집에 잡혀 있어. 박 회장님이 나를 좀 보자고 하셨대. “…….” 순간 유천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병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지금 나올 수 있어?” 문이 닫히기 직전에 들려온 유천의 한 마디에는 좀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리 우리를 도와준 명희 씨지만 저렇게 비밀스럽게 통화를 하고, 심지어 만나서까지 할 말이 뭐가 있단 말인가? “여자 만난다는데?” 재영이 웃음 섞인 목소리에 잔뜩 인상이 구겨졌다. 박유천도 그렇고 이재영도 그렇고, 내 주위에는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인간들이 많아? 울컥 짜증이 났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뭐요?” “박유천이 다른 여자 만난다는데 아무렇지 않아?” “아는 사람이에요. 유천이 친구.” “여자 친구겠지.” 어쩌면 이 사람은 나랑 반응이 똑같을까? 나도 전에 유천에게 친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렇게 말했는데. “그냥 친구요.” “장난 하냐?” “장난 아닌데요.” “남자 여자 사이에 그냥 친구가 어디 있어? 박유천은 딱히 게이도 아니라며?” “유천이는 있어요, 그냥 친구.” “너도 있어?” “…….” 말문이 막혔다. 나는 아는 여자 자체가 별로 없다. 재영은 내 반응에 피식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는 그의 미소는 언제 봐도 비웃음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 “그 때 그 얘기는 했고?” “무슨 얘기요?” “비상계단.” “…….” 제길, 잊고 있었다. 굳이 되살려 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 안 했어?” “…….” “말하기 곤란하거나 정곡을 찔리면 주로 입을 다무는군.” “…….” “너 참 세상 살기 힘들겠다. 반응이 너무 솔직하잖아.” “남의 세상살이까지 신경 안 써 주셔도 되는데요.” “이제부터 나랑 얽힐 거니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서 말이야.” 뭔 소리야, 이건? 나는 말을 얼른 못 알아듣고 잠시 단어를 되새김질 했다. ‘이제부터 나랑 얽힐 거’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들었잖아.” 나는 일어나서 유천이 내려놓은 바구니 옆으로 다가갔다. 계속 듣고 있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대화를 끊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뭐 드실래요?” “생각 없어.” “그럼 제가 먹을게요.” 나는 제일 만만한 사과를 골랐다. 몇 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두리번거렸더니 냉장고 위에 과도가 보였다. 과도와 쟁반을 챙겨 들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였다. 재영이 내 손목을 잡아서는 확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왜요?!” “여기서 해.” 저기, 이재영 씨. 나 애인이랑 같이 왔고, 질투에 눈이 멀면 살 떨리게 무서운 그 애인님이 바로 저 문밖에 있다고. 이러고 있다가 걸리면 당신이나 나나 여기서 바로 영안실 직행이야. 알아들어?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자리를 옮기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그에게 손목이 잡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진짜 이 사람이 근데……! “좀 놓으라고요.” 또 다시 짜증스럽게 말하며 손을 뿌리친 순간이었다. 재영이 앗,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며 볼을 감싸 쥐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재영이 손을 천천히 떼어내자 그의 볼에 선명하게 난 상처가 보였다. 과도에 긁힌 모양이었다. “어, 저기, 괘, 괜찮아요?” “안 괜찮아.” 재영은 말을 툭 내뱉으며 내 손에서 과도를 가져가더니 얼굴을 비춰보았다. 금세 핏방울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당황해서 티슈를 가지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재영에게 손목을 잡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재영은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바짝 당겨 안더니 또 다시 과도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코앞에서 칼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것도 성질 더러운 이재영의 손에 들린 칼이라니. 설마, 열 받는다고 찌르거나 긋지는 않겠지만 난 칼이 무섭단 말이다. 나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재영에게 안겨 눈치를 보았다. “야.” 한참이나 과도에 상처를 비춰보며 나를 겁먹게 한 재영이 나지막이 불러왔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너 혹시 내 몸값 아냐?” “아, 아뇨.” “이 기회에 알아둬. 오늘 찍은 그거 20억짜리야.” 20억……. 언뜻 감도 안 오는 숫자다. 내 연봉의 몇 배야 도대체. “너 지금 20억짜리에 흠집 낸 거야.” “…죄송합니다.” “여기 붕대 감긴 거 보여? 이것도 너 때문에 다친 거잖아. 총 37바늘 꿰맸어.” “…죄송합니다.” 그건 내가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쩔 거야?” “네?” “20억짜리에 흠집 냈는데 이제 어쩔 거냐고.” 뭘 어쩌라는 건지? 나는 재영의 말에 눈만 깜빡였다. 재영이 그런 나를 보며 쿡쿡 웃었다. 그의 호흡이 얼굴에 와서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뭔가 좀 난감한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흘깃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는 여태 안 들어오고 뭐하는 거야 진짜. “야.” “네?” 그의 목소리에 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가까워진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외국인처럼 색소가 옅은 갈색의 신비로운 눈동자……. 가까이에서는 처음 본다.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거나 했기 때문에. 그의 갈색 눈동자에 선명하게 나의 겁먹은 표정이 비추고 있었다. “왜, 왜요?” 더듬는 내 말에 재영이 피식 웃었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짓궂은 미소에 그제야 나는 그가 뭘 할 생각인지 깨달았다. 불길한 느낌에 머리카락이 전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재영의 눈동자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하, 하지 마요.” “뭔 줄 알고?” 재영은 짓궂게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리고 조금 더 입술이 가까워졌다. 나는 서둘러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재영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윽, 하는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내가 손을 댔던 곳의 환자복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상처가 터진 것 같아서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말았다. “나 건드리지 마. 보다시피 많이 다쳤거든.” 설상가상이다, 제길. 손도 못 대고, 피하지도 못하면 나더러 어쩌라고? “아까 고맙다며? 지금 갚아.” 어이없다. 그의 짓궂은 미소에 또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지금 굉장히 비겁한 거 알아요?” “어쩔 수 없어. 넌 내 말이 계속 장난 같잖아. 나 진심이야. 너 갖고 싶어.” 재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또 그의 상처를 건드릴까봐 밀어내지도 못하고 또 다시 애타는 눈으로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박유천 이 새끼, 도대체 어디 갔냐고!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실 문은 꿈쩍도 안 했다. 그리고 재영이 쿡쿡 웃으며 내 턱을 잡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또 다시 그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눈 감아.” “싫어요.” 그의 말에도 나는 고집스럽게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가 행할 일이 내 자의가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어필하는 중이었다. 재영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고개를 돌려 피하자 턱을 잡아 고정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버텼다. 그가 내 어깨를 힘주어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읏……!” 어깨에 가해지는 고통에 나는 결국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재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영의 말캉한 혀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느낌에 몸에 힘을 꽉 주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재영의 혀가 치열을 가만히 훑고, 혀가 더 깊이 파고들어왔다. 박유천처럼 능숙한 키스임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러운 그의 몸짓에 조금 웃어 버렸다. 입맞춤이라는 것은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아니, 사람의 체온이라는 것이 힘을 갖고 있는 것일까? 왠지 그의 심술궂은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아마도 외로운 것이다. 선물과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쓸쓸한 병실. 그것은 그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나를 안고 헤어진 연인에게 하듯 키스를 퍼붓고 있는 그가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을 때였다. 달칵!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나는 서둘러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또 상처를 건드릴까봐 힘주어 밀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박유천에게 이 장면을 걸리면 나는 최소한 사망이란 말이다! 식은땀이 버쩍 났다. 너무 당황하여 정신이 다 아득해질 즈음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재영의 입술이 멀어졌다. 나는 황급히 병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유천이 들어서다가 나란히 앉아있는 우리를 보고 멈칫 하는 것이 보였다. 재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또 다시 과도에 자신의 상처를 비춰보고 있었다. 유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또 다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뭐하냐, 꼬맹이. 빨리 휴지라도 가져 와.” “네?” 재영의 목소리에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의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가 눈에 들어왔다. “아, 네. 죄, 죄송합니다.” 나는 마구 말을 더듬으며 벌떡 일어나서 티슈를 몇 장 뽑아 그에게 내밀었다. “왜 그래?” “유천아. 내가, 상처…….” 유천이 다가와서 묻는 말에는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재영의 얼굴에 난 상처와 피에 물든 환자복을 보고 유천이 당황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간호사 불러 올게요.” “그래 주면 고맙고.” 유천이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그제야 나는 안도와 불안 등의 복잡한 의미가 담긴 한숨을 토해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등 뒤에서 나지막이 재영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컥 짜증이 치솟아 나는 매섭게 그를 노려봐 주었다. 이건 마치 이재영이랑 바람이라도 피운 상황 같다. 아 진짜, 저 인간은 박유천네 이사라서 패 줄 수도 없고. “박유천이 그렇게 무서워?” “…….” “걸려서 혼나면 나한테 오라니까?” 하여튼 말하는 거 하곤. 쿡쿡 웃는 재영을 또 다시 매섭게 노려봐주고는 나는 이마에 배어나온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박유천에게 걸리면 안 될 일이 또 하나 늘어버렸다. 어쩌지……. + 재영은 다시 치료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괜찮다는 재영의 말에도 유천은 나를 대신해서 몇 번이나 사과했고,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한 마디도 못 하고 그저 불안하게 곁에 서 있어야 했다. 매니저가 도착한 후 병실을 나왔을 때는 죄책감에 유천을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동요를 들킬 것 같은 기분에 괜히 텅 빈 엘리베이터를 탓하며 유천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섰다. 유천이 내 손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기며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 무슨 일이야?” “응?” “얼굴에 상처.” “아… 그게… 내가 사과 깎다가 잘못해서…….” “그래?” “응.” 거짓말을 하려니 자연스레 말끝을 흐리게 된다. 그것을 깨닫고는 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줄어드는 숫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옆얼굴에 흘깃 유천의 시선이 와서 꽂혔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식은땀이 난다.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느린 거야. [지하 1층입니다] “내리자.” 나는 서둘러 열리는 문을 비집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두리번거리며 미니 쿠퍼를 찾고 있으려니 뒤쪽에서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인데?” 유천의 말에 돌아보니 그제야 보닛에 커다랗게 ‘유천 오빠 사랑해요’가 적힌 미니 쿠퍼가 눈에 들어왔다. “아, 거기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유천에게 되돌아갔다. 유천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며 차에 올랐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니 되돌릴 수도 없다. 서둘러 없었던 일인 듯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마치 내가 유천의 비상계단 사건을 지우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데 유천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순간 흠칫해서 어깨를 움츠리고 보니, 유천의 손이 내 쪽의 벨트를 잡고 있다. 아, 나 벨트도 안 매고 있었구나. 나를 의아하게 보고 있는 유천에게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때 유천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 왜!” 나는 맞은 부분을 문지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정신 차려. 왜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어. 많이 놀랐냐?”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아니라고.” “걱정 마. 의사도 살짝 긁힌 거라 흉터 안 남는다고 했잖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손해배상 들어오면 너더러 내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정신 좀 챙겨.” …20억이라던데? 나는 또 흘깃 유천의 눈치를 봤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괜히 유천에게 미안해진다. 이렇게 괜찮은 녀석을 애인으로 두고, 나는 이재영 따위한테 키스나 당하고 말이지. “오늘 좀 늦게 들어가도 돼?”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유천이 불쑥 물어왔다. “왜?” “드라이브 가자.” “어디?” “가평.” “나 배고픈데.” “크레페 사줄게.” “밀키웨이?” “어.” 밀키웨이의 크레페를 사준다는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아무래도 바보인가 보다. 아니면, 재영의 말처럼 단순함의 극치이던가. “…두 개.” “딸기랑 치즈?” 유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고 말았다. 박유천은 내가 좋아하는 걸 잘도 안다. 블루피쉬하우스도 그렇고, 밀키웨이도 그렇고, 전부다 유천이 알려준 가게들이다. 그냥 평범하고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남자인 나는 저런 여자친구와 함께 가야할 것 같은 간질간질한 곳은 박유천이 아니면 평생 가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박유천은 여자친구들이랑 많이 다녀본 거다. 왜 생각이 그렇게 확장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박유천이 왜 이렇게 오늘 풀 서비스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면 더 미안해지는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천은 익숙한 솜씨로 차를 몰아 밀키웨이로 향했다. 유천이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서둘러 크레페와 커피를 사들고 차로 돌아왔다. 커피를 컵꽂이에 고정하고, 딸기가 들어간 크레페부터 덥썩 물었다. “아-.” 빨리 다녀와야 한다며 바로 차를 출발시키는 유천에게 먹던 딸기 크레페를 불쑥 내밀었더니 군 말 없이 한입 베어 문다. 음식 하나를 같이 먹던 건 친구일 때도 많이 하던 거였는데 왠지 감회가 새롭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유천이 베어 문 딸기 크레페를 입에 밀어 넣었다. 마음 한 구석이 간질간질하고 몽글거린다. 우리는, 박유천이랑 나는 진짜 연애라는 걸 하고 있나 보다. “기름 넣어야 되는데.” 유천의 말에 게이지를 확인하니 정말 불이 들어와 있다. 가다가 넣으면 되지 라고 중얼거리며 유천의 손에 들린 키위 크레페를 뺏어 한 입 먹어 보았다. 어라, 이거 맛있는데. “야, 네가 이거 먹어. 나 그거 먹을래.” 나는 내 치즈 크레페를 내밀며 유천에게 교환을 요구했다. “그거 못 먹어. 운전하잖아.” 듣고 보니 그렇다. 치즈 크레페는 작은 종이 접시에 담겨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어서 포크로 잘라 먹어야 한다. 옷에 소스 흘리면 날 죽이려고 할 테니 내가 먹여줄 수도 없고. 별로 튀지 않는 단순하고 수수한 디자인이지만, 유천이 입고 다니는 옷들은 전부 드라이클리닝이 필요한 고가의 브랜드 제품이란 말이다. “바꿔. 내가 운전할게.” 끝끝내 고집을 피우자, 유천은 알았다며 길가에 차를 댔다. 나는 치즈 크레페 접시를 대시 보드에 올려놓고 종종걸음을 쳐 운전석으로 옮겨 탔다. “경춘가도 길 알지?” “응.” 아마도? “모르면 네비 켜고 가.” “안다고, 새끼야.” “가다가 주유소 있으면 들어가고.” “알았다니까.” OK, 가다가 주유소. 나는 입에 키위 크레페를 물고 차를 출발시켰다. 퇴근시간이 지난 도로는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한산해졌다. 입 안에 감도는 생크림 맛과 달착지근한 키위 맛을 즐기며 조금 속력을 내서 서울을 빠져나왔다. 점점 주위에 불빛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유천이 마지막 남은 치즈 크레페 조각을 입에 넣어주며 말을 걸어왔다. “신청곡.” “신나는 거!” “본 조비 어때?” “콜!” 유천이 CD 하나를 밀어 넣자 이내 One Wild Night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차 안에 강렬한 락 사운드가 가득 찼다. 뭐야, 박유천. 지금 나보고 달리라는 거야? 이런 걸 들으면 안 밟을 수가 없잖아! 우리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렴구가 시작되기 직전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씨익 웃었다. 아는 노래지? 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One wild night (blinded by the moonlight) 뜨거운 밤!! (달빛에 난 눈이 멀 것 같아!) One wild night (24 hours of midnight) 뜨거운 밤!! (24시간 계속되는 이 밤!) One wild night (I stepped into the twilight zone And she left my heart with vertigo) 난 황혼이 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어지러움만을 남긴 채 그녀는 떠나버렸지 One wild night (hey, c'est la vie) 뜨거운 밤! (hey, 이게 인생이야) One wild night (welcome to the party) 뜨거운 밤!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One wild night (life is for the living so You gotta live it up, come on let's go) 뜨거운 밤! (살기위해 사는 것. 이게 진짜 사는 거라니까! 어이, 이리와! 즐기자!) One wild, one wild, one wild, one wild night 뜨거운, 뜨거운, 뜨거운, 뜨거운 밤 One wild night! 우리는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액셀을 밟은 오른발에 힘이 들어갔다. 은회색 미니 쿠퍼는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 빼면 지극히 평범한 22살의 청춘들을 싣고 어둑어둑한 산길을 가르며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우리가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온 것에 대해 감사했다. 너무 편해서 탈이기도 하지만, 낯설어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다른 내숭 떠는 연인들보다는 이게 편하다. 일단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이기 때문에 만일 지금 여자를 사귀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면 머릿속이 창백해진다. 정말 우습게도, 여자친구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그냥 박유천한테 잡혀 사는 게 편할 것 같다. 친구인 듯, 연인인 듯, 미묘한 경계. 뭐, 박유천만 변하지 않으면 우린 이렇게 계속 지내는 건가? 문득 호호 할아버지가 된 박유천을 생각하고는 풉 하고 웃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차의 속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라? 하고 오일 게이지를 확인한 순간 주유소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식은땀이 났다. 그렇게 자신 있게 유천에게 큰 소리를 쳤는데. 나는 잔뜩 표정이 굳은 채 차를 갓길로 몰았다. 결국 미니 쿠퍼는 한쪽 길가에 멈춰 섰다. “기름 없지?” “…응.” “주유소 들르랬잖아.” “…미안.” 유천의 말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러게 누가 그런 음악 걸어주래. 나는 속으로만 툴툴대며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유천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기름 떨어질 때까지 달리면 금세 차 못 쓰게 된다던데……. 유천이 화가 났나 싶어 흘깃 곁눈질했다. 유천은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죽여 웃고 있었다. 어깨 들썩이는 거 다 보인다, 새끼야. 괜히 쫄았다.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보험 불러야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유천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금세 내 얼굴도 환해졌다. 내 차가 아니니 이런 일을 당해 봤어야지. 유천은 핸드폰을 꺼내들어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위치를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에서 내렸다. 깜깜한 산 속, 가로등만이 띄엄띄엄 켜져 있을 뿐, 지나다니는 차도 없이 조용한 숲길. 별이 많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기 중에 하얗게 입김이 부서졌다. 불쑥 이런저런 것들이 떠올랐다. 비상계단, 죽은 새, 이재영, 그리고 좀 전에 걸려왔던 명희 씨의 전화……. 복잡하다. 왜 이렇게 유천과 나의 사랑은 방해물이 많은지. 등 뒤에서 탕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천이 담배를 꺼내 물며 다가오고 있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심플한 은색 듀퐁 라이터에서 주홍빛 불꽃이 타올랐다. 언젠가 동아리 형이 저 라이터를 보고 굉장히 탐냈던 기억이 난다. ‘듀퐁’이라는 브랜드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비흡연자라 잘 모르지만 분명 굉장히 비싼 물건일 것이다. 손에 와서 닿는 느낌이 그렇고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 나는 소리도 심상치 않다. “3, 40분 정도 걸린대.” “담배 끊는다며.” “한 번만 봐줘.” 유천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 번만 봐 달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안 추워?” “응.” “나는 추운데.” “어쩌라고.” “이럴 땐 옷을 벗어주는 게 남자의 매너 아니겠냐?” “미친놈.” 서방님이랄 때는 언제고 옷 벗어 달래. 유천이 내 어깨를 더 당겨 안으며 쿡쿡 웃었다. 나는 손을 들어 유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꼬맹아 나 춥다니까, 어쩌라고, 진짜 옷 안 벗어 줄 거야? 내가 미쳤냐? 나쁜 새끼 서방님 얼어 죽겠다는데, 서방님 좋아한다…….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서서 하늘을 보며 키득거렸다. 북극성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유천이 피우는 담배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불가리 블랙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유천이 나를 흘깃 보더니 가볍게 키스했다. 나는 ‘담배냄새 나’ 라고 중얼거리며 유천의 허리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유천은 그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으며 쿡쿡 웃었다. 와씨, 너무 좋아……. 나는 진심으로 유천을 이대로 납치해서 산 속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굳이 원인을 찾아보자면 우리 둘 다 장난기가 많다는 공통점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적이 드문 캄캄한 산 속에서 말이다. 도로를 따라 켜져 있는 가로등이 아니면 조금만 길에서 벗어나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숲속에서 숨바꼭질이라니. 미친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연인과 둘이 있을 땐 뭐든 다 재미있고, 별의 별 유치한 짓을 다 하는 법이다. 처음엔 내가 술래였다. 천천히 50까지 세고는 유천이 숨은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못 찾겠다 꾀꼬리’를 크게 외쳐 주었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하고 킥킥대고 있었는데 유천은 그럴 줄 알았다며 차 뒷좌석에서 나타났다. 제길, 역시 박유천은 한 수 위다. 그 다음은 박유천이 술래였다. 등을 돌리고 큰 소리로 숫자를 세고 있는 유천을 보며 좀 웃다가는 조심스럽게 숲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어서 나를 찾으러 나설 유천을 보며 숨죽여 웃고 있었다. 하지만 유천은 또 다시 담배를 피워 물더니 그것을 다 피울 때까지 나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결국 어둠 속에서 추위에 덜덜 떨던 나는 스스로 유천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고, 박유천은 ‘거기, 찾았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나를 비웃었다. 아씨, 재수 없어……. 그래서 다시 내가 술래가 되었다. 나는 유천에게 꼭 숨으라고 철석같은 약속을 받아낸 뒤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너도 어디 추운데 떨어봐라. 나는 가능하면 천천히 숫자를 세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박유천, 비상계단 사건의 복수다. 내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50!” 나는 숫자를 다 세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미니 쿠퍼와 나, 가로등만이 외롭게 서 있었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어두운 숲을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싸늘한 밤공기에 입김이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박유천은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 분명히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숨어버릴 것이다.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접근해야 잡을 수 있다. 나는 조용히 숲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마른 잎사귀가 부서졌다. 한겨울이라 숲은 건조하고 삭막하게 메말라 있었다. 풀벌레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어두운 숲 속……. 숲으로 조금 더 들어간 나는 좀 무서운 생각이 들어 불빛이 있는 도로를 되돌아보았다. 가로등 아래 시동이 꺼진 채 서 있는 미니 쿠퍼가 꼭 죽어버린 딱정벌레처럼 보였다. 문득 운전자도 없는 차에 갑자기 시동이 걸리고 저 혼자 스르륵 움직여서 가 버리는 장면이 떠올라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등을 돌렸다. 빨리 박유천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숲으로 몇 걸음, 발을 옮겼을 때였다. 어디선가 푸드득 하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아 하며 바람이 숲을 쓸고 지나가자 서걱거리며 마른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서 많이 벗어난 터라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광원(光源)을 만들어냈다. 파르스름한 빛이 주위를 조금 밝혔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유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다시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미니 쿠퍼를 돌아보았다. 설마 저 차 그냥 떠나버리는 건 아니겠지……? 또 다시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입술을 혀로 축이며 유천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유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 새끼는 어디에 숨은 거야? 조금 겁에 질린 채 투덜거리며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순간 어딘가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소리 난 쪽을 돌아보았다. 조심스레 핸드폰 불빛으로 비춰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또 다시 푸드득 하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뱉어내는 하얀 입김마저도 의지를 가진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입김들이 어딘가에서 모여서 인간의 형체를 이루는 건 아닐까……? 스물스물 안개처럼 뭉쳐진 환영이 떠올라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유천아?” 대답이 없다. “박유천? 어디 있어?” 사위는 조용했다. “…….” 갑자기 예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졸다가 깨보니 교실은 텅 비어 있다. 시간은 고작 오후 1시. 점심시간이 막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었어야 할 시간이다. 의아한 생각에 교실을 나선 주인공 앞에 기가 막힌 장면에 눈에 들어온다. 다른 교실도 모두 비어 있는 것이다. 교무실로 내려가자 텅 빈 교무실 안에 막 누가 타 놓은 듯 김이 오르는 커피 잔이 놓여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주인공이 가방을 들고 학교 밖으로 나오자 더 엄청난 광경이 벌어져 있다. 도로에는 조금 전까지도 움직이고 있었음이 분명한 차들이 시동이 걸린 채 멈춰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운전자는 어디에도 없다. 시동이 걸린 시내버스 안에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거리도 텅 비어 있고, 조금 전까지도 장사를 하고 있었을 학교 앞 떡볶이 포장마차 안에서는 어묵과 떡볶이가 김이 오르며 끓고 있다. 아무도 없다. 동물 병원 유리창 너머에서 꼬리를 흔들던 시츄도, 그 많던 비둘기도, 아무 것도…….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주인공 하나뿐이다. 주인공은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끼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유천아!” 나는 소리 높여 유천을 불렀다. “박유천! 못 찾겠어! 나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외쳤다. 쏴아아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갔다. 바싹 말라버린 입술이 느껴졌다.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면 어둠이 덮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숲은 대자연의 모체답게 인간의 무력함을 비웃으며, 어둠 속에서 흉포하고 잔혹한 손톱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하지만 대자연의 잔혹한 미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박유천이 없다. 그가 없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술이 덜덜 떨리고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박유천, 어디 있어…….” 힘없이 중얼거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목을 덥썩 끌어안았다. “으아아앗!”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붙잡은 뭔가를 떨쳐내기 위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준수야, 나야!” 내 어깨를 더 바짝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귓가에 와 닿는 유천의 호흡에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움직임을 멈췄다.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다. 짙은 암흑. 눈앞은 여전히 어둡다. 가늘게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서늘하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 유천이 곁에서 사라진 창백하고 메마른 세계……. 유천이 굳어 있는 나를 돌려세웠다. 나는 서둘러 눈물자국을 손등으로 훔쳤다. 쿡쿡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유천에게 웃어줄 수가 없었다. 다만, 원망 섞인 눈초리로 유천을 노려보았을 뿐이다. 유천의 표정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어… 놀랐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유천의 손을 뿌리치고 나는 도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준수야.” “뭐.” 유천의 부름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유천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그의 섬세하고 흰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많이 놀랐어?” “…….” “미안.” 그리고 유천은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와 닿는 유천의 사과에 나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코끝에 불가리 블랙의 쌉싸름한 향기가 파고들었다. 심장에 찡한 통증이 느껴졌다. 박유천이 아니면 안 된다. 박유천이 없으면 내 세상은 끝난다. 나는 그 잠시 동안에도 그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깊은 절망을 느꼈던 것이다. 유천이 가만히 몸을 떼어내더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 그를 보면 조금 전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준수야.” 유천이 내 양 볼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의 검고 어른스러운 눈동자에 내가 담겨 있다.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눈동자……. 나는 또 다시 시선을 피했다. 참았던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흘렀다. 유천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미안’이라고 속삭이며 따스하고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훔쳐냈다. 하지만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꾹 물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유천이 내 곁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느낀 절망감은 연약한 흐느낌이 되어 자꾸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때 조용히 유천의 입술이 와서 닿았다. 유천의 체온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내 눈물 맛이 났다. 짭짤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유천의 입술. 나는 마침내 코를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천은 더 힘을 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 늘 내 곁에 있겠다는 유천의 약속, 그의 다정한 맹세. 그것은 미안하다는 사과나 울지 말라는 말, 세상의 그 어떤 위로보다 백 배, 천 배가 넘는 위안이 되었다. 아랫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놀랐기 때문인지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유천의 입술이 멀어졌다. 유천은 자신의 값 비싼 캐시미어 피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더니 내 손목을 붙들고는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유천에게 이끌려 미니 쿠퍼 뒷좌석에 올랐다. 유천은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유천의 혀가 다급하게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도 서둘러 팔을 뻗어 유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성급하고 설익은 듯 하지만, 간절한 입맞춤이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전부터 늘 서로에게 목이 말랐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 갈증과 같아서 우리는 항상 곁에 있으면서도 애가 탔다.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해 가슴엔 늘 새로운 상처가 늘어갔고 피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고통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며 속으로 울어야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서로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하다 보면 통곡이라도 할 것 같았다. 나는 한 손으로 유천의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어제는 자의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순간 유천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유천은 버클을 풀어내는 내 손목을 잡고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어제 일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유천아.” 유천은 대답대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검고 진지한 눈동자 위로 새의 깃털처럼 새카맣고 고운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앉았다가 다시 열렸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 “…하자.” 또 다시 눈물이 한 방울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천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가는 버클을 잡고 있는 내 손을 풀어 다시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유천의 따스한 손이 볼에 남은 눈물자국을 훔쳐내는 것이 느껴졌다. “30초만 고민해 보고.” 유천이 중얼거리듯 뱉어내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손이 목 언저리로 올라오더니 내 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손길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왜? 싫어?” “30초만 고민해 보자니까.” 같은 말을 속삭이며 유천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셔츠 단추는 그 순간에도 하나씩 천천히 풀려나가고 있었지만, 역시 유천은 썩 내키지 않는 듯 하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만지작거렸다. “유천아.” “어.” “나 괜찮다니깐.” 유천이 다시 고개를 들더니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음영이 진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조각처럼 절묘한 비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음…….” 정말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듯 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말갛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동자에 내가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눈에는 그의 모습이 그렇게 비치고 있을 것이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럼 너 내일 출근 못해.” 왜?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게 있어. 그냥 그런 줄 알아.” 이어진 유천의 말에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유천은 아랫입술을 꾹 물고 그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건 뭔가를 참고 있는 표정인데. 나는 유천의 의도를 읽기 위해 또 다시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선을 마주치던 유천은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니면 너무 성급했던 건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의미를 알아내려 애쓰고 있자니 유천은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목덜미로 옮겨갔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조금 움츠렸을 때였다. “이제 다 울었어?” “……!” 그의 웃음 섞인 말 한 마디에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순간 좀 전까지 내가 했던 행동들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갔다. 놀라고, 울고, 매달리고……. 와, 이건 어떻게 생각해도 굉장히 추하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울보 토끼. 만날 울어.” 나는 유천의 어깨를 확 밀어냈다. 단추가 풀려 맨살을 드러낸 어깨에 금세 싸늘한 공기가 와 닿았다. 나는 주섬주섬 옷깃을 추스르며 유천을 노려보았다. “와, 이중인격. 금세 까칠해진 거 봐.” “비켜.” “하자며?” “꺼지라고.” 유천이 쿡쿡 웃으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야, 김준수.” “뭐.” “하잘 때는 언제고.” “내가 언제.” “좀 전에 네 입으로 그랬잖아.” “무거워, 비……!”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순간 유천의 입술이 다시 부딪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피했더니 턱을 잡아 돌리는 유천의 손이 느껴졌다. “하…지 마, 박유천!” 나는 유천의 어깨를 밀어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유천이 짓궂게 웃으며 내 양 손목을 한 손에 움켜쥐어 버렸다. 그리고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볼이며 이마, 잔뜩 풀어헤쳐진 어깨와 가슴 언저리에 마구 입을 맞춰대기 시작했다. “하지 말라고!” “싫어.” “아악- 간지러워, 하지 마아-!” “김준수, 너 항상 이래. 먼저 유혹해 놓고 꼭 튕겨.” “저리… 꺼져! 변태 새끼야!” 나는 간지러움에 몸을 뒤틀며 유천에게 반항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힘으로는 박유천의 압승이다. “넌 죽었어, 내일 꼼짝 못 하게 만들어 줄게.” 유천은 버둥대는 나를 꽉 누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방금 저 말 지나치게 진심 같아서 조금 무섭다……. 나는 또 다시 하지 말라고 악을 쓰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고, 유천은 전혀 아랑곳 않고 나를 짓누른 채 몸 여기저기에 키스를 해댔다. 그때였다. “박유천 씨!” 멀리서 들려온 경적과 유천을 부르는 소리에 우리는 동작을 우뚝 멈췄다. 소음이 가득하던 차 안에 싸하게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도르륵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마주했다. “풉!” 그리고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웃긴 상황이다. 차에 기름이 떨어져서 산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우리는 키득거리며 가볍게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좁다.” “…응.” 유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피코트를 집어 들어 내 위에 덮어주었다. “차 바꿀까?” “응.” “뭘로? 대형 버스?” “음… 캠핑카.” “캠핑카? 알았어.” 이러고 있다……. 이래서 우리는 천생연분이다. + 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손을 꼭 쥔 채였고,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차 안에는 조용히 98 Degrees의 I Do가 흐르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기에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유천이 손을 꾹 쥐어 왔다. 나는 멍하니 유천을 응시했다. “……?” 유천은 가만히 웃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I do cherish you for the rest of my life 내 남은 삶 동안 당신을 소중히 할 거예요 You don't have to think twice 당신은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I will love you still 나는 언제나 당신만을 사랑할겁니다 From the depths of my soul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It's beyond my control 그건 이미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죠 I've waited so long to say this to you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다려 왔지요 If you're asking do I love you this much, 만약 내게 당신을 이만큼 사랑하는지 묻는다면 I do, oh baby 난 그렇다고 대답할거예요 I do cherish you… I will love you still… 나는 드문드문 들려오는 가사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유천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나지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별 것 아니다. 그저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뛸까? 좋다. 너무 좋은데 한숨이 난다.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유천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아 버렸는데 유천이 이렇게 자꾸 다정하게 굴면 나는 더 박유천한테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자꾸 자꾸 유천을 더 좋아하게 되어 버려 그를 구속하려 하게 되면 어쩌나, 그래서 유천이 내게 질리면 어쩌나, 조금 두렵다. 그래도 노래를 해주다니… 와씨, 눈물 날 것 같아……. “준수.” “응?” 혼자 괜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유천이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왔다. “너 혼자 이재영한테 가지 마.” “으응…….” 나지막이 덧붙여진 마지막 한 마디에는 굉장히 찔끔해서 눈치를 봐야 했다. 도대체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박유천은 이렇게 쥐었다 놨다 해가며 나를 잘도 다룬다. 그때 얼핏 익숙한 주유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유천은 익숙한 솜씨로 주유소에 진입했다. 미니 쿠퍼가 주유소로 들어서자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얼마나 넣어드려요?” “가득이요.” 유천은 주유구를 열어 주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지갑에 조르륵 꽂혀 있는 골드카드 세 장이 보였다. 갑부 자식……. 늘 보던 거지만 매번 신기하다. 이런 녀석이 내 친구이자 애인이라니. 9만 2천원이라는 명랑한 목소리의 알바생에게 유천은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잠시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데 알바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한데, 정지된 카드라는데요.” “네?” 유천이 나지막이 되묻는 소리에는 당혹감이 묻어났다. 이게 뭔 소리야? 나는 멀뚱히 유천을 응시했다. 유천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잔돈은 됐다는 유천의 말에 주유소 알바생은 밝은 표정으로 꾸벅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유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카드 정지됐대?” “어.” “왜? 모델 한다고?” “아마도.” 나는 피식 웃으며 서비스로 받은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편한 길 놔두고 22살이나 먹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박유천도 신기하고, 신흥 부르주아인 연예계 종사자가 되겠다는 아들을 기를 쓰고 반대하는 고지식한 박유천네 집안도 신기하다. 우리 집은 내가 L그룹에 입사했다니까 아직 정직원이 된 것도 아니고, 발령이 난 것도 아닌데 친척들 다 불러서 잔치를 하고 난리가 났었는데. 하긴 유천이 아니었으면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은 구경도 못 했고, 대기업 입사는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까. 역시 박유천은 나에겐 과분한 상대일지도 모른다. 지이이잉. 서울로 접어드는데 유천의 전화가 진동했다. 유천은 전화를 꺼내들고 발신자를 흘깃 확인하더니 직접 받았다. 운전할 때는 나에게 늘 전화를 대신 받게 하는 박유천인데.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전화기에서는 또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희 씨였다. - 유천아, 나 지금 밖이야. “어딘데?” - H호텔 라운지. “지금 갈게.” 나는 묘한 기분에 유천을 가만히 응시했다. 유천은 나를 흘깃 보더니 다시 손을 끌어다 잡았다. 역시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비밀 이야기이기에 이럴까? “지금 명희 씨 만나게?” “어.” “왜?” “…….” “무슨 일 있어?” “…….” “…….” “…나중에 얘기해 줄게.” 유천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제 내가 더 이상 캐물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박유천은 그런 사람이다. 별 수 있나,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 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대다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천은 마음이 급한지 몇 차례나 신호를 무시하고 내달렸다. 서울인가 싶었더니 어느새 우리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늘 차에서 내려 집 앞에서 굿나잇 키스를 해주던 유천이었는데 오늘은 차 안에서 손을 끌어당기더니 입을 맞춰왔다. “피곤할 텐데 일찍 자.” “응.”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유천은 조금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바로 차를 돌려 사라져버렸다. 나는 미니 쿠퍼가 사라진 거리를 멍하니 응시하다가는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들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우편함에 웬 봉투가 하나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내용물을 꺼내들었더니 매끈한 종이가 한 장 만져졌다. 의아해하며 불을 켜고 종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나와 재영이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정전된 느낌이다.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혼자 이재영에게 가지 말라는 유천의 말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박유천이 본다면 나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하면서 이재영을 만나면 제일 먼저 있는 힘을 다 해 뺨을 올려붙이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비열한 사람인 줄 몰랐다. 나는 주먹을 꾹 쥔 채 분노로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택시에서 내려서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벌써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내가 알 바 아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다들 잠들었는지 조용한 복도에 내 발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나는 재영의 병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똑똑! 노크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들어오라는 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문을 열었다. 재영이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옅은 갈색의 뿔테 안경을 쓰고 책을 뒤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나를 발견한 재영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안경 벗어요.” 재영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한 손으로 안경을 빼냈다.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다시 나를 응시했다. 차갑지만 거짓 없는 눈동자……. 역겹다. 저런 눈을 하고 나를 속이고 협박하려 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뭐야?” 무심한 그의 목소리에 무의식중에 이를 꾹 물었다. “안 들려? 뭐냐고 묻잖아.” 재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그의 뺨을 올려쳤다. “…….” “…….” 파열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 손은 닿기도 전에 재영에게 잡혀 허공에 멈춰서 있었다. 재영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싸늘히 나를 응시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알싸했다. 역겹다니까, 그 눈빛. 나는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목이 잡혔다. 손목에 아릿하게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치미는 분을 못 참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재영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야, 지금.” “놔요.” “뭐하는 거냐고.” “몰라서 물어요?” “어, 몰라. 그러니까 알아듣게 설명부터 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그의 앞에 던졌다. 재영은 다시 뿔테 안경을 걸쳤다. 사진을 내려다 본 그의 표정이 금세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디서 났어?” “알잖아요.” “어디서 났냐고.” “어디에 갖다 놓으라고는 말 안 했나 보죠?” 내 빈정거림에 재영이 피식 웃었다. “너 지금 내가 이걸 찍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대답 없이 싸늘히 그를 노려보았다. 재영은 다시 사진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곳에서 그의 시선이 멈춰 섰다. 병문안용 꽃다발과 화분이 잔뜩 쌓여있는 곳이었다. 그는 그리로 다가가서 꽃다발을 하나하나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느닷없는 재영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짜증스러운 손길에, 곱게 포장된 꽃다발들이 순서대로 해체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상당수의 꽃다발을 전부 확인한 재영은 화분에 심겨진 화초도 전부 뽑아 내던지고는 바닥에 흙을 쏟아버렸다. 나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저쯤에서 찍어야 나올 수 있는 구도다. 설마 이 사람이 한 게 아닌 건가? 달그락. 커다란 난초 화분을 바닥에 쏟아냈을 때였다. 뭔가가 바닥으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재영은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화분에서 쏟아져 나온 흙을 뒤적였다. 이내 흙 속에서 소형 캠코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영은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으며 카메라를 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모르는 걸까? 나는 채 의심을 지우지 못 하고 가만히 재영을 바라보았다. 재영은 다시 침대로 다가오더니 사진을 집어 들어 뒷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내가 이미 확인했듯이 뒷면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그냥 하얀 백지다. “다른 건 없었어?” “뭐요?” “돈 달라는 메모라든가.”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정말 그쪽이 한 거 아니에요?” “재영 씨.” “……?” “그쪽이 아니라 재영 씨라고.” “…….” “이렇게 된 이상 하루 이틀 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린 지금 초대형 스캔들 사진의 주인공이 되어 있거든.” 정말 그렇다. 이 사진이 세간에 풀리면 스포츠 신문 1면은 따 놓은 당상이다. 아니, 일단은 박유천 한 명만 알아도 난리가 날 것이다. 아,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니면 도대체 이 사진은 누가 찍은 걸까? 설마 그 새를 넣어둔 사람? 잘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애써 굴리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때 불쑥 내 앞에 재영의 손이 내밀어졌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J. Lee, 한국이름은 이재영, 28살. 너한테 형 소리 들을 생각 없으니까 재영 씨라고 불러.” 나는 내밀어진 재영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마르고, 길고, 남자답게 마디가 선명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쭈뼛쭈뼛 그의 손을 맞잡았다. “…김준수요.” 재영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았다. “꼬맹이.” “김준수라고요.” 장난스럽게 뱉어져 나온 그의 말에 나는 이를 꾹 물고 퉁명하게 중얼거렸다. 재영은 그런 내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으며 사진을 들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거 어디서 났어?” “우편함이요.” “너희 집?” “네.” “흠…….” 내 말에 재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미안하게 됐어. 왜 내가 아니라 너에게 그런 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목표가, 어…, 음…, 그러니까…, …재영 씨라고요?” 나는 익숙하지 않은 어휘를 내뱉기 위해 상당히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럼 설마 너겠냐? 망상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지?” 와씨, 말하는 거 봐. 박유천보다 병이 더 하네. 잘난 것들은 다 저래? “그럼 왜 우리 집에 이런 걸 보낸 건데요?” “내가 그 사람들 하는 일을 어떻게 알아? 지능적인 놈이어서 돈 왕창 뜯어내려는 거겠지. 이 정도 사진이면 한 1억은 쥐어줘야 되겠는데.” “…파파라치요?” “아마도.” 1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마치 ‘어제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였어’ 라는 식으로 늘 있었던 일인 양 가벼운 대답……. 역시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파파라치라니 내 평생 그런 사람들과 엮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이제야 비상구에서 처음 만났던 날 그가 왜 그런 반응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까지 욕 먹어가며 돈을 벌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사진 한 장에 1억이라니 확실히 편한 방법이긴 하다. “아, 빨리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귀찮아서 못 해 먹겠네.” 재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주었다. “아까는 돈 잘 번다고 자랑했으면서.” “뭐?” “몸값 20억이라고 자랑했잖아요.” “꼬맹아, 그게 자랑 같아?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그나저나.” 재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여전히 침대 곁에 서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오늘 여러 번 보니까 좋다?” 키가 큰 그가 쥐를 코너에 몰아넣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말투며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나는 조금 위기감을 느끼고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또, 또 이상한 사진 찍히면 어쩌려고 가까이 와요?” 말은 왜 더듬냐고……. “때려치우지, 뭐.” “…별로 애착이 없나 봐요?” “너도 파파라치랑 스토커한테 몇 년 시달려봐.” 하긴. 나는 고개를 주억거려 그의 말에 호응해주는 척 하며 슬쩍 옆으로 발을 옮겨 그와 다시 거리를 두었다. 그러고 보니 매니저는 어디 갔는지, 어두운 병실에는 그와 나 단 둘이다. 그것도 이 야심한 밤에. 갑자기 그가 다가서니 박유천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된다. 나는 묘해지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말을 걸었다. “그만 두면 뭐 하게요?” “글쎄. 기획사 운영이나 할까 생각중인데.” “경영도 할 줄 알아요? 유천이가 이사님이라고 하던데.” “16살에 처음 사무실이랑 계약할 때 뭣도 모르고 스톡옵션으로 했는데 나중에 보니 주식이 상당히 되더라고. 그 이후로 돈 생길 때마다 사 모았더니 지분이 꽤 돼. 그랬더니 이사 자리 하나 주던데. 지금은 거의 내 회사나 마찬가지야.” 왠지… 굉장하다. 나는 조금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너도 써 줄까?” “됐어요.” “너는 장난감이나 어린이 영양제, 스포츠용품, 이온음료, 이런 거 잘 어울리겠다.” 쿡쿡 웃으며 이따위 말을 뱉어내는 재영을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놀리지 말아요.” “눈치 챘어?” 재영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한 대만 딱 때려줬으면 좋겠다. 박유천이었으면 벌써 한 방 날렸을 텐데. 나는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갈게요’라고 쏘아붙이고 문을 향했다. 그런데 우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보다는 많이 분위기가 노골노골해진 것 같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기다려. 데려다 줄게.” “됐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안 서면 이 사진 내일 신문사에 뿌린다. 아, 박유천한테만 보내도 되겠군.” 그럼 그렇지, 어떻게든 내 발목을 잡을 사진이었단 말이다, 제길.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삐딱하게 재영을 응시했다. 재영은 특유의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환자복 위에 패딩 점퍼 하나만을 걸쳐 입었다. 맨발에 슬리퍼, 환자복에 점퍼, 뿔테 안경까지. 정말 황당하고 추하기 그지없는 조합이지만 왜 이재영이 하니까 저것도 멋있는 건데? 저대로 이 병원 광고 찍어도 되겠다. 저래서 모델이라는 건가? …정말 신은 불공평하다. + “……!” 눈을 번쩍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몸에 싸늘하게 찬 공기가 와 닿았다. 식은땀이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한동안 천장을 응시했다.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을 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캐비닛을 열자 검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상자를 들어 뚜껑을 열었을 때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기쁨보다 그 안에 고스란히 담긴 극단적인 감정에 몸서리가 쳐졌다. 새였다. 날개가 이상하게 꺾인 죽은 새……. “하아.”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나보다. 그런 꿈을 꾸고. “아!” 몸을 뒤척이다가 베개에 오른쪽 귀가 닿아 짧게 비명을 뱉어냈다. 인상을 쓰고 통증을 참고 있으려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역시 유천의 의도는 적중했다. 상자 속의 새가 떠오를 때마다 나는 유천이 뚫어준 오른쪽 귀를 연상해내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기분 나쁜 꿈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마쳤다. 나가는 길에 세탁소에 들러 피 묻은 셔츠와 재킷을 맡기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에 올라 mp3를 귀에 꽂은 채 멍하니 음악을 듣고 있자니 문득 재영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까 여기저기 온통 이재영의 광고다.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저런 걸출한 연예인과 친분이 있다니 신기한 느낌이 든다. ‘야,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꼭 바람피우는 것 같지 않냐? 스릴 있는데?’ 라던가? 갑자기 왜 그의 말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재영은 나를 집에 데려다 주며 이런 말을 지껄였다. 이로써 재영을 만나지 말라던 유천의 말은 또 어겨버렸고……. 딱히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니지만 왠지 나도 재영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유천에게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문득 박유천은 어제 명희 씨와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해졌다. 명희 씨와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래된 친구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잘 알고 지냈다던데. 유천은 그냥 친구라지만… 왠지 나보다 더 친한 것 같고, 박유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어서 질투난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던가? 유천과 사귀면서 새삼스럽게 내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여전히 잠에 취한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놀이공원과 연결된 지하철역에 내려섰다. 사람들은 통로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 무리지어 이쪽 혹은 저쪽으로 걷고 있었다. 마치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 같다. 나는 내 기발한 비유에 혼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이 걷는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 걸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탈의실로 들어서자 지난번에 세탁소에 맡긴 유니폼이 배달되어 왔는지 내 캐비닛 앞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캐비닛을 열고 옷을 벗어 걸었다. 그때 캐비닛 안에서 또 다시 낯선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불길하다. 왠지 불길해. 나는 한동안 봉투를 내려다보며 집어 드는 것을 망설였다. 도대체 왜 자꾸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얼핏 보이는 종이를 보니 사진이다. 또 어제 그 사진일까? 나는 짜증스럽게 사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는 사진 안의 장면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박유천이다. 그리고 유천에게 안겨 있는 이 낯익은 인물은 분명 명희 씨다. 하지만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 뒤로 선명하게 찍혀 있는 배경. 그것은 분명히 호텔의 한 객실 문 앞이었다. 512호. 유천이 열쇠를 꽂아 넣고 있는 바로 그 방. 뭐야, 박유천. 그냥 친구라며……. 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멍하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 벽에 걸린 시계만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더 사진을 들여다보다가는 반으로 쭉 찢어버렸다. 아무리 사진을 보고 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지금 이 사진이 내게 유천이 명희 씨와 잤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증명은 불가능하니까. 유천에게 묻는다고 해도 진실을 대답할 확률은 어차피 반반이다. 명희 씨와 잤다고 대답을 하면 당연히 충격을 받을 것이지만, 아니라고 대답한들 나는 과연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건 결국… 진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사랑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박유천이 내게 했던 그 수많았던 고백들은, 지금 이 사진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인간은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더 잘, 오래, 깊이 기억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박유천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은 결국 이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상황이라면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백 번, 천 번 들어도 그것이 진실한 그의 마음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불안하다. 어쩌면 나도 그가 내게 머물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사실은 내게 정착할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내 이름이 그의 연애경력의 가장 최근 목록에 올라가는 것. “짜증나!” 나는 손에 들린 사진을 조각조각 찢어버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사진조각이 가루가 될 때까지 찢고 또 찢었다. 굉장히 비참한 기분이다. 배신감, 분노, 원망, 허탈함, 의심, 절망, 후회, 고통, 슬픔, 그리고… 체념. “하아-.” 마음 안의 응어리를 뱉어내듯 무거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사진 가루들을 쓰레기통에 처넣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기분은 더럽지만 혼자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문제는 또 하나가 남아 있다. 도대체 누가 여기를 드나들며 이런 것을 넣어두는 걸까? 지금 이 사진과 재영과 찍힌 사진, 그리고 새… 전부 같은 사람의 짓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 일단, 죽은 새는 나를 목표로 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것을 유천에게 줄 생각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재영과 찍힌 사진은 돈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치고… 유천의 사진 역시 돈이 목적인 걸까? 그렇지만 돈을 위해 협박을 할 생각이었다면 두 사진 모두, 사진의 주인공인 본인들에게 갔어야 맞다. 더구나 유천의 사진은 내가 찍히지도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돌아보니 그가 서 있다. 진회색의 슬림하고 늘씬한 수트 차림의 박유천. 받쳐 입은 검은색 셔츠와 폭이 좁은 핏빛 넥타이가 근사하다. 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이제 헛것이 다 보이네. 나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셔츠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재수 없어.” “왜?” 왜냐니? 몰라서 물어? 나는 소리 나는 쪽을 확 노려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의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거 되게 진짜 박유천 같네? “…박유천?” “어.” 뭐야, 진짜 박유천이잖아! 그의 나지막한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셔츠로 앞을 가리고 말았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일하러 왔지.” “무슨 일?” “어제 끝부분 조금 못 찍은 거.” “그거 네가 해?” “대역이야. 지금 이사님 입원해 있어서. 나중에 CG로 수정한대.” “아…….”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유천이 뚜벅뚜벅 내 캐비닛 앞으로 다가왔다. 유천은 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열쇠 바꿨어?” 미친놈아, 그런 말은 내가 호텔 사진을 보기 전에 해 주던가……. 유천의 말에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아마도 유천은 죽은 새가 마음에 걸려서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이미 감정이 삐딱해져 있었기 때문에 대답 따위는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캐비닛을 한참 살펴보던 유천이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제야 내가 셔츠를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움찔해서 좀 더 몸을 가렸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볼 거 다 봤는데.” 별 것도 아니라는 투로 무심히 내뱉으며 캐비닛 안에서 유니폼 셔츠를 꺼내 건네는 유천의 말에는 좀 울컥했다. 이 새끼,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유천을 험악하게 노려보며 셔츠를 잡아챘다. 유천은 팔짱을 끼고 캐비닛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자 괜히 또 긴장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야! 김준수! 너 지금 저 새끼한테 화난 상태야! 왜 얼굴은 빨개지는 건데! 나는 마구 내 자신을 질책하며 서둘러 셔츠를 팔에 끼워 넣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그리고는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긴장해서 그런지 넥타이를 잡은 손이 자꾸 뻣뻣하게 굳는다. 태연한 척 한쪽 끝을 고리 사이로 빼냈는데… 어라? 이게 왜 스르륵 풀리지? 나는 당황해서 다시 양쪽 길이를 맞췄다. "이리 와 봐." 유천이 피식 웃으며 넥타이를 잡아왔다. 개새끼야, 너는 나 기분 풀릴 때까지 접근금지야. 나는 그의 손에서 넥타이를 잡아채고는 등을 홱 돌렸다. 거울 앞에서 꼼지락대고 있으려니, 팔짱을 끼고 거울 너머로 서툰 내 손짓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유천의 시선에 얼굴이 더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고등학교 때 교복 넥타이 어떻게 맸어?" 쿡쿡 웃으며 묻는 말에는 불타는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넥타이를 잘 못 맨다……. 당황해서 그런지 넥타이는 스르륵 풀리고 말았다. 얼굴이 더 붉어졌다. 이젠 귀까지 화끈거린다. 유천이 다시 나를 돌려세우며 넥타이를 잡아왔다. 미친놈아, 접근금지라고. 나는 또 다시 그의 손에서 넥타이를 잡아채고 등을 돌렸다. “해줄게.” “신경 꺼.” 기분이 좋지 않으니 말도 이런 식으로밖에 안 나온다. 하지만 이번에도 넥타이는 스르륵 풀려 버렸다. “야.” “신경 끄라……!” 유천의 부름에 퉁명스럽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유천의 손이 내 어깨를 돌려세우더니 멱살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유천의 눈높이에 맞춰진 나는 뒷목덜미를 잡힌 토끼 같은 꼴로 까치발을 들고 그의 손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 아, 너무 가깝다, 위험한데……. 불현듯 위기감을 느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멈춘 채 잔뜩 굳어버렸다. "말 좀 들어."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색이 짙은 그의 눈동자 안에 잔뜩 얼어붙은 내 표정이 비치고 있었다. 유천은 내가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 쪽 입 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재영의 미소와 닮아 있다. 이 자식,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유천은 굳어있는 나를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더니 셔츠를 툭툭 쳐서 주름을 펴고는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목과 가슴 언저리에서 유천의 긴 손가락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어찌나 가슴이 뛰는지 숨이 턱턱 막혀온다.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보다. 호텔 사진 때문에 열 받아 미치겠는데, 박유천이 이렇게 나오면 또 좋다고 얼굴 붉히고 있고……. 유천은 능숙하게 넥타이 한쪽 끝을 잡아당기며 모양을 냈다. 신기하다. 자기가 매는 거랑 반대방향일 텐데도 잘 맨다. 나는 얼굴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채 얌전히 숨을 죽이고 유천의 마무리를 지켜보았다. “또 굳었지?” 유천이 쿡쿡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뾰로통하게 유천을 응시했다. “재수 없는 새끼.” “그 입 막아버리기 전에 말 좀 예쁘게 해라.” 씨……. 왠지 진담 같은 유천의 말에 차마 뒷말은 못 뱉어냈다. “넥타이도 못 매는 꼬맹이.” 피식 웃으며 내뱉은 유천의 놀림에 울컥해서 옆구리를 한 대 쳐버렸다. 그러는 너는 처신이나 잘 하고 다녀. 뭘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호텔 방문 앞에서 사진을 찍혀? 차마 입 밖으로는 뱉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툴툴대고 있으려니 유천이 옆구리를 감싸 쥐고 잔뜩 허리를 웅크린 채 나를 노려본다. 좀 많이 아팠을 것이다. 사진 건까지 해서 감정을 매우, 아주, 굉장히 많이 실었으니까. 나는 피식 비웃음을 흘려주고는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재킷을 꺼내려던 순간 갑자기 뒤에 뻗어 나온 유천의 손에 의해 쾅 하고 캐비닛 문이 닫혔다. 돌아서자 유천이 서늘한 표정으로 캐비닛을 짚은 채 서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거리가 가깝다. 어째 포즈도 묘하다. 이건 영화 같은 데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 “…….” 여전히 캐비닛에 손을 짚고 아무 말 없이 서늘하게 내려다보는 유천의 시선에 괜히 긴장하여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너는.” 유천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무, 뭐?” “입만 막을 게 아니라 손목도 확 꺾어놔야 할까 봐.” “웃기고 있다, 미친……!” 하지만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갑자기 유천의 입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이 없다. 살짝 한 쪽 눈을 떴다. 하지만 코앞에 다가와 있는 유천의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다시 질끈 감아야 했다. “너 이제부터 욕하면 키스 한 번씩이야.” 그리고 유천의 입술이 가만히 닿아왔다. 나지막이 들려온 유천의 말에는 두근대는 심장이 아플 지경이다. 얼굴은 이미 터질 듯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유천의 손이 어깨를 천천히 타고 내려와서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유천에게 허리가 잡혀 몸이 한 걸음 다가서자 나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열어주고 말았다. 이내 유천의 혀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씨발, 너무 좋다. 키스건, 폭력이건, 나는 박유천의 일부가 내게 닿기만 해도 너무 좋아서 심장이 내려앉아버리니까 다 좋다 이거다. 하지만 이건 무슨 경우인가 싶다. 어제 여자랑 호텔에 갔다 와서는 자기를 애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나에게 키스를 하고 있는 박유천이라니. 아니, 나는 애인 맞나?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순간 유천의 혀가 깊게 입안을 파고 들어왔다. 나는 무의식중에 더 힘껏 유천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하지만 이렇게 뼈마디가 노곤해질 정도로 달콤한 키스를 주고받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혹시 명희 씨에게도 나를 친구라고 속이고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와, 정말 그런 것이라면 박유천은 정말 지능범이다.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는 거지? 아니, 원래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까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일 수도 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 사진은 나를 해코지 하려는 게 아니라 박유천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한 것일까? 아, 진짜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내 안의 불신은 이렇게 서서히 그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마치 지뢰 같다. 언제 밟아서 터질지 모르는 불안 요소. 나는 그래서 더욱 유천과의 키스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서둘러 유천의 어깨를 밀어냈다. 유천이 나에게 떠밀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열리는 문으로 스튜디오에서도 봤던 스타일리스트 한 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유천 씨.” “아, 현지 씨.” “메이크업이요.” “네, 갈게요.” 스타일리스트에게 대답을 해주며 유천은 다시 한 번 내 넥타이의 모양을 바로 잡아 주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흘깃 유천을 올려다보자 그는 귀여워죽겠다는 미소를 지은 채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았다. 반한다, 웃지 마라, 새끼야. 나는 또 다시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있다 보자.” 가만히 웃으며 걸음을 옮기는 유천의 뒷모습에는 한숨이 나올 것 같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멋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박유천을 좋아하게 될까 봐 괜히 침울해지기까지 한다. 심지어 다른 여자와 호텔에서 찍힌 사진을 봤음에야……. “…유천아.” 나는 결국 그를 불러 세우고 말았다. 유천이 문고리를 잡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쉽게 입이 열리기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 “…….” 내가 대답이 없자 유천은 다시 한 번 나를 불러왔다. “준수.” “…응.” 요새 유천은 김준수도 아니고, 준수야도 아닌 저런 식으로 나를 자주 부른다. 김준수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준수야처럼 지나치게 다정하지도 않은, 김준수와 준수야의 중간 어디쯤 위치하는 기묘한 어감. 그리고 나는 저 호칭이 소름끼치도록 좋다. 내가 유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기 때문에. “뭔데?” “너 어제…….” “…….” 어제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가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제…….” “…….” “어제 명희 씨랑… 호텔에서 잤어?” 다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차마 유천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마치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숨을 죽였다. “…어.” 유천의 나지막한 대답에는 핑 하니 현기증이 느껴졌다. “…왜?” “…….” “명희 씨 그냥 친구라며. 왜?” “…준수야.” “나 네 애인이잖아. 아무리 전에 그랬다고 해도… 이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여전히 유천을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에 있었던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준수야.” “…….” “김준수.” “…말해. 듣고 있어.”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까…….” “나중에 언제? 나랑 헤어질 때?” 목소리가 떨려나오더니 결국 눈물이 한 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이를 꾹 물었다. 턱관절의 움직임을 따라 오른쪽 귀에 아릿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추하게 이러지 말자, 김준수. 아직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여자와 하룻밤 자고 온 거야. 박유천은 예전에도 많이 그랬잖아. 전엔 잘도 웃어 넘겼잖아. 새삼스럽게 왜 이래.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이르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하아-.” 유천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이 두려웠다. 유천이 지금이라도 내게 다가와서 어젯밤처럼 날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유천은 그러지 않았다. “…미안.”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유천은 탈의실을 나가고 없었다. 순간 심장을 누군가가 움켜잡은 듯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솔직히 대답해 줘서 고맙다, 새끼야……. 그런데… 나는 이제 너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나는 유천의 냉정함에 잔뜩 마음을 할퀸 채 흔들리고 있었다. + 눈이 빨갛다. 나는 또 괜히 얼굴을 유리창에 비춰보며 눈을 비볐다. 저 멀리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재영의 촬영 때보다는 적은 숫자였으나 중간중간에 유천을 알아보고 끼어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제나 오늘이나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오늘은 일찌감치 경호팀을 어제의 세 배로 요청해 놓고 멀리서 배회하는 중이었다. 가까이서 유천을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박유천은 꽤 사무실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기획사를 대표하는 이재영의 대역이라니. 길을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도 이제는 꽤 많고, 조만간 메인 모델로 CF를 찍을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랑은 더 멀어지게 되려나……? “하아-.” 또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멀리서 손짓을 하는 미영 누나에게 다가갔다. “왜요?” “있다가 유천이한테 술 한 잔 하자고 해.” 박유천한테 아무렇지 않게 말 걸 자신이 없는데……. 나는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미영 누나는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유천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저 녀석 멋있는 줄은 알았지만, CF모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다들 난리 났어. 여기서 같이 일하던 녀석이 갑자기 TV에 나온 것도 놀랐는데, 지금은 저렇게 촬영을 다니잖아. 유천이 이재영네 기획사 소속이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유천이 있는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분량이라 금세 끝날 것이라고 하더니 계속 재촬영을 하고 있다. 박유천, 너는 그래서 여태 아마추어인 거야……. 나는 괜히 유천을 깎아내리며 심술을 부렸다. “알았지, 준수야? 꼭 전해.” “아, 저, 누나!” 다급하게 불러보았지만 미영 누나는 손을 흔들며 달려가 버렸다. 나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건지 아무나 잡고 물어보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연애라도 많이 해둘 걸. 괜히 속상하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가까운 휴게실로 뛰어들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액정에 선명하게 떠 있는 이재영이라는 세 글자에는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유천은 내가 재영과 연락을 하거나 만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하지만 알게 뭐야, 박유천 때문에 속상해 죽겠는데. 나는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 꼬맹이? “김준수라고요.” - 어, 알아. 이 사람은 날 놀리는데 재미가 붙은 건지 전화에 대고 쿡쿡 웃어댄다. 나는 웃을 기분이 아닌데. “웬일이세요?” - 궁금해서. 뭐, 이상한 전화 오거나 하지 않았어? “무슨 전화요?” - 돈 달라거나. “없었는데요.” - 이상하네, 나한테도 연락이 없는데. “잊어버렸나보죠.” 잘 된 거 아닌가? 1억이나 굳고 좋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재영은 내 대답에 한참이나 웃어젖히더니 ‘너 진짜 단순하구나’라는 같잖은 소리를 해왔다. 내가 정말 그렇게 단순하면 박유천한테 휘둘려서 이렇게 속이 상하겠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는 대답 없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야. “왜요.” - 대답이 왜 이렇게 까칠해? 무슨 일 있어?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이럴 땐 거짓말을 쉽게 못 내뱉는 내 성격이 정말 미칠 듯이 화가 난다. - 오늘 시간 있냐? “시간은 왜요?” 내가 대답이 없자 재영은 눈치 빠르게도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 몇 시에 끝나? “다섯 시에 끝나는데 왜요?” - 데이트 해야지. 우리 어제부로 불륜커플 됐잖아. 사진을 찍혀서 1억이나 주고 입을 막아야 할 판인데 만나자니?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일까? “누가 불륜커플이에요?! 미쳤어요?!” - 어, 너한테 미쳤어. 몰랐어? 소리를 빽 지르자 전화기 너머로 또 재영의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이걸 철딱서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귀엽다고 해야 할지. - 다섯 시에 데리러 갈게. “오긴 어딜 와요, 입원해 있는 사람이.” - 좀 전에 퇴원했어. 나일론 환자였잖아. 솔직히 나일론 환자는 아닌데. 엄청 많이 다친 거 나도 봤단 말이다. 37바늘이나 꿰맸다면서 하루 만에 나을 리도 없고, 살살 돌아다니는 것만 가능해서 일도 박유천 시키고 있으면서. - 다섯 시에 정문. 안 나오면 사진 박유천한테 보낼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아, 저, 저기요!” 다급히 불러보았지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나는 멍하니 깜빡이는 액정을 내려다보다가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뭘 어쩌라는 건지. 기다리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고. 이 사람이 이렇게 멋대로 구는 건 좀 당황스럽다. 나는 천천히 휴게실을 나서며 촬영장을 흘깃 살폈다. 촬영이 끝났는지 유천이 수고하셨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직원용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문득 유천에게 술 한 잔 하자는 말을 전하라던 미영 누나의 말이 떠올라 서둘러 유천의 뒤를 쫓았다. 스태프들이 대기실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고, 유천은 또 한 손에 담배를 꺼내들며 옥외 비상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천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한담……. 복도 끝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비상계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망설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대기실 앞을 지나는데 스태프들이 소란스럽게 짐을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유천을 따라다니는 팀인지 다들 낯이 익다. 유천의 매니저와 눈이 마주쳐 꾸벅 인사를 했다. 역시 사무실에서도 유천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것이 눈에 확연하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팀이 붙다니. 이렇게 유천은 차근차근 인지도를 높여가며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기분이 묘하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기실 안을 바라보았다. “유천 씨 없는데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탈의실로 유천을 찾아왔던 스타일리스트가 메이크업 도구를 정리하며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아, 예.” “유천 씨, 담배.” 매니저가 복도 끝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비상계단 문이 코앞인데도 잘 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가서 멱살을 잡고 왜 그랬냐고 한 바탕 난리라도 칠까? 속이 풀릴 때까지 때려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살짝 문을 열어 보았다. 얇은 문틈 사이로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유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잘 손질된 머리가 몇 가닥 겨울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왔으면 이리 나와. 왜 그러고 있어.” 문득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는 화들짝 놀라 문을 닫아버렸다. 저 새끼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하지만 다시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또 망설였다. 선뜻 그에게 다가가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 자신이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러고 있으면 초등학생 같다고 정민 누나가 하지 말랬는데. 문득 재킷 주머니에 항상 들어있는 마스터키가 잡혔다. “…….” 나는 서둘러 마스터키를 꽂아 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어디 추운데서 떨어 봐라. 감기 걸려 고생해도 약도 안 사다 줄 거고, 밥도 안 해 먹일 거다.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다지며 비상계단 문에 가만히 이마를 기댔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못 됐다. 철컥! 바깥쪽에서 유천이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이마를 떼어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문고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박유천이다. 나는 좀 망설이다가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 문 열어.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화기를 통해 유천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에 찡한 통증이 느껴졌다. 왠지 서글프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다른 사람이랑 아무렇지 않게 자고 올 수 있는 유천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상황 자체가 나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도대체 누구에게 해결책을 물어봐야 속 시원히 풀어낼 수 있는 걸까?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준수야, 문 열어. “…….”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차가운 문에 이마를 가져다 댔을 뿐이다. - 어머, 유천아! 거기서 뭐해?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듯이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선다. - 어, 하나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유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인상을 쓰고 말았다. 하나는 우리랑 동갑인데, 박유천이 일하는 내내 유천에게 눈독을 들였었다. 나한테 몇 번이나 유천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던 전적이 있는 요주의 인물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하나가 위층에서 내려오는지 탕탕탕 하는 발소리에 이어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박유천은 이 여자를 막아놓으면 저기 가서 일을 터뜨리고, 좀 잠잠하다 싶으면 더 큰 사고를 친다. 정말 어디로 튈 지 알 수가 없다. 개새끼……. 나는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전화기 너머로 까르르 웃는 하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마스터키를 다시 꽂아 넣었다. 벌컥 문을 열자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유천과 하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유천을 매섭게 노려보며 그대로 손가락에 걸려있던 담배꽁초를 빼앗아 비상계단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유천의 손목을 잡아채서 복도로 끌고 들어왔다. ‘김준수, 뭐야!’라며 하나가 소리를 질렀지만 무시했다. 등 뒤로 비상계단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는 그대로 유천의 손을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유천이 하나와 있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유천은 아무 말 없이 손목을 잡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들 근무시간이라 텅 빈 복도에 우리 둘의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유천이 발걸음을 멈췄다. 유천이 따라오지 않는 통에 나도 멈춰서고 말았다. 주위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유천을 등진 채 망설였다. 그냥 이대로 가버릴까, 아니면 어찌된 일이냐고 다시 물어볼까. “준수야.” 나지막이 나를 불러오는 유천의 목소리에는 아침에 느꼈던 아릿한 고통이 되살아났다. 또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숨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유천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유천을 볼 자신이 없다. 나는 유천의 손을 뿌리치고는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다시 유천에게 손목을 잡혔다. 나는 또 다시 매섭게 그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참고 있던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꾹 움켜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 “…….” 또 다시 싸늘하게 침묵이 흘렀다. 나는 참았던 숨을 힘겹게 내뱉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영 누나가 오늘 저녁 때 시간 있으면 술 한 잔 하재. 다들 기다린다니까 전화해 봐.” “…어.” 나지막한 유천의 대답에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뱉어내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준수.” 유천이 다시 손목을 잡아왔다. 나는 결국 참고 있던 분을 못 이기고 있는 힘을 다해 유천의 뺨을 올려치고 말았다. 짜악! 매서운 파열음이 복도를 뒤흔들었다. 단번에 유천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고였던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유천의 입술 사이로 금세 붉은 액체가 고이는 것이 보였다. 아, 또 다치게 한 건가? 어이없고 한심하다. 이 와중에도 유천의 입안이 터진 것 같아서 걱정을 하고 있는 꼴이라니……. “…미안.” 결국 사과까지 한 채 돌아서고 말았다. 이번에 유천은 잡지 않았다. 텅 빈 복도에 타박타박 내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나는 움켜쥔 손등으로 볼을 훔치며 계속 걸었다. 가슴이 쥐어뜯긴 것처럼 아파서 숨이 턱턱 막혀왔다. 등 뒤로 유천의 나지막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 박유천 덕분에 하루 종일 정신이 나가 있었나보다. 유천은 촬영이 끝나자 스태프들과 철수해버렸고, 나는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진 채 간신히 퇴근 시간을 맞았다. 되돌아보니 너무 화난다. 사내새끼가 되어 가지고, 추하게 찔찔 짜기나 하고.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을까? 스스로를 책망하며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아, 이거 박유천이 매어 준 것인데……. 이 와중에도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박유천이 매 줘서 좋아? 어? 김준수, 좋아? 나는 스스로에게 마구 화를 내며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내버렸다. 지이이이잉. 문득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느릿느릿 전화를 꺼내들며 탈의실로 들어섰다. 재영의 이름이 떠 있다. 벌써 도착한 건가?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며 캐비닛을 열었을 때였다. “제길…….”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닫아버렸다. 캐비닛 안에는 또 한 장의 봉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나는 캐비닛 문에 이마를 콩콩 찧으며 고민했다. 혼자서는 저 사진을 열어볼 자신이 없다. 손에서는 계속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또 박유천의 사진일까? 아니면 이재영? 박유천의 사진이라면 나에게보다는 유천에게 직접 보내는 것이 나을 텐데. 하지만 재영의 사진이라면 그와는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것이 많으니까 같이 봐도 상관없을 것이다. 박유천의 사진처럼 내가 충격 받을 일도 없고. 나는 조금 더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 어디야? 왜 안 보여? “어딘데요?” - 정문. “지금 갈게요.” 나는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전화기를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봉투는 열어보지 않은 채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잰 걸음으로 1층 정문을 나서자 바로 앞에 재영의 벤츠가 보였다. 나는 서둘러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재영은 금세 깜빡이를 켜며 차를 출발시켰다. “안 나올 줄 알았어.” “그러려고 했어요.”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재영은 피식 웃으며 차선을 변경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겨울은 해가 짧다. 거리에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요.” “재영 씨.” “…재영 씨.” “왜?” “…또 사진이 온 것 같은데요.” 재영이 나를 흘깃 돌아보았다. 나는 부스럭거리며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차마 내 손으로는 열 수가 없다. “뭔데? 또 그 사진이야?” “아뇨, 아직 안 열어봤어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영이 피식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고내기 싫으니까 어디 자리 잡고 보자. 괜히 긴장되네, 이거.” 늘 빈정대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재영의 입에서 저런 말도 나오고,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요 근래의 내 일상은 마치 드라마 같다. 바람둥이 연예인 애인을 둔 주인공과 그 주인공에게 자꾸 작업을 거는 톱 모델. 그리고 누군가에게 찍혀서 자꾸 배달되어 오는 이상한 사진들. 심지어 그 사진들은 초대형 스캔들 감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아, 뭐가 이렇게 골치 아파.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건데요?” “청담동이나 압구정으로 갈까 생각 중인데.” “…….” “왜? 아는 데 있어?” 아는 데? 아는 데는 없지만, 난 강남보다 강북이 좋던데. 싸고, 푸짐하고. “가고 싶은데 있으면 말 해.” “…….” 재영은 특유의 냉랭한 표정으로 툭 말을 던졌다. 말과 표정이 어쩌면 저렇게 상반될 수 있는지 신기하지만 그래도 그의 말에는 솔직히 좀 감동이다. “저기요.” “재영 씨.” “재영 씨.” “왜?” “나한테 왜 이래요?” “넌 기억력이 3초냐? 아님 돌고래야?” …돌고래 머리 좋은데. “말했잖아. 너한테 미쳤다고.” “그러니까 왜요?” 내 질문에 재영이 나를 흘깃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뒤로 넘어가는 바로 그 비웃음. “멍청할 정도로 순수해서, 미친놈처럼 일편단심이라서, 바보같이 단순해서. 됐냐?” 저건 욕이야, 뭐야…….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깜빡 하며 한참이나 그를 응시했다. 뭔가 좋은 말인 것 같기도 한데 왜 기분이 나쁘지?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울었냐?” “…….” “무슨 일 있지?” “…….” 눈치도 빠르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고 싶은 데 없냐고 물었다, 꼬맹아. 시외로 쏠까?” 재영이 나지막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청계천이요.” 나는 고민 끝에 유천과 가려고 아껴두었던 곳을 불쑥 말하고 말았다. ‘OK’라며 재영은 차선을 변경하여 강북을 향했다. 그런데 이거 어째 데이트 같다. 하긴 재영도 데이트라고 하긴 했는데……. 명색이 애인이 있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만……. 뭐, 박유천이 한 짓을 생각하면 솔직히 이 정도는 미안한 일도 아닌 거다. 재수 없는 박유천한테 이재영이랑 만난 거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버려야지. 나는 소심하게 심술궂은 복수심도 불태웠다. 그런데 이 상황은 꼭 천 길 낭떠러지 위에 걸린 흔들다리 같다. 유천과 나는 좀 잘 지낼 만하면 일이 터진다. 진짜 운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필사적으로 우리를 방해한다는 느낌이 든다.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이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관계는 아무래도 재정립이 필요한 것 같다. 곰곰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는 박유천을 좋아하는 건가? 이 질문에는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럼, 그 사랑으로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한숨부터 나온다. 사실 명희 씨가 아니었다면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박유천이 한두 번 그런 것도 아니고……. 하지만 명희 씨인 것이 더 문제다. 유천과의 관계가 좀 의심스럽긴 해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고, 심지어 우리가 사귀도록 도와주기까지 한 사람인데 설마 그럴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크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나 할까? 그럼 다음 질문. 박유천은 나를 좋아하는 걸까……? 이건 좀 대답하기 힘들다. 지금은 유천의 마음을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도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사귀고 나서부터 박유천은 확실히 여자에게 눈을 돌린 적은 없으니까. 전화는 여전히 많이 걸려오긴 했지만 외박도 안 했고, 집에 여자를 데려오지도 않았고, 연락도 매일 꼬박꼬박 했고. 나름대로 다른 연인들이 하듯 알콩달콩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유천에게 전화를 걸면 계속 이상한 여자가 받는 것을 시작으로 비상계단에 이어, 느닷없이 명희 씨와 호텔에서 사진이 찍히다니.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원래 연애라는 게 이렇게 복잡한 건가 싶다. 아, 진짜 박유천을 좀 때려줬으면 좋겠다……. 내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재영은 종로의 랜드마크 종로타워로 차를 몰았다. 아무 생각 없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내려 보니 꼭대기 층의, 심지어 이름도 구름 꼭대기? 꼭대기 구름? 뭐 그런, 비쌀 것 같은 레스토랑이다. 으아, 기분도 안 좋은데 이런데서 먹으면 체할 것 같다……. “저기요.” “재영 씨.” “재영 씨.” “왜?” “다른 데 가면 안 돼요?” 재영이 선글라스를 한 손으로 빼내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재영이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더니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너 아는 데로 가봐, 그럼.” “…….” “왜?” “그럼 지저분하거나 맛없다고 불평하기 없기에요.” “알았어.” 재영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웃음을 만들어냈다. 와, 이 사람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서 얼른 눈을 피하고 말았다. 이놈의 심장이 미쳤나……. 나는 인근의 구석진 오래된 식당으로 그를 안내했다. 학교 선배들이 알려준 곳으로, 싸고 맛있고 지저분하다. 세련되고 도도한 이재영과는 정반대의 이미지인… 뭐 그런 곳이다. 우리는 부대찌개 2인분이 보글보글 끓는 가스버너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우와, 이건 진짜 이재영이랑 안 어울린다……. 나는 왠지 미안해져서 멋쩍게 웃어보였다. “이런 데 처음 와 봐.” 이재영이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예,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또 다시 멋쩍게 웃으며 서둘러 물을 한 컵 따라서 그의 앞에 놔주었다. “드세요.” 내 말에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저를 든다. 역시 사람은 홈그라운드에서 강한 법이다. 이재영이나 박유천 같은 잘 사는 것들은 고급 레스토랑이 홈그라운드겠지만, 여기는 내 홈그라운드라 재영도 빈정대지 않고 얌전하다. 말 잘 들으니까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는 서둘러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야, 맛있다, 이거.” “그죠?” “어. 너도 빨리 먹어.” 얼른 또 한 입을 떠다 입에 넣는 재영을 보자 흐뭇해서 웃음이 나온다. 아, 진짜 박유천이 이 장면을 봤어야 거품 물고 넘어갈 텐데. 나는 괜히 또 유천에게 심술을 부리며 수저를 집어 들었다. “어머!” 그때 출입문을 들어서던 여자 한 명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은 분명 내 맞은편의 이재영에게 꽂혀 있었다. 재영이 흘깃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어떡해, 진짜 이재영이야… 라는 눈빛이랄까?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랑은 밥도 제대로 못 먹겠다는 것을……. 그녀는 재영의 냉랭한 오라에 말도 못 걸고 한 쪽 구석에 앉아 계속 우리 쪽을 힐끔거렸고, 나는 그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 밥을 깨작거렸다. 하지만 이재영 씨께서는 엽사만 안 찍히면 된다며 굉장히 고고한 자태로 식사를 하고 계신다. 이 사람은 잘도 이런 생활을 하고 있구나 싶다. 피곤하겠다……. 박유천도 조금 더 인기가 많아지면 저렇게 되려나? 그의 모습에 유천을 겹쳐보다가는 문득 예전에 유천과 여기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1학년, 가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막 반팔에서 긴팔로 바꿔 입던 즈음. 선배들이랑 근처에서 뭉치기로 했었는데 둘이 먼저 도착해서 밥을 먹으러 왔던 것이다. 찌개가 나오기 전에 모듬전을 하나 시켜놓고 우린 정말 유치한 짓을 해댔다. 유천이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 가져가기’라고 했었나……? . . . “뭐야, 그게?” 나는 불쑥 내밀어진 유천의 손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긴 사람이 가져가기라고.” “다 이기면?” “다 먹기.” 나는 씨익 웃으며 자신 있다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 이런 쓸데없는 일에 승부욕을 불태우는 우리였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위바위보!” 첫 번째는 박유천의 승리였다. 유천은 싱긋 웃으며 호박전 하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아, 저거 내가 먹으려고 찜한 거였는데. 나는 굉장히 아깝다는 표정으로 호박전에게 이별을 고하며 유천을 재촉했다. “야, 빨리 다시 해.” “가위바위보!” 박유천이 또 이겼다. 동그랑땡 하나가 유천의 앞으로 이동했다. 저것도 내가 찍은 거였다. “가위바위보!” 이번엔 내가 이겼다. 나는 유천에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버섯전을 끌어다 놓았다. 이렇게 승부는 접시 가운데 쌓인 전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가위바위보! 보! 보!” 유천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마지막 남은 두부전을 끌어다가 자신의 앞에 쌓았다, 씨발…….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유천을 노려보았더니 ‘뭐?’라며 비웃는다. 9전 1승 8패. 완벽한 박유천의 승리다. “나 안 해!”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유천은 으하하 하고 특유의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삐쳐서 내 앞에 놓여있는 불쌍한 버섯전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대자, 유천은 그런 나를 보며 또 다시 미친 듯이 웃었다. “웃지 마, 개새끼야.” 퉁명스럽게 욕설을 뱉어내자 유천이 또 정색을 하고 바라본다. 아, 요놈의 입. 유천이 욕하는 거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잘 안 된다. 나는 그 시선에 찔끔해서 괜히 콜록하고 기침을 했다. 때마침 찌개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국물을 입에 떠 넣었다가 입안을 다 데고 말았다. 어찌나 뜨거운지 입을 틀어막고 손을 파닥파닥 하고 있으니 박유천이 의자까지 쓰러뜨리며 벌떡 일어나서 찬 물을 떠다 주었다. 그리고는 너 때문에 입 다 데었다고 괜히 짜증을 내며 모듬전을 내놓으라고 하자, 유천은 또 쿡쿡 웃으며 나에게 전을 밀어주었다. 내가 맛있는 것만 쏙쏙 골라 먹고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을 지경이 되었을 때야, 박유천은 겨우 한 개를 입에 넣고 식었다며 투덜거렸다. 안타깝게도 그날 우리는 바로 코앞에 청계천을 두고도 못 가봤다. 대신 둘 다 술에 떡이 되어 선배네 집에서 잤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친구 사이였던 우리는 만나서 술이나 마시러 다니면 다녔지, 데이트는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길 모퉁이를 돌면 나타나는 청계천을, 박유천과 가보고 싶어서 혼자 굉장히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청계천 가보자고 말 꺼내기가 힘들어 어찌나 유천의 눈치를 보았는지 여기저기 아무데나 부딪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앞에서 오던 오토바이도 못 보고 유천의 눈치를 보다가 사고가 날 뻔 하자 박유천이 죽고 싶냐고 화를 버럭 내며 손을 꼭 붙들어 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나는 유천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 국내 최고의 스타를 사람들이 못 알아 볼 리가 없다. 재영은 결국 식당 사장님과 사진을 찍히고 몇 장이나 사인을 해주어야 했다. 성질 더러운 그가 짜증내지 않을까 싶어서 눈치를 봤는데 재영은 흔쾌히 멋진 포즈를 잡아주어 식당 종업원들은 물론 손님들의 마음까지 단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재영이 그렇게 한바탕 팬 서비스를 해준 덕분에 우리는 힐끔거리는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좌중을 휘어잡는 그의 카리스마와 서비스 정신에 굉장히 놀랐다. 역시 프로다.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상황대처에 능숙하고 융통성이 있다. 신기하다. 그는 ‘재수 없는 이재영’과 ‘화면에 비치는 이재영’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새삼 그가 왜 톱의 자리에 설 수 있었는지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덕분에 우리는 서비스라며 시키지도 않은 것을 잔뜩 대접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재영이 지갑을 꺼내드는 걸 말리고 서둘러 여사장님께 만 오천 원을 쥐어드렸다. 내가 데리고 왔으니 오늘은 내가 호스트란 말이다. 안 받겠다는 여사장님을 뒤로 하고 재영을 서둘러 식당 밖으로 끌고 나왔다. 왠지 민망한 느낌에 딴청을 피우고 있으려니 재영은 귀여워 죽겠다며 한참을 웃었다. 도대체 뭐가 귀여운지 알 수가 없지만……. 얼굴이 붉어진 채, 재영이 웃음을 그치길 기다리며 둘러본 거리에는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우리는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청계천을 향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고, 겨울답게 휘황한 루미나리에가 장식되어 있었다. “와아-.” 나는 정말 순수하게 그 평화롭고 서정적인 광경에 감탄했다. 사람들은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채, 혹은 나지막이 뭔가를 속삭이며 천천히 냇가를 거닐고 있었다. “가자.” 재영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재영은 어느새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훤칠한 키는 돋보였다. 온통 검은 색으로 늘씬하게 차려입은 그는 확실히 남자가 보기에도 꽤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두운데도 선글라스를 쓴 그가 왠지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선글라스에 가려지지 않은 거리를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 걸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흐르는 물을 따라 걸었다. 나보다 키가 한참이나 큰 재영은 처음에는 성큼성큼 걷다가 뒤쳐진 나를 보고는 희미하게 비웃음을 흘리며 보폭을 맞춰왔다. 이제야 저 웃음이 비웃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는 냉혹한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자기 방어 중인 것이다. 워낙 어릴 때부터 몸에 익은 것이라 어떤 것이 진짜 자신의 모습이고, 어떤 것이 만들어낸 것인지 재영 스스로도 구별이 안 되는 것일 뿐. 그를 안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세상엔 근본이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아쉽다. 여길 함께 걷고 있는 것이 박유천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보니 정윤 형과 남산에 갔을 때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남산 하니까 생각난다. 박유천이 갑자기 차를 세우고 키스를 하더니 황정윤이랑 온 곳이 아니라 박유천이랑 키스한 곳이라며 다시 기억하라고 했던 우리의 첫 데이트. 나는 그날을 생각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소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나는 재영에게서 희미하게 번져오는 담배냄새를 맡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박유천, 명희 씨, 죽은 새와 사진에 대하여. 그리고 옆에 선 이재영…….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인식된 그의 존재에 괜히 긴장이 된다. 나는 재영을 흘끔 곁눈질했다. 하지만 그의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분이 이상하다. 박유천과 그 난리를 쳐놓고 나는 재영과 데이트 비슷한 걸 하고 있다니. “저기 이재영 아냐?”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자들이 재영을 알아보고는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신호로 주위의 시선이 갑자기 재영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니 곁에 있는 내 얼굴이 다 붉어질 지경이다. “꺄! 재영 오빠, 사랑해요!” 난간 위에서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몇 명이 난간에 매달려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핸드폰과 디카를 재영 쪽으로 들이대는 것이 보였다. 우리 주위로 웅성대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인데?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들켰네.” 재영은 나를 흘깃 보며 중얼거리고는 피우던 담배를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뭐, 제대로 청계천 구경 못 해서 미안하다는 건가? 별로 사과할 일은 아닌데. 이런 상황을 예측 못 한 내가 오히려 미안하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재영이 길게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불쑥 물어왔다. “꼬맹아, 너 달리기 잘하냐?” “네?” “오랜만에 운동 좀 해 볼까?” 나는 재영의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뛰어!” 그의 목소리와 동시에 몸이 홱 딸려나갔다.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여자들의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열어준 길을 뚫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도대체 뭐야, 이건? 나는 어느새 그의 천진함에 동화되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박유천과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작년 11월 말이던가? 내 생일을 기점으로 우리가 서로 죽일 듯이 싸워대기 바로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같은 동아리의 최지영이었던가? 뭐 그런 흔한 이름인 여자아이의 생일이었던 것 같다. 그 아이도 박유천을 좋아했었지 아마? 학교 근처의 한 호프집에서 모이기로 했다는 동기 녀석의 연락을 받고 우리는 어슬렁거리며 도서관을 나섰다. 모이는 녀석들 중에 세심한 놈은 하나도 없다는 유천의 말이 그럴 듯 하게 들려, 학교 앞 유명제과점에서 어차피 먹지도 못할 샴페인과 케이크를 샀다. 다음 달에 내 생일인데 박유천은 기억하고 있으려나? 나는 유천과 나란히 케이크를 고르면서 괜한 기대를 해 보기도 했다. 길에서 파는 장미 한 다발까지 사서 든 우리는 늘 그랬듯이 빈정거리고 서로를 놀리며 호프집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다들 모였는지 벌써 거하게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지영이 유천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민섭 선배는 일부러 유천을 지영이 옆에 앉혔다. 나의 불같은 질투심이 그것을 곱게 보아 넘길 리가 없다. 나는 내 생일도 아닌데 초장부터 가열차게 술을 들이부었고, 덕분에 케이크에 촛불도 안 켰는데 벌써 술기운이 잔뜩 올라 혼자 비척대며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 . . “하아-.” 나는 술 냄새가 나는 하얀 숨결을 허공에 토해내며 호프집 앞 계단에 앉았다. 겨울은 조금씩 그 차가운 옷깃을 펼쳐 세상을 덮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멍하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를 바라보며 속을 다스렸지만 기분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웬 청승이냐.” 빈정대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유천이 담배를 피워 물며 옆에 와서 앉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나는 뚱한 표정으로 유천을 보다가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유천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천천히 눈앞을 스쳐 지나다가는 스르륵 공기 중에 섞여 버렸다. 갑자기 추위가 오싹하게 느껴져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천이 자신의 외투를 주섬주섬 벗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유천의 체온이 남은 따스한 옷이 내 어깨에 덮였다. 나는 유천의 친절이 달갑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털어냈다. 이내 유천의 옷이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감기 걸려서 코 찔찔 흘리고 다니면 가슴에 손수건 달아준다?” “네 걱정이나 해, 미친놈아.” 다시 옷을 걸쳐주는 유천의 말에 나는 버릇처럼 퉁명스럽게 욕설로 대답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어깨에 걸쳐진 유천의 옷을 잡아서 꼭꼭 여미는 건 무슨 심사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우스워서 피식 웃었을 때였다. “아, 이 징그러운 새끼들, 또 붙어 앉아 있어. 땀띠 안 나냐?” 유천과 같은 과인 진형이 얼굴이 벌개 진 채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따뜻하고 좋기만 하다.” “안 나니까 신경 끄셔.” 유천과 나는 순서대로 진형에게 톡 쏴주었다. 그 대답이 묘하게도 동시에 겹쳐 우리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사내새끼들이 왜 이렇게 계집애들처럼 붙어 다녀. 둘이 사귀냐?” 진형이 유천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담배를 가져가더니 한 모금 빨고는 다시 유천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순간적으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의 말에는 우리 둘 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달아오른 얼굴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이제 알았냐? 준수가 좀 귀여워야 말이지. 애교가 장난이 아냐.” “웃기고 있네. 김준수 하는 거 봐라, 저게 애교 부릴 인간이냐? 말로 사람 잡을 놈이지. 너 준수가 작정하고 욕하는 거 못 들어봤구나?”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데? 나 박유천한테 죽는 꼴 보고 싶냐? 나는 입 다물라는 살기어린 눈빛을 진형에게 쏘아주었다. “다 들어 봤지. 근데 그것도 귀엽지 않냐?” “퍽도 귀엽겠다.” 진형은 ‘미친놈들’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킬킬댔다. 유천이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피식 웃자, 나도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또 장난처럼 넘어간 것 같다. 유천을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유천이 진형의 입술이 닿았던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걸 간접키스라고 하지, 아마? 제길, 내 질투심은 이런 것에도 왜 발동하는 거냐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를 입에 문 유천을 노려보았다. “왜?” 유천이 무심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물어왔다. 나는 유천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콜록콜록!”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는 참 쓰디썼다. 나는 기침을 몇 번 하며 다시 유천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나랑도 하자, 간접키스. 유천은 피식 웃으며 돌려받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아직 장초였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그리고 그날부터 담배를 끊었던 것 같다. 물론 그리 오래가진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실내로 들어왔을 때는 한참 1/2 게임이 진행 중이었다. 질문에 무조건 자신의 양 옆에 앉은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을 말하는 게임인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체에게 벌주를 받아야 한다. 그런 강제적인 특성상 짝사랑하는 사람의 고백을 주위에서 돕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다분히 고의적인 어떤 의도가 엿보이는 게임이었다. 아무래도 민섭 선배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듯 지영의 옆자리는 당연한 듯 유천이었다. 밖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온 것이 무색하게도 이런 분위기라니. 지영과 내 이름 중에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이 상황은 너무 의도가 뻔해서 내 이름이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 분명히 선배들은 짓궂은 질문을 해댈 것이다. 나는 유천의 옆에 앉아서 그의 옷을 챙기며 또 다시 뚱한 표정이 되었다. “자, 그럼. 박유천에게 질문! 처음이니까 간단하게, 동아리에서 제일 일 잘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유천에게 모였다. 기대에 찬 눈빛들. 아, 짜증나……. “최지영이요.” “동아리에서 제일 성격 좋은 사람?” “최지영.” 유천은 망설임 없이 연달아 최지영이라고 대답했고, 나는 그 대답에 더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성격이 썩 좋지 않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좀 섭섭하다……. “그럼… 제일 예쁜 사람?” “으… 최지영이요.” 유천이 힘든 대답을 억지로 한다는 듯 짓궂게 대답하자 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박유천, 뻔뻔하게도 잘도 그런 장난을 하고 있다. “자, 그럼 슬슬 본격적인 질문 들어갑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 민섭 선배였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본 게임이었구나 싶다. “음… 최지영이라고 해야겠죠?” 유천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지영아, 결혼 축하해.” “오늘 그냥 날짜 잡자.” 사람들이 거들자 지영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들 웃고 박수치고 난리가 났다. 아, 짜증나. 나만 재미없나보다. “더 독한 질문 갑니다. 같이 자 본 사람!” 씨발, 뭐야 저건.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당연히 김준수죠.” “풉! 콜록콜록!” 유천의 장난기 어린 대답과 동시에 나는 입에 든 맥주를 뿜고 말았다. “아, 형, 이 질문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지영이 혼삿길 막을 일 있어요?” 이어진 유천의 목소리에 왁자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심했다며 유천을 두둔하는 사람, 아니라고 더 센 질문으로 가야 한다며 부추기는 사람,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나는 독하게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지 달아오른 얼굴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유천이 쿡쿡 웃으며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의 손이 닿자 등줄기에 소름이 쭈욱 돋는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유천의 손을 쳐내며 다시 콜록대고 기침을 했다. “마지막 질문!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강민섭, 선배고 뭐고 없다! 너 이 새끼 죽었어! 혼자 속으로 질투심에 불타오르며 민섭 선배를 싸늘하게 노려본 순간이었다. “김준수요.” 유천의 나지막한 대답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오싹 한기가 돌았다. 잘못 들은 건가? 나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유천을 응시했다. 유천은 나를 흘깃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마셨다. “뭐야, 박유천. 재미없게!” “아, 진짜.”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야, 대답 마음에 안 들어. 넌 얄짤없이 벌주다. 몇 명이냐? 열세 명? 어디 소주 열세 잔 원샷 해 봐라. 집에 기어들어가게 해주마.” “형, 좀 봐 줘요.” 유천의 말에 민섭 선배는 한 잔 더 추가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라며 열세 잔을 가득가득 채워 유천의 앞에 조르륵 놓아주었다. 열세 개의 소주잔을 보니 내가 더 무섭다. 지금도 박유천은 이미 상당히 마셨는데, 저걸 원샷하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천과 열세 개의 잔을 번갈아 보았다. “야, 빨리 마셔!” 선배들의 재촉에 유천이 몇 번 더 사정을 해보다가는 안 되겠는지 제일 끝의 잔을 하나 집어 들며 내게로 몸을 살짝 기울여 왔다. “나 죽으면 집에 좀 데려다 놔.” 유천의 말에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무슨 깡이었는지……. “흑기사요!” 나는 손을 번쩍 치켜들며 유천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고 말았다. “김준수, 넌 그거 다 마시면 죽어.” 유천과 민섭 선배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술이 약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박유천이 뻗는 것보다 내가 뻗어서 박유천이 날 지고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내가 영악한 건가? 뭐, 어쨌든. “괜찮아요.” “야, 너 술 못 마신다고 해서 안 봐준다?” “넵, 선배님!” 까짓 거 기분이다! 비록 게임이지만 박유천이 날 좋아한다는데! 나는 단번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첫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 쓰다! 나는 콜록 하고 기침을 하며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잔을 손에 들었을 때였다. “잠깐만요, 형!” 유천이 내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들고는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모두의 시선이 유천에게 모였다. “준수야.” “응?” 유천이 내 손을 가만히 잡아왔다. “뭐해?” “뭐가?” “바보야… 달려!” “으아앗!”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유천에게 손목이 잡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대로 유천에게 끌려 호프집을 박차고 나섰다. “야! 박유천! 저 새끼가!” 등 뒤로 분노에 찬 민섭 선배의 목소리와 까르르 폭소하는 여자 선배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유천과 나는 가방도 다 내팽개친 채 호프집을 도망 나와서 거리를 달렸다. 그 상황이 어찌나 우스웠는지 결국 우리는 웃느라 뛰지도 못하고 길 한 가운데 멈춰 서서 숨도 못 쉴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야 했다……. . . . 우리는 서서히 달리던 속도를 줄였다. 어느새 꽤 많이 벗어난 듯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재영이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빼내는 것이 보였다. 문득 그의 모습이 나를 데리고 악마 같은 선배들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던 그날의 유천과 겹쳐 보였다. 그래, 박유천은 늘 그랬다. 박유천은 과제를 하다 내가 잠이 들면, 자기 것도 많으면서 밤새 내 것까지 해 놓았고, 시험 기간에는 자기 공부도 못하고 30분 단위로 전화를 해대며 나를 공부시켰다. 내가 추워하면 늘 옷을 벗어주었고, 혹여 아프기라도 하면 수업도 빠지고 간호를 해주었다. 늘 빈정대고 비웃으면서도 내가 했던 말은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으며, 심술궂게 나를 놀려대서 늘 내가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결국은 나에게 전부 양보하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아…….” 갑자기 눈물이 스르륵 고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겠다……. 유천이 나에게 그동안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나는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참았다. 어쨌거나 그는 적어도 함께 있는 시간에는 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이건 박유천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늘 그를 의심하고 불안해했던 것이다. “…왜 그래?” 재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결국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후두둑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 기억 속의 유천은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알아채지 못하게, 그렇게 나를 챙겨왔던 것이다. 나는 그저 그가 날 7년 동안 좋아했다는 말만 듣고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그와 함께 보낸 매 순간순간이 그렇게 새삼스러울 수가 없다. 또 다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손을 들어 얼른 눈물을 훔쳤다. 아, 김준수, 또 운다, 바보 같이. “…준수야.” 재영의 입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게 했다. 하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저 유천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의 손을 살짝 피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재영이 한숨처럼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아파왔다. 나는 아무래도 재영과 유천 모두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분이 이상해.” 재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흘깃 그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나한테서 돈이나 명성, 뜨기 위한 배경 같은 걸 원했어. 그 사람들에게 난 이재영이 아니라 그냥 잘 나가는 모델 정도였겠지.” “…….” “그래서 솔직히 사랑이란 건 안 믿었거든? 그런데 내가 지금 그 지경인가 봐. 되게 바보 같지 않냐?” “…….” “일반인들은 다 너 같아? 누군가를 그렇게 변치 않고 좋아한다는 게 가능해?” 그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잔뜩 담겨 있었다. 글쎄?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 그건 나도 궁금한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박유천이 첫사랑이라서요.” 재영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우린 둘 다 바보 같은 첫사랑을 하고 있는 동지였던 것이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우리는 조금 더 킥킥거리며 마주보고 웃었다. “가자. 데려다 줄게.” “아, 저 혼자…….” “그냥 해줄 때 알았다고 해.” 재영은 혼자 가겠다는 내 말을 중간에서 뚝 자르며 말했다. 쉽게 양보할 것 같지 않은 그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재영은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내가 좀처럼 따라붙지 못하자 재영은 나를 가만히 돌아보며 내가 자신의 옆을 걸을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었다. 박유천이었다면 날 더 놀리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장난을 쳤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밤거리를 걸어 재영의 차로 돌아갔다. 재영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아 우리 집으로 향했다. 지난번에 한 번 알려준 것뿐인데 어떻게 잘도 기억한다. 원래 남자들은 관심 없는 상대의 정보를 굳이 기억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대로 관심 있는 상대의 정보는 외우고 싶지 않아도 머릿속에 자연스레 남는다. 재영이 우리 집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새삼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이 묻어남을 느꼈다. 아까 보니 어린애처럼 천진한 면도 있던데 그동안 사귀었던 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이런 면을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는 건가?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어느새 낯익은 유천의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재영은 전에 나를 내려주었던 우리 집 근처에 차를 세웠다.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서둘러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갑자기 재영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아왔다.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영을 응시했다. “사진.” “아…….” 재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제야 우리에게 아직 남은 볼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내가 눈에 띄게 안도의 기색을 보이자 재영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놀라’냐는 재영의 말에 눈을 한 번 흘겨 주고는 주머니를 뒤적여 봉투를 꺼내들었다. 직접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봉투를 재영에게 건네줘 버렸다. 재영이 부스럭대며 사진을 꺼내들었다. “…어라.” 재영의 중얼거림에 흘깃 사진을 곁눈질한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사진에 찍힌 것은 유천과 나였다. 낯이 익은 장면이다. 유천과 내가, 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하다가 차에서 내려서 다투던 순간. 사진 속의 우리는 막 화해를 했는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확실히 그 때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음이 들려왔었다. 근처의 여고생들이 셀카를 찍는 줄 알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는 사진을 뒤집어 보고, 봉투 안을 살펴보더니 역시 아무것도 없는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꼬맹아… 이거 어째 목표가 너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사진을 응시하며 그 노골적인 적의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사진 속 내 얼굴에 커다랗고 선명하게 X표가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악의.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인간다운 감정……. 동물들은 쓸데없이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 별 것도 아닌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대량 살상을 일삼지도 않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살육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주린 배를 채우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사냥을 한다. 이유 없이 다른 생명을 함정에 몰아넣거나, 상처를 입히며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약육강식이라는 대자연의 공평하고도 냉혹한 법칙이 존재할 뿐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저주하고, 고의적으로 따돌리며 쾌감을 느낀다. 오직 인간만이……. 사진에 드러난 나를 향한 그 뚜렷한 악의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아,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너, 다른 일은 없었어?” 재영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왠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좀 이상한 일이 있긴 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넥타이핀 상자에 들어 있던 죽은 새와 우리 집 우편함에 꽂혀 있던 재영의 사진 이야기를 했다. 유천이 명희 씨와 찍힌 사진도 있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스토커야.” “…네?” “네가 말한 정도로는 아직 나인지 박유천인지 잘 모르겠지만.” “…….” “대단하네, 이 사람. 나랑 네 사이를 알아. 네가 박유천이랑 사귀는 것도 알고. 널 굉장히 싫어하나 본데.” 재영의 말에는 일단 파파라치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속 편한 생각을 했다. 내게는 입을 막기 위해 쥐어줄 1억 따위는 없으니까. 하지만 너무 신기하다. 누군가를 이렇게 싫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악의는 상대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강력한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으나, 악의를 품은 그 자신조차도 마이너스 감정에 잠식당하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도 행동으로 옮기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사랑이 크다면 그 반대의 감정도 커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하겠다. 하지만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싫어한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수정이나, 박유천이랑 사귀었던 여자들 정도인데, 좀 화는 났지만 그래도 이렇게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는 쉽게 해결날 일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문고리를 잡아 열며 재영에게 애써 밝게 인사를 했다. “웃긴다, 타겟을 잘못 잡은 스토커네요. 가세요. 저 들어갈게요.” “그래, 일단 가서 쉬어. 조심하고.” 재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재영은 창문을 내리더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차를 돌려 사라졌다. 나는 주택가로 접어들어 터덜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쌀쌀한 공기에 하얗게 입김이 나온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잔뜩 찔러 넣은 채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일진이 아주 사나운 것 같다. 비상계단의 일로 박유천한테 잔뜩 삐쳐있었는데, 박유천은 명희 씨와 자고 온 것을 내게 들켜 버렸다. 덕분에 나는 유천과 잔뜩 틀어진 상태고, 이재영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재영의 솔직하고 순수한 감정에 조금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유천을 좋아하는 건 변함없긴 하지만 내게도 누군가 이런 상황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하단 말이다. 심지어 박유천이나 이재영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괴롭힘의 표적이 되어 있는 상황임에야.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뒤적여 찾았다. 여기저기를 뒤적여 보았지만 없다. 그제야 재영의 전화를 받고 재킷에 그냥 쑤셔 넣었던 것이 떠올랐다. 박유천은 지금쯤 회사 알바생들과 한 잔 하고 있으려나? 또 전화 안 받았다고 시퍼렇게 날이 서서 달려오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어 근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오늘 때린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뭐든 자수하고 빨리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속이 편한 법이니까. 나는 이렇게 단순해서 큰일이다. 박유천에게 이를 득득 갈면서도 금세 먼저 접고 들어가는 걸 보면 자존심은 다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익숙한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기다렸다. 통화가 길어질 것을 대비해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을 몇 개 더 찾아내던 순간이었다. [설렘이 가득한 그대 하루만큼, 나의 하루는 길고 외로워, 어쩌면 나는 바랐는지 몰라,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이별이 되길…♬ 이런 나를 이해해요, 그댈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날, 그대가 난 눈물이 날만큼 부러웠었죠…♬] “……?” 나는 낯선 컬러링에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냈다. 박유천의 컬러링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기에 찍힌 번호를 확인했다. “아!” 그제야 나는 내가 계속 유천의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내가 아침에 먼저 전화를 하기 때문에 그저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러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 …여보세요? 역시 나지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잘못 걸었네요. 죄송합니다.” - …네. 나는 서둘러 사과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려고 했는데 새로 바뀐 유천의 번호는 생각나지 않았다.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우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터라 굳이 저장하지 않고도 문자며 통화목록에 번호가 잔뜩 남아 있었을 것이고. 왜 요즘 유천의 연락이 조금 줄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아마도 상당수의 문자를 예전 번호로 보냈을 것이고, 굉장히 자주 이렇게 잘못 전화를 걸어 저 여자와 통화를 했을 것이다. 그 동안 불평 한 마디 없었던 박유천을 오히려 기특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이제야 전화에 얽혔던 오해가 풀렸다. 나는 멍하니 공중전화 부스를 나와 집으로 걸었다. 문득 유천에게 여자를 집으로 불렀냐며 빽 소리를 질렀던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기를 무슨 발정난 개새끼로 아냐며 발끈하던 유천의 목소리도 되살아난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이 바보 멍청이 김준수! 그것도 모르고 여자가 전화를 자꾸 받는다면서 유천을 들들 볶았으니……. 어쩌면 이렇게 병신 같을까! 나는 머리를 내 손으로 쥐어박으며 자책했다. 번쩍! 도로 저편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HID 램프인지 너무 눈부시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부릉- 하고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래 중에서도 차의 외양을 호화롭게 꾸며서 으스대고 다니는 녀석이 있다. 나는 그런 녀석들 중 한 명인가보다 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저건 너무 밝잖아, 확 신고해버릴까. 나는 툴툴대며 앞에 보이는 모퉁이를 향했다. 그때였다. 부아아아앙!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차가 급발진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 소리가 너무 위협적으로 느껴져 나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차는 계속해서 속도를 높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너무 빠르잖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달려오는 차를 응시했다. 내가 보였으니 속도를 줄일 것이다. 줄일 거야……. 나는 계속해서 천천히 모퉁이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자동차의 엔진 굉음은 조금도 줄지 않은 채 똑바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눈부심에 번호판도, 운전자도, 아니 차량 자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집으로 가자…….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모퉁이가 점점 가까워오자 내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엔진소리는 더 요란하게 가까워졌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옷자락이며 가방이 거추장스럽다. 내가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 차는 그냥 지나가는 것일지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제발 착각했기를 바라며 서둘러 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저 멀리 언뜻 은회색 미니쿠퍼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옆에 빨갛게 타는 담배를 들고 서 있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유천아!” 나는 유천을 소리 높여 외쳐 불렀다. 그때 휘황한 HID 라이트를 켠 수상한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 커브를 도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차는 다시 속도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 차는 아무래도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깨닫자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김준수, 제발 조금만 더, 제발……. 유천은 언제나처럼 차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리기 시작하자 이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유천이 손을 모아 나를 향해 뭔가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안 들려! 하아하아-.” 숨이 턱에 차서 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등 뒤로 점점 환한 HID 라이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엔진소리도 너무 가까워져 있다. 나는 겁에 질린 채 그저 유천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그제야 유천이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서둘러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차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유천의 미니쿠퍼가 부릉- 하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곧이어 반짝, 하고 헤드라이트가 켜지는 것이 보였다. 미니쿠퍼에서 잠시 요란한 공회전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미니쿠퍼는 끼이익 하고 타이어 타는 소리를 내며 총알처럼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이……! 나는 그제야 유천이 무엇을 할 생각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막을 수 없다. 그 전에 내가 죽게 생겼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유천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에게로 달리는 것뿐. 부아아아앙! 요란한 엔진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유천의 차도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부디 유천이 벨트를 하고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미니쿠퍼가 매서운 속도로 아슬아슬하게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달리는 도중에 미니쿠퍼에 살짝 손등이 닿았는지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콰아앙! 요란한 파열음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나는 서둘러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아- 하아- 하아-.” 내 겁에 질린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어둠 속에 하얗게 입김이 부서졌다. 주택가를 관통하는 도로 위에 유천의 미니쿠퍼는 수상한 차와 정면충돌한 채 멈춰서 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애써 움직여 보닛이 심각하게 찌그러져 버린 미니쿠퍼로 다가갔다. “유…천아?” “하아…….” 유천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허겁지겁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유천이 터져있는 에어백을 쳐 내며 벨트를 풀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뒤로 좀 물러서.”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쭈뼛대며 몇 걸음 물러났다. 문이 찌그러져서 잘 열리지 않는지 유천은 안에서 발로 문을 몇 차례 걷어찼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짝이 아예 통째로 떨어져나가 바닥에 뒹굴었다. 유천은 뒷목을 부여잡고 차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상대차로 다가가더니 운전석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에 타고 있는 것은 우리 또래의 청년이었다. “뭡니까?” “아, 저, 그게…….” 청년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유천을 올려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차가… 갑자기 급발진했어요. 저, 저는 세, 세우려고 했는데…….” “…….” “브, 브레이크가 안 들어서.” “지금 액셀 밟고 계시잖아요.” 유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청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유천의 말에 청년은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한참 청년과 이야기를 나눠보던 유천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들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다. 렉카가 몇 대나 출동하고, 보험회사 직원들이 다녀갔다. 청년이 초보인데다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액셀로 잘못 밟은 것으로 사고는 처리되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천이 다가와서 자신의 코트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친 데 없어?” 차에 쓸려 손등에 조금 화상을 입은 것 같았지만 그 이외에는 멀쩡하다. 유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보험회사 직원 차에 올라 사라지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그는 분명 당황한 눈빛이 아니었다. “너, 너는 괜찮아?” 몸이 떨려서 말도 더듬어져 나왔다. 나는 아랫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다. 유천은 대답 없이 길게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흘깃 나를 응시했다. 왠지 그의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조금 긴장한 채 유천의 눈치를 살폈다. 나 죽다 살아났는데 왜 그래? “문이나 열어.” 유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또 다시 담배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꺼내들었다. 이건 최악이다. 오늘은 정말 일진이 사납다. 연이어 터지는 사건사고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정말 최악이다……. + 집에 들어서서 아무 말 없이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나와 보니 유천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침대에 앉아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정신이 멍했다. 유천도 그저 화면을 바라볼 뿐 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밴드 하나를 뜯어 손등에 붙였다. 결국 미니쿠퍼는 폐차장으로 보내졌다. 언젠가 ‘차 바꿀까?’라고 묻던 유천의 말이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매일 투닥거리며 둘이 타고 다니던 귀여운 친구와 영원히 안녕이라니 좀 섭섭하다. “…유천아.” 나는 유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왜.” “몸은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아직은 괜찮아.” “병원 가봐야 되잖아.” “며칠 있다 가도 돼.” 유천은 차갑게 툭 잘라 내뱉었다. 하긴, 교통사고는 2, 3일 지나야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더라만. 그나저나 유천의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인다. 나는 그제야 유천에게서 술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 사람들 안 만난 건가? 나는 또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유천의 눈치를 보았다. 유천은 여전히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이 없다. “야.” “왜, 또.” “고마워.” 나는 전화의 오해건과, 낮에 때린 것, 좀 전에 날 살려준 것까지 더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역시 또 아무 말이 없다. 왜 그러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천의 옆에 앉아 가만히 손을 잡았다. 유천은 나를 흘깃 보더니 차갑게 손을 빼냈다. 나는 다시 손을 끌어다 잡았다. “야, 고맙다고. 그리고 아까 때려서 미안해.”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유천은 다시 차갑게 손을 빼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금세 인상이 확 구겨진다. 애써 기분 풀어주겠다고 이러고 있는데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란다. 미친놈아, 지금 여자랑 자고 온 게 누군데 튕겨, 튕기기는. “야.” 유천은 대답 대신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너 왜 그래?” “뭐가?” “…….” 저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내가 난생 처음 애교라는 걸 떨고 있는데 왜 반응이 없어? 이럴 수도 없고. 나는 짜증스럽게 유천을 바라보았다. 그래, 계속 싸우자. 그게 낫겠다. 나는 TV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TV만이 침묵을 깨며 웅성대고 있었다. “너 핸드폰은 어쨌어?” 저 말 나올 줄 알았다. “캐비닛에 두고 왔나봐.” “…….” “…….” 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TV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야.” “뭐.” 유천이 불쑥 말을 걸어오기에 쌀쌀맞게 받아쳤다. “한 3, 4일 강원도 갈 준비해.” “왜?” “나 내일부터 강원도 로케야.” “근데 어쩌라고?” “너 데리고 갈 거라고.” “내가 거길 왜 가냐, 미친놈아.” 나는 잔뜩 삐쳐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몰라서 물어?” “그래, 모른다. 왜?” 빈정대는 내 대답에 유천이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나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뭐? 노려보면 어쩔 건데?’ 따위의 말을 지껄여주었다. 유천이 갑자기 침대 옆에 놓인, 차에서 챙긴 물건들이 담긴 박스에서 구깃구깃 접혀 있는 신문 하나를 꺼내서 내 옆에 던졌다. 그리고 펼쳐진 일면 사진을 확인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청계천 사진이다. 무려 이재영과 내가 사람들에 휩싸여 있다가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 장면. ‘이재영, 청계천 깜짝 나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는 그야말로 내용 없는 가십 기사였다. 날짜를 확인하니 석간이다. 좀 전에 전국에 깔렸을……. 나는 쭈뼛쭈뼛 유천을 응시했다. 유천은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보시지 그래?” …변명할 입이 없다. 그냥 소문도 아니고, 언제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사진도 아닌, 신문기사 일면에 떡하니 났으니. 그리고 나는 이제야, 내가 얼마나 이재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참이었다. 재영은 이렇게 아주 사소한 일거수일투족까지 신문기사가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서면 김준수가 아니다. “…너처럼 자고 오진 않았거든?” 나는 나지막이 뾰족한 가시를 세워 유천을 쿡 찔렀다. 내가 쥐고 있는 유천의 최대 약점. 비죽이 비웃음도 흘려주었다. “그래서 잘 했다고?” “너보다는 낫다고.” 나는 유천의 서늘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지며 끝까지 저항했다. 유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잔소리 말고 내일 데리러 올 테니까 준비해 놔.” “웃기시네. 내일 나는 돈 벌러 일 갈 거거든요?” 유천은 내 비아냥에 당장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입이 잔뜩 나와서 TV 화면을 응시했다. “이 실장님. 저 박유천입니다. …네, 안녕하셨어요?” …이 실장이 누구야? “…영업지원팀 김준수 씨요. 내일부터 일주일간 휴가 처리 좀 부탁드립니다.” “뭐야, 너!” 유천의 통화 내용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나는 발끈해서 벌떡 일어났다. 유천에게 다가가서 핸드폰을 빼앗으려 하자 유천은 내 손목을 잡아서는 뒤로 확 비틀어 버렸다. 나는 몸을 비틀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 아파!” “…네, 부탁드립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네.” 내가 유천에게 팔이 꺾여 파닥대고 있는 사이 유천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유천이 팔을 놓아주자 나는 관절을 주무르며 씩씩대고 노려보았다. 유천은 ‘됐지?’라는 의미의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줄 알고 준비해.” 쐐기를 박는 유천의 한 마디에는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도대체 저 새끼가 뭔데 자기 멋대로 남의 휴가를 내라마라 할 수 있는지, 이 실장은 누군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야! 너 미쳤어?!” 어찌나 흥분했는지 쇳소리가 나왔다. “아직 제정신이야. 네가 이재영이랑 만나는 게 한 번 더 눈에 띠면 그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유천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내뱉었다. 박유천, 미안한데 나는 제정신이 아니거든? 내가 고작 22살 밖에 안 됐고, 사회생활이 뭔지 아직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건 아니잖아. 네가 얼마나 잘난 집 자식이기에, 내 직장 일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지는 몰라도 나 무지 자존심 상했어. 알아, 새끼야? “재수 없는 새끼!” 나는 씩씩대며 유천에게 다가가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잘난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주먹은 목표했던 제자리에 닿지도 못한 채 허공에 멈춰 섰다. 대신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춤 물러서야 했다. 유천이 내 눈앞에 들이댄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재영과 내가 병원에서 입맞춤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사진……. 이건 완전 대박이다. 박유천이 날 죽일 지도 모르고 이 자리에서 당장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지도 모르는 사진인 것이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나는 또 다시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유천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누가 어떻게 찍은 건지 지금 알아보는 중이야. 지난번에 그 새도. 넌 그 다음이니까 내일 데리러 올 때까지 닥치고 준비나 해. 무인도 별장에 갖다 처박아버리기 전에.” 말투 봐라. 드디어 화산이 폭발했구나……. 사진을 들이댄 유천의 서늘한 눈빛은 나를 꿰뚫고 지나갈 것처럼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천은 다시 상자에서 작은 페이퍼백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버버리 로고가 선명하게 찍한 쇼핑백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잔뜩 굳어서 유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천은 나를 흘깃 보더니 그대로 옷을 집어 들고 집을 나가버렸다. “후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서 나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오늘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구나 싶다. 미친 차에 한 번, 박유천한테 한 번. 역시 유천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명희 씨 사진을 추궁하자 화낼 타이밍을 놓친 것일 뿐. 저런 용의주도한 자식.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툴툴댔다. 그나저나 박유천은 포켓몬이라도 되나보다. 한 달 사이에 진화했다. 화내는 포스며 기술이 장난이 아니다. 어릴 때랑 비교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저것보다는 좀 약했던 것 같은데……. 오늘 박유천이 하나하나 추궁하는 것마다 나는 변명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살기 어린 눈빛에 찔려 죽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는 친구라서 잘 몰랐던 모양이다. 사귀고 나서 박유천은 본격적으로 나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정윤 형 때문에 불처럼 화를 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박유천은 독점욕이 장난이 아닌 인간인 것 같다. 저렇게까지 내 뒤를 캐내다니 - 캐낸 것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 정말 무섭기까지 하다. 나는 한편으로는 몹시 겁에 질린 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이 코가 꿰어버린 것 같은 내 인생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복잡한 기분을 맛보았다. 문득 유천이 두고 간 버버리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내 꺼니까 두고 갔겠지? 그러고 보니 어제 목도리 사준다고 했었는데. 장난이었는데 진짜 사왔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쇼핑백을 뜯어보았다. 안에는 내가 탐냈던 버버리 목도리와 함께, 장난으로 얘기한 지갑까지 곱게 포장된 채 들어 있었다. 그래, 박유천은 이런 놈이다……. 미친 새끼, 집에서 카드도 정지당했으면서 돈은 어디서 나서 사왔대. 나는 또 다시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피식 웃고 말았다. + 감은 눈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쳐들었다. 햇빛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조금 돌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이내 눈 위로 작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는 만족스럽게 유천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자세를 조금 바꿨다. 유천의 어깨……? 순간 머리에 떠오른 단어에 흐릿하던 의식이 순식간에 돌아온다. 살짝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내 눈 위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유천의 손이 보였다. 역시 나는 유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때 정수리 근처에 유천의 입술이 가만히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한 가닥씩 잡아 넘기는 손길도 간지럽다. 괜히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다시 눈을 꾹 감아버렸다. 우리 사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구석이 너무 많다. 싸운 게 바로 어제인데, 나는 그 녀석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고, 박유천은 또 그런 내게 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니……. 이럴 때 보면 나도 나지만, 박유천도 참 속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린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사진을 본 상황인 것이다. 나는 때려주기라도 했지만, 박유천은 어제 나한테 손도 안 대고 무인도에 처박아버리겠다는 협박만으로 끝냈다. 하긴, 그 말이 패는 것보다 더 무섭게 들린다. 박유천은 한 번 한다면 하는 인간인 것이다. 한 번만 더 걸렸다가, 나는 진짜 무인도에 갇혀 라푼젤처럼 머리를 기르고 유천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될 지도 모른다. 덜컹하고 차가 조금 흔들렸다. 나는 여전히 자는 척하며 유천의 어깨에 기댄 채 순간의 여유를 즐겼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또 다시 어색한 침묵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낮에 유천이 데리러 왔을 때부터 내내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니쿠퍼와는 어젯밤에 이별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유천의 이동용 벤에 올라 강원도를 향하고 있었다. 아직 좌석에 비닐도 다 벗기지 않은 새 차다. 처음 알았다. 사무실에서 유천에게 차를 내준 줄은. 워낙 관심이 없다 보니 이재영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것도 이제야 알았으니까. [솔직히 사랑이란 건 안 믿었거든? 그런데 내가 지금 그 지경인가 봐. 되게 바보 같지 않냐?] 이럴 때 왜 재영의 말이 떠오르고 난리야……. 그거 고백 맞지? 갑자기 환청처럼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유천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더 이상 자는 척 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몸을 일으켜 앉아야 했다. 유천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기대어 잠들었던 어깨를 조금 주무르며 무심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나도 유천의 눈치를 조금 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가 밀리나 보다. 창밖으로 느리게 겨울 풍경이 지나갔다. 잎이 전부 떨어져서 앙상한 가지에 뒤덮인 산과 말라버린 들판. 도시에서도 ‘산’을 상상하라고 한다면 금세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산이 저런 모습인 것은 겨울 한 계절뿐이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의 산을 떠올리는 것보다 저렇게 나뭇가지가 앙상한 겨울 산을 떠올리는 것이 훨씬 쉽다. 마치 내 기억 속의 산은 겨울 풍경밖에 없는 것 같다. 어째서일까? “…….”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다가 어쩌면 지금 내 마음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왜 한숨이야?” 불쑥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데리러 와서 ‘타’라고 했던 이후로 3시간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다. 독한 새끼. 속으로 투덜거리며 흘깃 노려봐 주다가 눈이 마주쳐서 찔끔하고 시선을 돌렸다. 옆얼굴에 유천의 시선이 계속 와서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모르는 척 하고 창밖을 보고 있는데도 신경이 곤두서서 얼굴이 달아오르려고 한다. 이놈의 얼굴은 도대체가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시도 때도 없이 빨개지고 난리야……. “야.” “왜.” “팔 아파.” “근데.” 나는 유천을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퉁명스러운 척’이다. 유천의 눈빛 덕분에 얼굴은 이미 화끈거리고 있었으니까. “네가 기대고 자서 그렇잖아. 어깨 빠지겠다, 머리에 든 것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무겁냐.” “네 어깨가 부실한 거 아니고? 사람 머리 무게도 못 이기는 거 달고 다니면서 엄살은.” 내 비아냥에 유천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릎에 얹힌 손을 유천이 감싸 쥐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비틀어 빼내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 “…….” 유천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차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은 탓이다. 그래, 문제는 전부 사진인 거다. 도대체 박유천은 그 사진을 어디서 났을까?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흘깃 유천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야.” “어?” “…그 사진 어디서 났어?”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또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긴 이건 지금 묻고 답하기도 좀 그렇다. 불가항력이었다고는 하나, 내가 멀쩡한 애인을 놔두고 외간 남자와 입을 맞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당장 날 어떻게 하려고 달려들었을 박유천도 아마 지은 죄가 있어서 어제 그 핵폭탄 급의 사진을 보고도 협박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건 쌍방 과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추궁도, 해명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묘한 분위기가 흐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 이런 건 정말 싫다. 박유천의 그 사진을 봤던 기억을 그냥 머릿속에서 삭제해버렸으면 좋겠다. 박유천이 명희 씨와 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모르면 그만인 거다. 왜 박유천은 그런 사진을 찍혀서 나를 이렇게 속상하게 하는지 정말 짜증나서 미치겠다. 내가 재영과의 사진만 안 걸렸어도 몇 대 더 때려주는 건데. 그때 유천이 말을 걸어왔다. “야.” “왜.” “휴전.” 뭐라는 거야, 저 새끼는? 나는 흘깃 유천을 바라보았다. 유천은 창틀에 턱을 괸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뭔 헛소리야.” “휴전하자고. 서울 돌아갈 때까지 어제 얘기 꺼내지 말자.”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받아들이기도 그렇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그렇고……. 하긴, 어제 그렇게 무섭게 굴던 박유천이 저렇게 먼저 숙이고 나오는데. 게다가 유천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것이다. 어제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을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박유천이 아니었으면 나는 영안실 내지는 입원실에 누워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구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유천의 매니저는 깜빡이를 켜 차선을 변경했다. 벤은 천천히 고속도로 휴게소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점심도 못 먹었구나. “너 배 안 고파?” 또 다시 유천이 말을 걸어왔다. “안 고파.”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대답과 동시에 내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들려왔다……. “…….” “…….”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슬쩍 유천을 훔쳐보자. 유천이 피식 웃는다. 나는 금세 얼굴이 달아올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휴, 내 캐릭터가 늘 이렇지, 뭐……. 휴게소에서 떡볶이와 구운 감자, 오징어와 음료수, 기타 간식거리를 잔뜩 사서 실었다. 유천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내가 품에 한 가득 군것질거리를 들고 나타나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유천의 웃음에 나도 그냥 웃어버렸다. 유천의 휴전 발언 때문인지 벤 안에는 아까보다 많이 부드러워진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떡볶이를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가며 유천의 눈치를 보았다. 심심해 죽겠는데 재수 없는 박유천은 내가 사다준 라떼를 마시며 이어폰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고 음악을 듣고 있다. 전처럼 막 장난치고 달라붙고 싶은데, 차마 자존심 때문에 못하겠다. 뇌가 없냐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박유천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나는 이렇게 옆에만 있어도 좋아 죽겠으니 어쩔 수 없는 거다. 나는 괜히 유천의 손에서 커피를 빼앗아 한 모금 마셨다. 유천은 고개를 들어 나를 흘깃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mp3 플레이어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 자식은 뭐 좋은 게 있다고 계속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어. 나는 또 눈치를 보다가 실수인 척 유천의 발을 툭 걷어찼다. 하지만 유천은 조금 더 자기 쪽으로 발을 끌어당길 뿐, 이번에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이러면 휴전한 보람이 없잖아, 새끼야! 나는 조금 더 눈치를 보다가 유천의 이어폰 한 쪽을 쑥 빼들었다. “뭐 들어?” “그냥.” 유천은 의미 없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들리는 음악만으로 로비 윌리엄스의 Supreme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아예 mp3 플레이어를 빼앗아 들었다. 아, 진짜 김준수, 관심 끌려고 별짓을 다 한다. “와, 이게 언제적 노래야?” 지나치게 오버액션이 섞인 내 말에 유천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까지 빼서 내게 건넸다. “왜?” “들려줄 거 있어.” “뭔데? 같이 들으면 안 돼?” “어.”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유천에게 이어폰을 받아들고 양쪽 귀에 꽂아 넣었다. Supreme이 멈추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유천은 선곡을 하는 듯 mp3 플레이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유치하다고 웃지 마.” “알았어.” 유천의 말에 벌써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뭔데 이렇게 시작부터 거창할까? 그런 내게 유천은 둘째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웃지 말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알았다고 끄덕끄덕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천이 플레이 버튼을 꾹 누르는 것이 보였다. 이어폰에서 박유천의 취향에 전혀 안 맞는, 지나치게 가볍고 경쾌하고 유치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볍고 쉬운 일본어 가사였다. 나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유천이 mp3 플레이어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액정에 가사가 흐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킥킥거리며 웃고 있던 나는 가사 첫 줄을 읽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LOVE YOU ONLY - TOKIO 君が [君が] 君が 熱い ?をするなら (키미가 (키미가) 키미가 아츠이 코이오 스루나라) 네가 뜨거운 사랑을 한다면 世界で 僕しかいない (세카이데 보쿠시카 이나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 君が 好きだよ [君が好きだよ] 早く 言わないと (키미가 스키다요 (키미가 스키다요) 하야쿠 이와나이토) 널 좋아해 (널 좋아해) 라고 빨리 말하지 않으면 胸に あふれて 張り裂けそうだ (무네니 아후레테 하리사케소오다) 가슴에 가득 넘쳐서 터져버릴 것 같아 (…중략) 君と [君と] 僕が 燃える?をするなら (키미토 (키미토) 보쿠가 모에루 코이오 스루나라) 너와 (너와) 내가 불타는 사랑을 한다면 無敵の二人に なれる Only you. (무테키노 후타리니 나레루) 우린 무적일 거야 熱い [熱い] 本?の?をするなら (아츠이 (아츠이) 혼-토오노 코이오 스루나라) 뜨거운 진실한 사랑을 한다면 世界で 君しかいない (세카이데 키미시카 이나이) 이 세상에 너밖에 없어 君が [君が] 君が 熱い?をするなら (키미가 (키미가) 키미가 아츠이 코이오 스루나라) 네가 뜨거운 사랑을 한다면 相手は 僕しかいない Only you (아이테와 보쿠시카 이나이) 상대는 나 밖에 없어 熱い [熱い] 本?の?をするなら (아츠이 (아츠이) 혼-토오노 코이오 스루나라) 뜨거운 진실한 사랑을 한다면 世界で 僕しかいない (세카이데 보쿠시카 이나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 ‘노래는 마음을 담기 위해 탄생했다.’ 어디선가 읽은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곡이 끝날 때까지 액정을 내려다보며 가사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렸다. 정말 미치도록 유치한 가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손쉬우면서도, 가슴에 바로 와 닿는 고백 방법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나는 LOVE YOU ONLY가 끝나고, 다음 곡이 한참이나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액정에서 눈을 떼고 유천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멋쩍게 웃으며 이어폰을 빼내 유천에게 돌려주었다. 유천은 딱히 무슨 말을 듣기를 바란 것은 아닌 듯, 싱긋 웃으며 mp3 플레이어를 정리해서 집어넣었을 뿐이다. 아까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어색한 공기가 잠시 감돌았다. 나는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괜히 떡볶이를 쿡 찍어서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명희 씨랑은 왜 그랬냐고. 드라마로 치면 박유천의 테마 곡은 ‘나만 바라봐’ 정도 되려나? 웃긴다, 박유천, 너 말고도 나 좋다는 사람 많거든? 아, 진짜 미치겠다. 자꾸 웃음이 난다. 박유천은 가끔 저렇게 미치도록 귀엽다. “아-.”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나는 선심 쓰듯 떡볶이를 이쑤시개로 찍어 유천에게 내밀었다. 유천은 콜라 캔을 집어 들다가 내가 내민 떡볶이를 받아먹기 위해 순순히 입을 벌렸다. 순간 또 왜 나는 장난기가 동하는 건지……. “어어!” 차가 흔들리는 것에 맞춰 유천의 얼굴에 떡볶이를 슥 문질렀다. 금세 유천의 얼굴에 붉은 줄이 쭉 생겼다. “아, 뭐야.” “미안.” 유천의 투덜거림에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서둘러 입술을 깨물었다. 유천이 인상을 쓰며 물티슈를 꺼내 얼굴을 닦는 것을 보고 있자니 계속 웃음이 나온다. 장난이었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유천이라는 걸 알기에 떡볶이를 그냥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건 안다. 다른 문제가 터진다면 또 다시 이것까지 끄집어내서 싸울 것이 분명하다. 그 사진을 생각하면 사실 박유천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다. 재영에게 했듯이 명희 씨에게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간신히 풀린 분위기를 또 다시 살얼음판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일시적 소강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유천의 휴전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랑은 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법이니까. “자, 아-.” 나는 또 하나를 찍어 유천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장난을 할 생각이다. 유천은 여전히 아무 의심 없이 어미닭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병아리처럼 입을 벌려준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또 다시 떡볶이를 유천의 얼굴에 슥 문질렀다. “야.” “차가 흔들리잖아!” 불만 섞인 유천의 표정에 나는 되레 큰 소리를 쳤다. 유천이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내는 것을 보며 나는 또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내 방식의 복수일지도 모른다. 아주 소심한. “아-.” “안 먹어.” “아-.” “너나 먹어.” “아-.” 나는 고집스럽게 유천에게 떡볶이를 들이댔다. 유천이 잠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생긋 웃어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유천의 얼굴에 붉은 줄을 죽 그어버렸다. “아씨, 김준수!” “으항항항!” 발끈하는 유천의 표정에 이번에는 나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천이 험악하게 나를 노려보며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냈다. 나는 키득거리며 떡볶이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슛!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천의 손에 들려 있던 콜라 캔에서 폭발하듯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콜라를 홀딱 뒤집어쓰고 말았다. “야, 뭐야!” 머리에서 콜라를 뚝뚝 떨어뜨리며 노려보자 유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콜라’라며 입구를 막고 또 캔을 흔든다. 나는 서둘러 옆에 놓인 사이다 캔을 집어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이다 캔을 따기도 전에 나는 유천에게 2차 콜라거품 공격을 받아야 했다. “씨발, 죽었어!” 내가 또 다시 머리에서 콜라를 뚝뚝 떨어뜨리며 소리를 지르자 유천이 후다닥 뒷좌석으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뛰어봤자 벼룩이다. 이 좁은 차안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고, 유천에게는 이제 무기도 떨어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유천에게로 다가갔다. “하지 마, 김준수.” “네가 먼저 했어.” “네가 떡볶이로 먼저 시작했잖아.” “내가 언제?” “또 저래… 윽!” 유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사이다 캔 뚜껑을 따버렸다. 푸슛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뿜어져 나갔다. “으항항항항!” 나는 사이다 거품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유천을 보며 신나게 웃어젖혔다. 그때였다. 유천이 내 손에 들린 사이다 캔을 덥석 움켜잡았다. 나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매달렸다. “놔.” “싫어!” “말로 할 때 놓으라고.” “싫다고!” 놓으면 내가 또 뒤집어쓴단 말이다. 너라면 놓겠냐? 나는 유천의 힘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캔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유천은 마치 다 잡은 물고기를 끌어올리듯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시 봐도 재영의 비웃음과 닮았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그렇게 속으로 툴툴대고 있을 때였다. “어이! 뒤에 두 사람! 내가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콜라, 사이다, 차에 다 쏟아놓으면 누가 치우라는 거야! 어?!” 매니저 형의 고함소리에 우리는 둘 다 찔끔하고 말았다. “바닥에! 벽에! 얼룩지면 어떻게 지우라고! 뽑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차를!” 우리는 눈을 도르륵 굴려 마주쳤다. 그리고는 뒷좌석 깊숙이 몸을 웅크리고 숨어버렸다. 고개를 좌석 등받이 아래로 푹 숙이고 딱 붙어 앉아 숨을 죽이고 있자니 꼭 고등학교 때 나란히 수업 땡땡이 치고 도망가던 생각이 난다. “그거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죄송해요, 형. 저희가 치울게요.” 매니저의 고함이 계속 이어지자 유천이 고개만 빠끔히 내밀어 사과했다. 이 상황이 왜 이렇게 웃긴지. 나는 킥 하고 웃어버렸다. 정말 우리는 둘 다 못 말린다. 우린 기억력 따위는 없나보다. 단 몇 분 만에 어색했던 공기를 날려버렸다. 그것도 다른 연인이라면 당장 헤어진다는 말까지 나왔을, 무지무지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저 분이랑 말 텄어?” “어. 형이라고 부르래.” “몇 살인데?” “28인가, 29인가?” “아저씬데.” 우리는 매니저의 고함소리가 끝났는데도 뒷좌석에 웅크리고 숨어 이렇게 한참을 키득거렸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유천은 내 손을 끌어다가 깍지 껴 잡았다. 음료수 때문에 끈적한 느낌이 났지만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유천은 장난기가 사라진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가만히 웃었다. 그 진지한 눈빛에 얼굴이 슬그머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너.” 유천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흘깃 유천을 바라보자 유천의 눈동자에 또 다시 장난기가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아까 욕했지?” “그게 뭐.” “어, 기억 안 나나 보네?” “뭐, 어쩌라…….” 퉁명스러운 내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욕 한 번에 키스 한 번’이라던 유천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당황해서 굳어진 표정으로 또 다시 유천을 흘깃 바라보았다. 유천은 턱까지 괴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그거 진짜 실행할 생각이었던 건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앞에서 보면 어쩌려고……. 나는 뻣뻣하게 굳어지기 시작한 손을 슬쩍 빼내며 몸을 일으켰다. 안전지대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유천에게 다시 손목을 잡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왜, 왜 그래?”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지만, 억지로 지은 웃음은 딱딱하기 그지없고, 말은 더듬어서 나온다. 아 진짜 김준수! 병이냐?! 말은 왜 자꾸 더듬냐고! 그때 유천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따뜻한 손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미치겠다. 유천의 손이 닿으니 막 간질간질하고 소름이 끼친다. 아무래도 나는 귀가 예민한 편인 모양이다. 귓불에 와 닿는 유천의 체온에 불안하게 그를 응시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귀 안 아파?” “응?” “새로 뚫은 데, 괜찮냐고.” “괘, 괜찮아, 안 아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대답했다. 결국 오른쪽 귀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귀까지 새빨개져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유천이 귓불을 꾹 눌러왔다. “앗!” 갑자기 느껴진 알싸한 통증에 나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꾹 감았다. 촉! 뭔가가 빠르게 귓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귓가에 느껴진 유천의 따스한 숨결에 오싹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나는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유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유천은 여전히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봐줬다.” “미치…….” 나는 불타는 홍당무가 되어 욕설을 내뱉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유천은 더 해보라는 듯 비스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변태 새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안타깝게도 용기가 없는 나는 유천을 노려보며 속으로만 악을 써대야 했다. 일몰이 시작되었다. 차가 많이 밀린다. 햇살이 눈부시던 하늘은 어느새 눈을 쏟아 부을 듯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고속도로 위에서 저물고 있었다. + 물티슈로 대충 닦아낸 음료수는 계속해서 끈적하게 나를 괴롭혔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옆에 앉은 박유천에게서 쌉쌀한 불가리 블랙 대신 달큰한 레몬라임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불가리 블랙은 박유천의 향기다. 어른스럽고 쌉쌀한 향기. 유천에게서 불가리 블랙 향이 날 때는 꼭 접근 금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대하기가 좀 어렵다. 하지만 요 사이 보기 드물게 서늘한 카리스마를 벗어버리고 달착지근한 레몬라임향기를 풍기는 박유천은, 마구 끌어안고 비비적거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물론 충동은 충동에서 끝났다. 유천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려 보고 싶은 것을 매니저 형 때문에 참아야 했으니까. 대신 나는 유천의 커다란 손을 꼭 잡고 창밖을 응시했다. 서울을 떠난 지 6시간 째. 몸이 다 뻐근하다. 창밖은 어둠이 내려 캄캄했다. 그리고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우리는 지치지도 않는지 딱딱하게 말라붙어 잘그락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놀려대거나,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빈정거렸다. “너 그 CF 되게 멍청해 보여. 몰랐지?” “잘생긴 형님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는 거다, 꼬맹아.” “멍청한 표정이 부러운 사람이 어디 있냐, 미친놈아.” “넌 까칠한 게 매력이라고 생각하나본데, 그딴 건 개도 안 가져. 동물농장 못 봤냐? 까칠한 개는 개과천선 당하는 거?” “입에 지퍼 달고 싶냐? 확 꿰매줄까?” 아마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이런 장면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우리가 굉장히 사이가 안 좋은 줄 알 것이다. 오히려 사이가 너무 좋아서 문제라고 하면 웃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를 간과하고 만다. 모든 연인들에게 벌어지는 문제의 원인은 바로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연인들은 의심하고, 싸우고, 헤어진다. 얼핏 그것은 모든 러브 트러블의 근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 모두에게 보인다면 어떨까? ‘사토라레’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사토라레’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마음속을 들켜버리고 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드라마 상에서는 이 사토라레들에게 천재성이 있어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토라레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생각을 전부 들을 수 있지만 모른 척 해야 한다. 게다가 드라마 속에서 사토라레인 주인공은 짝사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주위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랑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 심지어 짝사랑의 대상인 ‘그녀’까지도 말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가?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모두 읽힌다니……. 나는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의 마음은 때때로 우리가 겉으로 보는 것만큼 깨끗하고 고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이 겉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 사랑이 꼭 아름답고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되어 그 마음을 측정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그 반대의 이유로 말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강한 법이며, 사랑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내가 박유천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설프게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다 보니 창밖으로 멀리 스키 슬로프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L 리조트인 모양이다. 내가 다니는 놀이공원의 계열사다. 과연 문어발 확장을 거듭하는 대기업답게 손이 닿지 않은 사업 분야가 없다. 나는 창밖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웅장한 호텔 급의 건물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침 떨어진다, 턱받이 사줄까?” 유천의 놀림에 흘깃 노려보았더니 손가락으로 내 턱을 슥 들어 올려 다물게 한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유천의 손을 툭 쳐내버리고는 다시 건물로 눈을 돌렸다. 이런 곳은 하룻밤에 얼마일까? 나 사원증 있으니까 여기 70% 할인일 텐데. 여긴 할인 받아도 엄청 비싸겠지? 혼자 예상해 보다가 그만 두었다. 어차피 다시 올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여기서 찍는 건 뭐야?” “너희 놀이공원에서 찍던 거.” “그게 끝 아니었어?” “브랜드 마케팅이잖아. 계열사 전체 다 찍는대.” 정말 대대적인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나 보다. 계열사 전체가 다 나오는 광고라니. “그걸 네가 찍어도 돼?” “여기서 찍는 건 얼굴 안 나와. 보드 타는 장면이라는데 이사님 상처 때문에 아직 많이 못 움직이니까.” “너 그거 탈 줄 알아?” 문득 든 궁금증에 무심코 유천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나는 왜 몰랐지? 유천을 응시하며 가만히 기억을 뒤적여보았지만 전혀 아무것도 없다. 왜 몰랐을까? “언제부터?” “예전부터.” “예전에 언제?” “생각 안 나.”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인데, 별일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유천의 대답에 기분이 이상해진다. 유천의 오랜 지기로서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하긴 지난달까지만 해도 유천의 어릴 때 친구라는 명희 씨라는 존재도 까맣게 몰랐으니까. 물론 다른 사람을 100% 알 수는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해 쩔쩔매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하물며 자신에 대해서는 저렇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열지 않는 박유천임에야.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했어.” “웃기시네. 네가 언제?” “같이 가자니까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안 했거든?” “고2 겨울방학 때 보드 타러 가자고 했더니 축구 경기 보러 가야된다고 싫다고 했잖아.” “…….” 기억에 없다. 하지만 고2의 겨울방학 때였다면 분명히 저렇게 대답했을 만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팀의 경기가 잔뜩 있었던 해니까……. 내가 박유천에 대한 기억을 확실히 담아두기 시작한 것은 고3의 첫키스 이후부터라서, 그 이전의 기억은 안타깝게도 이런 지경이다. 바꿔 말하면 유천이 별 걸 다 기억하고 있다고나 할까?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는 어떻게 그런 것도 다 기억하냐……?”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에 말끝을 흐렸다. “좋아했으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을 때 마주친 유천의 검은 눈동자는 그저 싱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이 당황스럽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눈을 피하고 말았다. 벤이 지하주차장으로 접어들었다. 유천은 차를 치우고 올라갈 테니 매니저 형과 먼저 방에 올라가 있으란다. 같이 하자고 했더니 끈적거린다고 자기한테 신경질 부리지 말고 먼저 올라가란다. 신경질 잘 부리는 건 자기 얘기 아닌가? 사돈 남 말한다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멀뚱멀뚱 보고 있었더니 ‘빨리 안 올라가면 나랑 같이 샤워해야 될 텐데?’란다. 유천의 말에 찔끔해서 ‘가, 갈게’하고 몸을 돌리고 말았다. 등 뒤로 들리는 유천의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영악한 자식. 내 약점을 잘도 찔러댄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주먹을 꼭 쥐고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 쏴아아 소리를 내며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샴푸를 듬뿍 손에 받아 콜라로 딱딱해져버린 머리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욕실이 굉장히 넓다. 여기가 콘도인지 호텔인지 모르겠지만, 욕실 뿐 아니라 모든 시설이 굉장히 좋다. 방도 박유천네 아파트만큼 넓고 벽난로도 있다. 학교 MT나 따라다녀 본 나는 단체용 민박집만 가봤지, 이런 곳은 처음이라 방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방은 도대체 하룻밤에 얼마일까? [딩동♬] 갑자기 벨소리가 들려서 당황했다. 유천이 올라온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샴푸 거품을 헹궈내고 타월을 허리에 둘렀다.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지만 얼른 문만 열어주고 올 생각으로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나.” 역시 유천이다. 나는 얼른 문고리를 돌려 문을 살짝 열었다. 유천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이기에 후다닥 욕실로 되돌아왔다. 나를 봤는지 문밖에서 으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괜히 욕실 문 너머의 유천에게 입을 삐죽대고는 다시 촤르륵 샤워커튼을 쳐버렸다. 나는 아무래도 병인가 보다. 박유천이 좋아 죽겠다면서 왜 가까이만 오면 이렇게 긴장되고 몸이 굳는지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박유천한테 만날 놀림이나 당하고, 진짜 짜증난다. 투덜투덜하며 몸에 비누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달칵.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내가 문을 안 잠갔던가? 나는 비누칠을 하던 그대로 동작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천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세면대에서 쏴아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문을 안 잠갔던 모양이다. 어쩌지? 나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샤워커튼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긴 뭘 어째! 별 일 아니다. 어차피 박유천도 남자, 나도 남자. 목욕탕 가면 잔뜩 보는 광경이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다시 비누칠을 재개했다. 하지만……. “야.” “으, 응!” 갑자기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지나치게 크게 대답해버렸다. 목욕탕 가면 잔뜩 보는 광경이긴 하지만… 제길, 박유천은 그냥 남자가 아니라 내 애인이란 말이다! “빨리 나오라고.” “아, 알았어. 다 했어.” 나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어색하게 대답하고는 또 다시 비누칠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있어도 유천이 나가는 소리가 안 들린다. 나갔는데 내가 못 들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샤워커튼을 조금 젖혔다. “……!” 문 앞에 기대서 있는 유천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서둘러 잡았던 샤워커튼을 내려버렸다. 유천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세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귀까지 욱신거린다. 빨리 안 나가고 뭐하는 거야, 저 자식은.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샤워기를 틀어 서둘러 비눗기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얼굴 빨개졌지?” 다 알면서 뭘 묻고 그러시나. 저 변.태.같.은. 자.식. “나가.” “싫은데.” “빨리 꺼져.” “싫어.” 샤워 커튼 너머 유천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얼굴이 더 달아오른다. 나는 더 손을 바삐 움직여 비눗기를 씻어 내렸다. “웃지 마, 미친놈아.” “한 번.” 뭐래? “꺼지라고, 변태 새끼야.” “두 번.” 유천의 말에 ‘뭐가 두 번이야, 미친놈.’하고 중얼거렸다. “다 들려. 세 번.” 세 번이고 뭐고……. 나는 샤워커튼 밖으로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리고 있는 유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는다, 빨랑 꺼져!” 유천이 으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씩씩대며 붉어진 얼굴로 유천을 매섭게 노려봐주었다. 그때 유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유천이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나는 샤워커튼을 거친 손길로 내리고는 다시 비눗기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어, 명희야.” 그때 또 다시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단어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유천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 네가 말한 건 다 팔았어. “주식은?” - 글쎄, 아저씨한테 사정해 보고 있긴 한데. “이모부 때문에 시작했으니 발뺌 못 하실 거야. 강제로 떠넘겨 버려.” 유천의 말을 끝으로 달칵 문이 열렸다 닫혔다. 쏴아아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조용히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저렇게 단편적인 말만 갖고는 무슨 소리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박유천이야 경영학 전공에 있는 집 자식이니 주식이든 뭐든 충분히 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지금 문제는 상대가 명희 씨라는 것이다. 그런 사진을 찍혀서 나랑 싸우고 휴전까지 해 놓고는……. 기분 나쁘다. 지나친 집착이라든가, 몹쓸 질투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기분이 잔뜩 상해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밖으로 나왔는데 유천은 보이지 않았다. 타월을 머리에 덮어쓰고 물기를 털어내며 두리번거리자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나는 베란다로 다가가서 문을 조금 열고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너 집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 텐데 미안하다.” - ……. “어. 박 회장님은 만났어?” - ……. “윽, 조만간 나 잡으러 사람 보내시겠다?” 재영의 병문안을 갔을 때도 들었던 박 회장님. 누굴까? 누군데 박유천을 잡으러 사람을 보내? 설마 저 자식 조직에 몸담은 건가? 아니면 사채? 명희 씨는 사채 딸? 그리고 박유천과 가져서는 안 되는 관계를 가졌고, 그 때문에 열 받은 명희 씨 아버지한테 박유천이 쫓기는 건가? 하지만 명희 씨는 이 씨인데?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상상력이 끝도 없이 증폭된다. 그런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서 씁쓸히 웃다가는, 다시 이어지는 유천의 목소리에 잔뜩 미간에 인상을 쓰고 더욱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거, 준수가 벌써 알았더라.” - ……? “맞았지, 뭐. …뭘 어떡해, 벌써 알았는데. …잘 모르겠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명희 씨와 찍힌 호텔 사진 이야기일 것이다. “넌? 부모님이 아무 말 안 하셔?” - ……? “아니, 아직. …우리 집? 연락 없이 잠잠한 거 보면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다들 그렇게 생각해야 할 텐데. - ……? “어, 카드 끊겼어.” 카드 정지된 건 모델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준수 사진은 알아보는 중이야. 워낙 흔적이 없어서 시간이 걸릴 것 같대. …모르겠어. 이재영도 엮여 있고 해서 불안해.” 나와 재영의 사진. 알아본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어, 그래. 조심하고, 전화할게.” 유천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듯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유천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나에게는 못하지만 명희 씨에게는 가능한 이야기. 도대체 뭘까? 기분이 이상하다. 질투나 화가 난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박유천이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 아니, 내 것이었던 박유천이 점점 내 것이 아니게 되어 가고 있는 느낌. 아니… 내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느낌……. 가슴 언저리에 희미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뭔가를 빼앗긴 느낌과 비슷하다. 가슴이 뻥 뚫려 찬바람이 휑하니 부는 것 같은 기분… 아릿한 고통… 상실감……. 순간 서운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참으며 베란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지금 물어본다고 해서 입을 열 박유천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유천이 담배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명희 씨지?” 나는 유천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채 중얼거렸다. “어.” “무슨 얘기 했어?” “그냥…….” 유천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끝을 흐렸다. 짧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쌀쌀한 겨울바람이 스쳐가자 막 샤워를 마친 몸에 오싹 한기가 느껴져 흠칫 몸을 떨었다. “…너.” 나는 잠깐 말을 쉬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너 명희 씨 좋아하냐?” 이번엔 오랜 침묵이 흘렀다. 유천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베란다 난간에 담배를 비벼 껐다. 목덜미를 따라 차갑게 식어버린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 “솔직히 얘기해도 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 나지막한 말에 유천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싸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오스스 소름이 돋아 또 다시 흠칫 몸을 떨었다. 추위에 입술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이 성큼 다가서더니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유천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유천은 베란다 문을 닫더니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아무 반응 없이 그냥 유천에게 안겨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유천에게는 아직 레몬라임향이 남아 있었다. 방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감기 걸리겠다.” 유천이 내 차가운 귀 끝에 자신의 볼을 갖다 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유천아.” “어.” “…나 좋아해?” 유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또 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따뜻한 실내에 들어왔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왔다. 유천의 침묵이 무서웠다. 마치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준수야.”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몸 안에서 울림을 만들고 나에게 가만히 전해져 와서 공명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천은 천천히 내 어깨를 밀어내 몸을 떼어냈다. 검고 진지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바닥에 눈물이 똑 하고 떨어져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유천은 가만히 내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유천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심장만이 조용히, 그러나 성실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유천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겁이 났다. 마음이 변했다는 걸까? 무섭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였다. “갈라서 보여주고 싶어.” “……?”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나는 눈을 천천히 들어 유천을 응시했다. 유천의 진지한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똑바로 나를 담고 있었다.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조용히 이어졌다. “너한테 미움 받는 거 굉장히 힘든데, 너한테 거짓말 하기는 더 싫어.” “…….” “네가 나 못 믿는 거 알지만 지금은 좀 말하기가 힘들어.” “…….” “그래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 “너 이재영한테 흔들리는 거 알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래서 떼어놓으려고 너한테 못된 짓까지 했는데……. 너 전엔 내가 겁주면 안 했었잖아…….” 말끝을 흐리는 유천의 목소리에 코가 찡하다. 너는 이런데 나는… 도대체 내 안에 자란 불신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크기인걸까? “…준수야, 그래도 난 널 믿어.” 유천의 올곧은 목소리. 그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담긴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 결국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재영에게 흔들리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믿는다니, 도대체 저 맹목적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조차도 내 마음을 알 수 없는데……. 게다가 처음부터 내가 재영에게 흔들릴 줄 알았다니……. 도대체 넌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박유천과 동일 인물일까? 내가 알고 있는 어디까지가 너의 본질일까? 정말 너란 사람은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네 가슴을 갈라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너의 진심이라면……. 그래… 그걸로 됐어. 네가 명희 씨를 좋아한다고 네 입으로 말하기 전까지… 널 믿을게. 내 사랑. My Beloved. 사랑해, 유천아. + “또 운다.” 유천이 나지막이 책망하며 손을 들어 내 볼을 닦아냈다. 찬바람에 유천의 손끝은 싸늘히 식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유천의 손을 피하고는 서둘러 눈물을 훔쳐냈다. 박유천 때문에 줄줄 우는 법만 자꾸 배우는 것 같다. 요즘에는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꿈이 아닌가 의심마저 든다. 그런걸 보면 나는 굉장히 의심이 많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이리 와.” 유천은 나를 품에 당겨 안았다. 나는 다시 유천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코끝에 레몬라임향이 와 닿아, 가슴 가득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달착지근하고 어딘지 모르게 들뜬 향기……. 유천이 내 어깨를 안은 손으로 천천히 등을 쓸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유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안도감, 미안함, 고마움 등등의 복잡한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유천의 말은 분명히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짐작도 못할 만큼 나는 유천을 불신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잔뜩 몸집이 커진 부정적인 감정이 한 순간에 사라질 리는 만무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맞닿은 가슴에서 유천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유천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또 다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천은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여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안고 한동안 체온을 나눴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유천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준수야.” “응?” “키스해도 돼?” 유천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박유천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언제 물어보고 했냐? 만날 멋대로 키스하고 입술 깨물어서 터뜨리고 했으면서.” 불평에 가까운 내 웅얼거림에 유천이 쿡쿡 웃는 것이 느껴졌다. 흔들림이 그를 안은 팔에 전해져 오자 나도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유천이 내 어깨를 잡고 가만히 몸을 떼어냈다. 조금 시선을 들자 유천의 눈동자가 보였다. 옅은 미소가 떠오른 그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담고 있었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금세 얼굴이 달아올라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유천이 나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미소 짓기에 그저 쭈뼛쭈뼛 유천을 따라 웃었을 뿐이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움직임을 빨리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유천의 입 끝에 미소가 사라진 순간,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유천의 움직임을 따라 레몬라임향이 확 번져왔다. 그의 체온이 내 입술 끝을 살짝 머금었다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다시 닿아오는 입술……. 이렇게 가벼운 베이비 키스가 몇 차례 오가고 나자, 언제나 키스를 시작하자마자 파고 들어오던 유천의 혀가 그리워 애가 탄다. 나는 유천의 허리를 더 힘주어 끌어안으며 닿아오는 유천의 입술에 내 입술을 꾹 눌러버렸다. 유천이 희미하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나쁜 자식, 다 알면서 나를 꼭 이렇게 놀린다. 나는 유천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유천이 한 걸음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천이 가만히 밀어오기에 그대로 몇 걸음 뒷걸음질 치자, 발뒤꿈치에 소파가 와 닿았다. 우리는 천천히 소파 위로 쓰러졌다. 유천이 아직 젖어있는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슬몃 눈을 뜬 순간 유천의 입술이 다시 닿아왔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몇 번의 베이비 키스가 이어지다가 유천의 입술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목덜미에 유천의 숨결이 느껴지자, 나는 간지러움에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유천이 쿡쿡 웃는 것이 느껴졌다. 왜 웃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내가 웃긴가? 유천의 앞에서 매번 긴장하는 나를 놀리는 건가 싶은 생각에 살짝 눈을 떴을 때였다. 유천이 욱신거리기 시작한 오른쪽 귀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대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의 뜨거운 호흡이 귓가에 느껴지자 나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유천의 어깨를 밀어내고 말았다. 간지러워서 미치겠다. 소름이 쭈욱 돋는데, 그냥 소름도 아니고 오싹한 느낌이다. 나는 여전히 어깨를 움츠린 채 눈을 깜빡거리며 유천을 응시했다. 유천은 왠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왜 웃어…….” 나는 쭈뼛쭈뼛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귀.” “귀가 왜? 안 아픈데.” “아니, 너 귀 예민하다고.” 유천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너 얼굴, 또 빨개졌… 읏!” 이어진 유천의 말은 끝나기도 전에 나에게 막혔다. 유천의 입을 막아버리려 그대로 목을 확 끌어당겨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유천은 조금 당황했는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는 쿡쿡 웃으며 다시 키스를 해왔다. [You‘re my sunshine, 어두운 날 환히 비쳐주는, 내게 아침을 안겨준 너, 너는 나의 단비, 메마른 내 가슴을 적셔줄 내 마음의 샤워 같은 너~♬] 그때 갑자기 유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유천은 입을 맞춘 그대로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유천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나는 촉촉하고 연해진 아랫입술을 꾹 물고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유천은 흘깃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네, 형.” - 차가 너무 밀려서 스태프들 아직 고속도로에 있대. 유천의 입술이 촉, 하고 닿았다 떨어졌다. - 오늘은 야간 촬영 못 할 것 같다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아, 네.” 유천은 매니저 형에게 대답을 해주며 내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그리고 또 다시 촉, 하고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 나는 잠깐 관계자들 좀 만나야 되거든. 저녁 먼저 먹어. 또 다시 입술이 와 닿았다. ‘하지 마’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더니 유천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맞춰왔다. - 식사는 호텔 라운지 이용하라는데, 산 정상에 산장인지 레스토랑인지 하나 있다니까 거기 가보던가. 혼자 괜찮겠지? “네. 준수도 있는데요, 뭐.” - 그래, 그럼 저녁 먹고 스키라도 타던가 해.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네.” 유천은 선선히 대답을 하고 핸드폰을 소파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왠지 민망한 상황에 나는 유천을 올려다보며 괜히 말을 걸었다. “뭐래?” “계속 하래.” “뭐……!” 곧바로 겹쳐진 유천의 입술에 내 말은 전부 먹혀버리고 말았다. 통화 내용 다 들었는데……. 하지만 그런 유천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 킥 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유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는 손을 들어 유천의 목을 끌어안고 또 다시 시작된 키스 타임을 즐겼다. 레몬라임향이 나는, 아주 달콤한 키스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천의 입술이 가만히 멀어졌다. 나는 도로록 눈을 굴려 유천의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라 있다. 아마 잔뜩 상기되어 있을 것이다. 유천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나는 유천의 눈을 흘끔거리거나,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거나, 쭈뼛쭈뼛 웃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너무 침묵이 길어지자 견딜 수가 없어져서 결국 먼저 말을 걸고 말았다. “왜?” “밥 먹으러 가자.” 유천은 어깨를 주무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천이 손을 내밀어 오기에 그 손을 잡고 나도 몸을 일으켰다. 유천은 흐트러진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내리며 ‘드라이 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가 팔을 들어 올리며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것이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어깨 아파?” “아니.” 유천은 싱긋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유를 알 것 같다. 어제 미니쿠퍼가 박살난 것이 아마 원인일 것이다. 어제는 괜찮다고 했지만 분명 후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천을 응시했다. “차 그렇게 된 거 집에서 아셔?” “아니.” “왜?” “또 사고 쳤냐면서 당장 집으로 호출일걸.” 유천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한두 푼도 아닌 미니쿠퍼를 폐차하게 만든 것은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미안하고 불안하다. “어깨 아픈 거지?” “안 아파.” “아프잖아.” “안 아프다니까.” 유천은 고집스럽게 고통을 부정했다. 나는 가만히 유천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폐차했잖아.” “무슨 너 때문이야.” “…….” “차는 또 사면 되지.” 학생 주제에 무슨 돈으로 차를 또 산다고 그래. 어차피 집에 손 벌릴 거면서. “네가 돈이 어디 있냐?” “카드 끊겼다고 무시하냐?” “무시가 아니라, 비싸잖아.” “너보단 안 비싸.” “…….”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다. 그저 나는 눈을 깜빡이며 유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천은 내 머리를 부스스 헝클어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 말려, 감기 걸리겠다. 나 씻고, 저녁 먹고, 보드나 타러 가자.” “탈 줄 모르는데.” “형님이 무료 강습 해줄게. 너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민섭 형 장비 빌려왔어.” 선배한테는 언제 갔다 왔대? 아무튼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다. “형님 좋아한다.”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냐? 내가 너보다 생일도 한참 빠른데.” “6개월 더 늙어서 좋기도 하겠다?” 또 빈정거림이 시작됐다. 역시 우리는 단 5분도 진지하기 힘든가 보다. 유천은 쿡쿡 웃으며 그런 나를 뒤로 한 채 욕실로 향했다. 나는 유천의 늘씬한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 잘난 녀석이 나를 좋아한단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슴을 갈라 보여주고 싶단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유천이 욕실 문 너머로 사라지고 달칵 하고 문이 닫혔는데도 나는 닫혀버린 욕실 문을 멍하나 바라보았다. 너무 잘나서 한없이 불안하게 하는 애인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은 너무 기분이 좋아 죽을 것 같다. ‘너보단 안 비싸’라니……. 나는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꼭 깨물어야 했다. + ‘씻고, 저녁 먹고, 보드’라던 박유천의 말은 ‘씻고, 보드, 보드, 보드’로 바뀌어 버렸다. 나는 벌써 한참동안이나 박유천에게 보드를 배우는 중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지 헬멧을 벗으면 김이 나고 있을 것 같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힐 엣지와 토우 엣지를 시작으로 어설픈 너비스 턴에 이르기까지, 약 세 시간에 걸친 유천의 하드 트레이닝 끝에, 제법 쓸 만한 자세로 초보자 슬로프를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드는 박유천다운 집요함의 승리였으며, 나 또한 처음 타보는 보드가 아주 재미있고 구미에 맞았기에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광속에 가까운 성취였다. 그 과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참담하고 고통스러웠으며, 내 몸에 수많은 멍자국을 남겼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조금 전에 유천에게 금방 배운다고 칭찬까지 들은 상태라는 것을 언급해 두는 바이다. 역시 내 뛰어난 운동신경이 어디 가겠어? 나는 괜히 으쓱해져서 팔짱을 끼고 거만한 표정으로 유천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유천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글과 반다나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유천의 고글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다. 옅은 아이보리 색 상의와 연녹색 바지, 박유천이 억지로 씌워준 검은색의 헬멧과 고글, 마스크까지. 나는 무심코 거기에 대고 V를 그렸다가… “바보냐?” …는 소리를 들었다. 새끼, 장난한 거 가지고 까칠하게 굴기는. 나는 그 말에 또 기분이 상해 싸늘히 유천을 노려보았다. 비록 고글 안에서 이루어진 행동이라 유천은 몰랐겠지만. 유천은 경사를 등지고 토우 엣지로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눈 위에 선 그는 왠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탈 줄 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비싸 보이는 자신의 장비를 풀 세팅하고 앞에 선 박유천은 짜증나도록 멋있었다. 짙은 보라색 바탕에 가슴에 커다란 별이 박힌 두터운 후드 티에 검은 보드 바지, 허리에 걸쳐진 크롬과 검은 색의 장식용 체인 두 줄. 검은 비니 위에 안이 비쳐 보이지 않는 고글, 역시 검은 바탕에 어두운 색으로 루이비통 특유의 무늬가 색색이 찍힌 반다나까지……. 위험하다며 자신의 헬멧과 마스크를 나에게 양보하고, 가진 것을 뒤적여 대충 차려 입은 것이 저 지경이다. 여태 열심히 배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사람들이 계속 유천을 흘끔거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뭐야, 나는 이런 데서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고 경계경보 발령해야 되는 거야? 투덜대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유천이 불쑥 말을 건네 왔다. “먼저 내려가.” “왜?” “내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아서.” 재수 없어, 또 자랑질이야. 나는 코웃음을 치며 스트랩을 조금 더 조였다. 유천은 옆으로 조금 비켜서며 내가 출발할 길을 열어주었다. 슬로프에는 아직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간다?” “어. 리프트 앞에서 기다려.” “알았어.” 나는 유천을 뒤로 하고 스타트를 끊었다. 금세 속력이 붙었다. 멈춰 있던 공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길을 열어주었다. 사악, 사악 소리를 내며 엣지가 눈 위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양쪽으로 산이, 사람들이, 리프트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온 몸에 느껴지는 속도감……. 으아, 기분 최고다! 나쁜 새끼, 이렇게 재미있는 걸 여태 혼자 했단 말이야? 유천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며 투덜거렸을 때였다. 촤아아악! 뒤에서 매섭게 눈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어두운 보라색 후드 티가 눈앞을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저 새끼가! 갑자기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나는 속도를 내서 유천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길지도 않은 초보 슬로프에서 박유천을 쫓는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유천은 내가 쫓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 유유히 바람을 가르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침 스키장에 흐르던 음악이 바뀌었다. [I get knocked down! but I get up again! You're never going to keep me down~!♬] Chumbawamba의 Tubthumping! 박유천 같은 부르주아가 즐기라고 만든 음악은 아니지만 유천과 나는 둘 다 이 곡을 꽤 좋아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산이 스쳐지나갔다. 자연스레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서는 아드레날린 분비가 늘어난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건조하고 매끄러운 눈의 감촉과 귓가에 들려오는 예리하게 눈을 가르는 소리……. 질주. 온 몸에 바람이 느껴졌다. 짜릿한 쾌감에 숨까지 가빠왔다. 그리고 묘하게 가슴에 찡한 감동이 느껴졌다. 박유천과 징그럽게 붙어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16살에 처음 만났던 날부터 싸우기 시작해서 22살이나 먹어서도 여태 이렇게 붙어 다니며 싸우고, 괴롭히고, 헐뜯고, 비아냥댄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데 서로에 대한 명칭만 친구에서 연인으로 바뀌어 있다. 참 멀리도 돌아왔지 싶다.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는데 우린 어떻게 견뎌온 걸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는 걸까? 혼자 괜한 감상에 젖어 있다가 유천이 한 쪽 구석에 멈춰 서서 나를 기다리는 것을 못 보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흘깃 뒤를 돌아보았더니 다시 나를 따라 슬로프를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나는 엣지의 감을 잃고 데크 전체로 눈 위에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어쩌지……! 발목이 묘하게 꺾여 있어 함부로 멈추려했다가는 눈 위를 잔뜩 굴러 어딘가 한 군데 부러질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 번 붙은 속력은 줄어들 생각은커녕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 나는 쏜살같이 슬로프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슬로프가 반대로 꺾이는 부분이 가까워졌다. 울타리가 쳐져 있긴 하지만 지금 속력이라면 저기에 걸려 멈출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보드를 타다가 절벽에서 추락했다는 해외 기사를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어딘가가 부러지느냐, 저 울타리를 뚫고 나가버리느냐, 라니 어느 쪽도 고르고 싶지 않은데……. 식은땀이 버쩍 났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 잔뜩 긴장한 채 눈을 꽉 감은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매섭게 눈을 가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군가가 온 몸으로 내 등 뒤에 부딪혀왔다. 보드 플레이트끼리 맞부딪혀 탁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게 중심이 잔뜩 쏠려버려 힘을 주지도 빼지도 못하던 왼쪽 다리가 강제로 앞으로 쭉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허리를 안겨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하고 온 몸에 적지 않은 충격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대로 한참을 더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울타리 앞에서 겨우 정지했다. “하아- 하아-.”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식은땀에 젖어 숨을 몰아쉬었다. 잠깐 한눈을 팔다가 죽을 뻔 했다. 역시 아무리 빨리 익혔어도, 나는 오늘 처음 시작한 초보인 것이다. 천천히 눈을 뜨자 쏟아질 듯 별이 가까운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답게 청명하고 짙푸르게 빛나는 남빛의 바다. 하마터면 저기 갈 뻔 했구나.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눈을 못 떼게 만들어? 죽을 뻔 했잖아, 바보야.” 그리고 곁에서 나지막이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내 허리를 안은 채 쓰러지듯 누워 있었다. 역시 너였어…….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재영과 함께 있으면서 깨달았듯이 그는 이렇게 항상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장난처럼 유천이 자신을 형님이라고 칭할 때가 있다. 생일이 나보다 6개월이나 빠르니 형이 맞긴 하다. 나는 그가 없는 세상에서는 단 1초도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나는 끝끝내 그에게 비아냥대고 비웃는다. 내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인 것이다. 유천도 그걸 아는지 발끈하지 않고 귀엽다는 듯 웃으며 넘어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박유천은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나를 좋아하는 걸까? 가슴을 갈라 보여주고 싶다는 소리를 할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뭘 먹어야 가능한 걸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인연이기에 이렇게 질긴 걸까? 계속 의문이 이어진다. 이렇게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제 한 가지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벤에서 유천이 내게 들려주었던 노래 가사처럼, 내 상대가 이 세상에 박유천 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유천아.” “왜.” “나한테 고맙지?” “무슨 헛소리야.” “나 없었으면 너 심심해서 어쩔 뻔 했냐? 이렇게 가끔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해 주니 스릴 있잖아.” “죽다 살아나더니 드디어 돌았냐?” 유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바둥거려 힘겹게 보드를 뒤집어 눈 위에 엎드렸다. 근처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리자 금세 입 주위가 싸늘하다. 유천은 많이 놀랐었는지 여전히 축 늘어져 눈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유천의 반다나를 끌어내렸다. “왜.” “이뻐서.”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유천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입술을 떼어내자 유천은 또 다시 피식 웃었다. 나도 푸스스 웃어주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이다. “너무 약하잖아.” “뭐가?” “설마 좀 전에 그게 살려준 대가인 거야? 너 그렇게 값어치 없는 사람이었어?” “와씨, 이 새끼 말 하는 것 좀 봐. 너는 네 애인이 싸구려였으면 좋겠냐?” …유천아, 이렇게 약해빠진 애인이라 미안해. “말 좀 예쁘게 해라? 싸구려가 뭐냐? 그리고 욕실에서 한 것까지 합쳐서 네 번이야, 너.” “백 번 채워주랴? 미친놈, 개새끼, 병…, …, …, …….” …하지만 네가 날 믿는 만큼 널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계속 까불겠다 이거지?” “그래, 계속 까불겠다는 거다, 어쩔래?” “너 오늘 나랑 둘이 자야 되는데 안 무섭지?” “……!” …지금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 “야, 왜 조용하냐? 더 해.” “…….” “더 하라고.” “…넌 모델이 아니라 사채나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그런데서 일했어야 돼.” …네가 나를 위해 네 스스로를 내던진 것만큼. “말 돌리지 말고. 백 번 채운다며. 빨리 해. 그래야 좀 있다가 침대에서 확 덮쳐 버릴 거 아냐.” “…….” “김준수 어디 갔냐? 왜 말이 없어?” …나도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나도 남자거든?” “그래서?” “…내가 덮쳐버리는 수가 있어.” “대환영.” “……!”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가자. 우리는 그동안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몰랐고, 서로 숨겨왔으니까. “아, 요 꼬맹이를 어째야 되냐.” “미친 새끼, 그러는 지는 되게 큰 줄 안다?” “자, 열두 번 했으니 88번 남았다. 힘내.” “변태새끼.” “87번. 야, 너는 서방이 변태라서 좋기도 하겠다?” “누가 서방이야 미친놈아!” “으하하하하! 86번!” …사랑해, 박유천. My Beloved. + 한참을 티격태격하며 슬로프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숙소로 향하는 유천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아쉽다. 너무 열심히 탔는지 온 몸이 쑤시긴 하지만 그래도 모처럼 박유천이랑 같이 있는 시간인데 뭐라도 하나 더, 같이 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우린 데이트도 제대로 못하는 커플이었으니까. “빨리 와.” “가잖아.” 앞서 가다가 나를 돌아보는 유천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천은 제자리에 서서 잠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터덜거리며 유천에게 다가갔다. “왜 또 입 나와 있어?” “뭔 헛소리야, 어디 아프냐?” 내가 틱틱대는 소리에도 유천은 그냥 웃기만 했다. 나는 더 기운 빠진 표정으로 터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유천은 여전히 쿡쿡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뿌리칠까 하다가 힘들어서 기운도 없고 맥 빠져서 그냥 두고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배고프지?” “응.” “룸서비스 시켜 줄게. 좀만 참아.” 유천의 말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나하나 더해지는 숫자를 보며 멍하니 있자니 유천이 어깨를 안았던 팔을 슬그머니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흘깃 그를 돌아보았다. 유천은 내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찡그린 미간을 펴고 싱긋 웃었지만 나는 그가 어제의 사고로 몸이 성치 않음을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어휴, 이 바보. 그러면서 보드는 왜 알려준다고 설치고 난리야……. “어깨 아프지?” 내 물음에 유천은 또 피식 웃었다. 괜찮다고 하지 않는 걸 보니 아프긴 아픈 모양이다. 저거 물리치료 받아야 될 텐데. 나는 또 걱정과 미안함을 포함한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에 시무룩하니 유천을 응시했다. “괜찮아.” 그제야 괜찮다는 말을 하는 유천이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차가 폐차될 정도로 세게 부딪혔는데 몸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다. 내가 초보일 적에 미니쿠퍼로 사고를 내봐서 안다. 그리 세게 부딪히지 않았는데도 목부터 어깨며 팔, 등줄기를 타고 허리까지 일주일이 넘도록 아파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박유천은 그것보다 훨씬 더 아플 것이 틀림없다. 유천은 또 다시 괜찮다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았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유천에게 괜히 화가 난다. 아니, 그가 그렇게 되게 만든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고……. 나는 뚱한 표정으로 유천의 손을 쳐내버렸다. “왜 그래, 자꾸.” “배고파서 그런다, 왜.” 나는 유치한 대꾸를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김준수.” “뭐.” 유천의 나지막한 부름에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터덜거리며 걷고 있자니 유천의 발소리가 따라오지 않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유천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씨, 또 삐쳤나? 나는 금세 찔끔해서 얼른 되돌아갔다. “가, 가자, 배고파.” 말까지 더듬으며 유천의 손을 잡아끄니 유천이 한숨을 내쉬며 씁쓸히 웃는 것이 보였다. 자식아, 나도 한숨 나온다. 하지만 내색도 못하고 유천의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웃어보였다. “야.” “응.” “산꼭대기 레스토랑에 데이트 갈까?” 유천의 말에는 귀가 쫑긋 섰다. 하지만… “…너 아프잖아.” 요 놈의 입은 왜 저딴 소리를 내뱉고 있는지……. 나는 말해놓고 금세 후회를 하며 흘깃 유천을 곁눈질했다. 유천은 금세 뭔가를 눈치 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고, 나는 달아오르기 시작한 뻘쭘한 얼굴로 유천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언제 크냐, 우리 준수.” “시끄러.” 유천은 또 다시 쿡쿡 웃으며 카드키를 꺼내들었고, 나는 여전히 눈을 피한 채 쏘아붙였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유천이 눈치 없이 바보 같았으면 정작 답답할 건 나였으니까. 나는 이렇게 영악하기도 하다. + 방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우리는 또 다시 방을 나섰다. 출발하기 전에 유천은 매니저 형의 방에 들러 내일 일정을 듣고 왔다. 아침부터 촬영이 있다고 하는 것 같다.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천을 흘깃 곁눈질 했다. 게다가 사고가 난 지 만 하루가 지났으니 이제 슬슬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릴 때가 됐다. 내가 걱정할까 봐 아파도 아프다 소리 안 하는 참 기특한 녀석이다. 유천은 분명 사무실에도 아무 말 안 했을 것이다. 가끔 박유천이 꽤 속이 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다. 내가 알았을 때 당황하거나, 걱정하거나, 해결하기 힘든 난감한 일일 경우 박유천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긴 그랬으니 박유천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나는 바보같이 몇 년이나 몰랐던 거겠지만……. 나는 유천의 패딩 점퍼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이내 유천의 손이 깍지를 껴 맞잡아 왔다. 크고 따뜻하고 든든한 손이다. 언제부턴가 이런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다. 아마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는 중인 것 같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온 것과는 다른 관계를 만들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조금씩 변하고 있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도 박유천의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이긴 하지만, 이 녀석도 나를 건사하느라 힘들긴 할 거다. 더군다나 요새 나는 묘하게 사고를 몰고 다니는 것 같으니까……. 그가 힘들 것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라고 내일부터 당장 일을 해야 하는 박유천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은 조금만 욕심을 부리고 싶다. 여태 계속 싸우기만 해서 우리는 즐거운 날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으니까. [1층입니다] 안내 멘트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리는 문을 나서다가 마주친 얼굴들에 멈칫하며 맞잡은 손을 놓았다. 놓아버린 손이 묘하게 휑하다. “어머, 유천 씨.” “준수 씨도 왔네?” “어, 이제 도착하셨어요?” 유천은 스태프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엘리베이터를 내려섰다. 나도 익히 얼굴을 아는 스태프들에게 싱긋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고속도로가 막힌다더니 이제야 도착한 모양인지 다들 짐을 손에 바리바리 들고 있었다. “어디 가요?” “그냥 잠깐…….” 현지 씨의 물음에 유천은 의례적인 대답을 해주며 말끝을 흐렸다. “아, 몰라. 힘들어, 빨리 올라가서 쉬자.” 성격이 괄괄한 헤어스타일리스트 주현 누나가 잔뜩 인상을 쓰고는 닫힘 버튼을 꾹 누르는 것이 보였다. 차가 막혀서 많이 시달리긴 한 모양이다. “쉬세요. 내일 봬요.” “응, 준수 씨, 내일 봐.” 힘들다면서도 대답은 친절하게 꼬박꼬박 다 해준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들려온 주현 누나의 목소리에 유천과 마주보며 킥킥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잡고 1층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왔다. 환하게 밝혀진 조명과 조용히 울려 퍼지는 음악. 멀리 보이는 슬로프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밤이 오면 잠드는 도시와는 다르게 여기는 밤새도록 사람들이 북적댄다. 쉴 새 없이 곤돌라와 리프트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이 보였다. 우리도 곤돌라 하나에 몸을 실었다. 정상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이 스키장은 장난 아니게 넓은 것 같다. 나는 멍하니 밖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곤돌라가 흔들리며 하얗게 눈이 쌓인 땅이 멀어져갔다. 연한 조명을 밝힌 호텔이 점점 작아진다 싶더니 우리는 금세 무성한 숲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위는 조용했다. 그저 곤돌라가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만이 느껴졌다. 멀리 보이는 깎아지른 최상급 코스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야, 저것 좀 봐, 되게 잘 탄다.” “그러네.” “멋있다, 난 언제 저만큼 되냐?” “넌 아직 멀었어, 꼬맹아.” “아씨, 너 그 꼬맹이 소리 좀 그만 해라?” 나는 유천의 말에 발끈해서 대꾸하면서도 여전히 최상급 코스의 고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꼬맹이한테 꼬맹이라고 하는데 뭐 잘 못 됐냐? 초딩이라고 해 줄까?” 나는 그제야 눈을 돌려 맞은편에 앉은 유천을 노려보았다. [You‘re my sunshine, 어두운 날 환히 비쳐주는, 내게 아침을 안겨준 너, 너는 나의 단비, 메마른 내 가슴을 적셔줄 내 마음의 샤워 같은 너~♬] 유천은 비웃음을 띤 채 ‘뭐?’ 하고 빈정거리며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네, 박유천입니다.” - 이재영인데. “…….” 순간 전화기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나와 유천 모두 표정이 굳었다. 왜 하필 이럴 때에……. - 강 매니저 전화 안 받던데, 혹시 같이 있나? “아뇨. 좀 전에 방에 계셨는데.” - 그래? 그럼 전화 건 김에 박유천 씨에게 말해야겠군. “무슨 일인데요?” - 박유천 씨. 전에 L그룹 CF 찍었던 적 있어? “네?” 유천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 본사는 왜? 나는 여전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재영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유천을 응시했다. 유천이 나를 흘깃 곁눈질하는 것이 보였다. - 박유천 씨가 출현한 부분. 그거 보더니 클레임이 들어왔어. 이 모델은 안 된다고. “…….” 곤돌라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유천이 입술을 가만히 깨무는 것이 보였다. CF라면 전에 찍었던 그 놀이공원 광고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게 왜? 클레임이면 위약금 물어줘야 되는 건가? 20억 받았다고 하던데, 그럼 60억? 힉……! 액수가 장난이 아니다. - 박유천 씨? “네, 듣고 있습니다.” - 일단, 내일 내가 그리 가지.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네.” 유천은 나지막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뭐래?” 유천은 대답 없이 입꼬리를 조금 올려 미소를 만들어 보이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은 느릿했다. 아, 또 입 닫았어, 저 새끼……. 나는 뚱하니 유천을 바라보다가는 재차 물었다. “야.” “어.” “재영 씨가 뭐래?” 내 부름에 고개도 돌리지 않던 유천이 그제야 서늘하게 나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왜 저래? 나는 차갑게 빛나는 유천의 눈초리에 찔끔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노려봤다. “뭐라고 했냐, 좀 전에.” “재영 씨가 뭐랬냐고 했다, 왜.” 유천의 눈초리가 조금 더 싸늘해졌다. 왜 저러는 건데? 나는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빈정대듯이 툭 내뱉었다. “왜? 뭐 잘 못 먹었냐?” “다시 말해 봐.” “뭐 잘 못 먹었…….” “그 전에.” 유천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허리를 뚝 자르고 들어왔다. 다시 하라면 못 할 줄 알아? “재영 씨가 뭐랬…, 아…….” 그제야 나는 내가 너무 친근한 호칭으로 재영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빈정거리며 장난을 하던 유천의 표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마디만 더 했다가는 당장 살인이라도 할 듯 사나운 그의 눈초리에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잊고 있었다. 박유천의 질투와 소유욕이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박유천 앞에서 ‘재영 씨’라니……. 자꾸 고쳐주는 것을 따라하다 보니 입에 붙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재영에게 날카롭고 까칠하게 굴었던 것은 유천이 아니라 오히려 내 쪽이었다. 갑자기 호칭이 ‘그 사람’에서 ‘재영 씨’로 바뀌다니 느닷없이 급격한 전개이긴 하다. “이재영이 뭐라고 했냐고.” 나는 황급히 말을 고쳐 질문했다. 유천은 여전히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은 이 순간에도 나는 그의 태도에 심통이 나는 중이었다.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는 대답도 안 해 주고 괜히 나한테 신경질이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나는 그냥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나저나 이 곤돌라 20분 걸린다더니 정말 오래 간다. 언제 도착하지? 멀리 레스토랑인지 산장인지의 불빛이 보이는 것 같기에 내게 와서 꽂히는 유천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계속 창밖을 응시했다. “준수.” “왜.” “이리 와 봐.” 결국 유천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나를 불렀다. “싫어.” 나는 싸늘하게 툭 내뱉었다. “얼른.” “싫다고.” “말 안 듣지.” “…….” 이어진 유천의 말은 그냥 씹어버렸다. 금세 분위기가 고슴도치처럼 따끔따끔하게 곤두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우리는 늘 이런 식이다. “야.” “…….” “김준수.” “…….” 유천이 또 다시 나를 불러왔으나 나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무시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유천이 성큼 내 옆자리로 옮겨 앉더니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유천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하지 마.”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하며 유천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내 미약한 저항은 금세 봉쇄당해버렸다. 유천은 밀어내는 내 손목을 꽉 틀어쥐더니 다시 입을 맞춰왔다. “하…지 마, 좀.” 나는 또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했다. 하지만 공간이 좁아 피할 곳도 마땅치 않고 유천이 작정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데는 당해낼 수가 없다.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결국 입술이 맞닿고 말았다. 금세 유천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반항을 멈추고 유천의 혀를 받아들였다. 유천의 말캉한 혀가 내 혀를 휘감아왔다. 분명히 나는 짜증이 났던 것 같은데,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유천의 목에 팔을 감고 만다. 분명히 나는 짜증이 났던 것 같은데,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유천의 목에 팔을 감고 만다. 오늘 벌써 키스만 몇 번인지 모르겠다. 이 녀석은 질리지도 않나보다. 하긴, 내가 할 말이 아닌 건 안다. 이런 짜증나는 상황에서도 좋다고 이러고 있으니, 아무튼 김준수는 박유천한테 너무 약해 터져서 탈이다. 이렇게 우리는 곤돌라 안에서 엉뚱하게 시작된 키스를 한참이나 나눴다. 이윽고 유천의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금세 입술이 휑하다. 아쉬운 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유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짜증났다는 말은 곧 죽어도 해야겠기에. “개새끼.” “너 이재영이랑 있는 거 눈에 띄기만 해 봐.” 유천은 내 욕설을 무시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최후의 미약한 저항을 시작했다. “만날 거다, 새끼야. 너 이렇……!” 하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유천이 내 옷의 단추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던 때문이다. “아, 알았어! 알았어!” 나는 서둘러 옷깃을 움켜쥐며 항복을 외쳤다. 와, 진짜 미친놈.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면 산 정상에 도착할 텐데 정말 여기서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순간 그의 손길이 어찌나 진심 같던지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었다. “안 만나! 안 만나면 될 거 아냐!” 나는 빽 소리를 지르며 유천의 손에서 옷깃을 잡아 빼냈다. 유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쿡쿡 웃으며 조금 몸을 떨어뜨렸다. 나는 씩씩대며 단추를 채워나갔다. 이제야 알겠다. 이게 박유천이 나를 겁주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도 말로 하면 알아듣는 학습 능력 충만한 인간인데, 어째서 박유천은 몸으로 공포를 익히게 하는지 참 알 수가 없다. 나는 유천을 매섭게 노려보며 또 다시 미친놈이라고 속삭여주었다. “너.” “뭐!” 말이 좋게 안 나와서 또 다시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봐. 이재영한테 흔들린 거 맞지?” “…….” 유천이 던진 질문에 나는 한참이나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눈초리로 노려봐 주었을 분이었다. 그러자 유천은 피식 웃으며 또 다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무언은 긍정의 의미.” “누가 그래!” 나는 이미 다 들켰음에도 억울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나랑 이재영은 닮은꼴이니까. 넌 취향이 확실하거든.” “…….” 또 할 말이 없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재영에게서 유천을, 그리고 유천에게서 재영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니까 말이다. 뭐야, 내 취향은 싸가지 없는 사람이었던 거야? 생각해 보니까 기분 나쁘다, 씨. “너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야. 만나지 말라고 나 분명히 경고했다. 또 한 번 둘이 있는 거 내 눈에 띄면 매너고 뭐고 없어. 무슨 뜻인지 알지?” 와, 이 새끼, 제대로 협박할 줄 아네……. 이어진 유천의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입까지 벌리고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유천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새삼스레 유천의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무언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내 애인이지만 정말 무섭다. 앞날이 걱정된다……. 난 도대체 어떤 사람과 사귀게 된 걸까? +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 폭력? 아니면 핵무기? 혹은 사랑이나 모성애? 언뜻 생각해 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만일 내가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박유천’이라고 대답하겠다. 내 성격도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박유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 버린다.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말대꾸를 꼬박꼬박 해대며 싸울 수 있었는데, 사귀고 나서는 박유천의 협박 때문에 점점 더 내 입지가 작아지고 있다. 평소에는 속없이 실실 웃으며 빈정대는 박유천이지만, 수틀리면 맹수처럼 서늘하게 발톱을 세우니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심지어 그 타이밍도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더 무서운 거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져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게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둘 사이의 다툼이라는 것이 대체로 내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는 해도 순간순간 돌변하는 박유천은 이중인격이 틀림없다. 유천은 동아리며, 과에서 ‘친절한 유천 씨’라고 불린다. 그 정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건 내가 봐도 정말 친절하고 매너 좋다. 심지어 여자들에게도 너무 친절해서 홀딱 넘어가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왜! 나한테는 이렇게 못 되게 구느냐 이거다. 죽을 줄 알라는 둥, 매너고 뭐고 없다는 둥, 이런 소리를 자기 입으로 지껄여대고 있으니 나보고 이중인격이라고 할 처지가 못 된다. 미친놈, 지가 언제 나한테 매너 있게 굴었다고……. ‘친절한 유천 씨’ 다 얼어 죽었다, 젠장. “야, 저기 보여?” “응, 저게 귀신 나오는 산장이야?” “어.” “어떻게 알아?” “내가 직접 봤으니까.” “웃기시네.” 하지만 박유천 이외에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 또 하나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진실한 마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아마 이것에는 대부분이 흔쾌히 동의하리라고 본다. 총, 칼을 앞세운 무력도 진심을 담은 비폭력 앞에서는 그 위용을 잃게 되고, 자식의 위기 앞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모성애나, 상대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사랑 역시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진짜야, 자고 있는데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눈을 떴더니 옆에 웬 낯선 여자가 누워 있더라고. 누군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여자가 스르륵 일어나더니 그대로 벽을 통과해서 나갔다니까.” 유천의 말에 오싹 소름이 끼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곤돌라와 연결된 산 정상의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 산 어딘가에 있다는 귀신 나오는 산장을 구경하러 가는 중이었다. “이 새끼 웃긴다, 술 잔뜩 퍼 마시고 헌팅한 거겠지.”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카사노바 주제에.” “아, 진짜, 이게…….” “이게, 뭐? 잘 하면 치겠다?” 계산대에서 유천이 직원에게 그 산장에 대해 물어본 것이 시초였다. 아직 그 산장 운영하냐는 유천의 질문에 레스토랑 직원은 산장이 지금 수리중이라서 숙박객은 안 받는다고 대답했다. 어느 재벌가의 별장이었던 것을 리조트에서 매입하여 호텔과 콘도 이외에 산속 외딴 산장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특별히 선별된 고객만 투숙 가능하다는 것이 유천의 설명이었다. 이 녀석은 어딜 그렇게 많이 다녀봤는지 아는 것도 많다. 어쨌거나 그 설명 끝에 덧붙여진 귀신이 나온다는 말을 내가 비웃지 않았다면 11시가 넘은 이 시간에 산속을 헤매며 그 산장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 무서워서 그러지?” “누가!” 유천이 돌아보며 피식 웃기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박유천의 도발에는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발끈해서 넘어가버리고 만다. 다음엔 그러지 말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어도 항상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건 장점이 아닌 것 같다. 유천이 성큼성큼 내딛는 발자국 자리를 그대로 디디며 나는 유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눈이 많이 와서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눈 때문에 공사도 잠시 중단되었다고 하던데, 정말 산장까지 오는 길은 거의 숲인지 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고 발자국도 하나 없이 하얀 눈이 소복했다. “건물 멋있지?” “응?” 유천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는 산장의 정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눈이 덮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산장의 건물은 정말 아름다웠다. 중앙 현관 포치 위로 동그란 원통형의 층계 통로가 보였고, 양쪽으로 펼쳐진 건물 벽을 빼곡히 덮고 있는 동그란 판자들은 꼭 물고기의 비늘처럼 보였다. 커다랗고 흰 격자창문과, 고동색의 현관문은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워 보였고, 왼편에 약간 돌출된 발코니는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의 미의식을 갖춘 독특한 건물이었다. 다만 수리중이라는 것을 드러내듯 벽 여기저기에 목재가 기대어 세워져 있었고, 창문 일부는 비닐로 막아두어 바람에 소란스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건물을 올려다보는 사이 유천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람이 한 차례 스쳐지나자 부스럭거리며 비닐이 소리를 냈다. 문득 오싹한 느낌이 들어,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 궁금해 할 틈도 없이 나는 허겁지겁 유천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라니, 이래서 수리를 하는 건가? 나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방이 되지 않아 하얗게 입김이 나왔다. 실내는 어두컴컴했지만 창밖에서 희뿌옇게 빛이 들어와서 사물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구는 전부 들어냈는지, 열려있는 문 너머로 텅 빈 공간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유천아, 어디 있어?” 조심스레 유천을 불렀더니 동굴에 있는 것처럼 소리가 울렸다. “여기.” 위쪽에서 대답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올라갔는지 2층 난간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있는 유천이 보였다. “이리 올라와 봐.” “어두워.” “좀 있으면 괜찮을 거야. 조심해서 올라와.” “응.” 위쪽에서 들려오는 유천의 목소리를 안내 삼아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끝까지 오르자 밖에서 보았던 창이 넓은 발코니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었지만 눈 때문에 사방은 달빛이 있는 밤보다 더 밝았다. 넓은 창으로 눈이 반사해낸 빛이 하얗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창가에 선 유천의 섬세한 콧날과 턱 선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 나는 계단 끝에 멈춰 서서 잠시 말을 잃었다. 누구 애인인지 참 잘 생겼다…는 팔불출 같은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내 자신이 너무 우스워서 씁슬히 웃으며 유천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왜?” “여기가 그 방이야.” “응?” “여기서 자다가 그 여자 봤다고.” “…….” 유천에게 다가가다가 또 말을 잃고 우뚝 멈췄다. 별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산속 외딴 건물에서 들으니까 왠지 무섭다.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저 넓기만 한 휑뎅그렁한 빈 공간……. “준수야.” “응?” “…아직도 내가 박유천으로 보여?” 유천이 나를 돌아보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눈빛에 반사되어 만들어진 뚜렷한 음영.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 갑자기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 장난 하지 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는데 말이 더듬어 나오니 얼굴까지 달아오를 지경이다. “알았어, 알았어.” 유천은 키득거리며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툴툴대며 그 손을 쳐냈다. 쿡쿡 웃으며 유천은 또 다시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귀신 나오는 산장, 기념사진 찍자.” 갑자기 유천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격자 창살이 잘 보이도록 창을 등지고 서더니 어깨를 당겨 안았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유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하나-, 둘-, 셋-.” 숫자가 끝나자마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동시에 유천이 내 목을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고 입술에 뭔가가 와서 닿았다. 밝은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액정을 확인하는 유천의 손끝 너머 얼핏 우리가 입을 맞추는 사진이 보였다. 순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이 자식, 하다하다 이제 별 짓을 다 한다, 진짜! “야!” “으하하하!” 당황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유천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유천을 쫓기 시작했다. “야, 그거 당장 안 지워?! 누가 그런 거 찍으래!” “꼬맹이 열 받았다!” “누가 꼬맹이야!” 우당탕거리는 요란한 발소리가 고요한 숲과 산장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계단을 서너 개씩 뛰어내리며 추격전을 벌였다.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유천이 문을 열고 산장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거기 안 서!” “내가 바보냐!” 깐죽거리는 유천의 목소리에 더 열이 치솟는다. 나는 문을 벌컥 열고 산장을 나섰다. 그리고는 서둘러 눈을 뭉쳐서 유천을 향해 던졌다. 눈뭉치는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서는 유천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유천이 우뚝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으항항항!” 나는 통쾌하게 허리까지 꺾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내 얼굴에 정통으로 눈뭉치가 와서 꽂혔다. 나는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려 얼굴에 남은 눈을 닦아냈다. 입 안에 들어간 눈이 스르륵 녹기에 그냥 삼키고는 유천을 노려보았다. 유천은 손에 든 또 하나의 눈뭉치를 허공에 던졌다 받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뭐?’라며 빈정댔다. “박유천… 지금 해보자는 거냐?” 나는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유천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또 다시 비웃음을 흘리며 옆에 서 있던 나무 둥치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그 충격에 내 머리 위까지 늘어진 나뭇가지에서 눈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나는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털어내며 유천을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비웃음을 띤 채 눈뭉치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하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다. 여기서 참으면 김준수가 아니다! “넌 죽었어!” 고함과 함께 나는 유천에게로 돌진했다. 유천은 특유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또 다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비열한 새끼, 넌 잡히면 죽는 거야!” “야, 김준수! 제발 좀 잡아서 죽여 봐! 말로만 그러지 말고!” “앗! 야!” “억울하면 너도 맞춰 보던가!” 유천의 손을 떠난 눈뭉치 하나가 또 다시 나에게 명중했고 나는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며 유천에게 눈을 뭉쳐 던졌지만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재빠른지 요리조리 피하면서 잘도 도망간다. 그 바람에 분노 게이지는 더욱 치솟아 올라 나는 씩씩대며 유천에게 눈을 뭉쳐 던져댔다. 이렇게 우리는 인적이 하나도 없는 산 속에서 서로를 향해 빈정대거나, 눈을 뭉쳐 던지거나, 잡기 위해 뒤쫓으며 눈 위를 뒹굴었다. 머리는 눈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볼이며 코는 온통 빨개진 채, 하얗게 입김을 토해내며 우리는 겨울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었다. “으아, 하지 마!” 거리가 좁혀졌나 싶었더니만, 나는 오히려 박유천에게 잡혀 눈 마사지를 받고 있다. 유천은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는 차가운 눈을 볼에 마구 문질러댔다. 덕분에 나는 볼이 얼얼해져서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아, 진짜 운동을 하던가 해야지……. 반항을 하다 지친 나는 그대로 축 늘어져서 눈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유천의 웃음소리에도 무저항 무반응으로 그저 눈을 감고 누워있었을 뿐이다. “죽었냐?” 유천은 여전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나를 쿡쿡 찔렀다. “두고 간다?” 다시 한 번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손을 가만히 뻗어 살그머니 눈을 한 주먹 움켜쥐었다. 유천은 몇 번 더 나를 찔러보고 놀리다가는 시들해졌는지 ‘이제 가자’며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유천의 손에 이끌려 눈밭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움켜쥔 눈을 유천의 목 뒤에 쑤셔 넣어버렸다. “읏, 차거!” “으항항항!” 어깨를 잔뜩 움츠린 유천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총알처럼 레스토랑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야! 너 이리 안 와?!” “내가 미쳤냐?!” “눈 속에 묻어버린다!” “메롱이다, 새끼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유천에게 꼬박꼬박 대꾸를 해주며 언덕을 올랐다. 하지만… 당연한 결과인 듯, 나는 금세 유천에게 목덜미를 잡아 채이고 말았다. “켁!” “죽을래? 콩알 만한 게.” 유천이 한 쪽 입꼬리만 올려 미소를 지은 채 눈을 한 주먹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미친놈아, 넌 이렇게 큰 콩알 봤냐? 하지 마, 그거 옷 속에 넣기만 해!” 나는 유천에게 잡혀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반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면 어쩔 건데?” 글쎄?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잠시 고민했다. “하면 어쩔 거냐고.” 다시 한 번 들려온 유천의 물음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녀석도 아니고, 저항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아, 진짜 초딩 새끼. 자, 해, 해.” 나는 당장 옷 속으로 쏟아 넣어질 싸늘한 눈의 감촉에 잔뜩 긴장하면서도 유천에게 옷깃을 벌려주며 마구 들이댔다. “진짜 한다?” “그래, 해, 하라고……!” 순간 유천은 나를 덥썩 끌어안더니 입을 맞춰 왔다. 촉 소리와 함께 유천의 입술이 멀어졌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서 눈만 깜빡이며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 유천아? 아무리 눈만 마주치면 손대고 싶고, 입술 맞대고 싶은 연애 30일 남짓의 우리지만, 오늘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다? “뭐야, 새끼야!” “하라며.” 천연덕스러운 유천의 대꾸에 기가 차서 하, 하고 짧은 웃음을 토해내고는 다시 버럭 소리르 질렀다. “누가 뽀뽀하래!?” “그럼 키스였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다시 목을 안아오는 유천의 태도에는 웃음마저 나온다. 나는 그대로 유천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으항항 웃음을 터뜨렸다. 유천이 나지막이 웃으며 나를 마주 안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서 나와 같은 비누향이 느껴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송이, 두 송이, 나풀나풀. 이내 그것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하얗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여전히 킥킥 웃어대면서 몸을 돌려 멀리 보이는 곤돌라 스테이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아직도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미묘한 경계를 걷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눈 장난을 하느라 손이 꽁꽁 얼었는데, 따뜻한 물에 닿으니 간질거리기까지 하다. 온 몸이 따뜻하게 데워져서 노곤하다. 느긋하게 욕조에 기대어 있다가 까무룩 잠이 오는 것 같아 얼른 물에서 나왔다. 아, 오늘 하루 정말 길다. 하품을 하며 느릿느릿 옷을 챙겨 입고 욕실을 나섰다. TV 앞 소파에 앉아 유천이 맥주를 마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머리를 털어 말리며 유천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소파가 프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유천은 나를 흘깃 보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에 맥주 캔이 보이기에 집어 들자 유천이 불쑥 자기 마시던 캔을 내밀었다. “왜?” “다 못 마실 거잖아.” 하긴 지금 졸려서 한 캔 다 마시기도 전에 잠이 들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선히 유천이 내민 캔을 받아들어 한 모금 마셨다. 서늘하고 쌉싸름한 액체가 위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카- 소리를 내며 흘깃 유천을 바라보다가 나를 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나른하고 무심한 눈동자……. 하지만 순간 잠이 싹 달아났다. 나는 서둘러 TV로 눈을 돌렸다. 내 옆얼굴에 와서 꽂히던 유천의 시선도 다시 TV로 돌아갔다. 방금 마신 술 한 모금이 금세 얼굴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이 넓은 방에 박유천이랑 나, 단 둘이다. 유천이 낮부터 몇 번이나 말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유천의 존재가 의식되기 시작하자 심장이 움직임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맥주 캔을 쥐고 있던 손이 안절부절 못하고 자꾸 꼼지락거려 알루미늄 캔이 달각달각 소리를 냈다. 김준수, 정신 차리자. 나는 애써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스무스하게 오늘을 넘겨야 한다.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유천이 알아차린다면 오히려 더 자극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와씨, 미치겠다……. 나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진짜 개도 웃을 일이다. 정윤 형이나 재영 씨에게도 이렇게 긴장을 했던가? 잠시 고민을 해 봤지만, 확실한 건 상대가 박유천이라 더 심한 거라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TV만 혼자서 웃음을 뱉어내고 있고, 우리 사이에는 어색하게 침묵만 떠돈다. 유천과 같이 잔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친구였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이 상황은 연인들의 여행 분위기라, 느낌 자체가 다른 것이다. 심지어 편하게 추리닝이나 입고 같이 소파에 뒹굴거리던 집도 아닌 것이 난감해서 죽을 지경이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면 못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박유천을 짝사랑하던 시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그와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치자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도록 긴장이 된다. 먼저 들어가서 잔다고 할까? 아니면 소파에서 잔다고 할까? 계속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문득 유천의 어깨에 생각이 미쳤다. “너 어깨 괜찮아?” “뭐가?” 아픈 거 다 아는데 또 시치미 뗀다, 사람 미안하게……. 나는 쭈뼛쭈뼛 유천의 눈치를 보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유천은 별 의미 없는 시선을 잠시 내게 던지다가는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아픈 데 없고?” “어.” “그래도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냐?” “나 아플까 봐 걱정해 주는 거냐?” 유천의 나지막한 질문. 하지만 표현에 서툴고 솔직하지 못한 내 입에서는 하나도 걱정 안 된다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씁쓸한 유천의 미소에 왠지 미안해진다. “어제는 왜 왔던 거야?” 괜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어제 이야기를 꺼냈다. “너 살리러.” “뭐야, 그건.” “맞잖아.” “…….” “뭐 줄 게 있어서 갔는데, 토끼가 맹수한테 쫓기고 있더라고.” 저런 대답을 하며 쿡쿡 웃는 유천 때문에 더 미안해진다. 나는 이런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왔던 것이다. “…지갑이랑 목도리, 그거 장난이었는데 진짜 사오면 어떡하냐? 돈도 없으면서.” 아, 나는 오늘 왜 이렇게 박유천에게 미안한 것투성이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박유천이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어제 한 행동이나 오늘 했던 말을 생각하면 유천이 나를 좋아하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바람둥이여서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뭔데?” 내 질문에 유천은 빙긋이 웃기만 한다. 그리고 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좋아 죽겠다는 듯, 계속해서 따끔따끔 와서 박히는 그의 애정 어린 시선에 금세 얼굴이 따끈따끈 달아오른다. 아, 정말 미치겠네. 나는 차마 유천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박유천은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지만, 지은 죄가 있는 나로서는 이 대화가 끊긴 시간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어째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쭈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수건 가지러.” “왜?” “너 어깨 찜질해 주게.” 내 말에 유천의 눈에 놀란 빛이 감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나란 인간이 박유천에게 이렇게 나서서 기특한 짓을 해줄 위인이 아니라는 건 안다. 괜히 민망한 생각에 귀끝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유천의 시선을 피하며 종종걸음을 쳐서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한껏 받아 수건을 던져 놓고 나니 유천이 이런 내 행동을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거울을 긁어내리며 머리를 쿵쿵 박았다. 난 진짜 바보에, 무슨 병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문득 밖에서 유천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추스르고 뜨겁게 김이 오르는 수건을 조심조심 건져냈다. “앗뜨!” 물기를 짜내려다가 뜨거워서 놓치고는 다시 조심스레 건져내 마른 타월을 하나 더 감싸서 꾹 짜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박유천이 미운데, 제대로 미워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고맙다는 티를 내는 사람도 아니고, 미안하다는 말은 더더욱 못한다. 여태 우리는 그렇게 지내왔던 것이다. 게다가 이 묘한 분위기의 밤이라니…….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뭐해?” “지, 지금 나가.” 갑자기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흠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처음 내 귀를 뚫어주던 생일날 밤처럼 유천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천은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아 벽에 밀어붙이더니 입술을 부딪혀왔다. 나는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은 채 뜨거운 타월을 꼭 쥐고 그저 눈을 질끈 감았을 뿐이었다. 키스라고 생각했는데, 유천의 혀끝이 뭔가를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순순히 입술을 열어 그것을 입안에 받아들였다. 그 무엇인가를 따라 유천의 혀도 같이 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뭔가를 그냥 둔 채 유천은 잠시 그렇게 내게 입을 맞추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내 입안에 남은 물체를 혀끝으로 굴려보았다. 무색무미에… 미지근하고… 딱딱하고… 동그랗고… 가운데가 텅 빈……. 유천이 싱긋 웃는 것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뱉어내 손에 들었다. 심플한 백금 반지가 내 손 끝에 잡혀 희미하게 빛났다. 설마 이게 어제 주려던……? “…뭐야, 이게?”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천은 말없이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도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입술을 깨물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녀석은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을까? 목이 매여 고맙다는 말도 못할 지경이다. “…더럽게 침 묻었잖아.” “난 하나도 안 더러운데.” 이런 민망한 소리를 해 대며 유천은 다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참고 있는 동안 유천은 반지를 끼워주고는 가만히 나를 품에 안았다. 잠깐의 정적. TV 소리만이 웅성웅성 들려왔다. 맞닿은 가슴에 조용히 유천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묘하게 코가 찡하다.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준수야.” 그리고 귓가에 나지막이 들려온 유천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나도 박유천 때문에 미치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허겁지겁 유천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부딪혀 들어갔다. 당황했는지 유천의 몸이 살짝 굳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의 닫힌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우리는 입술을 맞댄 채 그대로 벽을 더듬어 침실로 향했다. 도중에 잠깐 유천은 내 눈물을 입술로 훔쳐내고는 다시 입을 맞춰왔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머릿속이 하얀 것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유천의 ‘진실한 마음’을 전해 받아 가슴이 벅차오를 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그것이 내 안의 견고한 벽을 부숴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체중을 실어 유천을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뜨리고는 허겁지겁 다시 입술을 찾았다. 유천의 손이 다급하게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나는 유천이 옷을 벗기기 쉽게 팔을 들어주었다. 금세 싸늘한 공기가 상체에 와 닿았다. 어깨를 흠칫 떨자 유천이 내 허리를 안고는 자세를 바꿔 내 위로 올라왔다. 유천이 가볍게 입을 맞추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금세 나는 작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박유천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뭐가 이렇게 바보 같은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동안 그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믿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준수, 싫으면 지금 말해.” 나지막이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나는 그저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을 뿐이었다. 금세 유천의 혀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연이어 유천의 뜨거운 손이 등을 쓸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지나는 곳마다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유천이 잠시 입술을 떼어내더니 자신의 티셔츠를 벗어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입술이 떨어진 그 잠시도 애가 타서 서둘러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는 몇 번이나 내 입술 위에, 내 목덜미에, 가슴 언저리에, 내 온 몸에 고백을 반복해서 새겼다. 그때마다 나는 밭은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읏! 자, 자, 자, 잠깐만!” 하지만 늘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겁이 많다는 거다. 유천이 바지에 손을 대는 순간 나는 또 다시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싫어. 아까 말하랬잖아.” “야, 야, 자, 자, 잠깐만!” 손목을 움켜쥔 내 손을 풀어내는 유천의 행동에 당황해서 말을 마구 더듬었다. 몸이 잔뜩 달아오른 것은 나나 유천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아직 정신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첫경험에 대한 여자들의 두려움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유천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몸 위에서 그의 흔들림이 가만히 전해져왔다.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나를 내려다보는 유천의 시선을 피했다. 유천이 턱을 잡아 돌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야, 김준수.” “뭐.” 나는 또 다시 시선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너 이상해. 전엔 안 그랬잖아. 잘도 안겨오더니.” “내, 내가 언제.” “기억 안나? 우리 집 작은 방에서. 마지막에 울긴 했지만.” 온 몸의 피가 또 다시 얼굴로 몰려 뜨거워졌다. 기억난다. 유천이 나를 안는다는 생각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던 날. “그, 그 날은 그 날이고.” “다를 게 뭐 있어?” “…….” 할 말이 없다. “준수, 나 봐봐.” 내가 계속 눈을 피하고 있자 유천이 또 다시 턱을 잡아 돌려 시선을 맞춰왔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유천의 눈동자와, 그의 섬세한 얼굴선과 마른 듯 단단하고 넓은 맨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라 쭈뼛쭈뼛 유천을 바라보았다. 유천은 그대로 다시 입을 맞춰왔다. 닿아오는 유천의 부드러운 입술, 따스하고 말캉한 혀. “하앗……!” 유천이 또 다시 허리를 쓸고, 가슴 언저리를 지분거리자 나는 그의 입술 위에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금세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미치겠다. 왜 이렇게 머리랑 몸이 따로 노는지. “너 아플까 봐 그래?” “…….” 내가 또 대답이 없자 유천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볍게 웃었다. 나는 아예 유천의 눈을 피해 고개를 외로 돌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 해 귀까지 욱신거린다. 제길, 밤이 너무 길다. 해 안 뜨나? “알았어, 패팅만. 됐지?” 유천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싫다고 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새로 뚫은 오른쪽 귀에 입을 맞췄다. “하읏! 야!” 나는 또 다시 진저리를 치며 유천을 밀어냈으나, 유천은 그대로 내 손목을 틀어쥐고는 계속해서 귀를 자극해왔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과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그것이 유천의 고단의 술수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천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내가 잔뜩 몸이 달아올라 수치심을 잊을 때까지 천천히 나를 흥분시켰다. 유천의 능숙한 리드에 따라 나는 금세 그의 목에 매달려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고, 유천의 입맞춤이 그 위를 덮었다. 계속되는 귀의 자극과 유천의 느릿한 애무에 이제는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바지가 내려간다고 느껴진 순간 유천의 몸이 그대로 아래로 쭉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내 것을 물어오는 유천의 뜨거운 체온에 시트를 움켜쥐고 말았다. 이제 멈출 수 없겠구나. 나는 어느새 체념하듯 유천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좁아터진 그 곳에 유천의 기다란 손가락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비틀어 다리를 오므렸다. 유천은 다리 안쪽에 진하게 입맞춤을 하며 무릎과 골반을 단단히 잡아 눌렀다. “아앗! 아파!” 힘겹게 유천이 삽입을 시도하자 눈물이 자동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잔뜩 휜 채 움켜쥔 유천의 어깨를 긁어내렸다. 금세 그의 흰 피부에 붉게 손톱자국이 생겼다. 유천은 그대로 입술을 부딪혀 내 입을 막아버리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읏! 아… 윽……!”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감격, 미안함, 두려움, 고통, 그리고 유천에 대한 사랑… 그것은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내가 너무 울자, 유천이 손을 깍지 껴 잡아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준수, 괜찮아?” “하아… 괘, 괜찮아.”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시트를 움켜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유천은 도중에 몇 번이나 움직임을 멈추며 나를 배려했지만 난생 처음 겪는 고통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속으로 ‘내가 미쳤지’를 반복하며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거실에는 채 끄지 못한 TV가 계속해서 왁자한 웃음을 쏟아냈다. 창밖으로는 하얗게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박유천과 그의 마음.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1월의 어느 날 우리는 이렇게 진짜 연인이 되었다. + 이마에 차가운 것이 와 닿는 느낌에 문득 잠을 깼다. 목덜미에도 서늘한 것이 잠시 와 닿았다가 멀어졌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힘겹게 한 쪽 눈을 떴다.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다. 잘 초점이 맞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눈을 비벼댔다. 이윽고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보는 유천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마를 짚어보고 있었다. “안녕?” “아, 안녕…….”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목이 잔뜩 쉬어서 쇳소리가 났다. 유천은 또 다시 내 목덜미를 짚어보고는 자신의 체온과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 안녕이라니! 이 무슨 어색한 인사란 말인가……! 나는 뱉어놓은 말을 주워 담지도 못한 채 얼굴이 확 달아올라 후다닥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앓는 소리를 냈다. 허리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알싸한 통증 때문이었다. 유천의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가뜩이나 달아오른 얼굴이 더 화끈해졌다. 으아씨! 박유천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지?” 쿡쿡 웃어대며 타이르는 듯한 유천의 말투에는 가슴 저 밑바닥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닥쳐.” 나는 여전히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목에서 심하게 쇳소리가 난다. 잔뜩 쉬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아, 진짜 내 팔자야…….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불 치워 봐.” “…꺼져.” “너 열 나.” 그러고 보니 손이며 목이 따끈따끈한 것이 열 기운이 느껴졌다. 감기인가? 어제 유천과 눈 위에서 뒹군 것이 떠올라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원래 처음엔 열 많이 나. 일어나, 약 먹자.” “…….” 미친놈아, 알려주지 않아도 되거든? 나는 화를 참기 위해 또 다시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유천의 말에 비로소 이것이 감기가 아니라 지난밤의 일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또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러면 더더욱 널 볼 수 없다고, 새끼야……. 나는 이불에 대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거 빈속에 먹어도 되는 거라니까 지금 먹어.” “…알았으니까 놓고 꺼지라고.” “마눌, 얼굴 좀 보자. 서방님 좀 있으면 일 하러 가야 되는데.” 박유천이 이딴 소리를 지껄이며 이불을 끌어내리기에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 해 움켜잡고 버텼다. 어쩌면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댈 수 있는지 이제는 저 녀석의 사고 체계가 의심스럽다. 왜 이렇게 깔끔 & 매너 박이 내 앞에서는 철판맨이 되는 거냐고.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미치겠다, 유천아…….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여전히 이불을 부여잡고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꺼지라고 했다? 죽고 싶냐, 박유천?” “약 먹는 것만 보고 갈게. 나 그렇잖아도 늦었어.” “그럼 그냥 가.” “…….” 끝끝내 내가 고집을 부리자 유천이 입을 다물었다. 언제 유천이 방을 나가나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흠칫했다. 아씨, 이 새끼 또 삐친 거 아냐? 쭈뼛쭈뼛 이불을 끌어내려 빠끔히 밖을 내다본 순간이었다. 유천의 힘에 의해 이불이 확 끌려 내려갔다. “우아앗! 뭐야!” 상체에 싸늘하게 찬 공기가 와 닿자,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서둘러 이불을 잡아챘다. “좋게, 말로 할 때, 약 먹자?” “…싫다면?” 하여튼, 저 이중인격. 수틀리면 협박이나 하고, 아주 삐치기도 엄청 잘 삐쳐요. 웃음기가 사라진 채 딱딱 끊어 말하는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 근데 왜 우린 아침부터 이 모양이냐고……. 어처구니가 없다. 그때였다. “한 번 더 할까?” “무, 무, 무, 뭐, 뭘!” 다시 내 위로 몸을 겹쳐오는 유천의 행동에 나는 눈이 화등잔만해진 채 심각하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순식간에 귀가 욱신거릴 정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진짜 김준수, 대책이 없다, 진짜……. “으하하하하!” 내 반응을 보더니 유천은 침대에 털썩 엎어져서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가 장난을 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 진지한 그의 표정에 진심인가 싶어 식은땀이 다 난 순간이었는데, 도대체 네 녀석의 장난기는 어디가 끝인 거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랫입술을 꾹 물고는 있는 힘을 다 해서 유천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 아파!” 유천이 몸을 뒤틀며 엄살을 부렸지만, 여전히 얼굴에 웃음이 한 가득이다. 진짜 얄밉다, 이 새끼. 나는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다가는 있는 힘을 다해 유천을 발로 차 버렸다. 정신없이 웃고 있던 그는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쿵 하고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키득대는 그를 향해 손에 잡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당장 꺼져!”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쉰 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첫 번째로 베개가 내 손을 떠났다. 베개는 유천의 머리에 정면으로 충돌한 후 바닥에 떨어져버렸고, 이어 협탁에 놓인 티슈 상자와 손목시계 같은 것들이 연이어 허공을 날았다. “야, 아파! 아씨!” “아씨? 아씨? 이게 어디서……! 더 해 봐, 새끼야! 더 해 봐!” “아, 진짜 아프다고!” “미친놈아, 간지러우라고 던지는 거 아니거든!?” “사랑해!” “닥쳐!” 유천의 엉뚱한 말에 또 다시 호텔의 안내 책자가 허공을 날았다. 으아- 소리를 지르며 유천은 방문을 벌컥 열고 도망갔고, 갈색 파일은 쾅 하고 닫히는 방문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나는 씩씩대며 숨을 가다듬었다. 목소리도 안 나오는데 소리를 질러댔더니 아침부터 기운이 쭉 빠져서 숨 쉬기도 힘이 들다. 방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고, 내 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열 기운과, 허리 아래로 느껴지는 통증. 나는 한참 더 씩씩대다가는 개새끼… 라고 중얼거리며 털썩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윽…….” 이어지는 고통에 또 다시 앓는 소리를 내야 했다. 아침부터 박유천을 패주느라 아우성을 쳤더니 더 아프다. 나는 멍하니 낯선 천정을 올려다보며 고통을 잠재웠다. 그때 달칵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빠끔히 열리는 것이 보였다. “죽을래!” 나는 베개를 하나 더 집어 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베개가 문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유천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진짜 얄미워 미쳐버리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서 패고 밟고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데 몸이 이렇게 시원치 않아서야! 문이 다시 빠끔히 열렸다. ‘야!’ 하고 소리를 지르자 유천이 문을 조금 더 열더니 척 하고 두 손을 모아 사과하는 포즈를 취했다. “야, 미안!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진짜 죽여 버린다, 너!” “알았어, 알았어. 근데 지금은 못 죽이잖아. 나중에 하자. 어? 흥분하지 마, 열 더 난다.” 저런 대사는 어디서 배운 거냐……. 완전 느끼한 새끼. 기가 막혀서 웃음이 다 난다. 그때 유천이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으며 방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제 던질 것이 없다. 아, 진짜, 저 새끼 영악하기는.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에서 힘을 쭉 빼고 축 늘어져 버렸다. “준수, 나 진짜 늦었어.” “어쩌라고.” 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유천은 또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내 싸늘한 눈초리에 금세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아야 했다. 씨발… 나는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내며 또 다시 내 신세를 한탄했다. 유천은 여전히 웃음기를 채 지우지 못한 채 초토화가 된 방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뭔가를 주워들고 내게 다가왔다. 유천이 침대에 걸터앉자 잔잔한 흔들림이 내게까지 밀려왔다. 문득 어젯밤이 생각나서 나는 또 다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꼬맹이, 무슨 상상하냐. 얼굴 또 빨개졌네.” “죽는다, 진짜. 말 할 기운도 없는데 자꾸 말 시킬래.” 나는 잔뜩 진이 빠져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 먹자, 준수.” 유천은 쿡쿡 웃으며 내 등 뒤로 손을 넣어서는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앉혔다. 아씨, 이 새끼가 완전 애 취급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지만, 이제는 진짜 반항할 기운도 없어서 유천의 품에 안겨서 순순히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유천이 물 컵을 들어 입술에 대주었다. 나는 그것마저도 순순히 받아 마셨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 내가 박유천네 아파트 앞에서 실신 직전에 명희 씨에게 발견된 날이 떠오른다. 그땐 입으로 먹여줬는데 말이지……. 나는 도르륵 눈을 굴려 유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룸서비스 시켜 놨거든. 30분 정도 있다가 오라고 했으니까, 아침 먹고 쉬고 있어.” “응.” “너 핸드폰 회사에 두고 왔지?” “응.” “그럼 내 핸드폰 두고 갈게. 오전에는 돌아다니지 말고, 게임하거나 인터넷 하거나 그러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단축번호 10번이 매니저 형이니까 전화하고. 호텔에서 노트북 빌려다 줘?” “됐어.” “점심때 올 테니까, 심심해도 조금만 참아.” “응.”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유천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힛- 하고 웃고 말았다. 나를 안고 있으면서도 주섬주섬 베개며 협탁을 정리하던 유천이 내 웃음소리에 의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흠칫 놀라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나도 제정신은 아닌가보다. 그렇게 아침부터 악다구니를 써대며 난리를 치고선, 또 금세 좋다고 웃는다. 시선을 피한 채 얼굴이 빨개져 있는 나를 보더니 유천은 또 뭘 금세 눈치 챘는지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나도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냐?” “그러는 넌?” “네가 웃으니까.” “나도 네가 웃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나 눈을 마주치며 키득거렸다. 갑자기 가슴 저 밑에서부터 뭔가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와 나 사이에 뭔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질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연대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며, 우정 같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형제애 같기도 한, 설명하기 좀 힘든 애매모호하면서도 따뜻한 그런 감정이었다. 굳이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유천과 내가 손을 맞잡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랄까? 우리를 연결한 뭔가가 좀 더 강해졌다. 사랑이라는 몽글몽글한 감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네모반듯하고 단단한 무엇. 하지만 그것이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우린 잘 해낼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만 달려온 길이었으나, 사실은 앞으로 험난한 길이 첩첩이 버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유천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도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당황스러워져서 입술을 꾹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유천이 피식 웃으며 왼손을 잡아서는 손등 쪽으로 깍지를 껴왔다. 달그락거리며 반지가 부딪혔다. 그리고 유천의 입술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쭈뼛거리며 턱을 조금 들어 그의 입술에 마주했다. 조심스럽고 감미로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 순간 마치 세상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 유천이 주고 간 약은 진통 성분까지 있는지 약효가 돌자 열이 내리고 통증이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대충 샤워를 하고는 소파에 뒹굴거리며 유천의 핸드폰을 구석구석 뒤적거리다가 어제 산장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대번 삭제를 눌렀지만 사진이 꽤 잘 나온 것 같기에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우리는 참 여기 와서 많은 추억을 쌓고 간다. 느닷없이 생긴 일주일의 휴가에 박유천의 정체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계속 우리를 괴롭히던 사진이며,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에 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터라, 조금은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뭐, 박유천과의 역사적인 첫날밤도 있었고……. 지난 생각에 잠겨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얼굴이 따끈따끈 달아오르기에 고개를 홱홱 저어 머릿속에서 생각을 날려버렸다. 와씨… 되게 민망하다. 박유천이 돌아와도 문제다. 아침에는 까칠하게 굴어서 얼른 쫓아내 버렸는데, 아무 일도 없이 신경질을 낼 수도 없고 이제 어떻게 유천을 봐야 되나……. [딩동♬] 도어 벨이 울렸다. 시계를 흘깃 보니 얼추 1시가 되어 간다. 점심때 쯤 오겠다는 유천의 말이 생각나서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온 몸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 꼬맹이.” 이재영이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들며 특유의 색이 엷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짜로 몸이 굳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따라붙었다. 박유천과 나 사이를 끈질기게 방해하는 ‘운명’이라는 놈이……. 눈을 깜빡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해?” “유천이 따라 왔어요.” “일은?” “휴가요.” “흐음…….” 그는 선글라스 다리 한 쪽 끝을 톡 물어뜯으며 정말이냐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그리고 순간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그가 내게 했던 고백을 떠올려버렸다. 금세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미치겠다. 이 상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괜히 당황하여 쭈뼛쭈뼛 웃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야.” “네?” “들어오라고 안 하냐?” “아, 저… 그게…….” 나는 더욱 당황하여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재영과 같이 있는 것을 유천이 봤다가는 이번에는 정말 나는 황천행이다. “유천이는 촬영 중인데…….” “그게 뭐?” 그러게……. 내가 그 얘긴 왜 했을까. “저, 저기, 그러니까, 바, 밖에서 얘기해요.” 나는 말을 마구 더듬으며 일단 재영을 방에 들여놓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입고?” 재영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내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 차림의 전형적인 백수 패션. 신발장에 붙은 거울을 흘깃 보니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소파에서 뒹굴었더니 까치집이다. 갑자기 얼굴이 폭발할 듯이 달아올랐다. 아씨, 쪽팔려! 나 이렇게 입고 이재영을 봤다는 거야?! 고백까지 받았고, 조금이나마 가슴마저 두근거렸던 상대의 앞에서 이런 추한 모습이라니! “가, 갈아입고 올게요.” 서둘러 문을 닫으려 하자 문틈 새로 그의 발이 척 하고 들어왔다. 나는 흠칫 놀라 그의 발과 문틈 사이로 보이는 재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나 계속 밖에 세워 둘 거야?” “아…….” 생각해 보니 그도 그렇다. 나는 머뭇머뭇 문을 열어 재영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앉아 계시라고 말을 하고 얼른 욕실에 들어가서 머리에 물을 축여 다시 드라이를 했다. 옷을 갈아입으려 방으로 가면서 보니 그의 시선이 계속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괜히 민망하다.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점심 먹었니?” “아, 아뇨.” “가자, 밥 사 줄게.”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시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후면 박유천이 올 것이다. 밥이든 뭐든 일단 유천이 오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나저나 나는 왜 자꾸 병신같이 말을 더듬는 건데……. 좌절이다, 정말.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치열하게 고민하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그는 유천을 찾아 온 게 아니었던가? 만나야 할 사람이 내가 아닐 텐데 왜 나와 점심을 먹겠다는 거지? 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이었다. [딩동♬] 도어 벨이 울렸다. 박유천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귓가에 점심 때 오겠다는 유천의 말이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그것은 마치 사신의 방문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재영을 바라보았다. 고층이니 창문으로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데 어쩌지……. 그때 내 시야에 거실의 붙박이장이 들어왔다. “일어나요.” “왜?” “들어가요.” “미쳤어?” “아직 안 미쳐서 이러는 거니까 제발 좀 들어가요, 좀.” 나는 재영을 붙박이장에 마구 밀어 넣었다. 내가 하고 있지만 정말 기가 막힌다. 이건 진짜 바람피우다 걸린 사람들이 하는 짓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 좀! 들어가요!” “야, 장난해?” “유천이한테 걸리면 죽는단 말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들어가요!” 우리가 이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이 두어 번 도어 벨이 더 울렸다. 나는 더욱 당황하여 막무가내로 재영을 장 안으로 밀었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며 버텼다. 그리고 현관에서 찰칵 하고 잠금장치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재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재영 씨! 한 번만.” “야.” “제발. 재영 씨, 제발, 제발. 나 유천이한테 정말 죽어요.” 손을 모아가며 제발을 연발하자 재영은 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어이없어 하는 틈을 타 나는 그를 붙박이장 안으로 확 밀어 넣어버렸다. 문이 열리고 현관에 누군가가 들어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현관 쪽을 돌아보았다. 그때 재영이 내 손목을 낚아채서는 장 안으로 확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으나 재영은 내 입을 틀어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가 거실로 들어섰다. 동시에 붙박이장의 문이 달칵, 하고 닫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재영에게 포옥 안겨 붙박이장의 어둠 속에 있었다. “아니, 왜 나는……!” “쉿.” 발끈해서 작게 소리를 지르려 하니 재영이 다시 입을 막아왔다. 그의 손은 체온이 높았다. 나는 입가에 와 닿은 그의 뜨거운 손에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였다. 붙박이장 아래쪽에 난 통풍창으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준수 씨?”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현지 씨였다. 아, 뭐야. 박유천 아니잖아. 나는 입을 막은 재영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어라? 준수 씨? 어디 갔지.” 현지 씨가 나를 찾는 듯 거실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재영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쿡쿡 웃기 시작했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억눌러 참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유천이 아니더라도 나갈 수가 없다. 도대체 그녀에게 뭐라고 변명을 한단 말인가? 이건 누가 봐도 빼도 박도 못하는 불륜의 현장인 것이다. 물론 실제로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준수 씨?” 현지 씨는 계속 나를 찾아 방문이나 욕실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빨리 가주었으면 하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기척을 살폈다. 그리고 그때 재영의 입술이 볼에 살짝 와서 닿았다. “…….” 몸이 굳었다. 밖에서 현지 씨가 전화를 거는지 핸드폰 키패드를 또각또각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가요, 현지 씨.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사정하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재영과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좁아터진 붙박이장 안에서는 역효과. 나는 도리어 그의 품에 완벽하게 안긴 꼴이 되어 버렸다. 지이이잉. 현지 씨가 전화를 걸자 소파 위에 두었던 유천의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저걸 갖고 있었으면 당장 들킬 뻔 했다……. 나는 사소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냄새 난다.” 귓가에 와 닿는 재영의 낮은 목소리에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상황은 예전에 그가 병원에서 키스를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그에게 저항할 수 없고, 그는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뭐 그런 불공평한 상황…….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설마 붙박이장 안을 찍는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진 않았겠지?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하지 마요.” “뭘?” 나는 잔뜩 숨을 죽인 채 작게 속삭였고, 그는 조용히 웃으며 대꾸해왔다. 키스라고 차마 대답할 수 없어서 나는 또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유천 씨? 준수 씨 방에 없는데요?” 마이 갓. 현지 씨가 드디어 내가 방에 없다고 박유천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때 재영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와 닿았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씨, 내가 정말 미쳐버리겠다. 오늘 내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겠구나…….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있는 대로 고함을 지르며 쿵쾅거리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내 심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목덜미며, 이마의 혈관에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꼼지락거리며 그를 조금 밀어냈다. 또 다시 그가 쿡쿡 웃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 지를 거예요.” 그런 그에게 나는 되지도 않는 협박을 지껄여댔고……. “질러, 난 박유천이 알아도 상관없어.” 라는 무시무시한 대답을 들었다……. 그의 대담한 발언에 나는 체념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천이가 벌써 알았어요.” “그래? 잘 됐네. 이제 박유천한테 가서 너랑 헤어지라고 하면 되는 건가?” 미친……. 정말, 진심으로, 욕이 혀끝까지 튀어나왔다. 나는 조만간 해탈하지 싶다. 도대체 이 사람과 박유천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게 닮은꼴이라는 건가? 아, 진짜 괴물 같은 인간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입술이 와서 닿았다. 이번엔 깊은 입맞춤이었다. 그의 따스한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기에 나는 잔뜩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리며 어깨를 조금 밀어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거의 틈이 없었고, 붙박이장 속에도 다른 물건들 때문에 공간이 거의 없었다. 현지 씨에 이런 장면을 들켜서 박유천에게 끌려가느니……. 결국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키스에 응하고 말았다. - ……? “모르겠어요, 전화기도 두고 갔는데.” - ……. “알았어요.” 재영과 나의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거실에서는 현지 씨와 유천의 통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셋은 아무래도 전생이 원수였지 싶다. 이렇게 꼬이고 얽힌 관계라니 정말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인데. [딩동♬] 다시 도어 벨이 울렸다. 현지 씨가 현관문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야말로 박유천일 것이다. 재영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덥다. 붙박이장 안에는 우리가 만들어낸 희미한 열기가 가득했다. “누구세요?” 현지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유천이 아닌가 보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우리는 어둠속에서 흘깃 눈을 마주쳤다. “박유천 씨 계신가요?” 그리고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붙박이장의 문에 바짝 귀를 붙였다. 누군데 여기서 유천을 찾는 걸까? “지금 없는데요.” “언제 오시죠?” “저녁 때 되어야 올 거예요, 아마.” 뭐야, 점심 때 온다더니. 현지 씨의 말에 나는 괜히 유천에게 심통을 부렸다. 낯선 남자가 갔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지 씨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메모지에 써서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다시 현관 쪽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어둠속에서 잠시 더 귀를 기울이다가 그녀가 완전히 가버렸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깥 공기를 마시니 살 것 같다. 일단 숨을 돌린 나는 재영에게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저기요!” “재영 씨.” 어이없다, 진짜.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그는 또 이름을 고쳐주며 태연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는 것이 아닌가? “뭐야, 왜 이렇게 박유천 찾는 사람이 많아?” “말 돌리지 말고요.” “무슨 얘기 하게?” 무슨 얘기는 무슨 얘기야, 왜 마음대로 키스를 하고 난리냐 이걸 따지려는 거지! 나는 붙박이장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저 안에서!” “꼬맹이, 목은 왜 쉬었냐?” “……!”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드디어 잤어?” 쿡쿡 웃으며 짓궂게 말을 꺼내는 재영의 말에 얼굴은 터지기 직전이라도 된 듯이 달아올라버렸다. “자, 자꾸 말 돌리지 말라고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를 할 거냐고. 얼른 해 봐.” 적반하장으로 뻔뻔하게 물어오는 재영의 말에 기가 막힌다. 한 대 치기라도 할 듯이 주먹을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안 되겠어요, 그냥 가세요.” “얼른 옷이나 입고 나와.” “가시라고요. 유천이 오면 저 진짜 죽어요.” 재차 재영에게 말을 건넨 순간이었다.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등 뒤에서 유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인간의 공포심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이란 바로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는 경우다. 보이지 않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경우, 특히 그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지라면 인간은 이성을 잃고 공황상태에 빠질 만큼 공포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눈앞도 멀쩡히 볼 수 있고, 묶여 있지도 않은 상태임에도 극단의 공포로 뻣뻣하게 몸이 굳은 채 거실에 멍하니 서 있는 참이었다. “오셨어요?” “어.” 날 공포에 떨게 만든 저 두 원흉들은 얼어붙은 나를 사이에 두고 태평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래… 죽는 건 김준수 하나라 이거냐? 나는 조금 심술이 난 채 쭈뼛쭈뼛 고개를 돌려 유천을 돌아보았다. 목에서 끼기긱 하고 녹슨 기계 소리라도 날 것 같은 어정쩡한 움직임이었다. “……!” 그리고 마주친 유천의 시선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넌 이제 죽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살벌한 시선에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어쩌자고 재영을 안에 들였을까……. 아니, 저 사람은 왜 하필 우리 주위를 맴도는 걸까? 왜 하필 나이며, 왜 하필 저 사람인 걸까?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곰곰이 머리를 굴려 봐도 후회는 언제나 늦다. “강 매니저님 연락 못 받으셨어요?” “아니 받았어.” “스태프들 다 위에 있는데.” “알아, 박유천 씨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준수가 있더라고.” 재영이 내뱉은 ‘준수’라는 단어에 유천의 움직임이 전원 나간 장난감 로봇처럼 우뚝 멈추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숨도 못 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유천의 눈치를 봤다. ‘준수’라니 이건 박유천에게 우리의 호칭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결과밖에 안 된단 말이다. 어제 그렇잖아도 ‘재영 씨’라고 해서 곤돌라에서 일치를 뻔 했는데.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알잖아.” “이사님도 준수 저랑 사귀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네.” 씨발, 나 집에 갈래……. 얼어붙은 나를 거실에 세워놓고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저러고 있다. 전류라도 흐르는 듯 찌릿찌릿하게 스파크를 튀기고 있는 두 사람은, 역시 재영 쪽이 연상에, 연륜이 있어서 그런가 좀 더 느긋하다. 그는 미소까지 띤 채 느긋하게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우리를 보고 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재수 없는 부잣집 도련님 포즈. 반면 유천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것이 눈에도 보일 지경이다. 둘 사이에 오가는 이런 예민한 신경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인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인 이 상황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이제 어쩌지……. 한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슬금슬금 둘이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준수, 방에 들어가 있어.” 슬그머니 유천의 옆에 앉으려다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곱게 말을 들으면 김준수가 아니다. “…싫어. 왜?” 나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유천을 노려보았다. 재영이 쿡쿡 웃기에 매섭게 그를 노려봐주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어제 나랑 한 거 재연하던가. 이사님 보여드릴까? 우리 어떤 관계인지?” 억양이 없는 유천의 나지막한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런 미친’ 하고도 시옷 발음까지 내뱉었을 때였다. “김준수, 말로 할 때 입 닫고 당장 들어가.” 네. ‘들어가’에 잔뜩 악센트를 실어 싸늘하게 중얼거리는 유천의 말에 찔끔해서는 발딱 일어나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으와, 위험했다. 무인도에 처박아버리겠다고 했던 이후 처음 듣는 유천의 가라앉은 목소리.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대로 문에 등을 기댄 채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서둘러 몸을 틀어 귀를 문에 바짝 갖다 댔다. 아무리 들어가 있으라고 했지만, 내 생사가 달린 일인데 나 몰라라 하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사님, 말 돌리지 않겠습니다.”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에 나는 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무섭게. “해 봐.” “준수 저랑 사귀는 거 아신다고 하셨죠?” “어.” “그럼 준수 불러내서 개인적으로 만나시는 거 이제 그만 하셨으면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내리꽂는 유천의 냉랭한 말투에 나는 또 다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와씨, 저 새끼,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니, 정적인지, 잘 들리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귀를 더욱 문에 바짝 붙이고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박유천 씨.” “네.” 드디어 재영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빈정거리거나 장난기 어린 눈으로 쿡쿡 웃어대던 것과는 다른 진지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 아씨, 감질나. 잘 안 들리고……. 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문고리를 소리 나지 않게 돌려 살짝 문을 열었다. 미세하게 열린 문틈으로 재영의 목소리가 더 크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박유천 씨가 남자 대 남자의 대화를 원하니까 그렇게 응해줄게. 지금 우리한테는 그게 맞는 것 같으니까.” “네.” “난 사실 연애라는 걸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라. 대개 일회성 만남에 그쳐서 말이야.” “…….” “그런데 저 꼬맹이, 준수는 좀 달라. 나 진짜 쟤 좋아하나 봐.” 저 사람이 미쳤구나……. 나는 넋 나간 표정이 되어 천정을 응시했다. …저기요? 거기 계신 분? 바쁘세요? 나 박유천한테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방치하는 건데요? 네? 듣고 계세요? 정말 미치겠네……. “사실은 내가 억지로 스킨십도 많이 했어. 벌써 알고 있다며?” “네. 준수 겁 많고, 마음 약해서 제대로 반항도 못 했을 겁니다 아마.” “다행이야. 상대가 이성적인 박유천 씨라서. 다른 놈들이었으면 벌써 칼이라도 들고 죽인다고 달려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뭐냐, 이 대화는……. 도대체 내가 없는 자리에서 저 사람들은 어디까지 이야기를 진척시킬 셈인지 이젠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데, 박유천 씨는 연인들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재영의 말에 멍해졌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유천도 의외의 질문에 말이 없이 재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생각엔 책임이야.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서 깨달은 거긴 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박유천 씨가 나에게 김준수를 만나라 마라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어.” “…….” 저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고……? “사귀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건 하면 안 되는 게 맞겠지.” 나지막이 이어진 재영의 말에 언뜻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비상계단 사건. 계속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신경을 갉작갉작 긁어대며 나를 불안하게 하던 바로 그것. 막아야 한다. 유천이 알게 하고 싶지 않다. 비상계단의 일을 내가 안다는 걸 유천이 알았을 때 그가 지을 표정이, 그가 할 말이나 행동, 모든 것이 겁난다. 그랬다. 이제 와서 얘기하건데, 알량한 자존심을 핑계대고 있었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 저편에 있는 진실이 두려웠다. 정말 유천에게 다른 사랑이 있으면 어쩌나, 그가 혹여 헤어지자고 하지 않을까……. 그는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니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이야기해서 내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진실의 은폐를 택했다. 내가 모르는 척 하고 있으면 그도 끝까지 입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박유천이었으니까. “예전에…….” “저기.” 재영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나는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쭈뼛쭈뼛 웃으며 ‘저기……’라는 말만 더듬거렸다.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유천이 여전히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쭈뼛쭈뼛 유천의 눈치를 보면서도 재영에게 그 얘기는 하지 말라는 눈빛을 계속해서 보냈다. 재영은 나의 그런 표정에 쓴웃음을 지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준수, 방으로 들어가.” “싫어.”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유천이 몸을 일으켜 방으로 다가왔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왜 그렇게 긴장되던지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쳐 다시 방으로 들어서버렸다. 유천은 문고리를 잡고 잠시 나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은 죄…는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분위기 너무 살벌하다. “방에 있어. 엿듣지 말고.” 내가 문 열었던 것도 벌써 들켰나보다. 쌀쌀맞은 유천의 말투에 주눅이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천은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왠지 모를 무력감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당사자인데 나를 빼놓고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다니. 나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또 나올지 짐작도 할 수 없어서 겁이 났다. 나는 다시 문으로 다가가 귀를 바짝 대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좀 전에, 무슨 뜻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그냥 못 들은 걸로 쳐.” 재영의 말에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거다. 재영의 말을 끝으로 거실에는 또 다시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유천이었다. “이사님께서는 저희에 대해 아시는 게 많은 모양이네요.” “적지는 않다고 봐.” “그럼 혹시 이것도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뭐?” “준수는 절 좋아해요. 그런데 준수는 이사님도 좋아하죠.” “……?” “왜 그런지 아세요?” 무슨 소리야 저게……? 나는 눈을 깜빡깜빡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문에 귀를 갖다 댔다. “제가 모르는 뭔가를 이사님과 준수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어요. 아마 준수와 제 사이가 안 좋았던 그 즈음이었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알아도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누군가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준수와 지내온 게 자그마치 7년입니다. 저 녀석 단순하고 솔직해서 속에 있는 건 대체로 다 알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짧은 침묵. 그리고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녀석 이상형은 저에요. 저와 사이가 나빠진 동안에 이사님에게서 제 그림자를 보고 흔들린 것뿐이고요. 그러니까 준수가 이사님을 좋아한다고 착각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지. 모두가 이상형과 연애하고 결혼하진 않아.” “준수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서 책임감 없이 계속 준수를 힘들게 하겠다?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는데.” “제 어떤 모습을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무책임하게 보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경솔하게 행동해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요. 이사님에게 어떻게 보이든 저는 신경 안 씁니다. 준수가 힘들어하는 건 저도 마음 아프지만, 가끔 해피엔딩을 위해선 넘어야 할 벽이라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유천의 말을 끝으로 쥐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나는 또 다시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려서 작은 틈새를 만들어냈다. 재영이 담배연기를 뱉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고 유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쩔 셈이야?” 재영의 조용한 물음에 유천은 그저 희미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저 미소는 입을 열지 않겠다는 신호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쓴 채 한숨을 내쉬었다. 박유천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저렇게 입을 다물어버리면 어쩌란 말인지……. “혹시 이번 클레임 건과 관계가 있는 건가?” “그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나는 문틈으로 유천을 노려보며 온갖 욕을 퍼부어주었다. 도대체 뭔 소리야. 개새끼,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하고. 진짜 짜증난다. 그런데 정말 나는 재영에게서 유천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끌렸던 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랐을 때부터 나는 계속 그에게서 유천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장난기 심하고, 가끔 심술궂고, 쌀쌀맞고 재수 없는 말투,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따뜻한 시선. 그러고 보니 저 둘은 참 느낌이 비슷하구나……. 박유천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어떻게 저렇게 잘 알고 있는 건지 신기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상관없어. 나도 남의 눈에 신경 쓰는 인간은 아니어서 말이야. 나한테서 박유천 씨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든, 아니면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이든, 어쨌거나 저 녀석 마음이 나한테 있다는 건 분명한 거잖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무엇보다 난 준수가 박유천 씨 때문에 앓고 있는 건 못 봐주겠거든.”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 아닌가요?” “어어, 이봐, 내 첫사랑을 무시하지 마. 동정이라니. 그리고 사람 마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재영의 장난스러운 말에 유천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왠지 둘 다 쫌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뭐, 분위기가 조금 날카롭긴 해도 죽이네 마네 하는 저속한 대화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왜 당사자인 나는 저기에 끼어들지 못하는지 잘 이해는 못 하겠지만. “준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 그건 왠지 공감 가는 말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이서 쿡쿡 웃어댄다. 왠지 기분이 나쁜 것이 내 욕 같다. 정작 당사자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둘이서 뜻도 모를 소리를 지껄여대고 정말 재수 없다, 둘 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문 틈새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선전포고 하셔도 전 준수 못 내드립니다. 준수한테도 이사님 만나지 말라고 못박아둘 거구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건가? 역시 머리 좋네. 하지만 과연 준수가 날 완벽하게 피할 수 있을까? 세상엔 묘하게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빈번히 일어나서 말이야.” “정 안 되면 어딘가에 가둬 두죠, 뭐.” “그렇다면 나는 거기서 납치라도 해야겠군. 창과 방패의 대결인가? 이거 흥미진진한데?”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닙니다.” “나도 장난 아니야. 아, 그건 그렇고… 클레임 건 말인데.” “그건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유천이 이쪽을 흘깃 바라보는데, 문 틈새로 눈이 마주쳐서 움찔했다. 나는 문을 쾅하고 닫아버리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보다. 와, 진짜, 저 새끼 눈치 하나는 정말 인정. 숨을 고르며 그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기고 있으려니 재영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누군가와 몇 마디를 나지막이 주고받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같다. 나는 다시 귀를 문에 바짝 갖다 댔다. “난 먼저 이쪽 관계자랑 미팅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박유천 씨도 옷 갈아입고 강 매니저랑 바로 올라와.” “네.” 드디어 간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다시 닫히는 소리. 그리고 유천이 다시 되돌아오는 소리. 엥? 유천이 되돌아오는 소리?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나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곳을 찾았다. 몰랐는데 박유천이 무섭다! 정말 무섭다! 어젯밤을 지내보고는 확실히 깨달았다! 난 유천에게 잡히면 죽는 거다! 이건 생각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살기 위한 본능적 발버둥이었다. 허둥거리며 아까처럼 붙박이장 속에 숨을까 하다가는 간신히 등 뒤에 문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잠그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실천하는 것은 고작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손을 뻗어 잠금장치를 철컥 눌러버렸다. 유천이 문고리를 잡는 소리와 거의 동시였다. 손잡이를 돌리는지 몇 차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잠긴 문이 열릴 리가 만무하다. 일단 직면한 위기는 넘겼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어.” “……!” 사신의 목소리가 저보다 살기 어리고 음산할까? 나는 문에서 흠칫 한 걸음 물러섰다. 철컥철컥. 또 다시 유천이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열어.” “…….” “열라고 했다.” 계속되는 유천의 살벌한 목소리에 나는 숨을 죽인 채 손잡이만을 응시하고 있는 참이었다. “김준수, 빨리 열어.” “…….” “하나.” 하나, 1, 일, 유일함 등등의 의미를 포함한 아주 기초적인 어휘. 하지만 나는 그 단어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공포의 카운트다운이……. “시, 싫어!” “둘.” “야, 야, 왜 이렇게 빨라!” “그러니까 열어.” “싫다고, 미친놈아!” “부술까?” “……!”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방도 비싸 보이는데 문짝 하나에 수백 만 원 할지 어떻게 아냐고. 괜히 입을 삐죽거리며 문을 노려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셋.” “여, 여, 여, 열게! 기다려, 잠깐만!” 유천의 나지막한 카운트가 끝나자마자 나는 마구 말을 더듬으며 서둘러 문고리를 잡았다. 아, 진짜 비굴하다, 김준수……. 자, 이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 결국 나는 그냥 살고자하는 본능에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달칵.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조그맣게 열리는 틈 사이로 유천의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유천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더니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발뒤꿈치에 침대가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아 버렸고, 곧이어 유천의 손에 의해 어깨가 잡혀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 “…….” 묘한 정적이 흘렀다. 활짝 열린 문으로 거실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나는 유천의 그림자에 가려 엷은 어둠속에서 긴장한 채 굳어 있었다. 유천이 한 쪽 입꼬리만 올려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설령 믿지 않을 변명이라도! “유, 유천아…….” “뭐.” “그게, 내가, 저기,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쭈뼛쭈뼛 변명을 시작하자 유천은 짧게 대답하며 목에 입술을 묻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움츠리고 꼼지락거리자 금세 그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야, 야, 왜 이래!” 나는 당황해서 유천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허둥댔다. 그때 유천이 목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너 이 향수냄새 뭐야.” “으, 응? 무슨 향…….” 제길, 붙박이장 속에서 안겨 있었더니 재영의 향수 냄새가 밴 모양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나는 눈을 마구 이리저리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너…….” 유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싸늘하게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쭈뼛쭈뼛 멋쩍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역광을 받아 짙게 음영을 진 유천의 얼굴은 조각과도 같은 황금비율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사신과도 같은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음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난 죽었다……. “김준수…….” 공격 개시를 알리는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나는 생존을 위해 자존심을 내팽개쳐버렸다. “살려줘.” 내가 한 말이 맞던가?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뭐 의문의 여지없이 내가 한 게 맞는 모양이다. 자연스레 가슴 언저리에 손까지 모으고 빌고 있는 걸 보니. “진짜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살려줘, 박유천.” 나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진지한 표정으로 유천의 눈을 응시한 채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나 아프잖아. 어제 너랑 그… 뭐냐… 해서 아프잖아, 어? 너 지금 나한테 뭔 짓 하면 정말 인간 아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나는 유천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유천은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그제야 나는 내 생존본능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살벌했던 유천의 표정이 노골노골하게 풀렸으니까. “뭘?” “응?” “뭘 잘못했냐고. 말해 봐.” 이재영이랑 키스했다고,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새끼야! “어… 그러니까…….” 급작스런 전개에 괜히 당황스러워져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적당한 변명거리가 떠오를 리가 없다. 나는 ‘저기, 그러니까’ 만을 연발했고, 유천의 손이 또 다시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야, 하지 마!” 나는 허리를 쓸어내리는 유천의 손길에 진저리를 치며 그를 밀어냈다. 유천은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내 입을 막아버렸다. 버둥대며 다시 그를 밀어내자 손목을 잡아 눌러왔다. 입술이 막힌 채 ‘읍, 읍’ 거리며 조금 더 반항을 해 보았지만 박유천은 놓아줄 기미가 안 보인다. 잠시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누구 왔나 봐…….” 나는 고개를 돌리며 유천의 입술을 피했다. 하지만 유천은 턱을 잡아 돌리더니 다시 입을 맞춰왔다. 미치겠다, 이 새끼. 이제 누가 보든 상관없다는 거냐? 다시 한 번 온몸을 버둥거려 유천을 밀어내보았지만, 유천은 잡힌 손목이 아플 정도로 더 단단히 나를 밀어붙여왔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유천은 닿아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유천 씨.” 열려 있는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현지 씨가 서 있었다. 씨발, 쪽팔려. 나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채 얼른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유천에게 손목이 붙잡혀 침대에 쓰러져 있고, 유천은 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상황. 이건 누가 봐도 뻔한 장면 아닌가? “강 매니저님이랑 사무실로 올라오시래요.” “네, 고마워요.” 유천은 나지막이 대답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내 손목을 끌어당겨 일으켜주었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붉어진 손목만을 매만졌다. 하지만 현지 씨는 당황한 기색도 없다. 뭐야, 저 사람들 설마 우리 사귄다는 거 다 아는 거야? 아 진짜 쥐구멍이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은 이 기분. “어디까지 들었어, 밖에 얘기.” “하나도 못 들었어.” 날 가둬두겠다는 네 녀석의 말과, 납치라도 하겠다는 재영의 말까지 싸그리 다 들었다, 미친놈아! 내가 물건이냐! 무슨 짐짝 취급하고 있어! …라고 외쳐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유천의 손이 이마로 불쑥 다가왔다. 놀라서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은?” “괘, 괜찮아.” “아픈 건?” “괜찮아…….” 괜히 민망하여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자 유천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미팅 갔다가 아마 바로 촬영 들어갈 것 같아. 오늘 안에 촬영 다 마치고 철수하기로 했다니까 늦게까지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현지 씨랑 같이 가서 밥 먹어. 같이 못 있어서 미안해.” 그의 목소리에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감정이 묻어났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쨌거나 민망해 죽겠으니 좀 사라져주지 않으련?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아무튼 저 녀석 뻔뻔한 건 알아줘야 한다. 나랑 스캔들 기사가 나도 상관없다는 놈이니 뭐 말은 다 했지만. 나는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투덜댔다. 유천은 그런 내 머리를 귀엽다는 듯 부스스 흩어놓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내버렸고, 유천은 쿡쿡 웃었다. “유천 씨, 아까 누가 찾아왔었어요.” “네?” 거실에서 들려오는 현지 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유천을 바라보았다. 맞다. 아까 붙박이장 안에 있을 때 찾아왔던 낯선 남자.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박유천이 이 동네 사는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여기 있는지 알았을까? “누가요?” “모르는 사람이던데. 언제 오냐고 하기에 저녁 때 온다니까 그냥 갔어요.” “혹시… 덩치 크고, 정장 입고, 머리는 회색으로 염색하지 않았어요? 30대 초반 정도…….” “맞아요. 아는 사람?” “…….” 유천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갉작거렸다. 나는 눈을 깜빡깜빡하며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유천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버렸다. “준수야, 내 핸드폰 어디 있어?” “거기 소파 위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천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섰다. 유천은 핸드폰과 담배를 집어 들더니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아씨, 또 뭐야…….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 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유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지 씨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얼굴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다. 그런 민망한 꼴을 보였으니. 나는 멋쩍게 굳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TV를 켰다. 현지 씨는 그런 나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는 것 같다. 얼굴이 더 화끈해졌다. 아 진짜 심하게 민망하다. 박유천, 진짜 저 새끼 죽여 버려……. 나는 유천의 뒷모습에 눈을 흘겨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난감한 공기가 잠시 흘렀다. 그리고 나를 살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호텔 내선 전화가 울렸다. 주현 누나다. 현지 씨에게 바꿔주니 몇 마디를 나누고는 먼저 가야겠다며 라운지로 올라오란다. 고개를 끄덕이며 현지 씨를 배웅했다. 달칵.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첩보 작전을 연상시키듯 벽에 붙어 빠르게 베란다로 다가갔다. 유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중이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베란다 문을 살짝 열었다. - 현 실장님 내려갔다고 하던데. “그런 거 같다.” - 너 거기 내려간 거 아시고 너희 집에서 난리 났어. 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 안 듣는다고. 너 차도 폐차했다며? 사고 났어? “아니, 일이 좀 있었어.” - 유천아… 상황이 좀 급해졌어. 다음 달에 합병이래. 그 전에 발표가 날 것 같고. 준수 씨는 알아? “아직.” 이건 또 뭐야. 내가 뭘 더 알아야 하는 건데? 아, 정말 골치 아프다.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유천이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찔끔해서 시선을 피하며 베란다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명희야, 내가 다시 전화할게.” 또 명희 씨야. 나는 뚱한 표정으로 소파로 되돌아와서 리모컨을 집어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바꿨다. 유천이 거실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박유천도 열 받게 재영 씨랑 키스했다고 말해버릴걸. 아니, 그랬다간 지금쯤 난리 났으려나? “나가자. 옷 갈아입고 와.” 쳇. 나는 유천의 말에 대답도 안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밥 먹고, 바로 방에 가 있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유천이 또 다시 자신의 핸드폰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유천은 클레임 건으로 일이 생겨서 밥도 못 먹고 사무실로 올라가게 생겼다. 좀 불쌍하긴 하지만 나는 박유천에게 잔뜩 삐쳐서 기분이 완전 바닥이었다. 자기는 명희 씨랑 전화할 거 다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도 안 해주면서, 나한테는 재영이랑 무슨 일 있었냐며 꼬치꼬치 캐묻질 않나, 협박을 하질 않나. 지금도 저건 반 협박조다. 돌아다니면 어쩔 건데? …라고 대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괜히 사람들 잔뜩 있는 식당에서 대들었다간 당장 방으로 끌려갈지 모르니까. “그리고 너…….” 너 뭐? 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유천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있다가 일 끝나고 좀 보자.” 뭘 봐? 왜 봐?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저런 의미심장한 말만 툭 뱉어놓고 멀어져가는 유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재영과의 일이겠지? 향수 냄새가 밸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제길, 지금이라도 서울 올라갈까…….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라운지로 들어섰다. 멀리 낯이 익은 스태프들이 손을 흔들어 알은 체를 해왔다. 비싼 식당답게 뷔페식이다. 나는 음식을 이것저것 접시에 덜어 스태프들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준수 씨, 그거밖에 안 먹어?” “먹고 더 먹으려고요.” 재영과의 대화를 엿듣고 다시 한 번 깨달은 거지만, 역시 박유천은 공사가 철저한, 멋진 놈이다. 내 애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건 같은 남자로서 느낀 진심이다. 사적으로는 그렇게 불꽃 튀는 대화가 오갔지만, 공적으로는 어쨌거나 자신의 상사에다가 선배로 재영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박유천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개하지 못해 안달이어서 나는 참 뻔뻔하게도 관계자도 아닌데 잘도 이렇게 이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도 나를 박유천이 가는 곳에는 으레 딸려가는 부록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현지 씨랑 눈이 마주쳤다.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시선인데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이 사람들 내가 유천과 보통의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괜히 민망한 느낌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저기 산 정상에 레스토랑 있더라.” “있다가 가볼까?” 스타일리스트 누나들의 대화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어제 유천과 저녁을 먹었던 레스토랑 이야기인 것 같다. “맛있나? 비싸기만 하고 맛없는 거 아냐?” “맛있어요.” 나는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주현 누나가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어왔다. “어떻게 알아?” “어제 가봤어요.” “유천 씨랑?” “네.” “둘이 어떻게 알고 잘도 다닌다. 신기해.” 주현 누나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신기해요, 누나. 박유천은 어떻게 그런 레스토랑이며 산 속에 숨은 산장이 있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아는 곳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전부 다 여자들이랑 해본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또 심술이 났다. 어휴, 정말 이 대책 없는 질투심은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 건지. 나는 조금 짜증이 섞인 태도로 샐러드를 푹 찍어 입에 밀어 넣었다. “이건 뭐야?” “산장? 예쁘다.” 산장이라는 말에 또 귀가 쫑긋 선다. 누나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리조트 팸플릿인가 보다. 펼쳐진 페이지에서 어제 유천과 갔던 산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구경 가자, 금방 갔다 올 수 있을까?” “거기 수리 중이던데.” 나는 또 오지랖 넓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기도 가봤어?” “네. 눈 때문에 길 찾기 힘들어요. 레스토랑에서도 좀 멀어서.” 어제도 박유천이 길을 아는 게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히 산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올라가 보자. 갔다가 못 찾으면 되돌아오지 뭐.” “그래, 그래.” 뭐 알아서들 하겠지. 나는 다시 접시로 눈을 돌렸다. 언뜻 창밖에 또 다시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와, 올해는 진짜 눈 많이 온다. 여긴 강원도 산골이라 더 많이 내리는 거겠지? 창밖으로 눈이 나풀나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제 유천과 눈밭에서 뒹군 것이 생각나 피식 웃어버렸다. 이제 눈만 보면 어제를 떠올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슴 따뜻하고 기분 좋은 추억. +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창밖이 온통 새하얀 것이 무슨 극지방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방으로 돌아온 후 또 혼자 뒹굴거리며 유천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눈이 쏟아지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어 셀카를 찍어 두기도 하며 혼자 놀고 있자니 갑자기 내 이름이 뭐로 저장되어 있나 궁금해졌다. 검색을 눌러 김준수를 또각또각 눌러 보았다. 없다. 그럼 준수? 또각또각. 없다. 설마… ‘수’는 아니겠지……. 왠지 상상만 해도 닭살이 돋아 어깨를 흠칫 떨면서도 수라는 글자를 또각또각 눌러보았다. ‘수’자가 들어간 이름들이 주루룩 떴다. 수지, 수현, 수영, 수미, 수연, 수아, 수진, 수정이까지……. 누가 봐도 여자 이름들. 이 새끼 봐라. 나는 한참이나 눈을 가늘게 뜨고 목록을 노려보다가는 비릿하게 썩소를 지으며 모조리 선택해서 삭제를 꾹 눌러버렸다. 왠지 통쾌하다. 나는 소파 위에서 배를 끌어안고 한참을 키득거렸다. 그러다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왜 없지? 다시 검색을 눌렀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꼬맹이’ 세 글자를 또각또각 입력했다. 다행이다, 없다. 정말 저걸로 저장했으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그럼 뭘까? 마눌? 나는 기억을 뒤적여 유천이 가끔 나를 부르는 호칭들을 전부 입력해 보았다. 하나도 없다. 뭐야 그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국 내 번호를 입력해 보았다. 없다. “…….” 이런 망할 자식! 아예 저장도 안 해 놓다니! 순간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나는 씩씩대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약 기운이 떨어지는지 찡하게 허리 아래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배신감이 느껴진다. 나는 박유천을 뭐라고 저장해야 할지 좋을지 몰라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는데! 뭐, 고민 끝에 결국 ‘박유천’으로 저장해버리긴 했지만……. 뚱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있었다. 괜히 찾아 봤다. 기분만 더 나빠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박유천이 그렇지 뭐. 협박이나 할 줄 알았지, 나한테 신경이나 써 주는 인간이었나, 어디?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카메라 모드로 들어가서 가운데 손가락이 잘 보이게 들어 올리고는 셀카를 한 장 찍었다. 그리고는 내 번호를 꾹꾹 누르고 친절하게 좀 전에 찍은 사진과 함께 저장했다. 이제부터 나한테 전화 하거나 받을 때 아주 기분 좋을 거다, 개새끼야.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에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썩소를 지었다. 이젠 유천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좀 불안하다. 내가 그의 소중한 것 중에 첫 번째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뭐든지 잘 하지만 뭐든지 관심이 없는 유천이 좋아하는 것은 일단 지금 하고 있는 일. 아까 통화에서도 들었듯이 집에서 난리를 치는데도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걸 보면 정말 좋아하긴 하나보다.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좋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딱히 해줄 말도 없다. 그저 응원해주는 수밖에. 언젠가 생각했듯이 세상 모두가 등 돌려도 나만큼은 유천의 편으로 남아주고 싶다. 그리고 담배와 술. 담배는 끊는다고 하면서도 잘 못 끊고… 술! 저 놈의 술! 나랑 원수 같은 술! 박유천이 술만 마시면 여자를 끌어안고 들어왔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개새끼… 욕이 절로 튀어나온다. 앞으로 평생 술은 못 먹게 해야지. 나는 주먹을 꾹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떨며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명희 씨……. 어휴, 이건 뭐 한숨만 나온다. 나랑 그 난리를 치고도 명희 씨랑은 계속 연락을 하는 걸 보면 내 말이 먹힐 상대가 아니라는 뜻일 거다. 그러면 그 다음이 나인가……? 순위가 뒤로 밀리면 밀릴수록 나는 다른 것과 대체되기 쉬울 것이다. 특히 생각지도 못했던 명희 씨의 존재가 자꾸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것을 보면, 유천과 커플링을 끼고 있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 숨 쉬듯 당연하게 우리는 서로를 가슴에 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건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이며 약자라는 거다. 만일 집에서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이처럼 마음을 확인 했어도 아직 우리는 갈 길이 멀다. 왠지 침울해져서 소파에 털썩 누워버렸다. 눈이 미친 듯이 쏟아 붓고 있다.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키득대며 눈밭을 구르던 밤. 비죽이 웃음이 나왔다. 역시 행복한 기억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든다. 그래,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사나? 내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다. 사람들이 뭐라던 신경 쓸 일이 아닌 거다. 유천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맞다면 그걸로 된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오히려 문제는 내가 유천의 첫 번째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려 술, 담배에도 밀리는 김준수라니 서글프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박유천을 짝사랑하며 괴로워한 그 순간에도 늘 낙천적으로 스스로를 다독여온 김준수 아닌가? 세상 모든 여자가 눈독을 들이는 잘난 박유천인데다, 지금은 비록 내가 유천의 첫 번째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나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비록 유천의 어떤 점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지금 이 짧은 순간의 고통은 마지막에 웃는 그 때를 위해 견뎌 내겠다. 그래, 지금은 기다릴 때다. 내가 유천의 안에서 점점 커져 그의 모든 것이 되는 날까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유천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지레 겁먹고 걱정하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하루 종일 혼자 있으려니 심심하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이렇게 단순하고 낙천적이다. 군것질거리나 사올까? 입이 심심하여 옷을 챙겨 입었다. 무심코 방을 나섰는데, 낯선 사람이 방문 앞에 서 있어서 흠칫 놀랐다. “박유천 씨 계신가요?”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뇨, 없는데…….” 말끝을 흐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살폈다. 큰 키, 큰 덩치, 머리는 회색으로 염색했고, 정장, 30대 초반……. 뭐야, 아까 박유천이 말한 사람이랑 똑같네? 나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위압감에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무슨 관계시죠?”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아저씨. 질문으로 되묻는 남자에 울컥 짜증이 났다. “친구인데요.” “혹시… 김준수 씨?” “어떻게 아세요?” 나를 아는 듯 한 그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심지어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까지 하는 것이다. 뭐야, 기분 나빠. 나는 뚱하니 남자를 노려보았다. “유천이는 왜요? 무슨 일이신데요? 저한테 말씀하시면 전해 드릴게요.” “그냥 사적인 일입니다. 다시 오죠.” 남자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핸드폰을 꺼내들며 복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뭐야, 도대체. 나는 입을 삐죽대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왠지 불안한 것이 기분이 이상하다. 지하에 있는 편의점에서 음료수와 포테이토 칩,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사들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너무 많이 샀나 싶어 비닐 봉투 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안내 멘트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무심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며 고개를 든 순간 우리 방문이 천천히 닫히는 것이 보였다. 유천이 돌아왔나? 아니면 스태프들 중 한 명인가?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카드키를 꺼내들고 다시 잠겨버린 문을 열었다. “박유천?” 유천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유천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거실의 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낯익은 봉투. 그것은 분명 내 캐비닛에 남겨진, 사진이 들어있던 봉투와 같은 것이었다.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을 때 천천히 닫히던 문이 생각났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가 방금 이 방에서 나간 것이다……. 나는 비닐 봉투를 소파 위에 내던지고 그대로 현관으로 달려 나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멀리 보이는 복도 끝 모퉁이로 누군가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이다! 나를 굉장히 싫어하는 바로 그 사람! 누군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금세 손끝이 싸늘해졌다. 정말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운동화를 제대로 신지도 못한 채 그대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그가 사라진 모퉁이를 돌았다. 이번에는 멀리 비상구의 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저기다! 나는 다시 허겁지겁 복도를 달려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 이르러 비상계단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탁탁탁 하고 누군가가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난간에 매달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누군가의 옷자락이 보였다. “저기요!” 순간 발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금세 탁탁탁 하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나는 비로소 그 사람이 스토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 서!” 나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와 그의 발소리가 동굴에 있는 것처럼 커다랗게 반향을 만들어 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잡는구나 싶어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잡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지 말라고? 아니면 사과하라고? 나는 긴장으로 손끝이 싸늘하게 식은 이 와중에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오르다 보니 벌써 계단의 끝이다. 눈앞에 살짝 열려있는 옥상 문이 보였다. 설마 저리로 나간 건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옥상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쾅!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나는 흠칫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아하아-.” 두꺼운 철문은 꽉 닫힌 채 철저하게 공간을 분리해내고 있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이 머리며 어깨에 자꾸자꾸 부딪혀 쌓이거나 녹아버렸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하얗게 입김이 부서졌다. 그리고 사방에 흐르는 불길한 정적……. “하아… 하아…….” 나는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새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소복이 쌓인 눈. 하지만 발자국이 없다……. 나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다. 입술을 혀로 축이며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탄식처럼 욕설이 작게 흘러나왔다. “제길…….” 갇혔다……. + 쾅쾅쾅쾅! “저기요!” 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쉰 목으로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러보았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하긴,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굳이 비상계단으로 다닐 사람은 없을 테고, 더군다나 옥상까지 올라와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아-.” 하얗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눈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문에 기대어 선 채 막막한 기분으로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핸드폰도 두고 왔고,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모른다. 아니, ‘아무도’는 아니지. 나를 가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 머릿속이 멍하다. 무섭다. 누군가를 이렇게 미워할 수 있다는 것에 등골이 오싹하다. 그 대상이 나라는 것에 더욱 소름 끼친다. 썩 좋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미움 받을 짓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새삼 인간이란 참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점은 아마도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힘이 아닌가 싶다. 인간에게는 가끔 무서울 정도의 추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다. 지금 나를 가둔 스토커도 그렇고, 집에서 반대하는 일을 끝끝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박유천도 그렇고, 애인이 있는 내가 좋다는 이재영도 그렇고, 비록 내가 더 많이 좋아해서 속상하지만, 박유천에게 매달리는 나도 그렇다. 인간이라는 종의 보편적 특성으로 봤을 때 나는 충분히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아니, 굳이 객관적인 이해가 아니더라도 나는 나를 가둔 사람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박유천을 혼자 좋아하면서 가슴앓이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같은 경험을 갖고 있을 경우, 그 공감도는 훨씬 배가되고 증폭되기 마련이다. 나를 가둔 사람이 재영을 좋아하든, 아니면 유천을 좋아하는 것이든, 그 두 사람과 다 관련이 있는 내가 얼마나 밉고 괴로울지 나는 충분히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걸 연민이라고 하는 걸까……? 하지만……. 하면 안 되는 짓도 있는 거다! 이건 엄연한 납치, 감금, 살인 미수다!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다! “…….” 음… 납치랑 살인 미수는 아닌가……? 아무튼……. 이해한다고 해서 곱게 당해줄 수는 없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최우선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인간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추진력이든, 괴력이든, 뭐든지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내 자신이었다. 지금 제일 불쌍한 건, 이재영도, 그 스토커도, 박유천도 아닌 나 자신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가만 두지 않겠어……. 나는 주먹을 꾹 말아 쥐고 결심을 굳혔다. 눈이 나풀나풀 떨어져내려 볼에 닿더니 스르륵 녹아내렸다. “앗, 차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주위는 하얗게 눈이 쏟아지고, 문은 잠겨 있고, 나는 갇혀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나는 벌써 차가워지기 시작한 손등으로 눈 녹은 물방울을 슥 닦아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뻥 뚫린 허공과 난간……. “…….”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내려갈 길을 찾아야지. 나는 일단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 난간으로 걸어갔다. 외부로 난 사다리가 혹시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준수의 인생철학 제 1항.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참 긍정적이고 단순한 인간이다. 아직 갇힌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좀 난감하긴 하지만 분명히 해결책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방을 빙 둘러보며 사다리를 찾았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내 발자국이 생겼다. 조심스레 난간 밖을 둘러보았지만 옥외용 사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하긴 이렇게 높은 곳에는 없겠지? 나는 다시 문으로 돌아왔다. 차가운 철문에 가만히 귀를 대고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기울였다. 금세 귀가 차가워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락사락 조용히 눈이 내리는 소리와, 멀리 슬로프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뿐. 쾅쾅쾅쾅!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려 보았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난간 아래에 대고 소리도 질러 보았다. 하지만 목이 쉬어 있어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평일인데다, 비싼 호텔이라 그런지 드나드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어쩌지……. 이제야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아…….” 눈이 쏟아지고 있는 옥상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를 잔뜩 웅크려 팔짱을 끼고 다시 한 번 사방을 살펴보았다. 뛰어내리지 않는 한 방법이 없어 보인다. 김준수의 인생철학 제 2항. 길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나는 다시 문으로 돌아와서는 눈을 맞지 않는 작은 지붕 아래 몸을 작게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조금씩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준수야, 생각하자, 생각…….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리를 끌어안았다. 일단은 몸이 식는 것을 막아야 했다. 눈은 마치 어스름한 환영처럼 미친 듯이 쏟아 붓고 있었다. “유천아, 나 좀 데리러 와…….” 나는 하얗게 쏟아지는 눈 속에서 나도 모르게 유천을 찾고 있었다. + 철컹! “……!” 육중한 쇳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까무룩 잠이 들었었나 보다. 이런데서 자면 죽어!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천천히 열리고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문 뒤에서 나타난 낯익은 얼굴에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유천은 급하게 달려온 듯 잔뜩 머리가 흐트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스르륵 눈물이 고여 왔다. 손끝이 차갑다 못해 아렸다. 이러다 얼어 죽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무섭던 참이었는데. “너 여기 왜 왔어.” 갑자기 유천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팔을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나는 힘없이 끌려 일어나며 당황한 눈으로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김준수, 너 여기 왜 왔냐고!” 유천은 내 어깨를 잡아 흔들며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을 덜덜 떨며 유천을 바라보았다. 고였던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내 어깨를 움켜쥔 유천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너무 아팠다. “왜… 그래?” 몸이 얼어서 그런지 목소리는 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유천을 바라보았다. 유천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화를 주체하지 못해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왜? “유천아, 나 추워…….”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유천은 화를 참는 듯 핏기가 사라지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렀다. 유천은 그대로 거칠게 내 손을 잡아끌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이 얼어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천은 내 손목을 꽉 움켜쥔 채 걸음을 빨리할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유천이 나를 어떻게 찾은 건지도 모르겠고,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옥상에 갇힌 지 얼마나 지난 걸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천아.” 잔뜩 쇳소리가 났다. 하지만 유천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내 손을 확 잡아끌었다. 갑자기 반항심이 일었다. 나는 난간을 잡고 힘주어 버티며 유천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싸늘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여전히 덜덜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왜 이래.” 유천은 다시 성큼 다가와서는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와.” 잔뜩 낮아진 목소리. 하지만 나는 또 다시 손목을 뿌리치며 힘주어 버텼다. 그때였다. “……!” 유천이 내 어깨를 잡아 벽에 밀어붙이더니 있는 힘을 다 해 주먹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등에 싸늘한 충격이 와 닿았다.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세상에, 박유천이 나를 때리다니……. 믿을 수가 없다. 퍽! 둔탁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였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 바로 옆의 벽에 맞닿아 있는 유천의 주먹이 보였다. 힘껏 움켜쥔 그의 손은 하얗게 질린 채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또 다시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나는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며 천천히 유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다스리는 듯 숨을 쌕쌕 몰아쉬며 매섭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몸이 심하게 떨려 와서 딱딱딱 하고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섭다. 유천이 도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하아…….” 눈이 마주치자 유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의 눈에 착잡한 빛이 스쳐갔다. “미안……. 일단 방에 가서 얘기하자.” 유천은 좀 누그러진 말투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다시 내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옥상에 갇혀서 얼어 죽을 뻔 했는데 다짜고짜 와서 화를 내면 도대체 나는 어쩌라는 건지? “흐윽…….” 순간 서러움이 밀려와서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천은 또 다시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희미하게 물방울이 떨어져 반짝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 유천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게 이불을 뒤집어씌우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따뜻한 물을 받았다. 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며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유천을 쫓았다. 몸이 꽁꽁 얼었었는지 손끝이 빨갛게 붓고 아팠다. 동상에 걸린 건가? 나는 여전히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테이블에 놓인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유천이 열어본 것인지 작은 메모지 한 장이 테이블 위에 꺼내져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옥상에서 잠깐 보자 - 재영] “……!”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오싹한 한기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제야 유천이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는 내가 재영의 부름에 응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까 본 것은 분명 재영이 아니었다. 그 시간에 재영은 유천과 함께 관계자들과 미팅에 참석해 있었다. 유천 자신이 증인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가 아무리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불러낼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이 봉투는 스토커가 사진을 넣어두던 봉투와 같은 것이란 말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리 와.” 유천이 다가와서 이불을 벗겨내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에 와 닿은 유천의 손이 뜨겁다. 내 몸은 아직도 체온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기 때문이다. 욕실 앞에서 유천은 급하게 내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나는 그의 손길이 민망해서 앞섶을 움켜쥐고 말았다. 유천은 그런 내 손을 확 잡아채서 뿌리치더니 찢어내듯 티셔츠를 벗겨버렸다. 그의 거친 태도가 무섭다. 바지 버클을 풀어내는 그의 손을 저지할 수가 없다.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려 유천의 창백하게 질린 손등에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유천은 고개를 들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지만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듯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소리도 없이 계속해서 볼을 타고 흘러 유천의 손등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유천이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볼의 눈물자국을 입술로 훔쳐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눈물을 닦아내던 유천의 입술이 내 입술 위를 덮어왔다. 유천은 내 뒤통수를 잡고 거칠게 혀를 밀어 넣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저항했으나 집요한 그의 움직임에 이내 입술을 열어주고 말았다. 차갑게 식어 있는 내 입 안으로 들어온 그의 혀는 너무나도 뜨거웠다. 유천의 입술과 혀에서 내 눈물 맛이 났다. 혀와 타액이 엉켰다. 유천은 내 혀를 강하게 휘감아 올리더니 빨기 시작했다. 눈물이 또 다시 흘러내렸다. 유천은 입술이 맞닿은 채로 손을 조금 움직여 내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딥 키스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유천은 손을 풀기라도 하면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지 부서져라 나를 끌어안고 깊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꽁꽁 언 몸이 그의 거친 손길에 부서질 것처럼 아프다. 한참이나 그의 키스에 응하던 나는 결국 호흡곤란을 느끼고 그를 조금 밀어냈다. 조금 떨어져나간 입술 사이에 투명하게 타액이 이어져 반짝였다. 유천은 가벼운 베이비 키스로 그것을 없앤 후 다시 조금 길게 입술을 맞댔다. 그 동안에도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몸이 다 얼었어. 얼마나 있었던 거야?” 유천의 나지막한 물음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나도 모르니까. 유천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유천이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내가 할게.” 잔뜩 쉰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유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 문을 열고 나를 밀어 넣었다. “욕조에 들어가서 불러.” “응.” 내가 순순히 대답하자 유천은 소파로 되돌아가서 이불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얼핏 그의 왼쪽 손등에 붉게 피멍이 맺힌 것이 보였다. 아까 벽을 쳤던 것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는,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촤르륵 하고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쳤다.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자 손이며 발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을 당겨 끌어안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유천은 내가 재영이 불러서 나간 걸로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스토커라고 얘기하면 믿어줄까? 내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많아서 아직 유천은 스토커인지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참 설명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오늘 이 상황을 설명하자면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들여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다. 몸이 녹자 전신이 다 쑤시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욕조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자 유천은 나를 커다란 타월로 감싸더니 그대로 안아서 침대로 데려갔다. 나는 민망함에 달아오른 얼굴로 타월 끝을 꼭 쥐고 유천의 행동을 눈으로 쫓았다. “욕실 정리하고 올 테니까 옷 입고 있어.” “…응.” 나는 또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천은 내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찬바람이 쌩쌩 이는 태도로 방을 휙 나섰다.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입을 저렇게 꾹 다물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걸 보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나는 천천히 옷을 챙겨 입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슬으슬 몸이 떨려왔다.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이불을 코까지 올려 덮고 눈만 깜빡이며 천정을 응시했다. 타박타박 유천이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쭈뼛쭈뼛 유천의 눈치를 보았다. 유천은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더니 내 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렸다. 그의 손에 또 다시 붉은 피멍이 보였다. 내가 계속 눈으로 상처를 쫓자 유천은 멍이 안 보이게 손을 감추며 내 위로 몸을 기울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까…….” “…….” “미안해. 내가 좀 미쳤었나 봐.”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움이 복받쳐 또 눈물이 고인다. 우는 것을 보여주기가 싫어 나는 몸을 뒤척여 유천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눈물이 또르륵 베개로 굴러 떨어졌다. 유천이 이불을 들추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은 그대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그의 따스한 숨결이 규칙적으로 와 닿았다. 등줄기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츠리며 유천에게서 조금 몸을 떨어뜨렸다. 유천은 내 어깨를 가만히 당겨 나를 똑바로 눕혔다. 나는 눈이 빨개진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유천은 가볍게 내 턱을 잡아서 자기 쪽을 향하게 하더니 다시 키스를 해왔다.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의 입술을 피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유천의 혀가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럽게 입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나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유천의 목에 팔을 감아버렸다. 유천이 왜 자꾸 이러는지 알 것 같다. 정말 내가 재영을 만나러 갔던 게 아닌지 불안한 것이다. 내가 명희 씨 때문에 불안해하듯이, 그도 불안한 거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 우리는 서로에게 하지 않은 말이 너무도 많은데……. 유천의 입술이 살짝 떨어져나가더니 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연한 살을 조금 빨아올려 키스마크를 만드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은 그렇게 몇 차례나 내 목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다. 유천의 손이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 말라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했다. 그의 불안함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천아…….” 내 부름에 유천은 가만히 입술을 떼어내더니 대답 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 그… 이사님 만나러 간 거 아니야.” “…….” “누가 이 방에 들어왔었어. 봉투를 두고 가서 쫓아간 거야.” “…….” “비상계단으로 나간 것 같아서 쫓아갔다가, 옥상에 갇힌 거야. 나 그 봉투 열어보지도 않았어.” 또 다시 설움이 밀려와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금세 눈물이 고여 들었다. 유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가 또 화를 낼까봐 무섭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호텔 내선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유천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아들었다. “네.” - 유천 씨, 잠깐 재촬영분이 생겨서 마무리하고 철수한대요. “네, 갈게요.” 유천은 전화를 내려놓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유천의 손이 다가오더니 내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미간에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유천의 굳은 표정은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진지했다. “나 갔다 올 동안, 아무데도 나가지 말고 방에만 있어. 내 전화 아니면 받지도 말고, 아무도 안에 들이지 말고.” “응.” “갔다 와서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 유천의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지금 몸 상태로는 누가 와도 일어날 수 없을 듯 하다. 유천은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그는 아침에 나에게 먹였던 약을 또 한 알 건네며 물 컵을 내밀었다. “좀 자고 있어. 또 열난다.” “응.” 약을 받아먹고 눕자, 유천은 이불을 꼭꼭 여며주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천은 방을 나가기 전, 나를 돌아보며 미안한 듯, 멋쩍은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입 꼬리를 올려 웃어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날 그가 지었던 옅은 미소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 지이이이잉.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려와서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낯선 방. 해가 졌는지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아직도 얼었던 손은 조금 부어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불을 켜고 두리번거리자 소파 위에서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유천의 핸드폰이 보였다. 매니저 형이라는 글자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니 유천이 걸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받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버렸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다시 걸어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주방으로 들어가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지이이이잉. 다시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거실로 되돌아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제 철수한다] 자기 할 말만 간단히 떠 있는 것을 보니 유천이 보낸 것일 것이다. 그럼 집에 가는 건가? 나는 흘깃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꽤 많이도 잤나 보다. 벌써 밤 9시가 넘어 있으니.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약기운 때문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거실에 멀뚱히 앉아서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배고픈데, 박유천 오면 밥 먹자고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눈이 쏟아지고 있다. 눈이 많이 오는 모양인지, TV 아래에 계속 강원도 지역에 폭설 주의보가 내렸다는 자막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유천이 돌아오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걱정이다. 아마도 오늘 우리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전부 다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상계단 얘기도 해야 할까? 그렇다면 박유천은 과연 무슨 말을 할까? “하아.”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지이이이잉. 그때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산장으로 와] 나는 잠시 멍하니 문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산장은 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우리 둘만의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라는 것을 떠올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려고 이러는 건가, 아니면 또 무슨 이벤트라도 해주려는 건가? 나는 가끔 유천이 엉뚱하게 벌였던 선물 이벤트에 생각이 미쳐 피식 웃었다. 핸드폰이 배터리가 다 되었다며 삐비빅, 소리를 냈다. 박유천한테 충전하라고 해야지. 무심히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섰다. 눈이 많이 오는 것 같기에 옷을 잔뜩 껴입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유천의 비니까지 챙겨 쓰고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직전, 우리 방문 앞에 회색 머리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저 사람 아직도 안 갔네. 도대체 박유천이랑 무슨 일이 있어서 저러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와 유천의 관계를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감도 안 잡힌다. 박유천이 저런 사람과 친분이 있을 리도 없고. 설마… 스토커인 건가?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에이, 설마…….” 나는 괜히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복잡한 생각을 털어버리려 애썼다. 스토커라면 저렇게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다. 아직 뭔가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지금은 유천과 나의 일만 생각하고 싶었으니까. 와, 서울에도 눈이 이렇게 오면 매일매일 큰일이겠구나, 차도 막히고, 눈도 치워야 되고……. 나는 곤돌라 티켓을 사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얗게 눈이 쏟아졌다. 눈을 좋아하지만 올해는 사양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까 옥상의 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저 손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곤돌라가 10시까지만 운행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올라가셨다가 바로 내려오셔야 할 텐데.” “네, 괜찮아요.” 춥긴 하겠지만 리프트 타고 내려오던가, 아니면 박유천이 알아서 하겠지, 뭐. 나는 이렇게 안이한 생각을 하며 곤돌라에 올랐다. 곤돌라가 천천히 지상에서 멀어져갔다. 금세 호텔과 슬로프가 작아졌다. 눈이 쏟아져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생각보다 많이 유천에게 의지하고 있었나보다. 뭐든, 내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편이긴 하지만, 되돌아보면, 잘 안 되는 것은 항상 유천이 뒤처리를 해주곤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곤돌라가 멈춰도 박유천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웃긴다. 박유천이 무슨 신도 아니고, 눈이 많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텐데. 하긴, 아까 옥상에서도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이재영이 아니라 박유천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영향을 미치고,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유천의 말대로 나는 어쩌면 재영에게서 그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박유천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불안해 했으니까. 하지만 재영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고, 믿기지 않을 만큼 솔직하고 올곧은 마음을 내게 보여주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재영에게 흔들렸던 이유는. 나는 가만히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어둠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유천이 끼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반지……. 나는 이 반지를 받았을 때 비로소 속을 잘 표현하지 않는 유천이 얼마나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박유천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다녔어도, 단 한 번도 반지나 귀걸이 같은 선물을 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꽃이나 옷 정도였던 것이다. 유천은 오로지 나에게만 직접 손으로 귀를 뚫어줘 가며 귀걸이를 선물했다. 처음에는 어찌나 아픈지, 나를 괴롭히려고 그런 것인 줄만 알았다. 이 자식이 이제 나를 놀리고 괴롭히다 못해, 고통까지 주는구나 싶어서 어찌나 서럽던지 귀를 뚫고 나서는 내내 눈물바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누나들에게 귀걸이 선물의 의미를 듣고 나서는 정신이 다 멍해졌다. ‘일편단심’. 그는 내 귀에 자신의 마음을 새겼던 것이다. 그런 그가 선물한 반지가 보통의 의미 이상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유천의 기억이 스쳐갔다. 남산에서 머릿속에 다시 저장하라며 느닷없이 키스를 해오던 박유천, 내가 승연과 식사하던 날 질투에 눈빛이 싸늘해진 채 달려왔던 박유천, 30일이라며 케이크와 꽃을 사왔던 박유천, 그리고 날 강제로 안으려고 했던 그와, 죽은 새를 처음 발견했을 때 장난스럽게 나를 위로하던 박유천, 내가 재영과 만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모른 척 했던 박유천, 날 위해 미니쿠퍼를 몰아 마주 오는 차와 정면충돌하던 박유천, 자신이 나의 이상형이라고 단호하게 못 박던 박유천, 옥상으로 날 찾으러 온 박유천, 차마 나를 때리지 못해 피멍이 들도록 벽을 치던 박유천……. “…….” 그래, 이젠 모든 것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내일은 재영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무래도 내 마음은 박유천 밖에 담을 수가 없었노라고……. 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곤돌라에서 내렸다. 레스토랑은 아직 영업 중인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만, 곤돌라 운영이 10시까지라는 것 때문인지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나오고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눈을 피해 근처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나무는 엄청난 양의 눈을 가지에 힘겹게 걸고 금세라도 부러질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눈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내려 쌓이고 있었다. + 곤돌라가 멈췄다. 눈이 너무 많이 왔다. 하얗게 쏟아지는 눈 속에서 나는 20분을 기다렸지만 유천은 오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전원이 꺼져 있다. 큰일 났다…….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스토랑 사람들은 그새 철수를 했는지 불이 꺼져 있다. 혹시 잠깐이라도 전화가 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전원버튼을 꾹 눌렀다. 액정에 불이 들어오면서 전원이 켜지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준수? 어디야? 유천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대뜸 나냐고 묻는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가 산장…….” 아, 끊겼다……. “…으로 오라며…….” 나는 까맣게 변해버린 액정을 내려다보며 채 전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설마 박유천은 벌써 산장에 도착해 있는 건가? 곤돌라에서 내릴 줄 알고 여기서 기다렸는데. 길도 모르는데 찾아갈 수 있을까? 조금 걱정스러운 눈을 들어 산장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려쌓이는 눈……. 얼핏 길을 따라 묶어둔 로프가 보였다. 저걸 따라 가면 되려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김준수 씨?” “…네? 읍……!” 코가 따가울 정도로 클로로포름 냄새가 밀려들었다. +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흐려지는 정신을 되찾으려 애쓰며 억지로 눈꺼풀을 치켜 올렸다. 「박유천 씨, 어디 가?」 「죄송합니다, 좀 급해서.」 「아직 우리, 할 말이 남은 걸로 아는데?」 「다녀와서 하죠.」 「어딜 가겠다는 거야? 눈 때문에 차도 다 끊겼는데.」 「산장에요.」 「산장?」 축 늘어진 나를 누군가가 어깨에 들쳐 메는 것이 느껴졌다. 아득해지는 시야로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팔이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 눈, 눈, 눈……. 「준수가… 없어졌어요.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놓으세요, 가야 돼요.」 「기다려. 어딜 간다는 거야?」 「준수가 산장이라고 했어요. 저 위에 있을 거예요.」 「잠깐, 어이, 지금 슬로프 올 스톱이야. 준수가 거길 왜 가? 말이 안 되잖아.」 「그럼 이사님이 좀 찾아주시던가요.」 「…….」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가 또 하나 들린다. 한 사람이 더 있다……. 「거기 서. 무슨 일인지 설명해.」 「…….」 「박유천! 빨리 설명해! 준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 남자는 자꾸자꾸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새하얀 눈에 뒤덮인 풍경. 어느 쪽을 보아도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의식이 자꾸 흐려진다. 안 돼, 김준수, 정신 차려…….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눈이 스르륵 감기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모르는 거야. 내가 준수를 왜 옥상으로 불러내.」 「알아요, 누군가가 고의로 속인 거예요. 준수가 한참 갇혀 있었다고 했어요.」 「…….」 「…….」 「…준수를 괴롭히는 스토커가 있었어. 알고 있었나?」 「네.」 「…….」 「…….」 「하아… 그래서 지금 저 산꼭대기에 준수가 혼자 있을 거라고? 곤돌라도, 리프트도 다 멈췄는데?」 「네.」 뽀드득뽀드득, 계속 이어지는 눈 밟는 소리. 제길,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119에 전화해.」 「못 와요. 눈 때문에.」 「그럼 그냥 손 놓고 있어?」 「호텔 측에 연락해서 스노모빌이랑 무전기 좀 빌려 주세요.」 「왜?」 「…….」 「…직접 가겠다고?」 「…….」 「미쳤어? 저 위에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럼 다행이고요.」 「박유천 씨만 위험해질 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그럼 이사님이 가실래요?! 아니잖아요!」 「…….」 「…전에.」 「…….」 「…여기서 패트롤로 일했던 적 있어요. 지리는 잘 아니까 119보다 제가 빨라요.」 「하아…….」 멀리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물고기 비늘 같은 건물 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이 스산하게 비닐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그 전에 짚고 넘어가자고. 박유천 씨,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정말 L그룹 일가인 거야?」 「별로 관계없어요. 아버지 대부터 교류가 거의 끊겼으니까.」 「그 말은, 어쨌거나 그쪽 사람이 맞다는 뜻이군. 그럼 그쪽에서 왜 이렇게 박유천 씨 출현에 집요하게 구는지도 알겠네?」 「…집에서 반대하셨거든요.」 「하아…….」 「…….」 「그런 집안사람이 모델 일은 왜 하는 거야? 집에서도 반대한다며? 화려해보였나? 사람들이 알아봐주니까 어깨가 으쓱했어?」 「…….」 「대답해, 박유천. 화려해보였어?」 「…잘 모르겠어요.」 「…….」 「그냥 좋으니까 하는 겁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그냥 좋으니까.」 「그 말은… 아무 대가 없이도 할 수 있다는 뜻인가?」 「돈은 그다지 부자유스럽지 않아서요.」 아득한 의식 너머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굴까? 낮에 나를 옥상에 가둔 사람과 같은 사람들일까? 날 어떻게 하려는 걸까……? 「내가 잘못 보진 않았군.」 「…….」 「겉멋만 들어서 설치고 다니는 녀석들이 많아서 말이야.」 「…….」 「계약 연장하지. 60억, 까짓 거, 굉장히 비싼 계약금이라고 생각하겠어. 이번 건에서는 어떻게든 구제해 줄 테니까, 살아 돌아와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여 봐.」 「‘살아 돌아와서’라니, 말씀 무섭게 하시네요.」 「별 수 없어. 태생이 이런걸.」 펄럭펄럭 요란하게 비닐이 휘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점점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흐릿해져가는 의식, 힘없이 늘어져 흔들리는 몸……. 도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다. 건물이 점점 가까워졌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나를 들쳐 멘 남자는 천천히 산장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곤돌라 스테이션 앞에 패트롤용 스노모빌 열쇠야. 전해 받은 거라 어떤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알아서 잘 찾아봐. 여기 무전기.」 「감사합니다.」 「조심해, 잘 알아도 당하는 게 눈이야.」 「걱정 마세요, 준수 두고는 못 죽어요.」 「아, 진짜 네 녀석들, 정말 징그럽다.」 「칭찬이죠?」 「욕 같은데.」 「감사합니다.」 「웃지 마, 정들어.」 코끝을 스치는 눅눅한 눈 냄새와 오래된 먼지 냄새……. 삐걱삐걱, 마루에서 소리가 났다. 역시 유천과 함께 왔던 산장이다.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걸까? 「윽.」 「왜?」 「만나면 곤란한 사람이 문 앞에 있어요.」 「저 회색머리? 누군데?」 「회장님이 보낸 사람이에요, 아마도 저 데려오라고 보낸 걸 겁니다.」 「…….」 「…….」 「옷 벗어.」 「네?」 「바꿔 입자고. 내가 다른 곳으로 유인할 테니까 그 다음은… 알아서 해.」 남자는 천천히 어두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마루 밟는 소리가 어둠속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이 나이에 별짓을 다 해본다, 어처구니가 없네.」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설마.」 「하하.」 「정 들어, 자꾸 웃지 마, 그럼… 간다.」 「아, 저, 이사님.」 「왜?」 「이거… 저기 밖에 있는 분 연락처입니다.」 「…….」 「…혹시 제가 잘못되면 저 분한테 연락해 주세요.」 「…….」 「…….」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박유천 씨, 자신 있어서 가는 거 아냐?」 「그다지…….」 「야. 박유천.」 「…….」 「나 너한테 60억 걸겠다고 조금 전에 말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안 되지.」 「…….」 「장난 아니야, 나 지금 네 녀석한테 올인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L그룹이랑 정면대결 하겠다고. 알아?」 「…….」 「…….」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넌 이재영 주니어니까.」 「…….」 「똑똑하니까 이 정도만 해도 알아듣겠지? 어때? 구미가 당기나?」 「…굉장히 많이요.」 「그럼 김준수 넘겨.」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요.」 「하하, 농담 그만하고 출발하지.」 「아, 저, 이사님.」 「왜 또?」 「감사합니다.」 「…….」 「…….」 「웃기지 마, 준수 포기하는 거 아니야.」 「알아요.」 「간다.」 「네.」 「아, 박유천 씨.」 「네.」 「조심해.」 「…….」 「그리고, 준수… 꼭 데려와.」 「…네.」 「진짜 간다, Good luck!」 이윽고 뿌연 빛이 가득한 계단 끝에 이르렀다. 흐릿한 시야에 커다란 격자 창문이 들어왔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얗게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유천이 귀신을 봤다고 하던 방. 박유천과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방……. 유천아… 어디 있어……. 무의식중에 간절하게 유천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아득한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 고개가 자판을 향해 꾸벅 떨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잔뜩 잠에 취한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얗게 열려 있는 한글 파일. “하아…….”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괜히 학점을 잘 준다는 선배들의 말에 혹해 수강했다가 과제에 치어죽고 있는, 서양 철학과 현대 예술이라는 교양수업의 리포트. 도대체 어느 계열인지 알 수 없는 이 교양수업 덕분에 오늘도 이 시간까지 잠을 못 이루고 고민 중이다. 미치겠다, 보지도 않은 공연 감상문을 무슨 수로 써 낸다는 말인가? 애인이나 친구와 연극, 영화, 뮤지컬, 미술 감상 등 뭐든 상관없으니 관람하고 와서 두 사람 다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라는 과제인데, 문제는 이 넓고 넓은 서울에 저런 것을 함께 보러갈 만한 사람이 나에게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다른 친구 녀석들은 능력 좋게도 다들 여자들과 약속을 잡고 이미 보러 갔다 온 것 같다. 제출 날짜가 점점 다가오기에 넌지시 물었더니 넌 박유천이랑 갈 거 아니었냐며 시큰둥하게 되묻던 녀석들의 말이 생각나서 또 다시 울화가 치민다. 이 배신자들……. 어쨌거나 당장 제출은 내일 모레로 코앞에 다가와 있고, 나도 박유천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설마 박유천이 나에게 시간을 내줄까? 걱정부터 앞선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늘 지겹도록 붙어 다니기만 했지, 같이 공연 같은 것을 보러 간 적은 없다. 사실, 남자 둘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남들 눈치 보이는 일이고. 뭐, 박유천은 여자 친구들이랑 잘도 극장에 다니는 것 같은데, 나는 집에 처박혀서 노트북으로 다운 받아 보는 게 전부다. 아니면 박유천이 집에 사다 모으는 DVD를 가끔 박유천네 집 거실에서 뒹굴 거리며 보거나. “…….” 에이 씨, 짜증나, 나도 여자 친구나 사귈까. 노트북을 꺼버리고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중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병 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준수, 자냐?” “켁, 콜록콜록!”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사레가 들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콜록대며 현관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서 있다. 그리고 내가 헛것을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박유천 목소리다. 시계를 흘깃 올려다보니 새벽 1시. 저 새끼가 미쳤나,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왜 와? 나는 여전히 기침을 하며 투덜투덜 현관문을 열었다. 쌀쌀한 밤공기가 열린 문 사이로 밀려들었다. 반팔을 입고 있었던 터라, 금세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나는 팔을 슥슥 쓸어내리며 문 밖에 선 유천을 뚱하니 올려다보았다. 너는 잠도 없냐, 새끼야? 가서 여자나 끼고 처자던가. 다분히 내 시선에는 이런 의미가 섞여 있을 터였다. 아무리 짝사랑이라지만 나라고 그의 바람둥이 기질이 달가울 리는 없으니까. “웬일이야.” “라면 끓여 줘.”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따라서 희미하게 술 냄새가 번져 왔다. 미친놈, 술 마시고 왜 나한테 난리야. 나는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그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얼른 나와.” “왜?” “우리 집 가자.” 유천이 갑자기 내 손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문밖으로 끌어낸다. 어어어, 소리를 내며 그대로 유천의 손에 이끌려 문을 나서고 말았다. “야씨, 미쳤어!” 맨발로 끌려나온 나는 발에 와 닿는 싸늘한 콘크리트의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유천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유천은 다시 내 손목을 덥석 잡아끌며 대문을 나서려고 한다. 뭐야, 이 새끼 진심인가? “야야야야!” “뭐?” “나 신발!”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끌려가지 않게 버티자 그제야 유천이 나를 돌아보더니 손목을 놔준다. 뭐냐? 신발 신고 나오라는 거냐? 나 옷도 입어야 되거든?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투덜거리며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천은 문도 활짝 열어놓고 빨리 나오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밤중에 소란스럽게 한다고 주인집에서 한 소리 할까 봐, 급한 김에 위에 점퍼 하나만 걸치고, 맨발로 운동화를 신으려다 잠시 망설였다. 양말 신고 갈까……. 아니! 지금 양말 신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박유천이 술 먹고 이 새벽에 내게 행패를 부리는 것이 문제란 말이다!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어 유천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발에 와 닿는 차가운 그의 손끝에 숨을 멈췄다. “…….” 박유천이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을 신겨 주고 있었다. “이쪽도.” 왼쪽 발에 운동화를 신긴 유천이 내 오른발을 툭툭 쳤다. 그의 찬바람에 식은 손이 차갑다. 도대체 얼마나 밖에 있었던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오른발을 들어주었다. 미치겠다. 박유천이 오늘 왜 이러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저항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유천의 손에 이끌려 그의 아파트로 향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안온한 가을에서 고된 겨울로. 쌀쌀하게 식어있는 새벽 공기에 하얗게 입김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유천에게 손목이 잡힌 채 성큼성큼 앞서 걷는 그를 따라 바삐 걸음을 놀렸다. 유천은 우리 집에서 날 끌고 나온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야.” “어.” “왜 그래?” “뭐가?” “너 지금 하는 거.” “하는 게 어때서.” “이상하잖아. 만나는 여자한테 차였냐?” “아니.” “그럼? 작업이 잘 안 돼?” “아니.” 박유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만 한다. 그럼 도대체 뭐냐고.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꾹 다물고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 유천을 따라 걷느라 숨이 가쁠 지경이다. 어느새 잠은 다 깨어 버렸고, 걸음 따라가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좀 천천히 걷든가……. “야.” “뭐.” “…사실은 작업이 잘 안 돼. 너무 안 넘어와.” 씨발……. 나는 입 안으로 조그맣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에게 잡힌 손목을 뿌리쳤다. 그럼 그렇지. 고작 그 얘기해서 내 속 뒤집어 놓으려고 새벽부터 이 난리를 치는 거야? 답답해서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유천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문지르며 상처와 불만이 섞인 눈으로 유천을 응시했다. 유천은 말이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해 흐릿한 눈동자로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왠지 아파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눈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언제부턴가 가슴에 돌덩어리를 하나 얹고 사는 기분이다. 박유천을 좋아해서… 하지만 말할 수 없어서……. 친구지만, 친구가 아닌 묘한 관계. 시작도, 끝도 없는 막막하고 애매한 우리의 거리. “하아…….” 버릇처럼 또 한숨이 나온다. “야.” “…….” “야, 김준수.” “왜 또.” “나한테 화 안 나?” “화 나.” 화나지, 네가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꼭두새벽에 술 먹고 쳐들어와서 라면을 끓여달라며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는 이 상황. 누가 봐도 화나는 상황일 거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주정이나 다름없는데, 이유도 모르면서 이런 걸 받아주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이런 일을 당해도 박유천에게 제대로 화조차 못 낼 정도로 나는 그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 “…….”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유천은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우리 둘이 토해내는 하얀 입김 뿐……. 유천의 손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그의 온 몸에서 냉기가 묻어났다. 밖에 얼마나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지만 선뜻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왜?” “…….” “왜 화가 나는데?” “미친놈아, 새벽에 쳐들어와서 라면 끓여달라고 졸라 봐. 너라면 화 안 나겠냐?”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그가 뭘 묻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조금 불안한 눈초리로 그를 응시했다. 유천은 입술을 깨물며 쓰게 웃었다. 그런 그의 미소에 가슴을 갈퀴로 긁어내리는 것처럼 상처가 덧난다. 왜 그렇게 아프게 웃냐고 묻고 싶지만 차마 물을 수 없다. 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두려워서. “…가자, 나 일찍 일어나야 돼.” 나는 성큼 유천에게 다가서서 그의 차가운 손 안에 내 손을 밀어 넣었다. 유천이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맞잡아왔다. 워낙 어릴 때부터 붙어 다녔고, 둘 다 스킨십을 좋아하는 터라, 우리는 곧잘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용된 친구로서의 스킨십은 여기까지……. “집에 라면 있어?” “없어.” “그럼 편의점 지나치기 전에 말을 해야지, 새끼야. 다시 되돌아가야 되잖아.” “안 먹으면 되지.” “라면 끓여달라고 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딴 소리야, 죽을래?” 나는 유천의 손을 험악하게 잡아끌며 편의점으로 발을 돌렸다. 조금 쳐져서 걷던 유천이 이내 속력을 내서 나란히 곁을 걷는다. 나는 가만히 유천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유천이 흘깃 나를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유천도 희미하게 웃는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간다. + 꼭두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나는 당근과 파를 썰어 끓고 있는 냄비에 던져 넣으며 신세를 한탄했다. 혼자 살면서 느는 것은 라면 솜씨뿐이다. 가게에서 파는 라면만 먹다 질려서 인터넷을 뒤적여 각종 야채나 해산물을 넣은 맛있는 라면 끓이는 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것저것 전부 실험을 해본 끝에 나는 숙련된 라면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박유천은 나를 가끔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것을 사주곤 하지만 요리는 젬병이다. 집 떠난 지도 벌써 2년 째. 손맛이 그리운지 가끔 이렇게 내게 뭔가를 해달라고 하는데, 사실 라면 이외에는 내 실력도 그리 썩 좋지 않지만, 그래도 박유천은 무슨 고급요리라도 되는 양 정색을 하고 맛있다며 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시는 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다 됐어?” 유천이 다가와서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턱을 올린다. 나는 또 괜히 긴장해서 몸을 경직시킨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어릴 때부터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인데 언제부턴가 미칠 듯이 긴장된다. “으, 응, 면만 익으면 돼.” 말까지 더듬으며 쭈뼛쭈뼛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한테 좋은 냄새 난다.” 갑자기 유천이 내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쭉 타고 내려 흠칫 몸을 웅크렸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려 내 어깨 언저리에 놓인 유천의 뒤통수를 흘깃 훔쳐보았다. 유천은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는 그대로 움직임이 없다. 목덜미에 와 닿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야.” “응.” “나 미워?” 또 시작이다. “당연하지. 네가 예쁜 구석이 어디 있어.” “많이 미워?” “응, 존나게 미워.” “…….” 내 대답에 유천은 또 말이 없다. 조용한 가운데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만 들린다. 유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목덜미가 화끈해진다. 그리고 그의 숨결에 섞인 독한 술 냄새……. 도대체 왜 이러는데, 박유천? “야, 야, 다 됐어. 비켜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비틀어 허리를 안은 유천을 밀어냈다. 유천은 그제야 손을 풀고 느릿하게 식탁에 앉았다. “설거지는 네가 해.” “어.” “내일 수업 뭐 있어?” “전공 두 개.” “얼른 먹고 자, 수업 빠지지 말고.” “봐서.” “미친 새끼. 그러다 재수강 한다.” “너보다 내 학점이 더 좋아. 잊었냐?” “…….” 재수 없다. 하지만 할 말이 없다. 지난 학기에도 박유천은 전액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유천을 노려보며 덜어먹을 그릇을 앞에 놔주고 벗어놨던 점퍼를 걸쳐 입었다. 벌써 새벽 1시 반.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일 1교시 수업 전에 준비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 일찍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디 가?” “집에.” “가긴 어딜 가? 자고 가.” “됐어. 또 뭘 부려먹으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현관 앞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가지 마.” “…….” 신발을 신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유천의 목소리가 너무 절실하게 들렸기 때문에. + 결국 유천의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이 방에서는 처음 잔다. 이불을 들추고 옆에 눕는 유천에게서 알싸한 치약냄새가 났다. 유천이 손을 뻗어 머리맡의 스탠드를 껐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왠지 부끄러워져서 나는 꼼지락거리며 유천에게서 등을 돌렸다. “야.” “…….” “야, 김준수.” “왜.” “왜 등 돌려.” 미친놈아, 그럼 마주보고 자리? 그랬다간 나 숨 막혀 죽을 지도 모르는데? “왜 등 돌려.” “아, 쫌 자! 나 일찍 일어나야 된다고!” 나는 짜증스럽게 소리치며 이불을 확 뒤집어 써 버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이 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침대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웅크린 채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우리에게도 이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날이 올까? 네가 여자가 아닌 날 좋아해주는 날이 올까?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숨소리만 들리는 정적이 이어졌다. 엷게 잠기운이 밀려왔다. 조금씩 흐려지는 의식 속에 문득 모레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가 떠올랐다. 얘기하면 들어줄까? 잠시 고민 끝에 나는 조용히 유천을 불러 보았다. “박유천.” “…어.” 잠에 취한 대답이 느릿하고 조그맣게 들려왔다. “나 과제 좀 같이 해 줘.” “…뭔데.” “공연 보고 감상문 쓰는 거.” “…본 거 있어?” “아니, 내일 봐야 되는데, 뭘 봐야 될지 모르겠어.” “…….” 어둠속에서 조용히 대화가 이어졌다. 유천은 술기운 때문인지 벌써 목소리에 잠이 가득했지만, 꼬박꼬박 대답을 해왔다. 내일 기억을 하고 있을지가 문제인가? “…알았어.” “고마워.” “…아까 끓여준 라면이 맛있어서 해주는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려 덮었다. 이윽고 잠이 밀려들었다. + 지이이잉.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유천이다. 나는 서둘러 펼쳐진 책들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슬라이드를 밀어 올렸다. “응.” - 어디야? “도서관.” - 입구로 갈게, 빨리 나와. “알았어.”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단 세 마디. 전화를 걸고 받을 때 으레 하는 ‘여보세요’라는 말도 없고, ‘끊을게’라는 말도 없다. 그것을 깨닫자, 새삼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부대껴왔는지가 느껴져 묘한 기분이다. 도서관 로비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가며 입구 근처를 둘러보았더니 정면에 미니쿠퍼가 시동이 걸린 채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운전석 근처 창가에 몰려 있는 여학생들. 또 박유천을 보러 몰려든 것이다. 도서관의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여학생들에게서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웃고 있는 박유천이 보인다. 금세 기분이 상해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가만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유천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입맛이 쓰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미니쿠퍼로 다가갔다. 조수석에 오르려니 유천이 서둘러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네가 운전해.” “왜?” “나 6시까지 내야 되는 리포트 있어.” “…….”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선배님들, 저희는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둘이서 어디 가는데?” “공연 보러요.” “뭐야, 남자 둘이?” “네, 데이트하러.” 유천은 이런 능청스러운 소리를 지껄여대며 내 가방을 받아들고 나를 운전석에 밀어 넣었다. 유천의 대답에 또 다시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벨트를 채웠다. 유천은 내 가방을 뒷좌석에 내려놓고는 조수석에 올랐다. 대시보드에 책이 잔뜩 펼쳐져 있는 걸로 보아 리포트를 쓰고 있었나 보다. “동대문으로 가.” “동대문 어디.” “음…….” 내 퉁명스러운 말에 유천은 네비게이터를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하고는 여기, 라며 거치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유천이 뒷좌석에 놓아두었던 노트북을 무릎 위에 펼쳐드는 것을 보며 차를 출발시켰다. “과제 있었어?” “어. 거의 다 했어. 마무리 하고 메일로 쏘면 돼.” “응…….” 왠지 미안해지려고 한다. 나와의 약속이 아니라면 편하게 리포트를 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도 내일 당장 감상문을 내야 되니 난감한 노릇이다. “우리 뭐 보는데?” “뮤지컬.” “표는?” “예매했어. 급하게 했더니 좋은 자리는 없더라.” 헐… 시골 촌놈이 난생 처음 뮤지컬 보러 간다. “표 얼만데?” “얼마 안 해.” “얼만데.” “…….” 타닥타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나는 흘깃 유천을 돌아보았다가는 입을 다물었다. 다 마치면 물어보지 뭐. + 여주인공의 노랫소리가 청명하게 무대에 울려 퍼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울컥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늘 화면 속의 연기만 보다가 직접 사람이 살아 움직이면서 몸으로 만들어내는 무대를 보니 낯설면서도 신기하고 묘하게 감격스럽다. 유천은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했지만, 충분히 좋은 자리다. 설령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였어도 나는 감격했으리라. “꼬맹이, 왜 울어.” 유천이 손을 가만히 끌어다 잡으며 속삭였다. “울긴 누가 울어.”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쌀쌀맞게 뿌리치며 중얼거렸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감미롭고 환상적인 여주인공의 독창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는 결국 감동의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울보.” 유천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살벌하게 그를 노려봐주었다. 유천은 이번에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또 다시 내 손을 끌어다 잡았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다시 공연에 빠져들었다. 그가 잡은 손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나는 정말 당신에게 화가 나요, 밀러. - 어째서? 난 당신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 아뇨, 당신은 어제 에밀리를 만났잖아요. - 아, 그게…, …어떻게 알았지? -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에밀리를 만나서 내가 기분이 상했다는 게 더 중요한 거죠. - 샐리, 하지만! - 하지만은 필요 없어요. 난 지금 질투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니까. 이걸 원했던 건가요? 내가 질투로 미쳐버리는 것을 보고 싶었나요, 밀러? “아……!” 갑자기 유천이 손을 세게 쥐어왔다. 나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유천을 돌아보았다. 그의 진지한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며 나를 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계속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왜? 아프잖아.” “넌 나한테 화 안 나?” . . . “아…….” 눈을 뜨자마자 나는 이해의 의미로 작은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낯선 천정이 눈에 들어왔다. 길고 긴 꿈을 꾼 것 같다. 작년 가을, 리포트 때문에 둘이 같이 뮤지컬을 보러 갔던 날. 이제야 알겠다, 박유천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낯선 천정을 응시하며 멍하니 꿈의 여운을 더듬었다. 씁쓸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달콤한 꿈……. 몽롱한 정신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눈앞에 안개 같은 것이 자꾸 뿜어져 나온다. 잠이 덜 깼나 싶었는데 계속 보이는 것을 보니 실재하는 것인가 보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가습기, 그리고 공중에 투명하게 늘어져 있는 링거액 병이 눈에 들어왔다. “……!”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부서질 듯 아프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게 입혀진 환자복과 팔뚝에 꽂혀 있는 주사 바늘……. 병원이었다. “어, 준수 씨, 깼어요?” 문득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열린 문으로 명희 씨가 들어서고 있었다. “…유천이는요?”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 그리고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잠시만요.” 명희 씨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두통이 느껴졌다. 여기는 어딜까? 난 여기 어떻게 온 걸까? 그때 분명히 산장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의식이 없었으니 제 발로 온 것은 아닐 테고.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명희 씨가 의사 한 명과 같이 안으로 들어섰다. “좀 어떠세요?” 인상이 좋은 젊은 의사가 쾌활하게 물어왔다. 뭐가 어떠냐고 묻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나는 그냥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의문을 눈치 챘는지 그는 친절하게 되물어왔다. “두통이나 구토 증세 같은 건 없으세요?” “…머리가 좀 아파요. 아프다기보다 띵한 것 같은데…….” “토하고 싶다거나 이런 건?” “조금…….” “음… 마취제 부작용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심각하진 않네요. 그래도 한 이틀 더 입원하셨다가 경과를 보고 퇴원하도록 하세요.” 마취제 부작용… 클로로포름 때문인가?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서는 의사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갑자기 눈이 쏟아지던 산 정상에서의 기억을 되살리고는 나도 모르게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어느새 팔뚝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일부러 나쁜 짓을 하고 있다. 당연히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일들이다. 옥상에 갇혔었을 때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박유천이 미워서 비상계단에 가둬버리고 문을 잠갔던 기억이 있으니까. 하지만 클로로포름이라니, 이건 진짜 납치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명희 씨.” “네?” “유천이는요?” “…….” 명희 씨는 또 다시 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채 쭈뼛쭈뼛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답답하다. 내가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 짐작도 못 하겠다. 그녀가 여기 왜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속 시원히 설명해 줄 박유천이 필요했다. “제가 여기 어떻게 왔어요?” “…준수 씨, 미안하지만 지금 저도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유천이는 어디 있는데요? 유천이한테 들으면 될 텐데.” “유천이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거 있어요?” “아뇨, 아무 것도…….” 내가 말을 흐리자 그녀는 또 곤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사바늘이 꽂혀 있는 팔뚝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 사람들은 누구고, 박유천은 어디 간 걸까? 멍하니 생각에 잠긴 내 곁에서 명희 씨는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잠시만요’라며 다시 병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문을 응시하다가 씁쓸히 웃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박유천이라니……. 어이가 없다. 부모님들이 땅을 치고 통탄하실 일이다. 그나저나 부모님에게 연락이 갔으면 안 되는데. 괜히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몸을 눕혔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히 그 일은 누군가의 악의가 작용한 일임이 틀림없다. 클로로포름까지 쓰다니, 죽은 새는 애교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낯선 병실을 둘러보았다. 비싸 보이는 호텔 수준의 병실이지만 불편하다. 낯선 침대하며, 링거 주사바늘, 익숙하지 않은 풍경. 박유천도 갈비뼈 때문에 혼자 입원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런데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다니, 기특한 녀석. 금세 머릿속에 유천의 기억이 가득 차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건 아무래도 병인가 보다. 박유천 바이러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조금 일으켰다. 재영이 선글라스를 벗어들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이니, 어떻게 된 사정인지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좀 괜찮아?” 재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 익숙한 그의 분위기에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낯익은 얼굴을 봐서 그런지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 나는 이를 꾹 물어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와 나는 그동안 나쁜 일만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썩 좋은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명희 씨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판단한 이재영이라는 사람은 박유천 만큼 믿음직한 인물이었으니까. “여기가 어디에요? 서울이에요?” “…….” “나 어떻게 여기 있어요?” “…….”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옅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명희 씨와 그를 번갈아 보며 긴장했다. 잠시 더 침묵이 흐른 후 재영이 흠, 흠 하며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기억나?” “…….” 그의 질문을 들으니 아까 명희 씨의 기분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어디부터 말해야 되는 걸까?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다. 내가 말없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재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서울이야. 헬기에 실려 왔어.” 엥? 헬기라니 헬리콥터? 와씨, 김준수 호강한다. 아니, 왜 그런 횡재를 정신이 없을 때 하고 난리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난다. 이 와중에 웃어버린 내가 어이가 없는지 재영도 희미하게 웃음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박유천이 산장에서 너 정신 잃고 있는 거 발견했어.” “…….” “촬영 마치고 철수했는데, 방에 네가 없었대. 그래서 전화했는데 핸드폰은 꺼져있고. 그러다가 어떻게 연결이 됐는데, 네가 산장이라는 말만 하고 끊겼대.” “…….” “그래서 박유천이 너 찾으러 산장으로 출발했어. 눈 때문에 리프트, 곤돌라 전부 멈춘 상태에서.” 잠깐만, 곤돌라, 리프트가 다 멈췄는데 어떻게 산 정상에 있는 산장까지……? “…네?” “…….” “무슨 뜻이에요?” “뭐가?” “유천이가 어떻게 산장까지 왔어요? 다 멈췄다면서요.” “맨 몸으로.” “네에?!” 심하게 쇳소리가 났다. 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재영을 응시했다. 어이가 없어서 또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돼요, 거기가 어디라고. 곤돌라 타고도 20분이나 걸린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웃지 않았다. 나는 한참이나 재영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명희 씨를 보았다. 명희 씨가 여전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재영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제야 내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호텔에서 스노모빌 빌려서 올라가긴 했는데, 아마 산이 높아서 도중에 내려서 걸어갔을 거야.” 이어진 재영의 말에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너 찾고 나서는 지쳐서…….” 거짓말……. + 재영의 벤츠는 조용히 어둠에 잠긴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 알게 된 박유천의 신상 정보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세상에… 내 친구 녀석이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대재벌 가문 회장의 조카손자란다. 그러니까 우리 본사 회장님이 박유천의 큰할아버지고, 우리 회사 사장님이랑도 친척 관계. 쉽게 말해 L그룹 계열사의 모든 대표이사들이 전부 박유천네 친척이라는 소리다. 있는 집 자식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 대단한 집안 사람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고. 어쩐지, 내 휴가를 척척 받아내 준다 했다……. 직권 남용이다, 그건. 아니, 권력 남용인가? 아무튼. 아니, 그런 걸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준 건데? 나는 입이 댓발이나 나와 속으로 투덜댔다. 괜히 짜증이 난다. 왜 내가 내 애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되는 건지……. 더 짜증나는 건 명희 씨는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유천은 왜 그런 걸 얘기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중3. 머리가 자라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시기이긴 하지만, 자신의 배경이 그 정도라면 으쓱해서 자랑을 했을 만도 한 나이다. 적어도 감추고 싶은 콤플렉스 같은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혹시 다른 아이들이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는 시기, 질투를 했을 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일부는 부러워했을 테고, 또 어떤 일부는 그에게 아첨을 하거나, 억지 친분을 맺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극히 일부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겠지만. 예를 들면, 나 같은 경우. 생각해 보니,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박유천은 괜히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서 특별한 시선을 받느니, 그냥 입을 다물자고 결정한 것 같다. 하긴, 유천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단순히 철이 일찍 들었겠거니 했는데, 내가 모르는 어린 시절의 유천은 생각보다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한 것 같다. 번데기는 나비가 되기 위해 살을 찢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달콤한 열매를 위해서는 인내라는 쓰디쓴 고뇌가 뒤따르며, 인간은 자라기 위해 성장통을 겪는다. 나를 만나기 전의 그는 아마도 그렇게 아팠던 것 같다. 그래서 겉보기에 모두에게 친절해 보이는 그런 둥근 껍질을 갖게 된 것일지도…….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진다, 꼬맹아.” 재영이 불쑥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그저 그에게 조금 웃어 보이기만 했다. 이제야 조금씩 박유천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친구로 지낼 때는 그저 단순한 친구였고, 사귀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로에게 속내를 완전히 내보이지 못해서 내내 싸워대기만 했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나는 도대체 박유천의 무엇을 알아온 걸까? 유천아, 우린 또 뭘 더 알아야 하는 걸까? 아직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니? 곁에 있으면 잡아 앉혀놓고 2박 3일 밤을 새가며 궁금한 것을 전부 캐묻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 박유천은 내 곁에 없다……. 나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쨌거나 재영의 말에 의하면 박유천이 나를 살린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유천이 나를 찾아냈을 때, 나는 의식을 잃고 산장 2층에 혼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한참이나 의식이 없어서 저체온증이 우려되는 상황이었고, 아마 박유천이 나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 분명한 상태였단다. 유천은 그런 나를 끌어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몸을 덥히며, 혼자서 나를 데리고 산을 내려갈 수 없다고 판단, 무전기로 구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천의 예상대로 119는 눈 때문에 출동할 수 없었고, 결국 유천은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본사 회장님이 보낸 그 회색머리의 남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단다. 그 남자는 기업 소유의 헬기를 띄우는 대신 유천에게 순순히 서울로 함께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유천은 나를 병원에 입원시킨 후, 그대로 그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가서 그대로 연락 두절인 상태…란다. 미친놈, 영화 찍냐? 나는 또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실제로 일어난 상황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니, 이미 내 사랑 자체가 영화 같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유천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처럼, 박유천이나 이재영이 어쩌면 내 꿈속의 등장인물들이 아닐까,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말 꿈이라면… 깨어나서 박유천이랑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거야? 와씨, 끔찍하다……. “한숨 쉬었다가, 웃었다가, 혼자 뭐하냐?” 옆에서 들려온 재영의 목소리에 또 피식 웃었다. 그는 운전이 난폭한 편이었던 평소와는 다르게 속도도 잘 내지 않고 천천히 그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라지기 전에 유천은 우리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 절대 집에 연락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면서, 혼자 두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내가 깨어나면 재영에게 데려가라고 했단다. 글쎄…,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유천이 그렇게 말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긴, 이렇게 노골적으로 악의를 드러내는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서는 보안이 철저한 그의 집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터였다. “아직 멀었어요?” “다 왔어.” 그가 손가락으로 앞에 보이는 거대한 고층 아파트를 가리켰다. 갑부들만 산다고 소문난 바로 그 아파트. 재영의 벤츠가 아파트로 접어들었다. 주차장에 즐비하게 늘어선 난생 처음 보는 외제차들에 입까지 벌리고 두리번거렸다. 난… 너무 보통의 평범한 일반인인데, 묘한 경험을 참 많이 한다……. + 재영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는 쭈뼛거리며 뒤를 따랐다. 현관에는 거대한 신발장과 재영의 특이하고 값 비싸 보이는 신발들이 한 가득. 현관 인테리어부터가 심상치 않은 것이 일반인 출입금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먼저 안으로 들어서는 재영의 뒤를 쫓아 눈을 돌렸을 때는……. 광활한 거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점점 작아지는 재영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뭐해?” 나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오는 재영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인다. 집안에서 원근감을 느낀다면 믿어질까? 이건 뭐 세렝게티 초원도 아니고 도대체 몇 평이야? 달리기 시합을 해도 되겠다……. 갑자기 박유천과 크림 묻히기 장난을 이 집에서 한다면 절대 잡히지 않을 자신이 생긴다. 재영 씨한테 시험 삼아 한 번 해보자고 할까? 나는 또 엉뚱한 생각을 해가며 거실로 들어섰다. 어쨌거나 박유천이 돌아오거나, 나를 괴롭힌 사람이 잡히기 전까지는 여기서 살아야 되니까 빨리 적응하는 편이 낫겠다. “방은 여기 쓰고,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나 이외에는 아무도 문 열어주지 마.” 그의 말에 방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구는 있지만 사람의 흔적이 없어 썰렁한 방. 그러고 보니 이 집 전체가 그런 느낌이다. 모든 것이 값 비싼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사람은 살고 있지 않은 모델 하우스 같은 느낌. “…이 넓은 집에 혼자 살았어요?” “이젠 아니잖아.” 그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손바닥만 한 내 자취방에서 혼자 지내는 것도 어쩔 때는 쓸쓸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는 오죽할까? 까칠하고 성격이 나빠 보이지만 그는 의외로 정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 것 같던데. “하아-.” 갑자기 재영이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요?” “뭐가?” “왜 한숨 쉬어요?” “솔직히 말해?” “네.” “좋아서.” “…….” 단 세 글자에 담긴 그의 진심에 나는 또 미안해진다. 내가 어색하게 굳은 미소를 짓자 그는 내 손목을 잡아끌어 거실로 되돌아갔다. 비싸 보이는 소파에 나란히 앉자 프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이 사람도 여기에서 목 늘어난 티셔츠에 추리닝만 입고 뒹구는 일이 있을까? 상상을 하자마자 풉 하고 웃어버렸다. “왜 웃어?” “아니에요.” “뭔데?” “아니, 그냥.” “뭔데?” 이 사람도 참 집요하다, 박유천만큼. “그냥요, 재영 씨도 추리닝 입고 소파에서 뒹굴 거리나 싶어서.” “당연하지.” “어? 그래요?” “그럼, 지금 보여줘?” “아, 아니요. 사양할게요.” 그가 장난스레 몸을 일으키는 것을 잡아 말리며 킥킥 웃었다. 재영은 또 다시 소파에 기대어 앉으며 갑자기 나를 불러왔다. “야.” “네?” “나는 진짜 안 되냐?” “…….”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금세 표정이 굳어간다. 왜 갑자기 이런 주제로 넘어가는지. 좀 미리 예고를 해주던가, 아니면 분위기 조성을 해주던가. 어지간히 성격도 급한 사람인가 보다. 나는 말없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재영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내가 좀 말을 막 하긴 하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왠지 자조적인 그의 말에 또 웃음이 났다. “알면 고치던가요.” “귀찮아.” 아이쿠, 어련하시겠어요. “그래도 그게 재영 씨 매력이라던데요. 그 재수 없게 웃는 거에 비명 지르면서 넘어가는 여자들 많던데.” 뱉어놓고 찔끔했다. ‘재수 없게 웃는 거’라니……. 나는 흘깃 재영의 눈치를 봤다. 나를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쭈뼛쭈뼛 멋쩍게 웃었다. “죄송…….” “…괜찮아, 재수 없는 거 맞으니까.” 괜찮다면서 왜 안 웃는데요? 나는 좀 삐친 것 같은 그의 표정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28살이나 먹어서 삐쳤대요, 얼레리 꼴레리. 나는 웃음을 참느라, 그는 삐쳐 있느라 잠시 광활한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이 상황 정말 웃긴다. 이 사람 이제 보니까 박유천보다 잘 삐치고, 귀엽다. 이 말을 하면 또 삐치겠지? 자꾸 웃음이 나와서 눈물까지 찔끔 날 지경이었다. “배고프다.” 갑자기 그가 불쑥 또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배고프다. 나는 어찌된 일인지 이틀이나 정신을 못 차리고 병원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연달아 터진 사건들에 나도 모르게 긴장해 있던 것이 한 번에 풀려버려 정신을 놓았던 것일 터였다. 그 동안 한 끼도 못 먹었을 텐데, 그럼 나 3일째 굶고 있었다는 소린가? “나가서 밥 먹을까?” 그의 말에 조금 망설였다. 의사는 좀 더 입원해서 경과를 보자고 일단 의식을 되찾자 병원에 있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퇴원을 하긴 했지만, 또 어딘가에 나가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식사를 하기는 싫다. 더군다나 저 사람과 가면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분명 체할 거다. 나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누군가가 무방비한 나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갑자기 지난 꿈에서 유천에게 끓여주었던 라면 생각이 났다. 식욕이 없을 때는 역시 라면이 제일이다. “재영 씨.” “어?” “라면 같은 것도 먹어요?” “당연하지. 만인의 연인, 신라면과 너구리.” ‘어,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사람이 저 두 라면의 CF도 찍었던 적이 있다는 것이 불쑥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만인의 연인 저것도 광고 카피구나. 진짜 웃긴 사람이야. “있어요?” “왜? 끓여주게?” “네.” “없어. 매니저 시켜서 사오라고 할까?” “없으면 됐어요.” 괜히 오랜만에 쉬고 있을 사람에게 이런 쓸데없는 심부름을 시켰다간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200살까지 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잠깐만.” 갑자기 재영은 티 테이블 아래를 뒤적이더니 매니저가 정리해 주었음이 분명한 전화번호부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가 하는 양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아, 거기가 태양… Supermarket인가요?” 와우, 이 사람도 본토 발음. 주소를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것을 보니 근처 상가 슈퍼에 배달을 시킬 건가 보다. “네, 신라면 한 Box, 너구리 한 Box요.” 엥? 한 박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재영은 전화를 끊고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 갖다 준대.” “…라면 두 박스를 뭐 하게요?” “한 개씩은 안 된다잖아.” “…그렇다고 두 박스를 시켜요?” 끄덕끄덕. “…….” “…….” 헐… 이 사람은 생활력 제로의 부잣집 도련님이 맞다. 박유천은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데. 역시 너무 어릴 때부터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와서 그런 건가? “풉!” 결국 나는 배를 싸안고 바닥을 뒹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나는 그의 집에 자리 잡은 거대한 주방을 뒤져서 겨우 라면 두 개를 끓일만한 냄비를 찾아냈다. 너무 깨끗하고 말끔한 것이 생활의 흔적이라고는 거의 없는 넓고 황량한 집……. 그것을 또 눈으로 확인하자 그를 다시 보게 된다.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나 함부로 동정하면 안 된다. 동정이라는 감정은 사랑과 많이 닮아서 가끔 사람을 착각하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나름대로 이런 생활에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이라든가, 기쁨의 기준이란 것은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왜?” “아니에요.” 눈이 마주쳐서 나는 멋쩍게 웃으며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양파를 썰자 재영이 일어나서 다가온다. 걱정된다. 옆에서 자꾸 저렇게 보고 있으면 긴장해서 내 손을 썰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마트에 전화를 걸어서 당근, 파, 양파, 치즈와 두부 같은 것도 함께 배달을 시켰다. 이 집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해 먹는지 냉장고는 온통 맥주와 음료수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박유천이랑 똑같을까? 박유천의 5년 후는 이 사람과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다른 게 있다면 박유천은 이 사람처럼 비웃음이 무기가 아니라 해맑게 웃을 줄 안다는 것 정도? 서른인가 마흔인가를 넘기면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박유천은 지금도 충분히 멋있고 잘났지만, 그때가 되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유천에게 지금 위기가 닥친 것 같은데, 그때도 지금처럼 활짝 웃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때도 함께 할 수 있을까? “야, 너 잘 한다.” 당근을 채 썰자 재영이 팔짱을 끼고 혀를 내두른다. 나는 애써 무거운 생각을 날려버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좀 일급 요리사에요.” “내가 고용하면 안 될까? 평생?” “감당 못 할 걸요? 월급이 좀 많이 센데?” 표면적인 의미와 또 다른 의미의 두 가지 뜻이 담긴 그의 말은 그냥 농담으로 넘겨버렸다. 그와 얼마나 오래 지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괜히 불편한 공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다른 것도 할 줄 알아? 전에 먹은 부대찌개 같은 거.” “아, 그거 맛있죠?” “어.” “그건 못 해요.” 미안… 나 라면밖에 못 끓여요. “다음에 먹으러 갈까요?” “그래.” 그는 또 기분이 좋은지 싱긋 웃는다. 뭐,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다. 우리와 이런 식으로 엮이지 않았으면 분명 좋은 관계가 되고도 남았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 앞에서 재영과 그렇게 불꽃 튀는 라이벌간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박유천이다. 그런 그가 어떤 심정으로 나를 이 사람에게 부탁하고 갔을지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멍해진다. 이번 사건으로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도 그렇지만 유천도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다. 그저 단순히 사진이나 죽은 새를 보내 우리를 괴롭히려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나를 죽이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겁이 난다. 심지어 나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니까. “자, 완성!” “음… 보기엔 먹음직스러운데.” “맛있어요.” “과연?” “와씨, 못 믿네? 맛있으면 어떡할 건데요?” “키스해 줄게. 아주 진하게.” “…….” 그의 농담이 너무 진담 같아서 말문이 막혔다. 저기요… 우리는 그런 농담하면 안 되는 사이 같은데요? 나는 쭈뼛쭈뼛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앞에 수저를 놔주었다. “장난이야, 장난. 어서 먹자고.” 조금 미묘해진 공기를 깨달은 건지 그는 또 다시 싱긋 웃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야, 뚜껑 없냐?” “네?” 느닷없는 그의 말에 나는 라면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멍하니 재영을 응시했다. “나 이거 TV에서 봤어. 한 냄비에 놓고 같이 먹는 거. 왜, 그, 냄비 뚜껑에 덜어 먹고 그러잖아.” 난 이런 거 TV에서 본 거 같아요. 부잣집 도련님이 서민들 생활 모습 보고 신기해하는 장면……. “뭐 좀 아시는데요? 역시 라면은 양은 냄비 뚜껑에 덜어 먹는 게 맛있죠.” 뭐, 서민 생활은 내 홈그라운드니까. 그의 모습에 후훗 웃었다. 자꾸 이상한 웃음이 나온다. 왜 이상한지는 잘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가 모르는 것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에 좀 으쓱하면서도, 흐뭇하고, 귀엽고, 안쓰럽고, 유쾌하다. “이게 양은 냄비야?” “아뇨, 양은 냄비는 노란색이고 잘 찌그러져요.” “아, 매니저 보고 사다 놓으라고 해야겠다. 다음엔 거기에 해 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면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후루룩 소리와 함께 딸려오기 시작한 라면을 흐뭇하게 보다가 동작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길게 늘어진 라면 한 가닥이 재영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 순간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도 나도 움직임을 멈춘 채, 서로에게 이어져 있는 라면 한 가닥과 서로의 눈동자를 번갈아 보았다. 째깍째깍 시계가 가는 소리, 그의 옅은 눈동자, 넓고 넓은 그의 집과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보안 시설……. 묘한 긴장과 정적……. 씨발…, 이런 것도 TV에서 봤어……. 나는 난감해 하며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후루룩. 그가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화들짝 놀라 면을 끊어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 물 어디 있어요?” “거기 정수기.”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으와, 박유천! 이 새끼, 언제 와! 속으로 박유천을 찾으며 입 밖으로 튀어 나오기라도 할 듯 한 가슴 언저리를 부여잡고 애써 태연한 척 물 컵을 하나 꺼내들었다. 박유천, 너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거 예상하고 날 이 사람에게 보냈냐? 나 여기 있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너무 뻔하게 눈에 보여서 긴장돼 죽겠다? 네가 보낸 거다, 나 잘못 없다. 나중에 나타나서 날뛰기만 해. 그럼 정말 네 녀석 죽여 버릴 거야! 나는 애써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물이 담긴 유리잔 두 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쭈뼛대며 젓가락을 집어 드는데 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재영이 쿡쿡 웃는다. 나는 태연한 척 쭈뼛쭈뼛 웃어 보였다. “원래 그렇게 얼굴이 잘 빨개져?” 재영의 말에 얼굴이 확하고 달아오르며 순식간에 귀까지 욱신거린다. 민망해서 그를 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자동인형 같아. 쿡 누르면 굉장히 요란한 반응이 나오는.” “놀리지 마요.” “너 귀엽다고 칭찬하는 거야.” “놀리지 말라고요.” “놀리는 거 아니라니까.” 아니라면서 왜 그렇게 웃는데요? 나는 뚱하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쿡쿡 웃고 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야.” “왜요.” “너 정말 나한테 올 생각 없냐? 나 박유천이랑 비슷하다며.” “어디가 비슷해요? 나 참, 어이가 없네.” 나는 젓가락으로 면을 홱홱 휘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도 다 들었잖아, 박유천이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한 거.” 그의 말에 또 호텔에서 그들이 나눴던 불꽃 튀는 대화가 떠오른다. 내가 옥상에 갇히고, 클로로포름에 당해 정신을 잃던 바로 그 날. 한 순간에 두근두근 가슴 뛰며 긴장했던 것이 맥주 거품 꺼지듯 확 사그라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꽤 충격이 컸나보다. 순식간에 기분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 “박유천도 대단하더라. 너 찾겠다고 목숨 걸고 산을 오르고 말이야.” “…….” 그의 말에 나는 그냥 말없이 라면 한 가닥을 건져 입으로 가져갔다. 짭짤하다. 유천에게 프로포즈를 받았던 날, 내가 너무 울어서 계속 입술로 눈물을 훔치며 입을 맞춰주었던 유천에게서 났던 맛처럼……. “둘이 안지 얼마나 됐어?” “7년이요.” “계속 친구였던 거야?” “…네.” 참, 질기고 어리석은 인연이죠? 그런데도 난 내 사람이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계속 그 녀석에게 투덜대고 시비나 걸고 욕이나 해댔으니……. “그런데 어떻게 사귀게 됐어?”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 순간 좋아하고 있던데요.” 정말 정신 차리고 보니 좋아져 있더라고요. 왜 하필 사내새끼인지, 왜 하필 친구인 박유천인지 고민할 새도 없었어요. 그냥, 그 녀석이 너무 좋아서……. “그게 언젠데?” “…한 1년 반 전부터요.” 있잖아요… 나는 어릴 때 우리가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도 안 나요. 그런데 박유천은 나에 대해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되게 미안해요. “박유천은?”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내가 좋았대요.” 나는 수줍은 듯, 하지만 자랑스럽게 그에게 웃어 보였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우리의 사랑이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우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기분 좋다. 항상 감정을 숨기고 감추는 것에만 익숙해서 박유천도, 나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냥 혼자서 속으로 삭이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럼 박유천은 7년이나 혼자 짝사랑을 한 거야?” “네.” 글쎄 그랬대요, 그 녀석이……. 처음에 난 나만 그 녀석을 가슴에 담은 줄 알고 어찌나 겁이 나던지 그 녀석한테 더 쌀쌀맞게 굴었거든요? 그런데 그 녀석도 그게 섭섭했나 봐요. 여자들을 잔뜩 만나고 다니질 않나, 내 속을 아주 홀랑 뒤집고 새카맣게 태워놨었어요. “와, 너희 진짜 징그럽다. 그게 가능해?” 미안해요, 재영 씨. 나 이제 알 것 같아요. 그 녀석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 녀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와, 진짜 열부문(烈夫門)이라도 세워줘야겠네.” 재영의 감탄에 나는 또 수줍지만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올렸다. 벌써 유천이 보고 싶다. 나는 유천의 안부를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멀리서 유천을 그리워한다. 아마도 우린 지금 지상최대의 위기를 맞은 듯 하다. 하지만 박유천은 나를 위해 두 번이나 생명을 걸고 그 무모한 사랑을 내게 증명해 보였다. 이제 나는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있다. 남은 것은 내 사랑을 그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뿐이다. 어서 박유천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내 진심을 다해 그와 마주설 준비가 되어 있다……. + “준수야.”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그림자를 올려다보자, 뿔테 안경을 쓴 재영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부터 출근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웃음소리와 함께 재영의 입술이 짧게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잠에 취한 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으며 잔뜩 인상을 썼다. 그는 나지막이 웃으며 또 다시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심조심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길, 가볍게 이마에 와 닿던 입술. 박유천이 잠을 깨울 때 늘 이랬는데……. 나는 잠이 덜 깬 눈을 깜빡이며 침대에 걸터앉은 재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목덜미에 흘러내려 찰랑이는 가늘고 결이 고운 갈색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의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옅은 색의 눈동자. 첫날 이 집에 왔을 때 물어봤던 바로 그 티셔츠에 추리닝 차림의 그는, 박유천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입고도 멋있다. “일어나, 나 나갈 때 같이 나가자.” “몇 시에요?” “6시 반.”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때 촉, 하고 뭔가가 빠르게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잠이 화들짝 깨버렸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굿모닝 키스.” 재영은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는 머리를 싸쥐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뒤늦게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아놔, 진짜 박유천, 이 새끼 나타나기만 해 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이불에 대고 질러대며 또 그렇게 유천이 없는 아침을 맞고 있었다. + “오늘 나 좀 늦을 것 같으니까 먼저 저녁 먹고 자. 아무도 문 열어주지 말고, 한 시간마다 문자하는 거 잊지 말고.” “네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재영의 벤에서 내려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재영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드디어 외출을 시작한 나 때문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을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걱정스러운 재영의 옅은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또 다시 싱긋 웃어주었다. 부릉- 소리를 내며 재영의 벤이 떠났다. 그는 요즘 아주 복잡하다. 박유천의 문제가 L그룹과 재영의 회사와의 커다란 소송을 만들어낸 것이다. 본격적인 법정 싸움이 시작된다면 그는 더욱 골치 아파질 것이다. 한국의 거대 공룡 그룹인 L사와 일개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와의 전쟁이라니.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의 일터를 돌아보았다. 유천이 만들어준 나의 일주일의 휴가가 끝이 났다. 재영에게 닥친 일만큼 나도 골치 아픈 상황이다. 도대체 박유천은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주머니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직원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박유천의 것. 내 핸드폰은 전원이 나간 채 아마 캐비닛에 들어있을 터였다. “어, 준수야!”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아르바이트생인 미영 누나가 달려오고 있다. “너 아팠다며? 많이 아팠어? 일주일 동안 안 나와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죽을 병 걸린 건 아니지?” 그럼요, 죽을 뻔 하긴 했지만……. 누나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휴가는 이렇게 처리된 것 같다. 이제야 유천의 배경이 실감난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냥 좀 잘 산다고 생각했던 친구 녀석이 단순히 그냥 부자가 아니었다는 걸.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난 지금 하고 있는 매니저 일이 아주 만족스럽고, 졸업 후에 어디로 정식 발령이 날지도 기대된다. 박유천 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직장을 갖게 되는 것뿐이다. 응, 그렇다. 나는 고개까지 끄덕여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어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나저나 재영의 회사가 걱정이다. L그룹과 법정 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로 흐르자 재영의 회사는 주가가 바닥 모르고 뚝뚝 떨어지고 있고, 소속 모델이나 연예인들의 캐스팅 취소 통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의뢰가 들어오는 것은 기획사 간판스타인 재영 정도. 아무래도 L그룹 측의 로비가 있는 것 같다는 재영의 말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미안하다. 멍하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터벅터벅 탈의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무전기를 허리에 차는데 왜 이렇게 이 수트와 이어폰이 낯선지 모르겠다. 답답하다. 박유천은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관계없는 사람들이 요란하고 뻑적지근하게 후유증을 치러야 하는지……. 재벌가에서는 다들 그런가? 속상해 죽겠다. 하긴, 유천이 일주일이나 집에 내려가서 밥도 못 얻어먹고 쫄쫄 굶으며 무릎 꿇고 앉아서 허락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도, 호적을 파서 나가라는 말을 했을 정도면 그의 부모님도 어지간히 완고한 분들인 것 같다. “…….” 그렇다면 우리는? 갑자기 우리의 사이가 걱정스러워졌다. 모델도 못하게 막을 정도인 그의 부모님들이 과연 나와 그의 사이를 아신다면……?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하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까마득하구나, 우리가 갈 길은…….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그동안은 짝사랑의 고통에 잘 보지 못했던 현실들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또 다시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 경쾌한 음악이 들려오고 있는 놀이공원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돌아왔다, 나의 일상으로……. 토끼 옷을 입은 알바생과,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는 매장 직원들을 보자 괜히 반갑다. 하지만 오랜만에 맞은 평범한 나의 일상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지루하고 무감동했다. 여전히 놀이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어김없이 분실사고와 미아사고가 일어나 나를 번잡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비즈니스 스마일을 지은 채 일을 처리해 나갔다. 글쎄, 처음에는 이상한 손님이 많아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고생했는데, 이제는 이런 웃음이 아무렇지도 않다. 나도 슬슬 네모반듯했던 모가 둥글어지는 모양이다. 아니, 하루 종일 박유천의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화를 낼 여유가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웃으며 일을 하고 있을 뿐. “개새끼…….” 잠깐 손이 비어 멍하니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자, 나는 아래층에 보이는 아이스링크를 응시하며 오랜만에 욕설을 내뱉었다. 어쩌면 이렇게 감감무소식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명색이 그의 프로포즈를 받고, 커플링까지 끼고 있는 애인인데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문득 정윤 형이 떠올랐다. 정윤 형도 박유천네 먼 일가라고 들었다. 정윤 형에게 연락을 해볼까? 나는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가 한숨을 쉬며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정윤 형의 가슴에 상처를 내며 유천을 선택한 건 바로 나였다. 차마 형에게는 박유천이 사라졌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이 상황은 나를 너무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래서 남자들은 그렇게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치나 보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혹은 권력을 남용해서 편법으로라도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또 다시 밀어닥치는 내 자신에 대한 실망과 무력감에 어깨가 축 쳐졌다. 멀리 바이킹에서 하이 소프라노의 여자 비명이 들려왔다. 등 뒤에서 꼬마가 까르르 웃었다. 아이스링크에서는 넘어진 여자친구를 일으켜 세우는 남자가 보였다. 퍼레이드 준비를 하는지 경호원들이 나와서 라인을 만들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과,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와, 흔들흔들 허공을 날고 있는 누군가가 놓쳐버린 풍선……. 제길, 박유천이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잘도 돌아간다……. + 술을 마셨다. 많이 마셨다. 냉장고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독한 술. 술기운에 손발이 욱신거리고 유천이 뚫어준 귀도 아프다. 내 귀에 걸린 귀걸이와 왼손 약지의 반지. 박유천이 내게 했던 맹세의 증거. 하지만, 왜 옆에 없냐고, 이 망할 자식아! 나는 또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 TV에서는 유천이 출현했던 CF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만 나오는 CF다. 그의 똑바르고 곧은 등허리와 어깨가 화면에 가득 찬다. 그대로 그를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비비고 싶어진다. 얼굴이 나온 CF는 유천이 사라지고 나서 금세 다른 모델로 교체되었다. 정말 L그룹의 입김이 세긴 센가 보다. 타 회사 광고모델을 좌지우지할 정도면. 아, 박유천이 걷는다. 화면 속의 뒷모습이 뚜벅뚜벅 멀어진다. 그리고 살짝 뒤를 돌아보며 페이드아웃. 어둠속에서도 옆선이 뚜렷하다. 와씨, 누구 애인인데 저렇게 잘 생겼을까? 슬며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실제가 아닌 그의 영상을 보는 것뿐인데도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이건 아무래도 병인 것 같다. 심지어 나는 팔불출 끼도 있나 보다. 삑, 삑, 삑, 삑, 삑, 삑. 그때 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멀리 보이는 문을 돌아보았다. 철컹, 문이 열리고 재영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얹혀사는 객식구답게 얼른 일어나서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가 그를 맞았다. “오셨어요?” “안 잤네?” “네.” “먼저 자라니까.” “잠이 안 와서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그에게서는 쌀쌀하고 신선한 겨울 공기 냄새와 희미한 술 냄새가 났다. 그는 거실 안으로 들어서며 코트를 벗어 들었다. “술 드셨어요?” “어.”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느닷없는 행동에 나는 무방비하게 끌려가서 그에게 안겼다. 볼에 와 닿는 그의 차가운 옷깃…….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재영이 조금 더 나를 힘주어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준수야.” “네.” “너무 좋다.” “뭐가요.” “집에 오니까 불이 켜져 있어. 우리 준수가 오셨어요- 이러고 인사도 해주네.” 재영이 내 말투를 따라 하기에 킥킥 웃었다. 재영도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더니 쿡쿡 웃는다. 그의 따스한 숨결이 간지럽다. “저녁은?” “먹었어요. 재영 씨는요?” “아직.” 나를 안은 팔을 풀어내는 그에게 대답을 해주며 그의 코트를 받아들었다. 며칠을 이곳에서 살면서 익숙해진 행동이었다. 습관처럼. “밥 없는데.” “됐어.” “그래도 배고프잖아요.” “술 마시면서 많이 먹었어.” 많이 먹긴, 또 술만 마셔댔을 거면서. 재영은 마르고 탄탄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있다. 그는 톱스타답게 극도로 잘 짜여 있는 자기 관리 프로그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새벽에 일어나야 했고, 정기적으로 피트니스 센터에서 몸을 만들어야 했으며, 가뜩이나 마른 몸이지만 혹여 살이 붙으면 다이어트도 해야 했다.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는 워낙 어릴 때부터 익숙한 탓인지 불평도 안 하고 잘 지키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서 톱스타의 사생활을 보게 되다니 신기한 느낌도 든다. 설마, 박유천도 유명해지면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 으…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너도 술 마셨어?” “네.” “왜? 무슨 일 있었어? 너 술 잘 못 마신다며.” “아뇨, 그냥. 냉장고에 있기에 뭔가 하고.”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재영은 눈치 빠르게도 또 뭔가를 알아챈 기미다.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척 그냥 주방으로 들어섰다. 사라져버린 박유천 때문에 속상해서 마셨다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뭐가 좀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내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 속 아프다.” 재영이 허리께를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리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위가 멀쩡할 리가 없다. 자기 관리 뿐 아니라 회사 일도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인데, 요즘은 L그룹과의 소송 때문에 회사가 발칵 뒤집혀 있을 테니. 태연하게 웃고 있지만 저 사람도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재영 씨!” “어.” “스프라도 만들어 줘요?” “어, 고마워.” 드레스 룸에서 작게 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는 뜨거운 물에 그냥 타서 먹을 수 있는 스프를 잔뜩 사다 놓았다. 집안일을 해주시는 분이 이틀마다 오시지만 재영은 혼자 집에 있을 때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포트에 물을 붓고 전원을 넣었다. 점점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져 간다. 그가 돌아오면 옷을 받아들며 인사를 해 주고,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고, 가끔 아파트 내의 잘 꾸며진 정원을 함께 산책하는 일 같은 것들……. 물이 끓기에 스프를 잘 녹여 커다란 머그잔에 붓고 주방을 나섰다. 재영이 드레스 룸을 나서며 머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제법 길어서 집에서는 저러고 있다. 재영의 저런 모습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몰래 자는 모습 찍어서 팔까? 나는 엉뚱한 생각에 킥킥 웃으며 그에게 머그잔을 건넸다. “Thanks." “유어 웰컴.” 그의 본토 발음 인사에 나의 콩글리쉬 대답. 이것도 이제 익숙하다. 나는 이렇게 유천이 없는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 “빨리 해.” 재영은 쿡쿡 웃으며 온더락 글라스를 들어 마셨다. 나는 체스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집을 구경하다가 발견한 체스 세트에 괜히 재영에게 내기를 건 것이 시작이었다. 나도 박유천이랑 많이 맞붙어서 대전을 해왔던 터라 자신 있게 응했는데, 이 사람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내 킹은 몇 번만 더 차례가 오가면 그의 비숍이나 퀸에게 딱 잡히게 생겼다. 진땀이 난다. 아무래도 난감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은 불길한 기분……. “…재영 씨.” “어?” “진짜 할 거 아니죠?” “진짜 할 건데?” “…….” 이게 무슨 소리냐면, 승리자에게 돌아갈 전리품 이야기다. 나는 그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기를, 그는 나에게 키스를 요구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질 것 같은 분위기란 말이다. “흐음…….” 나는 심각하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 체스보드를 노려보았다. 한가로운 토요일 밤. 외출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재영과 나는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 참이었다. 유천이 사라진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가 없는데 시간은 잘도 흘러, 2월이 되었고, 내가 재영의 집에 산지도 일주일이 되어 간다. 그동안 나는 다시 직장에 복귀했고,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들에게 몇 차례 스토커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차츰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머지않아 잡힐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하고 갔지만, 이제 스토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박유천의 소식이 궁금할 뿐. 며칠 전에는 유천에게 연락이 왔었다. 물론 그가 직접 연락을 한 것은 아니었다. 유천의 핸드폰으로 낯선 번호에서 계속 전화가 걸려 왔다. 혹시나 하고 받았더니 스키장에서 만났던 회색 머리의 현 실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용건은 짤막하고 간결했다. ‘유천 씨가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달랬다며, 지금 회장님 댁에서 지내고 있다’는.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유천 씨는 현재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없으며, 외출도 불가능하니 참고 하시라’는 말만 마친 현 실장은 내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감을 잡아가는 중이다. 쉽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힘든 상황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차라리 우리가 겪었던 어이없는 오해들은 어린애 장난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그 불똥이 재영에게까지 튀어 있는 이 상황은……. “뭐야, 자포자기야?” 재영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참으로 어이없는 짓을 해 놨다. 내 나이트를 그의 퀸 앞에 떡 하니 날 잡아 잡수라는 식으로 갖다 놓아준 것이다. “으와! 잠깐만요!” “내기에 잠깐만이 어디 있어.” 당황한 내 목소리에도 재영은 가차 없이 퀸을 움직여 나이트를 잡았다. 헐, 내 킹은 이제 완전히 무방비 상태다. 제길, 이판사판이다. 나는 비숍을 움직여 다시 한 번 퀸을 막았다. 우리 관계도 이렇게 체스처럼 단순명쾌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체스 말을 움직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라면 당장 그 회장 댁인지 어딘지 쳐들어가서 유천을 데리고 탈출하면 좋겠는데 말이지……. 유천과 명희 씨의 전화 통화에서 종종 등장하던 박 회장님이 바로 그분이다. 도무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완고한 성격의 노인 같은 것이 마치 아직도 비숍과 나이트의 견고한 호위를 받고 있는 재영의 킹 같다. 반면에 나는 재영의 퀸에 의해 진영이 초토화된 무기력한 상태고. 희망이라면 재영의 진영 깊숙이 들어가 있는 저 폰 하나뿐인가? 마치 나처럼 약하고 작은 말……. “체크.” “헉! 잠깐만요!” 나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재영이 팔짱을 끼고 오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넌 끝났다는 표정…….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흘깃 그의 눈치를 봤다. 졌다. 이번에 피하더라도 다음 수는 체크 메이트다. 하지만, 아무리 내기라도 재영에게 순순히 입술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란 말이다. 어떡하지……. 나는 조금 시간을 끌면서 옆에 놓인 맥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야금야금 많이도 마셨다. 벌써 여섯 캔 째…….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화장실이요.” “이거 하고 가. 다 끝났네.” 도망가자……. 나는 재영의 말을 무시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야, 김준수. 뭐야.” 보면 모르나? 튀는 거잖아요, 지금. 내 걸음은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아서 이내 뜀박질로 바뀌었다. 나는 광활한 거실을 전력질주 하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좀 걱정스럽긴 했지만, 내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야!” 재영이 벌떡 일어나서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멈추라는 재영의 목소리에는 으항항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방으로 뛰어든 나는 문을 쾅 닫고 잠가 버렸다. 등을 문에 기대고 선 채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으려니 타박타박 재영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 웃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또 다시 웃음이 터진다. “왜요?” “열어.” “싫은데.” “너 졌잖아.” “그러게요, 내가 졌네.” “내기 했잖아.” “그래서 도망쳤잖아요.” “그렇게 나올 거라 이거지?” “네, 이렇게 나갈 겁니다.”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주며 키득대고 있으려니 금세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뭐야, 벌써 포기한 거야? 그러면 재미없는데. 나는 문에 귀를 바짝 대고 바깥 상황을 살폈다. 재영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달칵. 헉……. 문고리에 열쇠 꽂히는 소리에 나는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이 집이 저 사람 집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찰칵, 자물쇠 풀리는 소리에 또 한 걸음 주춤 물러섰다. 아놔, 이 바보 같은 김준수야, 열쇠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생각 좀 하란 말이다. 나는 숨을 곳이 없나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침대, 옷장과 작은 테이블 세트가 놓인 방은 숨을 곳도 마땅치 않다. 또 옷장에 들어가야 되나? 이건 꼭 호텔에서 박유천에게 혼나기 직전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뭐, 저 사람은 박유천만큼 무섭진 않지만. 고민하고 있을 때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서 재영은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 열쇠를 찰랑거려 보였다. 나는 쭈뼛쭈뼛 멋쩍은 웃음을 지은 채 또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아, 저기, 그게요.” “어.” “하, 하하, 하하하하.” 뭐냐 김준수, 이 만들어낸 티가 역력한 웃음은. 재영이 싱긋 웃으며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나는 주춤 물러났다. 그가 또 한 걸음 다가서고, 나는 한 걸음 물러서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계속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등 뒤에 와 닿은 벽…….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등 뒤에 닿아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재영이 쿡쿡 웃었다. 진땀이 버쩍 났다. 박유천, 네 애인 큰일 났다……? “다 도망갔어?” “아하하, 저기요, 재영 씨.” “약속은 지켜야지.” “그, 그게 말이죠.” 재영이 내 뒤의 벽에 손을 턱 짚었다. 나는 여전히 어색하게 굳은 미소를 지은 채 쭈뼛쭈뼛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쇳소리를 내고 말았다. “자, 자, 잠깐만요!” 입술이 닿기 직전 재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쓴 채 한쪽 눈만 조심스럽게 떴다. 그리고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코앞에 와 있다. 재영이 쿡쿡 웃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또 다시 어색하게 아하하 웃었다. “졌잖아.” “그, 그러게요.” 재영의 짓궂은 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정말 김준수, 왜 그런 내기는 해 가지고! 하지만 난 진짜 이 사람이 이렇게 잘 하는 줄 몰랐단 말이다! “그, 근데 재영 씨, 되, 되게 잘 하시네요.” 나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긴장해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잘 하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체스 두는 법도 모른다고 하면서 나를 속인 게 누군데. “네가 못 하는 거지.” “저 되게 잘 하는 편이거든요? 이런 게임 누구한테 져본 적 없는데.” “지금은 졌잖아.” 이렇게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울컥 신경질이 난다. 아, 진짜, 그래요! 내가 졌어요! 내가 졌는데……! 난감하고, 억울하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에 한숨만 내쉬었다. 재영은 또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웃어댄다. 와씨, 사기꾼……. “눈 감아요.”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툭 내뱉었다. “네가 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 사람은 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쿡쿡 웃는다. 웃지 말아요, 정 들어. 나는 빠르게 그의 볼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이게 뭐야?” “뭐가요?” “장난해?” 장난 아닌데요. 나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재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옅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나는 또 다시 생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응시했다. 재영의 표정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 “…….” 열린 문 밖 멀리, 거실 어딘가에서 TV가 웅성댔다. 째깍째깍 시계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하지만 재영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심지어 너무 가까운 거리……. 내 눈동자에서 한참이나 머물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눈을 지나 코를 따라 내려가다가 입술에 몇 초쯤 머물던 그의 시선이 다시 눈동자로 되돌아왔다. 내 표정에서도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너무 조용해서 헛기침이라도 해야 될 것 같다. 나는 난감함에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아, 미치겠다. 그가 너무 가까워서 몸이 바짝 긴장되어 얼어붙어 있다. 술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것이 온 몸의 말초혈관까지 전해져 와서 손끝이며 발끝이 욱신거릴 지경이다. 나는 또 다시 쭈뼛쭈뼛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했잖아요, 이제 비…, 읏……!”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재영의 입술이 부딪쳐왔다. 나는 그에게 어깨를 잡혀 벽에 밀쳐진 채 숨을 멈췄다. 재영의 혀가 금세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재영은 내 손목을 잡아서는 그대로 벽에 잡아 눌렀다. 그에게서 쌉싸름한 맛이 났다. 희미한 알콜 냄새가 번져왔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조금 돌려 입술을 피했지만 그는 입술을 살짝 떼었다가 다시 위를 눌러왔다. 나는 당혹감에 뻣뻣하게 굳은 채 닿아오는 그의 혀를 피하지 못했다. 재영이 그대로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다급하게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옷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전에 없이 다급하고 간절한 몸짓……. 나는 급작스러운 긴장과 술기운에 반쯤 정신이 나가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재영의 입술이 코끝에 살짝 와 닿았다. 그리고 볼에, 눈 위에, 이마에, 다시 입술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내 티셔츠를 그의 손이 조금씩 걷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 깊이 파고든 그의 손가락 끝이 내 가슴돌기에 닿았을 때 나는 그의 입술 위에 가쁜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아, 읏, 재영 씨, 자, 잠깐만요……!” 나는 서둘러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재영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늘이 아니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듯 내 몸 위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계속해서 붉은 흔적이 새겨지는 느낌이 났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건 아니다. 난 박유천이라는 연인이 있단 말이다. 비록 그가 집에 감금당한 상태로 며칠이나 못 만나고 있긴 하지만, 재영도, 나도, 이래선 안 되는 거다. “재영 씨, 그만 해요!” 나는 비명처럼 내뱉으며 그의 어깨를 다급히 밀어냈다. 거실에서 새어 들어온 빛이 내 위로 그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어느새 묶었던 머리가 풀려버린 재영은 길고 고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 해요…….” 나는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착잡한 듯 쓰게 웃더니 그대로 내 곁에 털썩 누워버렸다. “하아.” 그가 내뱉은 한숨에 조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받아줄 수는 없다. 우린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엇갈린 사랑은 항상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 그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보는 사람에게까지도. 그 상처는 쉬이 낫지도 않거니와, 낫더라도 흉하게 흔적을 남긴다. 그리하여 누구도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아무도 그 사랑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엇갈림이란 이렇게 아픈 것이다……. “…미안.” “…….” 나도 미안해요…….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를 두 번 아프게 하는 것 같아서. TV 소리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잠시 더 시간을 흘려보냈다. 입맛이 썼다. 왜 내게 연달아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 정윤 형을 아프게 한 것이 바로 요전의 일인데, 어째서 재영까지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부족한 것 없는 저들이 왜 나 하나 때문에 힘들어야 되는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조금 웅크렸다. 어서 유천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하다. 늘 알게 모르게 내 주위에서 나를 지켜봐주던 유천이 지금은 절실했다. 지이이잉. 어둠속에서 내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움직일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전화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끊겼다가도 이내 다시 걸려왔다. 급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침대에 맥없이 누워 나를 올려다보는 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조금 웃어 보였다. 재영도 씁쓸하게 웃었다. “여보세요?” - 준수 씨, 저 이명희에요. “아, 명희 씨.” - 지금 좀 볼 수 있을까요? 할 말이 있는데. 시계를 보니 11시 반.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할 말이라는 게 뭘까? “네. 괜찮아요.” - 아, 그럼……. 명희 씨는 청담동의 한 카페 이름을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꺼져버린 액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나를 왜……?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누군데?” “명희 씨가 좀 보자는데요.” 내 말에 재영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명희 씨와 유천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재영이었으나, 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녀의 전화가 불안한 모양이다. “…박유천 일인가?” 나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유천과 나에게 뭔가가 시작되었다. 조용히,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외면해왔던 현실들이 파도처럼 우리를 덮치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클로로포름에 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손등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붉은 상처… 차게 식은 내 몸을 끌어안고 퍼부었던 키스… 그리고 나지막한 그의 사과와… 미안한 듯 지어보였던 옅은 미소……. 왜 하필 우리의 마지막 기억은 그렇게 씁쓸한 장면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이를 꽉 악물고 참았다. 벌써부터 약해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내 자신을 추슬렀다. 유천아, 그동안 널 힘들게 했을지도 모를 어렸던 나지만, 이제는 혼자 노력해 볼게. 그리고 난 항상 네 편이니까, 언제까지나 네게 힘이 되어 줄게. 네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꼭 다시 만나자……. + “오랜만이에요.” “네.” “몸은 좀 괜찮아요?” “네.”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변함없이 다정했고, 아름다웠다. “살이 좀 빠졌네요, 준수 씨.” “명희 씨도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좀 어색하게 웃었다. 얄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상하게도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조금 두렵다. 희미하게 내게서 술 냄새가 느껴졌다. 술을 깨기 위해 앞에 놓인 뜨겁고 진한 블랙커피를 들어 조심스레 몇 모금 마셨다.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뭔가 말을 꺼내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시선을 커피 잔으로 옮겼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장면에는 가슴에 까끌까끌 보푸라기가 인다. 긴장감에 자꾸 입술이 마른다. 뭘까……? “지내는 곳은 어때요?” “좋아요. 집도 좋고, 잘 지내고 있어요.” “경찰에서는 뭐래요?” “수사 진행 중이니까 조만간 잡힐 거라고 하던데.” “다행이네요.” 그녀는 또 다시 살풋 웃었다. 커다랗고 선명한 동공이 조금 휘어지는 것이 박유천이 웃는 것과 닮았다. 아… 유천이 여자였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아무에게나 박유천을 겹쳐 보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스워서. “혹시 유천이한테 연락은 왔었어요?” “네. 한 번. 그 현 실장님이라는 분이 전화하셨어요. 유천이 잘 지내니까 걱정 말라고 전해 달랬다면서.” “아…….”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내게 고정된 채 조금 흔들린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이나 나를 응시하다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는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조심스레 몸을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만큼 긴장감도 커진다. 혀를 델만큼 뜨거운데도 나는 왜 이렇게 추운 건지……. “저, 명희 씨.” “준수 씨.” 동시에 입을 열고 우리는 또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못할 짓이다, 이건. 차라리 빨리 이야기를 듣는 편이 낫겠다. “먼저 말해요.” “아뇨, 준수 씨 먼저 말해요. 제 이야기는 좀 길어서.” 그녀의 말에 나는 커피 잔을 조심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유천이한테 무슨 일 있죠?” 내 말에 그녀는 조금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나를 바라보며 곤란한 눈빛을 하고,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또 조금 웃었다. 씁쓸하고 착잡한 미소. 알 것 같다, 무슨 이야기인지.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싱긋 웃어주었다. “…저기, 준수 씨.” “말해요, 괜찮아요.” “전 유천이한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어요. 그냥 현 실장님이랑 같이 간 이후로 끝. 그 녀석,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갑자기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거 듣고 아는 것보다, 제가 말해두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우선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해요. 원래는 유천이에게 듣는 게 맞는데, 지금 유천이가 저렇게 되어 있어서.” 서두부터 거창하다. “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또 다시 곤란한 듯 웃으며 이마를 조금 갉작였다. 조금씩 심장의 움직임이 불규칙해지고 있다. 이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지 않을까 괜스레 걱정이 된다. “준수 씨.” “네.” “어릴 때 이야기부터 할게요. 유천이가 아무 말도 안 했을 것 같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는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그녀는 알고 있는 유천의 유년의 이야기를……. . . . “저희 조부님이랑 박 회장님이 절친한 관계였거든요. 그래서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서로 인사를 하던 사이였어요.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서로 집을 드나들었는데요, 또래라고는 그 녀석이랑 저랑 둘 밖에 없었고, 또 마침 동갑이어서 둘이 같이 놀라고 한 방에 몰아넣는 일이 많았거든요? 뭐, 그 땐, 유천이도 저도 고집이 세고,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라서 만나기만 하면 싸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옛 추억을 되살리는지 아련한 눈빛으로 커피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박유천이라는 꼬맹이는 참 짓궂었지만 사실은 되게 착하고 다정해요. 한참이나 벌레 같은 걸 잡아다가 눈앞에 들이대면서 저를 놀리다가 제가 눈이 새빨개져서 노려보면 금세 쭈뼛거리면서 사과하고, 아이스크림 사주겠다면서 손잡고 데리고 나가고 그랬으니까.” “뭔지 알 것 같아요. 저한테도 만날 그랬어요.” 그녀와 나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스몰 사이즈의 유천이 난감한 표정으로 쭈뼛대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귀엽다. 뭐야, 박유천, 너 어릴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던 거야?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떠오른다. “자라면서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늘 붙어 다녔고, 그게 참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커서 선생님이 되겠다는 둥, 너는 폭력적이어서 선생님은 안 어울리니까 군대 가서 조교를 해야 된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그 녀석이랑 친구가 됐어요.” “…….” 왠지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난다. 내가 모르는 박유천을 그녀는 잔뜩 알고 있어서. “준수 씨.” “네?” “유천이 성격 되게 나쁘죠? 자기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고, 솔직하지 못해서 툭툭 말 던지면서 비꼬고.” “어, 정답.” 그녀의 말에 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저렇게 잘 아는지. 역시 어릴 때 친구가 맞나 보다. 명희 씨는 나를 보며 가만히 웃다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안 그랬어요. 장난기는 많았지만 밝은 성격이었거든요? 그런데 유천이 6학년 때, 부모님이 갑자기 경영권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가면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었어요. 하지만 박 회장님은 어지간한 분이 아니었거든요. 뭐랄까… 타고난 사업가? 득이 되는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분이에요. 그게 가족이든, 친척이든 상관없이. 더군다나 유천이 아버지는 굉장히 유능한 분이셨고, 그래서 박 회장님은 더더욱 놓을 수가 없었던 거죠. 와, 집안싸움이 완전 전쟁 같더라고요.” 나와는 먼 세계 이야기. 나는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 회장님은 유천이 아버지 하시는 일마다 사사건건 훼방을 놓으면서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하루도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죠. 보다 못한 유천이 부모님은 미국으로 유천이를 보내버리셨고요. 그게 한 4년 끌었나 봐요. 결국 유천이 아버지 고집을 꺾지 못하고 박 회장님은 거의 절연을 하다시피 하셨고, 그 후에야 유천이는 귀국할 수 있었어요.” “아…….” “그 녀석, 혼자 미국에 떨어져서 힘들었는지, 방황을 많이 했어요. 거기서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우울증 치료도 받고, 슬럼가 애들이랑 어울리기도 하고…….” 이거였구나. 박유천의 트라우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던 그의 미국 생활. 나는 뒤늦게 깨달은 그의 상처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걔 싸움 되게 잘 해요. 혹시 알아요?” “본 적 있어요.” 화장실에서 애들 반쯤 죽여 놓은 거……. “그거 미국에 있을 때 익힌 걸 거예요.” 명희 씨는 정말 옛 이야기를 하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나도 씁쓸하게 따라 웃었다. 왠지 슬프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나는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해. “막 귀국했을 때는 말수도 부쩍 적어지고 갑자기 어른의 눈동자를 하고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그 녀석이 점점 달라지더라고요. 가끔 통화를 하면 조금씩 밝아지는 게 느껴질 정도. 준수 씨 얘기를 많이 했어요. 새로 짝이 된 녀석인데 입이 거칠다고, 그런데 그게 너무 귀엽다고, 또,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고, 되게 밝고 어린애 같다고. 그래서 준수라는 사람, 참 좋은 친구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명희 씨는 또 유쾌하게 웃었다. 나도 가만히 따라 웃었다. 이제부터 내가 아는 이야기인가? “저 준수 씨 질투한 거 알아요? 통화할 때마다 준수 씨 이름이 나오니까. 언제는 준수랑 뭘 했다, 주말엔 준수랑 뭐 할 거다 이러니까 막 내 것 빼앗긴 것 같고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끄덕끄덕. 저도 같은 기분 느낀 적 있어서 왠지 알 것 같아요. “알다시피 되게 무심한 녀석이잖아요. 어지간히도 친한가보다 했는데…….” 명희 씨는 말을 잠깐 끊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한국 들어와서 보니까 친한 게 아니라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그 녀석이 준수 씨를…….” 그녀의 선량하고 커다란 눈망울이 조금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카페의 조명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영롱하게 반짝인다. 미안하게도 그녀의 마음이 보인다. 언젠가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그녀의 눈동자도 같은 빛을 하고 있었다. “명희 씨.” “네?” “그 녀석…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 해서, 그냥 원래 그렇게 무심하고 난폭한 녀석이구나 했어요. 명희 씨 아니었으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지나갈 뻔 했어요.” “…….” “고마워요. 이야기 해줘서.” 우리는 마주보고 조금 웃었다. “음… 준수 씨, 호텔 일 벌써 알고 있었다면서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안한 듯, 멋쩍은 듯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준수 씨는 몰라도 되는 일이었는데. 믿을지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알아요, 이젠 믿을 수 있어요. 명희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박유천도 그리 나쁘지 않은 녀석이라는 거……. “그건 근데 왜 그런 거예요?” “아…….” 명희 씨는 또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짧은 침묵. 조심스레 움직임을 빨리 하는 심장. 이제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이야기……. “아, 정말 박유천 이 자식, 여러 사람 난감하게 하네요.” 그녀는 앞에 놓인 물을 들어 마시며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다. 우리는 또 다시 마주보며 웃었지만, 이어질 이야기가 결코 이렇게 밝은 분위기가 아닐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난감한 듯 한 미소와, 조심스레 흔들리는 눈동자, 가만히 깨무는 입술. 이윽고 그녀는 하아- 하고 무거운 한숨을 토해낸 후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이를 꾹 악물었다. “준수 씨.” “…….” “결론부터 얘기 할게요.” “…….” “다음 주에 저랑 유천이 결혼 발표 나요.” 역시……. “…미안해요. 이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썼는데.” 그녀의 침울한 목소리가 가만히 주위를 떠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목 어딘가에서 꽉 막힌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마 눈물이 걸려 있을 것이다. 흐르지 못할… 흘려선 안 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를 더 악물었다. “…….” “…….” 우물……. 내 안 어딘가에 있는 텅 빈 우물. 휘이잉 찬바람이 스쳐가자, 그것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 안에 그녀의 말이 툭 던져진 채 바닥을 모르고 추락해 간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 닿을 수 없는 너와 나의 절대적인 거리. “정말 미안해요…….” 왜 하필 우리에게……. + “유천이 모델일 하는 거 부모님이 반대 많이 하신 거 알죠?” 나는 이를 꾹 악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외부에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안 내키셨던 것 같아요. 당신들이 그렇게 힘들게 인정받았는데, 집안에서 유천이를 보면 또 무슨 생각을 할지 몰랐던 거죠. 하지만 유천이는 그걸 기어코 시작했고.” 그녀는 말을 잠깐 끊고 잠시 물을 마셨다.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비워져 갔다. 공허하고 창백한 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을 땐 하늘이 잔뜩 흐려 있었다. 눈이 올 것 같다. “저희 조부님이랑 박 회장님의 친분 덕분에 저희는 태어나기도 전에 약혼 상태였대요. 어렸을 때는 둘 다 약혼자라는 말에 그냥 웃으면서 장난처럼 넘어갔어요. 지금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친구로 지내왔고.” “…….” “요새 본사에서 패션 쪽으로 사업 확장하려는 거 아시죠? 그게 저희 아버지 회사에요. 박 회장님에게는 단번에 패션 사업 확장을 세간에 알릴 거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한 번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줄 사건이……. 그런데 때마침 방송되기 시작한 CF를 보시고 박 회장님은 저희가 약혼 상태라는 걸 떠올리신 거예요. 유천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생각해낸 거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이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용조용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략결혼. 그것도 박유천의 부모님과는 오래 전에 절연을 했다면서, 사업에 자신의 조카손자를 이용하려는 큰할아버지라니. “대기업 일가의 결혼식, 그 결혼으로 L사가 패션계로 사업을 확장한다. 굳이 광고를 내지 않아도 온통 매스컴에서 떠들어댈 테니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잖아요. 심지어 결혼 당사자가 모델이라니, 이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계획을 진행하던 중에, 또 하나 문제가 발생했어요. 박 회장님이 준수 씨의 존재를 아신 거죠. 사업 확장을 앞두고 있는데, 유천이의 애인이 남자라니, 이건 절대적으로 기업 이미지에 타격이 있을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더욱 저희 결혼을 서두르신 거예요.” 결국 박유천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던 것뿐인데 그게 제 무덤을 팠다는 소리다. “약혼 상태로도 충분하지 않냐, 우린 정말 사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저희는 호텔을 드나들었어요. 일부러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기도 했고요. 회사에서 손을 썼는지 기사화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조금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유천이가 강원도에 준수 씨와 함께 갔다는 걸 아시고는 모델이고 뭐고 전부 때려치우고 얌전히 식 올리고, 회사 일 배우라면서 당장 불러 올린 거예요.” “…….” “회장님은 좀 모질고 냉정한 구석이 있어요. 당신이 일으킨 회사라 애착도 크시고. 아마, 그 또래의 남자가 또 있었으면 꼭 유천이가 아니라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회장님께는 사건이 필요했던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너무 유천이를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내가 박유천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아니면 유천은 모델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는 뜻. 명희 씨와 결혼해서 회사의 목적을 이룬 후에는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의미……. 걸림돌……. 맞는 것 같다. 나는 늘 유천이 신경 써 주지 않으면 실수만 연발했고, 괜히 가만히 있는 녀석에게 시비를 걸어 괴롭히고, 성가시게 했으니까. 모든 상황이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던 것 같다. 이제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져간다. 재영과의 악연, 유천의 인기, 그리고 지독히도 나를 싫어하는 스토커. 이 모든 것이 박유천이 나를 강원도에 데려가게 하기 위해 미리 배치되었으며, 우린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기라도 하듯 그 길을 순진하게 따라 왔고, 결국 이렇게 예정된 결말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느껴왔던 끈질긴 운명의 방해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내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난 유천의 앞길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나는 목에 걸린 뭔가를 꿀꺽 삼켜 넘겼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도 위치가 변하지 않은 채 무겁게 나를 짓눌러댔다. 가슴이 답답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이 의외로 너무나 단순명쾌해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 “…….” 이제야 유천이 왜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박유천 내가 알면 걱정할 것들, 내가 알아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굳이 내게 말하지 않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내가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현실 앞에 나는 다만 무력하게 침묵했다. 달그락, 그녀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는 드디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조용한 가운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실을 모두 토해놓은 그녀는 왠지 홀가분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네, 들어갈게요.” 그녀는 짧게 전화를 끊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12시가 넘어 있다. 아, 재영 씨가 밖에서 기다릴 텐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준수 씨,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꽉 막힌 목에서는 이상한 목소리가 났다. 마치 내 마음처럼 먹먹하고 일그러진 목소리. 명희 씨는 주섬주섬 외투와 가방을 챙겨들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빌지를 집어 들었다. “아 참. 이거.” 불쑥 뭔가가 눈앞에 내밀어졌다. 낯익은 파일이다. 전에 내가 유천에게 선물했던 모델 자료들. 나는 파일을 받아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텔에 있을 때, 유천이가 이것만 밤새도록 뒤적였어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웃으면서요.” 나는 다시 이를 악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목에 걸린 눈물이 울컥 넘어온다. 막힌 가슴을 좀 내려치고 싶다. 우리 사랑은 늘 이랬다. 좋아도 좋다고 말하지 않고, 고마워도 고맙다는 표현을 안 했다. 항상 곁에 붙어있으면서도 대화는 장난에 가까웠고, 나는 박유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 허다했다. 우리는 왜 서로의 일을 남을 통해 알아야 되는 걸까? 유천아, 우리 좀 이상한 것 같지 않냐? “저, 명희 씨.” 목소리가 떨려나온다. 그녀는 말갛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그녀의 눈동자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는다……. “우리… 이상하지 않아요?” 친구를 사랑하잖아요. 이게 맞는 거예요? “준수 씨는 준수 씨의 사랑이 이상해요?” 그녀의 나지막한 물음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랑스러운 내 사랑. 나는 세상에 외칠 수도 있다. 박유천만 괜찮다면. “마찬가지에요.” 그녀는 깨끗하게 웃었다. 사람의 가슴 밑바닥에 도사린 저열한 감정까지 모두 날려버릴 듯이, 명료하고, 상쾌하게. 나는 혀끝까지 넘어온 눈물을 또 다시 꿀꺽 삼켜 넘기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명희 씨도 유천이 좋아하죠?” “…….” “언젠가부터 늘 궁금했어요. 왜 이렇게 우리에게 잘 해주나.” 원래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라서, 대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대가 없는 행동이란, 늘 사랑에서만 나오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잠시 피했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녀의 선량한 눈망울에는 금세 희미한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 밉지 않았어요?” “조금요.” “…….” “근데 금방 포기했어요. 유천이 마음에 내가 없다는 걸 아는데, 매달리면 나만 초라해지잖아요. 여자가 자존심이 있지.” “그래도 나라면 기를 쓰고 방해했을 거예요. 명색이 약혼녀잖아요.” 그래… 그녀는 이미 내게 자신이 약혼녀라고 밝혔었다.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나였을 뿐. “그냥… 방식의 차이일 뿐이에요.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유천이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억지를 부릴 수는 없잖아요. 내 옆에 잡아두고 말라죽어가는 걸 보느니 준수 씨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그게 내 방식이에요. 박유천을 사랑하는.”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당당한 자신감.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라면 절대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박유천만을 사랑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유천아, 넌 이런 사람을 옆에 두고 철없고 어린애 같던 나를 택했던 거니? 도대체 왜? 네 발목만 잡을 나를… 왜……? “어쨌거나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해요, 준수 씨.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으려고 애썼지만, 아직 우리가 너무 어리고 힘이 없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명희 씨. 명희 씨는 할 만큼 했어요. 지금까지 박유천을 지켜준 게 명희 씨였잖아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 녀석을 의심하고 괴롭혔는데. 난 정말 어린가 봐요. 시간이 늦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라며 그녀는 볼 위에 반짝이는 눈물 자국을 한손으로 닦아내고는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또각또각, 그녀가 천천히 카페를 나섰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문을 응시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이나 커피 잔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손에 든 파일에 시선이 닿았다. 팔락, 팔락, 나는 천천히 파일을 넘겼다. 이재영의 패션쇼 사진들, 사진 잘 찍히는 법, 포즈 잘 잡는 법, 감정을 표현해 내는 법. 박유천이 하고 싶어 하는 일, 그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 나는 이를 꾹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있잖아요, 명희 씨. 왜 이제야 깨닫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런 결심을 한 적이 있어요. 세상이 전부 등 돌려도 난 박유천의 편이 되어 주겠다고, 박유천이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문을 열고 카페를 나서며 핸드폰을 꺼내들어 정윤 형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절대로 이 사람에게만은 의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형? 저 준수요.” - 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네. 오랜만이에요.” - 연락 없어서 섭섭해서 죽을 뻔 했다. 웬일이야? “저, 부탁이 있어서요.” - 어? 뭔데? “유천이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주실 수 있으세요? 만날 수 있게 해주시면 더 좋고요.” - 박유천……? 그거 이제 해야 할까 봐요. 그게 내 사랑의 방식이니까……. + 눈부시게 맑은 날이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춥지만, 공기는 청명하고 신선했다. 나는 재영의 벤츠 안에서 긴장한 눈으로 L그룹의 본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늘씬하고 새것처럼 반짝이는 초고층 빌딩은 참으로 오만하게 발밑의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장이 되어 자꾸 손에 땀이 났다. 옷에 손을 슥슥 문지르며 작게 한숨을 쉬자, 재영이 흘깃 나를 응시한다. 시간을 확인했다. 2시 45분. 슬슬 전화가 올 때가 되었는데……. 초조함에 핸드폰을 넣어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드디어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내려다 본 액정에는 선명하게 정윤 형의 이름이 떠 있었다. “네, 형.” - 지금 도착했어. 로비로 와. “네.” 나는 전화를 끊으며 흘깃 재영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선글라스 너머로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착했대?” “네. 다녀올게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하얗게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칼날처럼 예리한 날씨에 금세 볼이 떨어질 듯 시려왔다. 돌아서자 본사 건물이 까마득히 솟아 있다. 위압적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괜히 주눅이 든다. “꼬맹아.” 문득 들려온 재영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리 와봐.” 그가 운전석 쪽으로 나를 불렀다. 타박타박, 몇 걸음 걸어 그에게 다가가자 손가락을 까닥이며 허리를 숙여 보란다.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내게 자신의 선글라스를 씌워주었다. 허공에서 마주친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청명한 햇살에 투명하게 빛났다. 아름다운 얼굴……. “명색이 007작전인데, 특수요원 흉내는 내야 할 것 아냐?” 눈 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는 그의 미소에는 목이 메어 왔다. 그의 이 행동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성공 기원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명희 씨의 눈물과 그의 미소는 같은 종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나는 죽으면 아마 천국엔 못 갈 거다. 이 착한 사람들을 멋대로 휘두르고 괴롭게 하니까. 박유천도 그렇고, 정윤 형도 그렇고, 명희 씨, 재영 씨 모두 다……. “…고마워요.” 눈물을 삼키며 어렵게 뱉어낸 한 마디에 그는 또 싱긋 웃었다. “얼른 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지이잉 창문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애써 그를 뒤로 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이 내 방식대로 유천을 지키기 위한 길이니까. + 거대한 회전문을 밀고 들어서자 금세 훈훈한 기운이 느껴졌다. 멀리 말끔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정윤 형이 보였다. 매니저 일을 그만두고 본사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더니 제법 젊은 사업가의 티가 난다. 이제 박유천도 저렇게 되는 건가? 멋있겠다……. 금세 형에게 박유천의 수트 차림을 겹쳐 보고는 슬며시 웃어 버렸다. 이런 순간에도 철딱서니 없이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나는 아직도 정신 차리려면 멀었다. “오랜만이다.” “네.” “이뻐졌네?” “형도요.” “넉살도 늘었네. 순진한 꼬맹이였는데.” 형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박유천도 그렇고, 재영 씨도 그렇고 나는 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꼬맹이 소리만 듣는 건지 모르겠다. 나 정말 꼬맹인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괜히 자괴감이 든다. “가자.” 형은 비싸 보이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형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현관 로비의 엘리베이터를 두고 형은 건물 구석으로 자꾸자꾸 들어갔다. 이윽고 우리 앞에 최상층까지 한 번에 가는 임원 및 VIP용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 앞 사무용 책상에 말단 비서로 보이는 여직원이 꾸벅 인사를 해오기에 나도 꾸벅 맞절을 해버렸다. 옆에서 형이 쿡쿡 웃는 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아, 쪽팔려. 내가 언제 이런 데를 와 봤어야지. 고개를 푹 숙이고 괜히 머리를 매만졌다. [문이 열립니다] 성큼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정윤 형을 따라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형이 품에서 카드 같은 것을 꺼내 인식기에 갖다 대자 비로소 최상층의 버튼이 눌러진다. 오아, 신기하다. 나는 선글라스를 조금 내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선글라스는 뭐야?” 형이 나를 보는 시선에도 신기함이 가득하다. 하긴, 내가 언제 이런 걸 쓰고 다녔냐 말이다. 나는 그제야 얼른 선글라스를 올려 쓰면서 멋쩍게 웃었다. “명색이 007작전 아니냐면서 누가 씌워줬어요.” “재미있는 사람이네. 이거 비싼 건데. 누구야, 그 사람이?” 비싼 건가? 난 가격 따위는 모르니까, 뭐. “아… 돈 많고 좀 싸가지 없는데 귀여운 사람이 하나 있어요.” 형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매니저 일은 할만 해?” “그냥 뭐……. 형은요?” “나야, 뭐. 밑바닥부터 꾸역꾸역 올라가느라 고생이지.” 형은 또 싱긋 웃는다. 문득 사자 이야기가 생각난다.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살아남는 놈만 데려다 키운다는 냉혹한 이야기. 일을 하고 싶으면 바닥부터 배우며 자력으로 올라와라. 능력 없는 놈은 거두지 않는다. 박 회장님의 방침이란다. 명희 씨가 모질고 냉정한 사업가라더니 정말 맞는 것 같다. 그런 사람에게 걸렸으니 박유천은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논리로 밀어붙이는 사람에게 어리광은 통하지 않으니까……. 괜히 또 침울해진다. 지금 박유천이 상대하고 있는 박 회장님에 비해, 유천은 참 어리광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유천이 가끔 짜증을 내서 싸운 적도 있지만, 그래도 대체로 내 심술이나 어리광을 그는 논리가 아닌 귀여운 투정쯤으로 웃으며 받아주었던 것 같다. “…….” 엘리베이터 안에 고요히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그리고 문득 깨달은 어떤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더 큰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박유천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마음의 크기를 절대 수치로 측정해낼 수는 없지만, 더 아프고, 더 참고, 더 힘들었던 사람은 어쩌면…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코끝이 찡해온다.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도 어리석은 존재일까? 곁에 있을 때는 모르다가, 혼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것도 하필 이런 때에,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울지 말자, 김준수. 이제는 받아줄 박유천도 없어. 나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 층수를 확인했다. 숫자가 무식하게도 빨리 불어난다. 귀가 먹먹하지도 않은데 벌써 꼭대기에 다 와간다. 이제야 내가 여기 왜 왔는지가 생각나서 얼굴이 굳어온다. 서서히 심장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최상층에 도착했다는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정윤 형은 좌우를 살피더니 근처의 화분 하나를 들어다가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끼웠다. 문이 계속 안내멘트를 쏟아내며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3시 2분 전. 앞으로 2분…….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정윤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 역시 긴장한 눈빛이었지만 괜찮다는 듯 내게 싱긋 웃어보였다. “다녀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단 박유천만 생각하기로 했다. 정윤 형은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나는 천천히 회장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고급스러운 부조가 새겨진 거대한 목조 문은 이 건물만큼 위압적이다. 나는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축이며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3시가 지났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벌써 나간 건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손에 배어 나온 땀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그때였다. 달칵. 형이 알려준 회장실 문의 손잡이가 돌아갔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서둘러 모퉁이 뒤에 숨었다. 문이 열렸다. 회색머리. 현 실장이다. 뒤를 이어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조금씩 소리가 커진다. 유천일까? 아니면 박 회장님? 나는 긴장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뚫어져라 문을 응시했다. 드디어 누군가가 성큼 문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아…….” 나는 멍하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멈췄다. 박유천이다……. 언젠가처럼 세련된 짙은 회색 수트와 진홍색 넥타이. 그의 정결한 차림새와 낯익은 무심한 표정에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이 날 것 같다. 말랐구나, 너……. 그의 파리한 안색에서 우리가 떨어져 있던 지난 이 주일을 본다. 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당연한 듯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고통의 시간들. 떨어져 있었으되, 지독히도 가까이 맞닿아 오히려 상대를 볼 수 없었던 불면의 밤들……. 그가 보냈을 시간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안도감마저 든 나는 정말 못 되고 이기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회장님 나가십니다. 차 준비해 주세요.” 현 실장의 통화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바보, 지금이야! 뭘 정신 팔고 있어! 그제야 나는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 모든 것, 박유천을 향해서……! “어?” 현 실장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유천의 놀란 눈이 나를 응시한다. 개새끼, 넌 탈출 후에 보자. 나는 그대로 유천의 손을 낚아채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유천 씨!” 당황한 현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탁탁탁탁, 텅 빈 복도를 질주하는 우리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숨이 막힌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박유천이어서! 뒤에서 현 실장의 호출을 받은 경호직원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천과 짧게 눈이 마주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내가 보인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앗……!” 유천이 나를 앞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몸이 홱 앞으로 끌려 나갔다. “어디?” “임원용, 하아, 엘리베이터.” 유천은 짧게 물었고, 나도 짧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지만 멈추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고,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하지만 맞잡은 그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체온에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그가 내 곁에 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본능적으로 유천과의 거리를 느낀다. “빨리 와!” 모퉁이 너머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있는 정윤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천이 나를 흘깃 돌아보았다. 사정 청취는 나중에 하지 않으련?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저 싱긋 웃어 보였다. 너 때문에 네 꼬맹이가 거짓말쟁이에 여우가 다 됐다, 박유천. 모퉁이를 돌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튼을 누르고 있는 정윤 형의 긴장된 표정이 보였다.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요란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어 벽에 부딪혀 멈췄다. 정윤 형이 닫힘 버튼을 꾹 누른 순간 모퉁이를 도는 추격자들이 보였다.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현 실장의 굳은 표정이 점점 가까워졌다. 탁탁탁탁, 가까워지는 발소리! ‘멈춰!’라는 현 실장의 외침!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닫히고 있는 문! 제발……!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탕! 누군가가 문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출렁하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세한 기계음. 조용히 유천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맞잡은 손은 땀이 배어나와 흥건히 젖어 있다. “성공.” 나직한 정윤 형의 목소리. 그제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환히 웃는 정윤 형의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고개를 돌렸을 때……. 박유천이 서 있었다. 파리한 얼굴로, 굳게 다문 입술로, 그리움이 담긴 눈동자로, 뭔가를 삼켜 참는 듯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로, 희미하게 미소가 담긴 표정으로…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금세 눈시울이 화끈해졌다. 얼른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빡였다. 유천이 내 손을 꾹 힘주어 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오랜만이네요, 형.” “어, 오랜만이야.” 시선을 피한 나를 사이에 둔 채 둘은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라고, 잘 지냈냐고,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하냐고, 유천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핸드폰을 꺼내 재영의 번호를 꾹 눌렀을 뿐이었다. - 어. “지금 나가요.” - OK. 진짜 작전 암호라도 되는 양, 재영과 짧게 통화를 마치자 엘리베이터는 2층에서 정지했다. 나는 말없이 유천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천과 내가 문을 나서자 정윤 형은 1층부터 지하 모든 층의 버튼을 눌러놓고서야 비로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우리가 어디에서 내렸는지 모르게 하려는 것 같다. 뭐야, 이 사람, 이런 일 왜 이렇게 능숙해? 형의 전직을 의심하며 서둘러 비상계단을 통해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그때 인 이어로 말을 주고받던 로비의 경호직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천아.” “어.” “문밖에 재영 씨 차 있어. 형, 은회색 벤츠요.” “OK.” 내 말이 끝나자마자 유천이 다시 내 손을 꽉 쥐어왔다. 갑자기 경호직원들의 움직임이 민첩해졌다. 몇 명이 우리 쪽으로 온다. 심장이 또 움직임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준수야.” “응.” “뛰어!” 유천의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몸이 홱 딸려 나갔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모두 떨쳐낼 듯, 다시 헤어지게 되면 죽어버리기라도 할 듯, 가슴이 새하얗게 바라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정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잡아!” 누군가의 외침에 경비원 아저씨가 어설프게 팔을 벌려 길을 막았다. 유천은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내던지며 아저씨를 밀쳐버리고는 그대로 문에 어깨를 부딪쳤다. 문이 벌컥 열리자 순간적으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쳐 들어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뒤에서 계속해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부아아아아앙. 앞에 보이는 재영의 벤츠에서 요란한 공회전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앞좌석의 창문을 모두 열어젖힌 채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천이 뒷좌석 문을 벌컥 열더니 쑤셔 넣듯 나를 밀어 넣고는 자신도 몸을 실었다. 탕! 앞좌석에 오른 정윤 형이 문을 닫기가 무섭게 재영은 액셀을 콱 밟으며 급발진을 시도했다. 부우우우우웅. 벤츠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RPM과 속도계가 수직상승하면서 관성의 법칙으로 인해 저절로 몸이 털썩 등받이에 기대어졌다. 얼핏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우리를 쫓던 경호직원들이 몇 대의 검은 차에 나누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빠르기도 하다. 연락 체계가 잘 잡혀 있는 모양이다. 내가 멍하니 감탄하고 있을 때, 재영도 그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벨트 매!” 재영의 목소리에 허겁지겁 벨트를 찾아 쥐었다. 익히 그의 운전습관을 알고 있었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끼이이이익! 도로 합류 지점에서 재영은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그대로 확 핸들을 꺾어 얼마 되지도 않는 틈새로 험악하게 끼어들기를 시도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벤츠는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슬며시 눈을 떴을 때, 앞좌석에 오른 정윤 형은 사정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처음 그의 차를 탔던 날의 나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유천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가만히 끌어다 쥐었다. 옆얼굴에 그의 시선이 따갑게 와서 박혔다. 나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창밖만 응시할 뿐이었다. 대탈주. 먼 훗날 우리는 이 사건을 그렇게 불렀다. + 기묘한 축하 파티다. 나는 정신이 얼떨떨하기만 한데, 정작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신이 났다. 우리는 지금 명희 씨네 별장에 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을 잔뜩 사들고 도착한 명희 씨는 두 남자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왠지 이 상황이 굉장히 어처구니없이 느껴진다. 난 정말 뻔뻔하기도 하다. 어떻게 연인의 탈주를,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할 수 있었을까? 이제 보니,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다. 괜히 쓴웃음이 지어진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다. 그래도 난 행운아다. 박유천을 연인으로 가졌었고, 주위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래, 그걸로 됐다……. 흘깃 시계를 봤다. 오후 8시. 앞으로 네 시간……. 오늘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전부 정리가 될 거다. 아마도… 그렇게 될 거라 믿는다. 세 사람에게는 조금 있다가 확실히 사과를 할 거니까, 그때까지는 계속 뻔뻔한 척을 할 생각이다. “자, 탈출 성공을 축하하며, 건배!” 재영의 외침에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내 손을 끌어다가 억지로 건배를 하는 정윤 형은 애써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술이 들어가니 세 사람 모두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불안함을 지우기 위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하긴, 이건 박 회장님께 정면 대결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뭐, 아직 타이밍이 아니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다. 모든 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야, 너 뭐해. 빨리 안 마셔?” 재영이 내 잔을 가리키기에 얼른 생글생글 웃으며 잔을 들었다. 웃어야 한다, 이제 혼자서도 울지 말자고 결심했으니까. 박유천에게 우는 걸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근데요, 저 되게 많이 마셨는데, 왜 자꾸 줘요?” “그래야 박유천이 빨리 데리고 올라가지. 너는 기회를 만들어 줘도 투덜대냐? 쪼그만 게.” 재영의 말투가 변했다. 마치 친한 동생에게 하는 듯이, 그렇게……. 정을 떼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고 으항항 웃어보였다. 그러다 옆에 앉은 유천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것이, 살이 쪽 빠져서 아파 보인다. 나는 멋쩍게 쭈뼛쭈뼛 웃으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우리는 이 별장에 와서도 한 마디도 안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우리를 얇게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 고작 2주일 떨어져 있었는데, 유천이 낯설다. 아마도 현실의 무게를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는 재영 씨는 왜 안 마셔요!” 나는 점점 풀려가는 혀로 재영에게 시비를 걸었다. “내가 너랑 속도 맞출 나이냐?” “와씨,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와 나의 말장난에 정윤 형과 명희 씨가 웃는다. 흘깃 곁눈질 하자 유천도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아니, 보지 않아도 안다. 그가 계속 나만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리고 그 시선에 실린 감정이 초 단위로 달라진다는 것도. 얼굴에 얼마나 따갑게 그의 시선이 와서 박히는지 오히려 내가 유천을 바라볼 수도 없을 정도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참 난감하다. “자, 준수, 한 잔 더.” 정윤 형이 잔을 채워준다. 이 사람들은 우리 분위기를 눈치 채고 나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술을 먹이고 있다. 덕분에 나는 슬슬 취기가 올라 얼굴이 달아오르는 중이다. 술기운을 빌리면 좀 편해지려나? 정윤 형이 따라준 술을 또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다가 물을 쏟았다. “어, 준수 취했다.” “뭐해, 박유천 씨? 빨리 데리고 올라가.” 갑자기 재영과 정윤 형이 유천과 나를 일으켜서는 2층으로 떠민다. 우리는 반 강제로 그들에게 떠밀려 2층 계단을 올랐다. “뭐야, 둘이 사귀는 거 맞아? 왜 이렇게 어색해? 자꾸 이런 식이면 준수 내가 다시 데려가는 수가 있어?” 정윤 형의 짓궂은 말투에 유천의 표정이 굳었다. 으항항 웃음을 터뜨렸더니 유천이 싸늘히 나를 노려본다. 그것이 또 우스워 허리까지 젖히고 웃다가 계단 아래로 구를 뻔했다. 얼른 내 손목을 잡아채서 자신에게 바짝 당겨 안는 유천의 손길에 술기운보다 더 열이 오른다. 나는 쭈뼛쭈뼛 웃으며 유천의 가슴팍을 조금 밀어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라는 유천의 눈빛에는 여전히 찔끔해서 저항하지 못했다. “우린 아래층에서 잘 테니까, 내일 아침에 보자고. 잘 자.” “소리 내도 괜찮아, 못들은 척 할게.” 싱글싱글 웃는 두 사람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어느 새 친해져서 죽이 척척 맞는다. 정말 이 두 형님들 다 속도 없다. 명희 씨도 그렇고. 이 착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난 정말 나쁜 놈이다. 물끄러미 재영과 정윤 형을 바라보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꼬맹아, 이거 선물. 얼른 들어가.” “네?” 재영이 뭔가 작은 상자를 내 손에 쥐어주더니 나를 유천이 들어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달칵, 문이 닫혔다. 그리고 나는 제자리에 붙박여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 사이로 마지막에 마주친 재영의 씁쓸한 미소가 가슴에 쿡 와서 박혔기 때문이다. 저 사람에게 과연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래도 그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할 것 같다……. “뭐야?” “으, 응?” 그리웠던 유천의 목소리. 그제야 나는 돌아서며 재영이 쥐어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사각형의……. “……!” 나는 흠칫 하여 상자를 놓치고 말았다. 유천의 눈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상자로 향했다. 그 안에 들어 있을 내용물을 깨닫자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유천이 다가와서 콘돔 상자를 주워들었다. 나는 앞에 선 유천과 눈도 못 마주치고 달아오른 얼굴로 뒤로 조금 물러났다. 아, 씨발……. 차마 밖으로는 뱉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욕설을 삭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안 본지 2주나 지났는데, 내 병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박유천만 가까이 오면 자동으로 온 몸이 굳고 빨개지는 병. 유천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당황해?” 미친놈아, 너는 2주 만에 처음 본 애인한테 할 소리가 그거냐? 술기운에 박유천 접근병까지 더해져 나는 얼굴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채 유천을 노려보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쓴 웃음을 짓기에 재영을 조금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당장 취소다. 어쩌면 이렇게 짓궂은지. 내 주위엔 나를 괴롭히고 즐거워하는 인물들만 수두룩한 것이 틀림없다. 저기 저 내 애인이라는 박유천을 비롯해서 모두 다! 주먹을 꾹 쥐고 복수하겠다는 열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갑자기 유천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의 파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 숨이 턱 막힌다. “이사님이 안 먹였냐? 왜 이렇게 말랐어?” 내 턱을 잡고 이쪽저쪽으로 돌려보는 유천의 손길이 다정하다. “웃기시네. 그러는 자기는 멀쩡한 줄 아나? 얼마나 병신같이 굴었으면 밥도 못 얻어먹었냐?” 마음과는 달리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이렇게 까칠하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더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는 걸. 좋으면 좋을수록 더 삐딱하게 굴던 우리는 이렇게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몸 관리한 거거든?” “근육 다 빠졌구만, 무슨? 꿈에서 했냐?” “현실에서도 하고, 꿈에서도 하고. 근데 넌 어떻게 꿈에 다섯 번밖에 안 나오냐? 나 안 보고 싶었어?” “…….” 그의 나지막이 이어진 말에 말문이 막힌다. 나는 멍하니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유천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다. 나 역시 꿈에서 그를 보고 깨어나 숨죽여 울었던 밤들이 떠올라 결국 눈물이 고이고 만다. 지난 2주일은 생각보다 잔혹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재영과 웃고 떠들면서도 나는 늘 반 이상 밥을 남겼고, 멍하니 유천의 핸드폰에 찍혀 있는 우리의 마지막 사진을 보며 정신을 놓기도 했다. “우리 토끼 또 우네.” 유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나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나는 서둘러 그의 옷자락에 눈 밑을 찍어 눈물을 없애며 톡 쏘아붙였다. “안 울거든?” “눈 빨개졌거든?” “아니거든?” “코도 빨개졌거든?” “아니거든요?” “목소리도 떨리거든요?” “개새끼.” 토닥토닥 말싸움을 하다가 내가 욕설을 퍼붓자 유천은 쿡쿡 웃으며 나를 힘주어 안는다. 그리웠던 그의 체온. 나는 유천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를 콱 물어버렸다. “아!” 유천이 짧게 소리쳤지만, 나는 더 세게 어깨를 깨물었다. 제법 아팠을 텐데 유천은 피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유천의 호흡이 느껴진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로를 안고 체온을 나눴다. 이 시간을 영원히……. 간절한 바람과 함께 나는 유천의 향기와, 따스한 숨결과, 맞닿은 체온을 기억 속에 남겼다. 유천의 손이 등을 가만히 쓸고 토닥였다. 내 날개 뼈 언저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럽다. “토끼 살 빠진 거 봐. 여기 날개 생기겠다.” 유천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도 그의 재킷 단추를 풀어내고 안으로 손을 넣어 등을 더듬기 시작했다. 갈비뼈가 다 드러난 몸은 달그락달그락 소리라도 날 것 같다. “너는 여기 빨래해도 되겠다.” “너희 집에 빨래판 없잖아. 선물이야.” “줘도 안 가져.”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더듬으며 킥킥 댔다. 꿈이 아닌가 싶다. 내 앞에 박유천이 있어서 이렇게 만질 수 있다니.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이거 되게 비싸.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미친놈, 웃기고 있다.” “야.” “뭐?” “서방님한테 미친놈이 뭐냐? 어?” 갑자기 유천이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으항항! 하지 마!” 나는 몸을 뒤틀며 유천을 밀어내버렸다. 하지만 유천은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또 간지럼을 태운다. “하지 말라고!” “미안, 청개구리라.” “그럼 해!” “알았어.” “아씨 뭐야!” “하라며?” “으항항항! 저리 꺼져, 또라이야!” 계속해서 간지럼을 태우는 유천을 급하게 밀어내고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유천이 문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밖으로는 도망갈 수 없게 되자, 나는 다시 안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유천을 바라보니 한 쪽 입꼬리만 올려서 피식 웃는다. 개새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나는 그의 비웃음에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가만히 눈치를 봤다. 유천이 한 걸음 다가왔다. 서둘러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씨익 웃는 박유천의 미소에 움찔 몸이 굳는다. 그리고… 갑자기 유천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아!”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거기 안 서냐, 꼬맹이!” “개새끼, 맨날 나만 괴롭혀!” “그럼 너 말고 누가 또 있어?” 침대를 뛰어넘고, 소파를 뛰어넘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어이, 꼬맹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김에, 말로 할 때 잡히는 게 어때?” “말로 안 하면 어쩔 건데, 미친놈아.” “글쎄, 몸으로?” “변태새끼, 못 본 새에 스킬이 늘었어!” “네가 옆에 없으니까 할 게 상상밖에 없더라고!” 소파를 사이에 두고 빙빙 돌며 신경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유천이 소파를 덥석 밟고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침대 쪽으로 도주로를 변경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대에 냉큼 뛰어올라 반대쪽으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으앗!” 유천에게 덥석 뒷덜미가 잡혀서 침대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유천의 간지럼 공격이 이어졌다. “으아-, 하지 마! 미친 변태야!” “말 예쁘게 하라고 했지? 오늘 버릇 좀 고쳐 볼까?”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지만 유천은 놔주지 않았다. 유천이 내 옷을 마구 걷어 올리며 맨살을 간질이자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것이 아주 미치겠다. 나는 더 소리를 높여 고래고래 악을 써댔고, 유천은 시끄럽다고 더 간지럼을 태웠다. 이 새끼는 못 본 사이에 고문 기술을 배워 온 모양이다. 그 회사 사실은 특수요원 키워내는 곳이었던가? 이 따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힘껏 유천을 밀어내자 내 손목을 틀어쥐고는 침대에 꽉 누르더니 또 간지럼이다. “으항항, 하, 하지 말라고!” “잘못했다고 해.” “씨발, 내가 잘못한 게 있어야 잘못했다고 하지!” “이것 봐, 또 했네.” “내가 언제!” “욕하지 말랬다?” “아씨, 알았어!” “아씨는 떼고 말하라고.” “아, 알았다고!” 너무 웃어서 눈물이 고인다. 배가 아파서 웃지도 못할 지경이다. 숨이 차서 헐떡이며 대답을 한 순간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눈이 동그래진 정윤 형과 재영과 명희 씨가 보인다. 그제야 우리는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 “…….” 뭐지? 참 분위기가 이상하다. 사람은 다섯인데 쥐죽은 듯 정적이 흐른다. “뭐…하냐, 늬들?” 재영의 조심스러운 질문. “보시다시피.” 유천은 내 위에서 내 손목을 움켜쥔 채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명희 씨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으아! 지금 이 상황 뭐냐고! 나는 박유천에게 손목이 잡혀 침대에 쓰러져 있고, 심지어 옷이 가슴 언저리까지 걷혀 올라간 상태. 발버둥을 쳐서 머리도, 옷도 잔뜩 흐트러져 있을 것이고, 숨까지 헐떡이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나는 얼른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웃다 흘린 눈물을 시트에 대충 닦으며 꼼지락거려 유천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하자, 유천은 더 꽉 힘주어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난 또 싸우는 줄 알았지. 미안, 계속 해.” 재영의 말에 정윤 형이 풉, 하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문이 닫혔다.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와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덮치는 분위기인데? 라는 누군가의 말에 얼굴에 피가 잔뜩 몰려 터질 것 같다. “…좀 놔.” 나는 또 손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몸싸움을 벌이고 투닥거린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다. 유천이 쿡쿡 웃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얼굴이 더 달아오른다. “토마토 됐다.” “시끄러.” “맛있겠다.” “비키라고.” “앙.”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버렸다. 유천이 내 볼을 정말 토마토 베어 먹듯 물어왔기 때문이다. 뜨거운 그의 체온과 촉, 하고 가볍게 닿는 입술. 그리고 촉, 촉, 조금씩 움직여 내 입술 위로……. 유천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대고 있었다. 몸부림을 치느라 세차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속도를 줄였다. 달아올랐던 몸도 점차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곱게 감긴 유천의 속눈썹과 단아한 이마에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온다. 내 사랑, 내 연인, My Beloved……. 아… 우린 이렇게 서로를 담고 있는데……. 나는 멍하니 유천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유천의 감겼던 눈이 반짝 열렸다. 까맣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본다. 그리고 그의 손이 올라와서 내 눈 위에 덮였다. 커다란 손에 덮이니 금세 시야가 캄캄하다.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유천의 입술이 살짝 떨어져나갔다가 다시 각도를 조금 틀어 맞닿아왔다. 그의 입술이 열리고 부드러운 혀가 내 입술 위를 할짝거렸다. 나는 입술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조심스럽게 그의 혀가 안으로 파고든다. 유천이 손목을 놓아주기에 나는 그의 목에 천천히 팔을 감았다. 우리는 그렇게 입맞춤을 시작했다. 끝이 예정된 짧은 행복. 하지만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이……. + 맞닿았던 입술이 가볍게 멀어졌다. 유천은 그대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담겨 있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비치고 있어서 왠지 민망하다. 얼른 그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나 없이 잘 지냈어?” 내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기며 유천이 물어왔다. “빨리도 묻는다.” 하하, 유천은 그 낮고 건조하고 섹시한 목소리로 작게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목소리. 너무 좋아서 금세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만난 지 다섯 시간이나 지났는데 서로의 안부도 묻지 못했다.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어 선뜻 말을 꺼내는 것 자체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고작 2주일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 “넌 잘 지냈어?” 잘 지내지 못했다는 건 얼굴만 봐도 알지만. “어, 회장님 댁에 사니까 밥 해주는 사람도 있고 좋더라.” “개새끼.” 뾰로통하게 노려보았더니 쪽, 하고 입을 맞춘다. 금세 얼굴이 달아올라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려주었다. 아파, 라며 유천은 또 엄살이다.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한 대 더 때려주었다. 차라리 혀가 오가는 키스라면 눈을 감아버리니까 민망하다는 생각이 덜 드는데, 이런 사소한 스킨십은 정말 당황스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 “또 토마토.” “먹지 마.”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쿡쿡 웃는다. 유천은 또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나는 어깨를 조금 웅크린 채 그의 키스를 받았다. 이상하다. 유천의 입술이 닿는 것이 낯설다. 시간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란 것은 참으로 엄청난 힘을 가졌다. 서로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의 7년을 고작 2주일 만에 어색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아마도 우리 앞에 놓인 무거운 현실이 기억의 마모를 촉진시켰을 것이다. 인간은 저도 모르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피하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연약한 생물이니까. “아픈 데는 없고?” 유천이 또 머리를 넘겨주며 물어왔다. 그는 시선을 피해 내 머리카락만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천의 손이 닿았던 머리카락을 조금 갉작거렸다. “입원했었잖아.” “금방 퇴원했어.” “너 손에 동상도 걸렸었는데.” “금방 나았어.”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싱긋 웃었다. “튼튼한 토끼네.” 그는 또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긴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 희미한 입가의 미소……. 동상이 걸렸다는 것도 알고 있다니, 날 산장에서 발견한 게 유천이 맞구나 싶어 또 감정이 복받친다. “…넌 그날 산에 어떻게 올라 왔어?” “잘.” “죽는다.”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유천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나름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저 따위 대답이다. 유천은 또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쿡쿡 웃었다. “진짜야, 잘 갔어. 내가 좀 뭐든지 다 잘 하잖아.” “또 지 자랑이야.” “잘난 서방님이라 좋지 않냐?” “웃겨. 네가 무슨 슈퍼맨이냐? 거기가 어디라고 기어올라 와.” 그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져 오기에 일부러 톡톡 쏘아붙였다. 말하자면 그날 우리는, 둘 다 죽음과 싸웠던 거다. “야.” “뭐.” “마눌 구하겠다고, 어? 목숨 걸고 산 탔는데, ‘기어올라 와’가 뭐냐?” “…….” 유천이 서운한 표정으로 투덜댄다. 그래, 그건 내가 실수한 것 같다. 나는 얼른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에 와서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119가 출동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오는 날이었다. 말처럼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사투(死鬪). 유천은 목숨을 걸고 눈과 싸우며 산을 올랐을 것이다. 날 위해서……. “잘못했지?” “…응.” “잘못했으니까 뽀뽀.” 입술을 내밀기에 순순히 쪽, 입을 맞췄다. “말 잘 듣네.” 쿡쿡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데 또 내가 한 짓이 민망해서 미칠 것 같다. 얼굴이 슬그머니 달아오르기에 시선을 피했더니 턱을 잡아서는 다시 자신을 보게 한다. 너무 창피해서 눈을 꽉 감아버렸다. 유천은 나를 끌어안고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내 얼굴은 더 달아오르고 말았다. “웃지 마!” 한참이나 웃기에 그만 웃으라고 좀 때렸다. 유천은 아프다고 또 엄살을 피워댔고, 내게 몇 대를 더 맞고서야 웃음을 멈췄다. 웃음을 멈추고도 유천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유천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왜 나는 저걸 지금까지 못 봤을까? 저렇게 크고, 강하게 외치고 있는데……. 쭈뼛쭈뼛 웃으며 눈을 피했다. 하지만 얼굴에 계속 유천의 시선이 느껴진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의 손이 다시 다가오더니 머리를 쓸어 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내 어깨를 당겨 안기에 나도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안겼다. 쌉쌀하게 불가리 블랙 향이 번져왔다. 바스락거리는 그의 셔츠 소리가 내 마음에서 나는 소리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어쩌지, 유천아? 우리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려앉은 침묵에 목이 멘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서 서글프다. 명희 씨와의 결혼 얘기는 아직도 꺼내지 못했다. 유천도, 나도, 선뜻 입을 열 수 없는 큰일임이 분명하다. 아마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박유천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싸움이나 벌이고 있는 것이다. “준수야.” 오랜 침묵 끝에 불쑥 들려온 유천의 나지막한 부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가만히 내 어깨를 쓸어내리는 유천의 몸짓이 불안하다. 얼핏 눈에 들어온 씁쓸한 그의 미소에 심장이 움직임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그 집에 있을 때는…….” 유천이 말끝을 흐리기에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유천은 여전히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만지작거리고 있다. “무슨 집?”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이사님 집.” “이사님 집 진짜 좋아. 가봤어? 집이 무슨 초등학교 운동장만 하다. 엄청 넓어.” 나는 조금 긴장한 채 애써 쾌활하게 웃었다. 유천은 또 나를 보며 가만히 웃었다. 그의 미소가 왠지 서글퍼 보여 숨을 참으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왠지 알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유천과 내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던 계기가 되었던 스토커 사건. “…그 집에 있을 때는 아무 일 없었지?” “…….” 유천의 느릿한 질문에 숨이 막힌다……. “이상한 사진 같은 거, 새, 편지…같은 거.”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유천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작은 움직임, 그와 닿아 있는 몸에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 희미하게 앞머리를 흔드는 유천의 따스한 숨결과 이어지는 나직한 한숨……. “나란 소리네…….” 유천아……. “내가 널 죽일 뻔 했다는 거네…….” 가슴 어딘가가 서늘하고 아릿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콜록 하고 기침을 내뱉고 나서야 비로소 날숨이 새어나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나는 차마 한 마디도 해주지 못했다. 침울한 침묵이 무겁게 떠돌았다. 나는 유천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천도 내 어깨를 조금 더 당겨 안고는 토닥였다. 그의 가슴에 가만히 볼을 대고 조용히 뛰는 심장을 느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뛰던 심장. 내게 갈라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그의 마음, 박유천의 한결같던 사랑……. 유천아, 이거 내가 가져도 되지? 내 것이니까… 영원히 내가 가져도 되는 거지? 나는 호텔에서 유천이 했던 것처럼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 규칙적인 박동이 느껴진다. 이 안에 내가 산다. 그리고 내 안에는 네가 산다. 우린 어느새 심장을 바꿔 살고 있다……. “왜 울어.” 결국 울고 말았다. 유천의 체온이 너무 따뜻해서,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고, 그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많이 힘들었어? 미안해, 울지 마……. 유천은 나직이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숨죽여 훌쩍이면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그의 향기를 기억하고, 체온과 목소리와 따스한 눈빛들을, 가슴에 담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너무 어리고, 무력해서……. 유천은 내 눈물을 닦아내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짭짜름한 입술. 문득 그의 보드라운 귀가 보였다. 하얗고, 매끈하고, 깨끗한 귀. “유천아.” “어?” “너도 귀 뚫자.” 나는 붉어진 눈으로 그의 귀를 응시하며 만지작거렸다. “귀?”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어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래.” 유천은 가만히 웃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앉아서 귀걸이 하나를 빼냈다. 선물의 의미는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 “아, 이거 소독해야 하는데.” “안 죽어, 그냥 해.” 이런 순간에도 유천은 의연하다.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봤더니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미소를 짓는다. 우린 이렇게 다르다. 항상 유천에게 어린애처럼 굴었던 나인데, 그는 질려하지도 않고 이렇게 나를 감싸 안는다. 유천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투덜댔던 것이 바로 지난달인데, 정작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은 나였다는 걸, 나는 이제야 절실히 깨닫는다. “자, 뚫어.” 내가 멍하니 있자, 유천은 자신의 귀에 손수 내 손을 끌어다 놓았다. 하지만 막상 그 하얗고 말랑한 살 위에 대고 누르려니, 힘이 안 들어간다. 굉장히 아플 텐데……. 괜스레 마음이 약해져서 힘을 줄 수가 없다. 나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왜?” “응?” 문득 시선을 돌리자 유천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플까 봐?” “응.” “너 많이 아팠어?” “응.” 유천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았다. 그의 미소에 괜히 또 눈물이 난다. 나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준수야.” 묘하게 어른스러운 목소리.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천은 또 가만히 웃는다. “사랑이란 거 말이야.” “…….” “마음이 아픈 거더라.” “…….” “몸이 아픈 거랑은 비교도 안 되더라.” “…….” “괜찮아. 안 아픈 척 할게.” 너는… 너란 녀석은 도대체……. 울컥 눈물이 넘어왔다. 울지 마, 김준수. 이제 안 울기로 했잖아.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물을 삼켰다. 울보 토끼, 또 울어. 유천은 쿡쿡 웃으며 내 손을 다시 귀 위로 끌어다 놓았다. 그의 장난스러운 놀림에 뾰로통하니 노려보자 또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는다. 하지 마, 유천의 손을 쳐내고 이번엔 정말 뚫을 기세로 그의 귀 위에 귀걸이를 올려놓았다. “셋 하면 눌러.” “응.” “나중에 잘 참았다고 상 줘야 돼?” “응.” 내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의 눈이 선량하게 웃는다. 늘 나를 지켜봐주고,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 그래, 나는 이렇게 너에게 내 마음을 새긴다,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하나.” …사랑해. “둘.” …사랑해. “셋.” …사랑한다, 박유천. 눈을 질끈 감고 귀걸이를 꾹 누르자, 손끝에서 으득, 하고 살이 뚫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참았던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행여 유천이 볼까 서둘러 볼을 훔치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내 것과 똑같이 생긴 귀걸이가 그의 귀에서 반짝였다. 죽을 때까지 날 이렇게 매달고 살아. 유천아, 나 잊지 마. 평생 나만 사랑해야 해, 알았지? “잘 했어, 토끼.”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미소에 숨이 막힌다. 나는 가만히 붉어진 그의 귀를 쓸었다. 아, 나는 얼마나 지독한 이기주의자인지……. 사랑하는 이에게 이렇게 죽어도 잊지 못할 잔혹한 절망을 선물하다니……. “…안 아파?” “어.” 아팠으면 좋겠다. 네가 계속 나 때문에 힘들어 하고, 날 기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애써 활짝 웃었다. 순진하고, 눈치 없는 지금까지의 김준수는 여전하다는 듯이. 유천이 내 손을 당겨오기에 곁에 누워서는 어린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유천의 품에 파고들었다. 쌉싸름한 불가리 블랙. 박유천의 향기……. 이러다 또 울겠다, 어깨를 토닥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유천의 목소리에 목 끝까지 차올라온 눈물을 꿀꺽 삼켜 넘겼다. 울면 안 된다. 웃어야 한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야.” “어?” “너 나 없다고 또 여자들 잔뜩 만나고 다녔지?” 나의 엉뚱한 시비에 유천은 쿡쿡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웃는 거 보니까 정말 그런 모양이네?” “질투쟁이.” 나도 안다. 유천에게 그럴 정신도 없었을 거라는 건. 하지만 나는 끝까지 철딱서니 없는 김준수를 연기할 생각이니까. “웃지 마, 바람둥이 새끼야.” “그러는 넌?” “내가 뭘?” “너는 그 집에 있을 때 아무 일 없었어?” “무슨 일?” 유천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유천의 표정이 금세 샐쭉해져서 나를 내려다본다. 이거… 뭔가 분위기가……? “이재영이랑 밥 같이 먹었지?” “응.” “TV도 같이 보고?” “…응.” 일단 시작은 내가 하긴 했는데……. “손 잡았지?” “…….” “키스 했냐?” “…….”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잤냐?” 미친……! 나는 유천을 확 밀어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물이 쏙 들어간 눈으로 매섭게 노려봤더니 유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응시한다. 개새끼, 너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 네가 보냈잖아. 잊었냐? 넌 진짜 죽는다. “박유천, 너 사상이 불순해.” “사돈 남 말 한다. 날 들들 볶던 게 누군데?” “미친 새끼야, 의심 안 하게 생겼어? 넌 여자를 무슨, 어? 옷 갈아입듯이 갈아치웠잖아.” “아이쿠, 그래서 질투하셨어요?” 유천이 느긋하게 팔베개를 하고 귀엽다는 듯 나를 보며 웃는다. 어쩌면 저렇게 얄밉고 뻔뻔한지. 여전하구나, 나쁜 자식. “질투 좋아한다. 넌 질투할 가치도 없어.” “질투할 가치가 없어서 그렇게 찔찔 울었냐?” “닥쳐.” “아, 너 말 자꾸 그렇게 할래?” 이제 알겠다. 짝사랑과 사랑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짝사랑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화내다가, 혼자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저 잘 참기만 하면 된다. 가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만 잘 다스리면 훨씬 경제적이고, 마음도 가벼우며, 잊기도 쉽다. “내가 여자 만나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 말을 하지. 왜 입은 꾹 닫고 심술만 부렸냐?” “시끄럽다고.” 하지만 사랑은 고통 그 자체다. 사랑이 달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랑은 마음을 털어놓는 것부터가 힘들다. 우리가 ‘좋아한다’ 한 마디를 못 해서 힘들어 했던 것처럼. 그 다음 단계인 사귄다는 것도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것은 서로를 믿고, 충실하겠다는 서약과 같은 것이므로. 사귀게 되었다고 해서 한 고비를 넘겼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믿음에 대한 시험은 더욱 가혹하여, 하루에도 열 두 번씩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겁내고, 초조해하고, 의심하게 되니까. “난 너 새침 떨고 까칠하게 굴어서 영 가망 없는 줄 알았지.” “시작은 네가 먼저 했거든? 여자 친구 먼저 사귄 것도 너고! 또 너 고3때! 졸업식 날! 모텔! 그 새끼!” 나는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유천에게 부리지 않았어도 될 심술을 부려서,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을 그에게 짐만 더 지워준 셈이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눈치 백단이다, 새끼야. 너 먼저 시작한 게 맞아.” “웃기네, 너 그 전에도 나한테 틱틱대고 장난 아니었거든?” 사랑을 지키는 데는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고 해피엔딩은 사랑을 지켜낸 사람들에게만 문을 열어준다. 그것은 매우 냉정하고 공평한 법칙으로,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린 사랑의 대가로 많이 아팠고… 많이 아플 것이다……. “와씨, 증거 없다고 이렇게 상황을 조작하나?” “조작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하는 거다, 꼬맹아.” 우린 이제야 비로소 터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처구니없게도 7년 만에……. + 장난처럼 시작했던 대화는 제법 진지하게 한참이나 이어졌다. 많은 오해가 풀렸다. 모든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좋아해서 괴로웠고, 그랬기 때문에 더욱 상대를 괴롭혔으며, 그것은 다시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다. 나는 유천이 했던 행동들의 이유를 알 수 있었고, 유천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시행착오. 그게 정답이었다. “비슷한 사람은 서로 알아본다잖아. 처음부터 나랑 닮았다고 생각했어. 분위기나, 느낌 같은 거. 처음에 너 이사님 되게 싫어했잖아. 근데 그게 더 묘하게 신경 쓰이더라고. 넌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은 싫어하지도 않으니까.” 그랬나……? 나는 유천의 품으로 파고들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너, 처음에 나도 엄청 싫어했던 거 알아? 창가 자리 뺏겼다고 입이 이만큼이나 나와서 막 욕했다.” 내 등을 가만히 쓸며 유천은 피식 웃었다. 기억난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새 학기의 첫날. 이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날. 우리는 처음 좋아했던 순간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은 재영과의 일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사진은 어디서 났어?” “무슨 사진?” “그… 병원에서, 재영 씨랑 나랑…….” 차마 연인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과 키스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말끝을 흐렸다. “나도 몰라. 차에 꽂혀 있었어.” “그럼… 스토커가 그런 건가……?” 나는 유천이 또 자책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유천은 아마도, 라고 중얼거리며 또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너 산장으로 유인해 낸 것도 그렇고, 굉장히 지능적인 것 같아. 잡기가 쉽지 않을 거야.” “응.” 나는 작게 대답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인정한다. 아직도 그 사람은 잡히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큰 타격을 입고 휘청대고 있으니까. 이 순간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나는 박 회장님이 아닌, 그 사람을 원망할 것 같다. 우리 주변 인물들 중에 유일하게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악의를 필사적으로 활용하여 이렇게 성공적으로 목적을 이뤘다. 그래…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 추진력과 냉정한 판단력은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박 회장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유천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말에 우리는 반항을 하거나 구식이라고 코웃음을 치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현명한 방법이었음을 깨닫곤 한다.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큰소리 쳤던 우리의 판단이 틀렸거나, 멀리 돌아가는 방법일 경우가 많았다. 박유천은 큰 회사를 이끌 충분한 능력이 있고, 모델로서의 재능도 있다. 그는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맞다. “준수야.” “응.” “이번 주에…….” 말끝을 흐리는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이르렀다, 명희 씨와의 결혼 이야기에. 유천은 선뜻 말을 꺼낼 수 없는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한숨을 내쉬며 유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또 코끝에 불가리 블랙이 스친다. 죽어도 잊지 못할 박유천의 향기……. “나랑 관련된 큰 기사가 하나 날 거거든?” “응.”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너무 충격 받지 말라고.” “응.” 난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됐다. “뭔지 안 물어 봐?” “꼭 물어 봐야 돼?” 나는 여전히 유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되물었다. 이 이상 이야기가 진척되는 것은 싫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니, 묻지 마.” “응.” “준수.” “응.” “나 믿지?” “…….” 유천의 나지막한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기계적으로 하던 대답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질문은 너무 난해했다. 믿는다고 대답하면 정말 박유천이 그 일을 해결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말없이 유천의 허리를 더 힘껏 안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길은 단 하나뿐이라는 걸. 뎅, 뎅, 뎅, 뎅……. 이윽고 아래층 어딘가에서 괘종시계가 무거운 소리로 12시를 알려왔다. 마법이 끝났다……. + [딩동♬] 도어 벨이 울렸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유천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아래층은 조용해졌다. “유천아.” “어.” “키스해 줘.” 갑작스러운 내 요구에 유천은 잠시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다가는 가볍게 입술을 겹쳐왔다. 나는 바로 입술을 열고 그의 혀를 찾았다. 따스하고 말캉한 체온. 술기운이 섞인 부드러운 호흡. 금세 혀가 엉키고, 감미로운 키스가 이어졌다. 잠시 후 유천이 멀어지자, 입술 위로 찬 기운이 휑하니 돈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 가슴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다. “누가 왔나 봐. 내려가 보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생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또 눈물이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이 순간에는 온 몸이 버석버석 말라버린 것처럼 메말라 있다. 건조기 안에라도 들어갔다 온 것처럼 내 가슴은 말라붙었다. 사막처럼… 그렇게……. 유천의 손을 잡아 일으켜서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타박타박 걷는 발소리를 따라 가둬두었던 한숨이 하나씩 흘러나온다. 가슴이 너무 팍팍해서 호흡곤란이 느껴진다. 나중에 이 장면은 기억에서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동상처럼 얼어붙어 현 실장을 응시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내 앞을 걷던 유천이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유천 씨 모시러 왔습니다.” 무덤 속……. 혹은 진공 상태의 우주……. 그 정도의 무게를 가진 침묵이 무겁게 떠돌았다. 유천의 남자다운 목울대가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나를 돌아보는 유천에게 나는 또 다시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뭐야.” “…….” “지금 이거 뭐야, 김준수.”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향했다. 그들의 눈에 담긴 의아함과 당혹감에 죄책감이 느껴져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유천아, 현 실장님, 내가 오시라고 했어.” “너 지금 무슨…….” “있잖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데구르르르르, 유리처럼 연약한 나의 세계가 구르기 시작한다. 유천의 멍한 눈초리에 아무렇지 않은 척 싱긋 미소도 지어보였다. 가능한 한, 담담하고 태연한 척, 그렇게……. “많이 생각해 봤어. 학교 같은 건 다녀서 뭐하나, 그냥 너랑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살까? 가족이고 친구고 다 버리고. 그런 생각들…….” “…….” “그런데 있잖아, 너무 손해지 뭐야. 너를 잃지 않으려면, 버려야 하는 것들이 너무 크더라고.” “준수야.” 정윤 형의 떨리는 목소리……. 나는 형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야 하는 순간도 닥쳐오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이들에게 철저히 배신자가 되기 위해 여기 서 있다. “너 많이 좋아하긴 하는데, 내가 너무 이기적이더라.” “김준수,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재영의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정말 화가 난 것 같은 재영의 표정에 또 미안한 마음만 든다. 하지만, 이미 구르기 시작한 세계는 멈출 수가 없다.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가 뱉어내는 이 거짓들이 유천에게 상처로 남아 그가 쉽게 나를 잊고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 다만, 내 가슴에 흐르는 피를 그가 보지 못하기를……. “사실, 스토커 때문에 무섭기도 해.” …넌 유능한 사업가도 될 수 있을 거야. 이재영보다 더 멋지게 잘 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계속 그렇게 시달릴 거 생각하니까 겁나더라고.” …명희 씨, 참 좋은 여자더라. 나 같은 철없는 꼬마보다 명희 씨가 훨씬 네게 어울려. “그래, 이게 맞게 맞는 것 같아.” …나 하나만 비켜 가면 훨씬 나은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넌. (최재훈 - 너를 보내며 가사 中) 말을 마치고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 순간에 웃음이 나온다. 다행이다. 가슴 속에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이 밖으로 넘쳐나지 않아서. 이걸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게 맞는 거겠지? 잠깐 의문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냥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믿기로 했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메마른 눈동자처럼 입술도 바짝 말라서는 금세 찢어져 피가 난다. 씁쓸한 내 미소 속에서 세차게 세계가 구른다. 이제 남은 것은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바로 그 한 마디. “박유천.” …유천아, 꼭 최고의 모델이 되어 줘. 세계는 눈물에 흠뻑 젖어 속도가 점점 붙더니……. “우리 헤어지자.” …나 잊지 마. 이윽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힌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유천의 눈동자가 너무 서러워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명희 씨의 눈물이 영롱하고,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린 정윤 형의 몸짓에도 아득하게 절망이 묻어난다. 그리고 나는 끝끝내 울지 않았다. 담담하고 건조한 눈으로 마치 인사를 건네듯, 그렇게 유천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가능한 한 매정하게, 내가 그를 지울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유천이 나를 잊기 쉽게 해 주는 것이,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유천의 목울대가 또 다시 크게 움직였다.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이며 나를 담았다. 가만히 깨무는 입술… 바닥을 향하는 시선… 그리고 다시 나에게……. “…다시 말해 봐.” 유천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헤어지자고.” 나지막한 내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천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고, 눈동자에 실린 감정은 점점 더 착잡하게 가라앉아 갔다. 마치, 사진이 천천히 색이 바라 무채색이 되어 가듯, 그의 눈동자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가던 순간을 나는 단 1초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프다. 숨이 막혀서 가슴을 쥐어뜯고 싶지만 피하지 않았다. 피해선 안 된다.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아프게 그를 가슴에 새기고 평생 나는 고통스러워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애도니까. “진심이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담담하게. “…알았어.” 침묵 끝에 한숨처럼 토해져 나온 유천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가슴 속에 생채기가 무수히 늘어간다. 핑하니 현기증이 난다. 숨은 진즉부터 쉬지 않고 있었다. 유천이 몸을 돌렸다. 점점 그가 멀어져간다. 그제야 그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그를 불러 세웠다. “유천아.” 유천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귀에서 반짝, 하고 내 마음이 빛났다. “결혼 축하해.” 절대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한 마디. 표정이 굳은 유천을 향해 나는 그냥 웃어 보였다. 유천은 허탈하게 웃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인형처럼, 영혼이 없는 파리한 얼굴로. “갈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손이 멋대로 뻗어나가다가는 멈칫 허공에 멈춰서고 만다. 나는 손을 꼭 쥐고 그대로 거두어들였다. 현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약속대로 해줄 것을 그에게 눈빛으로 요구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서둘러 유천의 뒤를 따랐다. 달칵, 문이 닫혔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명희 씨가 흘리는 투명한 눈물 뿐……. 씨발, 재영은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내더니 그대로 유천이 나간 현관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가 나간 문을 응시했다. 난 널 가슴에 묻고 살아갈 수 있을까? 유천아, 나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깨어져버린 세계는 대답이 없고 바삭바삭, 가슴에서 메마른 소리가 난다. “야, 박유천.” “…….” “너 장난해?” “이사님, 이러지 마십시오.” 잔뜩 흥분한 재영의 목소리에 섞여 현 실장이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지금 장난 하냐고! 헤어지자는데 알았다는 말이 나와? 어?” “이사님.”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 실랑이 소리가 들려오자 서둘러 정윤 형이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제자리에 붙박인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게 맞다고, 잘 한 거라고, 수십 번, 수백 번, 스스로에게 되뇌며. “야, 너 쟤 지금 왜 저러는지 진짜 몰라서 그래?” “…알아요.” 유천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뜩 잠겨 있었다. “네가 알긴 뭘 알아?” “재영 씨, 그만 해요.” “무슨 말만 하면 찔찔 울던 저 꼬맹이가 지독하게 눈물도 안 흘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안다고요!” 유천의 절규에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 순간에도 눈물이 안 난다. 몸속의 수분이 어딘가로 전부 빠져나가버린 모양이다. “알아요, 나도 다 알아. 저 녀석 왜 저러는지, 준수 힘든 거, 나도 다 아는데!” 그가 가슴으로 운다. 피를 토하듯이 저렇게 힘들게 말을 뱉어내며 운다……. “내가 옆에 있으면 준수가 죽잖아요…….” “…….” “이사님, 나 솔직히 무서워요. 내가 없을 때 또 저 녀석한테 무슨 일 생겨서 정말 죽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유천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또 다시 무겁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명희 씨가 다가와서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고인 슬픈 눈물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박유천을 보낼 수 있을 만큼 값진 눈물……. 다행이다, 그녀라서. 나는 이렇게 또 안도한다. “미치겠어요. 사랑한다면서 저 녀석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렇게 약해빠진 인간이라. 너무 무력해서 어디 가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저 자신에게 화가 나요.” “…….” “나 쟤 없으면 죽어요. 그런데 준수가 다치는 것보다는 내가 아픈 게 마음이 더 편해요.” 개새끼, 끝까지 멋있는 척이야……. “그래서 오늘은 그냥 갑니다.” “…….” “준수한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좀 전해주세요.” “싫어.” “……?” “너 지금 가면 김준수 영원히 못 봐. 내가 그렇게 할 거야.” 재영의 고집스러운 말투에 또 다시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내가 지금까지 미친 척하고 저 꼬맹이 하자는 대로 다 했는데, 이제는 정말 안 되겠어. 너희들 지금 헤어졌어. 너한테는 이제 아무 권리도 없다는 소리야.” “이사님…….” “박유천, 똑똑히 들어. 김준수 내가 갖는다. 다시는 밖에 내놓지도 않고, 스토커 따위 접근도 못하게 내가 지킬 거야. 너희 두 번 다시 못 만나.” 또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다. 당사자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유천은 재영의 말에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울지 마요……. 나는 명희 씨의 어깨를 안고 토닥였다. 지금 이 순간 우린 모두 힘들었다. 서로 엇갈려서 너무 아픈 기묘한 관계…….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 주세요…….” 유천의 힘없는 중얼거림. 이내 차에 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시동을 거는 소리,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은 가끔 상황 앞에 죄가 된다. 그와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인이 되어 있다. 우리가 너무 무력해서 생긴 비극……. 나는 다만 침묵했다. 눈물도 나지 않는 절절한 슬픔에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몇 번이나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이렇게 우리는 애써 담담한 척 이별을 받아들였다. + “너 몇 학년이야?” “학교 안 다니는데여.” “그래? 그럼 유치원?” “아하하, 유치원이래.” 꼬마는 내 말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유치원이라는 말이 웃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유치원 아니고 Mr. John's English School 다니는데여.” 이어진 꼬마의 버터 바른 영어 발음에는 표정이 딱 굳었다. “이, 잉글리시 스쿨?” “Yep." 와씨, 요새 꼬맹이들 왜 이렇게 영어 발음이 좋아. 본토 출신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우리말 발음이 너무 정확한데. 내 콩글리시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비웃음이 섞인 꼬마의 시선을 피하며 그 손에 들려 있는 콜라를 빼앗아 한 모금 마셨다. 꼬맹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냥 무시했다. 건방진 꼬맹이에게는 난폭한 어른이 되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인 법이다. 지금 나는 제일 성가시고 까다로운, 미아 사고 처리중이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건방진 꼬맹이가 바로 그 미아 되시겠다. 요새 아이들은 참 똑똑한 것 같다. 부모를 잃어버리자 울지도 않고, 근처의 매장 직원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제 엄마의 핸드폰 번호도 똑바로 외우고 있어서 바로 연락이 되었고, 나는 부모가 올 때까지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꼬마와 대기 중이다. “아저씨는 뭐에요?” 아저씨……? 나 22살이거든? “나? 매니저.” “아하하, 매니저래. Manager지.” 꼬맹이의 비웃음에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인다. 저절로 주먹이 꾹 쥐어지는 것이 ‘고객님의 자녀분’이 아니라면 당장 쥐어박았을 것 같다. 더 얄미운 것은 이 꼬맹이 표정이 나를 놀릴 때의 박유천과 꼭 닮았다는 것이다. 이 새끼, 여자들 잔뜩 만나고 다니더니 정말 사고 쳐서 애라도 덜컥 낳은 거 아냐? 뭐, 중학생 때 사고 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큰 애가 있을 리는 없겠지만.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는 이를 꾹 악물고 꼬마에게 굳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박유천과 나. 우리는 3일 전에 이별을 했다. 나는 그가 없는 일상 속에서 이렇게 멀쩡히 웃으면서 일을 한다. 아직까지는 견딜 만한 것 같다. 박유천이 떠나고 재영과 다시 서울로 돌아오던 날은 정신이 멍하고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이, 금세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정말 죽지는 않은 걸 보면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임이 틀림없다. “어머, 민재야!” “엄마!”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날 것 같은 젊은 여자가 꼬마의 이름을 부르자, 꼬마가 도도도도 달려가서 덥석 안긴다. 나는 얼른 비즈니스 스마일을 짓고 꼬마의 부모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늘 사람이 많아서 혼잡하니까 조심해서 구경하세요.” 나는 여전히 영업용 미소로 웃어보였다. 꼬마의 부모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며 멀어져갔다. 와, 나 제법 매니저 티 나지 않아? 혼자 자화자찬도 해가면서 무전기를 꺼내들고 본부에 사고 해결을 보고했다. 멀리서 아빠의 품에 안긴 채 내게 손을 흔드는 박유천을 닮은 꼬마가 보인다. 몇 마디 안 나눴지만 그새 얼굴을 익혔다는 듯이 씨익 웃는다. 건방진 꼬맹이인 줄 알았더니, 박유천처럼 다정한 면도 있다. 꼬마, 넌 나중에 커서 박유천처럼 되지 마라. 그 자식은 카사노바의 환생이 분명해.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이렇게 울리고 있으니 말이야. 나는 꼬마에게 가만히 손을 흔들며 웃어 주었다. 유천에게 하지 못했던 마지막 인사를 대신 하듯……. “하아.”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당연한 듯 사람들의 즐거운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서늘한 것이, 새삼 이별이 아프다. 세상은 참 신기하다. 박유천이 없는데, 다들 저렇게 즐겁다.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시간에 이별을 겪는 이가 분명히 있을 텐데, 지금 내 주위엔 마냥 즐거운 사람들뿐이다.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든다. 나만이 어떤 진실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은 기분……. 나는 이렇게 난생 처음 이별을 배우고 있다. 박유천 덕분에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던 나는 참 많은 것을 알아간다. 박유천이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 덕에 마음과 다르게 그의 앞에서 웃는 법을 배웠고, 유천과 오해로 싸웠을 때는 처음으로 가슴이 먹먹하다는 기분을 알았다. 유천이 날 주차장에 두고 가버렸을 때는 입을 틀어막아 눈물을 참는 법을 깨우쳤으며,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의 앞에서 비켜서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유천이 떠난 후, 나는 담담히 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속여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정윤 형은 내 팔을 잡아 일으키며 ‘너 이렇게 되라고 박유천에게 얌전히 보내준 거 아니었다’고 조금 화를 냈다. 형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던 나는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재영이 도대체 왜 그랬냐며 화를 내는 데는 울컥 눈물이 나서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다. 세 분을 속인 건 너무 죄송하지만 어차피 헤어지게 될 것이라면 남들에게 떠밀려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박유천을 한 번도 못 보고 그냥 보낼 순 없었어요,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우리는 박유천의 프로포즈로 당당하게 사귀었고, 주위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닌, 내가 이별을 고한 것으로 그 사랑을 끝맺은 거예요……. 우리가 시작한 거니까 끝내는 것도 우리가 해야 되는 거잖아요, 우리 정말 사랑했으니까……. 나지막이 내가 말을 마쳤을 때, 명희 씨는 한참이나 나를 대신해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재영은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으며, 정윤 형은 슬픈 눈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눈물을 잘 참아냈다. 그러고 보니 꼬맹이 김준수도 조금 성장한 것 같다. 이렇게 잘 견뎌내고 있는 것을 보면……. 전부 박유천 덕분이다. 유천의 진심을 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게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도 외롭지 않다. 고통은 나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유천과 내가 둘이 나누어지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준수, 넋 놓고 뭐해?” 정민 누나가 어깨를 툭 치기에 정신을 차렸다. “가자. 왜 그러고 있어? 여친이랑 헤어지기라도 했어?” 벌써 교대시간인가 보다. 나는 앞서 걷는 정민 누나를 따라 터덜터덜 탈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헤어졌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나? 여친은 아니지만 헤어지긴 했는데. 아니 그것보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감이 좋아? 괜히 누나가 덧붙인 말에 지레 찔려서, 나는 내 행동을 되짚어 보며 눈을 깜빡였다. “주말에 시간 있어?” “네?” 누나가 또 불쑥 말을 걸어와서 화들짝 놀랐다. 괜스레 긴장이 된다. 주위의 사람들이 혹시 유천의 이야기를 꺼낼까 봐.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소식을 묻는 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럴 때는 박유천과 여기서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원망스럽다. “승연이 생일이잖아.” “아, 네. 괜찮아요.” “그럼 같이 한 잔 하자. 너 요새 얼굴 보기 너무 힘들어. 살은 왜 이렇게 빠졌니? 무슨 일 있어?” 정민 누나의 말에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조금 자란 줄 알았더니 남들 눈에도 다 보이는 고뇌인가 보다. 하지만 내 결정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괴로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진부한 법칙이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 것일 뿐이다. 박유천과 사귀게 되었을 때는 그 법칙이 나만은 피해가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막상 이별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지구상에 수도 없이 복작이는 평범한 일반인 중에 하나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다만, 딱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멋지게 이별하는 법을 미리 배워두지 못해서, 박유천에게 잘 가라는 인사도 해주지 못한 것이다. 혹시 다음번이 있다면… 그때는 꼭 조심해서 가라는 말을 해줘야겠다……. 지이이이잉.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기에 얼른 꺼내들었다. 귀가중이라는 재영의 문자가 떠 있다. 일찍 끝났네. 나는 볼을 갉작이며 집에 반찬이 뭐가 있던가 생각에 잠겼다. 문득 청계천에서 먹었던 부대찌개 이야기를 하던 재영이 떠올랐다. 의외로 서민적인 입맛인가 본데, 다시 한 번 사과도 할 겸 종로에 들러서 좀 사갈까? 나는 금세 결정을 내리고 발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박유천이 없는 일상은 오늘도 이렇게 담담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냄비에서 찌개가 끓는다. 나는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냄비를 내려다보고 있고, 재영은 식탁에 앉아 그런 나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노골적으로 나를 따라붙는지 민망해서 돌아볼 수가 없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저런대? 내가 밥 해 주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감동도 그만할 때도 됐는데. 괜히 접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부동자세로 나만 보고 있다. 헉, 눈이 마주쳤다. 쭈뼛쭈뼛 웃으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이미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지 오래. 그는 또 그런 나를 눈치 채고 한쪽 입꼬리만 올려 피식 웃는다. 나는 여전히 재영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스토커가 잡힐 때까지라는 토를 달기는 했지만, 글쎄, 좀 다른 분위기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집에 내 물건이 점점 늘어난다. 옷, 칫솔, 새로 산 내 전용 머그컵과 수저, 집에서 가져온 노트북과 책들. 뭐랄까? 어쩌면 그도, 나도 스토커 핑계를 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서, 그는 조금 다른 목적을 위해. 힘들어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역시 잘 안 된다.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꿈에 유천이 나오면 눈물이 난다. 그와 함께 했던 익숙한 것들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멍하니 정신을 놓기도 하고, 한참이나 숨 쉬는 것을 잊을 때도 있다. 전엔 미처 몰랐다, 내 주위가 온통 박유천의 흔적이었다는 걸. 하긴, 7년을 단 며칠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재영도 가끔 씁쓸하게 웃을 때가 있다. 내가 무심코 뱉어내는 말에 상처를 받는 것 같다. “유천아, 냄비 받침 좀.” 이렇게 말이다……. “이거?” “아, 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식탁 위에 찌개를 내려놓았다. 재영은 그냥 싱긋 웃는다. 말은 안 하지만 이 사람도 나처럼 호되게 첫사랑을 앓는구나 싶어 가슴이 싸할 때가 많다. 첫사랑이란 건 참 신기하다. 인생에 있어 언젠가 한 번은 꼭 찾아오지만,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 찾아온 그 혼란스러운 감정에 처음에는 기뻐하지만, 점점 더 그것이 힘든 감정임을 깨닫게 된다. 성패는 미지수. 뿌연 안개 속을 더듬듯, 느릿느릿 어딘가를 향해 전진하지만 대개 만나는 것은 절망이라는 낭떠러지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 소설 같다고나 할까? “재영 씨.” “어.” “미안해요.” 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사과했다. 이번에는 거짓말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과 엮이게 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였다. 나는 아무래도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재영은 흘깃 나를 보고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됐어.” 이 사람은 이런 게 박유천과 닮았다. 내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없었던 일처럼 넘어가 주는 것. 마음이 넓은 걸까? 분명히 원래 착한 성격은 아닌데. “나한테 실망했죠?” “왜?” “나 바보같이 착하고 일편단심이라 좋다고 했잖아요.” “너 아직도 바보같이 착하고 일편단심이야.” “…….” 재영의 나지막한 대답에 이를 꾹 악물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아프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난 아직도 네가 강변에서 한 말 기억난다. 박유천이랑 헤어져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했잖아, 공기처럼, 물처럼.” 조용조용 이어지는 재영의 말에 가슴 밑바닥에서 뭔가가 울컥 넘어온다. 그는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이런 것도 박유천과 닮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유천과 닮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뭔가가 바다처럼 깊고 넓게 내 안에서 일렁인다. 짭짜름한 액체가 숨을 내뱉는 순간 끝도 없이 밀려나올 것 같아 불안하다. “…재영 씨, 기억력 좋네요.” 간신히 끄집어낸 내 힘없는 중얼거림에 재영은 씁쓸히 웃었다. “난생 처음 누군가를 향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한 순간을 잊을 수는 없잖아.”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에게 나는 내 마지막 추억을 위해 그렇게 잔인한 부탁을 했다……. “그… 황정윤 씨?” “네.” “그 사람도 딱 김준수과더라. 속없이 착하지만 한 게.” “…….” “그 사람도 너 좋아하냐?” 나지막한 재영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재영은 나의 반응에는 아랑곳 않고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꼬맹이 인기 많네. 넌 뭐 전생에 황진이였냐?” 재영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피식 웃어버렸다. 사소한 대화로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그의 배려가 묻어나서 새삼 감동 중이다. 첫인상과는 완전히 180도 달라진 그의 이미지에 신기한 느낌마저 든다. 사람은 진화하는 동물이 맞나보다. 나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김준수가 되어 있고, 재영도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어 간다. 박유천은 부디 나를 하루 빨리 잊고, 자신의 꿈에 매진하기를……. “콜록!” 또 숨이 쉬어지지 않아 기침을 하며 서둘러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달려갔다. 쓰지도 않을 물을 틀어놓고 멍하니 세면대에 손을 짚고 서자 거울 속에 파리한 안색의 내가 있다. 눈 밑이 거무스름한 것이 정말 살이 많이 빠졌구나 싶다. 유천의 일이 떠오르자 숨이 턱턱 막혀, 재영과 주고받았던 가벼운 대화가 금세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도대체 얼마나 걸릴까? 내가 유천을 생각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는 날이 오려면? 아니, 그 날이 오기는 할까……? 사실 365일 24시간 내내 힘들진 않다. 낮에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사람들을 대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혼자라는 것을 온 몸이 오싹하도록 깨닫는 순간……. 그때가 힘들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공허. 휑하니 찬바람이 스쳐가는 마음. 손끝이 저릿저릿한 것이, 순간적으로 체온이 급강하하고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 이별이 힘든 것은, 이렇게 가끔 찾아오는 고통의 시간이 그 나머지 시간을 전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내가 숨 쉬는 이 공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내가 딛고 선 땅. 이 모든 게 유천에게도 이어져 있으니까, 난 혼자가 아니야. 애써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내 안에서는 또 바다가 일렁인다. 미처 쏟아내지 못한 눈물들이 내 안 어딘가에서 출렁이는 것이 느껴진다. 단단하게 밀봉이라도 된 듯, 전혀 새어나올 틈도 없어 보이는 슬픔을 깨닫자 또 숨이 막힌다. 가슴이 서늘한 것이, 나는 이렇게 이별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깨닫고 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점점 세게… 퍽퍽 소리가 날 때까지. “아…….” 거울 속에서 열린 문틈으로 나를 응시하는 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물을 잠그고 쭈뼛쭈뼛 돌아섰다. 팔짱을 끼고 선 그의 마른 몸도 유난히 호리호리해 보인다. 울지도 않았는데 자꾸 코가 막힌다. 나는 멋쩍게 웃고는, 코 밑을 비비며 화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재영은 그런 나를 끌어당겨 그대로 품에 안았다. “…….” “…….” 재영의 향기가 희미하게 밀려들었다. 알마니 마니아 옴므. 쌉쌀한 불가리 블랙이 아닌, 당당하고 오만한, 성공한 남자의 향기. 억지로 지었던 미소가 조금씩 풀려간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재영에게 기댔다. “준수야.” “…네.” 그의 입에서 꼬맹이가 아닌 내 이름이 나오다니 왠지 낯설다. “사랑의 상처는 다른 사랑으로 낫게 하는 거래.” 귓가에 나지막이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또 숨이 막힌다. “마음 조금만 열어 줘. 나 좀 들어가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걸……. 재영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희미한 죄책감. 하지만 얼른 털어버렸다. 이런 것도 이젠 느끼면 안 된다. 유천과 나는 헤어졌으니까……. 입술을 열어주자 재영은 조심스레 내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러운 위로의 키스가 이어졌다. 입맞춤이 끝나고서도 재영은 나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등을 토닥이는 그의 체온에 또 유천이 그리워졌지만, 애써 털어냈다. “내일 기분 전환하러 드라이브 갈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는 재영에게서 또 향수 냄새가 스친다. 하지만… 불가리 블랙이 아닌……. +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다 보니 집에서 문자가 와 있다. 등록금 고지서가 집으로 왔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어머니의 문자. 어떻게 할까? 박유천은 휴학했다고 했는데……. 유천은 아마 연예계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 학교 다니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 집안에서 박유천의 학력을 고졸로 그냥 둘 리는 없고. 설마 병행? 생각만 해도 등이 오싹하다. 가뜩이나 마른 몸이 나무젓가락이 되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바보 같은 자식. 모델 같은 걸 하려면 좀 더 일찍 시작하던가. 옷을 옷걸이에 걸어 넣으며 피식 웃었다. 이제 나랑 관계없는 일인데, 왜 내가 자꾸 걱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암튼 오지랖 넓은 김준수 어디 안 간다. 박유천의 일이라면 뭐든지 궁금해서 안달하던 나였으니까. 지이이이잉. 외투를 걸쳐 입는데 또 핸드폰이 울린다. 재영의 이름이 떠 있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다고 했는데. “여보세요?” - 끝났지? “네.” - 정문 앞으로 나와. “네.” 재영은 별 말 없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언제나처럼 냉랭하고 차가운 말투. 이제는 정말 그런 성격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밖에서 괜한 오해를 살까봐 걱정이다. “…….” 뭐야. 난 왜 자꾸 걱정거리만 늘지? 박유천도 걱정해야 되는데, 이젠 재영 씨까지.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인상을 썼다. 건물을 나서자 재영의 늘씬한 벤츠가 정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차에 오르자, 인사 대신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이 이젠 너무 익숙하다. “일 안 해요?” “소송 때문에 다 취소됐어. 몰라, 변호사가 나중에 연락한대.” “…….” 드디어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다. L그룹 측에서 뭘 갖고 걸고넘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계약 위반인 것 같다. 그리고 재영은 자사 소속 모델을 L그룹에서 잡고 놔주지 않아 생긴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맞소송을 걸었다. 이건 승패가 뻔한 자존심 싸움이다. 재영의 회사는 주가가 바닥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 박유천 한 명으로 인해 너무 엄청난 일이 벌어져 있어서 나는 미안해서 말도 못 꺼내겠다. 내가 유천과 헤어지면 이 일도 해결될 줄 알았는데……. 난 정말 사고를 몰고 다니나보다. 박유천에게도, 이 사람에게도 이렇게 짐만 되고 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우리 지금 어디 가요?” “드라이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목적지. 다혈질이라서 재영의 장난에 금세 속에서 뭔가가 울컥 솟는다. 하지만 상대가 유천이 아니라 차마 한 마디도 못했다. 박유천이 없으니까 나는 짜증도 제대로 못 내는구나……. 박유천은 되게 피곤했겠다. 내가 빈정대고 톡톡 쏘아대는 걸 다 참아냈으니. 새삼 또 유천의 빈자리를 깨닫게 된다. “어…….” 문득 고개를 들자 익숙한 드라이브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 서울 타워가 보인다. 박유천과 왔던 남산……. [머릿속에 다시 저장해. 여기 황정윤이랑 온 데 아니야. 박유천이랑 키스한 곳이야.] [대답해, 여기 어디야?] [다음에 와서 황정윤이랑 왔었다느니 하는 소리 하면 그땐 키스로 끝내지 않을 거니까 알아서 해.] 제길……! 환청처럼 떠오른 유천의 목소리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유천의 기억이 쏟아져 나온다. 정윤 형과 여길 왔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질투로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던 박유천, 다짜고짜 차를 세우고 키스를 해오던 박유천,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채근하여 결국 ‘박유천이랑 키스한 곳’이라는 대답을 받아내던 박유천. 얼굴이 화끈하다. 마치 유천이 옆에 있기라도 한 듯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잔뜩 긴장해버렸다. 자동반응이다. 나는 박유천과의 기억이 떠오르면 몸이 움츠러들도록 겁을 먹거나, 화가 나거나, 너무 슬프고, 웃음이 번지며, 얼굴이 달아오른다. 굳이 7년 전까지 거슬러 갈 필요도 없이, 둘이 나란히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상경했을 때부터의 기억만 떠올려도 우리 이야기는 이미 영화 같다. 특히, 남산의 저 키스와 저 대사! 나쁜 새끼. 서울 타워를 보자마자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몸이 굳다니, 이건 뭐, 의도하기라도 한 거야? 나는 그날 코앞에 그 서늘한 눈을 들이대고 빨리 대답하라고 채근하는 유천 때문에 당황해서 정말 온 몸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었다. 아, 박유천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말을 더듬던 내가 얼마나 웃겼을까? 갑자기 웃음이 난다. “왜 웃어?” 재영의 물음에도 웃음이 자꾸 삐질삐질 새어나온다. “그, 그냥요.” “싱겁긴.” 재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한참이나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혼자 키득거렸다. 고맙다, 나쁜 자식아……. 나는 창밖의 타워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픈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평생 여기만 오면 박유천을 떠올릴 것 같다. 우리가 사귄지 얼마 안 되어서, 한참 주도권 싸움을 하던 그 시절을……. + 제길, 오늘 무슨 박유천 메모리얼 데이라도 되는 거야, 뭐야……. 나는 차에 앉아 유천과 왔었던 레스토랑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 사람들 단체로 짰나, 아니면 저 레스토랑이 부자들만 가는 유명한 곳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왜? 싫어?” “아, 아뇨.” 재영의 물음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재영은 또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고는 차에서 내려섰다. 나는 얼른 재영을 따라 내려서는 다시 한 번 레스토랑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유천아, 나 피하지 않을래, 네 기억을 지우려 애쓰기보다 그 기억을 전부 끌어안은 채 추억할 거야. 어차피 희미해질 기억이라면, 애써 지금부터 서둘러 지우지 않을래.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숨 막히는 고통의 시간보다, 너와의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맞지……?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재영을 따라 레스토랑으로 다가가던 순간이었다. 딸랑, 하고 문이 열렸다. 순간 당황해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아…….” 문을 나서던 명희 씨와 눈이 마주치고… 명희 씨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서는 익숙한 실루엣에는 숨이 멎었다. “…….” “…….” 기묘한 정적……. 스스스 바람이 메마른 나뭇가지를 스쳐지나갔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마주친 유천의 눈동자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핑하니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유천의 희미하게 죽어버린 눈동자와 파리한 안색에 가슴이 콕콕 쑤신다. 유천의 아랫입술이 부르터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박유천은 스트레스가 심하면 몸이 아프다고 했던 명희 씨의 말이 갑자기 왜 떠오르는 건지……. 딸랑, 소리를 내며 레스토랑 문이 다시 열렸다. 현 실장이었다. 그리고 나를 알아본 현 실장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또 다시 쌀쌀한 바람이 스산하게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하얗게 토해져 나오는 입김만이 조용히 움직일 뿐, 주위는 고요했다. 나풀나풀 눈이 한 송이 떨어져 내렸다. 둘, 셋. 그리고 무수히……. 목에 뭔가가 걸린 것 같다. 몇 번이나 그것을 삼켜 넘기려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된다. 가슴이 한 구석이 서늘하여 저절로 몸이 덜덜 떨려온다. 내 안에서 또 바다가 출렁거리는데, 겉으로는 단 한 방울도 넘쳐나지 않아 눈이 뻑뻑하다. 아득하게 현기증이 느껴졌다. 눈이 내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눈 속에 인형처럼 숨을 멈추고 선 우리들은……. 찰칵!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반짝였다. 그제야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현 실장이 서둘러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기자로 보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슬슬 유천의 결혼 소식이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모양이다. “가요…….” 나는 차마 유천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재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재영에게 유천은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희미하게 불가리 블랙 향이 났다. 순간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혹여 재영이 볼까 봐 서둘러 볼을 훔쳐내며 싱긋 웃어주었다. 등 뒤에서 유천과 명희 씨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레스토랑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도, 계속 정신이 멍하다. 잔을 집어 드는데 손끝이 뻣뻣하고 싸늘하다. 이럴 때 박유천은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꼭 쥐어 주거나,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있게 했었는데……. “괜히 왔나…….” 재영의 자책어린 중얼거림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이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내가 아파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재영 씨, 저 화장실 좀…….” 자꾸 눈물이 난다. 눈을 깜빡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밖으로 넘치지 못하니 눈물은 전부 안으로 흘렀는지, 코가 자꾸 막혀 숨쉬기가 힘들다. 찬물을 틀어 몇 번이고 세수를 했다. 코끝이 얼얼해질 만큼 물을 끼얹자 비로소 혼란스럽던 감정이 진정된다. “…….” 나는 페이퍼 타월로 얼굴의 물기를 대충 닦아내며 거울 안의 나를 응시했다. 박유천 만큼이나 파리한 얼굴……. 물에 젖은 얼굴이 홀쭉하다. 박유천은 내 통통한 볼을 양 손으로 꾹 꼬집고는 꼬맹이라고 놀렸었는데. 잘 했어. 잘 한 거야, 김준수. 내 자신을 칭찬하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 물기 어린 미소에는 내 가슴 속의 거울이 파삭, 소리를 내며 깨져나간다.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마음의 조각들……. 날카로운 단면이 심장에 와서 박히는지 가슴이 따끔거려 죽겠다. “씨발…….” 한숨처럼 욕설을 뱉어내며, 페이퍼 타월 뭉치를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사랑은 때로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리하여 이렇게 사람을 무너뜨린다……. + “그러니까, 그 꼬맹이가 뭐랬는지 알아요?” “뭐랬는데?” “아하하, 유치원이래. 이랬어요. 네? 유치원이 어디가 어때서! 어? 나는 유치원 다녔는데!” “꼬맹이, 너는 지금도 다니는 거 아냐?” “아니라니깐!” 재영의 놀림에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주정이다. 그래, 이건 100% 주정이다. 괜히 엄한 재영을 붙들고 나는 주정을 부리고 있다. “미스터얼 좐스 잉글리시 스쿠-울 다니는데여. 이러고 있어, 꼬맹이 주제에!” “으하하하하!” 재영은 허리까지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씩씩대며 앞에 놓인 위스키 병을 집어 들고 잔에 따랐다. 병이 고급스럽고 입 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 굉장히 비싸 보이지만, 오늘은 내가 좀 마셔야겠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또 김준수표 특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별에 아플 때는 식욕이 없지만, 그 때가 지나면 또 배가 고파온다. 가슴은 아파 죽겠다는데, 몸은 살겠다고 밥을 달란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다, 인간의 생존 본능이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사람은 이별을 버티며 또 하루를 살아낸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동물인 거다……. “이거 무슨 술이에요, 왜 이렇게 맛있어?” “맛있으면 많이 마셔.” 재영은 쿡쿡 웃으며 자신의 잔을 내 잔에 부딪쳐왔다. 나는 벌컥벌컥 잔을 비우고 촌스럽게 크- 소리를 냈다. 그런 날 보고 재영은 또 귀엽다는 듯 웃었다. 위스키 마시는 법 같은 건 잘 모르겠다. 그냥 소주 마시듯, 맥주 마시듯, 먹고 있다. 애초에 박유천처럼 잘난 집안에서 태어나 상류층의 교양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닐 뿐더러, 무슨 술을 어떻게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몸 안에 들어가면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그래, 박유천이 친절하고, 매너 좋은 것이 사실은 그 교육 덕분이었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닫고 있다. 그 녀석을 바람둥이로 만든 건 부모님들이었다는 소리다. 마음은 전혀 없는데 몸에 익은 습관 때문에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게 되고, 그것이 여자들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오히려 나에게 했던, 까칠하지만 다정하고, 장난기 많았던 모습이 박유천의 본 모습이었다는 걸, 나는 헤어진 후에야 깨달아 버렸다. 정말 씁쓸하게도 말이다. 진즉에 알았다면 그렇게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거 얼마에요? 비싸 보이는데.” “500.” 엥?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술을 따르던 손을 멈췄다. 재영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또 쿡쿡 웃는다. 500이면 단위는 뭐야……?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레 한 마디를 뱉어냈다. “…원?” “풉!” 재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 안에 든 술을 내게 몽땅 뿜어내고 말았다. “으하하하하!” 재영 씨, 즐거우신가 봐요……. 나는 눈을 꾹 감고 점점이 얼굴에 튄 술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원이 아닌가……? 하긴, 병 값만 해도 꽤 비싸겠다. 아, 진짜, 김준수, 이러니 꼬맹이 소리를 듣지……. “아, 미안.” 한참이나 배를 끌어안고 웃던 재영은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티슈를 몇 장 뽑아 건넸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재영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아, 무슨 말을 하지? “회사 일은 어때요? 그 소송 걸린 거.” 그래, 너 당첨. “질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어떡해요?” “회사 팔아치우고, 은퇴해서 너랑 살지, 뭐.” “누가 살아준대요?” “지금도 같이 살잖아.” 재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쿡쿡 웃었다. 나도 푸스스 웃어버렸다. 그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아 조금 찔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자취방에 틀어박혀 있었다면, 이렇게 의연하게 이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 같다. 분명히 밥도 안 먹고, 찔찔 울어댔을 거다. “재영 씨.” “어.” “방 구경 시켜줘요.” 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넓은 집에서 그의 방만 못 봤기에 꺼낸 말이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가? 나는 도르륵 눈을 굴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재영은 그런 날 보며 한 쪽 입 꼬리만 올려 피식 웃었다. “와 봐.” 재영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쪼르르 뒤를 따랐다. 아, 너무 많이 마셨나? 순간 거실이 크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제 모습을 찾는다. 잠시 비틀거리는 나를 돌아보며 재영은 또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가 방문을 열자마자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이 두 곳 있었는데, 책이 꽉꽉 들어찬 서재와, 초현대식 부엌이다. 그런데 한 곳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재영의 아름다운 이 방. 재영의 방은 무슨 인테리어 화보를 보는 것처럼 고급스러운 앤티크 가구로 꾸며져 있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방을 두리번거렸다. 복도를 지나다니며 슬쩍 훔쳐 본 적은 있지만 직접 이렇게 본 것은 처음이라 그저 감탄사만 나온다. 커다란 침대와 책이 가득 꽂힌 책장, 중앙에 자리 잡은 간이 티 테이블 세트, 그리고 그 앞에 자리 잡은 벽난로와 그의 향수와 화장품이 가지런히 정리된 화장대, 한 쪽 벽면을 온통 차지한 프랑스식 창문과 연결된 발코니까지. 제길, 그의 방 하나가 시골에 있는 우리 집 거실보다 넓다. “들어와.” 재영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거야? 괜히 주눅이 들어 쭈뼛거리며 재영을 따라 들어갔다. “왜 그러고 있어. 구경시켜 달라며.” 재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싱긋 웃었다. 나는 쭈뼛쭈뼛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괜히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파르륵 책장을 넘기자 영어가 빽빽하다. “이, 이거…….” “어?” “원서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재영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잠시 응시했다. “이거… 다 읽었어요?” “반쯤.” 헐… 진짜? 나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재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엄청난 양의 책이다. 3/4는 우리말로 되어 있다고 해도 나머지 양이 장난이 아닌데. 부럽다… 나는 전공 책 몇 권 읽는 것도 허덕이는데……. 어쩐지 발음이 남다르다 했다. 하긴, 집이 미국이랬지. 내 영어 실력으로 이 책을 다 읽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보다가 술기운까지 합쳐져 어질어질해져 버렸다. 씨발, 세상엔 왜 이렇게 잘난 놈들이 많아. 박유천을 포함해서 내 주위에 전부 다! 괜히 짜증을 내며 책을 꽂아 넣고 돌아섰다. 재영이 앉아있는 침대 옆에 향수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병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대체로 깔끔한 성격인 것 같다. “무슨 향수가 이렇게 많아요?” “그냥, 출국할 때마다 하나씩 사 모았더니.” 나는 특이한 병 하나를 열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다르다. 이게 아닌데. “재영 씨가 잘 쓰는 향수는 뭐에요? 그, 알마니?” “거기 까만…….” “잠깐, 잠깐! 내가 맞춰 볼게요.” 내 말에 재영은 또 한 쪽 입 꼬리만 올려 피식 웃었다. 나는 이것저것 병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서도 재영이 자주 쓰는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박유천의 방에도 늘 희미한 담배 냄새와 불가리 블랙 향이 났는데……. 쌉싸름하고 어른스러운 박유천의 향기. 나는 아직도 명희 씨의 별장에서 유천에게 안겨 맡았던 불가리 블랙의 향기를 기억한다. 아, 재영의 향수 냄새가 어떤 거였더라? 뚜껑을 열었던 향수병들의 향기가 뒤섞여 그 어느 것도 구별할 수가 없다. 나는 재영에게 다가가 그의 목덜미 근처에 코를 대고 다시 향기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향수병을 열어 냄새를 맡고, 또 재영의 향기를 확인하고, 향수병을 열어보고……. 몇 차례나 반복했더니 더더욱 향기가 구별되지 않는다. 내가 구별할 수 있는 향기는 오직 박유천의 불가리 블랙뿐인데……. 향을 많이 맡았더니 더 술기운이 올라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재영의 옆에 털썩 앉았다. “못 찾겠어요…….” “…….” “불가리 블랙이 없네…….” 힘없이 중얼거렸다. 재영은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는 끌어당겨 안았다. 이마에 닿은 그의 입술이 서늘한 것을 보니 내 몸에 열이 많이 나나 보다. “내일 사올게.” “…….” “그럼 되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재영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이마, 눈, 볼 위, 그리고 코끝을 지나 입술에……. 몇 번이나 가볍게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 허리를 안아오는 재영에게 의지해 나는 천천히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재영의 입술이 살짝 떨어져나갔다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잠시 망설이다가는 입술을 열어주었다. 천천히 재영의 혀가 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의 혀와 손끝이 모두 서늘하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내 체온이 재영보다 확연히 높은 것이 느껴진다. 손을 둘 곳이 없어 난감하다. 지금까지 재영과의 입맞춤은 내 의지였다기보다는 재영에 의한 일방적인 키스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재영은 내 손을 잡아서는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촉, 촉, 와 닿는 입술의 느낌은 부드럽고, 입술 위를 핥짝이는 그의 몸짓도 여전히 조심스럽다. 연한 간접 조명… 정신이 흐릿해질 정도로 잔뜩 오른 술기운과, 방안에 떠도는 재영의 향기……. 혀를 감아올리는 재영의 목을 좀 더 당겨 안자, 재영은 좀 더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전에 없이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잘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박유천인지, 이재영인지. 사랑의 상처를 다른 사랑으로 치료하라는 재영의 말은 확실히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다. 심지어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박유천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비슷하기까지 하니까. 어쩌면 유천과 헤어진 지금, 나는 박유천을 닮은 이재영을 원하는 것일지도……. “하아…….”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재영의 몸짓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천천히 단추를 풀어내는 재영의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그의 입맞춤에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준수야.” 재영의 색이 옅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본다. 새삼 그의 눈동자 색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옅은 갈색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 박유천의 눈동자는 까맣고 서늘해서 화가 났을 때는 맹수처럼 파랗게 빛나는데. “해도 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몃 웃음이 난다. 허락을 구하는 방법도 이렇게 다르다. 박유천은 ‘싫으면 지금 말해’였다. 개새끼, 싫다고 했어도 할 거였으면서……. 자꾸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가벼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재영의 손이 단추를 풀어내자 상체에 싸늘한 공기가 와 닿는다. 맨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이 닿는 곳마다 화끈거린다. 가슴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서… 이윽고 허리에……. 나는 간질간질하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느낌에 어깨를 조금 웅크렸다. 그리고 재영의 입술이 귀에 와 닿았을 때……. “자, 잠깐만, 유천아.” 나는 지나친 쾌감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 말았다. 재영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내가 뱉어낸 것이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자, 나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아… 저, 저기 재영 씨…….”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쭈뼛쭈뼛 웃었다. 재영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는 피식 웃었다. “됐다, 꼬맹이.” 그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시 단추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작게 속삭이자 재영은 쪽, 하고 베이비 키스를 해 왔다. 미안해서 눈도 마주칠 수가 없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는 박유천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사무치게 깨닫고 있었다. “자자.” 재영은 그대로 나를 품에 안더니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안겼다. 아직 가시지 않은 몸의 열기. 술기운 때문인지 온 몸에서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린다. 재영과 유천, 양쪽에 느끼는 죄책감에 가슴이 답답하다. “하아…….” 언제쯤 나는 널 잊을 수 있을까? 힘들다, 박유천……. + 운명이라는 것은 대개 잔인하지만, 아주 가끔 호의를 베풀 때가 있다. 과연 지금 이 상황을 호의라고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진형의 결혼식에 와 있었다. 동아리의 윤진형이 사고를 쳤단다. 여자 친구의 배가 점점 불러오자 급하게 식을 올리게 되었다며 얼마 전에 연락이 왔다. 친구 녀석이 결혼을 하는 것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 좀 당황했다. 그래서 박유천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여기에 도착했던 것이다. “어, 박유천.” “축하한다.” “고맙다. 너도 결혼한다며? TV에서 난리 났더라. 제수씨 엄청 미인이던데?” 처음에 유천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에 서 있던 현 실장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가 박유천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의식중에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나는 정말 멍청한가 보다. 박유천과 윤진형은 같은 과이기까지 하단 말이다. 어째서 유천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 또 눈물 나면 어떡하지? 남의 경사에서 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축의금 냈으니까 그냥 갈까? 하지만 동기 중에 처음으로 스타트를 끊는 녀석인데. 나는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채 나지막이 들려오는 유천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유천아, 피로연 올 수 있지?” “가야지.” “신혼여행 갔다 와서 다시 한 번 뭉치자. 너희들한테 너무 급하게 연락해서 미안하다.” “언제 떠나는데?” “내일 아침.” “그래, 그럼.” “근데 왜 준수랑 따로 왔냐? 만날 붙어 다니던 녀석들이.” “준수 왔어……?” 아, 윤진형 저 새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슬쩍 기둥 뒤를 내다보다가 흠칫했다. 박유천의 서늘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다시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씨발, 살 빠지니까 더 멋있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 가슴을 부여잡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 들켰으니 도망가기도 틀렸다. 오늘 하루는 꼬박 박유천을 봐야겠구나 싶어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해진다. 그냥 피로연 갔다가 일찍 빠져 나가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조심스레 다시 기둥 너머를 내다보았다. 하지만 박유천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아…….” 괜히 어깨가 축 쳐졌다. 난 뭘 기대한 걸까? + 쭈뼛쭈뼛 눈치를 보다가 박유천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동기 녀석들이 모여 앉은 자리로 다가갔다. 다들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 어리둥절한가 보다.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처음 수트를 입는 놈도 많아서 다들 가관이다. “어, 왔냐?” “응.” “오, 김준수, 간지 난다? 일하는 남자의 포스냐?” 친구 녀석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에 피식 웃어주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친구 결혼식에 간다니까 재영이 선물이라며 지금 입은 이 옷을 억지로 떠안겼다. 입어보니 딱 맞는 것을 보면, 일부러 내게 맞춰 사온 것 같다. 나보다 재영 쪽이 키가 훨씬 크니까 재영의 옷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안쪽에 무슨 일련번호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굉장히 비싼 옷인 것 같은데 덥석 받아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영이 여기까지 따라온다는 것은 간신히 말렸다. 이재영이 나타났다가는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될지도 모른다. 친구 녀석의 결혼식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저녁 때 데리러 온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가끔 보면 그 사람도 묘하게 독점욕을 내비치기도 한다. “신부 봤냐?” “신부가 뭐냐? 제수씨라고 해야지.” “제수씨? 야, 영 어색하다.” 몇몇 녀석은 축의금을 받는 등 진형의 식 진행을 돕고 있고, 나머지 녀석들은 키득거리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 박유천과 나만 방학 전과 후가 180도 달라져 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예식이 시작되었다. 진형이 성큼성큼 버진 로드를 걸어 들어오자 우리는 철딱서니 없는 청춘들답게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이어서 결혼행진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은 그야말로 꽃처럼 예쁘고 화사했다. 우리와 동갑의 어린 신부는 너무나도 행복한 듯, 생글생글 웃으며 버진 로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유천과 명희 씨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에……. 지난주에 레스토랑 앞에서 유천을 본 후, 드디어 매스컴에서 유천과 명희 씨의 결혼소식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L그룹으로 흡수 합병되는 유진 어패럴의 기사는 ‘세기의 결혼’이라는 제목을 달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유진 어패럴은 아마도 박유천이 후계의 자리를 잇게 되지 않겠느냐는 추측 기사부터 시작해서, 유천이 출현했었던 CF가 다시 재조명을 받는 등, 박유천은 일약 엄친아 CF모델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 내내 TV를 보지 않았다. 온통 L그룹의 결혼 이야기였기에 속이 쓰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박 회장님이라는 분이 얼마나 수완이 좋은 분인지를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이젠 정말 국내에서 L그룹이 패션 업계에 진출한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드르륵, 의자를 조금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와서 앉기에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가락에서 익숙한 반지가 반짝, 하고 빛났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유천 씨.” 바로 곁에서 들려온 현 실장의 목소리에는 숨도 못 쉬고 눈만 깜빡였다. “이 자린…….” “친구랑 인사도 못 해요?” 유천의 싸늘하고 강압적인 말투. 유천은 화가 났을 때 꼭 저렇게 말을 했다. 현 실장이 좀 머뭇거리다가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친구라는 단어에 가슴이 싸하다. 나는 한참이나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얼핏 곁눈질을 했을 때, 박유천은 파리한 얼굴로 식이 진행되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확실히 살이 빠지고 나더니 더 멋있어졌다. 아니, 분위기 자체가 좀 변한 것 같다. 전에도 박유천은 멋있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소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선이 예리하게 날이 서고, 서늘하게 카리스마를 풍기는 것이, 완벽하게 남자가 되어 있다. “오랜만이다.”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응…….” 그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했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움직임을 빨리 한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자꾸 내 몸은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기를 쓴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유천의 반대편으로 조금 몸을 떨어뜨렸다. 숨 쉬기가 힘들다. 뻣뻣하게 경직된 어깨가 결릴 정도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어쩌고저쩌고……. 나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주례사를 대충 흘려들으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이게 운명이 베풀어준 호의라면 그 운명이라는 놈을 저주해줄 테다……. + 핸드폰이 진동하기에 주머니를 뒤적였다. 유천이 흘깃 나를 곁눈질한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재영이다. 나는 유천에게서 조금 몸을 돌리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네.” - 언제 올 거야?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한 시간 정도.” - 한 시간? “네.” - 혹시 거기 박유천 있어? 재영의 물음에 잠시 표정이 굳었다. 왜 묻는 걸까? “아, 아뇨. 없어요.” 말까지 더듬으며 거짓말을 해버렸다. - 음… 알았어. 한 시간 후에 데리러 갈게. “네.” 나는 전화를 끊으며 또 유천의 눈치를 보았다. 뭔가 이상하다. 왜 재영에게 박유천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재영의 전화를 받으며 유천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아, 정말 이런 거 싫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자, 다들 긴장해라. 벌칙을 말하겠다.” 높은 스툴에 앉은 민섭 형이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제법 왕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룸은 와글와글 소란스러워졌다. 동갑내기 신랑신부여서 그런지 피로연에 모인 사람들도 다들 또래인데다가, 처음 겪는 친구의 생일이라 많이도 몰려와서, 꼭 과 연합 미팅 같은 분위기다. 여기저기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웃고 떠드는 가운데, 신랑신부가 자리 잡은 우리 테이블에서는 왕 게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까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지 말지를 계속 고민 중이었다. 술이 오르면 내가 사라진 것도 모를 테니, 그때 살짝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들 얼큰하게 술이 올랐음에도,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유천의 존재가 자꾸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이 아니면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자꾸 귀가를 미루고 있었다. “벌칙은! 러브 샷 3단계! 입으로 술 먹여 주기!” “오-.” “좋다!” 민섭 형의 말에 환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들 이 게임이 신혼부부에게 뭔가를 시키기 위한 의도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하하하, 그래서 가기로 했어?” 친구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유천의 낮은 웃음소리. 그리고 술을 들어 마시는 그의 팔이 내 팔에 조금 닿았다. 나는 어깨를 웅크려 닿은 팔을 떨어뜨렸다. 유천이 슬쩍 나를 곁눈질 하는 것이 보였지만 모르는 척 숫자가 적힌 쪽지를 펴들었다. 미치겠다. 자꾸 박유천과 무릎이며 팔다리가 닿아서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는다. 우린 헤어졌는데, 분명히 헤어진 게 맞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꼭 사귀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그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낼 때 또 팔이 내 몸에 닿았다. 뒤로 흠칫 물러났다. 유천이 또 나를 흘깃 곁눈질한다. 서둘러 쪽지로 눈을 돌렸다. 손에 쥔 쪽지에는 숫자 4가 적혀 있다. 재수 없어. 왜 하필 4야. 괜히 기분이 침울해진다. 유천이 찰칵, 하고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이 보였다. 이 새끼는 술을 꽤 많이 마셨는데도, 또 잔을 받아들고 있다. 술이랑 원수 졌냐? 저러다 집에 기어들어가겠네…….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자꾸 곁눈질을 하느라 눈도 아프고, 고개도 아프고 죽겠다. 사실 그의 옆에 앉아있기가 너무 불편하고 힘들다. 그냥 집에 갈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에 놓인 물을 조금 마셨다. “자자, 번호 발표하겠다. 벌칙은 아까 말했지? 3단계 러브 샷이다.” 민섭 형의 말에 왁자하던 테이블이 조금 조용해졌다. “번호는!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기분이 가장 좋을… 7번! 그리고, 반대로 그 사람에게 코 꿰게 생긴… 4번!” 에? 민섭 형의 말에 다시 쪽지를 펴서 확인했다. 내가 4번인데, 저건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섭 형을 응시했다. “자자, 누구야? 4번, 7번?” 싱글싱글 웃는 형의 미소가 예사롭지가 않다. 도대체 뭘까? 나는 쭈뼛쭈뼛 손을 들어 보였다. 동시에 민섭 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준수 너 몇 번인데?” “4번이요.” “진짜?” 내가 쪽지를 펴서 보여주었더니 형의 표정이 더 이상해진다. “그럼 7번은?” “저요.” 유천의 대답에 다들 잠시 표정이 굳었다. 민섭 형이 쪽지를 돌렸던 후배를 툭 치면서 ‘뭐야?’라고 묻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게 신랑신부에게 갔어야 하는 것들인가 보다. 테이블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더니 왁자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그냥 둘이 1단 러브 샷 한 잔 하고 다시 돌려.” 성훈 형의 말에 또 웃음이 터진다. 하긴 우린 연인도 아니고, 입으로 술 먹여 주기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형에게 소주잔을 받아들었다. “자, 유천이도.” 유천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형에게서 잔을 받아 들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토해내는 그와 눈이 마주쳐서 또 흠칫 시선을 피했다. 러브 샷, 러브 샷, 하며 다들 난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다. 유천은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가 뱉어내는 연기에 내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자 유천은 손으로 연기를 휘휘 저어 없애며 잔을 내밀었다. 아, 정말 미치겠다. 내가 왜 진즉 안 가고 여태 여기 않아 있었던 걸까? 미친 듯이 후회가 밀려온다. 그를 아직 사랑하지만, 헤어지자고 모진 말을 먼저 한 것은 나다. 그의 앞에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변해버린 유천의 분위기에는 자꾸 겁을 먹게 된다. 표정이 사라진 유천의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보기라도 하면 몸이 얼어붙어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이다. 러브 샷이라니, 유천과 그저 슬쩍 몸이 스치기만 해도 불에 덴 듯 몸을 움츠리는 내게 너무 가혹한 처사 아냐? “러브 샷, 러브 샷!” 사람들의 환호는 더욱 커졌다. 나는 쭈뼛거리며 유천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유천의 팔에 내 팔을 감았다. 사내새끼 둘이 러브 샷을 한다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다른 테이블에서도 구경을 오고 난리가 났다. 나는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오른 채, 계속 유천의 시선을 외면하며 입으로 잔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유천이 내 소주잔을 빼앗아 탁!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내 뒷목을 덥석 잡아 왔다. 곧이어 그의 손이 강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으아, 뭐야! 진짜 했어!” “씨바, 박유천, 남자다!” “꺄악, 유천 오빠!” “헉, 저거 준수야?” 주위에서 경악과 환호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유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술을 억지로 벌리더니, 그의 타액이 섞인 미지근하고 쓰디 쓴 소주를 내 입 안에 흘려 넣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입 안으로 넘어온 술이 어찌나 쓴지 왈칵 토기가 넘어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유천을 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환호가 이어졌다.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황망한 시야에 유천이 서늘하게 나를 보며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는 것이 보였다. “욱……!” 또 다시 속에서 울컥 쓴 기운이 넘어온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렸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손을 덜덜 떨며 서둘러 문을 닫고는 그대로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이 하얗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나도 모르게 입에서 계속 욕설이 뱉어져 나온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술기운과 당혹감에 온 몸이 심장이라도 된 듯, 박동을 따라 욱신, 욱신거린다. 한참이 지나서야 쌕쌕 몰아쉬던 숨결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멍하니 세면대로 다가갔다. 아직도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미친놈, 정말 미친 거야…….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찬물을 받아 몇 번이고 세수를 했다. 어질어질한 술기운이 가시도록, 한참이나 그렇게……. 달칵. 갑자기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선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면대에 손을 짚고 섰다. 거울 속에 유천이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서 있었다. 또 심장이 속도를 빨리 하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정말 심장병이라도 생기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턱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유천이 불쑥 눈앞에 손수건을 내밀었다. “…….” “…….” 나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는 집어 들어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손수건에서는 쌉싸름하게 불가리 블랙 향이 났다. “야.” 유천의 부름에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가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또 후회가 밀려온다. 아까 갔다면 유천과 이렇게 마주칠 일은 없었을 텐데. “씨발, 대답 안 하냐, 김준수.” 순간 울컥하여 유천을 노려보았다. 박유천의 입에서 욕이 나오다니 별 일이다. 내가 욕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서 자기도 잘 안 했는데. “왜 피해.” “내가 뭘?” “나 피했잖아.” “내가 언제?” “지금까지 계속. 눈도 안 마주치고, 조금만 닿아도 흠칫거리고.” “안 그랬어.” 심장이 너무 미친 듯이 뛴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겁이 나 죽겠다. 나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유천이 성큼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의 옆쪽으로 비켜가기 위해 한 걸음을 옮겼다. 유천은 다시 앞을 가로막고 섰다. 나는 또 한 걸음 그의 옆쪽으로 발을 내딛었고, 유천 역시 또 내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나는 짜증이 담긴 눈으로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비켜.” 내 싸늘한 한 마디에 유천은 오히려 달칵, 문을 잠가 버렸다. 공기 중에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를 돌아보는 유천의 서늘한 시선에는 또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박유천은 지금 취했다. 괜히 그의 기분을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소리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아플 지경이다. 호흡이 자꾸 가빠져서 숨쉬기도 힘들다. 유천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 손끝하나도 댈 수 없는 이 상황은……. “…….” “…….” 유천이 갑자기 성큼 다가섰다. 흠칫 놀라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어이가 없다는 듯 유천은 짧게 웃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유천의 눈치를 봤다. 유천이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버티려고 했지만 겁을 먹고 또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순간 유천의 얼굴에 싸늘히 냉기가 스쳤다. 그는 그대로 성큼성큼 내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계속 뒷걸음질을 쳐 유천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몇 걸음 안 되어 등에 싸늘하게 타일이 와 닿았다. 턱, 하고 벽을 짚어오는 유천의 커다란 손. 나는 긴장한 눈으로 쭈뼛쭈뼛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왜 피해?”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바퀴벌레야?” “…….” “내가 전염병 환자야?” “…….” “씨발, 내가 전염병 환자냐고!” 유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에 놀라 흠칫 어깨를 떨었다. 금세 입술이 바짝 말라버렸다. 겁에 질려 자꾸 호흡이 불안정해진다. 등에 오싹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아랫입술이 가늘게 떨려오기에 이로 꾹 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유천의 목소리에 섞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에……. “그, 그런 거 아니야…….” 어렵게 뱉어낸 내 말에 유천은 짧게 웃었다. 그의 고통스러운 미소가 심장을 쿡 찔러왔다. 우린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박유천에 대한 기억을 전부 지워버리고 싶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조차도 애초에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어디선가 운명이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 잔혹하고 차가운 미소에는 소름이 끼친다. 운명은 손에 쥘 수 없었던 것을 잠시 갖게 해주더니, 그것이 나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자 다시 가져가 버렸다. 애초에 우리에게 해피엔딩을 쥐어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우리를 죽여 버릴 생각인 걸까……? 아니, 우린 이미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 유천의 서늘하고 텅 빈 눈동자에서, 나의 서글픈 미소에서…….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낸다. 억지로 입 안으로 밥을 밀어 넣고,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한다.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고, 사람들에게는 거짓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코끼리의 상아무덤을 향한 마지막 걸음…, 혹은 거북이 무덤을 향한 바다거북의 마지막 유영처럼…,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가슴에 담은 채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눈물이 고인다. 그를 계속 보고 있다가는 내가 먼저 죽어버릴 것 같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 떠.” 어깨를 잡아오는 유천의 말에 또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목소리에 고통이 가득하다. 몸에 와 닿는 익숙한 체온에는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잘 참고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흘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반지 어쨌어?” 대답하지 않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심호흡을 했을 뿐. “김준수, 반지 어쨌어?” 아프다. 어깨를 더 꽉 잡아오는 유천의 거친 손길.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이렇게 온몸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는 나는, 정작 가슴이 너무 아파서 금세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성큼 불가리 블랙이 다가섰다. 얼른 고개를 돌려 유천의 입술을 피했다. “…….” “…….” 한참이나 정적이 무겁게 떠돌았다. 그리고 다시 입술이 가까워졌다. “안 돼. 하지 마, 유천아.” 나는 또 고개를 돌려 피했다. 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가면 안 된다. 유천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 나는 재영에게 안기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애써 녹이 슨 문을 밀어 열며, 재영을 마음에 담으려고 애쓰고 있다. 사랑은 아니지만, 안온한 일상은 가능할 것이다. 혼자서는 박유천을 비워내는 것이 불가능하여, 재영의 마음까지 이용하고 있는 나는 정말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뼛속까지 어린애임이 틀림없다. “…왜 안 되는데?” 유천의 싸늘하게 식은 손이 턱을 잡아 돌렸다. 그 섬뜩한 느낌에 순간 숨을 멈췄다. 감은 눈 위, 이마와 볼 위로, 유천의 차가운 시선이 따끔따끔 쏟아져 내렸다. 얼음송곳처럼 예리하고 서늘한 그의 상처. 보듬어 줄 수 없어 더 아픈 마음……. “씨발, 누가 안 된대?” 계속 이어지는 유천의 거친 욕설에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는다. 등에 닿아 있는 타일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에 자꾸 몸이 떨린다. “…….” “…….” 또 침묵이 흘렀다. 잠겨버린 문 저편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풍경이 펼쳐져 있을 테지만, 우리가 있는 공간만이 세상에서 동그랗게 유리된 채 부유한다. 심장이 콕콕 쑤셔 대서 자꾸 미간이 일그러진다. 눈을 뜨고 싶다. 눈을 뜨고 유천을 똑바로 보고 싶다. 그리고는 세상 끝, 어디까지라도 달아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안 된다. 내가 너를 놓아주는 것이 널 위한 최선이라는 걸 깨달아버린 이 시점에서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왜? 라는 의문만이 자꾸 떠돈다. 나는 왜 하필 너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헤어졌는데도 왜 나는 네가 좋아서 미칠 것 같을까? 유천아, 네가 날 죽여가……. 네 식어버린 눈동자가, 파리한 얼굴이, 서늘한 표정과 말라비틀어진 네 몸이 날 죽이고 있어. 너도 그래? 나 때문에 너도 이렇게 죽을 것처럼 아파? “내꺼였어.” “…….” “이 눈, 이 입술, 그 손발, 네 마음까지, 전부 다 내꺼였다고.” 유천의 손가락이 가만히 입술을 쓰는 느낌이 났다. 어느새 유천의 따스한 숨결이 가까워져 있다. 하지만 차가운 손끝……. “…이젠 아니야.”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필사적으로 숨을 억눌렀다. 거짓말을 하지 못해 입을 다물던 김준수는 이제 없다. 목 아래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아 올라온다. 나도 모르게 흐느끼고 있다. 눈물 없이 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리고 유천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 “아직도 내꺼야.” 마치 주문을 걸 듯, 그렇게……. “……!” 몸이 강하게 벽에 밀어붙여졌다. 그대로 유천의 입술이 부딪혀 왔다. 놀란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유천은 더 단단히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는 손목을 잡아 눌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는 유천의 손길이 거칠다. 그의 숨결에서는 달착지근하게 술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했다. 유천의 싸늘한 손이 다시 턱을 잡아 돌렸다. “유천…, 읍……!”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다시 한 번 입술이 막혔다. 부딪힌 입술이 터졌는지 비릿한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유천은 아랑곳 않고 거칠게 입 안을 헤집었다. 폭력에 가까운 그의 몸짓에 또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를 잃을 것 같은 예감이 들 때마다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 유천의 본능적인 소유욕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당할 때는 힘들고 아프다. 한참이나 실랑이가 이어졌다. 내가 유천을 밀어내며 입술을 피하면, 유천은 또 다시 턱을 잡아 돌리며 입술을 부딪혀왔다. 입술이 너덜너덜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친 입맞춤이었다. 숨을 쉬기가 곤란하다. 유천에게서 흐릿하게 번져나는 불가리 블랙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그렇게 유천의 반강제적인 키스가 이어지던 순간이었다. 똑똑! 잠긴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유천 씨’ 하고 나지막이 들려온 현 실장의 목소리에 나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유천도 잠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유천은 열린 화장실 칸 안으로 나를 확 밀어 넣고는 다시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방해받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고스란히 실린 그 행동에 나는 더욱 더 겁을 집어먹어 버렸다. “유, 유천아…….” 유천은 그대로 자신의 넥타이를 슥 하고 풀어내버렸다. 싸늘히 나를 응시하는 유천의 눈동자는 맹수처럼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무섭다. 결국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시나무 떨 듯 몸을 가늘게 떨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좁은 칸 안에서 갈 곳이 어디 있겠으며, 물러날 걸음이 몇이나 되겠는가? 등 뒤에 벽이 닿아 다시 멈춰 섰을 뿐이다. 유천이 성큼 다가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시 입술이 부딪혀왔다. 터진 아랫입술이 따끔거렸다. 유천의 혀를 따라 비릿한 쇠 맛이 밀려들었다. 유천의 손이 내 넥타이를 풀어내자, 그것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그리고 단추를 풀어내는 손.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나는 고스란히 입술을 내준 채, 그저 눈물만 흘렸다. 일단 한 번 흐르기 시작하자,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넘쳐난다. 기가 막힌다. 이건 분명 애정 어린 스킨십이 아닌데, 나는 저항 의지를 잃은 지 오래다. 그저 오랜만에 닿아오는 유천의 체온에 가슴이 소란스럽게 두근거리기만 한다.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자제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 …그리고 유천은 내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똑똑! 유천 씨! 또 노크 소리와 현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천의 손이 망설임 없이 버클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 유천의 손목을 서둘러 움켜잡았다. 입술이 조금 멀어졌다. “놔.” “유천아.” “놔.” “너, 너 취했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더듬더듬 늘어놓아봤자, 이미 이성이 날아가 버린 유천에게 먹힐 리는 없겠지만……. 역시나 유천은 짧게 웃었고, 그 냉랭한 미소에 눈물이 고여 또 시야가 흐려진다.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옷에 진한 얼룩을 몇 개 만들어냈다. 힘들다. 이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은 유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마음의 상처. 그 고통의 무게만큼은 나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유천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유천은 지금 나의 태도 때문에 더욱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다. 놓아준 그의 날개를 꺾어, 다시 내 좁은 새장에 가두고 구속하며 이것이 행복이다, 강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이기적이라서 그렇게 할 것이 틀림없다. 고인 눈물이 또 옷깃에 떨어져 내렸다. 그때 유천의 차가운 손이 풀어헤쳐진 쇄골 근처에 와 닿았다. 그 싸늘한 느낌에 나는 어깨를 흠칫 떨며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유천의 눈동자는 내 목덜미 어딘가를 응시한 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제야 지난밤에 재영이 만들어 놓았을 키스마크가 떠올랐다. 조금씩 깊어지는 재영의 스킨십. 내가 그를 박유천이라고 생각하며 키스에 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영은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내가 간혹 내뱉는 유천의 이름에도 그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상처를 받고 있음이 틀림없었을 텐데도……. “뭐야…….” “…….” “김준수, 이거 뭐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미안…, 미안해, 유천아……. 이래서 너한테 못 가. 그 사람의 마음 이용하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나는 자꾸 그 사람한테서 널 보면서 기대. 나는 끊임없이 그에게 사죄하며 눈물을 흘렸다. 혀끝에 와 닿는 비릿한 피 냄새에 또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간다. 우린 이미 엇갈려버렸다. 나란히 걷던 평행선은 끝난 것이다. 안타까운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지만, 걸음을 서두를수록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질 뿐. 운명이란…, 인연이란 건 그런 거다……. 똑똑! 준수야, 안에 있어? 문밖에서 들려온 재영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유천과 눈이 마주치자 또 숨이 막혀왔다. 잔뜩 상처 입은 것이 분명한 그 눈동자는 인형처럼 말갛고 투명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고운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너… 이재영이랑…….”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유천이 차마 뱉어내지 못한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응.”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나는 웃었다.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유천아, 나 더 이상 거짓말 못하겠어. 널 보는 것도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유천아, 제발 나를 놔. 우리 너무 아팠잖아. 이제 그만 서로를 놓고 행복해지자. 그냥 그러자. 응? “너… 아직 그 집에 살아……?” “응. 거기 살아. 계속 살 거야.” 말에 섞여 간간히 터져 나오는 흐느낌이 어찌나 서러운지.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유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유천이 성큼 다가서며 내 양쪽 어깨를 붙들었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 나 때문에 식어버린 손. 내가 죽여 버린 그의 눈동자와, 내가 가져와버려 텅 비어 있을 그의 가슴.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비수를 꽂는다. 내 심장에 박히는 대못은 애써 외면한 채. “하.” 유천은 허탈하게 웃었다. 또 밖에서 노크 소리와 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간 후에 온다더니, 왜 벌써 왔을까? 그도 아마 뭔가를 예감했던 게 아닐까? “넌…….” 유천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또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입술을 깨문 유천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숨이 멎어버렸다. “왜 이렇게 쉬워……?” 박유천이 울고 있다……. 그 커다랗고 정직한 눈동자에 그렁그렁 고였다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한 줄기의 눈물. “난…….” “흑…….” “왜 이렇게 어렵니……?” 나는 무너졌다. 드디어 밀려나오기 시작한 내 안의 슬픔에 가슴을 움켜잡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은 계속 쏟아지는데 전혀 소리를 낼 수 없어 이상한 흐느낌만이 간간히 앙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그리고 붉어진 눈을 깜빡이며 손등으로 볼을 훔쳐낸 유천은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최후. 그의 여윈 등허리에 문득 떠오른 단어가 얄팍했던 마음을 갈가리 찢어낸다. 유천아, 아파 죽겠어. 나 좀 살려 줘……. 그의 뒷모습에 불쑥 손이 뻗어나갔지만 서둘러 거두어들였다. 새는 이제 눈부시게 비상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역할. 그래서… 나는 너를 보낸다. “으아아아!” 유천의 고통스러운 절규와 함께 와장창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달칵,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 현 실장의 목소리. 그리고… 멀어지는 유천의 발소리…….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 칸 밖으로 나왔다. 창백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재영과, 산산이 부서진 거울이 보였다. 방사형으로 깨어져나간 그 수많은 조각들의 중심에는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눈물이 소리도 없이 자꾸자꾸 흘러내렸다. 잠금장치가 고장난 듯, 쉬지도 않고, 줄줄줄……. 웃었다. 허탈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하아, 씨발…….” 재영이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토해내며 다가와서는 나를 끌어안았다. 입술이 따끔거렸다. 재영의 향수 냄새에 섞여 비릿하게 피 비린내가 떠돌았다. 박유천과 내가 죽어 버렸다는 증거……. 확인 사살. 운명은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 멍하니 하루가 간다. 알고 보면 산다는 것도 별 거 아니다. 먹고, 자고, 숨을 쉬면 그만이다. 인간의 영역인 사고 체계를 멈춰도 동물적인 본능으로 어떻게든 알아서 몸은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허기를 느끼면 밥을 찾아 먹고, 멍하니 천정을 보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 다음날의 햇빛이 눈부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개 웃어주면 대답이 된다. 의미 없는 미소지만, 사람들은 만족하고 또 다음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또 웃는다. 다만, 가끔 숨 쉬는 것을 잊는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가슴에 뻐근하게 고통이 밀려오면 오싹하게 한기가 든다. 숨이 차서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다. 어쩌면 이별은 이렇게 사람을 서서히 질식시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나의 일상에 회의가 든다. 내 인생에서 유천이 빠져나가자 삶은 굉장히 단조로운 무채색으로 변해버렸다. 유천을 만나면서 포기했었던,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늙어가는, 평범한 인생 시나리오가 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허했다. 누굴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계속 살아야 하는 건가? 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했을 때조차 외로웠다. 사랑을 잃어버린 나는, 탈피를 마치고 나무 밑동에 버려진 매미 껍질처럼 텅 비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시간도 흐르긴 흘렀다. 내가 이별을 맞아도 전혀 아랑곳 않고, 느릿느릿… 내 영혼을 조금씩 축내며……. 그렇게 유천의 결혼 날짜가 다음 주로 다가왔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유천과 명희 씨의 사진이나 기사가 자세하게 공중파를 탄 적은 없지만, 유천의 CF는 몇 번이나 TV에 소개되어, 박유천은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똑똑하고 잘 생기기까지 한 대기업 일가의 젊은 모델은 단번에 인지도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아마도 박 회장님은 이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 같았다. 유천은 그렇게 차근차근 정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내가 그의 삶에서 비켜선 직후에 말이다. 가끔 TV에 비치는 그의 더 말라버린 몸에는 가슴이 아팠지만 조금쯤은 웃을 수 있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스키장에서 유천이 내게 주고 갔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핸드폰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랑이 끝난 후 가장 두려운 것은, 잊혀지는 것이었다. 날 잊으라고 모질게 밀어내긴 했으나, 사실은 겁이 났다. 정말 내가 그에게서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런 밤은 결국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나는 밤새 거실을 서성였다. 그러다가는 유천의 핸드폰을 쥐고 이리저리 그의 흔적을 뒤적였다. 해지하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음이라 믿었다. 아직도 나를 담고 있기에 마지막 남은 우리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않은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마음이 진정되어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면서도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나만 아픈 게 아니야… 박유천도 이렇게 아파… 그러니까 난 외롭지 않아…….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코를 훌쩍이고 있자면 어느새 재영이 깨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그도 점점 말라갔다. 사랑에 생명력을 고스란히 갖다 바치기라도 한 듯, 그렇게 우리는 점점 말라갔다. 재영의 회사는 경영권이 흔들렸다. L그룹은 기획사의 주가가 바닥까지 떨어지자 공격적인 주식 매수를 통해 아예 재영의 회사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의 법칙을 보았다. 냉혹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그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눈물을 요구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차갑고 무서워서 나는 더욱 재영에게 기댔고, 그는 장미가시를 심장에 박아 넣고 노래하는 나이팅게일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 사람과……. 나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재영은 점점 더 시들어갔다.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혹독하게 지새고 있었다. 한 때는 분명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겨울을……. + 어떤 일은 사소한 오해로부터 시작해서 큰 사건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또 어떤 일은 작은 것을 계기로 쉽게 풀려버리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작은 계기였다. + 주말에는 재영이 2박 3일간 해외 로케를 떠나버렸다. 기분전환 삼아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을 그냥 집에 있겠다고 했다. 지금은 뭘 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를 공항까지 마중하고 벤츠를 몰고 돌아오는 길은 계속 초긴장상태였다. 이 비싼 것을 긁기라도 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의 수리비가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얼마 만에 이렇게 긴장해서 주위를 살피는지 모르겠다. 계속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의무적인 미소만 입가에 걸고 지냈기 때문에, 사실은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날짜관념이 흐려져 있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역시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간신히 주차를 마쳤다. 이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차들 중에는 그나마 재영의 차가 제일 무난하고 일반적인 디자인이다. 유명 연예인이라 오히려 튀지 않는 것을 선택하려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다른 것들은 얼마나 현란하고 고급스러운지 주차하다가 괜히 스치기라도 할까봐 몇 번이나 미러를 확인해야 했다. 시동을 끄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용하고 텅 빈 주차장. 그러고 보니, 주말에 혼자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큰 집에 휑하니 찬 기운이 돌 텐데. 새삼 내 손바닥만 한 자취방이 생각났다. 아, 그 방 월세는 어떻게 되었지? 문득 잊고 지내던 현실을 깨닫자 당황스러워졌다. 주인집에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싶어 서둘러 주머니를 뒤적였을 때였다. 지이이이잉. 핸드폰에서 전해져오는 진동에 깜짝 놀라 손을 뺐다. 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이 든다. 잠시 기다렸으나 핸드폰은 그대로 잠잠해졌다. 다시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니 메시지가 하나 떠 있다. 내용을 확인하고는 미간이 일그러졌다. 누군가가 나의 위치 추적을 시도했다는 문자. 상대방의 번호를 확인했다. 낯익은 11자리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정신이 멍해졌다. 너무 낯익어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꾹꾹 눌러대던 유천의 잃어버린 예전 핸드폰 번호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일까? 찡하게 편두통이 느껴졌다. 충격 탓인지 이명도 들리는 것 같다. 생각해야 되는데, 잘 머리가 안 돌아간다. 뭔가가 흐릿하게 잡힐락 말락 하면서 계속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다. 도대체 뭘까? 나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박유천은 요 석 달 사이에 핸드폰을 네 번이나 바꿨다. 처음에 쓰던 것은 병원에서 나랑 싸우다가 반으로 잘라 창밖으로 던져버렸고, 그 다음 것은 나와 남산에 갔던 날 스태프들이랑 술을 마시러 갔다가 잃어버렸다. 세 번째 핸드폰은 지금 내가 갖고 있고, 아마 지금은 새로운 것을 쓰고 있을 것이다. 친구 찾기 등록이 된 것은 두 번째 핸드폰뿐이다. 내 위치 찾기가 가능하다는 말은 아직도 그 핸드폰이 해지되지 않은 채, 박유천의 명의로 살아있다는 뜻이다. 해지되었다가 다른 사람이 번호를 등록한 것이라면 당연히 위치 추적도 해지되었을 테니까. 유천이 핸드폰을 다시 찾은 걸까? 그래서 그걸 쓰고 있는 걸까? 내가 궁금해서 찾아본 걸까……? 갑자기 코끝이 시큰한 것이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는 찡한 코밑을 비비며 차에서 내렸다. 눈물이 나지만 왠지 기쁘다. 아직도 날 그리워하는 유천의 마음을 전해 받은 것 같아서. 애써 눈을 깜빡여 눈물을 참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는 계속 멍하니 문자를 내려다보았다. 새삼 그리움이 밀려든다. 위치 추적은 사귀고 나서 내가 신청한 것이었다. 박유천이 혹시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나는 사귀면서 가끔 유천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유천은 단 한 번도 내 위치를 확인하지 않았다. 도대체 박유천은 날 얼마만큼 믿고 있기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건데, 위치 추적을 신청한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음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박유천은 불안해하는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새삼 그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고는 감동하게 된다. 난 다음 생에도 박유천과 헤어진 것을 후회할 것이다. 수십 번, 수백 번 다시 태어나도 절대 그런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계속 통화버튼을 눌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걸 유천이 갖고 있다면 통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린 이미 헤어졌는데. 충동은 충동으로 끝나야 한다. 이제 와서 애써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유천을 들쑤실 필요는 없다… 라고는 생각했지만, 내 몸은 내 것이 아닌가보다. 어느새 손가락은 통화버튼을 꾹 누르고 있으니 말이다. [설렘이 가득한 그대 하루만큼, 나의 하루는 길고 외로워, 어쩌면 나는 바랐는지 몰라,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이별이 되길…♬] 몹쓸 손가락을 원망하며 서둘러 종료하려 했다. 하지만 컬러링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내 손가락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입술이 조금씩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또 다시 찡하게 편두통이 느껴졌다. 나는 이 음악을 알고 있다……. 유천의 미니쿠퍼가 박살나던 밤이었다. 나는 이 음악을 듣고 내가 유천의 번호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엔 그랬다. 유천은 그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세 번째 핸드폰을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인이 바뀐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두 번째 핸드폰이 해지되지 않은 거라면 도대체 누가 갖고 있는 걸까? ‘…여보세요?’라며 늘 조심스레 그 전화를 받던 여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는데……. [23층입니다] 아…, 비상계단……! 문득 깨달은 사실에 눈을 크게 떴을 때, 소리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전화는 어느새 끊겨 있었다. 다시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전화가 꺼져있다는 대답만이 되돌아왔다. 나는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복도를 응시했다. 느닷없이 진실이 일부를 드러냈다. 제각각으로 보였던 상황들이 조금씩 흐릿하게 연관성을 갖추기 시작한다. 유천의 잃어버린 핸드폰, 자꾸 다른 사람이 받던 전화, 비상계단의 그녀, 스키장까지 따라왔던 스토커, 박유천인 척 하며 날 산장으로 불러낸 누군가……. 뭔가가 있다……. 분명히 뭔가가 있다.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쳤던 어떤 공통점이. 하지만 그게 뭘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박유천을 믿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유천의 말대로 그가 다른 여자에게 핸드폰을 맡길 일이 있던가? 나와 사귀고 있던 시점에서 유천이 다른 여자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지금에서야 깨달았지만, 내가 아는 박유천은, 절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상계단의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왜……? 아니, 그 때 그 자리에 정말 박유천이 있었던 걸까? “준수 씨.” “헉!” 누군가가 성큼 다가서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부르르 떨고 말았다. “저에요. 이명희.” 작게 웃으며 내 어깨를 잡아오는 명희 씨의 행동에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쪽팔려. 나는 멋쩍게 조금 웃어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아, 네, 오랜만…….” 생긋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명희 씨에게 말끝을 흐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명희 씨가 맞나? 눈이 안 보이도록 새카만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까지 깊게 눌러쓴 명희 씨의 모습은 너무 낯설다. “왜요? 이상해요?” “아, 아뇨. 좀 낯설어서.” 그녀는 선글라스 너머에서 또 생긋 웃었다. 그제야 손님을 계속 복도에 세워두었다는 생각이 들어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명희 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저기… 준수 씨. 다짜고짜 이런 부탁해서 미안하지만, 나 좀 도와줘요.” “에?” 그녀의 느닷없는 행동에 멍해진 내 표정은 아마 좀 우스웠을 것이다. + “오늘 뉴욕 행 5시 비행기 타야 돼요.” “…….”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뉴욕 행 5시 비행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시선은 안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짙은 선글라스 위와 복도 벽과 천정과 바닥을 골고루 훑으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이 맞다면 그녀는 다음 주 수요일, 박유천과 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다. 결혼식 준비로 바쁠 이 시점에 갑자기 미국은 왜……?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또 눈을 깜빡였다. “준수 씨.” “네.” “시간이 없어요. 공항에 좀 데려다 줘요.” “…….”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급함이 느껴진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흘깃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출국 수속을 하려면 빠듯한 시간. 가려면 지금 출발해야 했다. + 방금 주차시켰던 벤츠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명희 씨가 재촉을 해서 얼떨결에 내려오긴 했는데, 이것이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이유도 제대로 못 들었단 말이다. 여전히 의아함을 마음에 품은 채 차를 출발시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입구를 나서자 차 한 대가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아파트 안으로는 아파트 주민 이외 사람들의 차는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에 재영의 팬들이 저렇게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심히 룸미러를 확인했다. 머리가 긴 여자다. 거리가 꽤 멀고 여자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 정도의 극성팬이라면 재영이 오늘 출국한 것은 알고 있을 텐데? 의아한 생각에 좌측 깜빡이를 켜 보았다. 금세 뒤차도 깜빡이를 켠다. 다시 깜빡이를 껐다. 뒤차에서도 깜빡이가 꺼졌다. 아무래도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왜요?”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요.” 명희 씨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을 해주고 액셀을 밟았다. 부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앞으로 휙 튀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밟았는데도 금세 속도계가 120을 넘어선다. 이제야 재영의 운전 습관이 이해가 된다. 그의 운전 습관이 난폭한 편이기도 하지만 차가 너무 좋은 탓도 있었다. 왜 국산차를 타지 않고 비싼 외제차를 타나 했더니, 이런 이유인가 보다. 추격하는 차들을 따돌리기 위한. 하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도심에 차가 많아 좀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뒤차와의 거리는 좀처럼 넓혀지지 않았다. 고속도로까지는 별 수 없이 계속 달고 가야할 것 같다. 그제야 명희 씨를 흘깃 돌아봤다. 짐도 없이 손에 지갑만 달랑 들고 있는 그녀는 아무리 봐도 출국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엔 갑자기 왜 가요? 결혼식은 어쩌고요?” “결혼 안 해요.” “에?” 쇳소리가 나왔다. 나는 운전 중이었다는 것도 잊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중앙선을 넘어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다. 빠아앙!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반대편 차선에서 오던 차가 급정거를 하는 것이 보였다. 욕설을 퍼붓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표시만 해 보인 채 서둘러 다시 차를 몰았다. “유천이, 준수 씨한테 양보할게요.” 이어진 명희 씨의 말에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어 운전만 했다.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기분 안 좋아요.” “아…, 미안해요.” 내 말에 섞인 고통을 알아차렸는지, 명희 씨는 금세 사과를 해 왔다. 또 침묵이 흘렀다. 그 동안 벤츠는 고속도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룸미러를 확인하자 아직도 뒤차가 따라오고 있다. 3250. 차 넘버를 기억해 두고는 액셀을 꾹 밟았다. 부우우웅! 벤츠는 급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뒤차가 서둘러 속도를 내 따라붙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재영이 했던 것처럼 아슬아슬한 끼어들기와 추월을 시도했다. 속도계가 180을 가리켰다. 양쪽으로 순식간에 풍경이 흘러갔다. 나에게 따라잡힌 차들이 자꾸자꾸 뒤로 물러난다. 얼마나 달렸을까? 다시 미러를 확인했을 때, 3250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미친 듯이 액셀을 밟을 때 아, 차 진짜 좋다…라는 생각을 언뜻 했던 것도 같다. 박유천도 이런 거 타면 잘 어울릴 텐데. 또 쓸데없이 유천의 생각을 하면서……. “명희 씨 출국하는 거, 집에서도 아세요?” 문득 의아했던 점이 떠올라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아뇨, 도망가는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비상등을 켜고 갓길로 차를 몰았다.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차를 세우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심인가? 짙은 선글라스 너머의 그녀는 전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기…, 명희 씨, 미안한데 안 되겠어요. 우리 돌아가요.” “안 돼요.”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 “명희 씨, 이, 이건 아니에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그녀를 설득하려 애썼다. “부모님들이 얼마나…….” “준수 씨.” 명희 씨는 내 말을 뚝 자르며 나지막이 나를 불러왔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좀 비열한 것 같지만 전에 준수 씨 도와줬던 거 지금 돌려받아야 할 것 같아요. 준수 씨도 준수 씨를 위해 유천이를 납치했잖아요. 마찬가지에요. 저도 저 자신을 위해 달아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좀 도와줘요.” 나는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도를 모르겠다. 달아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니……? “하지만, 명희 씨…, 유천이 좋아하잖아요…….” “좋아하는 것만 갖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순 없어요.” 나는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또 한참이나 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옆에서 차들이 쌩쌩 속도를 내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원인은 나인가? 이제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디부터 잘못되었기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비틀려 있는지. 난 그냥 박유천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나는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준수 씨 때문이 아니에요. 날 위한 거예요. 유천이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쉽게 마음이 바뀔 녀석도 아니고요. 이 결혼 분명히 불행해질 거예요.” “…….” “유천이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걸 알면서 따를 순 없어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단호하게 말을 잇는 그녀의 말투에서는 얼핏 냉랭한 한기마저 흘렀다. 그것은 그녀가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 외동딸이에요. 어릴 때부터 우리 회사 당연히 내가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남의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 차별에 상처받으면서도 죽어라고 경영 공부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박유천이라지만 이제 와서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어요.” 나는 여전히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굳게 다문 입매는 오늘따라 유난히 고집스러워 보였다. 마냥 착하게만 봤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다. 그 동안 내가 봐 왔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그녀의 모습에 왠지 기가 눌린다. 내 앞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안정된 직장을 갖길 바랐고, 박유천과 티격대며 계속 평온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박유천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확실한 목표를 향해 걷고 있다. 심지어, 내가 친구 녀석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던 박유천까지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집안의 제일 큰 어른과 대결을 펼치지 않았던가? 명희 씨의 야무진 말투에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녀야말로 박유천의 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가서 공부 계속 할 거예요. 난 회사를 가질 테니까, 유천이는 준수 씨가 가져요.” 불쑥 눈앞에 그녀의 희고 작은 손이 내밀어졌다. 멍하니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는 내 손을 끌어다가 덥석 잡고는 흔든다. 그리고는 마치 나와 계약이라도 성사시킨 사람처럼 싱긋 웃으며 빨리 출발하라고 채근했다. 왠지 복잡한 기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씁쓸히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을 뿐이다. 벤츠는 소리도 없이 도로를 질주했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또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다르고,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중이다. 명희 씨는 지금 박유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른들이 마련해준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자기 스스로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박유천이 뒤늦게 모델 일을 시작하며 그랬던 것처럼……. 유천과의 애정 전선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 덕분에 나의 일상은 심신이 모두 굉장히 지쳐 있지만, 요즘 들어 부쩍 깨닫는 것이 있다. 나는 자라고 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주는 법, 힘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법, 사랑하는 이를 채가서 죽도록 미운 사람에게도 감정의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한 법,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물러설 줄 아는 법. 박유천과, 정윤 형과, 재영과 명희 씨. 내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자꾸자꾸 좋은 것을 배우며 나는 진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궁금하다. 내 성장은 이렇게 아픈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것을 깨닫게 되었을까? 설마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 테고, 어떤 고통스러운 파각(破却 : 알을 깨고 나옴)을 경험했기에 그렇게 어른스러운 눈동자를 갖게 된 걸까? 나만이 과거에서 서성이며 아직도 어린애처럼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가운데, 둘러보면 다른 사람들은 어느새 제몫을 하는 어른이 되어 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만의 하나, 다시 유천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이제 그를 아무 조건 없이 신뢰할 수 있을까……? 멍하니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공항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있다. 열심히 밟아서 왔더니 다행히 시간이 조금 남는 것 같아 티켓팅을 마친 후에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햄버거를 하나씩 시켰다. 나도 아침부터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었고, 명희 씨도 몰래 나오느라 식사를 못했다고 했다. 나는 콜라를 쪼르르 빨며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짐은요?” “없어요. 몸만 도망 나왔어요. 감시가 심해서.” 감시……. 박유천이 가는 곳마다 현 실장이 있었던 것처럼? 그런 걸 보면, 양가에서도 이들이 원치 않는 결혼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잘 사는 집들은 다 이런가? 이렇게 정략결혼을 서둘러서 재산을 불리고, 애정 없는 결혼으로 인해 금세 이혼해 버리고? 재영과의 최근 분위기를 통해, 사랑이 없는 사이에서도 잠자리는 가능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목적이 돈이라니 왠지 입맛이 쓰다. 아삭아삭, 그녀가 야채를 씹는 소리가 왠지 서글프다. 그러고 보니, 명희 씨도 살이 많이 빠졌다. 박유천이나 나, 재영까지 우리는 마치 단체로 극한 다이어트에 돌입한 사람들 같다. “…명희 씨, 정말 괜찮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엄지손가락 끝에 묻은 소스를 쪽 빨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싸구려 냅킨에는 그녀를 닮은 연한 분홍빛 립글로스가 조금 묻어났다. “속은 좀 쓰려요. 나중에 불행해지더라도 한 번 손에 넣어보기나 할까 싶어서.” 이건 아마도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가 나중에 다시 풀어내면서 힘들어하고 싶진 않아요. 지금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손에 넣은 이후에 다시 놓아주는 게 훨씬 힘들 테니까. 무엇보다 친구로서의 박유천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씩씩한 말투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정말 우리랑 동갑이 맞을까 싶다. 나도 그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강인하고, 선량하고, 현명한……. “준수 씨는 좀 괜찮아요?” 그녀의 물음에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을 것 같아요. 그냥 이것저것 신경 끄고, 못 헤어지겠다고 고집부릴까 싶기도 하고.”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나는 좀 덜 힘들었을까? 그랬다면 박 회장님도 우리를 그냥 놔주시지 않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유천을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 그렇게 내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명희 씨네 별장에서 유천을 보내던 날, 현 실장과 나는 모종의 거래를 했다. 유천을 놓아주겠다, 명희 씨와 결혼하는 것도 받아들이겠다, 그러니 유천이 모델은 계속 하게 해 달라. 현 실장은 내 요구사항을 박 회장님께 전했고, 내가 유천을 보내며 거래는 성사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것으로 보인다. 유천을 위해 박 회장님은 재영의 기획사를 통째로 매수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나는 딱히 되고 싶은 것이나, 이루고 싶은 것이 없어서 유천의 모델을 향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앞으로 걸어 나갈 목표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구나 싶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해내려는 의지나 목표의식 같은 것은 참 부럽다. 게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뭔가에 고집스레 애착을 보인 적이 없었던 박유천이 하고 싶다는 일 아닌가? 그래서 박유천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 다 하게 해주고 싶다. 난 유천이 웃으면 덩달아 행복하고, 그가 좋아하면 덩달아 기분 좋으니까. 그것이 내 상처를 딛고 이루어져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수밖에……. 내 사랑은 이렇게도 바보 같고 맹목적이다. “유천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명희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꽤 오래 전부터 이때를 준비했어요. 자기 앞으로 된 재산이며 주식 같은 거, 저한테 다 처분해달라고 했었어요. 그 녀석 돈 굉장히 많아요. 와, 장난 아니던데요.” “…….” “아마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준비했던 걸 거예요. 뭐, 박유천이라면 준수 씨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칠 계획이었겠죠. 그런데 준수 씨가 예상 외로 이별이라는 조커를 쓴 거구요. 그래서 지금 그 녀석 타격이 장난이 아니에요.” 그녀의 스포츠 해설 같은 명쾌한 말투에 피식 웃어 버렸다. 사실 유천과 나는 ‘타격’이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명료한 말투는 버거운 현실을 조금쯤은 가볍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유천이 왜 그녀를 가까이 두는지 이해가 된다. 나 같아도 그녀는 잃고 싶지 않은 좋은 친구 1순위가 될 것 같으니까. “준수 씨.” “네?” 씁쓸하게 웃으며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다가 고개를 들었다. 명희 씨는 또 냅킨으로 입가를 살짝 닦아냈다. 단체 여행객들이 들이닥쳤는지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아삭아삭, 입 안에 양상추가 부서진다.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눈을 깜빡였다. “유천이 강하지 않아요. 굉장히 마음 약한 녀석이에요. 알죠……?” “…….” “미국에서 다 망가져서 돌아온 유천이, 다시 사람처럼 웃게 만든 게 준수 씨잖아요. 한 번만 더 도와줘요.” ‘사람처럼’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걸린다. 내가 아는 박유천은 첫날부터 마냥 잘나고 둥글둥글한 사람이었는데. 도대체 미국에서 어떤 생활을 했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말끝을 흐리는 내 앞에 그녀는 지갑을 뒤적여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여기 자주 간다고 들었어요. 술만 찾는대요.” “…….” 나는 그녀에게서 그것을 받아들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명함이었다. 청담동의 유명한 클럽. 얼마 전에 난잡하다고 신문에 나기까지 했던……. 목이 메어 콜라를 조금 마셨는데 온통 입 안이 쓰다. 박유천은 나와 사귀기 전에 그랬듯이 여기서 여자와 술에 절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어렴풋이 유천의 행동 패턴이 이해된다. 힘이 들면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제일 위험한 타입. 나 때문이다. 진형의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제가 가면 일만 더 복잡해질 거예요…….”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이제 와서 내가 나선다고 해봤자,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유천이 모델 그만 두겠대요.” 나지막이 이어진 명희 씨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청천벽력.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스럽다. 명희 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들은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삶의 의욕이 사라진 상태에요. 그러다 정말 죽을 지도 몰라요. 어른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유천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용의주도하고 독한 녀석이라 복수한답시고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위잉- 하고 이명이 들렸다. 내가 아는 박유천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다. 그 녀석은 드물게도 목표가 생기면 목숨을 거는 타입이니까. 말끔하고 무심한 표정을 하고서도, 날 위해 미니 쿠퍼로 마주 오는 차와 정면충돌하고, 눈이 덮인 산을 오르는 미친 녀석. “어…….” 명희 씨의 짤막한 감탄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내 뒤 어딘가를 응시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돌아보지 말아요, 현 실장님이에요. 그녀의 작은 속삭임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정말 명희 씨가 미국으로 가도록 도와야 하는 걸까? 명희 씨는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한 걸까? 착한 그녀라면 또 박유천을 위해 자신이 물러나는 길을 택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그녀를 돕는 것은 정말 그녀를 위한 걸까? 나 자신의 이기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온통 복잡하게 의문이 떠돈다. 하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 그녀를 무사히 미국으로 탈출시키든, 다시 서울로 돌려보내든. “명희 씨.” “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마지막 기회에요.” 내 목소리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수긍하고 받아들였던 우리의 운명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지도 모를 순간 앞에 우리는 진실해야 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처럼, 살면서 우리 앞에는 수도 없이 선택의 순간이 온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양 갈래의 길 중에 한 쪽을 선택해서 발을 내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선택이라는 것이 옳은 것이었는지는 시간이 꽤 많이 흐른 후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정말 그녀를 위한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먼 훗날 오늘을 돌아봤을 때, 나를 탓하지 않을 핑계거리를 만들고 싶은지도 몰랐다. “준수 씨는 유천이 보낼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었어요?” “…….” “저도 자신 없어요.” 명희 씨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씁쓸한 미소에는 이미 후회가 섞여 있다. “준수 씨는 유천이를 위해서 보내준 거잖아요. 하지만 저는 제가 덜 힘든 길을 택한 것뿐이에요. 여자들은 이기적이거든요. 준수 씨가 아니라 상대가 다른 누구였더라도 제 선택은 이거였을 거예요.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해져요, 우리.”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 말이 맞다. 이렇게 방향이 틀린 사랑이 모두 행복해질 수는 없다.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해지는 것. 어쩌면 그녀의 선택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아마도 유천을 위해 떠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녀가 떠난다고 해서 유천과 내 일이 잘 풀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새삼 감동하게 된다. 명희 씨는 고개를 숙인 내 손 위에 그 작고 흰 손을 가만히 포개며 미소 지었다. 나도 피식 웃어 보였다. 또 입맛이 쓰다. 고마운 사람을 보내는 길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준수 씨.” “네.” “유천이가 그런 말을 한 적 있어요. 준수만 옆에 있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 녀석만 옆에서 지켜봐 준다면 뭐든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박유천은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도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다……. “유천이가 무너져가요. 지금 그 녀석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준수 씨뿐이에요.” “…….” “이번엔 준수 씨 차례에요. 유천이가 준수 씨를 지켰던 것처럼 유천이를 지켜줘요.” 자신은 없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는 그녀가 훨씬 유천에게 힘이 될 테지만, 이제는 그녀가 없을 테니까. 적어도 술독에서는 빼내올 수 있겠지……. “아……!” 그때 명희 씨가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선글라스에 현 실장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비치고 있다. 이젠 그녀를 보낼 시간. “명희 씨.” “……?” “마지막 가는 거 못 봐서 미안해요.” 나는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났다. 현 실장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명희 씨와 모르는 사이인 척 서둘러 앞에 놓인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통에 남은 부스러기들을 밀어 넣고 있는데, 뚜벅뚜벅 현 실장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를 알아본 것이 틀림없다. 명희 씨가 사라졌고, 내가 공항에 있다. 현 실장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발소리가 서두르지 않는 것을 보면, 명희 씨를 알아보지는 못 한 것 같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명희 씨가 출국하려면 10분 정도는 시간을 끌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여기서 지하 주차장까지의 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10분…,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고개를 잔뜩 숙인 명희 씨와 눈이 마주쳤다. “잘 가요.” 명희 씨는 인사대신 짧게 웃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해사한 봄꽃처럼 한들거리며 시야에 가득 찬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두근두근, 심장이 속도를 빨리하기 시작했다. “저…….” 뒤에서 조심스러운 현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 준수 씨!” 현 실장의 목소리가 웅웅 메아리쳤다. 눈앞을 소란스럽게 가로막는 여행객들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뒤로 슥슥 물러난다. 잡아! 현 실장의 외침과 함께 나를 쫓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늘어난다. 와씨, 뭐야, 경호원들 다 데려온 거야?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항 내를 질주했다. 어머! 뭐야? 공항을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르는 나와 현 실장 패거리 때문에 주위가 웅성웅성하다. 경비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우리를 주시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지하 주차장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오로지 명희 씨의 무사 탈출을 기원하며……! + 탁탁탁탁, 텅 빈 계단 내에 발소리가 요란하다. 위쪽에서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수 씨! 현 실장이 난간에 몸을 걸친 채 나를 다시 한 번 외쳐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가슴 속이 새하얗다. 그 와중에 또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얼추 출국했을 시간인데……. “준수 씨!” 씨발……! 바로 위층에서 들려오는 현 실장의 목소리에 나는 또 헐떡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내일부터 운동한다! 박유천한테도 만날 힘으로 지고, 그래서 만날 당하고! 지금도 이게 뭐냐고! 왜 이렇게들 금방 쫓아오는 건데! 나름 운동신경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지구력은 심각하게 부족한 모양이다. 눈앞에 지하 주차장으로 나가는 문이 나타났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서둘러 키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는 순간! 뒤에서 어깨를 덥석 잡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현 실장과 그 부하들. 나는 달아나는 것을 포기하고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현 실장은 내 어깨를 잡은 채 한참이나 인상을 쓰고 숨을 가다듬었다. “준수 씨, 전에도 느낀 건데 굉장히 빠르네. 전에 운동 선수였어요?” 현 실장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을 뿐이다. 그렇게 쌕쌕대는 숨소리만이 조용한 주차장에 한참이나 계속 되었다. 지이이잉.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어깨를 잡은 현 실장의 손을 쳐내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출국 성공♥] 하트까지 붙어 있는 명희 씨의 간단한 문자. 흐흐흐… 이상한 웃음이 나온다.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마치 모종의 작전을 성공시킨 독립투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현 실장에게 그 문자를 들이밀자, 안색이 굳는 그 표정이 어찌나 통쾌한지……! 키득키득 어깨를 들썩이다가는 으항항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늦으셨네요.” 이렇게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 실장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부에 명희 씨가 출국했다는 것을 보고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또 키득키득 웃었다. 현 실장의 부하직원들은 나에겐 볼 일이 없는지, 이젠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고, 나는 여전히 키득거리며 재영의 벤츠로 향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는지 모르겠다. 뭔가 가슴 속을 꽉 막고 있던 것이 잠시나마 살라고 숨통을 틔워주는 것 같은 느낌? 하늘을 두텁게 감싼 먹장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을 본 것 같은 기분. 다시 유천이 없는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조금 마음이 가볍다. 이렇게 사람은 이별에 익숙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준수 씨.” 그때 뒤에서 현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문을 열다 말고 나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현 실장은 안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뚜벅뚜벅 가까워진 그의 발소리. 박유천보다 더 건장하고 훤칠한 키의 그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다. 하긴 그러니 대기업 회장의 경호실장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나는 살짝 기가 눌린 표정으로 쭈뼛쭈뼛 그를 올려다보았다. 좀 전까지 그를 놀려댔는데, 괜히 기분 나쁘다고 한 대 때리면 어쩌나 사실 좀 겁을 먹었다. 심지어 인적이 드문 주차장임에야. 제길, 비굴한 김준수는 박유천 앞에서만 발휘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거.” 현 실장은 조그만 플라스틱 카드를 하나 내밀며 작게 속삭였다. 아무 것도 없이 일련번호만 찍혀 있는 보라색의 기묘한 카드. 이게 뭘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얘기 들었죠?” “무슨…….” “클럽 멤버십 카드에요. 유천 씨 여기 있어요. 이거 보여주고 현 실장이 보냈다고 하면 들여보내줄 거예요.” 그의 말에 표정이 굳는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일까? 그렇게 나와 유천을 갈라놓지 못해 기를 쓰던 현 실장인데, 왜 클럽의 멤버십 카드를……?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는 내게 현 실장은 싱긋,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고는 돌아섰다. “철수.” 부하직원들에게 짧게 명령을 내리는 그의 등은 어쩐지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뭔가 잘 정리되지 않은 내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럽기만 했다. 유천아…, 넌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주위 사람들을 온통 네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냐? 정윤 형, 재영 씨, 이젠 현 실장님까지. 나는 아무래도 보통이 아닌 사람을 애인으로 뒀던 것 같다……. + 눈이 내렸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은 건조하고 담담했다. 그것은 스키장에서 내가 클로로포름에 당하기 직전에 내리던 눈처럼 무심하고 냉혹해서 오싹 오한이 들 정도였다. 와이퍼를 움직여 시야를 가리는 눈을 치워냈다. 고급 외제차에서 내린 젊은이들이 쉴 새 없이 클럽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들어가 봐야 하나……? 하지만 박유천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나는 벌써 한참이나 멍하니 입구를 응시하며 이렇게 망설이는 중이었다. 아프게 떨쳐낸 인연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만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명희 씨가 떠났다고 해도 나아질 것이 없는 상황. 이미 내 세계는 잘게 부스러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데……. 후아……. 내쉬는 무거운 한숨 끝에는 불안이 장식처럼 매달려 있다. 클럽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에 벌써부터 유천과 나의 거리가 절실히 느껴진다. 잘나도 너무 잘난 박유천과 지극히 평범해서 어디 내놓아도 티도 안 날 김준수……. 냉정하게도 머리는 계속해서 내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새삼 가슴이 답답해 온다. 친구는 조건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7년이란 시간을 함께 부대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애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랑은 호르몬이 만들어내는 몽몽한 핑크빛 환상이지만, 그 뒤에는 냉엄한 현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명희 씨의 말처럼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험한 현실을 헤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쉬운 길을 두고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앞날이 창창한 박유천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걸림돌이었을 내가 그 앞에서 비켜주었는데도, 박유천은 조금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모델까지 그만두겠다니, 백만 피스짜리 직소 퍼즐을 앞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다. 도대체 답이 뭘까? 입이 쓰다. 초조하게 현 실장이 준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눈은 이 순간에도 냉정하게 차곡차곡 대지에 내려쌓이고 있었다. 저것으로 어떻게 안 될까? 우리의 이 아픈 현실을 덮어버릴 수는 없는 걸까? 멍하니 눈을 바라보다가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술 생각이 난다. 박유천도 이런 기분일까? 이렇게 착잡하고 무력한 기분을 맛보며, 술로 현실을 잊으려 애쓰고 있는 걸까? 에이 씨! 나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의미를 갖는 인생이라지만, 박유천과 내 앞에 놓인 문제는 너무 어려워서 화가 날 지경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생 때 공부를 더 열심히 해둘 걸 그랬다. 선생님들은 모든 문제가 전부 교과서에서 나온다고 했으니까……. “하아…….” 그래, 그냥 보고 오기만 하는 거다. 이건 박유천이 걱정되어서도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도 아닌, 그냥 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가서, 술이나 한 잔 마시고 나오는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으니까. 나는 벤츠를 몰아 천천히 클럽 앞으로 이동했다. 차에서 내리자 수트를 깔끔하게 빼입은 주차요원이 와서 키를 받아든다. 이거 재영 씨 차인데 괜찮으려나…….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리버리한 티를 내기 싫어 그냥 입구를 향해 걸었다. 역시나 지나치게 평범한 내 차림이 문제인지 문 앞에서 잡혔다. 처음이시냐는 질문에 금세 표정이 뻣뻣해온다. 만지작거리던 멤버십 카드를 내밀며 현 실장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금세 사람을 불러준다. 씨바, 외국 나가는 것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낯선 분위기에 민망하고 창피해서 괜히 머리를 매만지며 쭈뼛쭈뼛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술도 안 마셨는데 벌써 얼굴이 따끈따끈 달아오른다. 난 박유천 덕분에 정말 신기한 경험을 많이도 해보는 것 같다. 뭐, 그 녀석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이긴 하지만……. “이 방입니다.” 한참이나 어딘가로 깊게 들어가던 남자는 친절하게 룸 앞에까지 나를 데려다 놓고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금세 왔던 길을 돌아가 버렸다. 나는 한참이나 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문을 마주했다. 이제야 비로소 심장이 천천히 속도를 높이는 것이 느껴진다. 입술이 마르는 것이 느껴져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쓸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간접 조명이 희미한 달무리처럼 낡은 운동화 위에 보드랍게 쏟아져 내렸다. 언젠가 유천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싸늘하게 식어버린 손으로 신겨주던 바로 그 신발……. 나는 손을 들어 가만히 문에 올려 보았다. 희미하게 온기라도 느껴지는 기분이다. 여기 있다. My Beloved. 심장에 너무 깊게 박혀 세계가 끝나도 지울 수 없는 사람이 이 안에……. 금세 눈앞이 뿌옇게 차올라 흐릿하게 일렁인다. 또 울어, 울보 토끼……. 유천이 어깨를 안아주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음악처럼 흐른다. 많이도 자랐건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얼마나 더 자라야 나는 울보 토끼 소리를 면할 수 있을까? “후…….” 저절로 심호흡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 있어도 놀라거나 흥분하지 말자…….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조용히 문을 노크했다. 똑똑! 하는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지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상처가 생겨 순식간에 피가 빠져나가기라도 하듯 급격히 손끝에서 체온이 사라져간다. 그리고 조금씩 가빠지는 숨결……. 폭신한 카펫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잔잔히 흐르는 음악, 그리고 ‘오랜 친구’……. 술을 한 잔 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분위기다. 그래 나쁘지 않아…….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조용히 문을 열었다. + 숨이 멎었다. 당혹스러움에 시선을 피하지도 못했다. 삐이- 하고 들려오는 초음파에 가까운 이명.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룸 안은 과일향과 술 냄새가 진동했다. 테이블 위에는 비워진 양주병이 몇 개나 나뒹굴었다. 그리고 박유천은 폭신한 소파 위에서 반라의 여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서둘러 볼을 훔쳐내며 이를 악물었다. 한두 번 본 장면이 아니다. 지금보다 강도는 약했지만, 어쨌든 예상했던 상황 아닌가? 나는 멈췄던 숨을 가늘게 토해내며 담담하려 애썼다. 분명 내가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두 사람은 끈적한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여자의 하얗게 드러난 다리 위를 유천의 손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는 축축한 소리에 등 뒤로 싸하게 소름이 돋는다. 심장이 딱딱해졌는지, 고동칠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린다.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등 뒤에 열려있는 문을 닫고 가만히 근처 소파에 걸터앉자 프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여전히 유천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뻐근한 통증에 저절로 입술을 비집고 앓는 신음이 나온다. 간신히 뱉어내는 밭은 숨결에서는 온통 바스라진 내 세계가 바삭바삭, 메마른 소리를 낸다. 입술이 말라버려서 금세 찢어져 피가 난다. 입술을 축이자 혀끝에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손을 들어 슥 문질렀다. 입술에 느껴지는 싸늘해진 손끝……. 그리고 나의 존재는 안중에 없다는 듯 더욱 끈적해지는 손길에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실내에 흐르는 재즈 선율을 따라 아득하게 절망이 내려쌓였다.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유천의 복수. 그의 가슴을 통째로 도려낸 나에게 보내는 죽은 미소. 절실하게 느껴지는 유천의 고통에 나는 차마 방을 나서지도 못한 채, 다만 시간을 견딜 뿐이었다. 밖에는 아직도 눈이 오려나? 눈을 감자, 온통 눈앞에 까끌까끌한 육각형의 눈 결정이 쏟아진다. 냉혹하고 아름다운 겨울은 역시나 잔인한 계절……. 널 잊기 위해 재영에게 안기려 했던 나나, 날 잊으려 여자를 안는 너나,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것마저 닮았는지……. 결국 고이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눈 밑을 슥슥 비비며 코를 몇 번이나 훌쩍였다. 감미로운 음악은 내 훌쩍임을 감추지 못하고 온통 어긋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술을 잔에 따라 조금 마셨다. 온통 입 안이 써서 헛구역질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햄버거 반 쪼가리와 콜라 몇 모금뿐이었으니까. “나가.” 나지막이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흠칫 몸이 굳었다. 유천이 움직임을 멈추자 여자가 열기 섞인 숨결을 가볍게 토해냈다. 그리고 얼마간의 정적. 나는 입술에 닿은 잔을 천천히 기울여 술을 또 조금 흘려 넣었다. “안 들려? 나가라고.” “…싫어.”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오빠, 아는 사람이야?” “아니.” 유천의 냉정한 대답에 가슴 안에서 또 뭔가가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져나간다. 아직도 상처받을 마음이란 것이 남았던가? 쓴웃음이 난다. 그때 유천이 벌떡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눈이 흐릿하다. 나는 가만히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 유천은 내 손목을 덥석 잡더니 문 쪽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우악스럽게 움켜잡은 손목에 금세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끌려가지 않으려 테이블을 잡고 고집스레 버텼다. 나를 싸늘히 돌아보는 유천의 눈동자는 언젠가처럼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똑같이 유천을 노려보았다. 우리는 똑같이 상처받은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도 의도한 적 없다. 우리 둘 중 누구도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현실이라는 파도에 떠밀려 여기까지 흘러왔을 뿐. 하지만 유천의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냉랭하고 무심했다. 마치 날 이미 다 지워내기라도 했다는 듯, 그렇게 새파랗고 차가웠다. 유천의 뒤로 보이는 연한 주홍빛 조명이 빛무리 지듯 부스스 번진다. 나는 아마 또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것이다. 유천이 움켜잡은 손목을 더 매섭게 끌어당겨왔다. 나는 힘주어 버티며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애썼다. 말은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다만 조금씩 격앙되는 숨소리가 쌕쌕 룸을 채워갈 뿐. 우리는 그렇게 고집스레 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저기요, 모르시는 분이라잖아요. 아, 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여자가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젊고, 하얗고, 늘씬하다. 여자는 조금 전에 그런 낯 뜨거운 장면을 내게 보였음에도 전혀 수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치 유천에게 안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새침하고 도도한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내 서러움을 자극했다. 내가 자신의 것이었다던 유천의 말이 가슴 속에서 뾰족뾰족 되살아나 상처를 덧낸다. 그래, 박유천도 내 것이었다. 이런 장면을 봤다면 당장 유천의 뺨을 올려칠 수 있는 자격이 내게도 ‘한때 있었다’. 나는 그녀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천은 또 다시 힘주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덜커덩, 테이블에 다리를 심하게 부딪치며 유천의 힘에 몸이 딸려 일어났다. “나가라고, 김준수. 뭐 좋은 거 보겠다고 여길 와.” 김준수. 내 이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내 이름. 아직 이름은 안 잊어먹었나 보네?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버린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를 잊기를 바랐지만, 막상 나를 지운 것 같은 그의 눈동자에서는 서러움을 느끼고, 나를 잊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나면, 또 미련한 절망이 파도처럼 덮친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다. 나는 힘없이 유천에게 이끌려 복도로 밀어내졌다. 등 뒤에서 문이 달칵 닫혀버렸다. 모질게 나를 끊어내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은 유천의 태도에 이제는 내가 못 견딜 것 같다. 유천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귀에서 웅웅 울린다. 뭐 좋은 걸 보겠다고? 네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건 아나 보지? 순간 억눌렀던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흐느낌은 이를 악물어 참았지만 후두둑 쏟아져버리는 눈물은 결국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아직도 안 갔네. 오빠 어떡해? 여자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아버리고 싶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는 질투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천은 다시 나타난 나를 보며 잔뜩 미간을 찡그린 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무심한 검은 눈동자는 술에 취해 흐릿하지만 여전히 깊고 진지했다. 그린 것처럼 단정한 이마와 눈썹. 파리한 볼은 잔뜩 말라 있지만, 훨씬 더 남자다움을 배가시켜주고 있었다. 빳빳하게 잘 다려진 하얀 셔츠가 칼날처럼 그의 목을 감쌌다.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마시는 그의 멋진 목울대가 꿀꺽, 하고 움직인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그 길고 우아한 손끝에 걸린 하얀 담배 한 개비는 그에게 맞춰진 액세서리처럼 잘 어울린다. 내 사랑, My Beloved. 넌 내가 곁에 없는데도 여전히 멋지구나……. “일어나, 박유천.” “나가라고 했다.” 나지막이 딱딱 끊어 말하는 박유천 특유의 화난 목소리는 차라리 그리워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가자, 유천아. 데려다 줄게.” “씨발, 귀 먹었냐? 나가라고.” 개새끼야, 줄줄 울고 있는 나한테 지금 욕이 나오냐? 나는 입술을 꾹 물고 유천을 노려보았다. “구경이라도 하려는 거야, 뭐야? 3P라도 할까?” 낯설고 저속한 유천의 비릿한 말투에 손이 금세라도 올라갈 듯 꾸욱 쥐어진다. 또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구른다. “어때, 혜연 씨? 3P 가능해? 내가 현찰로 200 더 줄게.” “200? 와, 오빠 진짜 돈 많은가 보다. 나야 좋지. 뭐 이상한 짓 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걱정 마, 노멀이야. 그리고 저기 저 오빠, 테크닉이 끝내주거든.” 뭐야, 여자를 샀어? 그녀의 까르르 웃는 소리에 핑하니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술을 들어 마시며 흐릿해진 눈동자로 쿡쿡 웃는 유천의 모습은 전형적인 개망나니 재벌 3세였다. 천하의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해댔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유천에겐 일정한 룰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손대지 않고, 몸을 두고 거래를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롯이 박유천만 탓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는 유천의 반반한 외모와 좀 사는 집 아들 같은 표면적인 조건을 보고 뛰어드는 여자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돈을 주고 여자를 사다니……. 손을 쓸 수 없는 막막한 현실 앞에 나는 또 다시 좌절하고 있었다. 파멸의 속도는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다……. 현 실장이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던가? 이렇게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가는 박유천을 자신들도 어쩔 수 없었기에 내게 떠맡긴 건가? 제발 유천아…, 이러지 마. “나가요.” “어머, 오빠, 왜 이래.” “당신 같은 동생 둔 적 없으니까, 오빠라고 하지 마. 얼른 나가요.” 여자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에 질식할 것 같다. 나는 유천의 옆에 엉겨 붙는 여자의 손목을 틀어쥐고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나를 보자, 유천은 흐릿한 눈동자로 후후 웃으며 길게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박유천, 너 진짜 머리 좋다. 어떻게 하면 결정적으로 사람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잘 아는구나. 그래, 인정한다. 나는 눈 밑을 슥슥 비벼 닦으며 유천을 한껏 노려보았다. 유천의 입가에 걸린 흐릿한 미소는 마치 복수에 성공했다는 듯 오만하고 느긋했다. “얼른 나가요!” “아직 계산 안 끝났잖아요!” 고집을 부리는 그녀를 밀어내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카랑카랑하게 돈 얘기를 하며 대든다. 등 뒤에서 또 유천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갑에서 신용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알아서 끊어요.” 그제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밖으로 사라져갔다. 저런 여자들이 카드를 받아가서 곱게 정해진 액수만 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박유천, 이 자식을 이곳에서 끌고 나가야 했다. 문을 닫고는 매섭게 등을 돌려 유천을 응시했다. 검은 수트가 어쩌면 저렇게 잘 어울리는지. 나른한 눈으로 길게 담배연기를 뱉어내는 그의 모습에 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분명히 잔뜩 화가 났는데, 화를 낼 수가 없다. 약점. 그는 존재 자체로 나의 약점이다. 별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유천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왈칵 풍겨오는 술 냄새. 도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유천은 또 쿡쿡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다. “여기 두 명 더 보내…….” 짜악! 결국 참고 있던 것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또 여자를 부르는 유천의 모습에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 있는 힘을 다 해 뺨을 후려친 것이다. 씩씩대며 화를 참는 내 숨소리가 또 음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까끌까끌하게 공기 중에 떠돈다. 유천은 여전히 고개가 돌아간 채였다. “…집에 가자, 유천아.” 이제야 명희 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박유천은 약하다는 거. 이 녀석은 괴로우면 자기 자신을 더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는 거. 이러다 정말 박유천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거. “이러지 마.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목소리가 떨려나온다.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이를 꾹 악물었다. “뭘 이러지 마?” 나지막이 되물으며 내게 맞은 볼을 가만히 쓸어보는 유천의 창백한 손끝 위로 조용히 그를 닮은 음악이 내린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저지른 일이 모두에게 상처가 되고 있다.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명희 씨는 덜 불행해지겠다며 자신의 꿈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버렸는데, 남은 우리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 불행해질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뭘까? 널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대혼란. 머릿속이 뒤죽박죽 마구 뒤섞여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다. “이재영이랑 좋아 보이더라?” “…….” “김준수, 너야말로 이러지 마.” “…….” “갑자기 나타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잊었다며. 이젠 내 사람도 아니라며.” “…….” “나한테 신경 꺼. 새로운 사람 만나서 너 늘 하던 대로 생글생글 웃고, 삐치고, 울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 조용조용 이어지는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차라리 서럽다. 너무 서러워서 오히려 눈물도 안 난다. “모델 계속 해.” 그제야 유천은 흐릿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하게 비웃음이 스쳐갔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계속 해.” “신경 꺼.” “계속 하라고.” 너 그거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물러난 거잖아.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내가 비켜줬잖아. 제발 이러지 마, 박유천……. 가슴에 담은 말을 차마 하지 못해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모델? 경영 수업? 결혼? 그런 거 해서 뭐해? 어디다 쓰게?” 입가에 떠오른 비릿한 조소. 담배연기를 함부로 뱉어내며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물기가 하나도 없이 버석버석 메말라 있었다. 말라붙은 내 입술과, 쩍쩍 갈라진 그의 가슴처럼 삭막하고 건조한 목소리. 죽은 새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참담했다. 비상하리라 믿었던 새는 죽어버렸다. 제 스스로 날개를 꺾고, 제 뼈로 텅 빈 심장을 찔렀다. 내가 그렇게 그를 죽였다. 달처럼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 그를 혼자 내동댕이치고, 그게 행복일 거라 믿었다. 이제 와서 변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낭떠러지 앞에 외롭게 난 길을 가리키며 그 길을 걸어 낭떠러지를 벗어날 것인지, 아니면 아래로 떨어질지를 선택하라는 주위의 시선 앞에, 아직 어리고 힘이 없는 우리는 두 번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너 모델 하고 싶다며. 카메라 앞에 서면 다른 사람 된 것 같아서 좋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또 다시 유천은 창백한 입술로 비릿하게 조소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버석인다. 죽어버린 눈동자……. 그것은 모질게도 내 가슴을 쿡 찔러왔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너 하고 싶어 했잖아.” 설득을 해보려 애쓰지만 내 목소리에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유천은 담배연기를 길게 토해내며 미간을 찡그렸다. “칭얼대지 말고 가, 좀. 시끄러워 죽겠네. 아직도 내가 네 서방인 줄 아냐?” “…….”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위잉- 또 다시 이명이 밀어닥쳤다. 꾹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려왔다. 싸늘하게 식은 손끝은 핏기가 가셔 새파랗게 보일 정도였다. 기대하면 안 된다고 토닥이며 버틴 짝사랑이었고,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즈려밟히겠다고 생각하며 이 악물고 견딘 이별이었다. 칭얼대다니……. 내가 겪은 고통이 고작 저런 단어 하나로 매도될 수준이었던가……? 나는 이를 꾹 물고 유천을 응시했다. 성가셔 죽겠다는 듯 내뱉은 유천의 한 마디는 내 안 어딘가에 있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 틀림없었다. “가라고 좀.” 유천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온더락 글라스를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글라스를 빼앗은 것과 동시였다. 짜악! 또 한 번 매서운 파열음이 정적을 뒤흔들었다. 유천은 또 고개가 돌아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왜 참는데…….” 억울하다는 듯 토해내는 내 목소리는 분노에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천의 볼에 닿았던 손이 화끈거릴 정도로 매서운 손찌검이었다. 유천은 혀로 입 안쪽을 쓸어보다가는 어이가 없는 듯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또 다시 맹수처럼 파랗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흠칫 어깨가 떨렸다. 알콜 기운이 사라진 유천의 눈동자는 나를 산 채로 얼려버리기라도 할 듯이 냉랭하게 빛나고 있었다. 겁을 먹고 한 걸음 물러나려는 다리를 애써 고정한 채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매섭게 유천을 응시했다. “이러라고 너랑 헤어진 거 아냐.” “…….” “이렇게 더러운 꼴 보려고 너 보낸 거…, 아윽……!” 나는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유천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혀 벽에 밀어붙여졌다. 목을 움켜잡은 손 때문에 기도가 눌려 숨 쉬기가 곤란하다. 나는 양손으로 유천의 손을 붙잡고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성큼 불가리 블랙이 다가섰다. 그리고 눈앞에 가까워지는 창백한 눈동자와, 메마른 입술 끝에 걸려 있는 비릿한 미소……. 그렇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유천의 냉랭한 눈빛에 표정이 뻣뻣하게 굳는다. 나는 금세 겁을 먹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더러워?” 유천의 입술이 비틀리듯 열리며 나지막한 단어 하나가 틈을 비집고 나왔다. “더럽다고? 그게 네 본심이야?” 잔뜩 가라앉은 차분한 목소리…….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에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 오싹하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불안감에 입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랑 사귈 땐 어떻게 참았어?” “…….” “더러워서 어떻게 나랑 키스하고 잤어?” 유천의 파리한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져갔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피한 채, 목을 움켜잡은 그의 손을 떨쳐내려 애썼다. 서러움, 두려움, 불안함, 안타까움……. 확실히 정의할 수조차 없는 무수한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쳤다. 그의 감정이 사라진 표정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유천의 손을 풀어내는데 온 힘을 다했다. “놔.” “…….” “이거 놔, 박유천.” 내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을 그가 알아채지 못하길……. “진짜 더러운 거 보여줘?” 얼핏 들으면 장난처럼 들리는 단조로운 목소리와 함께 유천의 표정에 잠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목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리더니 가만히 내 턱에 와서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이나 내 눈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내 입술로 움직여 갔다. “…….” “…….” 숨 막히는 정적. 차갑게 식은 유천의 손끝이 내 입술을 가만히 쓰는 것이 느껴졌다. 내 입술에 고정된 유천의 눈동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것 같아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가 없다. 경직된 어깨가 결려왔다. 하지만 잔뜩 겁을 먹은 나와 다르게, 유천의 표정은 너무나도 차갑고 무심했다. 돌로 쌓아진 벽을 응시하듯, 단조롭고 아무런 감흥도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 내 직감은 요란하게 다음 순간을 경고하고 있었다. 갑자기 성큼 입술이 다가섰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피하며 유천의 어깨를 밀어냈다. 나가야 한다. 계속 있다가는 또 유천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평소에는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 같지만, 뭔가 뒤틀려 버리면 그는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리는 활화산이니까.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서둘러 걸음을 뗐다. “……!” 금세 손목을 낚아채는 유천의 손에 몸이 휘청거리며 빙글 돌았다. 균형을 잃은 나는 그대로 유천의 품으로 덥석 안겨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유천의 입술이 부딪쳐왔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 피하자 유천은 싸늘한 손끝으로 내 턱을 다시 잡아 돌렸다. 힘껏 유천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유천은 금세 내 손목을 잡아 고정시켰고, 나는 다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런 나의 저항에도 아랑곳 않고 유천은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닿아오는 아랫입술을 콱 물어버렸다. 툭, 하고 살이 터지는 느낌이 들면서 입 안에 온통 비릿하게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하지만 유천은 짤막한 신음 한 번 없이 그대로 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놔!” 벽과 유천 사이에 갇힌 나는 그의 옷을 잡아 뜯고, 어깨를 밀어내고, 고개를 내저으며 전에 없이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유천의 행동 또한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야무지게 남은 손목을 틀어쥐는 유천의 험악한 손길에 나는 또 덜컥 겁을 집어먹어버렸다. 그는 지금 그가 말한 ‘진짜 더러운’ 짓을 할 생각인 거다. “개새끼야, 놔!” 나는 또 다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혼신을 다한 내 저항을 이기지 못하자 유천은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내더니 틀어쥔 내 손목을 묶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로 내 쇄골 근처를 꽉 누른 유천에게서 불가리 블랙과 술 냄새, 좀 전까지 품에 안았던 여자의 진한 향수 냄새가 밀려들었다. 그 여자의 향기라니……. 왈칵 토악질이 났다. 급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유천의 넥타이에 묶인 양손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나는 유천의 어깨 너머로 몇 차례나 헛구역질을 했다. 그런 내 행동에 유천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렇게 더러워? 구역질이 날 정도로?” 냉랭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새파랗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붉게 피가 맺힌 유천의 입술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 거 아니야, 좀 놔!” 어깨를 뒤틀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애써 보았다. 하지만 유천은 어깨로 내 몸을 벽에 짓누르며 착실히 손목에 매듭을 짓고 있었다. 미친 새끼야, 이거 빨리 안 풀어?! 놔!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다리를 걷어차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유천은 내 팔을 덥석 낚아채더니 내팽개치듯 험악하게 소파로 밀어붙였다. 발에 걸린 육중한 테이블이 끼익 소리를 내며 조금 밀려났다. 챙그랑! 뭔가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대로 소파 위에 털썩 쓰러져버렸다. 서둘러 유천을 돌아보았다. 유천은 재떨이에 놓여 있던 담배를 들어 깊게 빨며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 잡은 사냥감을 내려다보듯 오만하고 무미건조한 눈동자. 하얀 담배 끝에 발갛게 피가 묻어나는 것이 보였다. 느릿하게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유천의 마르고 긴 손가락은 이 순간에도 지독하게 우아했다. “유, 유천아…….” 나는 그의 이성을 되돌리려 더듬더듬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유천은 내 의사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그저 담담한 눈으로 차근차근 단추를 풀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룸에는 여전히 정적이고 차분한 음악이 흘렀다. 폭풍 전야 같은 그 기묘한 위화감에 소름이 끼쳤다. 그의 무심한 시선에서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의지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못되게 군 적이 많은 유천이었지만, 그래도 내게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다. 아무리 싸우고 화가 나도 집 앞까지 꼭 데려다준다던가, 담배를 피우고 나서는 딥 키스를 하지 않는다던가, 무리해서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의 차갑게 식어버린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묶여버린 손목 아래 창백해진 내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너무 경솔했었나? 어째서 유천을 여기서 쉽게 데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답답한 마음에 금세 눈물이 차오른다. 어쨌건 이 자리는 피해야 했다. 이건 유천이나 나나 더 큰 상처만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나는 다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윽……!” 유천은 일어나려 애쓰는 내 어깨를 다시 험악하게 밀쳐냈다. 일절 배려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 폭력적인 몸짓에 나는 또 다시 무력하게 소파에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유천의 그림자가 내 위에 성큼 드리워졌다.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불가리 블랙……. 쌉싸름한 유천의 향기를 따라 고였던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 몸은 이제는 내 의지로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비, 비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유천의 어깨를 밀어냈다. 유천은 그런 내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러 고정했다. 꽉 잡아 누른 손목은 피가 통하지 않아 금세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팔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해버린 유천은 그대로 차가운 입술을 내리눌러왔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외로 돌렸다. 유천은 싸늘한 손끝으로 다시 내 턱을 잡아 돌렸다. “하지 마, 또 깨물 거야.” 나는 유천을 노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스쳐가는 엷은 비웃음을 되돌려 받았을 뿐이었다. “흣……!” 유천의 차가운 손끝이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맨살에 닿은 싸늘하고 섬뜩한 느낌에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또 몸을 비틀었다. 어깨를 꽉 누른 유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말캉한 혀가 단숨에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비릿한 피 내음과 술 냄새가 함께 따라 밀려들었다. 급하게 혀를 휘감아오는 유천의 체온에 숨이 턱 막혔다. 깨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 안을 온통 헤젓는 그의 혀를 깨물고 밀어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입술에 닿아오는 유천의 붉게 부어오른 상처에 자꾸 죄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박유천에게 또 상처를 내다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이건 분명 잘못된 것인데, 어째서 나는 유천의 싸늘한 손길도 그저 그립기만 한 건지…, 익숙한 불가리 블랙이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왜 나는 네게 틀린 것도 틀렸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약해져 버린 건지……. 거칠게 몸을 더듬고 입을 맞추는 유천의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나는 그저 울었다. “하아…, 유처…….” 고개를 틀어 입술을 피하며 간신히 토해낸 한숨을 다시 유천의 싸늘한 입술이 덮쳐왔다. 또르륵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성급하게 옷을 들추고 버클을 풀어내는 유천의 거친 손길이 하염없이 슬프다. 필사적으로 크게 몸을 뒤틀어 유천을 밀어냈다. 조금 멀어지는 유천의 체온. 나는 또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건조한 유천의 눈동자는 술기운에 조금 흐려지긴 했으나 여전히 시리도록 차가웠고, 옅게 음영이 진 창백한 그의 얼굴은 변함없이 말끔하고 단정했다. 참 서럽게도 운다, 김준수……. 검게 가라앉은 유천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담겨 있다. 순간 유천의 눈동자에 희미한 죄의식이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도 알고 있는 거다. 내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거. 하지만 유천 스스로도 감당하기 벅찬 제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다는 거. 또 숨을 할딱이며 서러운 흐느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우린 사랑하는데, 서로 이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 맞는데, 현실은 숨이 막히도록 사방에서 조여 온다. 어쩔 수 없다. 어긋나버린 우리의 사랑의 종착역이 이것이라면…, 이것이 내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라면…, 나는 또 너를 끌어안는 수밖에……. “유천아.” “…….” “여기 싫어. 제발…….” 말을 마친 나는 입술을 꾹 물고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박유천을 닮은 음악이 조용히 흘렀다. 내 흐느낌과 뒤섞인 음악은 제 몫을 다 하지 못하고 우리가 쌕쌕 토해내는 밭은 숨결에 묻혀버렸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어깨를 떨며 울었다. 그리고 유천은 한참이나 내 위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유천의 차가운 손끝이 눈물자국을 닦아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어깨를 흠칫 웅크리면서도 아까처럼 격렬하게 저항하지는 않았다. “하아…….” 유천은 술 냄새와 불가리 블랙이 마구 뒤섞인 한숨을 조용히 토해냈다. 그 안에 섞인 고통이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잠잠해진 내 위로 유천의 무게가 조금 더 실렸다. 유천이 가만히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조심스레 호흡이 가까워졌다. 메말라서 까끌까끌한 유천의 입술이 조용히 내 입술 위를 눌러왔다. 손목을 쥐고 있던 유천의 손이 느슨해졌다. 나는 유천의 손에서 팔을 빼내어 그대로 유천의 목에 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맞닿은 몸을 밀어내지 않았다. 길이 끊긴 곳. 설령 바로 눈앞에 우리가 다시 등을 돌리고 멀어져야 하는 순간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의 식어버린 손을 잡아줄 수 있기를……. 서로에게 진실하기를……. 박유천, 이렇게 미련한 사랑이라 미안해……. + 유천은 언젠가 명희 씨네 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가만히 대고 한참이나 움직임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가볍게 와 닿는 따스한 그의 호흡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이 느껴질 뿐. 나는 여전히 서럽게 울고 있었지만, 묶인 팔을 꼼지락거려 유천을 더 당겨 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희미하게 그의 심장이 뛰고 있다. 내가 다시 살려내야 하는 심장……. “…그러게 여긴 뭐 하러 와.” 입술이 살짝 멀어지면서 유천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좀 누그러진 듯한 유천의 목소리에 또 다시 눈물이 왈칵 넘쳤다. 내 흐느낌에 유천은 또 술 냄새와 불가리 블랙 향이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유천이 몸을 일으키려 하는 것 같기에 나는 다시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자꾸자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직 눈을 뜨고 그를 똑바로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마주선 연인을 또 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놔.”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또르륵 눈물이 굴러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은 또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놔 봐.” “…싫어.” “또 덮친다?” “…….” 입술을 꾹 깨물자, 유천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진다. 금세 귀가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유천을 때리고, 걷어차고, 밀어내던 나였는데……. 유천은 그대로 다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얼른 입술을 열어 유천의 혀를 재촉했다. 하지만 키스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지, 유천은 그대로 손을 목뒤로 뻗어 내 손목을 묶은 넥타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작게 꼼지락거리던 손이 풀리자 나는 덥석 유천의 목을 끌어안아 버렸다. 코끝에 쌉쌀한 불가리 블랙이 감돌았다. 그리웠던 향기에 또 눈물이 난다. 급히 유천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 하자, 이번에는 유천이 고개를 돌려 피했다. 멀어지는 체온에 다급하게 눈을 떴다. “왜?” “더럽다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유천의 검은 눈동자 안에 새로 생겨난 생채기가 보인다. 나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고는 그대로 유천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쳐 버렸다. 유천은 놀란 듯 잠시 움직임을 멈췄지만, 내가 집요하게 입술 위를 할짝거리자 비로소 입을 열어 주었다. 천천히 체온이 회복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여전히 유천의 손끝과 입술은 차가웠다. 키스를 하면서 유천의 차가운 볼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잔뜩 말라서 홀쭉해져 있지만, 여전히 도자기처럼 매끈한 그의 뺨. 그리고 보드라운 귀 끝에 작은 귀걸이가 만져졌다. 바보야, 여태 날 매달고 있으니 힘들지……. 내가 모질게 군만큼, 너도 빨리 날 떨쳐냈으면 좋았잖아. 죄책감에 코끝이 찡해서 잠시 숨을 멈추자, 유천의 차가운 손가락이 가만히 눈물을 닦아내고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허리부터 간질간질하게 오싹한 느낌이 올라온다. 맨살에 닿는 유천의 체온에 나는 또 흠칫 어깨를 웅크렸다. 그렇게 본격적인 키스가 시작되었다. 촉, 촉,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잔잔히 흐르는 음악에 섞여들었다. 부쩍 조심스러워진 유천의 손끝은 끊임없이 내 눈물자국을 훔쳐냈고, 나는 유천의 입술에 만든 상처 위에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말이라는 것은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좋아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이 순간의 애틋한 감정을 전부 담아낼 수 없었다. 우리는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서로의 몸을 쓰다듬고 끌어안았다. 맞닿은 체온으로 그 마음을 전하려는 것처럼. 입술 위를 맴돌던 유천이 말갛게 드러난 목에 입을 맞추자, 나는 한숨처럼 열기가 섞인 숨결을 허공에 토해내며 유천의 어깨를 꾹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보드라운 머리카락, 손바닥에 느껴지는 어깨의 골격과 잔뜩 말라 도드라진 날개 뼈, 입술에 와 닿는 그리운 온기와, 쌉싸름한 유천의 향기……. 내 품에 안고 있는데도 너무 그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유천 역시 잔뜩 마른 내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깊게 입을 맞춰오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깊어지는 유천의 손길에 천천히 몸이 달아오르던 순간이었다. “준수야.” “…응?” “한다?” 목덜미에 내뱉어진 조심스러운 유천의 말에 나는 비로소 감았던 눈을 떴다. 연한 조명이 뽀얗게 쏟아지는 룸의 천정이 눈에 들어왔다. 유천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나자 왠지 굉장히 민망한 기분이다. 내가 움직임을 멈춘 것을 깨달았는지 유천이 고개를 들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유천의 눈동자 안에 말갛게 담긴 내가 눈을 깜빡인다. 금세 볼이 화끈하다. “여기 싫다고, 미친놈아!” 눈을 꾹 감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고였던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유천은 ‘알았어’라며 가만히 웃었다. 희미한 웃음을 따라 엷게 술 냄새가 밀려왔다. 조심스레 눈물 자국을 닦아내는 유천의 손길에는 또 가슴이 뻐근하게 아프다. 고통과는 조금 다른 기묘한 통증. 꼭 영화에서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뒤에 남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웃는 장면처럼 먹먹하고 아릿한…….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을 해 보았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이라곤, 또 어떤 현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더라도, 우리는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또 우리를 궁지로 몰고,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운 상처를 만들지라도 우리는 연결된 끈을 놓지 못할 것이라는 것. 금속은 불에 몸을 달구고, 모질게 망치질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강철이 된다. 값진 다이아몬드도 연마되지 않고서는 제 몫을 다 하지 못한다. 바위는 정을 맞아 깨어지고 나서야 작품이 되며, 씨앗은 얼어붙은 땅 속에서 모진 겨울을 견뎌내야 싹을 틔울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러했듯, 사랑 역시 고통 속에서 더 강인해진다. 이제는 온전히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한다. 현실은 비록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시련은 순식간에 우리의 불신을 불식시키고, 서툴렀던 감정을 더욱 참되고 영롱하게 벼리어 주었다. 상처 주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사이지만, 혈액처럼 농밀하게 몸을 타고 도는 서로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실하다고 이제는 자신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하고 있다. 사랑의 크기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겪을 고통스러운 시간은 마음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전보다는 수월하게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질리고 애정이 사라져 잔뜩 할퀴며 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유천과 이별한 후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아직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위안삼아 이를 악물고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온기가 필요했다. 끝까지 기억하고, 기대어 추억할……. 나는 다시 유천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지금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최후일지라도…, 비록 이것이 우리의 눈을 속이는 아름다운 환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순간을 함께 해야 했기에……. 유천은 그런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올라갈까?’라고 물었다. 어디를 의미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유천은 내 손목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힘없이 끌려 일어난 내가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를 응시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유천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운 룸을 나서서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 연한 조명이 드문드문 설치된 복도는 방음시설이 잘 되어 있는지 여전히 조용했다. 푹신한 진보랏빛 카펫은 우리가 걷는 발소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굳게 내 손을 맞잡은 유천의 마르고 커다란 손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잠자코 유천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박 회장님이라든가, 재영의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와 나의 감정에 충실할 시간이었으니까. + 한참이나 길게 꼬불꼬불 이어지던 복도는 클럽 뒤편에 위치한 고급 호텔 지하 주차장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CCTV가 설치된 엘리베이터에서는 손만 잡고 있었지만, 유천이 카드키로 방문을 여는 순간부터 우리는 성급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입술을 마주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유천은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혀를 밀어 넣었다. 나는 유천의 어깨를 더듬어 재킷을 벗겨 내렸다. 유천 역시 내 외투를 벗겨 바닥에 던지고는 서둘러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맨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차가운 손끝에 섬뜩한 느낌이 들어 부르르 몸을 떨자 유천은 입술을 맞댄 채 쿡쿡 웃었다. 유천에게서는 여전히 알싸한 불가리 블랙과 술 냄새가 났다. 우리가 지나간 길 위에는 뱀의 허물처럼 재킷이며, 셔츠가 구겨진 채 남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를 벗겨내며 침대로 향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유천이 허리를 받치는 것에 의지해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버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유천의 실루엣이 움직인다. 잘 보이지 않으니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몸의 모든 감각이 전부 깨어나서 세심하게 유천의 흔적을 쫓는다. 몸을 겹쳐오는 유천의 무게에 아직 남은 옷가지들이 바스락바스락 속살거린다. 시트에서 번져나는 청결한 향기. 유천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희미한 궤적을 그리며 불가리 블랙이 흩어진다. 유천의 차가웠던 손끝을 내 체온이 데우고 있다. “준수, 손.” 내 티셔츠를 끌어올리며 유천이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럽게 울던 나는 응? 하고 되물으며 킥킥 웃었다. 팔 들라고. 유천은 가만히 웃으며 다시 속삭였다. 낮고 건조하고 섹시한 유천의 목소리. 나는 조금 긴장한 채 팔을 들어 주었고, 유천은 조심스레 내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겨냈다. “추워.” “금방 안 춥게 해 줄게.” 이런 소리를 하며 찰칵, 찰칵, 버클을 풀어내는 유천의 행동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해진다. 불을 켜지 않아 다행이다. 얼굴이 빨개진 걸 유천이 봤으면 또 놀려댔을 테니까.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유천의 어깨를 더듬어 찾았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가 사각이며 만져졌다. 다시 가슴 쪽으로 더듬어 내려왔다. 미처 풀지 못한 단추가 잡혔다. 단추를 풀어 내리는데 자꾸 긴장이 되어 손끝이 떨린다. 그런 내 반응에 유천은 또 쿡쿡 웃었고, 나는 얼굴이 더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가 할게.” 유천은 조용히 속삭이며 떨리는 내 손을 꽉 잡아 저지시키더니 다시 입술을 맞대왔다. 말캉하게 얽혀드는 혀는 어느새 뜨거운 느낌마저 든다. 술 냄새 나. 유천은 내 투덜거림에 사과하는 대신, 콧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아까 내게 했던 행동 때문인지 유천은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긴장감이 더해 어깨를 덜덜 떠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유천은 이불을 끌어올려 내 위를 덮어주며 맨살이 닿는 면적을 서서히 늘려나갔다. 어느새 차갑게 식은 어깨를 유천의 커다란 손이 감싸왔다. 아직도 추워? 아니……. 그럼? ……. 대답하지 못하는 내 위로 유천은 조금 더 무게를 실어 깊은 입맞춤을 해왔다. 얼굴을 간질이는 유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 넘겼다. 사르륵, 이내 손가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에서 희미하게 샴푸 냄새가 났다. 바스락바스락, 여전히 시트는 조용히 소곤거렸고, 허리를 끌어안는 유천의 손길에 나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맞닿은 유천의 몸은 비쩍 말라서 뼈가 부딪힐 때마다 조금 아팠다.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손을 뻗어 유천의 등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여전히 갈비뼈가 오톨도톨 만져진다. 안쓰럽지만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 킥킥 웃었다. 왜 웃어? 유천이 입술을 떨어뜨리고 조용히 물어왔다. 여기, 아직 빨래판이야. 너 너무 말라서 아파. 유천은 피식 웃더니 그대로 내 가슴 위에 입술을 묻었다. “하윽……! 야!” 유두를 물어오는 유천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허리를 뒤틀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저절로 무릎을 세워 한쪽 다리를 끌어올리자, 유천의 다리가 사이를 파고 들어와 엉킨다. 유천과 맞닿은 피부가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다. 그제야 우리가 샤워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천아…….” 내 부름에 여전히 유두를 머금고 있는 유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답을 웅얼거린다. 고개를 조금 숙이자, 어둠에 익은 눈에 유천의 짙까만 머리가 보인다. 찰랑찰랑 계속해서 내 가슴을 간질이는 매끄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슥 집어넣어 쓰다듬었다. 보슬보슬 풍겨 오는 샴푸 냄새. “나, 하아…, 아, 안 씻었는데…….” 유천은 여전히 내 가슴을 자극하며 쿡쿡 웃었다. 맨살에 와 닿는 따스한 호흡이 간질간질하다. 나는 또 다시 열기 어린 숨결을 허공에 토해내며 몸을 뒤틀었다. 허리를 쓰다듬던 유천의 뜨거운 손이 조심스레 골반 위로 옮겨오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의 입술이 쇄골에 잠시 머물며 작은 흔적을 만들었다. 목덜미에도 하나, 가슴에도 하나. 그러고 나서는 조심스럽게 턱에 입을 맞추고, 다시 입술에 한 번. 코끝, 뺨, 감은 눈 위, 눈썹과 이마 위로 감미로운 키스가 내렸다. 마지막으로 유천의 입술이 귀에 닿았다. “읏……!” 귀에 뜨거운 호흡이 와 닿자, 나는 또 어깨를 웅크리며 몸을 뒤척였다. 유천은 내 반응에 조금 더 세심하게 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혀와 입술이 귓불을 섬세하게 훑어 내렸다. 유천의 혀가 닿았던 자리는 금세 싸늘하게 찬 공기가 와 닿았고, 유천은 그 위를 또 다시 따스한 혀로 더듬었다. 볼에 와 닿는 유천의 머리카락과, 그의 체온과 숨결에 나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다시 유천의 뜨거운 손이 비쩍 마른 골반 위를 가만히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싫으면 지금 얘기해.” 귓가에 속삭이는 유천의 목소리. 하지만 닿아 있는 그 역시 잔뜩 흥분한 채 달아올라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싫다고 해도 할 거잖아.” 나는 언젠가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투덜거렸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다시 내 가슴에 입술을 눌러왔다. 조심스럽게 그의 손이 허리 뒤쪽을 쓸었다가 다시 골반으로 미끄러졌다. 뾰족하게 일어선 유두를 계속해서 자극하며 허벅지 안쪽을 살살 쓰는 느낌에 나는 크게 몸을 뒤척이며 들뜬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유천의 뜨거운 손이 내 것을 살짝 쥐어오자 긴장해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런 나를 알아차렸는지 유천은 또 다시 가슴에 따스한 호흡을 흘리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 유천의 조금씩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슴에 입술을 꾹 누르고, 말라서 볼 품 없을 갈비뼈 위에도 하나하나 호흡을 뱉어냈다. 그리고 유천이 동그랗게 패인 배꼽 위에 잠시 혀를 굴리고 난 직후. “……!” 머리가 쭈뼛 서도록 짜릿한 자극에 나는 화들짝 놀라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시트를 틀어쥐었다. 다리 사이에 와 닿는 유천의 머리카락에, 허벅지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잔뜩 경직되어 있다. 따뜻하고 매끄럽고 보드라운 느낌. 유천은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골반 뼈 위를 꾹 누르며 혀로 입 안에 머금은 끝을 할짝거렸다. 허리가 자연스레 크게 휘며 또 시트를 움켜쥐게 된다. 나는 더욱 입을 틀어막은 손에 힘을 주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유천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을 잡아 내리고는 더 교묘하게 나를 자극해 왔다. 촉촉한 입 안에 감싸인 그것은 유천이 움직임을 시작하자 조금씩 열기를 더해갔다. 코 끝에 계속해서 불가리 블랙이 밀려들었다. 유천의 샴푸 냄새, 세제 향기, 낯선 방. 내 것을 이로 살살 긁어대고 끝을 혀로 굴리는 유천의 애무에 나는 몇 번이나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유천아…, 하윽……!” 머릿속이 창백하다. 절정을 맞은 나는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과 함께 몸을 크게 뒤틀어 유천의 머리를 밀어냈다. 나는 쌕쌕 숨을 몰아쉬며 축 늘어져버렸다. 유천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그만 못 해. 아프다고 울어도 계속 할 거야.” “…응.” 다시 허리를 안으며 귓가에 속삭여오는 유천의 목소리는 음악처럼 감미롭다. 말캉한 혀가 다시 입 안을 침입함과 동시에, 내가 사정한 액체가 잔뜩 묻은 유천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질감에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유천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습기 어린 입맞춤은 역시 습기 찬 소리를 냈다.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잠시, 유천의 손가락이 하나 더 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자지러지게 몸을 떨며 유천의 혀를 깨물어버렸다. “아윽…, 유, 유천아, 아파…….” 내가 깨문 혀가 아팠는지, 유천은 조금 웃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허리를 살살 쓸어내리는 유천의 손길이 한없이 간지럽다. 유천의 따뜻한 입술이 유두를 머금고 할짝였다. “흐읏……!” 허리 뒤에서부터 간질거리며 느껴지는 쾌감에 나는 또 몸을 크게 휘었다. 유천은 내 안으로 들어선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잠시 더 나를 달래며 쓰다듬고 키스했다. 약한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유천의 섬세한 자극에 나는 바들바들 몸을 떨면서도 그의 목에 매달려 달뜬 신음을 토해냈다. 이물감에 익숙해질 무렵 유천은 다시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입구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팠다.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 기묘한 느낌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이나 고통을 참았다. 유천의 따뜻한 혀가 눈가를 핥으며 눈물을 닦아낸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경고했듯이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순간, 왜 내가 매번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불만이 생겨나기도 했으나, 유천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에 해방감이 느껴져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늘 너무 단순해서 탈이다. 무릎을 굽혀 세워진 다리 사이로 유천의 몸이 들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에 힘 빼.” 경직되어 파르르 떨고 있는 허벅지를 유천이 톡톡 치며 속삭였다. 다리 안쪽의 연한 살을 유천이 가만히 쓸어내리자 손끝을 따라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유천은 자신의 것으로 조심스레 입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촘촘한 주름을 따라 보드라운 살갗이 닿아오는 느낌이 낯설다. 잠시 후 유천은 한쪽 손으로 단단히 내 골반을 부여잡더니 조심스레 삽입을 시도했다. 또 다시 아래부터 울컥 밀려오는 통증에 나는 숨을 멈추고 시트를 틀어쥐었다. 손끝이 새하얗게 질려 빳빳하다. 바들바들 몸을 떠는 내 입술 위에 유천의 따스한 숨결이 와 닿았다. “준수야, 숨 쉬어. 힘 빼면서 후- 해.” 유천의 뜨거운 손이 또 다시 허리 뒤쪽을 쓸어내리자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하아…….” 고통이 섞인 달뜬 신음. 유천은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계속해서 예민해진 내 몸을 쓸어내리고 입술을 눌러 자국을 새겼다. 그렇게 조금 더 안으로 들어오는 유천의 몸에 몸을 떨고, 힘들어하는 나를 달래는 유천의 손길에 열기 어린 숨결을 토해내기를 수차례. 한참만에야 끝까지 안으로 들어온 유천이 내벽을 쓸며 천천히 빠져나가는 느낌에 나는 또 파르르 몸을 떨었다. “윽…, 준수야, 힘 주지 마.” 유천은 흠칫 경직된 내 몸에 고통을 느꼈는지, 짧게 신음을 토해내며 내 위로 쓰러졌다. 나는 입술을 달달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몸에서 힘을 풀었다. 많이 아파? 미안……. 유천은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충분히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몸짓이었지만, 몸을 나누는 것은 아직 서툰 나였기에 눈물이 방울방울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유천의 따스한 입술이 계속해서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 유천에게 손을 뻗어 팔뚝을 움켜쥐었다. 또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유천은 그런 내 손을 풀어내더니 깍지 껴 잡았다. 조금 몸을 숙여오는 유천에게서 또 불가리 블랙이 쏟아져 내린다. 이렇게 씁쓸한 향기였구나……. 허리를 밀어 올리는 유천에게 안겨 나는 새삼 그의 향기를 추억했다. 땀에 젖은 피부 위로 불가리 블랙과 닮은 유천의 체향이 느껴졌다. 온통 우리 주위에는 희미한 열기가 떠돌았다. 뱉어내는 달뜬 신음과, 뜨거운 숨결에 섞어 우리의 고통도 토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몸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차곡차곡 접어 제 안에 소중히 간직하는 중이다. 나중에 두고두고 펴보기 위한 책갈피. 몸이 흔들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넘쳐흐르는 눈으로 나를 안는 유천을 응시했다. 이제는 꽤나 어둠이 눈에 익어 유천의 나신이 선명하다. 그의 매끈하게 떨어지는 어깨와, 잔뜩 말라서 가느다랗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목덜미가 뽀얗다. 유천은 말끔하고 단정한 미간에 조금 인상을 쓰고 있었다. 유천이 눈물을 입술로 훔쳐냈다. 나는 허리를 밀어 올리는 유천의 몸짓에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손을 뻗어 유천의 볼을 감싸 쥐고는 유천의 입술 위에 난 상처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여전히 부어올라 있는 내 흔적. 자꾸 몸이 흔들려 입술이 어긋났지만, 나는 계속해서 유천에게 키스했다. 눈물이 또르륵 굴러 시트를 적셨다. 익숙한 유천의 체향에 몇 번이나 숨을 쉬지 못하고 나는 숨을 할딱이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준수야.” “하읏…, 응.” “윽…, 우리 준수.” “으, 응…….” 유천은 입맞춤에 반응하듯 계속해서 내 이름을 속삭였다. 낮고 건조한 유천의 목소리. 그 말에 담긴 애달픈 감정. 유천이 부르는 내 이름이 작은 유리조각처럼 가슴 속에 따끔따끔 쏟아져 내렸다. “준수 맞지……?” “응, 하아…, 나 맞아.” “박유천 애인, 읏…, 김, 준수 맞지?” “맞아, 유천아. 흑…. 박유천 꺼, 김준수.” 유천에 의해 흔들리며 나는 신음을 섞어 더듬더듬 대답을 뱉어냈다. 유천은 또 내 손을 꾹 말아 쥐며 한숨처럼 가쁜 신음을 토해냈다. 그에 의해 조금씩 열기를 더하는 몸은 슬슬 고통을 쾌감으로 바꾸어 느끼고 있었다. “왜 이제 왔어…….” 얼핏 물기가 서린 유천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는 또 다시 몸을 떨며 울었다. 그의 가슴에 잔뜩 난 생채기가 고작 하루 만에 치유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가 오늘을 기억하며 나 없는 일상을 잘 견뎌주길 바랐다. 순간 거칠게 밀어붙이는 허리를 밀어붙이는 유천의 행동에 흠칫 몸이 굳었다. 알싸하게 아래부터 통증이 타고 올라온다. 나는 투정처럼 눈물을 섞어 칭얼댔다. “아파…, 유천아, 아흣…, 아파 죽겠어…….”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네가 너무 그리워서…, 널 안고 있어도 네가 그리워서……. “이제, 흐읏…, 그만 못 해.” “응…, 응…, 그만 하지 마. 하앗…….” 나는 계속해서 유천의 따스한 체온을 더듬었다. 귓가에 조용조용 속삭이며 나를 달래는 유천의 낮은 목소리는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엷은 어둠은 고운 벨벳 장막처럼 우리를 감싸 안았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은 신기루. 다시 유천을 놓아 보내야 한다 해도, 오늘을 잊지 않기를. 몸에 새긴 아릿한 고통을…, 달콤했던 키스를…, 달뜬 숨결을…, 너의 미소를……. My Beloved……. 내가 평생 안고 갈 마음의 연인, 애달픈 내 사랑아……. 간절한 마음만큼 행위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유천은 좀 더 힘을 실어 허리를 쳐올렸고 나는 유천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렸다. 거칠게 몰아붙여진 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시간이 영원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하악……!”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유천의 입술 위로 나는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토해내며 크게 몸을 들썩였다. “읏…, 찾았다.” 희미하게 웃음이 섞인 유천의 속삭임은 의미를 채 깨닫기도 전에 뇌리에서 증발해버렸다. “하아…, 아흣…, 유…, 흐읍…, 유천아…….” “흐…, 어.” “아흑……! 아앗! 으응…, 거, 거기.” “알아.” 유천의 나지막한 웃음소리. 그리고 유천의 움직임이 조금씩 속도를 더 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 안 어딘가를 쿡쿡 찔러올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신음을 토했다. 살이 섞이는 소리는 생각보다 민망하고 질척했다. 유천은 그렇게 나를 밀어붙이면서 또 다시 고개를 든 내 것을 그러쥐고 자극해왔다. 소름끼치도록 격렬한 쾌감에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소리 내도 괜찮다는 유천의 말에 세차게 도리질하자, 유천은 내 입 안으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었다. “이 다 상해. 악물지 마.” 유천의 건조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나를 절정으로 몰아붙였다. 나는 입 안에 밀어 넣어진 유천의 손을 꽉 물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아랫배 어딘가에서 뭉근하게 찾아드는 쾌감, 등골이 오싹하도록 짜릿한 느낌과 서서히 피치를 더해가는 유천의 움직임은 나를 서서히 절정으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흐읏…….” “으응…, 흐으…….”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 눈앞이 알록달록하다. 현란한 색깔들이 마구 소용돌이치며 뒤섞인다. 이세계(異世界). 서로의 감정이 정확하게 연결되는 순간. 혼자서는 느껴보지 못한 아찔한 느낌에 나는 유천의 손을 더욱 꽉 악물었다. 이윽고 눈앞이 캄캄하게 암전되며 또 다시 절정이 찾아왔다. 온 몸을 바르르 떨며 뻣뻣하게 굳어 먼저 절정을 맞은 나를 유천은 조금 더 밀어붙였다. 쌕쌕 숨을 몰아쉬며 축 늘어져 있으려니 유천 역시 사정감에 흠칫 몸을 굳히며 서둘러 내 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후두둑 유천의 액체가 내 몸 위로 흘러넘쳤다. 나는 손을 뻗어 그대로 유천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조심스럽게 혀가 엉켜들었다. 유천은 내게 깔끔한 후희도 서비스했다. 유천의 다정한 애무에 나는 몇 번이나 킥킥대며 웃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관계로 이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라도록 길고 오랜 정사였다. 온 몸이 땀과 타액으로 흥건히 젖을 때까지 우리는 몇 번이나 서로를 안았다. 그것은 새장에 갇히기 직전, 현실에 저항하는 우리의 마지막 날갯짓 같았다. 나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 유천은 계속 해서 눈물을 입술로 훔쳐내며 나를 뜨겁게 끌어안았고, 나는 간절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어둠이 눈에 익어 사물이 선명해질 때까지. 벗은 몸이 더 이상 창피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의 손을 잡고 잠드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까지. 새벽녘, 지쳐서 죽은 듯 늘어진 내게, 수마는 잿빛 어둠을 환영처럼 뽀얗게 반전시키며 밀어닥쳤다. 술기운이 사라진 유천의 말갛고 단정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하다. 잠에 취해 억지로 부릅뜬 눈에 쌍꺼풀이 짙게 만들어지자 유천은 피식 웃으며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좀 자 둬. 유천의 속삭임은 언제나처럼 달콤했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득하게 의식이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몇 차례에 걸친 격렬한 정사 끝에 나는 그렇게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전, 유천은 나를 소중한 듯 품에 안고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 학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도서관 5층의 작은 서고다. 열람용 책상도 하나뿐이고, 에어컨이 없어서 여름방학을 하기 직전에는 좀 덥다. 읽을 만한 책이나 학생들이 자주 찾는 서적들은 전부 3, 4층에 있고, 5층에 있는 책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폴폴 나는 조선왕조실록이라던가, 한자로 쓰인 역사 관련 도서들뿐이었기에 굳이 거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덕분에 나는 시험 기간 내내 오롯이 책상을 독차지한 채 열람실의 자리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창문을 열어두면 쏴아아- 나뭇잎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된 먼지와 종이 냄새에 섞여 싱그러운 풀 향기가 나는 미풍이 앞머리를 가볍게 흩트리고 지나갔다. 이곳은 커다란 나무 위에 지어진 소년들의 작은 통나무집처럼 좁고 아늑하고 조용했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새끼 고양이처럼 구석진 곳을 좋아했다. 이 작은 서고는 유천과 1학년 초에 학교를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곳이었다. 캠퍼스가 넓으니 학생들은 4년, 6년씩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이곳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나중에 졸업생들에게 물어봐도, ‘어? 그런 곳이 있었어?’라고 할 만큼 알려지지 않은 곳. 멍하니 내다본 창밖에는 눈부신 햇살이 뽀얗게 쏟아져 내렸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와 또각또각 구두소리. 시험을 마쳤는지 홀가분한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내일 볼 마지막 시험을 위해 토 나오도록 두꺼운 전공 책과 전자 사전을 앞에 두고 사투 중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공부가 될 리가 없다. 이럴 때는 여러 가지 의미로 박유천이 부러워 죽겠다. 박유천은 어제 시험이 끝났다. 아마 지금은 뻗어서 못 일어나고 있을 거다. 종강했다고 어제 같은 과 녀석들이랑 진탕 퍼마셨으니까. 또 아파트에 불이 꺼져 있기에 잔뜩 삐쳐 있다가 미친 척 하고 전화를 했더니 역시나 여자가 받았다. 열 받아서 여자가 말해준 술집으로 달려갔더니 다행히 여럿이 있기에, 딴 생각 하기 전에 냉큼 주워다 집에 던져 놨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죽어라고 술을 마셔대는지. 그 새끼는 아마도 몸의 70%가 수분이 아닌 알콜로 이루어져 있을 거다. 날아가면 채우고, 날아가면 채우고, 매일매일 그러고 있는 거다. 당연히 어제도 유천의 치다꺼리를 하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잤다. 공부할 분량이 많아서 일찍 도서관에 나오긴 했지만, 잠이 와서 글자가 눈에 제대로 안 들어온다. 공부라는 건, 다이어트와 함께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혹한 시련인 것 같다. 이기면 성공하지만, 대체로 지고 마는 싸움. 커피나 한잔 마실까? 주머니에 든 동전을 잘그락거리며 일어섰다. 터덜터덜 옥상으로 올라가 커피를 뽑아들었다. 청량한 바람과 따가운 햇살. 여름이 눈부시다. 날씨가 좋은 날은 더 공부하기가 싫어진다. 멍하니 앉아서 하늘을 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박유천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하지만 우린 심심하다고 통화하는 사이가 아닌데. 아무튼 이건 병도 아주 심각하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이런 기분일까? 수시로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무 용건 없이 전화를 하게 되는. 조금 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번호를 꾹꾹 누르고 통화를 눌러버렸다. 이러고 있다가는 공부도 못 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 어. “일어났어?” - 어. “언제?” - 좀 전에. 짧고 간결한 우리의 대화. 전화기 너머에서는 유천이 부스럭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볍게 내쉬는 숨소리와,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 물을 마시는 소리 같은 것들. 괜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 왜? “응?” - 할 말 있어서 전화한 거 아냐? “아, 아니. 그냥.” 대화가 끊기자 괜히 손에 땀이 난다. 유천은 잠시 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 어디야? “응? 하, 학교.” - 옆에 누구 있어? “아니, 없는데.” - 근데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여자랑 있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 새끼 눈치 빠른 건 알았지만, 어쩌면 이렇게 귀신같을까? 여자는 아니지만, 박유천 때문에 떨고 있으니까, 얼추 그의 말이 맞다. 아무튼 분위기 읽는 실력은 점쟁이 저리가라다. “아니야. 혼자 있어.” - 학교에서 뭐해? “공부.” - 시험 아직 안 끝났어? “응, 내일 끝나.” 그러자 유천은 집에 자기를 데려다 놓은 게 나냐고 물었고, 나는 술 좀 그만 마시라고 대답했다. 유천은 피식 웃었고, 나는 어제 너 데려다 놓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고 투덜거렸다. 소소한 대화임에도 등줄기가 간질간질해진다. 오스스 소름이 돋은 목덜미를 긁적거리면서도, 유천의 잠긴 듯 한 낮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헤실헤실 웃었다. - 날씨 좋지? “응.” - 할 거 많아? “왜?” - 드라이브 갈까? “응.”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나는 박유천을 굉장히 많이 좋아하나보다. 공부할 것이 쌓였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말이다. + 미니쿠퍼 창문을 다 열어놓고 경인고속도로를 탔다. 머리가 잔뜩 흐트러진 채 우린 월미도에 도착했고, 차를 대고서는 슬러시를 한 개씩 사먹었다. 쪼르르 빨대를 빨아올리자 슬러시 색이 연해지며 서늘하고 달큰한 액체가 입 안에 감돈다. “이렇게 해 봐.” 유천이 핸드폰 카메라를 작동시키며 혀를 내밀어 보인다. 착하게도 나는 얼른 혀를 내밀었고, 유천은 키득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입술이며 혓바닥이 온통 진보라색이다. 꼭 어릴 때 불량식품을 먹고 입안이 물든 것 같다. 반면 박유천은 레몬 맛이라 전혀 변화가 없다. 나는 유천에게도 내 포도 맛 슬러시를 억지로 먹여 기어코 입술을 시커멓게 물들여 놓았다. 그리고는 바다를 등지고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셀카를 찍었다. 피에로처럼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사진이 찍혀서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놀려대며 웃었다. 그러고 나서는 유람선을 탔다. 천 원짜리 슬러시는 내가 샀으니, 유천에게 만5천 원짜리 표를 사라고 강요하면서 말이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원래 부자들은 이런데서 많이 써줘야 지역경제가 살아난다고 훈계까지 했다. 유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선선히 지갑을 꺼내들었다. 유람선의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단체로 구경 온 중년 부부들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우리뿐이다. 아니, 그 틈에서는 젊은 게 아니라 새파랗게 어린 건가? 우리는 뻘쭘하게 기예단의 공연을 구경을 하다가는 새우깡 한 봉지를 사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와…….” 갈매기들의 군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까지 벌린 채 넋을 잃고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를 구경했다.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이라, 이렇게 가까이서 갈매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침 떨어진다.” 유천은 내 턱을 밀어 올리며 새우깡 봉지를 쥐어주었다. “먹기 싫어.” “너 말고. 쟤들.” 유천은 담배를 피워 물며 갈매기들을 가리켰다. 그제야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공중에서 낚아채 받아먹는 갈매기들의 묘기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쟤들 훈련 받았어? 왜 이렇게 잘 받아먹어? 나는 서둘러 새우깡을 몇 개 꺼내 허공에 던졌다. 갈매기 네 마리가 얼른 채 간다. “야! 저거 봐!” 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고 새된 소리를 질러버렸다. 유천은 쿡쿡 웃으며 새우깡을 몇 개 집더니 그 긴 팔을 배 밖으로 쭉 뻗었다. 갈매기 한 마리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유천의 손에서 새우깡을 물고 간다. 나는 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에게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조류라니……. 도심의 ‘닭 비둘기’ 빼곤 처음 봤다. 나는 갈매기와 유천을 번갈아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새끼는 이런 델 어떻게 아는 거야. 불현듯 고개를 드는 질투심. “누구랑 와 봤냐?” “어?” 유천은 또 새우깡 몇 개를 집어가며 되물었다. “여기 누구랑 와 봤냐고.” “말 하면 알아?” “몰라도 해 봐.” “음…….” 개새끼, 진짜 와 봤나보네. 금세 썩소가 지어진다. “강현아, 김지은.” 아악! 귀신은 뭐하나 몰라! 이 새끼 안 잡아가고! 어이, 거기 빠져죽은 억울한 영혼님. 이 새끼 바람둥이래요. 새우깡 드릴 테니까 얘 좀 잡아가요! 나는 새우깡을 우수수 바다에 쏟으며 입술을 꾹 물었다. 유천에게서 담배연기가 날아와 콜록콜록 기침도 했다. “이쪽으로 와.” “니가 옮겨.” 반대쪽으로 오라는 유천의 말에도 퉁명스럽게 고집을 피웠다. 유천은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잔뜩 기분이 상해 한 손에 새우깡 봉지를 쥔 채 난간에 축 늘어져 빨래처럼 흐늘거렸다. 강현아, 김지은, 그 다음이 김준수네. 뭐, 열 번째가 아닌 것도 감사해야 되는 건가? 에휴……. 한숨을 내쉬며 옆을 흘깃 봤더니 또 박유천은 갈매기들에게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다. 이대로 확 밀어버릴까 보다. 이참에 물에 빠져 죽은 처녀귀신들한테 봉사하는 건 어떠냐, 친구야? 네 바람둥이 이력에 화려한 장식이 되지 않겠니? 나는 심술궂게 유천을 노려보며 손에 든 새우깡을 한 주먹 입 안에 넣고 와구와구 씹었다. “너 먹지 말고 새 주라고.” “새가 뭐냐? 갈매기지.” “새나 갈매기나.” “웃기는 새끼. 새가 다 갈매기냐? 그러면 인간은 다 박유천이냐? 생물시간에 뭐 했냐? 머리는 장식이냐?” 김준수 심술 작렬이다. 유천은 피식 웃기만 했다. “또 시작이야, 김준수.” “내가 뭘.” “입 이만큼 나왔거든?” . . . “…아니거든?” 아득하게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하게 의식이 깨어난다. 감은 눈 위로 햇빛이 뽀얗다. 잠꼬대를 한 것 같다. 꿈의 여운인가? 나른하고 기분 좋은 느낌에 좀 더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유천의 꿈을 꿨다. 작년 여름, 시험보기 전날 박유천과 둘이 바다에 갔던 날. 그날 나는 심술이 잔뜩 나서 유천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대다가 짜증이 난 유천과 좀 싸웠다. 하지만 유람선을 내리며 유천이 회를 사준다는 말에 금세 풀리고 말았던 것 같다. 먹을 것에 넘어가다니, 정말 단순하기도 하지. 웃음이 나서 잠결에 피식 웃었다. 달칵.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눈을 뜨려 애썼다. 하지만 풀이라도 붙여 놓은 듯, 잘 떠지지 않는다. 손을 들어 한참이나 꼼지락거리며 눈을 비볐다. 바스락거리는 시트 소리. 몸에 와 닿는 이불의 느낌이 집과 다르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다. 밖에서 유천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그게…, 꿈이 아니란 말이지……?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유천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찔끔해서 다시 눈을 꾹 감아버렸다. 유천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내가 난리가 났다. 금세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지만,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가만히 머리를 쓸어 올리는 유천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마에 가볍게 와 닿는 입술에는 괜히 긴장해서 자는 척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말았다. “안녕?” 조금 잠긴 듯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 그제야 나는 눈을 뜨고 멋쩍게 미소 지었다. 유천은 싱긋 웃으며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내 손을 끌어다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버렸다. 쭈뼛쭈뼛 웃으며 유천의 손에 잡혀 있는 손을 빼내고는 꼼지락대며 이불을 끌어올려 드러난 맨 어깨를 덮었다. 아씨,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나는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굴려 유천의 시선을 피했다. “눈 부은 거 봐.” 유천은 쿡쿡 웃으며 내 볼을 꾹 꼬집었다.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쌀쌀맞게 유천의 손을 쳐내버렸다. 뚱하니 노려보자 입을 맞춰온다. 괜히 또 민망한 느낌에 귀가 따끈따끈해진다. “일어날 수 있겠어?” “당연하지.” 목이 잔뜩 쉬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입만 뻥긋거리는 금붕어가 된 느낌이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내 옷가지를 침대위에 올려두고는 입고 나오라며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가만히 유천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는 낑낑대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서 앉는 데만 해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다. 아무리 내가 좋아서 그랬다지만, 이 몸 상태는 정말 심각한 것 같다. 내려다 본 몸에는 유천의 흔적이 가득하다. 영역 표시를 하는 동물처럼 수도 없이 자국을 남겨 놓았다. 아무튼 저 녀석, 독점욕은…….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기묘한 느낌에 피식 웃었다. 그새 세탁을 보냈었는지 비닐 포장지에 싸인 내 옷이 참 낯설다. 시간이 얼마나 된 걸까? 세탁 보낸 옷이 돌아올 정도면 꽤 많이 지난 것 같은데. 오늘이 일요일이던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창밖을 보니 해가 지평에 가깝다. 새벽은 아니겠고……. 얼마나 잤는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똑똑, 빨리 나와. 문밖에서 들려온 유천의 목소리에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는데, 너무 무리했는지 저절로 다리가 절룩거려진다. 그런 나를 본 유천이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야야야, 뭐야!” 화들짝 놀라 버둥거려 보았지만, 유천은 그대로 나를 안아다가 소파 위에 앉혔다. 금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다. “꼬맹이, 목 쉰 거 봐.” 유천이 쿡쿡 웃는 것에는 괜히 심술이 난다. “너 때문이잖아.” “만날 다 나 때문이래.” “너 때문인 거 맞거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뾰족하게 날을 새워 대드는 내게 유천은 쪽 하고 입을 맞춰왔다. 당연히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입을 다물었고, 유천은 또 피식 웃었다. 나를 무력화 시키는 방법을 이 녀석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탈이다. “배 안 고파? 너 하루 종일 잤어.” 듣고 보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다. 어제 그렇게 체력을 쏟아 부었으니 배가 고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언제 시켰는지, 테이블에 놓인 룸서비스로 보이는 음식에서 김이 오르고 있다. “넌?” “별로 생각 없어.”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지?” “잘 아네.” 장난으로 꺼낸 말에 진심으로 대답해 오는 유천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하다. 입안이 까슬까슬해서 잘 먹힐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유천이 앞에 놓아주는 스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빵을 조금 찢어 스프에 적시는 나를 유천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유천과 내가 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서로에게 거짓 없이 마주선 순간. 내가 더 이상 유천을 억지로 밀어내려 하지 않는 시간. 하지만 괜한 어색함에 유천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더 오버해서 큰 소리를 내가며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었다. “그만 봐. 사람 먹는 거 처음 보냐?” “맛있냐?” “존나 맛있다, 읏……!” 퉁명스레 대답하는 내 입으로 빵이 하나 밀어 넣어졌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입에서 빵을 집어냈다. “왜 그래!” “잘도 들어간다 싶어서.” 나지막한 유천의 목소리에 고소(苦笑)가 어려 있다. “잘만 들어간다, 왜?” 나는 애써 모르는 척 더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정말 맛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입이 깔깔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른스럽게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넘기는 법은 잘 몰랐으니까. 유천은 그런 나를 보며 또 쓰게 웃었다. 기가 막힐 것이다. 자신은 밥도 잘 못 먹으며 괴로워했는데, 정작 김준수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하긴, 그래야 김준수지.” 유천의 씁쓸한 미소에는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애써 코를 훌쩍여 눈물을 참으며 가지런히 놓인 오렌지 조각 하나를 집어 유천에게 불쑥 내밀었다. 유천은 자기 앞에 내밀어진 오렌지 조각을 한참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째깍째깍, 조용히 시간이 흐른다. 유천의 검은 눈동자에 내가 담겨 있다. 그리움이 조용히 일렁이는 눈동자. “싫음 말고!” 괜한 민망함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유천은 그런 내 손목을 덥석 낚아채더니 오렌지를 자신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끝에 유천의 보드라운 입안 점막이 조금 닿았다.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움츠리고는 쭈뼛쭈뼛 시선을 피했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그런 내 입안에 또 빵 하나를 쑤셔 넣었고, 나는 잔뜩 신경질을 내며 유천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 진짜, 김준수, 저 놈의 입은 아직도 저래. 너 내가 못해서 안 하는 거 아니다?” “하시던가. 안 말렸다?” 우리는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고 이렇게 투닥댄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세상엔 딱히 정해놓지 않아도 당연한 것들이 있다. 여름엔 수박, 겨울엔 눈싸움,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어두워진다. 생명은 소중하며, 나보다 약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 그리고… 김준수 옆엔 박유천.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또 서로의 입에 빵조각을 쑤셔 넣고 킥킥대며 웃었다. 그래, 이건 좀 과격한 애정표현이라고 해 두자.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쑥스러움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마음은 계속 된다. 비록 서로가 곁에 없더라도.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킥킥대는 우리의 얼굴 위로 주홍빛 석양이 내렸다. 모처럼만에 우리는 친구 모드로 돌아가서 웃고 떠들며 첫 끼니를 마쳤다. 유천의 결혼식을 3일 앞둔 2월의 어느 날이었다. + 해가 지고, 밤이 내렸다. 대충 배를 채운 후, 우리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몇 시간이나 영화를 봤다. 아무도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긴긴 시간 내내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 짧고 무심한 대화들이 오갔을 뿐이다. 뭐 좀 마실래? 저거 재미없어, 저 여자 어디서 나왔었지? 너 그거 안 봤잖아… 따위의 사소하고 의미 없는 말들. 선뜻 꺼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제 이야기도, 그 동안 잘 지냈냐는 말도, 아무 것도……. 밤을 함께 보냈음에도 현실의 무게는 여전히 가슴 속에 닻을 내리고 우리를 묵직하게 짓눌러왔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단순히 지난밤 일을 떠올리고 멋쩍음에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이야깃거리가 떨어져갈수록 우리는 어색해졌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입을 꾹 다문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천의 손이 가끔 내 손 위를 감싸 쥐어왔다. 그러면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어깨가 아팠다. 잔뜩 말라버린 유천의 손가락에는 여전히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텅 빈 내 손가락이 너무나도 미안해서 나는 자리를 뜨는 척 하며 자연스레 그의 손을 피했다. 그러면 유천은 그 무심한 눈동자로 나를 잠시 올려다보다가는 이내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렇게 용무도 없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고, 한쪽 구석에 자리한 작은 냉장고와 홈 바를 왕복했다. “줄까?” 나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맥주 캔을 따며 물었다. “어.” 나지막한 유천의 대답에 나는 입도 대지 않은 캔을 그대로 유천에게 내밀었다. 넌? 되물어오는 유천에게는 그냥 짧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갔다. 도시의 야경이 정물화처럼 얼어붙어 있다. 나는 차창을 구경하는 어린애처럼 창틀에 기어 올라가서 멍하니 아래를 응시했다. 우리가 있는 방은 꽤 고층이었고, 비싸 보이는 가구로 채워져 있었으며, 넓었다. 스위트 룸 정도 되는 모양이다. 박유천다운 배려에 쓴 웃음이 나왔다. 어둠이 깔린 도시는 시리도록 차갑고 짙푸른 색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가로등의 주홍빛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흐릿했다. 지나는 사람들의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나왔다. 나는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한참이나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뱉어내는 숨결에 유리창은 천천히 흐려졌다가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시간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혔다. 수요일. 박유천의 결혼식. 명희 씨가 떠났다고 해도, 얼마든지 연기되어 다시 치러질 수 있는……. 이건 마치 영화 딥 임팩트처럼 별의 최후를 앞둔 카운트다운 같다. 유천과 나는 서로의 파멸을 손에 쥔 채,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정신만 황폐하게 만드는 회복불능의 진흙탕…….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언제 갈 거야?”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꺼낸 말은 유리창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 싸늘한 냉기에 얼어버리기라도 한 듯, 창에 하얗게 서렸던 입김은 한참만에야 천천히 사라져갔다. 이런 말을 꺼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속이 상해서 핑하니 눈물이 돌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손에 닿은 창문이 너무 차가워서 손이 시리다. “어딜?” “집.” 내 대답에 유천은 말없이 채널을 돌렸다. 등 뒤에서 웅성웅성 영화 대사가 들려왔다. 무심코 돌아본 화면에서는 로미오가 독약을 마시고 있었다. “박 회장님 댁.” 한참이나 대답이 없기에 다시 정정해서 말했다. 유천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화면에는 약을 먹고 쓰러진 로미오가 비쳤다. 소파에는 스스로를 망가뜨려버린 박유천.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죽어버린 로미오를 보고 제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 줄리엣처럼, 유천을 다시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나. 저 영화는 꼭 우리 같다……. 나는 얼어버린 손을 유리창에서 떼어 꾹 쥐었다. 뻣뻣하게 굳은 손끝이 조금 아렸다. “너 집에 가고 싶어?” 나지막한 유천의 되물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유천은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조금 쓸쓸하고 아파 보였다. 가슴 한 구석을 쿡 찔러오는 아련한 박유천의 분위기에 또 심장이 지끈거린다.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모습. 내가 사랑했던 눈동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할 시간이라고? 쓴 웃음이 나온다. “명희 출국했다며?” 유천의 말에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유천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나를 불렀다. 무심코 그의 곁으로 발을 옮기다가 씁쓸히 웃었다. 부르면 가는 김준수라니, 말 잘 듣는 애완동물 같다고나 할까? 아니, 인력(引力)이라고 해 두자. 유천이 나를 이끄는 힘은 늘 블랙홀처럼 짙고 농밀해서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태양의 주위를 도는 8개의 행성들처럼, 앞으로도 나는 그의 주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영영 맴돌 것이 분명하다. 설령 우리가 헤어진대도……. 말없이 유천의 옆에 몸을 걸쳤다. 폭신한 소파의 감촉. 샤워를 하고 세탁된 옷을 입었는데도 여전히 유천에게선 희미한 불가리 블랙 향이 났다. 유천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텅 빈 왼손을 가만히 끌어다 잡았다. 내 작은 손을 꾹 감싸 쥐는 체온에 조금 슬퍼졌다. 우리 모두가 다 슬펐다. 유천을 마음에 담은 채 재영의 곁에 머물 나도, 몸을 내게 튼 유천과 그의 휑한 등을 바라봐야 하는 명희 씨도, TV에서 유천이 나오면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를 집에 두어야 할 재영도……. “명희가 뭐래?” 유천의 물음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해도 되는 걸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유천과의 결혼은 불행해질 것이 틀림없을 거라는 얘기를? “결혼 못 하겠대?” 내 망설임을 알아챈 듯 유천이 다시 물어왔다. 나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천은 피식 웃으며 또 내 손을 꾹 쥐어왔다.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결국 둘 다 죽어버린 로미오와 줄리엣……. 우리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아 몸이 뻣뻣하다. 우린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 가슴이 콱콱 막혀온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결혼식.” 자신 없는 내 목소리에 유천은 내 손을 꾹 쥐며 말했다. “결혼 못해. 명희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게 맞아.” 절대적인 신뢰가 담긴 유천의 목소리. 묘한 기분에 나는 잔뜩 표정이 굳어버렸다. 섭섭함. 아니 조금 다른데……. 뭘까, 이 기분은? …질투?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유천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명희 씨의 위치가 묘하게 부럽다. 이런 걸 보면 난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연인 자리도 모자라, 친구의 자리도 아직까지 이렇게 탐을 내는 것을 보면. “너…….” 유천이 다시 손을 꾹 쥐어왔다. “응?” “이재영이랑 아무 일 없었지?” 유천의 무심한 질문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박유천이 궁금해 할 만 한 재영과의 ‘아무 일’이란 게……. “아, 아니야.”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부정했다. 유천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피식 웃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그 미소에 괜히 긴장이 된다. “꼬맹이, 거짓말만 늘었어.” “아니거든?” “무슨 일 있었던 사람이 그렇게 힘들어 하냐?” 내 모든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눈동자, 유천과 맞잡은 손끝, 숨조차도. 어젯밤 유천에게 안겨 힘들어 하던 나를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레 쓰다듬고 달래던 유천의 손길이 떠올라서 폭발하듯이 온 몸이 달아올라 버렸다. 손등마저 새빨개져 있는 것이 내 눈에도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자, 잤거든?” 도대체 무슨 자존심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떨리는 목소리로. “손만 잡고?” 유천은 피식 비웃었다. 개새끼……. 가슴 밑바닥에서 또 뭔가가 울컥 치솟는다. “잤다니까?” “어, 손만 잡고?” “아니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유천은 또 피식 웃으며 나를 달랜다. “이게 안 믿네? 보여줘?” 정색을 하고 진짜라는 듯 우겼다. 그러자 유천이 싸늘해진 눈초리로 나를 응시한다. 찔끔했지만 나는 지지 않고 노려봐주었다. “뭐?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시비라도 거는 듯 한 말투. 참 쓸데없는 고집이라는 걸 아는데, 그래도 나는 여전히 유천에게 이렇게 못되게 군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이런 다툼이 빠지면 밍밍해서 같이 못 있는다. 말은 안 했지만, 우린 이런 토닥임도 은근히 즐긴다. 왠지 굉장히 가까운 사이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이랄까?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내 표정은 한없이 퉁명스러웠을 것이고, 유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실소했다. “김준수, 넌.” “뭐?”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이번까지만 봐 준다.” 유천의 나직한 목소리에 담긴 수많은 의미에 쓴 웃음이 난다. 그는 지금 간접적으로 여자들과 가졌던 잠자리를 사과하고 있는 것이다. 뭐…, 속상하긴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그런 걸로 유천을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나는 지난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괴로워하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무거운 분위기는 싫으니까. 심지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코앞에 둔 지금으로서는 더더욱.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이 유천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택했다. “웃기는 새끼.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또 까분다.” “내가 콩이냐? 까불긴 뭘 까불어?” “나중에 안 무섭지?” 내 시비에 유천은 짧게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유천의 입가에 비릿하게 떠오른 미소를 보자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내가 했으면 분명 웃겼을 비스듬한 미소가 박유천에게는 어쩌면 저리도 섹시하게 어울리는 걸까? 나는 새삼 유천의 매력에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 “무섭긴 개뿔…, 헉……!” 씨발, 당장 무서워졌다……. 퉁명스럽게 비웃은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유천에게 어깨가 밀쳐져 소파에 털썩 쓰러져버렸고, 화등잔만큼 커진 눈으로 유천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어딘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유천의 표정에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간다. 유천은 그런 나를 보며 또 피식 웃었다. “안 무섭다며.” “누, 누가 무섭대!” “누가 무섭대?” “…….” 이게 미쳤나……. “따라하지 마.” “따라하지 마.” “…죽을래?” “죽을래?” 키득대며 내가 한 말을 고대로 따라하는 박유천은 정말 당장 불을 끄고 밟아버리고 싶다. 내 눈초리가 점점 험악해졌다. “해지 마!” “해지 마!” “씨바…….” “김준수, 욕 좀 해지 마!” 유천은 당황해서 튀어나온 말을 따라하며 키득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난다. 나는 허, 하고 웃으며 유천의 어깨를 밀어내 버렸다. “해지 마래.” 박유천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다. 그렇게 좋냐? 한 번 더 해주면 아주 쓰러져 죽겠다? 어찌나 얄미운지 한 대 쥐어박으려 손을 번쩍 들었을 때였다. 턱, 하니 유천에게 손목을 낚아 채여 몸이 확 일으켜졌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유천의 눈동자에 또 어깨가 경직되어 잔뜩 굳어버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뛴다. 아무래도 오늘 내 심장은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 “…….” 나 혼자만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은 정적. 아니, 이 새끼는 얼굴에 티타늄합금이라도 깔았어? 나는 얼굴이 자꾸 달아올라서 죽겠는데,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내가 잔뜩 긴장한 기색에 유천은 또 피식 웃으며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희미하게 번져나는 불가리 블랙. 눈가에 닿아오는 유천의 머리카락에 조금 눈을 찡그렸을 때였다. “야.” “……?” “나 결혼해?” “…….” “그냥 결혼해 버려?” 나지막이 물어오는 유천의 목소리.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 진짜 나 안 잡을 거야……? 투정이 섞인 것 같은 유천의 목소리에 또 가슴이 답답해 온다. 박유천이 저렇게까지 말을 하다니, 얼마나 고된 나날을 보냈을지 알 것 같아서 속이 상한다. 나쁜 자식. 그렇게 물으면 하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여태 투닥거리던 것도 잊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때 손가락에 낯선 것이 닿았다. 시선을 내리자, 유천은 자신의 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내 내 약지에 끼우고 있었다. 유천은 그대로 내 손을 당겨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반지는 조금 컸다. 나보다 커다란 유천의 손처럼. 손을 뻗어 유천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조금 더 짙은 불가리 블랙 향이 났다. 우리의 사랑처럼 쓰디 쓴 향기……. “왜 그랬어?” “…….” “이기지도 못할 거, 왜 헤어지자고 고집을 피워.” 유천의 목소리에 섞여 있는 상처에 또 죄책감이 밀려든다. 나는 유천의 어깨에 가만히 턱을 올린 채 씁쓸히 웃었다. 신기하다. 전 같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울었을 텐데, 웃음이 난다. “…못 이기니까.” “…….” “이겨낼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으니까.” “멍청하기는.” 내 대답에 유천은 나를 더 힘주어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비난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별 수 없는 상황이라 나는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럼 데리러 갔을 텐데.” 유천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조곤조곤 귓가에 부서졌다. 같이 도망가게? 라고 묻자, 그럴까 하고 되묻는 유천의 말에 또 조금 웃었다. 글쎄, 어떤 것이 맞는 건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박 회장님의 마음도 어떤 건지 알 것 같고, 박유천이나, 명희 씨, 재영이나 정윤 형의 마음, 전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한 가지 상황만 갖고 선과 악을 가를 수는 없는 거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너랑 헤어지면 내가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냐?” “응.” 순진한 내 대답에 유천은 내 등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아! 왜!” 유천에게 안긴 채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짝! 소리가 한 번 더 난다. 등이 얼얼한 것이 제법 아프다. 나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유천의 어깨를 밀어냈다. 씩씩대며 노려보자, 유천은 피식 웃으며 볼을 꾹 꼬집고 흔들었다. “못된 꼬맹이.” “놔라?” “싫어.” “죽는다?” 나는 유천에게 볼을 꼬집혀 짤짤 흔들리면서도 전혀 기가 꺾인 기색 없이 욕설을 뱉어냈다. 이놈의 입. 확 꿰매 버릴까보다. 유천은 싸늘히 나를 응시하며 진담처럼 중얼거렸다. 웃기고 있네. 피식 비웃자, 유천은 내 입술마저 꾹 쥐고 흔들었다. 나는 유천의 손에 오리 주둥이처럼 입을 잡혀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낑낑거렸다. “씨발, 죽을래……!” 버럭 소리를 지르며 유천의 손을 매섭게 쳐냈을 때였다. 유천이 어깨를 덥석 잡더니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 단번에 어깨가 뻣뻣하게 경직됐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쥐 죽은 듯 고요가 내려앉았다. 영화에서는 엔딩 롤이 올라가는지, 잔잔한 음악만이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얇은 눈꺼풀 속, 희미한 어둠 안에서 유천의 입술이 와 닿기를 기다리며 숨을 멈췄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임이 없다. 나는 살며시 한 쪽 눈을 떴다. 유천의 검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빙긋 웃는다. 찔끔 해서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유천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괜히 혼자 오버한 건가? 민망해져서 가만히 눈을 떴다. 유천의 얼굴이 여전히 코앞에 있다.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쭈뼛쭈뼛 웃었다. “못된 꼬맹이.” 유천은 또 나지막이 나를 비난했다. 나는 미안함에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유천이 고개를 살짝 틀며 가까워졌다. 금세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또 흠칫 몸이 굳었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유천의 검은 눈동자는 나를 진지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내 마음을 읽어내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조금 굴리고,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유천은 여전히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또 쭈뼛쭈뼛 웃었다. 시선을 똑바로 맞출 수가 없는데, 유천은 뚫어져라 그렇게 나만 바라보고 있다. 무슨 뜻일까? 나는 조금 더 혼란스럽게 눈을 굴리다가는 멋쩍게 웃으며 유천을 응시했다. 금세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어색한 표정의 내가 유천의 눈동자 안에 담겨 있다. “…….” “…….” 엷지만 존재가 확실한 정적. 그리고 유천의 눈동자에서 넘쳐 나온 ‘진심’이 그대로 내 안에 흘러들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는 헤어질 수 없음을.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라도, 다시는 등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김준수.” “…응.” “너 솔직하게 대답해야 돼.” 달싹이는 유천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따스하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헤어질 수 있어?” “…….” 잠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담긴 복합적인 의미에 조금 숨쉬기가 힘들었다. 느낄 수 있다. 유천은 또 다시 우리의 교차점을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있겠어?” 재차 물어오는 유천에게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 보였다. 길어버린 머리카락이 가볍게 목덜미를 간질였다. 유천의 눈이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마주친 시선에서는 좀 더 깊어진 감정이 오갔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믿음이 유천에게 닿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녀석을 의심하다니, 난 머리가 어떻게 되었었나보다. 유천의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따스한 체온이 맞닿자, 왠지 가슴이 콕콕 쑤셨다. 길이 없다면 만드는 수밖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천의 진지한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일요일 밤, 11시 반. 유천의 눈에 담겨 있던 의지에 나는 조금 기뻤던 것 같다. + “하읏……!” 나는 유천의 등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몸을 떨었다. 그동안의 고통을 보상받으려는 듯, 유천은 또 나를 안고 놔주지 않고 있었다. 입맞춤이 이어졌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은 매정하게 흘렀다. 무력한 나는 그저 매순간을 마지막이라 여기며 애타게 유천을 찾았다. 유천 역시 몸이 땀에 흠뻑 젖었음에도 나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를 끌어안은 유천의 체온은 언제나처럼 따스했다. 관계가 끝나고도 유천은 내 어깨를 안고 계속 입을 맞췄다. 조금씩 몸이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온한 정적.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체온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재확인했을 뿐. 하지만 마음은 편했다. 어쩌면 헤어지는 것을 당연한 운명인 듯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안정되어 있었다. 그의 당당한 연인이 아니면 또 어떤가? 나는 앞으로도 계속 유천을 사랑할 것이므로,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만 해도 행복할 것이다. 다만, 내가 계속 유천을 지켜볼 수 있도록 모델만은 계속 해주었으면 했다. 그건 체념 같은 것이었다. 현실이라는 것은 그렇다. 인간에게 수많은 선택을 강요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체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길을 정해놓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듯 선택의 자유를 준다 말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운명과 싸우거나, 우리처럼 정해져 있는 길을 잠자코 따르는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밖에 없다고…,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유천의 입술이 가볍게 맨 어깨에 와서 닿았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유천의 몸은 여전히 말라서 아팠다. “박유천.” “어.” 작은 대답과 함께 목덜미에 와 닿는 유천의 숨결. “살 좀 쪄. 아파 죽겠어.” “네가 더 말랐어, 바보야.” 유천은 내 옆구리를 슥슥 훑으며 이것 봐, 뼈밖에 안 남았네 라고 중얼거렸다. 간지러움에 허리를 좀 비틀며 킥킥 웃자, 유천은 또 내 어깨에 입을 맞췄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바로 누워 유천을 흘깃 훔쳐보았다. 유천은 한 팔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엷은 어둠 속에 나를 응시하는 유천의 눈동자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한숨이 난다. 나는 정말 저 눈을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유천은 아무 말 없이 이불을 끌어올려 싸늘하게 식은 내 어깨에 꼭꼭 눌러 덮었다. “우리 언제 가?” “안 가.” “나 내일 일 가야 되는데?” “가지 마.” “평생 여기서 살아?” “어.” “미친놈.” “미친놈 애인.” 유천은 표정도 없이 툭툭 말을 뱉어내며 또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유천도, 나도, 내일이면 제각기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인간에게는 사랑 이외에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사실 인간에게 사랑의 우선순위는 그리 높지 않은데, 우린 왜 이렇게 죽을 것처럼 힘든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씁쓸히 웃으며 유천의 손을 잡아내려 가볍게 손끝에 입을 맞췄다. 유천은 다시 내 손을 끌어다 손등에 키스했다. 이런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에 애틋함이 배어 나와 속이 상해 죽겠다. 운명이 원망스럽다. 왜 우리를 사랑하게 했는지……. 그냥 친구로 두었다면 우린 아직도 매일 티격대며 잘 지내고 있었을 텐데……. “몇 시야?” 가느다란 내 물음에 유천은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액정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암순응된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밝다. 새하얀 불빛에 미간을 찡그린 유천의 모습이 너무나도 섹시해서 금세 소름이 돋는다. “1시 10분.” 그의 잠긴 듯 낮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긴, 저런 녀석을 나 혼자 독차지 한다는 건 비극일지도 모른다. TV에 두고두고 출현시켜 다 같이 공유해야 되는 인물. 나를 죽어라고 귀찮게 하던 스토커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던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너 근데 전에 쓰던 핸드폰들 왜 해지 안 했어?” “핸드폰?” “잃어버렸던 거랑 나한테 준 거 다 해지 안 했던데.” 유천은 한참이나 기억을 되살려보는 듯 말이 없었다. 자기도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다. 암튼, 이 녀석 내가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평생 이러고 살 텐데 걱정이다. “돈 많다고 자랑하냐? 왜 돈을 허투루 써?”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겠지. 원래 돈이 다 그런 거잖아. 내가 쓰면 누군가는 벌고.” 누가 상경계열 전공 아니랄까봐, 저런 소리를 한다. “근데 잃어버린 거, 해지 안 되어 있어?” “응. 아직 살아 있던데?” “어떻게 알아?” 유천의 무심한 질문에 낮에 있었던 이상한 일이 떠올랐다. 유천의 잃어버린 두 번째 핸드폰이 해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위치 추적 문자. 그제야 뭔가 잡힐 듯 말 듯했던 기묘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아, 그게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하냐는 유천의 물음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그 동안 있었던 이상한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내가 실수로 유천의 잃어버린 핸드폰에 자꾸 전화를 거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전화를 걸 때마다 낯선 여자가 받았고, 나는 유천이 또 여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라 오해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건대, 그 핸드폰은 그때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박유천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포기해버렸지만, 그 후에도 핸드폰은 해지되지 않은 채 계속 제 기능을 다 했다.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그 여자가 받거나, 전화벨이 울렸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생긴다. 그 여자는 왜 자신의 것도 아닌 전화기를 계속해서 충전해서 살려둔 것일까? 유천이 모를 정도였다면 그 전화를 실제로 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그 번호가 네 위치 추적을 했다고?” “응, 아까 낮에 문자가 와서 봤더니 위치 추적했다고 해서, 전화 걸어봤는데 금방 껐더라고.” 그제야 또 뭔가가 번뜩이며 머리를 스쳐간다. 명희 씨와 내가 탄 벤츠를 뒤쫓던 그 여자……. 유천은 굳어버린 내 표정을 보더니 뭔가를 눈치 챈 듯 다른 일이 있었냐고 물어왔다. “차번호가 3으로 시작했는데. 까먹었어.” “바보야, 그런 건 잘 기억해 둬야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유천은 코를 꾹 꼬집으며 책망했다. 내가 그런 건 줄 알았나? 유천의 손을 쳐내며 투덜거렸더니 유천은 다른 일은 없었냐며 다 이야기해 보란다. 말하자면 긴데, 진짜 다 해야 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자 유천은 밤새서라도 다 들을 테니 이야기하란다. 정말 이야기가 긴데. 말하다 보면 재영과의 일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는 연달아 사건이 터지기만 했지, 제대로 대화를 나누거나 해결책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스토커가 계속해서 묘한 협박을 해올 즈음, 나는 전화 때문에 생긴 오해로 유천과 사이가 잔뜩 나빠져 있는 상태였고, 재영이 얽혀들면서 점점 더 우리는 비밀이 많아졌던 것이다. 순간 머리를 뭔가로 맞은 듯 한 충격이 찾아왔다. 항상 모든 것은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다……. 단순히 오해에 지나지 않았던 나의 불신은 차츰 커다란 날개로 자라나더니 모든 상황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으나, 오해는 나를 계속해서 부정적인 길로 몰아붙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이 상황이, 내가 유천을 온전히 믿지 못해 시작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니……. 나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천도 내 이야기를 듣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조용히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엷은 정적. 가슴에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책감에 자꾸 한숨이 나왔다. 어리석게도 이제야 유천을 믿을 수 있게 되다니……. 그때 유천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설렘이 가득한 그대 하루만큼, 나의 하루는 길고 외로워, 어쩌면 나는 바랐는지 몰라,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이별이 되길…♬] 조용한 어둠에 희미하게 음악이 섞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음악.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유천을 응시했다. 하지만 한참이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천은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역시 전화가 꺼져있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분명히 누군가가 갖고 있다. 바로바로 확인하고 전화를 꺼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둔 채. “이걸 왜 계속 갖고 있는 거지? 쓰지도 않을 거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뭔가 이상해. 사진 얘기부터 다시 해 봐.” 유천은 내 어깨를 당겨 나를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유천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다시 기억을 더듬어 사진이 처음 도착한 날을 떠올렸다. 사진은 총 세 장이 도착했었다. 재영과 내가 병실에서 키스했던 사진, 유천이 명희 씨와 호텔에서 찍힌 사진, 유천과 내가 재영의 병문안을 가다가 길에서 싸웠을 때 찍힌 사진. 스토커의 목표는 ‘박유천의 애인’인 나였다. 유천과 내가 찍힌 사진은 그 자가 우리를 치밀하게 미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나머지 두 장은 유천과 나를 이간질시키기 위한 목적이 틀림없었다. 박유천은 나와 재영의 사진을 비교적 너그럽게 넘어갔지만, 나는 명희 씨와 유천의 사진에 극렬하게 반응하여 유천에게 복수를 한답시고 재영을 만나러 나갔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나는 순진하게도 스토커가 원한대로 행동했고, 이런 결과에 도달할 여지를 만들어 준 것이다. 죽은 새는 내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사진을 보내 우리 사이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협박을 해오다니, 정말 치밀하고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천재적인 머리를 좀 건설적인 일에나 쓸 것이지. 그리고 본격적으로 날 겁주기 위해 벌어진 큰 사고들. 유천의 미니쿠퍼가 부서지도록 부딪혀 세워야 했던 이상한 차, 나를 옥상에 가둔 사람과, 눈 오는 산장으로 나를 유인해 버려두었던 인물……. 그러고 보니, 유천의 핸드폰을 갖고 있는 ‘그녀’의 컬러링 음악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우리의 이별을 절실히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조금 흥분한 채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진즉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유천은 가끔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당시 상황에 대해 짧은 질문을 던지며 귀를 기울였다. 밤이 점점 깊어 갔다. 그리고 한참 만에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나는 왠지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유천에게 포옥 안겨 있었다. 우리 주위를 감싼 어둠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날이 밝으면 사라질 평화였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와 내가 연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유천은 여전히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내 등을 토닥였다. 엷게 잠이 밀려왔다. “졸려?” “응…….” “자.” 잠투정처럼 중얼거리며 대답하는 나를 유천은 조금 더 당겨 안고 가볍게 입 맞췄다. 내가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도 유천의 눈은 여전히 어둠 속을 응시하며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그리고 나는 그의 눈빛을 간과했다. 박유천은 내가 관련되면 미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주 잠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지금은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절실히 잠을 원하고 있었다. 박유천이 알아서 해 주겠지…….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걱정 없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손길은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준수, 일어나.” 유천의 나직한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코끝에 엷은 불가리 블랙이 스쳤다. 나는 다시 미간을 찡그리며 가늘게 실눈을 떴다. 어슴푸레 보이는 인영(人影)이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눈을 비비적거리며 잠을 깨려 애썼다. 뿌옇게 창밖이 밝아 있다. 새벽인가? “…몇 시야?” “6시 반.” “너 가야 돼?” “아니.”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내 질문에 유천은 차분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해왔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멀쩡했기 때문이다. 설마 한 잠도 안 잔 건가? 나는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 유천을 응시했다. 흰 피부가 유난히 말갛다. 아니…, 창백한 건가?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유천의 볼을 쓸어 보았다. 조금 낮은 듯 한 체온. 열이 있는 건 아닌데. 의아한 내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유천은 짧게 웃으며 내 손을 꾹 쥐었다. 여전히 내 약지에는 유천의 헐렁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서서히 답답한 현실이 밀려든다. 아,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인가……. 코끝이 찡하다. “준수야, 현 실장님한테 전화해줘.” “응, 너 데리러 오라고?” “아니.” 아픈 허리를 낑낑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데 유천은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뭔가 이상하다. 유천의 창백한 입술이 왠지 불길하다. 문득 어젯밤에 보았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엔딩 씬이 스쳐간다. 나는 불안하게 유천을 보다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럼 뭐라고 해?” 현 실장의 번호를 찾으며 물었다. “앰뷸런스 보내라고.” 나직한 유천의 대답에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나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못한 채 얼음처럼 굳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구급차는 왜……? “…너 아파?” 차갑게 식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세 글자를 뱉어냈다. 유천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 창백한 얼굴은……. “어, 어디 아픈데?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손끝이 자꾸 떨린다. 그리고 유천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나는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피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유천아!” 나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내뱉으며 유천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목에는 타월이 둘둘 감긴 채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똑, 하고 핏방울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미쳤어?!” 계속해서 쇳소리가 뱉어져 나왔다. 머릿속이 하얗다. 이 새끼가 도대체 무슨 짓을……! “준수야.” “벼, 병원 가자.” “김준수.” “피 봐…, 계, 계속 나. 피가…….” 나는 패닉 상태에 빠져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허둥거렸다. 그동안에도 유천의 손목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금세 입술이 까끌하게 말라버렸다. 계속해서 젖어드는 새하얀 타월에 헛구역질이 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온통 방 안에 피비린내가 떠도는 것 같다. 금세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이게 아니란 말이다! “준수야, 잠깐만. 괜찮아, 많이 다친 거 아니야.” 유천은 내 어깨를 잡아 세우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채 눈물만 쏟아내고 있었다. “너 손에 피가…….” “괜찮다고.” “병원, 아니, 약. 피…….” 혼돈. 하얗게 세계가 침몰해간다. 온 몸이 잿빛으로 산화되어 바람에 날려 흩어진다. 남은 것은 색이 바라 희디흰 뼛조각. 멸망해버린 대지. “김준수.” “피가…….” “김준수!” “죽으면 안 돼…….”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헛소리를 뱉어냈다. 준수야, 정신 차려! 유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내 어깨를 잡아 흔드는 유천의 손길이 거칠다. 피가 또 한 방울 바닥에 떨어진다. 죽어버린 로미오와 줄리엣……. “아악!” 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짜악! “정신 차려!” 눈앞에 불이 번쩍 했다. 고개가 돌아간 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씩 눈앞에 현실이 펼쳐진다. “김준수, 나 똑바로 봐!” 유천은 내 어깨를 또 세차게 흔들며 무섭게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천천히 유천에게 시선을 옮겼다. 볼이 흥건히 눈물로 젖어갔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내 입은 무의식중에 욕설을 뱉어내고 있었다. 유천의 창백한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준수야, 괜찮아.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유천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치 최면이라도 걸 듯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여전히 몸을 떨었다. 딱딱딱,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불길하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무섭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 왜 속 편히 잠이나 자고 있었을까? 유천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도 왜 나는……!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정말…, 안 죽어……?” “안 죽어. 내가 널 두고 왜 죽어, 바보야.” 유천은 여전히 피를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조용조용 나를 달랬다. 나는 입술을 덜덜 떨며 바닥에 떨어진 피를 응시했다. 전혀 유천의 말이 신뢰가 가지 않는다. 저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준수야, 빨리 현 실장님한테 전화해. 구급차 보내라고.” 유천은 내 핸드폰을 손에 쥐어주며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떨리는 손으로 현 실장의 번호를 찾아 꾹 눌렀다. “현 실장님한테 이렇게 말해. 유천이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죽을 것 같다고. 그땐 울어도 돼.” 유천은 파리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며 싱긋 웃었다. 뭐라 대답할 시간도 없이 현 실장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더듬더듬 유천이 했던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유천은 핸드폰을 빼앗아 끊어버렸다. 나는 와락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온통 피 냄새가 났다. 제발 살려주세요, 유천이 좀…, 우리 좀 살려 줘요……. 나는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유천에게 자꾸자꾸 입을 맞췄다. 내 생명을 나눠주기라도 하려는 듯 간절하게, 진심을 다 해,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유천은 내 등을 토닥이며 계속해서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을 한 손에 움켜쥔 박 회장님은 자기를 만나주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1초가 1시간 같았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유천을 끌어안았다. 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너 죽으면 나도 죽어…….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덜덜 떠는 나를 품에 안은 유천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때려서 미안해, 이런 거 보여줘서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좀 더 강하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준수야. 미안해……. 쾅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유천은 붉어진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밀어냈다. 나가 봐.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 나는 여전히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몸을 추슬러 일어나려는 순간 유천이 내 손목을 꽉 쥐어 왔다. 그를 돌아보자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창백한 얼굴, 온통 붉은 피……. 미친 새끼. 나는 또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또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흐윽……!” “데리러 갈 테니까. 알았지?”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겨우겨우 삼켜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 유천은 나를 일으켜 세워 조용히 등을 현관으로 떠밀었다. 꼭 데리러 와. 유천아, 나 꼭 데리러 와야 돼. 나는 주문처럼 유천의 말을 되뇌며 비틀비틀 문으로 다가섰다. 자물쇠를 풀자 열린 문으로 현 실장의 굳은 표정이 보였다.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이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어 꾹꾹 눌러 삼킨 울음을 토해냈다. 유천이 괜찮은지 봐야 하는데,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 이대로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준수야.” 누군가가 나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재영의 향기가 났다. 온통 눈앞이 붉다. 고개를 들자 유천이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다. 창백한 그의 얼굴은 죽은 듯이 보였다. 준수야, 괜찮아? 나야, 알아보겠어?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실려 나가는 유천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덜덜 떨며 울었다. 찰칵! 어디선가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위잉-하고 이명이 들려왔다. 현기증이 났다. 준수야, 나 좀 봐봐. 아득히 들려오는 낯익은 재영의 목소리……. 주위에는 온통 사람, 사람, 사람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유천은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온 몸을 다해 부딪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게 이렇게 미련한 짓일 줄이야……. 또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시선의 끝에 유천이 흔들렸다. 들것에 실린 유천의 손이 툭, 하고 밖으로 떨어졌다. 또 이명이 들렸다. 소리들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안의 유천은 여전히 창백했다. 화이트아웃.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깨어난 것은 월요일 밤 늦은 시각이었다. 몸은 여전히 뻐근하고 아팠지만, 정신은 오히려 또렷했다. 가만히 천정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재영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간호하다 지쳤는지 재영은 피곤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다. 2박 3일이라더니 왜 벌써 도착한 걸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그의 머리를 가지런히 쓸어 넘기자 익숙한 향기가 번져온다. 하지만 내 몸에 잔뜩 남았을 불가리 블랙……. 쓴 웃음이 난다. 이 사람은 어떻게 견디는 걸까? 나는 유천이 조금만 다른 여자랑 대화를 나눠도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던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혼자 웅성대던 TV에서 박유천, L그룹, 결혼. 귀에 익은 단어들이 자꾸 들려오기에 시선을 돌렸다. 앵커는 박유천의 입원 소식을 전하며 결혼식이 연기되었음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쓴 것인지, 자살 시도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다. 그저 과로로 쓰러졌다는 이야기 뿐. 이것도 유천이 의도한 것일까? 묘한 의문이 든다.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던 유천의 손목이 눈앞에 선명하다. 그것을 처음 봤을 때는 너무 당황해서 그저 겁이 나기만 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시간 동안 길고 긴 꿈을 꾸면서 나는 유천이 내게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의 과거부터 현재까지가 영화처럼 스쳐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꿈. 그 속에서 유천의 행동은 매장면마다 오로지 한 가지만 이야기 하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행해졌던 그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너무 작고 사소한 것이어서, 꿈속의 나는 빼놓지 않고 유천의 마음을 포착해 내기 위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16세의 소년은 짓궂은 장난으로 제 서툰 마음을 이야기했다. 17세 소년은 설익은 눈빛으로, 18세 소년은 멋쩍은 미소로 풋사랑을 말하고 있었으며, 19세의 소년은 아픈 시선으로 웃었다. 20세의 그는 나를 대신해 다른 사람을 안았고, 21세의 그는 성큼 자란 어른스러운 시선으로 제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22세의 유천은 내게 기다리라 말했다.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그는 침통한 목소리로 계속 사과했다. 이제야 간신히 손에 넣은 나를 놓칠 수 없다는 듯, 피가 떨어지는 팔이 아프지도 않은지 내 어깨를 꼭 그러안고. 유천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사랑을 속삭였다. 나는 유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헤어질 수 없다. 설령 그 끝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결말이라도……. 운명이 내게 요구했던 것은 오로지 믿음,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지켜내지 못한 나는 이렇게 모든 상황을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유천은 항상 옳았다. 그는 늘 신중하고 침착했으므로. 이번 일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다리라 했으니 나는 그를 믿고 기다리면 된다. 문득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는 유천의 말이 떠올라 코끝이 찡하다. 나는 유천의 이름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TV에 귀를 기울이다가 가만히 이불을 걷어냈다. “어, 왜……?” 잠에 취한 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좀 마시려고요.” “내가…….” “아뇨, 제가 할게요.” 일어나려는 재영을 말리고 부스스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불도 켜지 않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있으려니 재영이 따라 나와서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유난히 파리해 보였다. 무너져버렸던 유천처럼……. 컵을 내려놓고 멋쩍게 웃었다. 왠지 알 수 없는 묘한 거리감이 우리 사이에 떠돌았다. 그에게서 성큼 물러난 것은 나였다. 유천에게 온통 마음을 내주고 돌아왔으므로. “몸은 괜찮아?” 재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충격 받은 것 같다고 안정을 취해야 된댔어.” 또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웃었다. 내가 유천과 밤을 보내고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는 이렇게 나를 생각해준다. 너무 미안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하다. 잠시의 침묵이 견딜 수 없어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내일쯤 오는 거 아니었나?” “불안해서. 너한테 무슨 일 있을까 봐.” 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있었네요.” “그러게.” 재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무겁게 공기가 가라앉았다. “…미안해요.” “어.” 어렵게 꺼낸 내 사과에 재영은 ‘됐어’라는 말 대신 저렇게 대답했다. 그도 상처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한없이 무르고 약해서, 아무리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마음에 생채기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재영은 창백한 얼굴로 싱긋 미소 지으며 주방에 불을 켰다. 그리고는 싱크대 앞에 서더니 얼마 전에 사다 놓은 양은 냄비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배고프다. 이거 어떻게 해? 너 자는 거 보다가 나도 하루 종일 잤다.” “뭐하게요?” “라면 끓이게.” “해줄게요.” “알려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이제 혼자 할 줄 알아야지.” 그의 말에 숨이 턱 막혀왔다. 보이지 않는 선. 그와 나 사이에 선명하게 선이 생겨나 있다. 재영은 뭔가를 예감한 것이 틀림없었다.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사랑이라는 것은 어려운 것인지……. “울지 마. 뭘 잘 했다고 우냐?” 재영은 금세 눈물이 고여 버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으며 싱긋 웃었다. 나는 찡한 코 밑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가 너무 아파서 숨이 막힌다. 결국 고인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굴렀다. 퐁, 가벼운 소리를 내며 눈물이 냄비 안에 떨어져 내렸다. 으…, 짜겠다. 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눈물이 자꾸자꾸 흐른다. 그의 오만한 향기가 너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다. “미안해요…….” “…….” “흐윽…, 미안해요, 재영 씨…….” “어…….” 또 재영은 ‘됐어’라는 말 대신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신을 받아줄 수 없는 나를 인정하는 그의 마음이 슬펐다. 째깍째깍,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유일하게 주방에만 불이 들어온 넓은 집은 묘하게도 쓸쓸해 보였다. + 유일한 첫 끼니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는 재영을 싱크대 앞에서 밀어내버렸다. 뭐랄까? 그는 이런 것이 안 어울린다. 재영은 그냥 오만하고 콧대 높은 남자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다정한 모습을 기억한다면 나는 두고두고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미안해해야 할 것이 틀림없으니. “아-.” 냄비를 씻고 있는데 재영이 불쑥 다가와서 말을 건다. 돌아보니 양치질 중이었는지 입에 칫솔을 물고 있다. 그리고 눈앞에 내밀어진 내 칫솔.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재영과 내 칫솔을 번갈아 보았다. “아- 하라고.” 재영의 재촉에 얼떨결에 입을 열자 내 칫솔을 쑥 집어넣더니 치카치카 문지르기 시작한다. “으으응, 머에여-!” 나는 당황해서 부정확한 발음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재영은 내 턱을 잡아서 돌리더니 쿡쿡 웃으며 계속 칫솔질을 했다. 하던 거나 계속 해. 양치질 시켜주잖아. 재영의 짓궂은 미소에, 나는 손에 쥔 수세미에서 거품을 뚝뚝 떨어뜨리며 또 그를 밀어냈다. “야, 한 번 정도는 얌전히 말 좀 들어. 나도 기억할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얼른 아- 해.” 재영은 다시 한 걸음 다가서며 내 턱을 잡아 올렸다. 그의 말에 또 코가 찡하다. “치열이 이쁘다. 이가 튼튼한가 봐.” 재영은 자신의 칫솔을 물고 웅얼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 그의 미소에 눈물이 핑 돈다. 치카치카 소리를 내며 계속 되는 양치질은 어딘지 모르게 우습고, 슬펐다. 나는 얌전히 그에게 칫솔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자, 헹궈.” 내 손에 칫솔을 쥐어주는 재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 거품을 한 가득 문 채,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헹궈냈다. 뱉어낸 물을 따라 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나는 이 집에 이렇게 진한 눈물을 몇 번이나 남긴다. 그가 나 없이 외롭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명희 씨에 이어, 박유천도 드디어 행동을 개시한 첫날. 그렇게 나는 유천을 향한 기다림을 시작하고 있었다. + 결근으로 스케줄이 잔뜩 꼬여버렸다. 그래서 오늘은 늦게까지 일을 해야 될 것 같다. 스케줄 조정을 하러 들른 사무실에서 안색이 안 좋다는 팀장의 말에 그냥 웃어주고 일을 시작했다. 여전히 놀이공원은 방학을 맞은 사람들로 붐볐고, 경쾌한 음악이 흘렀다. 되돌아온 나의 일상에서 보니 주말에 일어났던 일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정말 유천을 만났던 걸까? 우리가 정말 함께 있었던 걸까? 유천이 다친 게 진짜 일어난 일이었던가? 정신이 멍한 것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유천의 결혼식으로 예정되어 있던 수요일은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으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꼬마가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부모가 얼른 일으켜 세웠지만, 바닥에는 꼬마가 들고 있던 음료수 잔이 널브러진 채, 온통 흥건하다. 주위에 청소 담당 알바생이 보이지 않아 나는 손수 걸레를 챙겨 들고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예전 같으면 분명히 그 부모들에게 투덜투덜 불평을 해댔을 텐데. 이젠 일어난 사건, 사고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내 모습에 웃음이 난다. 그때 인 이어에서 본부의 지시가 들려왔다. 본사 회장님이 나오셨으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라는. 나는 좀 더 서둘러 손을 움직여 음료수를 훔쳐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꼬마가 꽤 호되게 넘어졌는지 음료수가 바닥에 넓게 퍼져 시간이 좀 걸릴 듯 하다. 사람들이 밟으면 여기저기 끈적거려서 곤란해지는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걸레를 바꿔 들었을 때였다. 뚜벅뚜벅, 여러 사람의 요란한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고객님, 밟지 않게 조심하세요. 다칩니다.” 나는 얼른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당황해서 단번에 표정이 얼어붙었다. 시선 끝에는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노신사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병풍처럼 둘러선 수많은 사람들과 현 실장……. 박 회장님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해보이고는 다시 바닥에 쏟아진 음료수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에 멈춰선 고급 구두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내가 뭐 잘못했나? 볼이 따끔따끔 할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박 회장님과 간부들의 시선에 저절로 몸이 굳어온다. “자네.” 한참만에 들려온 박 회장님의 목소리는 박유천처럼 낮고 건조했다. 나는 음료수가 뚝뚝 떨어지는 걸레를 통에 던져 넣고는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박 회장님의 시선은 저절로 사람을 움츠러들게 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일은 할 만한가?” 질문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눈을 굴리다가 현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현 실장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회장님 뒤로 줄줄이 늘어선 놀이공원 간부들.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다 모였는지 말단 자리에서 빨리 대답하라고 나를 재촉하는 팀장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네.” 나의 뒤늦은 대답에 박 회장님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리고 박 회장님의 시선이 천천히 내 왼쪽 가슴에 달린 이름표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괜한 긴장감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 연세에 키가 나랑 비슷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유천과 닮은 차가운 눈동자. 박 회장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숨이 막힌다. 익히 듣던 대로다.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의 사업가. 문득 유천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과 정면 대결을 불사하다니. 역시 박유천도 보통은 아닌 놈이다. 나라면 찍 소리도 못 하고 결혼했을 텐데. 그제야 유천의 극단적 선택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확실히 이런 분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다. “웃는 인상이 좋군.” “…감사합니다.” “눈 밑에 다크 서클은 어떻게 좀 하는 게 좋겠어. 명색이 서비스직 아닌가?” “…죄송합니다.”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지만. “많이 힘든가 보군.” “아닙니다.” …회장님 덕분에 죽을 듯이 힘들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강 이사.” “네, 회장님.” “이 청년, 한 일주일 휴가 좀 줘.” “네.” 우리 놀이공원 대표이사님을 ‘강 이사’라고 불러대는 박 회장님의 태도에 내 위치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박유천이 아니라면 평생 만나보지도 못했을 존재. 그러고 보니 나 졸업하면 본사 소속인데. 저 분 밑에서 일하는 거야? 완전 무서워……. “저, 회장님…….”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는 박 회장님을 조심스럽게 불러 세웠다. 박 회장님은 차가운 태도로 나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 뒤에 주렁주렁 꼬리처럼 회장님을 따르던 간부들의 시선이 온통 나에게 와서 꽂힌다. 그 눈빛들이 어찌나 부담스러운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휴가…, 안 주셔도 되는데요.” 자신 없고 머뭇거리는 내 말투에 박 회장님은 그대로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와씨, 진짜 무섭다. 사람 말을 저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박유천처럼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스타일인 것 같다. 뭐야, 박유천 성격이랑 똑같잖아. 나는 멍하니 쏟아진 음료수 자국을 내려다보며 긴장으로 굳어졌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말갛게 반짝이는 음료수 자국에 내 시무룩한 표정이 비친다. 작고 미약한 나. 그리고 너무 높아서 감히 올려다 볼 수도 없는 박 회장님. 괜히 침울해진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잘 지내고 있을까?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날 두고 죽을 수 없다고 했으니, 그런 건 아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이미 내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멀리 보이는 박 회장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회장님!” 새된 쇳소리가 나와서 나 스스로도 흠칫했다. 박 회장님은 또 다시 차갑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회장님 앞으로 달려가서 멈췄다. “유천이, 하아, 잘 있나요?” 가쁜 숨을 토해내는 내 질문에 박 회장님은 대답 없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유천이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나는 서둘러 소리치며 회장님의 앞으로 다시 달려 나갔다. 회장님은 특유의 냉랭한 시선으로 앞을 막아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알고 있다. 쉽게 이 분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일수록 논리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내 사랑은 논리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온 몸을 내던지는 것뿐. “부탁드립니다!” 나는 서둘러 회장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온통 주변의 시선이 내게 와서 꽂혔지만 나는 겁나지 않았다. 내 사랑은 미련하고 바보 같지만 결코 창피하지 않았으므로. “제 앞에서 손목을 그었어요. 무사한지만 확인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앞에 머리를 숙였다. “준수 씨, 이러지 마세요.” 내가 안쓰러웠는지 현 실장이 서둘러 다가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박 회장님은 매정하게 등을 돌려 사라져갔다. 금세 주위가 휑해졌다. 온 몸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가버리는 무력감에 다리에서 자꾸 힘이 풀렸다. 유천아, 나 정말 기다리면 되는 거 맞아? 아득하게 절망감이 밀려왔다. 나는 현 실장에게 이끌려 몸을 일으키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깨문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현 실장은 이내 회장님의 뒤를 따라 멀어져갔다. 나는 얼굴을 싸쥐고 마른세수를 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약해지면 안 된다. 유천은 꼭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거다.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내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데리러 오겠다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박유천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킬 거야. 박유천은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나는 이렇게 유천이 했던 말에 모든 것을 걸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 오히려 내 안에서는 이렇게 유천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 일상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나는 새 학기 등록을 마쳤고, 회사는 평일 야간 3회와 주말 중 하루를 일하기로 스케줄 조정을 마쳤다. 공기 중에는 부쩍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유천이 없어도 계절은 차근차근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한없이 모질기만 했던 겨울은 그렇게 날이 무뎌져가고 있었다. L그룹은 재영의 회사에 걸린 소송을 취하했다. 하지만 떨어진 기획사의 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재영은 회사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 신경을 쏟느라 여기저기 출장과 촬영을 다니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그는 어느새 정윤 형과 친해져서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나는 이들의 친분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정윤 형은 가슴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인데다가, 나를 좋아했다는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터라, 재영의 얼핏 비뚤어져 보이는 성격을 잘 받아줄 수 있을 터였다. 평소에는 재영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내면서 그의 고통을 무시하려 애썼다. 가끔 재영은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투정처럼 나를 안고 입을 맞췄다. 순순히 그에게 응하면서도 나는 마음을 단단히 지켰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 챈 재영은 늘 쓴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아침마다 본사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회장님을 기다렸다. 유천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회장님은 여전히 나를 냉랭히 보고 지나쳤지만 나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회장님을 찾았다. 내 부탁은 늘 한결같았다. 유천이 무사한지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는 것. 회장님은 새벽에 나오시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일은 가끔 힘들고 나를 지치게 했다. 하지만 그만 두지는 않았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도중에 멈춘다면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그리고 회장님 같은 성격은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할 거라는 기묘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회장님께 책을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유천에게도, 회장님께도 일말의 도움도 안 되는 미약한 존재였기 때문에. 재영에게는 새벽마다 운동을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는 정말 헬스장에 등록도 했다. 강해지고 싶었다. 유천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도, 내 스스로도. 약해터진 내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에. L그룹과 유진 어패럴은 결혼식 없이 조용히 합병이 이루어졌다. TV에서는 가끔 결혼식이 연기된 L그룹에 대한 예측 기사가 나왔다. 명희 씨가 외국에서 계속 공부를 할 예정이라는 짤막한 기사도 한 번 났다. 유천은 입원 이후 거의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에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천이 분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이 두 사람에 대한 기묘한 가십 기사가 스포츠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다. 사실은 두 사람 다 사랑하는 상대가 있다. 그래서 둘 다 결혼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유진 어패럴의 영애 이명희 씨가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기묘한 추격 소동이 있었다. 그 소동을 벌인 남자가 이명희 씨의 연인이 아닐까? 또, 박유천 씨의 입원. 그것은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은 박유천 씨가 연인과 함께 음독을 시도했던 것 같다. 그날 새벽 분명 앰뷸런스에 실리는 박유천 씨를 본 사람이 있다. 제보자는 박유천 씨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등……. 기사는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이 버무려진 채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세간의 반응은 의외였다. 정략결혼이 일반화된 상류층에서 도피와 죽음을 불사한 이들의 사랑은 ‘新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기사로 매스컴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신념을 지킨 이들의 사랑에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L그룹 측에서는 공식적인 해명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런 회사 측의 태도는 사람들의 환상을 더욱 부추겼다. 그렇게 박유천과 명희 씨는 거만한 상류층 자제가 아닌 21세기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세간에는 차츰 이들의 사랑을 지지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갔다. 뭔가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느릿한 계절의 변화를 따라 나를 둘러싼 현실이 천천히 변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유천 없이도 그의 흔적을 짙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움직이고 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은 유천이 만들어낸 작품임이 틀림없었으므로. + “오늘은 몇 시에 들어와요?” “오늘 약속 있어서 늦을 것 같아.” “정윤 형이랑?” “어.” 재영의 대답에 나는 싱긋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재영도 가만히 웃으며 차를 몰아 사라져갔다. 여전히 나는 재영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재영은 아직도 나를 사랑했고, 나 또한 그가 싫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어색했던 처음과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함께 생활하면서 조금 더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가족 같은 분위기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재영의 벤츠가 완전히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등을 돌려 회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2월 말. 바람에서 보드라운 기운이 느껴졌다. 부쩍 봄이 다가와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진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유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용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복잡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구겨지듯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는 함께 탄 정민 누나의 자리를 만들어주려 벽을 짚고 힘주어 버텼다. “어, 준수, 안녕.” “안녕하세요.” “와, 오늘 마지막이네.” “그러네요.” 마주친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를 하고 있으려니 점점 새 학기가 시작되는 것이 실감난다. 대학에 다니는 알바생들 중에는 이번 주 안에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나는 언제까지예요?” “모레까지 하려고 했는데, 하루 더 하려고.” “복학하면 바빠지겠네요?” “너만 하려고. 일 해야지, 학교 다녀야지, 연애 해야지, 우리 준수 바쁘다.” 정민 누나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연애……. 글쎄, 이거 연애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싶다만. 잠시 쓴 웃음을 짓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또 다시 사람들에게 떠밀려 우르르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져 나오자 신선한 공기가 반갑다. 정민 누나와 잡담을 주고받으며 탈의실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어, 준수 오빠! 이리 좀!” 탈의실 옆에 딸린 휴게실에서 승연이 다급하게 나를 부르고 있다. “왜?” “준수야, 너한테 뭐가 왔어!” 미현 누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테이블 위의 상자를 가리켰다. 테이블로 다가서자 사각형으로 뚫린 상자 안의 선홍빛 장미가 붉다. “뭐에요?” “우리야 모르지. 너한테 온 거라니까.” 미현 누나가 호들갑스럽게 말을 이으며 빨리 열어보라고 난리다. 그냥 봐도 꽃 상자인데. 누가 보낸 거지?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곱게 묶인 리본을 풀어냈다. “와아- 예쁘다.” 주위에 둘러선 여자들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금세 휴게실 안에 장미향이 번진다. 건강하고 싱싱한 장미는 갓 꺾은 것처럼 생명력이 넘쳤다. “뭐야, 백송이도 아니고.” “누가 보낸 거야?” “몰라, 아무 것도 안 적혀 있어.”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꽃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상자 안에 곱게 담긴 65송이의 장미……. 오늘은 유천과 내가 사귄지 65일째 되는 날이었다. 금세 코끝이 찡해져서 코밑을 비볐다. 어떻게 보냈을까? 박 회장님의 태도로 봤을 때 집에 갇혀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여기 뭐 들어 있다.” “열어봐, 열어봐.” 누군가가 또 내 손에 뭔가를 쥐어 주었다. 검은 보석함이다. 왠지 뭐가 들어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열린 상자 안에는 작은 귀걸이 한 쌍이 빛나고 있었다. “예쁘다.” “뭐야?” 막 출근한 사람들이 웅성웅성 휴게실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귀걸이 밑에 끼워진 유천의 메모를 발견하고는 급히 숨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강철의 줄리엣에게] 선명하게 적혀 있는 유천의 글씨에 금세 눈물이 핑 돈다. 나는 서둘러 보석함을 닫으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야?” “준수 애인이 보낸 거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된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와, 준수 애인 너무 멋있다.” “누군데?” “여자가 꽃 보내는 것도 멋있구나. 나도 우리 남친한테 꽃 보내줄까?” 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꽃 상자도 그냥 둔 채 휴게실을 나섰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강철의 줄리엣. 조금만 더 힘을 내라는 유천의 메시지. 비극은 없으니 부디 견뎌내 달라 말하고 있는 내 연인…….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놓을 수 있을까? 이제는 불가능하다. 이런 로미오라면 평생이라도 기다릴 수밖에……. 내 심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다림은 막연한 것이어도 좋다. 그리하여 내 사랑은 의미를 가지므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공원 안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는 작은 환상의 세계……. 흔들흔들 빨강 풍선이 허공을 날고 있다. 유천이 언젠가 내게 건넸던 것과 같은.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유천아, 나 여기 있어. 네 말대로 허튼 생각 안 하고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야.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는 마. 난 인내심이 부족하거든. 그러니까… 빨리 와. 기다릴게. 내 사랑, My Beloved. + 3월을 하루 앞둔 2월의 마지막 휴일은 재영의 늦잠으로 시작되었다. 어제도 정윤 형과 만나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신 모양이다. 새벽에야 간신히 들어와서 잠이 든 나를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해대기에 비몽사몽간에 마구 당했던 것 같다. 평소라면 조금 스킨십이 깊어진다 싶을 때 재영을 밀어냈을 테지만, 나도 맥주를 한 잔 걸치고 졸고 있었던 터라 거의 관계 직전까지 갔을 때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기 때문에 새벽에 잠에서 깨보니 재영도, 나도, 옷은 거의 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굴이 화끈하다. 이러다가는 정말 실수하겠다 싶어서 마음을 좀 더 다잡아야 했다. 박 회장님께 갔다가 운동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재영은 왕자님처럼 고고하게 잠들어 있었다. 최후의 귀족, 냉혈미남, 얼음왕자 등등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어휘들. 처음에는 비웃었는데 지금은 어쩌면 그렇게 딱 맞는 별명을 붙였는지 신기할 정도다. 박유천도 차가운 이미지이긴 하지만, 이 사람처럼 냉랭하지는 않은데. 유천은 나중에 뭐라고 불릴까? 궁금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제 재영이 일어나야 하는 시간. 나는 짓궂게 웃으며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재영 씨, 일어나요!” 재영의 귀에 대고 카랑카랑하게 소리를 질렀다. 유천이 돌고래 초음파라고 놀려대던 바로 그 목소리. 재영은 심각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떴다. “…왜?” “시트!” 빨래해야 된단 말이다. 내일은 학교에 잠깐 들렀다가, 친구들을 만나야 하니까. “내일 해, 내일.” 재영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이불을 끌어내리며 또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제야 재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잘 나가는 모델답게 잠에서 막 깬 모습마저도 화보다. 와씨, 아무튼 잘생긴 것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침대에서 시트를 벗겨냈다. “너 변했어.” “뭐가요.” “청소한다고 소리 지르고, 밥 먹으라고 소리 지르고. 잔소리가 늘었어.” “하지 말까요, 그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재영은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고 중얼중얼 불평을 해댔다. 나는 그런 재영의 모습에 또 피식 웃으며 시트를 들고 방을 나섰다. 시트를 세탁기에 넣어 돌려놓고는 밥을 먹었다. 재영이 늦잠을 잔 덕에 점심도 늦어서 벌써 2시가 다 되어 간다. 재영은 입맛이 없는지 밥을 깨작거리고 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술 마시고 들어오래? 내가 험악하게 노려보자 서둘러 밥을 밀어 넣는 그의 모습에 또 웃음이 난다. 유천과 이런 생활을 꿈꾼 적이 있다. 박유천은 재영만큼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사사건건 부딪힐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을 가끔 상상했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 또 다시 의심이 고개를 들지만,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불신은 또 다시 잘못된 길을 택하게 할 것이 분명하니까. 우리의 근황을 조금 얘기하자면, 유진 어패럴의 후계 결정은 당분간 미뤄졌다. 명희 씨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면 그때 정하기로 한 모양이다. 어차피 지금은 명희 씨 아버지가 운영하고 계시니까, 그리 급한 사항은 아니다. 다만, 유천의 거취가 궁금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후계자 교육도 받지 않는다면 박유천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냥 모델을 하게 놔주시면 좋으련만.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또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밀어 넣었다. “재영 씨.” “어?” “밥 먹고 마트 가요.” “왜?” “라면 다 떨어졌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재영의 모습은 정말 많이 변했다. 친해진 사람에게만 한정된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재영은 예전에 비하면 훨씬 다정하고 친절하다. 역시 편견이란 건 나쁜 거다. 나는 그의 첫인상만 보고 그를 재수 없다고 판단해 버렸다. 하지만 사람은 조금씩 변해 간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변할 거라는 믿음이다. 걸리는 시간은 부수적인 것이다. 얼마가 걸리든 변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박 회장님의 변화를 믿는다. “모자 쓰고 가요.” “왜?” “지난번에도 사람들이 다 알아봐서 밥도 못 먹었잖아요.” “답답해서 싫은데.” “그럼 혼자 갈게요.” “쓰면 되잖아.” 마트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다 말고 재영은 또 투덜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또 웃음이 나서 그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키득댔다. 일상. 우리는 이렇게 시간을 함께 한다. 연인인 듯 다정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상태. 이런 나날이 얼마나 더 이어져야 할까? 너는 언제 다시 내게 돌아오는 걸까? 한숨이 난다. 이렇게 유천과 나는 좀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길을 각각 멀리 떨어져서 걷고 있다. 유천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대로 매일 열심히 박 회장님을 찾아 유천에 대한 내 진심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 회장님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실 거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지치지 않고 끝까지 신념을 실천하고 지켜낼 수 있는 믿음. 유천과 나는 다시 만날 것이다. 나는 유천과의 재회를 굳게 믿는다. + 카트를 몰고 진열대 구석구석을 누비며 물건을 주워 담았다. 재영은 여전히 잠이 부족한지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사방에서 재영을 흘깃거리는 눈초리에 괜스레 불안하다. 요즘 팬들은 눈에 띄게 몰려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조르진 않지만, 무서운 건 핸드폰이나 디카로 찍어대는 실사인 것이다. 재영은 엽사 찍히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무방비하게 하품을 해대는 것을 보면, 진짜 싫어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모자 써도 알아보네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재영은 아무렇지 않게 저런 소리를 해대며 또 하품을 했다. 자부심? 아니면 자긍심. 그에게서는 최고의 자리에 선 자의 오만한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그의 모습에 매료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최고에 대한 동경. 그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환상이니까. “왜 웃어?” “박유천 같은 소리를 해서요.” “내가 더 멋있어.” “어련하시겠어요.” 우리는 말장난 같은 대화를 토닥토닥 주고받으며 시식코너로 접어들었다. 지글지글 군만두가 구워지는 프라이팬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옆에 비치된 이쑤시개로 군만두 조각을 하나 찍어서 재영에게 건넸다.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는 그의 모습은 가끔 천진하도록 어린애 같아서 웃음이 난다. 맛있어요? 만두 조각 하나를 찍어 입에 밀어 넣으며 묻자, 재영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살까요? 재영은 또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그가 귀여워서 또 킥킥 웃어버렸다. 아, 이게 박유천이라면……. 조금 씁쓸한 생각도 들었지만. “나 재영 씨 집에 살면서 살림꾼 되는 것 같아요.” “그러게. 도우미 아주머니 오시지 말라고 할까?” “그 넓은 집을 나 혼자 치우라고요? 제발 참아줘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나를 보며 재영도 쿡쿡 웃었다. 우리는 시식코너를 골고루 돌아 이것저것을 집어먹으며 키득댔다. “맥주 사자. 이거 먹어 봤어?” “아뇨.” “이건 짠 맛이 나.” “맥주에 짠 맛이 어디 있어요?” “역시 꼬맹이. 하이네켄은 짠 맛이 난다니까?” 재영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비웃음. 진짜 비웃는 것이 아닌 걸 알기에 이젠 같이 마주보며 웃어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지만. “이건요?” “옥수수 맛.” “이건?” “그건 고소하고 달아.” “이건?” “시원해. 살얼음 뜬 것처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막힘없이 맥주의 맛을 설명해내는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대장금이에요? 어떻게 맥주 맛을 구별해 내요? 난 다 똑같던데.” “보리 맛이 나서 맥주라고 한 것뿐이야.” 재영은 농담처럼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하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 그의 그 오만한 미소를 누군가가 찰칵, 사진으로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영은 소리가 난 곳을 흘깃 돌아보았다가는 이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하도 자주 겪는 일이라 무뎌진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사진이라면 치가 떨린다. 유천과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스토커가 애용하던 것이 바로 사진이었으니까. 나는 서둘러 재영을 재촉해 맥주를 고르게 한 후, 자리를 떠났다. 우리가 다시 멈춰선 곳은 싸구려 티셔츠가 산더미처럼 쌓인 할인 매대 앞이었다. 이런 옷은 평생 단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을 재영은 3천원이라고 적혀 있는 가격표를 신기한 듯이 가리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신이 나서 옷을 뒤적여 내게 하나하나 대보며 키득거렸다. “이거 너한테 맞겠다.” “작아요.” “맞다니까.” “작다니깐!” “너 쪼그맣잖아.” “아 진짜, 이건 여자 사이즈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평을 터뜨리자 재영은 또 쿡쿡 웃어댔다. “저기도 있다, 네 옷.” 아동복 코너를 가리키는 재영의 장난에 나는 ‘자꾸 그러면 저녁밥 없어요!’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고, 재영은 배를 감싸 안은 채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유쾌한 그의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가슴을 울렸다. 평화로운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유천이 그립다. 준수, 라고 짧게 나를 부르는 그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꼬맹이, 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는 그의 손길이…, 이리 와, 라며 나를 안아주던 그의 불가리 블랙과 담배 향기가……. + “귀걸이 못 보던 거네.” “원래 있던 거예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마트에서 사온 만두를 구워 접시에 담았다. 거짓말은 원래 잘 못한다. 하지만 재영에게는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하얀 거짓말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그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고 앉았다. 재영은 언제나 따스한 애정과 애틋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의 사랑 역시 박유천처럼 깊고 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드세요.” “어.” 곁눈질로 훔쳐본 그는 나의 태도에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만두를 작게 잘랐다. 그때였다. [오늘 낮 3시 경, 인기모델 박유천 씨를 스토킹을 해오던 유모 씨가 체포되었습니다. 유 씨는 박 씨의 지인 김모 씨에게 위해를 가하는 등, 세 건의 살인미수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은…….]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화면을 돌아보았다. 화면에는 누군가가 막 체포되어 경찰차에 오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파리한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무는 유천의 모습이 잠깐 스쳐갔다. 숨이 멎었다. 머릿속이 창백한 것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유천의 창백한 얼굴과, 오른쪽 손목에 감겨 있던 하얀 붕대만이 선명하게 시야에 남아 흔들릴 뿐. 해냈구나…….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네 글자가 혼란스럽다. 뭘 해낸 건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우리를 가로막는 수많은 역경 중 하나가 사라진 것임을 깨달았다. 나를 괴롭히던 스토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방해물 하나를 유천은 치워낸 것이다. 탁, 재영이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재영은 왠지 굳은 표정으로 서둘러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TV는 여전히 웅성대며 스토커 관련 뉴스를 뱉어놓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는 누군가의 컬러링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어떻게 된 거야? 왜 유현지 씨가……?” 아……. 재영의 말을 듣고 나니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가끔 유천이 촬영 중일 때, 유천의 전화를 받던 그녀. 비상계단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유천의 잃어버린 전화를 받았던 목소리 역시 전부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를 계속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고 느껴왔던 것이다. 그게 유천의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유현지 씨였다니……. 왜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내게 일어났던 이상한 일. 그것은 분명 박유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천의 스케줄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 유천이 가는 곳에 항상 있을 수 있는 사람, 재영에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 비로소 수많은 의문점이 하나하나 정리되어 나간다. 스토커를 코앞에 두고 몰랐다니. 아니, 그래서 더더욱 꼬리를 잡기 힘들었던 것이리라. 설마 그녀라고는 예상도 못했으니까. 정신이 다 아득해진다. 그녀는 그러면 우리의 당혹스러워하는 상황을 모두 지켜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를 했다는 건가? 도대체 인간의 악의란 어디까지가 바닥인 걸까? 나는 오싹하게 밀려드는 인간에 대한 불신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재영이 서둘러 키를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나도 갈래요.” “집에 있어.” “잠시만요, 나도 갈래요.” 나는 고집스럽게 재영을 잡아 세우며 서둘러 옷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섰다. 어쩌면 이제 유천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도 우리 앞에는 난관이 첩첩산중이었지만, 그래도 어쩌면…, 혹시라도 그를……. 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옷걸이에서 외투를 벗겨냈다.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멀리서 재영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셨어요, 이사님.” 익숙한 그의 목소리에는 뻣뻣하게 손끝이 굳어버렸다……. + “안녕하셨어요, 이사님.” “…….” “준수 데리러 왔습니다.” 유천의 말을 끝으로 거실에는 기묘한 침묵이 떠돌았다. 재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그대로 어둠 속에 얼어붙었다. 타박타박, 유천이 거실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침을 삼켰다. 입술이 금세 바싹 말라있다. 손끝이 싸늘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연이어 벌어지는 상황에 오싹하게 한기마저 느껴진다. “준수 안 보내겠다고 전에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그래서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못 들어줘. 돌아가.” “그냥 돌려달라는 거 아닙니다.” 살벌한 듯, 냉랭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드디어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선뜻 유천의 앞에 나설 용기도 없어,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갔다. 소리 나지 않게 잔뜩 숨을 죽여 문고리를 조금 돌려 열자, 작게 벌어진 틈 사이로 거실에서 마주선 재영과 유천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에서 벌어졌던 것과 비슷한 상황.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뀌어 있다.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응시하기만 하며 아무 말이 없었다. TV에서는 계속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L그룹에서 새로 합병한 유진 어패럴 산하에 모델 기획사를 두기로 했다는 소식. L그룹이 주식 매수를 통해 경영권을 행사할 기획사는 바로 재영의 회사였다. 드디어 재영의 회사가 넘어가는 건가? 나는 미안한 마음에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재영은 잠시 뉴스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며 소파에 털썩 앉아버렸다. 소송이 취하됐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유천은 그런 재영 앞에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재영은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유천을 올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먼저 갚을 게 있는 것 같아서, 그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유천은 차가운 재영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작게 열린 문틈 새로 파리한 그의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손목에 감긴 흰 붕대가 보였다. 나를 위한 상처. 그것은 마치 훈장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희 친가 쪽에서 이번에 기획사 지분을 꽤 많이 사들인 것으로 압니다. 좀 전에 뉴스 보셔서 아시겠지만, 친가 쪽에서 대주주로서 경영에 직접 참여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재영은 미간을 조금 찡그린 채, 담배연기를 길게 토해내며 유천을 응시했다. “이사님께서는 별로 회사에 애착이 없는 듯이 말씀하시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 압니다.” “…….” “그거 제 전 재산입니다. 기획사 주식, 정확히 9.8%를 제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경영권 방어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준수를 돈으로 사겠다?” “예전에 저 때문에 난처해지셨을 때 제 편이 되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재영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유천은 이렇게 대답하며 또 다른 서류 봉투를 재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미세한 문틈으로 들려오는 대화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오가는 말이 심상치가 않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몸의 떨림은 멈췄지만, 여전히 숨이 가쁘다. 도대체 박유천은 뭘 어쩌려는 것일까? “제가 제 2의 이재영이라고 하셨죠?” “…….” “60억 투자하시겠다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유천은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재영은 그런 유천을 올려다보며 또 다시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그 안에 든 건 이사님이 높이 사주셨던 제 재능입니다. 이번에 기획사에 손해가 큰 걸로 아는데, 그거 벌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재영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이사님과 저의 더블 화보집 기획서입니다. 이사님의 두터운 팬층과 저에 대한 세간의 호기심에 어필하는.” “…….” “화보집 이름은 Romeo & Romeo, 컨셉은 이사님과 제가 한 사람을 두고 갈등을 벌이는 상황입니다. 이사님과 저의 이미지에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인지도는 이미 상당한 수준이고, 사람들에게 21세기 로미오라고 불리고 있으니까요.” 와씨, 저 녀석,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도 너무 잘 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유천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재영의 표정에는 제법 진지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유천의 기획안에 솔깃한 것이다. 늘 관심 없는 척 했지만 역시 재영도 사업가는 사업가였다. 최근 사람들 사이에 가장 자주 회자되는 이름은 단연 L그룹 회장의 조카손자인 박유천이었다. 상류층의 자제이면서,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CF모델. 그의 독특한 배경은 확실히 사람들의 호기심과 환상을 부추기고 있었다. 연예인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사람들의 호기심과 환상을 충족시키면서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유천의 배경과 사람들의 호기심. 시대와 여론을 이용한다라……. 그렇다면 이미 마케팅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제목마저 Romeo & Romeo라니……. 만일 이 화보집이 성공한다면 파급 효과는 메가톤급일 것이 틀림없었다. 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가만히 응시한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담담한 유천의 눈동자에 비해, 재영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뱉어내는 재영의 눈빛에서는 고민의 흔적이 짙게 묻어났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발굴해낸 신인이 대형 톱 모델로 떠오르는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이 군림했던 최고의 자리를 물려줄 후계. 그를 제 손으로 키워내는 미래……. 유천은 재영에게 그것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고의 자리에 섰던 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욕심이었다. 재영은 말이 없었다. 그의 고민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유천은 그런 재영의 앞에서 처분을 기다리듯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재영의 대답이 어떻든 상관없다. 하지만 묘하게도 나는 유천의 절실함의 끝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가 나와 바꾸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조커가 얼마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는 것일지…, 내가 그의 세상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그의 사랑의 크기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그때였다. 유천이 재영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나는 놀라움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숨을 멈췄다. 저 자존심 센 박유천이……. 경악할 노릇이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재영의 표정도 잔뜩 굳어 있었다. “준수의 가치, 저도 잘 압니다. 이런 주식 쪼가리나, 기획서 따위로 바꿀 수 없다는 것 정도는요.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 “저 녀석 하나 지킬 힘이 없어서 이사님께 떠맡기고 사라졌던 자격 없는 놈이라고 비난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다는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이 노력했습니다. 준수 괴롭히던 스토커도 잡았고, 친가 쪽에 준수와의 관계도 반쯤 인정받았습니다. 나머지 반은 2년 후에 제가 톱 모델이 되어 있고, 대형 기획사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다면 인정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준비한 기획안입니다. 저 꼭 성공해야 합니다. 아니,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천은 여전히 창백하고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품을 뒤적여 따로 준비한 듯 보이는 작은 봉투를 다시 재영의 앞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종신계약서입니다. 계약금은 필요 없습니다. 노예처럼 부리셔도 좋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준수만 돌려주십시오. 저 준수가 아니면 안 돼요, 이사님.” 나지막이 이어진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입을 틀어막은 손 가장자리로 계속해서 약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도대체 넌…, 너란 녀석은……. 나는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흐느꼈다. 내 연인, My Beloved. 네가 이렇게 강인한 사람이었다니. 아니, 내가 너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준수야, 듣고 있지?” “…….” “스토커 잡았어.” 그렇게 서두를 꺼낸 유천은 조용조용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명희랑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고, 조건이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너 계속 만나는 것도 인정받았어.” “…….” “잠깐 너랑 헤어져 있는 동안…, 너 없으니까 죽을 것 같더라……. 숨은 쉬고 있는데 사는 게 아니더라.” “…….” “처음엔 그냥 네가 무작정 좋아서 갖고 싶고, 안고 싶고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알겠어. 네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내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너란 사람이 나한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눈물이 계속해서 볼을 타고 흘렀다. 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말도 제대로 안 해서 답답하게 하고, 다짜고짜 기다리라고만 하고 사라지고……. 너한테 못된 짓 많이 했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사과 못해. 하지도 않을 거야.” “…….” “이렇게 이기적인 놈이라 미안해. 근데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다시 한 번 와줬으면 좋겠어.” “…….” “기다릴게. 나 미운 만큼 오래오래 기다리게 해도 되니까 꼭 와주기만 해.” “…….” “사랑한다.” 유천은 그렇게 할 말을 마치더니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틈 새로 유천이 재영에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철컹, 문이 닫혔다. 그렇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눈물을 훔쳐낼 생각도 없이 어두운 방 안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천을 잡을 수도, 그의 앞에 나설 수도……. 내가 그의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그의 앞을 가로막으면서까지 이 사랑을 지켜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일까?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자신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짐이 될 지도 모를 김준수. 아니 이미 그의 어깨에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워준 나……. 나는 정말 그에게 강철 같은 줄리엣이 되어 줄 수 있는 걸까?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저 단순히 기다리라는 말인 줄 알았는데. 유천이 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도박을 시작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왜 그러고 있어.” 방문이 열리고 뽀얗게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역광을 받아 문 앞에 선 재영은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눈물을 훔쳐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가봐야 되죠?” 내 말에서는 울음이 배어났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유천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현실을 모두 해결하고 왔다고 했다. 우리를 헤어지게 한 스토커도 잡았고, 자신의 결혼 문제도 처리했다. 심지어 나와 그의 관계를 아는 박 회장님께 우리의 만남도 반쯤은 인정받았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가 얼마나 애썼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늘 박유천은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내가 해결하지 못할 것, 내가 걱정하고 고민할 것은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는 녀석이었으니까…….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 손목을 그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또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며 재영에게 쭈뼛쭈뼛 웃어보였다. 재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잡고 거실로 이끌었다. 그의 손에 끌려 소파에 나란히 앉자 또 눈물이 흐른다. 나는 옷소매를 잡아당겨 얼굴을 문질렀다. 금세 옷이 진한 색으로 물들며 습기를 머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재영에게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그와 보낸 시간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상처 입은 나를 잘 보듬어 주었고, 자신의 상처에도 아랑곳 않고 내 사랑을 지켜봐 주었으니까. 우린 얼핏 보기에 연인인 듯, 가족인 듯, 잘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눈물이 왜 이렇게 많니.” 재영은 내 머리를 부스스 흩어놓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유천에게 하던 냉랭한 태도와는 정반대의 따뜻한 말투여서 또 눈물이 난다. 이 사람도 나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유천의 상처를 끌어안았듯, 그도 나의 또 다른 사랑까지 끌어안으려는 것일까?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재영은 손을 들어 내 볼을 훔치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너무나 미안한 표정의 내가 담겨 있어서 또 눈물이 났다. 그만 좀 울어. 더 못 생겨진다. 그의 장난기 어린 한 마디에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피식 웃었다. 재영은 또 싱긋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그의 색소가 연한 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답고 도도했다. 그렇게 재영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가볍게 와 닿는 따스한 체온.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날 끌어안고, 세상의 비바람에서 지켜주던 그의 온기. 차갑지만, 결코 차갑지 않았던 그의 마음. 나는 재영의 입술 위에 작은 흐느낌을 토해놓았다. 재영은 내 볼을 감싸 쥔 손으로 가만히 눈물을 훔쳐내며 조심스레 내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혀로 내 입 안을 세심하게 어루만졌다. 예쁘다고 했던 치열을 가지런히 쓸고, 조심스레 혀를 부딪쳐오고, 연약한 입 안을 살살 간질였다. 섬세한 그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아쉬운 듯 쓸고, 허리를 조금 끌어안았다. 그의 높고 곧은 콧날이 살짝 볼에 닿고, 오만한 향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우리는 애틋한 체온을 나누었다. 나의 이별을 지켜봐준 사람. 나는 그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는데, 그는 나에게 무엇을 얻었을까? 눈물이 자꾸 나서 멈출 수가 없다. “처음엔 바짝 약 오른 고양이 같았어. 손 내밀면 금세 캬앙-하면서 할퀴었거든. 그런데 말이지, 고양이는 친해지면 금방 다정해져. 주인이 놀자고 하면 처음엔 그래 내가 놀아주지 뭐, 하면서 마지못해 응하는 척 하는데, 막상 놀이가 시작되면 자기가 더 흥분해서 신나해.” 재영은 내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가에는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그래. 박유천 밖에 눈에 안 들어온다는 듯,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사람을 보는데, 그게 묘하게 사람을 자극한다고 해야 하나? 세상엔 박유천 이외에도 괜찮은 사람이 많다는 걸 증명해주고 싶은 기분.” “…….” “굉장히 새로웠어. 내 주위에는 늘 내 눈에 들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밖에 없었거든. 그게 처음이었던 것 같아. 신기함……. 너 정말 신기했어. 하는 행동마다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으니까. 조금 곁을 내준다고 생각하면 또 금세 날이 바짝 서서 달려와서는 따귀를 올려붙이지 않나, 박유천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복수하겠다고 나를 만나러 나오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또 눈물만 흘렸다. 재영은 그런 내게 다시 한 번 가볍게 키스했다. 내 입술에 고여 있던 짭짜름한 눈물이 입술에 닿자, 재영은 혀로 내 입술을 조금 훔쳐냈다. 그의 따스한 온기에 또 마음이 찌릿하게 아프다. “대단하다. 너도, 박유천도.” 그는 가만히 웃으며 또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심장에 와서 박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하루에 세 번씩 꼭꼭 전화하기.” “……?” “박유천이랑 싸우면 나한테 제일 먼저 달려오기.” “…….” “가끔 나랑 저녁 먹기.” 재영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고인 눈물 너머로 그의 애틋한 미소가 일렁인다. “나 많이 아프니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자꾸 울면 안 보내준다? 재영의 나지막한 말에 나는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재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재영 씨. 어. 미안해요. 알아. 미안해요……. 어……. 눈물과 사과, 그리고 재영의 다독임. 그와 나의 마지막은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가 늘 내게 주었던 사랑처럼. “어서 가.” 재영이 가만히 나를 밀어내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당신 같은 사람을 알게 해준 신에게. 그리고 당신에게도……. 나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빨리 가라, 꼬맹아. 마음 변하기 전에.” 재영은 내가 계속 울기만 하자 손수 나를 잡아 일으켜서는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현관으로 떠밀었다. “네 물건들은 나중에 가지러 와. 하나도 안 버리고 그냥 둘 테니까.” 나는 가늘게 흐느끼면서 또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으며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재영은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댄 채, 싱긋 웃었다. 아스라이 고통을 담고 있는 그의 미소는 오래된 필름처럼 흐릿하고 아련했다. 그리고 나는 냉랭하고 차갑기만 했던 그의 풍부해진 표정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사람도 성장했구나……. 그의 애틋한 표정에 비로소 나는 조금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갈게요. 울음이 섞인 내 말에 재영은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나가지 않을게. 여기가 너무 아파서 말이야.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는 또 눈물이 나서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열린 문 너머로 재영의 아련한 시선이 엇갈렸다.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재영은 또 다시 싱긋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이 닫혔다. 나는 또 다시 눈물을 쏟아내며 조금 흐느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계단을 향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상태로 유천을 만날 수는 없으니, 조금 시간을 벌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박타박, 텅 빈 계단에 내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는 차근차근 유천에게로 가는 계단을 밟아 나갔다. 마음이 조급했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두 칸, 세 칸씩 과정을 건너뛰어 내려가다가는 또 어떤 불신이 자라날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랑은 우리 셋을 모두 성장시켰다. 고통스럽고 잔뜩 꼬여 힘든 여정이었기에 마음엔 잔뜩 흉터가 남았지만,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제 마음을 타인에게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일그러지고 잘못된 것이라도 좋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때로 희생도 필요한 법이며, 서툴고 어설플지라도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다. 우리는 이 사소한 사랑의 진리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박유천과 나. 우리는 처음부터 많이 달랐다.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활동적이었고, 유천은 조용히 사색을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그 차이는 사귀는 도중에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당시의 기분에 복받쳐 파르르 화를 내고 금세 잊어버리는 타입이었다면, 유천은 무섭게 화를 내면서도 깊숙한 곳에 도사린 싸움의 본질까지 꿰뚫어보는 타입이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내 성격이 극으로 치달았을 지도 모를 우리의 싸움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유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일이 최후의 최후까지 커지게 될 만약의 상황까지 대비하는 유천의 신중한 성격은 늘 우리가 파국을 맞는 것을 막아왔던 것이다. 사람이 마냥 둥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톱니처럼 울퉁불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처음에 외모에 이끌려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은, 이 울퉁불퉁한 장단점을 발견하면 억지로 갈아내 동그랗게 만들려고 애를 쓴다. 자기 자신 역시 그런 모양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러다 보면 사랑은 잔뜩 갈리고 쓸린 상처만 남긴 채 깨어지고 만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상대를 비난하며 이별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연애라는 건, 상대의 그 울퉁불퉁한 단면을 조금씩 갈아내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단면도 함께 갈아내어 아귀를 맞춰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과, 그리고 유천이 그런 사랑을 해 보자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는 것을…….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도 예전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그대로 유치하게 투닥거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위기에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싸움이라는 것이 상대가 정말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름을 인정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타박타박, 나는 그렇게 계단의 끝에 도착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잔뜩 찌푸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내일이면 3월. 봄이 시작된다. 그런데 눈이 올 듯이 찌푸린 하늘이라니. 왠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유천은 어디 있을까? 그의 아파트로 가보아야 하나? 나는 막연한 두려움을 안은 채 아파트 입구를 나섰다. 그리고 무심코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지냈던 재영의 아파트를 돌아보았다. 창가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또 눈물이 나려 하기에 애써 이를 꾹 물며 등을 돌렸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나마 나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를 진심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려 노력했으며,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정말 그와 마음을 나누었기에……. 나는 입구를 벗어나며 택시를 잡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낯선 차에 기대어 선 채 담배를 물고 있는 유천과 눈이 마주쳤다……. + “…….” “…….” 정적이 조용히 이어졌다. 유천은 담배 연기를 토해내며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풀나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 송이, 두 송이……. 조심스레, 팔랑팔랑. 그와 내가 토해내는 하얀 숨결만이 조용히 어둠 속에 부서졌다. 이 순간에도 시간은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눈꽃 하나가 유천의 기다란 속눈썹에 내려앉았다가 스르륵 녹아버렸다. 유천은 손끝으로 그것을 슥 닦아내며 또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그 남자다우면서 우아한 동작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를 눈으로 천천히 훑어 내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사랑하는 섬세하고 기다란 손가락과 그 끝에 걸린 담배였다. 그리고 그의 까만 머리카락과, 곧은 어깨, 희고 매끈한 피부와 무심한 검은 눈동자……. 그 안에 일렁이는 나에 대한 깊은 사랑……. “안 춥냐?” 나는 시린 손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으며 불쑥 내뱉었다. “추워.” 유천의 나직한 목소리에 또 코끝이 찡하다. “춥다는 새끼가 왜 길바닥에서 개폼이야. 얼른 집에나 가지.” “누구 좀 기다리느라고.” “어떤 여자야?” 퉁명스러운 내 질문에 유천은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후후, 웃었다. 그의 미소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아, 내가 저 미소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심장이 두근, 두근, 조용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우리는 정말 재회한 것이다. “너는 또 누구한테 맞았는데 찔찔 울고 다니냐?” “맞긴 누가 맞아!” 유천의 짓궂은 장난에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이런 것마저도 우리는 변함이 없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가 점점 불어난다. 까만 하늘, 흰 나비처럼 팔랑팔랑 쏟아져 내리는 눈, 그리고 쏟아지는 눈꽃 아래 온통 검은 수트를 빼입은 박유천……. 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꼬맹이, 밥은?” “안 먹었다, 왜.” “새끼야, 시간이 몇 신데 밥도 안 먹고 있냐.” 생각난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새벽, 우린 이것과 똑같은 대화를 나눴다. 유천은 그날도 저렇게 말하며 불쑥 초밥상자를 내밀었다. 지금보다 조금 앳되고 보송보송 솜털이 가시지 않았던 갓 20살이 된 박유천. 그때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난다. “그러는 넌?” “난 누구 마중 오느라 좀 바빠서.” “웃기고 있네.” 엉뚱한 대화가 토닥토닥 이어진다. 여전히 멀찌감치 서서, 서로를 머뭇거리는 눈빛으로 응시하며.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유천에게 묻고 싶은 것이 수두룩하다. 그 날은 왜 그랬는지, 그리고 박 회장님과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우리는 뽀얗게 쏟아지는 함박눈 아래 또 눈을 마주치며 멋쩍게 웃었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수많은 고비들. 나는 여전히 유천이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했고, 다시 만났다.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긍정하며 짧게 웃었다. “입술은 왜 터졌어? 박 회장님한테 맞았냐?” “아, 이거…….” 유천이 피식 웃으며 담배가 걸린 손을 움직여 상처 난 입가를 쓸었다. “장인어른께 맞았어.” “뭐……?” “김준수 데리고 살겠다고, 안 때리고, 잘 먹이고, 예뻐해 주겠다고, 너희 집 갔었거든. 근데 좀 많이 맞았다.” “…….” “내일도 맞으러 가야 돼. 불쌍하면 나중에 약 좀 발라주라.” 그러니까 저 말은…….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우리 집에……?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쿡쿡 웃는 유천의 말에 핑하니 현기증이 돈다. “너 미쳤어?” “어, 미쳤어.” “지금 장난이 나와!”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어찌나 황당한지 목에서는 잔뜩 갈라진 쇳소리가 났다. “장난 아니야.” 유천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가셨다. 금세 진지해진 그의 표정에 나도 덩달아 얼굴이 굳었다. “아니면 뭔데?” “네가 말하기 힘들잖아. 한 1년은 나 혼자 다닐게. 처음엔 인정하시기 힘들겠지만, 우리 잘 지내는 거 보여드리면 좀 누그러지실 거야. 그 때 같이 가자.” “…….” “너희 아버지, 손 엄청 맵더라. 입 안이 다 터져서 피가 줄줄 나는데, 첫날은 맞다가 기절할 뻔 했다.” 하……. 조용조용 이어지는 유천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이제야 유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는 정말 제대로 된 관계를 시작할 생각인 거다. 양가의 허락을 받아, 완전히 공인된 커플이 되겠다는 뜻. 다시는 내가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잡아두겠다는 강력한 의지. 세상에,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을 애인으로 두었던 걸까?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분명히 우리 집이 발칵 뒤집혀 있을 테지만, 늘 속편하고 낙천적인 나는 또 박유천이 어떻게든 해주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학습 효과가 큰 사람이라서, 이번 일로 유천만 믿고 기다리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아버지, 나처럼 다혈질인데, 정말 많이 맞았겠다……. 또 어이없는 웃음이 비죽이 새어난다. “눈 많이 오네.” 유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뽀얗게 함박눈이 쏟아졌다. 나는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는 어이가 없어서 또 피식 웃었다. “싫어?” “뭐가?” “나랑 사는 거.” “미친놈아, 벌써 일 다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 물으면 어쩌자는 건데? 내가 싫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농담이었다고 하기라도 할 거냐?” 날이 잔뜩 선 내 대답에 유천은 또 담배연기를 토해내며 쿡쿡 웃었다. 그 미소가 묘하게 여유롭다. 역시 박유천은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 전엔 좀 신경질적인 소년 같은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선이 뚜렷하고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넘치는 남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 자리 잡은 강인함, 바닥까지 떨어져본 자의 깊은 눈매……. 그것을 깨닫자 또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내 연인은 더욱 단단해져서 돌아온 것이다. “준수야.” “뭐.” 마음과 다르게 유천의 부름에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유천은 그런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거창한 말 같은 건 잘 못하는데 지금은 뭐라도 해야 되는 분위기네.” “…….” “음…, 다시는 여자들 안 쳐다보고, 너 속 안 썩일게.” “…….” “표현 같은 거 잘 못하지만, 적어놨다가 국어책 읽듯이 읽어주기라도 할게. 어색해서 마음에 안 든다면 연기라도 배우지, 뭐.” “…….” “아침 일찍 깨워도 신경질 안 부리고, 술 먹고 새벽에 라면 끓여달라고 깨우지 않을게. 핸드폰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안 맡기고, 내가 꼬박꼬박 받을게.” 나지막이 이어지는 유천의 목소리에 숨이 멎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내게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랑 살자.” 유천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꾹꾹 눌러 참았다. 가슴 밑바닥부터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 이렇게 간단한 한 마디를, 왜 우리는 그렇게 멀리 돌아왔을까? 나는 왜 박유천의 마음을 믿지 못했던 걸까……? 금세 손이 젖어든다. 내 뜨거운 눈물에, 흐느낌에. “꼬맹이, 또 운다.” 안쓰럽다는 듯, 조용히 들려오는 유천의 목소리. 나는 이를 꾹 물고 고개를 번쩍 들어 유천을 노려보았다. “울긴 누가 울어!” “안 울면 됐고.” 쿡쿡 웃는 유천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하얗게 부서지는 담배 연기. 그의 길고 마른 손가락, 희고 여윈 목덜미, 아직도 창백한 얼굴……. 유천의 검은 머리 위로 조금씩 쌓이는 눈은 유난히도 희게 보였다. 아직도 멀찌감치 서서 어색한 듯 서로를 응시하는 우리 주위로 새하얗게 눈이 내렸다.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눈시울이 화끈한 것이 가슴이 벅차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뛴다. 나를 온통 쥐고 흔드는 내 사랑, 내 연인, My Beloved……. 아, 하얗게 쏟아지는 눈 아래 선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같이 살자, 준수야.” 이제는 알 것 같다. 우리는 평생 서로를 놓을 수 없다는 것. 물과 물고기, 하늘과 새, 극이 다른 자석,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는 凹자와 凸자,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공위성, 서로를 끌어당기는 달과 지구……. 운명처럼 거창한 것이 아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 우리는 삐걱거림이 심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미 한 쌍이었으니까. 나는 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위로 하얗게 눈이 쏟아졌다. 올 겨울의 마지막 눈. 유천의 어깨에도, 머리에도, 옷깃에도……. 우리를 축복하듯이 새하얗게……. 유천은 싱긋 웃으며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는 밟아 껐다. 길게 담배연기를 토해내는 유천의 눈빛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속도를 더한다. “뭐해?” 그리고 팔을 조금 벌리며 나지막이 내뱉는 유천의 말. “빨리 와서 안겨.” 나는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무적의 로미오와 강철의 줄리엣. 우린… 지금부터 시작이다. + Beloved Fin. ++++ 사랑이 우정에게 (1부) 08.09.06 ~ 08.11.16 完 Star Dust (Beloved 중간 번외) 09.02.21 ~ 09.03.02 完 Beloved (2부) 08.11.20 ~ 09.07.27 完 마치며... Beloved... 뭐랄까요.. 나이테가 있는 글??? 오랜 기간에 걸친 연재로 뭔가 제 문장이나 묘사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저 스스로도 많이 성장했다고 느껴요.. 전부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특히 8개월에 걸친 연재를 지켜봐주신 저의 사랑하는 님들.. 여러분들이 안 계셨다면 A4 386쪽에 달하는 이 글, 아마 반도 못 쓰고 중단했을 거에요.. 그렇게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았던 비럽에도 드디어 끝이 왔네요.. 많은 장면이 삭제되고, 우회되며 좀 우여곡절이 많았던 글입니다.. 끝내고 나니.. 시원섭섭..? ㅎㅎㅎ 이거 쓰면서 이틀동안 미친 듯이 울었어요.. 하... 아.. 진짜 끝난건가...? ㅎㅎ 잘 실감이 안 나는데... 어쨌든..... 완결이네요........... 아 아쉽다.. ㅠㅠ 카미유 마지막 가는 길에 폭풍 댓글 꽃길 좀 깔아주세요.. ㅠㅠ 다섯개까지 가능하댑니다.. <<<< 강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으아아아아아!! 이제 진짜 가야겠군요... 우리 예쁜 유수.. 그리고 비럽.. 아쉽지만 여기서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_ _) 카 : 가자, 얘들아. 유 : 수고했다. 수 : 고생했어. (토닥토닥) 카 : 너희들도 고생했다. 많이 울려서 미안하다... 유&수 : 됐어. 카 : 하아... 진짜 끝난 거냐? 유 : 그러네. 기분 이상하다, 야. 카 : 나도.... 수 : 이제 재영 씨 못 보는 건가? 좀 섭섭하네. 카 : 그치? 그치? ㅠㅠ 유 : 아 고만 좀 해. 술이나 한 잔 하자. 쫑파티 기념. 카 : 그래! 까짓것! 내가 쏜다! 유 : 그럼 우리보고 사라고 하려고 했냐? 카 : ..... ㄱ-+ 유 : 하여튼 작가라고 하나 있는게... 카 : 아 ㅅㅂ.. 박서방 너 잠깐 따라와.. 안 끝났어 이 시키야! 번외 가자, 번외! 넌 죽었어! 내가 또 찢어놓을 거야! (버럭버럭) 유 : 아, 또 시작이야. 가자 준수야. 수 : 응. 쟤 근데 왜 저래? 유 : 몰라, 쟤 좀 이상해. 수 : 그래? 유 : 어, 그러니까 쟤랑 놀지마. 카 : 야! 박유천! 너 이 시키 이루 안 와?!! (버럭버럭) 유 : 준수, 귀 막아. 귀 썩어. 수 : 응. 이르케? 유 : 잘 한다. 우리 준수. 카 : 야아아아아!!!!!! 박유!!!!!! . . . . 개인홈 Camille's Secrets http://secrets.ivyro.net 다음 카페 뉴동픽 http://cafe.daum.net/dongpic 현재 이 두 곳에서만 Beloved 박유천 번외 Lion Heart 차기작 Beautiful Days 연재 예정